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글은
2010.1.13에 발행된 평택시민신문
‘김해규 장연환의 평택역사 산책’ 스무번째 이야기로 기고한 내용인데
글을 써주신 한광중학교에 재직하고 계신 김해규선생님께
양해를 구하고 진주소씨 회지 제49호에
게재하게 되었습니다.
편집자 주
수백년간 평택지역 최고의 가문
진주소씨(晉州蘇氏)
김해규 장연환의 평택역사산책 스무 번째 이야기
평택시민신문※2010. 1. 13일자
송북동 소골 진주 소씨 묘역과 소골 풍경
인생을 살다보면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들이 있다. 사람은 날 때부터 완전한 존재가 아니어서 지나온 시간 속에는 남이 알새라 가슴 밑바닦에 깊숙이 묻어둔 사연들이 있게 마련이다. 필자도 종종 지난시절의 부끄러운 과거를 떠올릴 때마다 얼굴이 화끈해지는 걸 느낀다. 사실 부끄러운 과거는 개인의 삶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가문의 명예가 개인의 삶에 절대적으로 영향을 끼쳤던 봉건시대에는 흡사 부끄러운 과거가 드러날까 두려워 모든 가문들이 전전긍긍하였다.
한국전쟁 뒤 좌익색출이라는 미명하에 적용된 연좌제도 엄청난 두려움을 주었다. 요즘에도 이슬람권 국가에서는 명예살인이라는 걸 하고 있다고 한다. 명예살인이란 이슬람의 법도를 어기고 간통을 하였거나 풍기문란 한 여성을 아버지나 가까운 친척이 죽이는 것을 말한다. 법보다 이슬람의 율법이 상위에 있는 사회에서나 있을법한 이야기인 것 같지만, 사실 조선시대 사대부가에서도 가문의 명예를 위해 여성들에게 명예살인에 버금가는 폭력을 강요하였다.
몇 주 전 가깝게 지내는 분의 고향마을인 모곡동 답사를 하였다. 모곡동은 전주 이씨 수도군파의 5백 년 세거지다. 전주 이씨 수도군파는 조선의 2대 왕 정종의 후손이고 누대에 관료를 배출한 집안이다. 지인은 산과 골짜기를 누비며 답사하던 중에 송탄공단 건설로 파묘(破墓)된 묘 자리 앞에서 잃어버린 조상이야기를 꺼냈다. 병조판서까지 지낸 것으로 전해지는 묘(墓) 주인의 죽음이 석연치 않으며, 사후에 후손들이 황급히 고향을 떠난 이유를 도무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문제가 되는 조상의 이름을 물었더니 다름 아닌 영조 4년(1728)에 발생한 ‘무신 난’의 중심인물 이배였다.
충효를 최고의 가치로 여겼던 조선시대에 반정(反政)에 실패한 인물을 조상으로 두었다는 것은 분명 감추고 싶은 비밀이었을 것이다. ‘역적의 자손’이라는 닉네임도 장롱 속에 꼭꼭 숨겨두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생각이 다르면 가는 길도 달라지듯이, 집권층에 반대를 했거나 반역을 하였다고 해서 반드시 나쁘다고만 평가할 수는 없다. 역사는 반역의 피를 먹고 발전하였기 때문이다. 이번 역사산책은 평택의 유력가문들의 내밀한 이야기다. 비밀의 흔적을 따라 역사를 산책해 보자.
1.선덕여왕때 상대등 알천이 시조
송북동 우곡마을 뒤쪽에는 진주 소씨 묘역이 있다.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서 수풀에 묻혀 있던 묘역은 몇 년 전 새 단장을 해서 한층 말끔해졌다. 도일동에서 은산리로 넘어가는 고갯마루에도 진주 소씨 묘역이 있다. 이곳에는 진주 소씨 4대조부터 26대 소을경까지 실전되었던 조상들의 제단(祭壇)을 비롯하여 납골묘와 여러 기의 묘가 산재되어 있다. 우곡마을 수성 최씨 묘역 가장 윗자리에는 수성군 최유림의 어머니 진산 소씨의 묘가 있다. 이충동에도 남강공 소수천과 홍문관 대제학을 지낸 소숙 등이 안장된 진주 소씨 묘역이 있다.
평택과 인접한 원곡과 양성, 용인시 이동면에도 진주 소씨 동족마을과 묘역이 있다. 그밖에도 송북동에는 소골이라는 마을이 있고, 도일동에는 ‘석씨 천년, 소씨 천년, 원씨 천년의 마을’이라는 이야기가 전한다. 지금도 도일동 원도일, 동삭동 영신에는 진주 소씨들이 다수 거주하고 있으며, 소골의 풀무골 전설도 소(蘇)씨들과 관련된 이야기다.
