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붕래 선생님 글방 펌]
1.黃帝와 皇帝
황제는 '黃帝'라고 쓰는 '고유명사'입니다.
'皇帝'는 진시황이 三皇五帝의 '황'과 '제'를 따다 붙인 '보통명사'입니다.
황제(黃帝)는 수구(壽丘-산동성 곡부)에서 태어났지만
희수(姬水-섬서성 함양시 무공현)에서 자랐으므로 성이 '희(姬 =公孫)씨가 되고
헌원의 언덕(하남성 신정시)에서 살아 이름을 '헌원(軒轅)'이라 했습니다.
일설에는 수레를 발명하여 헌원이라 했다고도 합니다(수레 헌, 끌채 원).
황제는 4개의 얼굴을 하고 중앙에 앉아 동서남북을 다 살피고 춘하추동 4계절을 관장했다고 합니다.
오행으로 볼 때 중앙은 토덕(土德)이고 색깔은 황색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황제라 칭했다고도 하고,
황룡이 나타나 상서로운 조짐을 보여서 황제라 칭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토지신 후토(后土)가 늘 그를 보좌 합니다.
부친은 유웅국의 추장 소전(有熊國 少典)이고
어머니 유교씨(有嬌氏 = 부보附寶)는 큰 번개가 북두칠성(樞星)을 에워싸는 것을 보고
감응을 받아 잉태하여 24개월 만에 황제를 출산 했습니다.
그래서 황제는 천둥과 번개를 관장하는 신이기도 합니다.
이 모든 이야기들이 올림프스산 상의 그리스 신화나 다르지 않은 허황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사기> '오제본기'에는
'황제에게는 아들 25 명이 있었는데 스스로 성씨를 세운 자가 14 명이었다.
큰아들은 현효(玄囂) 즉 청양(靑陽)으로서 그는 강수(江水=하남성 안양시)의 제후가 되었다.
둘째는 창의(昌意)라고 했는데, 그의 아들이 황제의 제위를 이은 전욱(顚頊)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2. 황제고리
하남성의 성도(省都)인 정주(鄭州)에서 버스를 타고 남쪽으로 1시간 거리에 신정(新鄭) 마을이 있습니다.
한국에서 간다면 '정주국제공항'에서는 택시로 30분 거리입니다.
시외버스 운전기사가 신정시(新鄭市) 황제릉 입구라 해서 내리기는 했는데
아무리 육감을 총 동원해도 근처에는 '헌원지구(軒轅之丘)'라 부를만한 산도 언덕도 없는 허허벌판 평지였습니다.
오월 말인데도 한낮의 열기는 그대로 삼복인 신작로 길을 땀 흘리며 한참 걸으니
길이 구부러지면서 육중한 사당의 입구가 보였습니다.
원래 명당이란 입구에 다다를 때까지 그 형상이 쉽게 보이지 않는 법이라는 말이 사실인 것 같습니다.
황제 사당은 온 천지가 황금빛으로 꾸며져 있었습니다.
청명(淸明) 절기 제사를 끝낸 조형물들이 아직 치워지지 않고 그대로 있어서
더욱 그들의 지극한 조상 숭배사상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들어서는 입구부터 다른 능과는 구조가 달라 정문을 없애고
단지 좌우로 고루(鼓樓)와 종루(鐘樓)가 서 있는 중앙에 통도가 시원히 뚫려 있었는데
시조 할아버지의 능답게 입장료도 받지 않았습니다.
황제 사당 앞에는 '중화 성씨 광장'이 있는데
여기에는 3천여 개의 성씨가 빼곡히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 옆으로는 '성씨 나무'라 하여 가지가 여럿으로 뻗어 나가고
잎이 무성한 나무가 조각된 동판(銅版)이 있는데 그 중심 줄기에 '황제(姬)'라 쓰여 있고
옆 가지로 '신농(姜)' 치우, '소호(己)' 등의 이름을 쓴 가지가 있었습니다.
모든 성씨의 기원이 황제라는 뜻입니다.
염황(炎黃)의 자손이라 하나 큰 줄기는 황제이고,
혹은 화하족이라 하니, 하(夏) 나라를 세운 우왕(禹王)도 황제의 자손입니다.
염황 이전의 복희의 성씨는 풍(風)씨입니다.
그 옆에 있는 황제 보정(寶鼎)은 24톤이나 되는 매머드 급이었습니다.
보정에 조각된 9 마리 용은 중국 구주(九州)를 뜻하고
받침 다리 역할을 하는 세 마리 곰은 황제가 유웅국 출신이라는 상징입니다. 황
제는 우리의 단군과 동일한 곰 토템입니다.
황금 보정의 다리인 곰 한 마리는 성인의 두 배나 되는 키와 풍채였습니다.
수백 개의 황제 깃발이 펄럭이는 사당의 신도(神道)가 끝나는 지점에 다리 셋이 경사를 이루고 나란히 나타납니다.
헌원교 혹은 중화제일교라고도 하고 아래 흐르는 물을 희수(姬水)라 부르기도 한답니다.
