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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문예시대 한국가람문학회 원문보기 글쓴이: 學亭 이재익
성덕왕릉과 괘릉을 탐방하며 글/ 사진 : 학정 이재익 시인
2012. 5월 28일 월요일은 불기 2556년 석가탄신일이었다. 올해는 음력으로 윤3월이 들어서 다른 해 보다도 음력으로 치는 부처님 오신 날이 절후상 좀 늦게 들었다. 나는 부처님 오신 날에 석굴암을 꼭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자와 딸과 동행하여 경주 석굴암 행에 나섰다. 물론 석굴암 올라가는 차도는 차가 많이 밀렸다. 주차장에 차를 세울 공간이 없지 않을까 싶어서 2/3쯤 올라 온 길가에 적당히 주차하고 걸어서 올라갔다. 먼저 비빔밥 점심 공양부터 해결하고, 인내심 있게 긴 줄에 서서 기다려 부처님을 친견했다.
가서 보니, 좀 복잡해도 오기를 잘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 하면 평소에는 유리 칸막이 밖에서만 관람할 수 있는데, 부처님 오신 날은 특별히 입장료도 안 받았고, 유리칸막이를 개방해서 안으로 들어가 석가모니 부처님이 계신 방을 한 바퀴 돌며 가까이서 장엄한 부처님 조각상과 벽면의 보살상 제자상까지도 자세히 감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과히 세계 제일의 조각솜씨라는 자부심이 들었다.
토함산을 내려와서 불국사로 갔다. 청운교 백운교와 연화교 칠보교가 있는 대석단 앞마당에서 축하공연이 있었는데, 우리가 좀 늦어서 도착하자마자 연예공연은 끝이 났다. 대웅전앞 석가탑과 다보탑은 색색이 아름다운 연등으로 치장 하였고, 일본인 단체 관광객이 많았는데, 그들은 모두 정중하게 합장하였다. 불국사에서 저녁공양 비빔밥을 먹었다. 석굴암 불국사 비빔밥 공양의 맛은 일품이었다. 이 공양 맛으로 부처님 오신 날은 꼭 절을 찾고 싶다. 해는 길어서 아직 어두워 질 때까지는 시간이 좀 있어서 돌아가는 길에 불국사 부근에 있는 왕릉을 찾아보고 싶었다.
평소에 왕릉을 수호하는 석상 중에 수염이 텁수룩하고 눈이 쑥들어간 서양 서역인의 모습의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어느 왕릉인지 지금 헷갈렸다. 성덕왕릉으로 기억하고 찾아갔다. 뜻밖에도 성덕왕릉 바로 옆에는 그의 형님 왕인 효소왕릉도 있었다. 효소왕은 큰 업적이 없는 유약했던 왕이었는지, 왕릉의 규모는 크지 않았다. 거기에 비하면 성덕왕릉은 웅장했으며 호석이 잘 갖춰져 있고, 12지신상 부조도 보였다. 왕릉 입구 부근에는 비신은 없어지고, 귀부만 남아있는데, 온전하지는 않았지만 규모는 웅장했다. 비석이 온전했다면 장엄한 비석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성덕왕릉에는 동물조각상과 문인석상이 있었으나. 서역인 상은 아니었다. 주민에게 물어 봐도 잘 모르고, 아마 괘릉인지 모르겠다고 추천해줘서 괘릉을 찾아갔다. 불국사에서 울산쪽 도로를 차로 한 5분쯤 가면 왼쪽에 안내판이 보인다. 이미 날은 저물어 관람객의 발길은 끊어졌다. 정말 찾는 서역인 상이 왕릉 입구 양쪽에 서있어서 목표한 바를 찾아서 기뻤고 겨우 사진을 찍었다. 신라시대 아라비아인들이 무역을 하러 신라에 온 것을 증거하는 유물이다. 다음은 효소왕~성덕왕~괘릉의 역사 연결 고리를 이어가며 통일신라 전반기의 역사를 간추려 본다.
부처님 오신날 불국사
부처님 오신날 불국사
부처님 오신날 석굴암
1) 29대 태종무열왕은 백제를 멸(660)해서 삼국통일의 기반을 다지며 통일신라 중대라는 신라 전성기의 서막을 열었다. 무열왕의 맡아들 30대 문무왕은 고구려를 멸(668)하고 당군을 격퇴(676)하여 삼국통일을 완성했다. 31대 신문왕은 문무왕의 맡아들, 귀족세력을 꺾고, 전제왕권을 강화시킨 후 신라를 이끌어 갈 제도를 잘 정비하였다.
