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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그리아니하실지라도 감사의 추석
말씀: 시126:1-6; 단3:16-30
시)1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2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열방 중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저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다 하였도다
3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4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같이 돌리소서
5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6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단3:16)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단3:17)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단3:18)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단3:19) 느부갓네살이 분이 가득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향하여 낯빛을 변하고 명하여 이르되 그 풀무를 뜨겁게 하기를 평일보다 칠 배나 뜨겁게 하라 하고
(단3:20) 군대 중 용사 몇 사람을 명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결박하여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지라 하니
(단3:21) 이 사람들을 고의와 속옷과 겉옷과 별다른 옷을 입은 채 결박하여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질 때에
(단3:22) 왕의 명령이 엄하고 풀무가 심히 뜨거우므로 불꽃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붙든 사람을 태워 죽였고
(단3:23) 이 세 사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결박된 채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떨어졌더라
(단3:24) 때에 느부갓네살 왕이 놀라 급히 일어나서 모사들에게 물어 가로되 우리가 결박하여 불가운데 던진 자는 세 사람이 아니었느냐 그들이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왕이여 옳소이다
(단3:25) 왕이 또 말하여 가로되 내가 보니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상하지도 아니하였고 그 네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 하고
(단3:26) 느부갓네살이 극렬히 타는 풀무 아구 가까이 가서 불러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나와서 이리로 오라 하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불 가운데서 나온지라
(단3:27) 방백과 수령과 도백과 왕의 모사들이 모여 이 사람들을 본즉 불이 능히 그 몸을 해하지 못하였고 머리털도 그슬리지 아니하였고 고의 빛도 변하지 아니하였고 불 탄 냄새도 없었더라
(단3:28) 느부갓네살이 말하여 가로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그가 그 사자를 보내사 자기를 의뢰하고 그 몸을 버려서 왕의 명을 거역하고 그 하나님 밖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에게 절하지 아니한 종들을 구원하셨도다
(단3:29) 그러므로 내가 이제 조서를 내리노니 각 백성과 각 나라와 각 방언하는 자가 무릇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께 설만히 말하거든 그 몸을 쪼개고 그 집으로 거름터를 삼을지니 이는 이같이 사람을 구원할 다른 신이 없음이니라 하고
(단3:30) 왕이 드디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바벨론 도에서 더욱 높이니라
서론>
추석연휴가 시작되었습니다. 추석은 민족의 가장 큰 명절로 시기적으로도 가장 아름다운 계절입니다. 하늘은 청명하고 바람은 서늘하며 들녘엔 오곡백 과가 넘실댑니다. 그러므로 모든 백성들은 고향이나 식구들을 찾아가 이날을 즐깁니다. 올해도 수천 만 명의 민족의 대이동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올해는
추석연휴가 주일까지를 포함해서 9일이 되기 때문에 고향과 외국여행을 향해 떠난 차량들이 고속도로를 메우고 하늘을 포장하고 있습니다.
우리 무속신화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해도 달도 없는 까막나라 임금님이 나라 안을 밝히고자 사나운 개로 하여금 하늘나라에 가서 해와 달을 훔쳐오도록시켰습니다. 가서 해를 무니 너무 뜨겁고 달을 무니 너무 차가워 물어 오지 못했습니다. 까막나라 임금은 포기하지를 않고 기회만 있으면 개를 시켜 해와 달을 물어오도록 하는데 그 개에 물렸을때 물린 부위만큼이 일식과 월식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런 중에 까막나라 임금은 연중 가장 밝고 둥근 중추날 밤의 달을 물어오도록 시켰답니다.
