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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성적으로 향수와 그리움과 고독의 수필가인 김우종 교수
최원현/수필가·문학평론가
한 해가 저물어가고 있다. 아니 20세기의 해가 저물고 있다. 1999년, 이 해가 가고 나면 우리는 새 천년 곧 2천 년대를 맞이한다. 1천 년대를 온전히 마감하고 2천 년대를 여는 새벽에 문학인인 우리는 어떤 자세로 무엇을 생각해야 할까. 과연 문학은 인간의 역사 속에서 얼마만큼이나 어떤 공헌을 해왔을까?
시간이 가면 무엇이나 잊어지기 마련이지만 그렇게 잊어질 수 있는 삶이라도 문학과 만나면 새롭게 조명되기도 하고, 재창조되기도 하여 새 생명을 얻게 됨으로서 먼 훗날까지 생생하게 남아있을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이야기도 남기고 싶어 하고, 자신이 이 땅에 살았었다는 흔적-역사적 증거-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남기려한다. 문학 또한 이러한 사람들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이어주는 가교로서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다.
1900년대 들어 우리 민족은 유난히 많은 아픔과 고통을 겪었다. 일제 강점기의 36년을 비롯하여 6.25라는 동족상잔과 민주화로 이어지는 변혁 의 회오리 속에서 차마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아픔과 슬픔과 고통을 겪어왔다. 어떻게 사는 것이 사람답게 사는 것이며, 옳게 사는 것이며, 문인답게 사는 것일까. 자신의 생명을 지킨다는 것조차 참으로 힘겨운 시대가 아녔던가 싶다.
이러한 우리 역사의 변혁기에서 문학을 통하여 역사에 동참하고, 그러한 참여문학으로 절망을 초극하는 의지의 인간상을 생산해 내야 한다고 주장한 김우종 교수님, 문학의 사명은 까뮈의 <페스트>, 앙드레 말로의 <정복자>, 헤밍웨이의 <바다와 노인> 그리고 펄벅의 <해일>처럼 그 때 그때 시대와 상황에 따라 그 시대를 사는 삶들에게 필요한 빛이 되어 변화와 선도의 적절한 영향을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그의 목소리는 순수문학이라는 잔잔한 호수에 커다란 물결을 일으켰으며, 문인들의 고요한 가슴들을 깨우는 경종이고도 남았다.
김우종 교수님은 1929년 함북 성진에서 김재환(金在煥)님과 송태순(宋泰淳)님의 7남매 중 3남으로 출생하였으나 바로 황해도로 이주하여 연안의 산양학원과 연백초등학교를 마쳤고, 개성에서 송부중학교 6년을 졸업하였으며, 1950년 서울대 문리대 국문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6.25전쟁으로 육군에 학도병으로 입대했다가 51년 5월 중공군 포로가 되었고, 포격으로 중상을 입어 인민군 야전병원에 입원도 했는데 그 때 탈출 월남하여 미군 포로수용소에 갇혀 있다가 국군에 복귀하는 등 참으로 많은 우여곡절 후에 1955년 제대와 함께 서울대에 복학 입학 8년만인 1958년에 졸업했다.
재학 중인 57년 현대문학에 <隱喩法 論考>와 <李箱論>으로 조연현 선생의 추천을 받아 등단했으나 이듬해인 58년엔 한국일보 신춘문예 평론에도 당선했으며 여원사 편집부 기자생활도 했다.
1958년 유덕임(柳德姙)과 결혼하여 장남 성천, 차남 성보, 장녀 나리 등 2남 1녀를 두고 있다.
진명, 배화, 보성여고의 교사를 거쳐 1962년 충남대학교 강사를 시작으로 조교수, 1967년 경희대학교 조교수로부터 76년까지 교수로 봉직하다가 유신정권에 의해 휴직 및 해직을 당하였으며, 1980년에 덕성여대 국문과 교수가 되어 95년 2월말 정년퇴임을 맞고 현재는 한국대학신문 주필로 계신다.
