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시보에 답함
▣ 작품 내용
학문은 오로지 벗 사이에서 갈고 닦는 힘의 의지하는 것인데, 우리 마을이
선비로서 뜻있는 사람들은 대개가 다른 일 때문에 이 일에 전심(傳心)하지 못하여, 경계되고 유익됨이 자못 적습니다. 산중에 홀로
앉아 있으려니까 날로 무디어지고 침체되는 것 같아 걱정입니다. 전날 서울에서 함께 만나 즐기던 즐거움을 매양 생각하지만, 또다시
바른 사람을 만나지 못함은 나의 경우 역시 주신 편지에 말한 것과 같습니다. ▶ 학문을 함께 닦을 벗을 찾지 못해 걱정임
특히 이제까지 강학(講學)한 것은 거의가 망연(茫然)하고 한만(汗漫)한 지경에 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요즈음 회암(晦菴)의 글을
읽으며 친절한 뜻을 엿보고서야, 비로소 전날의 그것이 잘못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 전날의 강학이 잘못된 것이었음
대체로 이(理)는 일상 생활 속 어디에나 있는 것입니다. 동작 중에도, 쉬는 중에도 있고, 말하거나 묵묵히 있거나, 이륜(彛倫)에
따라 응접(應接)하는 경우도, 있습니다.평범하고 실제적이며, 명백하게 있습니다. 세미(細微)한 곡절(曲折)의 경우에도,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그렇지 않은 게 없습니다. 눈앞에 드러나 있으면서 또한 아무 조짐(兆朕)도 없는 데로 묘하게 들어갑니다. 처음
배우는 사람들은 이것을 버리고 성급히 고원(高遠) 심대(深大)한 것을 일삼아, 지름길에서 재빨리 손쉽게 얻으려 하지만, 이는
자공(子貢)도 하지 못한 것인데 우리가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한갖 수고로움만 있을뿐 실행하는데 있어서는 망연히 의거할
실속이 없습니다. 연평(延平)이 "이 도리는 순전히 일상 생활 속에 있다."고 하였는데, 뜻 깊은 말입니다. ▶ '이(理)'는
생활의 어디에나 있음
▣ 감상 길라잡이
<1>
이 편지는 조선 명종 13년, 무오년(1588년)에 퇴계가 시보 남언경에게 보낸 서신의 별지로서 학문에 임하는 퇴계의 성실한 태도가 드러나 있다.
서경덕의 제자였던 남언경은 스승의 의견에 동조하여 우주의 본지로가 현상을 모두 기(氣)로서 설명, 기원 영원성을 주장하고,
이(理)는 기를 초월할 수도 없고 초월의 실재성도 인정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래서 기는 유한하고 이는 무한하다는 이황의 주장을
반박하게 된다. 서경덕과 남언경의 주장을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이라고 한다면, 이황의 주장은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이다.
그들의 상호 학문적 논쟁은 당연한 일로써 이 두 사람은 편지를 통해 학문에 대한 토론과 논쟁을 벌였다.
이 편지는 학문적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에게 보낸 것이다. 그러나 그 학문적 토론과 대립도 인간 관계의 유지를 위한 인정을 바탕으로 해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편지는 두사람간의 대화로서 떨어져 있는 사람에게 안부를 묻고. 자신의 근황을 알리고 사연을 말하는 기능을 한다. 단순히 정보
전달뿐이 아니라 인간관계의 유지의 기능을 지닌다. 즉, 편지 속에는 편지를 쓰는 사람의 감정 인품, 인정이 포함되어 드러나게
된다. 이 작품은 사상을 달리하는 두 학자간에 오간 편지로 학문적인 논쟁은 당연한 일이었는데 이 두사람은 편지를 통해 학문에 대하
토론과 논쟁을 벌이지만 자신의 품격과 감정을 적절히 다뤄 학문과 인간 사이의 융화의 경지를 제시한다.
▣ 핵심사항
▶ 작가 : 이황
▶ 연대 : 명종 때
▶ 내용 : 이(理)에 대한 의견
▶ 제재 : 이(理)
▶ 주제 : 이(理)의 실재
▶ 출전 : '자성록(自省錄)'
▣ 어휘 및 구절풀이
#.