해를 찬양하고 숭앙하는 문화권을 아폴로 문화권이라 하고 달을 찬양하고 친근감을 갖는 문화권을 다이애나 문화권이라 합니다. 고위도지방에 위치하여 태양열에 굶주리는 한대 지방이 대체로 아풀로 문화권에 속합니다. 우리 한국사람은 해보다는 달을 좋아하여 일년 열두 달 명절 아닌 보름날은 없습니다. 그 보름중의 보름이 팔월 보름인 추석입니다. 그런데 추석은 동양 권 중에서도 신라에서 처음 시작되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당나라 때인 서기 838년에 일본 승려 원인이 중국에 가다 표류해 장보고가 경영하는 절간 적산원에서 보호를 받으면서 일기를 써 남겼습니다. 그해 8월 15일자 일기를 옮기면 이렇습니다. [사원에서는 떡과 과일을 차리고 8월 보름을 쇠었다. 이 명절은 아무나 쇠는 것은 아니고 유독 신라만이 쇠는 이유는 신라와 발해가 싸웠을 때 전승을 기원 하는데서 비롯됐다고 노승들이 말했다. 여러 가지 음식과 풍악 가무로 밤을 지새우는데 사흘을 계속하다 멎었다. 이 적산원 에서는 고국을 그리며 이 명절을 즐긴다]고 기록되었습니다. 우리나라 명절이 중국 세시문화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게 상식인데 추석만은 우리가 인근나라에 영향을 미친 명절로 생각됩니다.
우리전래의 전통 8월 보름의 한가위를 신앙인의 자세로 어떻게 맞이해야 할 것인가요?
추석과 추수감사절은 첫 열매에 대한 감사의 뜻을 표현한다는 데의 공통점은 지니고 있습니다. 추석은 햅쌀로 술과 떡을 빚고 갖가지 음식과 오색 과일을 갖추어 조상에 차례(茶禮)를 지내고 산소에 찾아가 성묘를 합니다. 그리고 추수감사절은 첫 수확을 하나님께 감사한 일에서부터 비롯합니다. 한국배달민족은 삼국시대부터 추석을 한가위로 지켰습니다. 한가위에는 새로 익은 곡식과 과일로 제사를 겸하여 감사하는 날로 지켰습니다.
세계교회들의 감사절은 구약시대 이스라엘의 감사절에 연유하면서 자기민족의 역사와 전통과 문화에 알맞게 지킵니다. 따라서 우리도 민족의 역사와 전통과 문화를 배제하는 것보다는 수용하고 접목하여서 성경 적인 관점에서 해석하고 기독교정신에 맞는 명절로 발전시키는 것이 필요합니다(문기태 목사설교에서).
추석 명절은 모두에게 좋은 날입니다. 일년중 모든 것이 풍성해서 좋습니다. 들에 익어가는 곡식이나 과일들, 이 은혜를 돌아보고 감사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어서 좋고 모두가 함께 즐거워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그리고 이만큼 좋은 복을 많이 주신 하나님께서 앞으로 더 큰복을 우리와 우리 자녀손들에게 주실 것을 믿음으로 바라볼 수 있어서 좋은 계절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안타깝게도 올 추석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옛말이 무색 할 정도로 어려운 상황임이 틀림없습니다. 수많은 청년실업과 명퇴 및 파산과 회생의 인생들이 즐비합니다. 수해와 태풍으로 인한 자연재해뿐 아니라 사회환경적 수해를 입은 인재로 갈등하고, 허덕이는 수많은 사람들이 방황하고, 암울하게 추석을 보내야 합니다. 또한 선친의 묘역이 사라져 성묘를 못드리는 분들도 있고, 가족의 사망과 실종으로 가슴 아픈 추석을 보내는 분, 생계 수단을 잃고 자포자기한 분도 주위에 많이 있습니다. 또한 도시의 물가는 살인적으로 치솟아 추석이 무척 부담스러진 사람들이 수없이 많아졌습니다.
이와 같은 때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하나님이 왜 이런 고난을 우리에게, 나에게 허락하셨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성경은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전 7:14상)고 말씀합니다. 또한 추석인데도 눈물짓고 있는 나자신과 우리의 이웃을 돌아 봐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중심으로 특히 나자신은 어떻게 달라진 환경의 추석을 맞이하고 보내야 하는지를 성찰하고 생각해보고, 은혜를 나누도록 합시다.