궁궐 앞을 흐르는 금천(禁川)인 셈입니다.
이 헌원교를 지나면 '황제고리'란 현판을 단 황제사당의 본전이 나타납니다.
그 안 에는 비단 휘장에 둘러싸인 검소한 황제상이 모셔져 있습니다.
그 머리 위에는 인문초조(人文初祖)라는 현판이 달려 있습니다.
그 뒤로 황제의 두 부인, 선잠 누조(先蠶嫘祖)와 선직 막모(先織幙母)가 모셔져 있습니다.
제1부인 누조는 최초로 누에를 길렀기 때문에 '선잠낭랑'이라고도 하고,
제2부인 막모는 직조기를 만들어서 '선직낭랑'이라고도 합니다.
신농씨가 먹거리를 해결했다면 황제 때에는 입을 것이 해결될 차례입니다.
이것이 역사의 진화 단계겠지요.
우리나라에도 서울 성북구 성북동에 '선잠원'이 있습니다.
임금이 신설동 '선농당'에서 '친경'을 했던 것처럼
왕비는 이곳 성북동에 와서 누에에게 뽕을 주며 풍년을 기원했습니다.
이 황제 본전을 지나면 다시 넓은 광장이 나타나는데
황금색 천을 감싸다시피 가지에 늘어뜨린 500년 묵었다는 대추나무도 보입니다.
이 대추는 이곳 신정시의 대표 과실이기도 한데 원래 대추란 것이 동양 문명권에서는 종족의 근원을 나타냅니다.
우리의 제사상에도 '조율이시(棗栗梨柹)라 하여 대추를 첫 번째로 올리고 있습니다.
씨가 하나라 하여 제왕의 상징으로 쓰이기도 합니다. 중국 대추는 우리나라 살구만큼 크고 답니다.
광장 북단에 산같이 세워진 황제의 좌상이 주변을 압도합니다.
그 뒤로는 압축된 시조산(始祖山)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배조대전(拜祖大殿)이라 하여 해마다 이 앞에서 큰 제례를 올리는데
제상에는 커다란 제기에 오곡이 가지런히 담겨 있었습니다.
황제는 오곡을 수확한 임금이기도 합니다.
황제 좌상이 뒤에는 황제고리 기념관이 있습니다.
황제 헌원은 중원에 진출한 뒤,
염제(炎帝) 신농씨와 연합하여 강대한 치우(蚩尤 - 구려족(九黎族)의 수령)를 황하지역에서 장강 남쪽까지 물리쳤고,
다시 세력이 약해진 염제(炎帝)와 판천의 싸움에서 이겨
최초로 중화민족을 통일하는 과정이 그림으로 그려져 있고,
그 때 사용하던 무기류도 전시되어 있습니다.
염제와는 파천(阪泉)에서 3회, 치우와는 탁록(涿鹿, 하북성 장가구시 탁록현) 에서 74회 싸웠다고 하는데
이때 사용한 칼과 지남차도 유물로 전시되어 있습니다.
하기야 황제로부터 많은 세월이 흘러 은나라에 와서야 청동기가 열리지만
사마천의 <사기> 이래 많은 책에는 치우가 철의 이마를 했고
황제가 지남차를 발명했다고 사실처럼 이야기합니다.
진위서 논란이 있는 <죽서기년(竹書紀年)>이나 <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에 의하면
황제는 기원전 2699- 2598년까지 100년 동안 재위에 올라 있었다 합니다.
황제와 싸운 치우에 대해 우리나라 <환단고기> 같은 책에서는
단군 왕조인 고조선 이전의 베달국(신시)의 임금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실 여부를 떠나서 단군보다 400년 이전의 황제와 동시대 인물인 치우는
한국인에게는 수호신으로 확실하게 자리 잡아가고 있습니다.
경주 안압지에서 출토된 '귀면기와(鬼面瓦)'에서부터
조선 왕궁에 보이는 치우상에 이르기까지
21세기 와서는 축구 응원단의 붉은 악마 또한 치우 상징인 것은 분명합니다.
3. 황제보정(黃帝寶鼎)
황제의 유적지는 중국 곳곳에 많이 흩어져 있지만 그 중에 다음 네 곳이 유명합니다.
앞서 이야기 한 하남성 신정시의 '황제고리',
무덤이 있는 섬서성 연안시 황릉현 '교산(矯山)',
그리고 하남성 삼문협 영보<靈寶)시 형산(荊山)의 '황제주정원(黃帝鑄鼎原)',
마지막으로 황제의 도읍지로도 손꼽히는 탁록((涿鹿)현의 '중화삼조당'입니다.
물론 정주의 황하유람구에 조성된 100m가 넘는 '염황상(炎'黃象)도 새로운 눈길을 끌기 시작했고요.
형산의 주정원은 황제가 보정(寶鼎)을 완성한 곳입니다.
≪사기(史記)≫ 「봉선서(封禪書)」에 의하면
황제는 수양산(首陽山)의 구리를 캐다가 하남성 영보(靈寶)시 형산(荊山)에서 보정(寶鼎)을 주조하였는데
보정이 완성되자 하늘에서 긴 턱 수염이 달린 한 마리 용이 내려왔다고 합니다.
