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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일시;2071년[일요일] 첫째주 일요일
산행장소;여수 여자도 섬
주민등록 지참 /배삭 10.000 원 본인 부담
아침은 순두부 제공 합니다 점심은 반찬 준비하세요
귀가중 휴게소에서 회 대접 하겠읍니다
회장 최순하 010 5672 4210
둔포신협앞 | 06;00 | 성환읍사무소 | 06;30 |
정원주유소 | 06;10 | 삼풍아파트 | 06;35 |
성환훼미리마트 | 06;12 | 성환부영아파트 | 06;40 |
천안 연암대 | 06;20 | 직산사거리 | 06;50 |
대흥 초교 | 06;25 | 천안 농협앞 | 07;10 |
충남 주유소 | 06;28 |
여자만의 중심지에 있는 봄이 아름다운 섬
[ 汝自島 ]
위치 | 전라남도 여수시 소라면에 딸린 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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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도 | 북위 34°47′ |
경도 | 동경 127°44′ |
면적 | 0.59km2 |
해안선 길이 | 7.5km |
인구 | 107가구 277명(2010년) |
섬을 중심으로 주위에 몰려 있는 도서의 배열이 공중에서 보면 ‘너 여(汝)’ 자형이고, 육지와 거리가 너무 멀어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한다는 뜻에서 스스로 자(自) 자를 써 ‘여자도(汝自島)’라 했다고 한다.
여자도(汝自島)는 여수에선 여자만, 순천에선 순천만이라 부르는 여자만의 중심에 위치한 섬이다. 화양면의 섬달천에서 4.2km, 여수에서 해로로 44.5km 떨어져 있다. 여자도 바로 옆에는 송여자도가 있다.
여자도는 대동·마파 마을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중 남쪽 마을은 남풍 즉 마파람이 부는 마을이어서 마파지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여수 시청사에서 20여 분 화양면으로 진입하면 달천도가 나온다. 지명은 달천도이지만 육지 쪽은 육달천이며 다리가 이어져 있는 섬 쪽은 섬달천으로 구분하여 불린다. 이 섬달천에서 여자도로 이어지는 도선이 있다. 오래 전에는 여자도에서 여수항까지 다니던 여객선이 순천만과 가막만과 화정면 섬들을 돌고 돌아서 다섯 시간 정도 걸리는 오지 중의 오지 섬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도로 사정이 좋아져서 30분이면 육지와 가장 가까운 섬달천으로 건너가 여수 시내로 이어 주는 버스와 연결된다.
여자도를 순수한 우리말로 부르면 여자들만 사는 금남(禁男)의 섬이 아닌가 하는 오해를 하기도 한다. 한문으로 풀어서는 의미를 부여할 수 없지만 주위에 세 개의 섬 모양과 너 여(汝) 자의 글자 모양이 비슷한 데서 따 왔으며 섬 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 하여 스스로 자(自)를 쓴 것이라는 동네 사람들의 설명이 설득력이 있는 것 같다.
다른 유래로는 ‘넘자섬’이 한자화했다고 전하기도 하는데, 넘자란 말의 뜻을 풀어보면 ‘넘’은 넘는다는 뜻이며 ‘자’는 산을 말하는 고어로 섬의 높이가 낮아 파도가 산을 넘어서 생겨난 말로 풀이할 수 있는데, 이는 낮은 산으로 이루어진 여자도의 지형과도 맞아떨어지는 이름이다.
여자도에 처음 사람이 들어온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400년 전 임진왜란 당시로 남원 방씨가 승주군 낙안면 선조(현 보성군 벌교읍 장양리)에서 이 섬에 처음 들어와 마파지 마을에서 살았다고 전해지며, 그 뒤 대동 마을에는 초계 최씨가 들어와 살았다고 한다.
행정 지명은 여수시 화정면 여자리로 여수반도와 고흥반도 사이의 여자만(지도상 지명 순천만)이 있으며 평균 바다 수심이 3~5m 정도로 비교적 낮고 순천과 벌교 방향에서 유입되는 육수가 유입되어 좋은 갯벌과 염도로 인해 패류들이 살기 좋은 서식 환경이 조성되어 있다. 피조개의 주산지였으나 지금은 똥꼬막 양식을 주로 하고 낙지와 감성돔이 많이 나는 곳이다.