서론>
1. 심고 거두는 법칙을 생각하는 추석
5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6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금년도 「월간목회」10월호에는, 미국 캘리포니어주 오시언시티에 있는 어느 학교에서 일어난 감동적인 이야기가 소개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초등학 교 5학년 남자아이들 17명이 스님처럼 머리를 빡빡 깎고 등교했습니다. 이런 머리는 폭력 조직 회원들에게나 가끔 있는 일이어서 교사들이 매우 놀랐습 니다. 알고 보았더니 그 학생들의 행동이 너무나 아름다운 것이었습니다. 같은 반에 암에 걸려 방사선 치료를 받느라 머리가 빠진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는 보기 싫은 머리를 벙거지 모자로 가리고 다녔습니다. 이에 17명의 학우들은 이 친구를 위해 다 함께 머리를 깎은 것입니다. 부끄러움을 함께 나누자는 사랑의 배려였습니다. 그 학생들이 기독교인지 모르나 너무나 기독교적인 행동이었습니다. 풍성함의 추석주간에 적절한 예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가을의 산야는 오곡백과가 영글어져가는 계절입니다. 따라서 모든 것이 풍성한 계절입니다. 그러나 밝은 햇볕 저면에는 컴컴한 그늘이 반드시 있습니다. 풍성할 수록 고통받는 이들이 우리 주변에는 많습니다. 자연환경과 물리적 환경은 저와 여러분이 감히 어떻게 해볼 수 없습니다. 단지 자연의 법칙과 물리적 법칙에 순응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극복할 수 있는 법칙이 있습니다. 영의 세계법칙은 믿음을 심는대로 거둘 수 있는 법칙이 적용되기 때문에 저와 여러분은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자연계의 가을과 같이 인생의 가을의 법칙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가장 좋은 열매는 전도의 열매입니다. 온 천하보다 귀한 영혼 추수의 열매를 거두어 주께 드리는 일은 여간 귀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가을은 부지깽이도 덤벙거린다"라는 말이 있듯이 젊은이도 늙은이도 학생들도 가을에는 놀수가 없습니다. 데살로니가전후서 3:10에는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고 하였습니다. 시원한 가을에 부지런히 일을 하지만, 삶의 현장에서 몸부림을 치는대로 풍성한 열매를 맺지못하는 서민 계층의 사회 물리적 환경속에서 허덕이는 사람들이 올 추석에는 유달리 많음을 봅니다. 이럴 때 저와 여러분은 믿음을 심으면 되는 것입니다. 심은대로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가을은 성숙해지는 계절입니다만, 이들에게는 고통이 되고, 위축이 되는 계절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회계층적으로 불리한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기쁨으로 단을 거둘 수 있을까요?
믿음의 수확에는 반드시 법칙이 있습니다. 이 법칙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에게 많은 도전을 줍니다. 세가지 심고 거두는 원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심어야 거둔다는 법칙입니다.
심지 않은데서는 절대로 거둘 수가 없습니다. 반드시 심어야 거두게 되어 있습니다. 심는다는 것은 다른 말로 뿌린다는 것입니다. 시편 126편5절에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고 했습니다. 인생의 수확법칙은 마술(magic)이 아닙니다. 악을 심고 선을 기대해선 안됩니다. 미움을 심고 사랑을 기대해서는 안됩니다.,남을 비판하면서 자신은 칭찬 받기를 기대 해서는 안됩니다.무엇을 심고 무엇을 뿌려야 할까요?
눅8:11절에 보시면 사람들의 마음밭에 뿌려야 할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둘째는 심은 것을 거둔다는 것입니다.
이 진리는 주님 오시는 날까지 변함이 없습니다. 본문 6:8절에 [자기 육체를 위하여 심는자는 육체로부터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둔다]고 했습니다.
욥기서 4장8절은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9가지 열매를 심는다면 분명히 생활속에서 성령의 열매들이 열린 것을 거둘줄 압니다. 그러나 육체의 소욕(갈5:19- 21)을 심는 자는 반드시 썩어 질 것을 거두게 됩니다.
사도바울의 위대한 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의 위대한 점은 그의 훌륭한 지식에 또는 그의 위대한 능력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년이나 밤낮 쉬지않고 눈물로 각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행20:31).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3년이나 에베소 한 교회를 위해서 흘린 그 눈물에 그의 위대한 하나님의 종의 모습이 깃들어 있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의 눈물, 그것은 진실로 그의 능력의 원천이었습니다. 이 눈물은 진실로 하나님을 움직인다고 가르칩니다. 눈물로 심으면 반드시 거두게 됩니다.
셋째는 심은 만큼 거두게 된다는 것입니다.
신앙에는 양도 대단히 중요합니다. 내가 얼마만큼 헌신하는가, 얼마만큼 감사의 생활을 하는가 하는 것도 대단히 중요합니다.