· 경계(警戒)되고 : 나쁜 일이나 잘못된 일을 아니 하게 되고. · 강학(講學) : 학문을 연구하고 닦음. ·
망연(茫然)하고 : 멀고 아득하며. · 한만(汗漫) : 등한히 함. · 회암(晦菴) : 중국 송(宋)나라의 철학을 집대성한
유학자 주희(朱熹;1130∼1200)의 호. 후대 사람들이 주자(朱子)라 존칭하면서 ?의 학문을 주자학이라고 함. ·
이(理):① 사물 현상이 존재하는 불변의 법칙. ② 중국 철학에서 우주의 본체. 만물을 형성 하는 정신적 시원.'기(氣)'의 상대
개념. · 이륜(彛倫) :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 · 응접(應接) : 어떤 사물에 접촉함. · 세미(細微) :
매우 가늘고 작음. · 곡절(曲折) : 자세한 사연이나 까닭. · 조짐(兆朕) : 어떤 일이 일어날 기미가 보이는 현상. ·
고원(高遠) : 높고 멂. · 자공(子貢) : 춘추 전국시대 위(衛)나라의 유가(儒家). 성은 단목(檀木). 이름은 사(賜).
공자의 제자로서 십철(十哲)의 한 사람. · 망연(茫然)히 : 넓고 멀어서 아득하게. 아무 생각 없이 성하게. ·
의거(依據) : 의지하고 빙자함. · 연평(延平) : 중국 송(宋)의 이동(李洞)의 호. 주희의 선생.
#. 산중에 홀로 ~ 걱정입니다. : 학문이란 서로 토론하고 비판적 자세를 가지고 있을 때 발전할 것일진대, 홀로 공부하다보니 답보 상태에 놓이는 것 같아 걱정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 이 도리는 순전히 ~ 속에 있다. : 일상 생활에서 평범하고 실제적이며 명백하게 드러나는 이를 추구하는 것이 학문의 길임을 가리킨다.
#. 특히 이제까지 강학(講學)한 것은 거의가∼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 특히 이제까지 연구하고 닦은 학문은 거의가 생 활에서 멀리 떨어져 등한히 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 이륜(彛倫)에 따라 응접(應接)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 사람의 도리에 따라 사물을 접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 아무 조짐(兆朕)도 없는 데로 묘하게 들어갑니다. : 어떤 일이 일어날 기미가 없는 데로 묘하게 들어갑니다.
#. 처음 배우는 사람들은∼자공도 하지 못한 것인데 우 리가 할 수 있겠습니까? : 일상 생활에서 평범하고 실제적이며 명백하게 드러나는 이(理)를 말하고 있다.
▣ 참고 자료
◇ 이(理)
중국철학, 특히 정주학(程朱學)의 근본개념. 이(理)의 형이상학적 개념화는 당대(唐代)에서의 화엄교리(華嚴敎理)의
사리무애법계관(事理無法界觀)의 영향도 있으나, 전통적인 유교도덕의 보편성과 절대성을 형이상학적으로 뿌리내리게 하려는 요청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이렇게 하여 또한 인륜을 부정하는 도불(道佛) 두 교(敎)를 비판할 수 있는 원리를 발견했던 것이다.
정이(程)는 만유(萬有)를 생성케 하는 음양 이기(二氣)의 작용 속에 그 작용의 원인으로서의 도(道), 즉 이를 보고, 또한 이
이(理)가 일체의 차별적 사상(事象)으로 하여금 차별적 사상이게 하는 근거라고 생각하였다. 이 이(理)는 원래 기(氣)나 차별적
사상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형이상적·초감각적이기는 하지만 차별적 사상에 내재현시(內在顯示)하여, 보편적
일자(一者)이면서 자신을 무한히 특수화한다. 그래서 만물에는 일리가 있는 동시에 일물(一物)에 일리(一理)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나중에 주자는 정이를 계승하여 기(氣)에 대한 이의 형이상적 존재성을 더욱 명확히 하여 ‘소이연(所以然)’과
‘소당연(所當然)’으로 분석하고, 이의 존재론적 성격과 도덕적·법칙적 성격을 밝혔다. 육상산(陸象山)은 우주에 충색(充塞)하는
것은 일리뿐이라고 주장하고 이일원론(理一元論)을 내세웠으며, 명대(明代)의 왕양명(王陽明)은 기에 중점을 두고 이를 기가 구비하고
있는 조리(條理)라고 보았다. 또한 정주학에서는 ‘물(物)에 대하여 이를 구명(究明)하는 것’이 특히 중요한 의의를 가졌다.