한국문학가협회상(59). 월탄문학상(69). 서울시문화상(94)을 수상했으며 1969년 제6회와 제7회 목우회 공모전 입선을 비롯 1975년부터 4회의 개인 유화전을 가졌으며, 한국일요화가회 이사 등 화가로서도 확고한 위치를 갖고 있다.
저서로는 1968년 <내일이 오는 길목에서>를 시작으로 1994년까지 수필집만도 34권이나 내셨는데 69년, 78년, 84년, 88년에 각각 3권씩, 72년엔 4권을 내는 등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왕성한 작품 활동과 12권의 학술 저서 및 수많은 논문 외에도 KBS <시민법정> 프로의 변호사, 공개대학 <한국근대문학사조사>, 교육방송의 <고전백선> MC, 그리고 여러 방송 프로에서 (문학해설) 등 명 MC, 명 강의로 많은 시청자를 사로잡는 것을 보듯 교수로, 문인으로, 화가로, 방송인으로 그가 얼마나 삶을 열심히 살아 왔는가를 짐작케 하지 않는가.
그래서일까. 선생님과 마주 앉아 있으면 몇 날이 걸려도 무료하거나 지루하지 않을 것 같다. 독특한 화술로 무궁무진한 지식들이 너무나 쉽고 재미있게 흘러나와 시간 가는 줄을 모르게 하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어린 날부터 자기주장과 목적의식이 아주 강하셨던가 보다.
“중학교 2학년 때 해방을 맞았습니다. 미술반 반장과 싸우고 미술반을 그만 두게 되면서부터 책을 읽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경성으로 책을 사러 다녔는데 책 한 권이라도 더 살려고 경성역전 대합실에서 거지들과 함께 잠을 자면서 여관비를 아껴 책을 사 갖고 내려가곤 했답니다. 그 때부터 계속 책을 모았는데 ‘앙드레 지드‘를 특히 좋아했고, 세계 명작들을 두루 읽었는데 점차 사상전집 등 이론서 쪽으로 취향이 바뀌면서 독서의 폭도 더욱 넓어졌고, 읽은 책들에 대해선 장문의 독후감을 쓰곤 했습니다.“
아마 그 때 쓰신 그러한 장문의 독후감들이 한국 평론계에 우뚝하게 한 필력을 키우게 했던 것이 아닐까.
“ 내가 가장 큰 영향을 받았던 책은 독일 비평가요 사상가인 ‘레싱‘이 쓴 <라오콘>인데 트로이 목마를 전리품으로 가져가려 하자 그러면 안 된다고 말한 예언자 부자(父子)가 천기를 누설한 죄로 거대한 두 마리의 바다뱀에 칭칭 감겨 죽어 가는 모습의 조각품 이름으로 ‘레싱‘은 이 조각과 ‘버질‘의 시를 비교하였는데 너무나 재미가 있었어요. 말하자면 평론인데 아마도 내가 평론을 하게 된 것은 그 영향일 것입니다.“
김 교수님의 부모님은 그 시대에도 연애를 하셨었다고 한다. 원래 신라 경순왕의 패망한 자손들인 설성 김씨로 그들이 주로 많이 살고 있는 개성이 고향인데 연애를 하여 성진으로 도망을 가서 거기서 살림을 차렸고 그곳에서 김 교수님도 태어나신 것인데 부친께선 소설도 써서 남에게 읽어 주는가 하면 만드는 것을 잘하는 말하자면 예술가적 기질이 풍부했던 분으로 김교수님이 그런 아버지의 기질을 이어받으신 것도 같다.