고린도 후서 9장 6절에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두고 적게 심는자는 적게 거둔다]고 했습니다 . 적게 심고, 많이 심고 하는 문제는 절대적인 평가(기준)는 없다고 봅니다. 자신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객관적 평가가 중요하리라 생각됩니다.
저와 여러분은 뿌린 눈물로 심은만큼 거두어야 합니다. 눈물이 많은 사람은 그만큼 솔직하고 깨끗한 사람입니다. 진실의 눈물이 많은 사람을 찾아보기 힘든 시대를 만났습니다. 이 시대는 정말로 깨끗한 눈물을 가진 사람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오늘 본문은 말씀하십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시 126:5-6)
오스왈드 스미스는 그당시에 카나다교회를 말하면서 1년에 한명의 영혼도 예수님께 인도하지 못한 교회가 7,000교회도 넘는다고 보고한 적이 있습니다. 7,000명의 교역자가 설교한 횟수를 따지면 560,000번의 설교를 했을 것입니다...여기엔 확실히 문제가 있습니다.
어떤 교회가 아무리 신령하다고 해도 <일년에 한명도 구원 받은 사람이 없다면> 이것은 어딘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크게 병든것입니다. 마귀에게 속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씨를 뿌려야 합니다. 눈물로 씨를 뿌려야 합니다. 그리고 씨를 뿌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씨를 심으면 단으로 거두게 되어 있습니다.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마 13:8)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잘 되는 가정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반드시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반대로 못되는 가정을 보면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습니다. 또한 잘되는 사람과 못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눈물의 믿음으로 심는 사람은 반드시 풍성한 열매를 맺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축복으로 거두는 심령들의 특징은 눈물로 믿음을 심는 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시는 70년 동안의 바벨론의 포로생활을 청산하고 그리던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되었을 때 감격과 기쁨에 넘쳐서 읊은 노래구절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기나긴 바벨론 포로 생활을 끝내고 그립고 그립던 약속의 땅에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루살렘에 무사히 도착했음이 너무나 감격스럽고 기뻤습니다. 그러나 황량하게 버려진 땅과 우거진 숲과 무너진 성벽. 그리고 황폐한 예루살렘 성, 이러한 예루살렘의 형편도 그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지만 아직도 포로에서 귀환치 못한 바벨론에 남아 있는 동족들을 생각하며 가슴 아파했습니다. 그들은 해방의 기쁨과 절망적인 현실을 동시에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때 하나님은 낙심하는 백성들에게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5절)고 외칠 수 있는 힘을 주셨던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시 126:5-6)
그렇습니다.
풍성한 계절 가을입니다. 벌써 농부들은 가을 들녘에서 많은 열매를 거두어들이고 있습니다. 봄에 열심히 심은 사람은 가을에 거둘 것이 많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도 무엇이든지 심는 대로 거둡니다. 우리나라의 속담에도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진리는 보편적 진리로서 우리 모두에게 해당됩니다. 행복한 추석을 맞는 형제,자매도 있지만, 절망가운데 추석을 고민하는 형제,자매도 많이 있습니다.
눈물의 믿음을 심으셔서 심은대로 축복으로 보상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그리아니하실지라도 감사하는 추석
오늘은 '추수감사주일' 전야주일입니다. 금년에도 우리는 우리의 처소와 일터에서 한해의 농사를 지었습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일터에서.... 생업의 농사, 신앙의 농사... 우리가 뿌리고 가꾼 이상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놀랍게 축복해 주셨습니다.
불황을 만나고 실직을 당하고 파산을 맞은 사람들이 많은데도.... 하나님의 은혜속에 수고의 열매를 거두게 하시며 넘치는 복으로 안겨 주셨습니다.
한 해 동안 여러 가지 사건과 사고도 많았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 이 시간까지 우리를 복되게 하시고 인도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감사하는 자를 사랑하시고, 감사하는 자를 귀히 여기십니다.
시편50:14∼15절에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했습니다.
시편 50:23절에서도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했습니다.
1787년 미국의 초대 대통령이었던 죠지 워싱톤은 11월 26일을 감사절로 선포했으며, 링컨은 11월 마지막 목요일을, 루즈벨트는 셋째주 목요일을 선포했던 것이 오늘의 추수감사절이 되었습니다.
