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
정릉에서 지명 유래
정릉 ㅡ 태조의 왕비 신덕왕후 강씨의 무덤
덕수궁
상왕일때 태조의 궁호
서궁
1593년 선조가 머물기 시작하면서 붙여진 이름
1608.2 선조가 사망한 곳.
대규모 토목공사는 없이 기존의 주택을 사용.
시대순 정리ㅡㅡㅡㅡㅡㅡㅡㅡㅡ
1893 양.10.4 고종, 경운궁 즉조당에 참배 ㅡ300주기 기념
1895.10.8 양력. 을미사변
1896.2.11 양력. 아관파천
왕대비, 세자비등은 경운궁에
헌종계비 효정왕후 홍씨 1831-1844-1904.1.2
순명효황후 민씨 1872.11-1882-1904.11.5
1896.8.10 경운궁 수리 명령
1896.9.4 왕비 빈전? 혼전? 을 경운궁으로
선원전, 집옥재 어진을 경운궁 별당(즉조당)으로
1897.8.7 어진을 보문각으로 옮기다
1897.2.20 경운궁으로 이어
1897년 6월 19일
함녕전 상량문 제술관 임명
보문각 상량문 제술관 서사관 임명
보문각 : 경복궁 집옥재의 어진을 옮겨온 것으로 보인다.
준명전 북쪽에 위치
1902년 흠문각으로 이름을 바꾼 것으로 추정된다.
1897년 6월 26일 즉조당의 어진을 새 진전으로 옮기다
새 진전의 위치 : 포덕문 안쪽.
1900년 10월 소실된 것으로 보인다.
1897년 9월 30일 함녕전에서 신료들과 접견(함녕전 사용관련 첫 기록)
2월~9월 사이 고종의 생활공간은 대유재 청목재 등이었을 듯하다.
1897년 9월 25일 귀비 엄씨 영친왕 출산
장소 : 숙옹재(대유재 자리로 추정)
청목재 : 주로 재실 용도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
1897년 10월 2일 칭제건원을 수락
1897년 10월 7일 즉조당의 이름을 태극전으로 개명
1897년 10월 12일 대한제국선포, 왕비를 황후로 추존(명성황후)
태극전(현재의 즉조당 자리)에서 다양한 행사 진행
1897년 11월 21일 명성황후 국장
빈전으로 사용하던 경소전을 수리해서
혼전 경효전으로 이름 바꿈
명성황후 국장 행렬 : 빈전 - 돈례문 - 금천교 - 인화문 -
1898년 2월 13일 태극전의 이름을 중화전으로 개명
1900년 3월 6일 선원전 영역 흥덕전
영흥 준원전의 태조 어진을 흥덕전에 모시다
1902년 5월 12일 새 정전 중화전 건설
1904.2 한일의정서 ㅡ러일전쟁을 의한 보급기지화
1904.2.8 러일전쟁 발발
1904.4.14 22시경 함녕전에서 발화 ㅡ대화재
화재를 가장한 변란을 우려, 대응이 늦어졌을 가능성 있음
23시경 화재경보
23:30경 고종, 수옥헌으로 피신
영국공사관 경비병들 궁궐진입해서 소방활동
실화일까? 방화일까?
화재관련 관련자 및 책임자들 체포
종전과 다른 경미한 처벌
광무황제의 거처문제
일부대신 및 일본공사의 창덕궁으로 이어 제안
봄 기근 등으로 재정궁핍하니 경운궁 중건공사는 불가하다
송규헌의 상소
지금이 토목공사나 할 때인가? 취지의 글
국가재정의 파탄 노출?
4.25 창덕궁으로 이어하기로 했다가 번복
1904.8 제1차 한일협약
1905.11.17 제2차 한일협약
일제강점기 일제의 덕수궁 매각계획
: 반대여론이 심해 취소하였다.
1945년 12월 12일 귀국한 임정이 석조전을 임시 정무처로 사용하였다.
1946년 3월 20일 석조전에서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개최
1947년 7월 12일 한미행정이양협정
행정권을 미군정에서 우리 정부로 이양하는 협정
덕수궁 일부의 토지를 미국 소유로 넘기다.