이곳 주요 농산물은 마늘·보리·녹두·고구마 등이며 세 개의 자연 마을로 이루어진 여자도 110여 가구는 여자만을 ‘텃밭’처럼 여기며 연중 새꼬막을 양식하고, 5~7월엔 낙지 잡이, 8~10월이면 전어 잡이로 분주하다. 주요 수산물은 피조개·새꼬막·조기·멸치·문어 등이고 피조개와 새우가 많이 나며 낚시터가 형성되어 있다. 특히 여자도는 낚시터로도 이름이 높다.
여자도행 도선 금진호는 10t 정도 되는 제법 큰 배에 속하며 정원이 열두 명인데, 아침 첫배를 아홉 시 이십 분에 탈 수 있으며 하루 5회, 왕복 요금은 5,000원이다. 명절과 공휴일 결혼식과 상가 집에 오고갈 때는 사람들이 많이 몰린다. 게다가 배를 한 번 놓쳐 버리면 몇 시간 뒤에나 있기 때문에 어찌하든지 배를 타려고 한다. 사람들이 몰려오면 다 아는 동네 이웃 사람들인데 배 타려고 나온 사람에게 배 정원이 찼다고 배 타지 말라는 소리를 차마 못하는 마음씨 좋은 이재학 선장. 결국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열두 명 정원을 초과하는 바람에 여러 번 벌금을 물고 억울해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란다. 얼마 전만 해도 170만 원이나 물었다고 하는데, 조사 받느라 시간까지 내야 했단다. 벌금 때문에 그만둘까 고민까지 했지만 속이 썩는 일을 수차례 겪으면서도 차마 배를 묶지는 못했다는 선장은 이 같은 고충 속에서도 묵묵히 30년간 주민들의 발이 되어 주었다.
그의 아내 김점옥(51세) 씨는 그 비슷한 세월 동안 우편 행랑을 메고 여자도 집집에 소식을 전달해 왔다고 한다. 벌써 24년째 집배원 노릇을 하고 있다는데, 남편의 뒤를 이은 것이란다. 여자도와 송여자도의 섬마을 선장과 집배원 부부가 두 개 섬, 세 개 마을 157가구 섬사람들의 영락없는 ‘다리’인 셈이다. 그들이 있어 길은 이 험한 바닷길이 끊이지 않고 날마다 저 바다를 건너갔다 건너오는 것이다.
사연 많은 선장이 몰고 가는 금진호는 섬달천에서 출발한 지 30여 분만에 송여자도를 잠시 들러서 여자도 출장소가 있는 마파 마을을 지나 대동 마을까지 하루에 네 번 운항한다.
선장의 사연을 안고 금진호에서 내려 여자도에 발을 내딛는다. 도선에서 종점인 여자 대동 마을에 내리면 길이 시작되는 지점인 마을 입구 봉우리 끝에 한국 전력공사가 보인다. 섬의 북쪽 끝자락 언덕을 이 한 기관이 독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이곳 여자도는 그동안의 숙원이었던 내연 발전소가 1994년 4월의 점화식을 계기로 가동되기 시작했다. 예의 하루 다섯 시간의 제한 송전 시대가 24시간의 문화 시대로 탈바꿈한 것이다. 덕분에 지금은 집집마다 전기가 들어오고, 수도 시설도 잘 되어 물도 잘 나온다. 그래서 이제는 집집마다 세면장과 수세식 화장실, 세탁기 등 편리한 문화생활을 누리고 있다.
예전에는 물이 너무나 부족하여 고생도 많이 했다고 한다. 고생고생 물 고생을 말도 못할 정도로 했단다. 사람이 아무리 살아가려고 해도 자연의 축복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 아무리 살고 싶어도 물이 없으면 살 수 없다. 여자도는 지형이 51m로 매우 낮기 때문에 물이 터무니없이 부족한 곳이었다. 아무리 샘을 파도 간기가 있는 물이 나왔고 이 물로는 세수를 해도 비눗물이 잘 나지 않았다. 그래서 여자도는 여자들이 물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단다.