김교수님의 평론에서는 문둥이, 천형수, 기아 훈련 등 참담한 현실적 용어들이 많이 등장하지만 수필은 지극히 서정적이다. 수필집 제목도 내일이 오는 길목에서, 밤이 길어서 남긴 사연, 외롭지 않으려고 써버린 낙서, 소양강에 비내리다, 돌과 속삭인 인생노트, 목마른 별들의 대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이 조용한 시간에, 아픔으로 크는 나무여, 영원의 숲속에 멈추어 서서 등 책 제목만으로도 그냥 가슴으로 젖어드는 것들이듯이 수필의 제목도 누님, 황소, 개미, 우비, 베짱이, 백담사, 고향 등 자연의 향수가 물씬 풍기는 것들이다. 그래서 김우종 교수님의 수필을 두고 정주환 교수는 ‘향수와 그리움의 역정‘이라 했고, 신동한 교수는 ‘윤기가 있고 감성에 넘쳐있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삶은 누구도 겪지 못했을 고통스런 체험들이었다. 과연 이러한 아픈 체험들이 선생님의 문학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그리고 그런 자신만의 독특한 삶의 체험을 문학 속에서 어떻게 표현하려 하셨을까.
“나는 민족의 현실을 남보다 많이 본 경우일 것입니다. 나는 실향민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다 잃고 가난의 고통과 분단국의 고통을 직접 겪고 보았기 때문에 체험과 가까운 글쓰기를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전쟁 전에도 개성 송부중학교 6년동안 뒷산으로 38선이 지나고 있었기 때문에 분단의 현실과 아픔을 늘 느끼고 있었고, 국군에 입대해서는 중공군에 포로가 되어 중공군에도 있었고, 인민군에도 있었고, 탈출 후에는 미군 군사고문단에도 있었으니 미군, 중공군, 인민군, 국군 그러니까 남쪽 북쪽을 모두 다 겪었지요. 남보다 많이 겪었으니 더 많은 증인이 될 수 있고, 체험과 가까운 글쓰기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많은 체험은 문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적합한 기회를 주시는 신의 배려로도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러한 것들은 실제 내 글쓰기에서 많은 도움을 받은 것이 사실입니다, “
선생님은 문학의 현실문제 참여를 주장하셨고 순수문학을 비판하신 대표 주자로 알려져 있다.
“순수문학이란 말은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만주사변 후 프롤레타리아 문학을 탄압케 되면서부터이고, 김환태 평론가가 예술의 순수성에 대하여 순수문학 이론을 정립했다고 할 것입니다. 곧 순수문학의 3대 조건으로 사상성 배제, 목적성 배제, 사회성 배제를 들고 있는데 이것이 김동리의 순수문학으로 이어졌으며, 조연현, 김동리, 서정주 등이 순수문학의 주류를 이루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김우종 교수님은 60년 2월 한국일보에 <문학의 순수성과 이데올로기>로 순수문학을 비판하며 문학의 사회 참여 기능을 주장하기 시작하여 61년 4월 현대문학에 <초토문학의 사상>, 6월 동아일보에 <정의감과 예술성> 등으로 문학의 사회 참여 기능을 계속 주장했다. 63년에는 동아일보에 <파산의 순수문학>으로 순수문학 비판 및 참여 운동을 호소하여 순수파인 이형기(李炯基)와 최초의 순수. 참여 논쟁을 일으키게 되었으며, 김병걸(金炳傑)의 합세하에 65년에는 <순수의 자기 기만> 등으로 참여문학 운동을 계속하다가 66년 참여문학이 범문단적으로 확대되자 후선으로 물러나 집필에만 열중했다. 말하자면 우리 나라에 참여문학의 불씨를 피워낸 장본인인 셈이다. 그렇다고 그의 문학이 모두 순수성을 배제한 참여문학 쪽이라는 것은 아니다. 그는 문학이 절망을 초극하는 의지의 인간상을 그려내야 한다는 강한 사명 의식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선생님은 특별한 역사 변혁의 중심부에서 몸소 겪은 너무나도 많은 사건들이 있으시지만 살아오시며 그 중에서도 특별히 기억되는 행복했던 순간이나 추억되시는 일이 있으실까?