◇ 기(氣)
만물 또는 우주를 구성하는 기본 요소로 물질의 근원 및 본질. 중국철학 용어로 모든 존재현상은 기의 취산(聚散), 즉 기가
모이고 흩어지는 데 따라 생겨나고 없어지는 것이며 따라서 생명 및 생명의 근원으로 보기도 한다. 원래는 호흡을 하는 숨[息],
공기가 움직이는 바람[風]을 뜻하는 가벼운 의미에서 시작하였으나 도가(道家)인 노자·장자가 우주의 생성 변화를 기의 현상이라고
하는 데서부터 여러 가지 어려운 뜻을 가지는 철학용어로 쓰이게 되었다. 한(漢)시대에는 음양오행(陰陽五行)으로 기의 이론이
복잡하게 전개되면서 우주 자연의 운행 천문 지리, 그리고 양생(養生) 의학 및 길흉 화복과 관련되는 일상생활에까지 기를 적용하여
모든 것을 설명해 나갔다. 송(宋)대에 와서는 유가(儒家)에서 이(理)의 존재를 생각하게 됨으로써 그 이와 대치되는 개념으로 기를
다루어 나간다. 모든 존재의 원인 또는 이치로서 형이상(形而上)의 보편자를 이라 하였고, 기는 형이하(形而下)의 구체적인 개체의
존재현상으로 생각하여 이기(理氣)철학의 중요개념으로 다루었다. 이 이기철학이 한국에 들어와서는 주요 심성론(心性論)으로
전개되는데, 도덕적 근거가 되는 선악(善惡)의 문제를 마음속의 성정(性情)에서 찾고 있어 이와 기를 주로 가치론적으로 다루는 것이
그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사칠(四七)논변과 인물성논쟁(人物性論爭)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대체로
성(性)을 이, 정(情)을 기로 보는 데 그치고 있으나 한국철학에서는 성론(性論)을 다시 이기문제로, 그리고 정론(情論) 또한
이기와 관련하여 문제삼으면서 선악 및 모든 가치(도덕적 가치)의 근거를 마련하려는 데서 이와 기를 가치론적으로 보려는 특색이
있다. 이는 선(善)의 근거, 그리고 기는 악(惡)의 근거로 삼았다고 하겠으나 이는 언제나 선한 존재요 기는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니라고 하는가 하면, 선과 악을 함께 하는 것이라고도 하여 어려운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의 선도 기를 통해서만
구현되는 것이므로 선과 악이 모두 구체적 현실로 드러나는 것은 기라고 보고 가장 실질적인 요소로 문제삼는다. 그러므로 실질적인
것에서 진리를 찾아 들어가는 조선 후기의 실학(實學)은 바로 이 기에 바탕을 두고 일어난 것이다. 그 밖에 한국에서 가지는
일반적인 기의 의미는 “이 산세(山勢)는 기가 세다”라고 할 때와 같은 형세·기운·조짐, 그리고 양생(養生)과 관련하여 신체상의
생명력·힘·정기 및 생체에너지 등의 뜻으로도 쓰인다.
◇ 남언경(南彦經/?~?) :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
의령(宜寧). 자 시보(時甫). 호 동강(東岡). 서경덕(徐敬德)의 문인. 1566년(명종 21)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지평현감(砥平縣監)에 기용되고, 73년(선조 6) 양주목사(楊州牧使)를 지냈다. 지평(持平)·장령(掌令)을 거쳐 전주부윤이
되었다가, 89년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으로 탄핵받아 파직되었다. 92년 여주목사(驪州牧使)에 다시 기용되어, 이듬해
공조참의(工曹參議)를 역임하였다. 이요(李瑤)와 함께 조선 최초의 양명학자(陽明學者)로서 이황(李滉)을 비판했다는 주자학파의
탄핵으로 삭탈관직되었다. 양근(楊根)의 미원서원(迷源書院)에 배향되었다.