동네에는 우물이 세 개 있었는데 두 개는 간기가 있고, 간기 없는 동네 가운데 우물은 멍석으로 덮어 놓았다가 일시에 배급을 했다고 한다. 또한 물싸움이 안 나게 양동이마다 높이를 맞추어 금을 그었다.
그 대신 오늘날 여자도가 사람들이 살 수 있는 것은 그 넓은 바다와 광활한 갯벌 때문이다. 거기에 보화들이 가득 들어 있다. 섬 주변이 모두 황금 어장터다. 두레박만 던져도 고기가 가득한 축복받은 섬이다. 여자도는 일제 시대부터 중하·대하가 최고 이름난 곳으로 여자도는 집에 개도 돈을 물고 다닌다고 할 정도였다고 한다.
마을이 참 조용하다. 사람들 소리가 간간이 들려올 뿐 요란함은 없다. 각종 어구들이 널브러져 있는 포구를 지나면 이어 마을. 마을은 포구의 동쪽 나지막한 평지에 형성되어 있다.
마을 안쪽 바닷가를 바라보면 낮은 지대에 학교가 있다. 소라초등학교 여자분교장이다. 여자분교는 감탄사가 절로 나오게 풍광이 곱다. 운동장에서 공을 차면 저 바다로 풍덩 빠지는 아주 작은 아담한 운동장에 교사도 아주 단출하다. 두 칸 정도의 교실이 분교의 유일한 교육 시설. 너무 작아서인지 앙증맞을 정도로 친근감을 느끼게 한다. 전교생은 4학년 조지영과 2학년 조동현 남매. 지영이는 지난해까지 ‘학생 하나 선생님 한 분’인 학교에 다녔다. 지영이는 2학년 때 ‘내년에는 다른 동네에 사는 친구들이 우리 학교로 전학을 왔으면 좋겠습니다’라고 글짓기를 했는데 동생만 달랑 후배가 되었다.
‘······운동장 끝에 팽나무는 아빠가 학교에 다닐 때도 지금처럼 컸다 합니다. 나무는 참 천천히 자라는 것 같습니다.’
지영이의 글 속에 나오는 팽나무. 그 아래 넓디넓은 초록 그늘에 앉으면 도무지 일어나고 싶지 않는 곳이다. 학교 오른쪽에는 글 속의 커다란 느티나무 세 그루가 있다. 미니 학교지만 100년이 넘었을 법한 고목들이 학교의 나이를 어림잡게 한다. 그 아래는 단상을 만들어 두어 쉼터 겸, 제를 올릴 수 있도록 했다. 자연 학습장 좌우로 이승복 동상과 이순신 장군상 등 각종 조형물들도 세워져 있다. 학교는 전체적으로 아담하고 아름답다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다. 책 읽는 소녀상은 따로 한 곳에 세워져 있다.
학교 담장을 넘어서면 바로 바닷가다. 담벼락이 방파제 역할을 한다. 바다를 접하는 학교. 파도 소리가 아름답게 들려온다. 학교 너머 해변에는 골짜기가 있는데 ‘샘북넘’이라고 한다. ‘샘 북쪽 너머’란 지명을 줄인 말로 바닷가에서 옛날 장정 열 명이 들어도 들지 못하는 바위를 최 장군이란 사람이 들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그리고 학교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보이는 섬이 납계도이다. 여자도의 동북쪽에 있는 납계도는 높이가 8m밖에 되지 않는 아주 납작한 섬이어서 ‘납닥섬’이라고 하는데 납은 납(納)으로 닦은 계(鷄)라 하여 납닥섬이 한자로 ‘납계도’가 되었다고 한다.
대동 마을 선창에 내려 학교를 돌아보고 나서 마을에 올라가면 보이는 커다란 플라타너스 두 그루가 정자나무이다. 이 나무 그루터기 아래에는 섬사람들이 모두 나와 앉아 있다. 저쪽은 남자들 노는 곳, 이쪽은 여자들 노는 곳으로 나무 아래엔 시멘트를 부어 ‘신발 벗고 올라가는 방’ 같은 쉼터를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겨울에는 기름값이 비싸서 낮에는 노인정에 모여서 점심밥을 지어 먹고 하루 종일 화투 등으로 하루를 소일하면서 보낸다고 한다. 놀이 문화가 없는 이곳에 찾아 가는 재가 복지와 문화 복지가 절실한 곳이다.