“크게 행복했던 시절은 없는 것 같지만 그래도 맘껏 공부에 시달리지 않고 뛰놀던 초등학교 시절을 들 수 있겠고, 내가 북쪽에 가서 포로생활을 하다가 탈출에 성공한 것도 기뻤지만 어머니 아버지를 찾은 때가 정말 기뻤습니다. 서울에 와서 집에 가봤지만 어디로 가신지 모르겠고, 나는 북쪽으로 갔으니 부모님들도 이미 단념해 버린 상태여서 결국 못 찾고 다시 들어갔다가 휴가를 나와 다시 찾아 나섰는데 다행히 인천에서 찾게 되었어요. 그때 나도 그렇고 아마 부모님도 제일 기쁘셨을 거예요.“
무려 34권의 수필집을 내신 김우종 교수님, 예리한 비평으로 평단을 섭렵하던 선생님의 수필에 대한 생각은 어떠실까. 문학 속에서 수필문학이 차지하는 비중과 수필의 문학성에 대하여 여쭤 보았다.
“ 수필은 교양과 생활문화를 찾고자 하는 욕망만 있으면 쉽게 접근할 수가 있는 만큼 일반 교양 양식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글쓰기를 하고싶은 사람의 접근이 가장 용이하기 때문에 독자라도 접근하기 쉽다는 특성을 지니고 있어서 수필이 문단에서 아무나 할 수 있는 문학으로 오해되어 소외된 듯이 보이지만 사실은 문학의 생활화와 보편화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수필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우리 수필문학이 발전하려면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특히 평론가의 입장에서는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실까?
“ 관동출판사에서 《수필문학》이 나올 때 수필에 대한 비판도 여러 차례 한 적도 있습니다만 수필은 우리 문단에서 타 문학 장르에 비해서 분명히 소외당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종합 문예지의 지면 할애 등만 봐도 수필은 뒤쪽이나 적당히 지면을 할애하는 느낌을 받지요. 그러나 그것은 수필문학의 특성 때문입니다. 수필문학은 붓 나가는 대로 자유롭게 쓰는 글, 시나 소설처럼 전문가적 기법 수련을 안 한다는 것, 누구나 쉽고 자유롭게 쓰는 것이 장점이지만 그것이 단점이 되어 소외되는 운명을 맞게 하는 것입니다.
사실 기법 면에서도 좋은 수필을 쓰려면 소설이나 시를 쓰는 것보다 훨씬 어렵습니다. 그러나 프로 의식을 갖고 기법을 끊임없이 다듬어 가면서 쓰는 어려운 입장을 유지해야 한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누구나 다 참여할 수 있는 문학 장르로 수필은 대단히 중요한 문학 장르이기 때문입니다.
생활문학, 일상과 가까운 문학, 거대한 사명감 없이도 쓸 수 있는 문학으로 대중적일 수 있는 문학이 수필이라면 이 문학은 어떤 시대에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좋은 문학이 됩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엄격한 척도의 기준으로 비판만 한다고 하면 수필을 누가 쓰겠습니까. 본격적으로 문학성을 따지는 사람도 있지만 수필이 문학성보다도 누구도 큰 부담 없이 쓸 수 있는 장르라면 엄격한 잣대를 대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시나 소설은 주제를 담고 역사적 사회적인 사명감을 갖고 문학 행위를 하지만 수필은 그런 거창한 의식은 오히려 다독여 가며 좀 가벼운 마음으로 쓰게 되는 것이 수필의 장점이므로 어쩌다 비판의 때를 만나도 그 칼날을 무디게 만들어 독한 데를 피하는 것이 특성입니다. 수필이 이러한 특성의 문학이라면 수필평론도 문학적 사명이나 민족이나 역사성을 논할 중대성을 갖지 않기 때문에 사회적 비중과 역할의 관심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상화나 윤동주의 시를 이야기 할 때는 민족의식을 논하게 되듯이 시나 소설을 평할 때는 날카로운 칼을 갖다 대게 되지만 수필은 그렇지 않습니다. 또 하나 어려운 것은 수필은 이론적 정리가 잘 안되어 있어서 평론이 어려운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수필문학은 영원히 생활문학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아닐까요?