◇ 이황(李滉/1501~1570) : 조선
중기의 학자·문신. 본관 진보(眞寶). 초명 서홍(瑞鴻). 자 경호(景浩). 초자 계호(季浩). 호
퇴계(退溪)·도옹(陶翁)·퇴도(退陶)·청량산인(淸凉山人). 시호 문순(文純). 예안(禮安) 출생. 12세 때 숙부
이우(李%)에게서 학문을 배우다가 1523년(중종 18) 성균관(成均館)에 입학, 28년 진사가 되고 34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부정자(副正子)·박사(博士)·호조좌랑(戶曹佐郞) 등을 거쳐 39년 수찬(修撰)·정언(正言) 등을 거쳐
형조좌랑으로서 승문원교리(承文院校理)를 겸직하였다. 42년 검상(檢詳)으로 충청도 암행어사로 나갔다가 사인(舍人)으로
문학(文學)·교감(校勘) 등을 겸직, 장령(掌令)을 거쳐 이듬해 대사성(大司成)이 되었다.
45년(명종 즉위)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이기(李)에 의해 삭직되었다가 이어 사복시정(司僕寺正)이 되고 응교(應敎) 등의 벼슬을 거쳐 52년
대사성에 재임, 54년 형조·병조의 참의에 이어 56년 부제학, 2년 후 공조참판이 되었다. 66년 공조판서에 오르고 이어
예조판서, 68년(선조 1) 우찬성을 거쳐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을 지내고 이듬해 고향에 은퇴, 학문과 교육에 전심하였다.
이언적(李彦迪)의 주리설(主理說)을 계승, 주자(朱子)의 주장을 따라 우주의 현상을 이(理)·기(氣) 이원(二元)으로써 설명,
이와 기는 서로 다르면서 동시에 상호 의존관계에 있어서, 이는 기를 움직이게 하는 근본 법칙을 의미하고 기는 형질을 갖춘
형이하적(形而下的) 존재로서 이의 법칙을 따라 구상화(具象化)되는 것이라고 하여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주장하면서도 이를 보다
근원적으로 보아 주자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발전시켰다.
그는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사상의 핵심으로 하는데, 즉
이가 발하여 기가 이에 따르는 것은 4단(端)이며 기가 발하여 이가 기를 타[乘]는 것은 7정(情)이라고 주장하였다.
사단칠정(四端七情)을 주제로 한 기대승(奇大升)과의 8년에 걸친 논쟁은 사칠분이기여부론(四七分理氣與否論)의 발단이 되었고 인간의
존재와 본질도 행동적인 면에서보다는 이념적인 면에서 추구하며, 인간의 순수이성(純粹理性)은 절대선(絶對善)이며 여기에 따른 것을
최고의 덕(德)으로 보았다. 그의 학풍은 뒤에 그의 문하생인 유성룡(柳成龍)·김성일(金誠一)·정구(鄭逑) 등에게 계승되어
영남학파(嶺南學派)를 이루었고, 이이(李珥)의 제자들로 이루어진 기호학파(畿湖學派)와 대립, 동서 당쟁은 이 두 학파의 대립과도
관련되었으며 그의 학설은 임진왜란 후 일본에 소개되어 그곳 유학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스스로 도산서원(陶山書院)을
창설, 후진 양성과 학문 연구에 힘썼고 현실생활과 학문의 세계를 구분하여 끝까지 학자의 태도로 일관했다. 중종·명종·선조의 지극한
존경을 받았으며 시문은 물론 글씨에도 뛰어났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묘 및 선조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단양(丹陽)의
단암서원(丹巖書院), 괴산의 화암서원(華巖書院), 예안의 도산서원 등 전국의 수십 개 서원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퇴계전서(退溪全書):修正天命圖說·聖學十圖·自省錄·朱書記疑·心經釋疑·宋季之明理學通錄·古鏡重磨方·朱子書節要·理學通錄·啓蒙傳疑·經書釋義·喪禮問答·戊辰封事·退溪書節要·四七續編》이
있고 작품으로는 시조에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 글씨에 《퇴계필적(退溪筆迹)》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