포구 앞 가운데에 마을 회관과 쉼터가 나란히 있다. 마을 회관은 현대식 건물이지만 쉼터는 기와집 형태로 사방이 탁 트여 있고 마루에 난간을 둘러쳤다. 그리고 시계와 TV만 있을 뿐 다른 특별한 시설은 없다. 그 옆으로 대동 경로당과 파출소가 나란히 이어져 있다. 경로당 앞에는 푸른색 칠을 한 단상이 만들어져 있다. 각종 시설이 바다를 배경으로 전진 배치되어 있고 그 뒤로 집들이 있다.
포구 오른쪽 공터에는 배수지가 있고 공동 우물이 있다. 여자도는 고기가 많이 잡히고 갯벌에서 패류 채취가 풍족하여 부유한 섬이었다. 그러나 식수난은 아직도 제대로 해결이 되지 않고 있다. 소형 관정을 아무리 파 보아도 염기 있는 물만 나오는 실정이다.
물양장이 길게 이어져 있고 그 뒤로 뒷동산이다. 방파제를 따라 바닷가 쪽으로 쭉 나가면 선양장이 상당히 넓은 면적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마을을 바라보면 마을이 평지라 규모를 제대로 볼 수 없다. 고만고만한 건물에 대부분이 단층짜리 건물이다. 그나마 공공시설이 눈에 띌 정도다. 마을 뒤는 아주 나지막한 언덕이다.
전형적인 골목길을 들어서 마을 안으로 들어가면 곳곳에 밭이 있고 빈집도 더러 보인다. 빈집일 뿐 아니라 폐가도 있다. 군데군데 풀숲이 우거진 빈집이 눈에 띈다. 대동 교회 건물 앞 공터에 철제로 된 종각이 있고 종이 매달려 있다. 건물 정면 외벽은 시멘트이지만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건물이다.
여자도 주민들은 섬의 북단과 남단에 모여 살면서 어업과 농업을 겸한다. 대동 마을에는 50가구 140여 명이 전형적인 어촌 마을을 이루며 사는데 그들은 고기잡이가 생활이요, 천직이다. 그동안 고기가 넘쳐나고, 갯벌에서 낙지와 꼬막 등이 풍족하게 잡혀 생활은 그런대로 해 왔으나 요즘은 여러 가지 사정으로 어려움에 처해 있다고 한다.
교회 옆으로 해서 난 시멘트 길을 따라 올라가면 마파지 가는 길이 나타난다. 대동리에서 마파지로 넘어가는 재로부터 10여 분 거리에 동네가 있다. 길은 외줄기다. 농가 옆으로 해서 난 길을 따라 구불구불하게 시멘트로 만들어져 있고 좌우에 밭이 들어서 있다. 또한 섬 전체가 완만한 경사의 구릉성 산지로 이루어져 있어 산길을 따라가면 오른쪽으로 드넓은 바닷가의 섬들이 한눈에 들어와 걷는 재미를 더한다. 여자도는 동남쪽으로 길게, 그러면서 폭이 좁다. 그래서 대동 마을에서 마파지로 가는 길목은 말 그대로 길목이다. 그다지 높지 않은 정상을 오른 후 내리막길이 이어진다.
송여자도와 납계도 그리고 주위의 이름을 얻지 못한 섬들. 왼쪽 해변은 자갈밭이고 오른쪽은 구릉지로 밭과 그 사이에 여러 기의 가족묘가 조성되어 있다. 조금 더 들어가면 안부 지점으로 오른쪽은 자갈 해변이 나타난다. 활처럼 둥글게 형성되어 있다고 하여 활꼬밭 즉 모래톱이라는 곳이다. 해수욕장으로 이용해도 좋을 듯싶다.