“ 그렇지 않습니다. 90년대에 들어서 80년대의 강력한 사회적 이슈가 사라지면서 우리들의 관심은 모호한 방향으로 방황을 하게 됩니다. 책이 잘 안 읽히는 것도 그런 연유에서일 것입니다. 절규해야 될 대상이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서 문학에 위기가 왔습니다. 몇 몇 색다른 것만 관심을 일으켜 베스트셀러가 될 뿐 책을 읽지 않게 되는 위기가 왔습니다. 그러나 수필문학은 날이 가면 갈수록 더욱 풍요로워지고 있습니다. 70년대엔 소설이나 시가 호황을 이루었지만 80년대 후반 90년대에 들면서 수필은 독자도 많아지고 수필가도 많아지면서 점차 수필이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등 점점 지위를 확보해 가게 됩니다. 시나 소설은 좀 무겁지만 수필은 가볍게 대할 수 있고, 15매 정도의 분량이 적당하기도 하고 어려워서 못 읽는 경우도 거의 없고, 수필은 온갖 계층의 사람이 다 쓰기 때문에 읽으면 지식과 교양도 많이 얻을 수 있습니다.
수필은 일반 대중들에게 교양을 위한 양식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또 글쓰기를 하고 싶은 사람이 가장 쉽게 접근하기 쉬워서 수필을 찾는 사람이 많고, 해서 수필가가 많아지고 독자들이 접근하기 쉽고 하니 수필은 스타디 베스트셀러로 위치를 차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나 소설은 유행처럼 순간적 베스트가 되어 사라지고 말지만 수필은 꾸준히 독자와 함께 남아있을 수 있기 때문에 수필이 소외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오늘날의 상업지 물결 속에서도 꾸준히 살아남아 마음의 양식을 줄 수 있는 것은 수필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교수님께서는 어떤 수필이 좋은 수필이라고 생각 하시는가요.
“ 수필이 문학인 이상 독자의 감동이 커야 합니다. 감동은 예술적인 특성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예술적인 특성은 그 수필이 갖고 있는 문체의 특성, 기법, 특히 상상력에서 만들어집니다. 이 상상력은 작가가 상상해서 소설가처럼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에게 상상 작용을 일으킬 수 있는 장치 곧 미의 본질이라 할 것입니다.
프랑스의 ‘바슐라르‘ 같은 철학자가 미의 본질을 이야기했지만 우리가 ‘빗물‘ 하면 빗물이 지닌 생명감, 슬픔 등의 의미로 만국의 공통언어가 되어 있고, 가을의 나뭇잎은 인생의 죽음, 이별 같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곧 직접적 설명보다 그런 소재를 통해 독자가 자연적으로 인생의 슬픔이나 이별이나 만남의 기쁨 같은 인생의 맛을 느낄 수 있게 만들어주면 감동이 더 커지게 됩니다. 이처럼 직접적 설명으로 문장 자체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가 상상 작용을 일으킬 수 있어야 감동이 커지는 법입니다. 피천득의 시골 한약방 같은 수필을 보면 비싸고 좋은 약재가 없어 처방전만 해주는 시골 한약방에서 좋은 의사이긴 하지만 가난하기 때문에 약을 지어주지 못하는 것이 전쟁 속에서 책을 모두 도둑맞아 좋은 논문을 못 쓰게 된 피천득 자신의 슬픔을 시골 한약방 이야기를 함으로서 독자가 상상케 함으로 더 큰 감동을 일으키게 하는데 이것이 수필에서의 미의 본질이 되는 것입니다. 수필은 그런 상상을 인생 전체에서 소재를 얻었을 때 좋은 수필이 됩니다. 그래서 수필은 어려운 것입니다. “
교수님께 국내외 수필작품 가운데서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수필은 어떤 것인지 여쭤 보았다.