1950년 서울 수복이후 미군의 본부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1957년 산업기술전람회 개최
중화전 내부를 개조해 전시장으로 사용하였다가
비난여론이 일자 추후 원상복구
1961년 덕수궁 동쪽 돌담(태평로 방면)을 철책으로 개조
1년여의 논란끝에 공사진행
1961년 12월 공사 완공
1968년 태평로 도로 확장하면서 담장이 뒤로 후퇴
16미터정도 뒤로 후퇴, 돌담으로 복원
1970년 대한문도 12미터정도 후퇴해서 현재 자리에 있게 됨.
포덕문이 평성문 자리로 이동하게 되었다.
1981년 수리 시작
1984년 중화전 앞뜰 복구,
북쪽 담장 복원 : 일제강점기 벽돌담장으로 했던 것을 전통의 사괴석 담장으로 복원
1986년 금천교 복원
일제강점기 차량통행을 위해 파묻었던 것을 복원
1992년 석조전을 궁중유물 전시관으로 사용, 현재는 대한제국역사관으로 사용중
1996년 조선왕궁 수문병 교대식 재현행사 시작
2004~2015 덕수궁 복원계획, 비용 약 1,000억원
원래는 2018년 현재 공사가 끝나야 하나, 그렇지 못하고 진행중인 것으로 여겨진다.
공간------
헌종 계비 홍태후의 생활공간 수인당
1894년 당시 시녀만 100여명에 환관까지 있었다고 한다.
매천야록에서 : 1908년 궁에서 쫓겨난 자들이 환관이 500여명에,
나인 무감 별감 별군관 원역 등 3500여명 이었다고 한다.
26칸 건물로 귀비 엄씨의 영복당 23칸 보다 컸던 건물이었다고 한다.
귀비 엄씨의 생활공간 영복당
경선궁 현 서울시의회와 조선일보사 자리로 추정
1912~1914년 태평로 공사하면서 사라진듯
즉조당 귀비 엄씨 돌아가신곳
태자와 태자비의 생활공간, 태자궁
함녕전 권역에 위치하다가
1904년 4월의 대화재 이후 중명전 권역으로 이전한 것으로 보인다.
복녕당
귀인 양씨의 처소, 덕혜옹주의 출생지
영복당 동쪽으로 추정
1927년 태평로 확장공사시 사라짐.
궐내각사
대한문 안쪽에 위치
원수부 : 황제의 군권과 관계되는 곳
궁내부 : 황제권과 관계되는 곳
장례원 : 황실의례를 담당하던 곳
진전
포덕문 안의 선원전 : ㅣ1900년 10월 14일 소실
영성문 안의 선원전
1900년 11월 7일 개기
1901년 7월 11일 필역(완공)
1900년 10월 14일의 화재로 7명의 선대왕의 어진이 불에 타자
어진을 모사하게 하고
태조 어진은 정관헌에 모시고 나머지 6명의 어진은 중화전에 임시 보관하게 하였다.
1901년 6월 13일에 영성문 안의 선원전으로 어진을 옮겼다.
흥덕전 : 선원전 옆 동쪽으로 추정
홍태후의 빈전으로 사용 : 1904년 1월 2일 서거
태자비 민씨의 혼전으로 사용 : 1904년 11월 5일 서거
흠문각과 부속 계명재
1901년 11월 7일 고종의 어진을 그리게 하다
1901년 11월 8일 황태자의 예진을 그리게 하다.
1902년 6월 21일 고종의 어진은 흠문각에, 황태자의 예진은 계명재에 봉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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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립미술관 본관
1928년 르네상스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건물
구 대법원 청사로 사용 : 전면만 보존, 후면은 수리 신축
등록문화재 237호
육영공원 자리
평리원(한성재판소) 자리
1928년 경성재판소 건설
1945~1995 대법원으로 사용
1995년 대법원이 서초동으로 이전
서울시립미술관은 1988년 8월 19일 구 서울고등학교 건물에서 개관
2005년 5월 현재 위치로 이전해 왔다.
그밖에 서울 시립미술관 분관으로 경희궁 분관, 남서울 분관이 있고, 창작 스튜디오도 별도로 운영하고 있다.
배재학당/배재학당역사박물관
배재학당
1885년 8월 개교, 학생 2명
아펜젤러
최초의 근대식 남자 중등학교
목표 : 기독교인 양성. 근대국가의 인재양성
졸업생 : 김소월 나도향 주시경 이승만 등
아펜젤러와 배재학당
1885.6.21 인천에 입항
1885.7.19 서울에서 작은 교실을 열어, 학생 2명에게 영어 등을 가르치다
이후 고종이 학교사업을 허락
1886년 6.8 배재학당 편액 하사, 당시 학생은 6명
1886년 10월 6일 재학생 20명
1887년 벽돌건물 완성
학생 自助 정책
대가를 지불할 줄 모르는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없다.