사족집단의 성장이 미흡한 평택지역에서 이렇게 광범위한 지역에 흔적을 남긴 가문은 일찍이 없었다. 무봉산 일대를 주름잡았던 경주 이씨도 이보다는 못했다. 더구나 묘역의 주인공들이 학문과 무예로 이름을 날렸고 관직도 찬성, 판서, 세자의 사부, 사간원 대사간, 성균관 사성, 홍문관 대제학, 목사, 부사, 병마절도사, 그리고 임진왜란, 병자호란 당시의 의병장이었다는 사실 앞에서는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시대를 거슬러 삼국시대와 고려시대로 올라가면 입이 다물어지다 못해 눈알이 튀어나온다. 먼저 진주 소씨의 시조는 드라마 선덕여왕에 등장하였던 상대등 알천이다. 알천이 진주를 식읍으로 받고 이름을 경(慶)으로 바꾸면서 진주를 본거지로 하였고, 고려 초에는 11세손 소격달이 대장군에 오른 뒤 구세구장군(九世九將軍), 다시 말해서 아홉 대에 걸쳐 대장군을 배출하면서 이름을 떨쳤다. 또 고려 문종과 헌종 때에 이부상서에 올랐던 소계령은 딸이 헌종 비로 간택되면서 진산부원군(晋山府院君)에 봉해졌다. 소계령의 두 아들 소광보와 소경보는 최고위직인 문하시중을 지냈으며, 나머지 형제들과 후손들도 귀한 자리에 올랐다. 진주 소씨를 진산 소씨로 부르는 것도 ‘왕실과 혼인을 맺은 귀한 집안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중앙에 권력기반을 가졌던 명문가가 척박한 평택에 근거를 두게 된 것은 고려 후기다. 상장군을 지낸 소함이 몽고군에 맞서 진위일원에서 싸우다 전사하자 고려 고종이 덕암산 일대를 식읍으로 하사하였는데, 고려 말 왜구의 침입으로 진주와 하동이 위협을 받자 소을경이 진위현 여좌동(도일동 상리)으로 이거하면서 근거를 두게 된 것이다. 전국구급의 유력 명문가가 평택에 근거를 두면서 지역유력가문 뿐 아니라 출세를 원하는 사람들이 혼인을 맺으려고 줄을 섰다. 고려 말의 대학자 정몽주나 조선 후기의 대학자 송시열이 진주 소씨와 인척관계였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2.평택 유력가문들과 혼사로 확고한 자리
진주 소씨와 혼인관계를 맺었던 집안으로는 독곡동 오좌동 마을과 송탄동 막곡의 수성 최씨와 도일동의 원주 원씨, 칠괴동의 청주 한씨를 꼽을 수 있다. 수성 최씨의 입향조는 조선 전기 화원(畵員)출신의 최경이다. 미천한 신분으로 화원이 되었고 인물화를 잘 그려서 당상관 절충장군에 올랐던 신화적인 인물이다. 억세게 운이 좋아서 관등(官等)은 당상관에 올랐지만 출신성분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미천한 출신성분을 세탁하는 방법은 유력가문과 혼인을 하거나 자손을 출세시키는 방법밖에는 없다. 최경이 손잡은 유력가문이 진주 소씨다. 나중에는 처가를 배경삼아 아예 진위현(평택)으로 이거하였다. 처가는 유력가문이었지만 처가살이는 녹록하지는 않았다. 처음 정착한 곳도 덕암산 자락 후미진 골짜기 도일동 능골이었다. 능골에는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최경의 묘 자리가 거북이의 형국이고 논 가운데 있는 바위는 거북이밥이라는 전설이다. 수성 최씨가 크게 성장한 것도 묘를 잘 썼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덧붙여진다. 입향 초기의 어려움은 큰아들 최유림이 계유정난과 이시애의 난에 연거푸 공을 세워 공신(功臣)에 오르면서 해소되었다. 최유림의 형제들과 아들 최윤신도 관직에 진출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성 최씨가 오좌동에 기반을 잡은 것은 최윤신의 아들 최자반에 이르러서였다. 수성 최씨가 오좌동에 기반을 잡는 일에 가장 큰 기여를 한 사람은 최유림의 어머니 진주 소씨로 판단된다. 송북동 소골마을 뒤 수성군 최유림의 묘 윗자리에 안양공 최경이 아닌 진산(주) 소씨의 묘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증표다.
원주 원씨의 입향조 원몽도 진주 소씨와의 혼인관계를 배경삼아 입향하였다. 초기 입향지는 진주 소씨의 중심 터전 도일동 상리 샛골마을이었다. 지명에서 알 수 있듯이 샛골은 덕암산 골짜기에서도 대 여섯 집밖에 살지 않는 작은 마을이다. 16세기의 학자 유희춘의 미암일기에서 볼 수 있듯이 당시만 해도 처가살이는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원몽도 처음에는 처가살이를 하였을 것이다. 그러다가 원준량이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오르고, 원균이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워 공신(功臣)의 반열에 올랐으며, 원연, 원전, 원사립 등에게 충신, 효자정문이 하사되면서 도일동 내리에 터를 잡았다.
3.이인좌의 난 때 멸문지화
평택 양반문화의 젓줄이 되고 대동맥 구실을 하였던 진주 소씨는 이인좌의 난으로 멸문을 당하였다. 진주 소씨의 빈자리는 수성 최씨, 광산 김씨, 원주 원씨, 청주 한씨가 차지하였다. 진위면의 안동 권씨, 평택의 양성 이씨, 용인 이씨, 모곡동 전주 이씨도 진주 소씨와 무관하지 않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긍지’는 감사함에서 나온다. 조한알 장일순 선생은 작은 좁쌀 한 알에도 우주가 들어있다고 말했다.
밥 한 톨, 옷 한 벌에도 다른 사람의 땀과 열정이 들어있음을 깨달을 때 감사가 나오고 긍지가 생긴다는 말이다. 새해에는 간난산고를 극복하고 빛나는 미래를 물려준 우리고장 선조들의 삶에 관심을 갖자. 그분들의 삶에 빚진 자로서 오늘을 사는 내 삶의 몫을 생각하자.
회지편찬위원회위원장 진주소씨45세 소정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