2) 32대 효소왕(재위 692~702)은 신문왕의 아들이다. 이름이 김이공으로 신문왕의 두 번째 황비 신목왕후 김씨의 소생이다. 서시전 남시전을 설치(지증왕 때 이미 설치한 동시전과 신라 서울의 3대시장이 갖췄다. 나이는 어렸고, 부왕 신문왕이 강화시킨 왕권 위에 큰 치적 없이 유지하다가, 대를 이을 왕자 없이 즉위 11년 만에 하세했다.
3) 33대 성덕왕(702~734)은 신문왕의 둘째 아들로 이름은 김광흥, 효소왕의 아우로 효소왕이 후사가 없어서 화백회의가 추대하여 즉위 했다. 즉위 15년에 왕비를 교체했다. 소판 김원태의 딸인 성정왕후를 내보내고, 이찬 김순원의 딸을 소덕왕후로 다시 맞이하였으나, 불행하게도 그 후비는 4년 후에 죽었다.
즉위 2년에 영묘사가 불타고, 도성이 물에 잠기는 재해도 있었고, 가뭄에 시달리기도 하였지만, 통일신라 전제왕권이 강화되어 왕권은 안정되었고,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였으며, 통일과정에서 백제를 지원했던 일본도 현실을 받아들이고 이때 사신을 파견하여 신라와 외교를 재개하였다. 당나라 현종으로부터 낙랑군공 신라왕이라는 관작도 받았다. 즉위 21년(722)에 모든 백성에게 정전을 지급하는 토지개혁을 단행했다. 자영농민들이 본래부터 소유한 토지를 국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다는 의미였으며 국가재정이 튼튼해졌다. 당나라와 국경 현안이던 국경문제는 대동강~원산만선으로 국경까지 확정하여 안정을 얻었다. 당나라 요청으로 발해를 공격하기도 하였다.
성덕왕은 조부 문무왕이 일찍이 통일 왕국의 주도이념으로 수용했던 의상(義湘, 625~702년) 대사의 신라화엄종(新羅華嚴宗= 海東華嚴宗) 이념에 따라 6대조 진흥왕이 꿈꾸던 불국토 건설을 실현해 나가고자 하였다. 신라가 불국토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신라 국토 안에 여러 보살의 진신(眞身) 상주처(常住處; 항상 머무는 곳)를 설정하였다.
제32대 효소왕릉(경주시 조양동)
제32대 효소왕릉(경주시 조양동)
제33대 성덕왕릉앞 (경주시 조양동)
제33대 성덕왕릉(경주시 조양동)
제33대 성덕왕릉 호석(경주시 조양동) 제33대 성덕왕릉(경주시 조양동)
제33대 성덕왕릉(경주시 조양동)
제33대 성덕왕릉(경주시 조양동)
4) 34대 효성왕(737~742)은 성덕왕의 둘째 아들이며, 형인 태자가 일직 죽어서, 즉위했다. 이름은 김승경이다. 재위 6년 만에 갑자기 죽었으며, 유언에 따라 화장하여 유골은 동해 바다에 뿌려져 왕릉은 없다. 통일대업을 달성한 증조부 문무대왕을 본받은 것은 잘한 일이다.
5) 35대 경덕왕(재위 742~765)은 성덕왕의 셋째 아들인 김헌영이다. 효성왕의 친아우로 효성왕이 아들이 없었으므로 즉위하였다. 왕비는 이찬 김순정의 딸이었으나 아들이 없자 폐위하고, 김의충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였다. 이 시기에 당나라는 현종때 안녹산, 사사명의 난으로 국력이 쇠퇴해졌고, 신라의 국력도 경덕왕을 정점으로 고비를 맞는 시기였다. 즉위 16년(757)에 녹읍제가 부활되었다. 녹읍제는 신문왕때 폐지되었다가 70 여 년 만에 부활된 것으로 다시 귀족 세력이 득세하여 감을 의미한다. 유교적 이상정치를 위해 한화정책을 실시하여, 지방의 주군현 명칭과 중앙관부의 모든 관직명을 한문식으로 고쳤다. 그러나 이것도 귀족들의 반발에 부딪쳐 성공하지는 못하고 혜공왕때 모두 원래대로 환원되었다.