“ 외국 것은 별로 권하고 싶지 않습니다. 수필은 생활문학으로 정서와 문화를 중시합니다. ‘수필은 평범 자체‘라고 했듯이 평범한 사물을 소재로 다루고 있습니다. 시나 소설이 놓치고 있는 것에서 수필은 만들어집니다. 정말 하찮은 작은 것들이 소재가 됩니다. 수필은 그 나라의 언어로 표현되는데 외국의 수필도 그 나라 정서와 문화의 산물입니다. 문장의 감각만으로는 좋은 수필이 될 수가 없고, 외국 것을 우리가 이해하기 위해선 먼저 그들과 살아봐야 제대로 그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곧 우리가 우리 글로 쓰는 수필이 우리 정서와 문화에 맞고 우리가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작품들입니다. 나는 윤오영 씨의 수필을 좋아하고, 월북한 화가 김용준, 그리고 평론가로 김동리와 이론 논쟁을 하던 김동석의 수필이 좋은 수필이라 생각합니다.“
어느덧 토요일 오후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교수님께 마지막으로 한국수필문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 한 말씀 부탁 드렸다.
“수필가로서 프로근성을 가져야 합니다. 곧 꾸준히 공부해야 한다는 것인데 무엇보다도 좋은 수필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의 이야기를 많이 듣는 것이 필요합니다. 요령을 몇 가지만 터득하더라도 좋은 수필을 쓸 수 있을 것입니다. 다수의 수필가들이 좋은 수필을 많이 써야 독자로부터 대접도 받고 문단의 위상도 높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아직까지 프로정신이 뚜렷한 것이 시나 소설입니다. 곧 시나 소설 쪽이 공부를 더 많이 한다는 것입니다. 남들보다도 자신을 위해서도 필요한 인생 공부가 될 것이며, 정서와 가치관이 상실되어 가는 이 시대에 좋은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글을 쓰고 글을 읽으면서 자기 정서를 가꿔 나간다면 우리 사회가 이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요즘 신지식인 운동도 돈을 벌 수 있는 것만 강조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문학에서도 가장 문호가 개방되어 있는 것이 수필문학인 만큼 모두 다 받아들이고 모두 다 같이 쓰도록 하고 그 다음에 더 좋은 수필을 쓰도록 하면 되지 않나 생각됩니다.“
교수님과의 대담이 1천 년대를 마감하는 마지막 호를 장식하는 것도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 같다. 문학이 문학 그 자체의 순수성만으로 문학의 사명을 다한다고 할 수 있을까. 문학은 사람의 이야기지만 시대의 산물이지 않던가. 결국 그 시대의 산물인 문학은 그 시대와 후세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고 그것은 삶의 문화를 변화시키는 정도가 아니라 다가올 새 시대를 만들어 내는 큰 힘을 지니고 있다 할 것이다. 수필 또한 어느 한 개인의 체험이 아니라 그 시대를 대표하는 체험으로 감동과 동화와 변화를 수반한다. 따라서 수필이 이러한 독자의 기대를 실망시키지 않을 때 그 위상도 높아질 수 있으리라. 어쩌면 김우종 교수님은 이 시대 문학의 마지막 인디안 같은 존재가 아닐까싶다.
‘이미 오래 전에 잊어버렸던 그를 위하여 당신은 그림엽서 한 장을 띄우시지 않으려나요? 그들이 당신을 생각하듯이 당신도 그들을 위하여 그리고 우리 모두의 내일의 기쁨을 약속해 주기 위하여 이 조용한 시간에 편지 한 장을 쓰세요.‘(수필 ’조용한 시간에‘ 끝 부분)
헤어져 나오는 나의 귓가엔 도란도란 말씀하시던 목소리가 여전히 감돌고 있다. 위트와 패러독스가 넘치는 문장만큼 선생님의 남은 삶도 즐겁고 기쁨 넘치는 삶이되시기를 빌어본다. 누가 그랬을까. 아파트 옆 나무 가지에 실 끊긴 연 하나가 걸려 팽글팽글 돌고 있다. 선생님도 저 연을 보셨을까?
격월간《수필과비평》1999년 11.12월호/원로 수필가 초대석/
《문학에게 길을 묻다》(최원현. 수필과비평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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