크게되려는 사람은 마땅히 남에게 봉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欲爲大者 當爲人役)
서재필의 배재학당 협성회와 목요클럽
정동제일교회
1895.9~1897.10 건물 완성. 사적 256호
고딕풍의 붉은 벽돌 건물
1953년 전쟁중 반파된것을 후에 수리 복원함
1885.6 아펜젤러 조선에 오다
1885.10.11 정동 한옥집에 예배실 설치
선교가 승인되지 않아 학교부터 설립 - 배재학당
선교 승인되고
1887년 벧엘예배당 이름 걸고 첫 공개예배, 정동부인병원 개원 - 여성 어린이 진료
1889년 월간지 <교회> 발간
1897년 청년사업 전개시작
1922년 여름성경학교 개설
중명전
수옥헌
1901년 왕실도서관
1904년 4월 이후 편전 및 알현실로 사용
을사늑약
1904년 2월 8일 러일전쟁 발발
1905년 7월 27일 카츠라 태프트 밀약
8월 12일 2차 영일동맹 체결
9월 5일 러일간의 포츠머스 조약 체결
11월 9일 이토 히로부미의 고종 압박
11월 15일 재 압박
11월 17일 대신들을 일본 공사관으로 불러들여 협약승인 꾀하나 실패.
11월 17일 중명전 포위하고 계속 강요 결국 을사늑약 체결
1906년 순종의 가례
1925년 화재
1960년대 李方子 등에게 불하
정동극장등이 소유하다 국민신탁운동으로
2006년 9월 문화재청으로 소유권 이전
정동이화여고 심슨기념관
이화여고
1886년 매리 스크랜턴에 의해 개교
1887년 고종이 '이화학당' 학교명 하사
1988. 이화학원에서 예원학교와 서울예고 분리
심슨 기념관
1915년 Sarah J. Simpson이 위탁한 기금으로 건물 건립
한국전쟁중 붕괴
1960년대 복구
남쪽 외관은 원형그대로, 뒷부분은 변형
2002년 2월 28일 등록문화재로 지정
손탁호텔터/이화여고100주년 기념관
Sontag : 프랑스계 독일여성. 1854~1925
1885년 10월 초대 주한 러시아 공사 Waeber따라서 조선에 오다
1909년 까지 머물다.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러시아어에 능통
1894년 12월 17일 이후 정동구락부
배일운동에 미국과 러시아가 협력
을미사변 이후 친미파였던 이완용이 발족
정동구락부의 주요 모임장소중 하나가 손탁호텔이었다.
친러 거청 정책에 기여 - 청나라 배제하고 친러시아 성향
그 공을 인정 받아 1895년 1184평 규모의 대지와 거기에 딸린 한옥을 받다
1898년 3월 16일 한옥을 헐고 방5개의 양옥을 지어주다.
객실 5개로 호텔영업 시작
1902년 10월 2층의 양관으로 신축해서 영빈관을 경영하게 하였다.
1904년 처칠이 하루 묵어가기도 했다고 한다.
1909년 손탁여사, 한국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다.
호텔은 팰리스 호텔의 J 보에르에게 매각
1917년 이화학당에서 호텔건물을 매입해서 학생 기숙사로 사용하였다.
1922년 건물을 철거하고 Frey Hall을 신축
한국전쟁중 소실
1975년 다시 소실되고 방치되었다가
2003년 착공하여 2004년 7월 이화여고 100주년 기념관이 준공
구 러시아 공사관
사적 253호, 1977년 11월 22일 지정
탑부만 현존
르네상스식 건물
1884년 7월 조러 수호통상조약 체결
1885년 10월 비준
1890년까지 건물공사 진행. 3층의 벽돌구조 건물
아관파천이후 조선은 친러정권인 박정양 내각 수립
한국전쟁중 옛 건물 소실
1973년 현재 모습으로 복원
1981년 건물과 주변 조경 재보수ㅜ
1990년 9월 러시아와 UN에서 대사급 외교관계 수립하면서 다시 교류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