경덕왕은 부왕 성덕왕과 일찍 별세한 모후 소덕왕후를 추모하여 지금 경주국립박물관 마당 종각에 보존되어있는 성덕대왕신종을 주조하기 시작하였으나, 당대에 완성하지 못하고 혜공왕 때 완성하였다. 《삼국유사》에는 경덕왕 때 ‘재상 김대성이 현세의 부모를 위해서 불국사를 짓고, 전생의 부모를 위해서는 석굴암을 지었다’ 고 일반적으로 그렇게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 분야에서 연구가 깊은 간송미술관 최완수 학예실장의 연구에 의하면 좀 복잡한 사연이 얽혀있다. 불국사와 석굴암 영조에 관한 시각은 최실장님의 연구 시각에서 이야기를 전개하고자 한다.
불국사 사중기에는 ‘경덕왕대 大相 김대성이 불국사 영조(營造)를 시작했으나 혜공왕대까지도 완성 하지 못하고 대성이 돌아감으로써 국가가 이를 끝마쳤다’고 하였다. 과연 불국사와 석굴암을 김대성 개인의 의지에 따라서 거대한 사업을 이루어 낸 것일까?
경덕왕은 성덕왕이 다져 놓은 튼튼한 기반 위에서 전륜성왕(轉輪聖王)으로 군림하여 절대왕권을 행사하며 불국시대 문화의 황금기를 이루었다. 전륜성왕은 고대 인도의 전기(傳記)에 나오는 이상적 제왕이다. 이 왕이 세상에 나타날 때 하늘의 차륜(車輪)이 나타나고, 왕은 그 선도(先導) 아래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전 세계를 평정한다고 여긴다. 전륜성왕은 세속세계의 주인이며, 진리계(眞理界)의 제왕인 부처님에 비유되는 지위를 부여받는 개념이다.
경덕왕은 우선 부왕 성덕왕의 왕릉을 스투파 형식으로 꾸미고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입체상으로 조각하여 호석(護石)을 설치하였다. 부왕 성덕왕과 모후 소덕왕후의 추복(追福)을 위해 대대적인 불교적 사업을 추진하였다. 3세 때 하세(下世)한 어머니 소덕왕후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과 자식들을 위해 13년 동안이나 홀아비로 살면서 고독한 여생을 보낸 아버지 성덕왕을 추모하기 위한 봉덕사(奉德寺)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鍾)을 주조(鑄造)하였으나, 당대에 완성하지는 못하였다. 둘째 불국사와 석굴암을 조영(造營)을 시작하였고, 이 역시 당대에 완성하지는 못했다. 그 취지는 토함산 일원을 하나의 화엄불국토로 설정하고, 그 근본 원칙은 《화엄경》으로부터 취하고, 구체적인 불국세계의 모습은 그것을 가장 분명하게 기술하고 있는 각 경전에서 따다가 적용하여 화엄불국토를 일관된 기획 아래 불국사와 석굴암을 조영하였다.
(6) 36대 혜공왕(재위 765~780)은 경덕왕의 아들이다. 태자 8세에 경덕왕을 계승하여 즉위했다. 항상 부녀의 행동을 하기를 좋아하여 비단주머니를 차기를 좋아하였다. 신라의 기품이 연약, 사치 방종 안일에 빠졌음을 뜻한다. 마침내 김지정의 난이 일어나자 상대등 김양상에게 난을 진압케 하였으나, 김양상(뒤의 선덕왕)과 김경신(뒤의 원성왕)이 진압하는 과정에서 왕과 왕비까지 살해했다. 삼국유사는 이렇게 전한다. 경덕왕이 아들이 없어 표훈 대사를 불러 상제께 청하여 달라고 하였다. 상제가 딸은 가하나 아들은 불가하다고 하자 왕은 딸을 바꾸어 아들로 해주기 바란다고 하였다. 표훈이 다시 상제께 청하니 그렇게 할 수는 있으나 나라가 위태하다 하였다. 경덕왕이 그래도 좋다고 하였으므로 드디어 아들을 낳았다. 이것은 유약했던 왕이 난중에 비명에 간 것을 반영한 설화일 것이다.
(7) 37대 선덕왕(宣德王, 재위 780~785)은 이름이 김양상이다. 성덕대왕신종에 종 주조 책임자로 그의 이름이 나타난다. 즉위 6년 후에 후사 없이 하세했다. 선덕왕이 즉위한 과정은 이러했다. 처음 혜공왕 말년에 김지정이 반란을 일으키자 상대등 김양상(金良相)이 김경신(金敬信)의 군사력의 협력을 얻어 함께 난을 평정하였다. 그 와중에 김양상과 김경신은 혜공왕까지 살해하고, 차례로 왕이 되었다. 김양상은 내물왕(奈勿王) 10세손을 표방하며 즉위하였으니, 그가 곧 37대 선덕왕이다. 선덕왕의 즉위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120 여 년의 무열왕 직계 후손들로 이어지던 신라 중대가 몰락하고 내물왕 방계귀족들이 왕위를 계승하는 신라 하대가 시작된 것이다.
