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비가말을타고
양화진에 갈 일이 생겼다. 글쟁이로 사는 내가 가슴 벅차게 뵙고 싶은 분, 호머 헐버트. 그분을 뵙고 싶어서다.
한글의 우수성은 증명되고도 남아 우리나라 국민이면 누구나 한글에 대한 자부심으로 어깨가 솟는다. 문자가 없는 나라의 공식 문자로까지 등극한 데는 한글의 우수성 외에도 쉽고 편하게 읽고 쓰고 뜻을 이해할 수 있게 띄어쓰기를 도입한 헐버트 님의 노력이 더해져서다.
한글 창제 이후 사백 오십여 년이 지나도록 띄어쓰기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지만 사실이다. 불과 백 이십육 년 전인 1896년부터 시작한 띄어쓰기는 헐버트 님 덕분이다. 한글을 체계화시킨 한글학자의 선두에 헐버트 님을 상좌에 올려도 좋을 것으로 생각하는 이유다.
1886년, 인천 제물포항에 첫발을 디딘 헐버트 님은 조선에 파견할 교사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고 자발적으로 조선 땅에 들어왔다. 코리아라는 나라 이름과 세계 지도로 본 한반도의 위치가 조선에 대한 사전 지식의 전부였지만 헐버트 님은 평생을 우리나라를 위해 헌신했다. 헐버트 님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공립학교인 육영공원에서 과거에 합격한 관리와 양반집 자제에게 영어와 세계사, 세계 지리 등을 가르쳤다. 당시 교과서는 청나라 문자인 한자로 만들어진 책이었다.
우연히 한글을 접하게 된 헐버트 님은 한글의 우수성에 감탄했다. 표음문자인 한글은 자음과 모음 28자만 있으면 초성·중성·종성 단 3개 구조만으로 가로, 세로로 조합을 하고 동그라미와 네모를 결합해 어떤 낱말도 어떤 문장도 표기할 수 있다. 그래서 레고처럼 조합해 글자를 만들기에 컴퓨터 자판에 가장 최적화된 문자가 된 것이다. 한글은 가장 간단하면서 가장 과학적인 문자라고 한 헐버트 님의 극찬이 세계 언어학자들의 논문에서 증명이 되었다. 한글이 첨단의 앞선 문자라는 찬사에 글을 쓰는 작가로서 자부심이 생긴다.
헐버트 님은 언어에 탁월한 재능을 가진 분이셨다. 무려 7개 국어를 하셨다. 한글은 글자로서의 미덕인 배우고 쓰기가 쉬워 우리나라에 도착한 지 단 4일 만에 한글을 읽고 썼다고 한다. 한글을 세계에 알리는 데 예비된 분이라 우리나라에 올 운명이 아닌가 싶다.
헐버트 님은 언문이라며 천대받던 한글로 ‘사민필지’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교과서를 만들어 육영공원에서 교재로 썼다. ‘사민필지’는 선비와 백성이 모두 알아야 할 지식이란 뜻으로 온 국민이 두루 배워 익히는 데 어려움이 없게 한 한글 교과서다. 육영공원 학생들은 천한 백성이 쓰는 글이라며 반발했지만, 헐버트 님은 한글의 우수성을 논문으로 써서 세상에 알렸다.
우리 역사의 근현대사에 헐버트 님의 공로는 무궁하다. 배재학당에서 푸른 눈의 한글학자 헐버트 선생을 은사로 만난 주시경 학생은 뒷날 한글학자로 탑을 쌓게 된다. 헐버트 님과 함께 ‘국문연구소’를 만들어 한글 맞춤법의 체계화를 이루는 인연을 만난 것이다.
어느 날, 미국에서 귀국한 서재필 박사가 헐버트 님을 찾아왔다. 올바른 소식을 전하고 독립 정신을 고취할 조선 국민의 자존감을 키울 신문을 만들기로 결의한 서재필 박사와 헐버트 님은 독립신문을 창간하게 된다.
한글은 띄어쓰기가 안 되면 엉뚱하게 읽히기에 띄어쓰기와 쉼표, 마침표로 오역을 없앤 한글판 독립신문을 만들기로 했다. 그 당시 띄어쓰기의 중요성을 예시한 문장이 있다. ‘장비가말을타고’ 문장을 예로 들면서 장비가 말을 타고 인지, 장비 가말(가마)을 타고 인지, 정확한 의미 전달을 위해서는 반드시 띄어쓰기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헐버트 님은 한글 사랑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에도 지대한 공헌을 했다.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열사를 파견한 주역이면서 일본의 침략을 세계만방에 알린 연사였다. 일본 정부의 강제 추방으로 미국에 돌아가서도 천 번이 넘는 강연으로 우리나라의 독립을 호소하며 한국을 세계에 알렸다.
"나는 웨스트민스터성당보다 한국에 묻히고 싶다"라고 하셨던 헐버트 님은 1949년 광복절을 기념해 정부 초청으로 한 달에 걸친 긴 항해 끝에 한국에 도착했다. 그리워하던 한국 땅을 밟았지만 86세의 고령인 데다 여독이 심해 일주일 만에 눈을 감았다. 헐버트 님은 교육자, 한글학자, 독립운동가이셨고 우리의 역사를 연구한 역사학자로도 업적을 남겼다. 그뿐만이 아니다. 별주부전을 마법사 엄지로 각색해 영어로 번역하고, 아리랑을 채보해 서양 음계로 옮긴 문화예술 기록자로, 우리나라의 국권 회복기에 헌신한 큰 인물이셨다.
요즈음 정치판은 날마다 아전인수에 싸움판이다. 지쳐 가는 국민은 우리나라 사람보다 더 우리나라를 사랑했던 헐버트 님 같은 큰 바위 얼굴이 나오기를 고대한다. 헐버트 님은 우리나라 최초의 외국인사회장으로 치러져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영면해 계신다. 비 내리는 여름 초입 어느 날, 친구와 양화진 외국인 묘지를 찾아갔다. 나붓나붓 비가 내리는 헐버트 님의 묘비 앞에서 우산을 접었다. 헐버트 님 묘 앞에 마음을 담아 정성껏 술 한잔을 올렸다.
[신 미 송]
2002《한국수필》수필 「징검다리」 신인상 수상으로 수필 등단. 2006《한국문인》소설 「민달팽이」 신인상 수상으로 소설 등단. 개인 소설집『당신의 날씨』, 7인 소설집『인천, 소설을 낳다』산문집『사랑은 증오보다 조금 더 아프다』『나무늘보의 세상과 말 트기』
공저『러시아의 문학과 예술을 찾아서』. 기호일보 칼럼 <틈세> 연재 중. 인천문인협회, 굴포문학회, 소설가협회, 국제PEN 한국본부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