그는 70여 명의 후궁, 신하와 함께 그 용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는데
여러 신하들은 그와 함께 승천하려고 필사적으로 용의 수염을 잡아당기는 바람에
수염과 황제의 활이 떨어져 호수가 생겼습니다.
이 지역 사람들은 이를 정호(鼎湖)라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교산에 있는 황제능은 황제의 시신이 없는 의관총인 셈입니다.
역대 제왕들은 권력의 상징으로 보정을 주조했는데,
복희씨는 천하를 통일하고 신정(神鼎)을 하나 만들었습니다.
하나란 통일의 의미이고 신정은 천지만물의 귀결이라는 뜻입니다.
이를 이어받아 황제는 보정을 세 개 만들어 천지인을 형상화 했는데
형산 황제의 무덤 앞에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크기는 한길 석자 로 쌀 열섬들이 넓이며 둘레에는 응룡(鷹龍)을 조각하였습니다.
그 이후에도 하 우왕은 구주의 금속을 모아 9개의 정을 만들었고
진시황은 천하의 병기를 모아 녹여 큰 보정 아홉을 만들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 황제 보정이 있는 하남성 삼문협시(三門峽市)는
황하(黃河)를 끼고 그 유명한 천혜의 요지 함곡관(函谷關)이 있는 곳입니다.
만리장성의 동단은 하북성의 진황도시, 산해관(山海關)이고,
서쪽 끝은 감숙성 주천(酒泉)시에 있는 가욕관(嘉峪關)입니다.
그 만리장성 내부에 위치한 천혜의 요새가 하남성 함곡관입니다.
함곡관에 얽힌 고사는 수많은 전쟁의 기록 말고도
맹상군(孟嘗君)의 계명구도(鷄鳴狗盜)가 있는가 하면,
노자(老子)가 이곳을 지나다 문지기의 간절한 소망을 받아 <도덕경(道德經)> 5천자를 써 준 장소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제는 관문으로서의 위용보다는 '도교' 성지 모습이 더욱 지나는 사람의 마음을 휘어잡습니다.
모셔진 노자의 모습도 인상적입니다.
호호백발 노인인데 입술과 혀는 선홍색으로 선명하여 강한 인상을 주었습니다.
함곡관에서 황제보정이 있는 영보(靈寶)시까지 거리가 지도에는 가깝게 나와 있는데
중국 시외버스라는 것이 이리 저리 빙글 빙글 돌아 세 시간 가깝게 걸렸습니다.
영보시에서 황제 보정이 있는 황제 사당까지는 택시를 탔습니다.
택시 기사가 재미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곳 지명이 '잉바오(靈寶)' 인데 한국 대통령 이름이 '밍바오(明博)'이니 둘이 비슷하다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동행 없이 혼자 가는 길이라 모든 것이 낯설었지만 듣고 보니 그럴듯해서 마주 웃어 주었습니다.
이럴 때마다 제가 중국말을 조금만 할 수 있다면 꽤 재미있는 여행을 할 수 있었겠다는 아쉬움을 금하지 못했습니다.
'중화삼조당(中華三祖堂)'은 하북성 장가구(张家口)시 탁록현에 있습니다.
황제를 중앙에 모시고 좌우에 염제 신농과 치우를 모셨는데
그 명칭 '중화삼조당'이 의미하는 바는 많은 상징성이 있습니다.
애당초 화하족(華夏族)의 개념에는 '황제'의 자손이란 뜻이었는데
거기에 염제(炎帝)가 첨가되며 '염황의 자손'이었다가
1997년 중화삼조당을 꾸미면서 중국인의 선조는 황제, 신농, 치우로 다원화된 것입니다.
실로 56개 민족의 다민족국가 다운 발상입니다.
치우는 우리 민족의 제왕으로 야기되기도 하지만 중국 남방민족인 묘족의 추앙을 받기도 하는 우리 할아버지입니다.
제가 대학시절 노계 박인로의 <선상탄(船上嘆)>을 읽으며 혼란스러웠던 부분이 있었습니다.
배를 만든 헌원씨를 원망한다고 하면서 또 황제가 배를 만들었다(黃帝作舟車)니 무슨 말인가?
그 때만해도 참고할만한 책이 쉽지 않았고 인터넷 검색도 없던 시절이라 참으로 답답했습니다.
그러다가 '황제'와 '헌원씨'가 같은 사람이고, '염제'와 '신농씨' 또한 같은 이름인 줄 알고
혼자 씁쓸히 웃었던 젊은 시절도 있어서,
70의 나이가 돼서 그 '황제'를 찾아 나섰던 감회는 남달랐습니다.
오래 소망하며 기다리면 기회는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것이 삶의 순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황제 고리 사진을 몇 장 인터넷 카페에 올리며 '제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패러디를 써보기도 했습니다.
문득 젊어서 여행하지 않은 사람은 늙어서 이야깃거리가 없다는 명구를 기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