제38대 원성왕릉(괘릉)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
제38대 원성왕릉(괘릉)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
제38대 원성왕릉(괘릉)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
제38대 원성왕릉(괘릉)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
제38대 원성왕릉(괘릉)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 / 동일 석물을 다른 각도에서 찍은것. 릉을 바라보고 좌측편
제38대 원성왕릉(괘릉)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 / 동일 석물을 다른 각도에서 찍은것. 릉을 바라보고 우측편
제38대 원성왕릉(괘릉)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
제38대 원성왕릉(괘릉)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
(8) 38대 원성왕(元聖王, 재위 785~798)은 이름이 김경신이며 내물왕 12세손을 표방하고 즉위하였다. 김양상을 도와 선덕왕으로 즉위시킨 공로로 실세의 자리를 유지하다가, 선덕왕이 후사가 없이 하세하자 제1후보자 김주원과 왕위계승 경쟁 우여곡절 끝에 즉위하였다. 원성왕의 즉위 과정은 이러했다. 선덕왕이 후사 없이 재위 6년 만에 하세하자 군신들이 왕위계승을 의논하였다. 제일 후보자는 제1의 재상 이찬 김주원(金周元; 태종무열왕 6세손)이었다. 주원은 서울 북쪽 20리 밖에 살았는데 마침 큰 비가 와서 알천(閼川)이 불어나 주원이 건너올 수 없었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임금 자리는 진실로 사람이 도모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 폭우가 하늘에서 쏟아지니 혹시 하늘의 뜻이 '김주원을 세우려하지 않음' 인가 보다. 지금의 상대등 김경신은 전왕의 아우로 본디 덕망이 높아 임금의 자격이 있다.이 말에 뭇 신하들이 동의하여 김경신이 임금으로 추대되었고, 그런 연후에 비가 그쳤다. 일기(日氣)가 역사를 바꾼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괘릉은 바로 원성왕의 능으로 알려져 있다.
삼국유사에 김경신(뒤 원성왕)의 꿈에 관한 설화가 있다. 선덕왕 말 왕위가 교체되려는 미묘한 시기에 김경신은 이상한 꿈을 꾸었다. 복상투를 풀고 흰 갓을 쓴 다음, 12줄 가야금을 들고 천관사 우물 속으로 들어가는 꿈을 꿨다. 점을 쳤더니, "복상투를 벗은 것은 관직을 잃을 징조요, 가야금을 든 것은 칼을 쓸 징조요, 우물 속으로 들어간 것은 옥에 갇힐 징조" 라고 했다. 김경신은 이 말을 듣고 두문불출 근신하였다. 아찬 여삼이 찾아와 꿈의 내용을 듣고, 꿈풀이를 다시 해줬다. "이는 좋은 꿈입니다. 복상투를 벗은 것은 위에 앉는 이가 없다는 것이요, 흰 갓을 쓴 것은 면류관을 쓸 징조요, 12줄 가야금을 든 것은 12대손이 왕위를 이어받을 징조요, 천관사 우물에 들어간 것은 궁궐로 들어갈 징조입니다." 하였다. "위에 김주원이 있는데, 어떻게 내가 왕위에 오를 수 있단 말인가? "하니, "몰래 북천산(알천)에 제사 지내면 될 것입니다." 그의 말대로 북천의 신에게 제사를 지냈더니 과연 얼마 후에 큰 비가 와서 알천의 물이 불어서 김주원이 냇물을 건너지 못해 왕위를 놓치고 김경신이 왕위에 오르는 이변이 일어났다는 설화이다.
김주원은 왕위계승에 패배하여 멀리 명주(강릉)로 옮겨 살았고, 아들 김헌창은 웅천주 도독으로 있다가 아버지가 즉위하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고, 822년 헌덕왕때 난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였고, 4년 후 김헌창의 아들 김범문도 고달산 산적 수신의 세력과 함께 난을 일으켰으나 역시 실패하였다. 김헌창과 김범문의 난은 내물왕계에게 왕위를 뺏긴 무열왕계열의 반발로 왕권에 대한 도전이었다.