물론 추수감사절은 이미 성경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구약성서에서 추수감사절의 유래를 살펴보면, 이스라엘에는 3대 절기라고 해서 꼭 지켜야 할 절기가 있었는데, 바로.... 무교절, 맥추절, 수장절입니다. 무교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430년이라는 세월동안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다가 나온 날인 유월절을 기념하면서 누룩없는 떡을 급히 먹는 날이기에 무교절이라고 했습니다. 두 번째 절기는, 맥추절로 밀과 보리 농사를 한 후에 그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는 절기입니다. 이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이 베푸셨기 때문임을 고백하고... 따라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신앙의 고백으로 지키는 절기가 맥추절입니다. 세 번째 절기가 수장절인데, 밭에서 거둔 것을 저장하며 감사하는 절기로서 오늘날의 추수감사절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감사'라는 말을 참 많이 사용합니다. 참으로 좋은 말입니다. 이 단어는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고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언어입니다. 그런데 아무나 감사를 말하지 않습니다. 이 마음은 하늘이 주시는 마음입니다. 결코 쉬운 마음이 아닙니다.
로마서 1:21절 말씀에 보면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환경과 여건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신앙의 세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입니다.
왕은 이 세 청년을 진정 사랑하였습니다. 너무 충직스럽고 너무 왕을 잘 받들어 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설득도 하고, 위협도 하면서.... 어찌하든지 이 세 사람이 형식적으로라도 금신상에 절하고 살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왕의 간곡한 설득에도 불구하고 세 청년은 전혀 굽히지 않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이시여, 우리라고 어찌 불에 타죽는 것이 두렵지 않겠습니까? 하오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 외에.. 그 어떤 신에게 절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신앙의 지조를 지킨다면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불 속에서 우리를 능히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혹시 우리 하나님께서 구원하여 주시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왕의 금신상을 섬기지도 않고, 절을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이들의 신앙은 '그리 아니하실 지라도의 신앙'입니다. 환경이나 여건에 의해서 바뀌는 신앙이 아닙니다. 핍박이나 죽음도 그의 신앙을 바꾸지 못하는 신앙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 앞에 감사를 드리되.. 무엇 때문에 드리는 감사가 아니라... 좀더 차원 높은 감사.... 그리 아니하실 지라도 드리는 감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특별히 추수감사주일을 맞아...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신앙을 본받기를 원합니다.
감사를 드리되...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감사를 드리는 형제, 자매가 모두 되시기 바랍니다.
하박국 3:17∼18절 말씀에 보면,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하고 고백했습니다. 환경과 여건을 초월한 오늘 본문의 주인공과 동일한 감사입니다.
욥기서 1:21절 말씀에 "...내가 모태에서 적신(赤身)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원망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하는 찬송을 했습니다.
또한, 고린도후서 12:7-9의 말씀은 바울사도가 자신의 몸의 병을 위해 기도한 기사입니다. 바울사도는 그 몸을 몹시 괴롭히는 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흔히, 그것이 심한 안질이었다고도 하고, 혹은 간질, 치질이 었다고도 합니다. 좌우간 바울사도는 그것을 "육체의 가시 곧 사단의 사자"라고 했습니다.
바울사도는 이 병을 위해 하나님께 세 번을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응답은 "내 은혜가 네가 족하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하는 것이 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사도는 자신의 약한 것을 자랑하겠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약할 때 그리스도의 능력이 더 크게 채워져 강하게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리 아니하실 찌라도...
이 사건 속에서 세 친구가 가진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대한 확신은 정말 대단합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감동적인 것은 '그리 아니하실 찌라도'의 고백입니다. 왕 앞에 자신들이 가진 확신을 말한 후에 이렇게 덧붙입니다. "그리 아니하실 찌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18절).