다시 서서히 이어지는 오르막길은 잘 닦인 도로이다. 차도 거뜬하게 다닐 수 있을 만한 길. 그러나 여자도에는 차량 이용이 불가능하다. 그만한 도로가 없고 육지에서 차를 가져올 수단도 없다.
이어 내리막길이 나타난다. 그리고 이어지는 좁은 길. 좌우로 큰 나무들이 숲 터널을 이룬다. 이제부터 ‘마파지길’이 시작된다. 이 마을이 바로 마파지 마을이다.
입구 쪽에 여자 중앙 교회가 있다. 이곳에도 빨간색 철제로 된 종각이 있다. 골목길은 외길이나 사이사이에 샛길이 있다. 이곳에도 빈집이 더러 보인다. 이곳에는 1979년에 개청한 화정면 여자출장소가 있고 그 앞밭에는 남원 방씨 공훈비가 있다.
출장소 맞은편에 선박 입출항 신고소가 있다. 그 아래 보건 진료소를 지나면 바로 포구다. 이곳에서 배를 탄다. 그러나 포구가 생각보다 작다. 접안 시설은 넓게 되어 있으나 자갈밭이라 바로 접안하기는 무리일 듯싶다. 도선을 타는 방파제 입구에 마파 청년회에서 세운 마파지 마을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별도의 대합실은 없다. 각종 어구들로 복잡하게 얽혀 있는 이곳은 방파제와는 달리 길게 뻗어 있다.
보건 진료소에서 안쪽으로 더 들어가면 2층짜리 건물이 있는데 마을 회관으로 마치 운동장처럼 마당이 상당히 넓다. 체육 시설과 벤치 등이 설치되어 있다. 배구 코트도 보인다. 그리고 그 옆으로는 마파 경로당이 있다.
골목을 통해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또 다른 포구가 나타난다. 포구 가는 길목 임야에 제법 많은 묘들이 있는 추모당이 있다. 이 포구는 옆 포구에 비해 제법 큰 편이고 배들도 많이 정박해 있다. 시멘트 길로 내리막길을 걸어가면 나타나는 포구. 이곳에서도 배를 탈 수 있는데 이곳은 수심이 깊어 반대쪽에 있는 선착장에 물이 빠져나가면 이곳에 배를 댄다고 한다. 배는 계단이 있는 끝자락에 댄다.
고깃배가 많다. 그것도 대부분이 목선들이다. 방파제는 빙 둘러 형성되어 있다. 방파제 끝에서 마을을 바라본다. 오른쪽은 마을이고 왼쪽은 임야로 특히 묘들이 많이 보인다.
섬 주변에는 마치 인위적으로 조성한 것처럼 ‘편안한 갯바위 낚시터’가 즐비하다. 특히 대여자도와 송여자도 사이에 마치 배(船)처럼 자리 잡고 있는 ‘검둥여’는 숨겨진 최고의 갯바위 낚시터다. 여름철이면 낚시꾼 간에 자리 쟁탈전이 벌어질 정도로 낚시터로 유명한 곳이다. 검둥여에는 6~7월엔 농어, 8~9월엔 월척 급의 감성돔이 잘 잡혀 하루 10여 마리 잡기는 어렵지 않다고 한다. 주요 어종은 감성돔, 볼락(5~11월) 등이며, 물때는 낮 낚시는 6~8물, 밤낚시는 조금 때가 좋고 릴낚시 및 갯바위가 잘 된다고 한다.
한편, 여자도와 송여자도를 잇는 해상 인도교가 설치되기 때문에 여수시 화정면 여자도에 교량에서 바다낚시를 즐길 수 있는 낚시터를 개발하기로 했다. 여수시에 따르면 제3차 도서종합개발 사업의 하나로 화정면 여자와 송여자도를 잇는 교량 낚시터를 개발하기 위해 총 50억 원을 들여 길이 560m, 폭 3m의 인도교 낚시터를 건설할 계획이다. 교량 중간에는 낚시터와 쉼터 각 2개소, 시·종점부에 광장 각 1개소가 설치된다고 한다.
점점 발달하고 있는 여자도, 자연이 있어 봄이 있어 아름다운 섬을 떠나며 섬이 조금 더 발전하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