(9) 원성왕이 역사를 왜곡하다. 원성왕은 경덕왕이 성덕왕의 추복사찰로 국력을 기울여 건립해온 불국사의 건립 시말을 자세히 밝히기를 꺼렸다. 원성왕 자신이 성덕왕과 경덕왕의 혈통을 단절시키고, 새 왕조나 다름없는 하대왕조를 열어 간 당사자로, 불국사의 건립 시말을 자세히 밝힌다는 것은 자신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국가적 사업이었던 불국사 건립을 마무리 지은 원성왕은 공사의 총책임을 맡았던 김대성 개인의 원찰(願刹)로 둔갑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김대성이 양대 부모를 위해 그 추복사찰로 지은 것처럼 선전하였다고 최완수님은 주장한다. 그리고는 원성왕 자신의 왕릉을 그 불국사가 바라다 보이는 토함산 끝자락에 써서 불국사가 마치 자신의 원찰인 듯 착각하게 했다. 그 결과 신라 불국토 사상을 표방하기 위해 토함산에 화엄불국세계를 구현해 낸 불국사와 석굴암의 정확한 창건 시말은 왜곡되고 말았다. 원성왕의 능이 괘릉이라고 불리는 데는 능을 매장 할 때 곽이 들어 가야할 구덩이에 물이 많이 고여서 곽이 물에 닿지 않게 곽을 걸어두는 장치를 한 후에 매장하였기 때문에 '걸 괘(掛)자 괘릉(掛陵)이라고 한다.
▣ 맺는 말
이번에 답사에서 경주시 조양동에 부근에 함께 능이 있는 32대 효소왕과 33대 성덕왕은 형제왕, 효소왕은 유약했고 후사가 없었으며, 그 실정(實情)이 왕릉에도 반영되었다. 성덕왕*은 당당한 왕이었다.
성덕왕이 하세하고 큰아들 효성왕이 즉위하면서, 정치적 안정은 일시적으로 흔들렸으나, 효성왕의 아우인 경덕왕*이 다시 당당한 왕으로 신라 문화중흥을 이끌었다. 이 얘기에서 경덕왕릉을 빼고는 얘기가 안 되는데, 경주시 내남면 부지리에 있고, 호석을 두르고 십이지신상을 조각한 당당한 왕릉인데, 이번 답사에서는 빠졌다. 다시 가서 사진을 찍어와야겠다. 경덕왕은 즉위하면서 아들을 위해 개인적 행복도 희생해 가며 자식을 돌보아 온 부왕 성덕왕과 얼굴도 모르는 모후 소덕왕후에 대한 그리움과 효성이 지극한 나머지 성덕대왕신종과 석굴암 불국사를 영조하는 큰 업적을 남겼다.
부왕 성덕왕이 다져 놓은 튼튼한 기반 위에서 외척세력을 제어하고 전륜성왕(轉輪聖王)으로 군림하여 절대왕권을 행사하며 불국시대(佛國時代) 문화의 황금기를 이루었다. 성덕왕릉이 호석을 두른 웅장한 왕릉인 것도, 아들 경덕왕 효성의 발로라고 볼 수 있다. 성덕왕릉 앞에 비신이 없는 귀비만 있는 비석도 부왕을 위해 거창하게 세웠지만, 파손된 것은 신라 중대 태종무열계에서 하대 내물왕계로 왕위 계통이 바뀌면서 지워진 역사의 단편이 아닌가 생각된다. 또는 고려시대 제3차 몽고군 침입시(1235~1239) 경주가 함락되고 황룡사9층목탑이 불탈 때, 몽고인들의 약탈과 파괴한 흔적일지도 모른다. 지워진 역사는 말이 없다.
어느 왕릉인지가 확실할 때는 태종무열왕이나. 성덕왕릉같이 그 왕의 시호를 붙인다. 그런데 경주에는 이름을 모르는 왕릉이 많다. 그럴 때는 그 능의 특징으로 이름을 붙인다. 천마총, 금관총, 괘릉 등....... 괘릉(경주시 외동읍 괘릉리)은 원성왕릉으로 단정한다. 원성왕 자신도 역사지우기를 했던 만큼, 이 왕릉도 후세의 역사지우기 보복을 당했을 가능성이 크다. 불교에 대한 지극한 신앙심과 부모에 대한 효성이 결합되어 만들어진 불국사와 석굴암의 그 건축 조각의 미적아름다움에 경탄하며, 위대한 우리 민족문화유산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는 한편, 그 배후에 얽힌 정치성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
33대 성덕왕릉 귀부, 비신이 없어진 비석의 거북 받친대 (경주시 조양동)
효소왕릉
성덕왕릉
성덕왕릉
성덕왕릉 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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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즐감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