사실 하나님은 모든 상황 속에서 우리를 지키시지는 않습니다. 때로는 고난을 당하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이 된다면 고난 당하는 것을 허용하시는 분입니다. 어떤 사람은 주님의 보호하심만을 생각하는데 하나님은 꼭 보호만을 하시는 분은 아닙니다. 다윗은 온갖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경험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고난 가운데 버려 두시는 것과 같은 경험도 많이 했습니다. 아마 다윗도 고난 중에는 그 고난이 고통스러워서 하나님 앞에 섭섭한 마음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고난의 과정을 거치고 나니 그것이 자신에게 정말 유익된 사건들이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고난 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라고 고백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고난에 대한 우리의 자세를 점검해야 합니다. 작은 고난에도 원망하고 불평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신앙의 지조를 지키는 우리 앞에 다가오는 고난 앞에서 '그리 아니하실 찌라도' 감사하고 찬양하는 '세상이 감당치 못할' 저와 여러분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기도와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잠17:22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라 했습니다. 뼈는 피를 만드는 곳입니다. 그런데 근심은 건강에 얼마나 해독을 가져오는지 뼈를 마르게 한다고 했습니다. 또한 근심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한 죄가 되므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기는커녕 책망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지 말아야 되며 대신 기도하여야 합니다.
근심과 염려가 쓰레기처럼 쌓일 때 기도의 비로 쓸어서 하나님께 안고 가서 맡겨 버려야 합니다. 다음에 할 일은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길로 해결해 주시고 합력하여 선한 곳으로 인도하여 주실 줄 믿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과 생각이 하나님의 평강으로 지키어 질 것이요, 동시에 우리가 근심하는 문제를 하나님이 맡으셔서 친히 처리하신 것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미국의 한 실업가의 딸이 10살이 조금 지났는데 귀신이 들려서 자기 동생을 미워하고 보기만 하면 마구 두들겨 주곤 했습니다. 병원에 여러 해를 다녀도 도무지 차도가 없습니다, 그래서 멀린 캐러더스 목사님에게 상담을 했더니 ‘하나님께서 당신들에게 무엇을 알게 하려고 이 아이를 주셨고 당신의 가정에 가장 필요한 은혜와 축복을 주시려고 하는 것이니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하신 후에 진심으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십시오.’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딸아이의 문제를 열심히 기도로 아뢰었고 하나님이 좋은 길 열어 줄 줄 믿고 감사했습니다. 그랬더니 낫기는커녕 더 병이 심해졌습니다. 그래도 계속 기도하면서 감사했더니 이번에는 그 부모가 거실에 있는데 딸이 화분을 들고 오더니 부모를 바라보고 웃으면서 방바닥에 떨어뜨렸습니다. 얼마나 소름끼친 일입니까? 보통 부모 같으면 낙심을 하고 다시는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부모는 그런 끔찍한 장면을 보고도 하늘을 쳐다보면서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를 가르쳐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하고 찬양을 하니 그 순간 귀신이 떠나고 딸아이가 깨끗해졌다고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해지기를 소원합니다. 그러면 과연 어떤 사람이 행복할까요? 많은 사람들은 행복이 소유나 환경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입니다. 행복은 감사에 있습니다. 감사는 비유컨대 ‘행복을 느끼는 입맛’과 같은 것입니다.
행복해지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감사하는 법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절을 맞이해서 평소 감사하지 못했던 것을 회개하고 감사 신앙을 회복하는 기회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프랑스인 쟝 도미니크 보비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10여년전 잘 나가던 사람입니다. 세계적인 패션 잡지 <엘르 Elle>의 편집장으로 저널리스트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퇴근 길에 뇌혈관이 터지며 뇌졸중에 빠집니다. 뇌졸중 가운데서도 가장 극악무도한 ‘자물쇠 증후군’에 걸려 마치 자물쇠로 채운 듯 인체의 기능이 한꺼번에 정지되고 꼼짝 못하게 됩니다. 왼쪽 눈만 움직이고 귀로 들을 수 있을 뿐 사지가 마비되고 혀까지 마비되어 말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소망을 잃지 않고 대필자를 세운 채 왼쪽 눈을 깜박거리며 작품을 씁니다. 1년 3개월 동안 무려 왼쪽 눈을 20만번이나 움직여 가며 <잠수복과 나비>라는 작품을 씁니다. 그 책은 20만부나 팔리는 베스트셀러가 됩니다. 그가 만일 절망했다면 그 작품은 세상이 나오지 못했을 겁니다. 그가 한 말입니다. “흘러내리는 침을 삼킬 수만 있다면 당신은 세상에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노련한 등반가의 진가는 야산을 오를 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험산 계곡을 지날때에 비로소 발휘될 수 있는 것입니다. 뱃사공이 능숙한 사공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고요한 바다에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바다에 풍랑이 일어나 흉흉할 때 비로소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참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평탄할 때는 그 신앙의 진위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극심한 환란과 시련 그리고 도전에 부딪혀 봐야 그 진가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한국 코미디계의 대부 SBS 방송초기 코미디 전망대 진행자 김경태 장로님은 말년에 간암으로 투병생활을 하셨습니다. 죽기전날 가족예배를 드렸던 기도는 제 머리에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 제가 영원히 주님과 함께 살터인데 죽음을 두려워 하리이까? 하오나 이 고통이 너무나 극심하여 하나님의 자녀로서 입술로 범죄할까 두렵습니다. 못나도 장로인데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울까 두렵습니다. 지난 몇 개월동안 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시간마다 찾아오는 고통 때문에 몸부림을 하고 살아왔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가릴까 두렵사오니 이 고통을 제거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이 고통 가운데도 당당히 신앙을 지키며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고 사랑스런 내 자녀들에게 우리 아버지는 그토록 처절한 고통 가운데서도 당당히 아버지의 영광을 찬송하며 갈수 있었다는 기억을 남기게 해 주옵소서.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이 고통이 제거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나는 주님앞에 감사하며 눈을 감고 싶습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당신은 하나님을 섬길 수 있습니까?
이지선이라는 젊은 자매(78년생, 이화여대 유아교육학과 졸업)가 2000년 7월 30일 주일 오빠가 모는 마티즈 승용차를 타고 가다 용산 어느 지점에서 음주운전을 하던 갤로퍼 승용차에 치어 6중 추돌사고후 차가 불이 붙는 바람에 화상을 입고 새까만 몸으로 중환자실에서 생명을 넘다들다 겨우 살아 개설한 홈페이지에 이런 글을 실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그를 보는 순간 속을 뱉어 내는 한 마디가 ‘저러고도 살 수 있을까? 저러고도 정말 살 수 있을까?’ 이지만 정작 본인은 당당히 하나님께 감사하며 써내려 가는 감사의 글 중 극히 적은 일부입니다.
짧아진 여덟 개의 손가락으로 사람에게 손톱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게되었고, 1인 10역을 해내는 온전히 남은 엄지손가락으로 생활하며, 글을 쓰며, 엄지손가락을 남겨주신 하나님께 감사했고, 눈썹이 없어 무엇이든 여과 없이 눈으로 들어가는 것을 경험하며 사람에게 이 작은 눈썹마저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막대기 같아져버린 오른팔을 쓰며 왜 하나님이 관절이 모두 구부러지도록 만드셨는지, 손이 귀까지 닿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온전치 못한 오른쪽 귀바퀴 덕분에 귀바퀴란 것이 귀에 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하나님이 얼마나 정교하게 만들어 주신 것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잠시였지만 다리에서 피부를 많이 떼어내 절뚝 절뚝 걸으면서 다리가 불편한 이들이 걷는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힘든 것인지 느끼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건강한 피부가 얼마나 많은 기능을 하였는지 껍데기일 뿐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던 피부가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나마 남겨주신 피부들이 건강하게 움직이는 것에 감사하며, 하나님이 우리의 몸을 얼마나 정교하고, 놀랍게 만드신 것인지 몸으로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감히 내 작은 고통 중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을 100만분의 1만큼 공감할수 있었고, 너무나 비천한 사람으로 때로는 죄인으로, 초라한 사람으로 대해지는 그 기분 또한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지난 고통마저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이 고통이 아니었다면 지금처럼 남들의 아픔에 진심으로 공감할 가슴이 없었을테니깐요.
몸은 이렇지만 누구보다 건강한 마음임을 자부하며, 이 몸이라도 전혀 부끄러운 마음을 가지지 않게 해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이런 몸이라도 사랑해주시고 써주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에 감사드립니다.
“네. 저는 이러고도 삽니다. 누구보다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나는 건강한 몸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나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분께 감사하며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중심으로 왜, 고난과 역경이 저와 여러분에게 있으며, 왜, 감사와 믿음의 씨를 부려야 하는지를 깨달았습니다. 깨달은 바대로 한 주간도 기도가운데 실천하시어 풍성한 열매를 소출하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결론>
1. 심고 거두는 법칙을 생각하는 추석
2. 그리아니하실지라도 감사하는 추석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