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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전에 아이들하고 답사를 다년온곳 칠장사
그때는 사실 다녀와본적이 없이 답사를 떠난터라 그리고 아이들 수업하기 바쁜터라
인터넷에서, 그리고 책에서 공부를 하고 갔기에 나 스스로 절을 둘러볼 시간이 없었고 아이들 데리고 다니기 바빳다.
오늘 칠장사를 공부하면서,
칠장사홈페이지 그리고 블로그들, 카페들 등 여러곳에서 사진과 자료를 찾아서 보았다.
물론 사천왕문은 내가 찍은 사진이다 ㅎㅎㅎ
나중에 시간이 되면 다시 찾아서 그때는 오롯이 나를 위한 답사를 해야겠다.
칠장사(七長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조선 영조 9년(1773년)에 간행한 칠장사 사적비(事蹟碑)에 의하면 고려시대 혜소국사에 의해 중수된 기록이 있으나 초창된 시기는 정확하게 밝혀진 바가 없다. 그러나 문헌 등을 통해 볼 때 10세기경에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칠장사는 신라 선덕여왕 5년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되었다는 설이 전하며, 고려시대 현종 5년(1014) 혜소국사가 왕명으로 중창하였고 칠장사와 칠현산이란 이름은 혜소국사가 이곳에 머물면서 일곱 명의 악인을 교화하여 현인으로 만들었다는 설화에서 유래되었다.
고려 우왕9년(1383년)에 왜구의 침입으로 충주 개천사에 있던 고려조의 역대실록을 이곳에 옮겼을 정도로 당시 교계에서는 중요한 사찰이었다.
공양왕1년(1389년)에 왜구의 침입으로 전소되어 폐허로 내려오다가 조선시대 중종 1년(1506년)에 흥정이 중건했다고 한다. 이후 인종 1년(1623년)에 인목대비가 아버지 김제남과 아들 영창대군의 원찰로 삼아 사세를 크게 중창했다고 전한다.
현종15년(1674),숙종 20년(1694),영조 1년(1725),고종 15년(1878)등 수차례 중건하였으며 1970년대 이후 지속적인 보수를 통해 지금의 가람을 이루고 있다.
경내에는 대웅전과 국보 제296호 오불회괘불탱을 비롯하여 혜소국사비, 철당간등 지정문화재가 많다. 또한 칠장사에는 여러 구전이 내려오는데 궁예가 10세까지 활쏘기를 하며 유년기를 보냈다는 활텅가 남아있으며 의적 임꺽정 갖바치스님 병해대사에게 바친 꺽정불이야기, 암행어사 박문수가 과거시험을 보기전에 나한전에서 기도를 드리고 잠이 들었는데 꿈에 나타난 나한님이 과거시험 구절을 가르쳐주어 장원급제했다는 설화가 내려오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 원통문, 사천왕문, 명부전, 나한전 등을 비롯하여 17등의 건물이 있으며, 혜소국사비, 철제당간 등의 유물이 남아 있다.
대웅전
유형문화재 제114호이며, 순조28년(1828년)에 이건되고 1982년 해체 보수되었다. 정면 3칸, 측면 3칸 목조 기와지붕이다.
칠장사의 주불전으로 석가모니불을 봉안한 전각이다. 현재의 대웅전 건물이 매우 오래된 양식이며 그 위에 세운 목조건물은 조선말기에 다시 세원진 것으로 보인다.
기단은 4단의 장대석을 가지런히 쌓아 올렸으며 제일 윗부분과 그 아래 장대석의 사이는 깊은 홈을 파서 단을 구획하였다.
기단 중앙에 있는 계단의 좌우 우석은 위를 약간 둥굴게 돌렸으며우석 측면에는 구름모양의 양각을 하였다.
영상회상도와 삼존불
석가여래·미륵보살·제화갈라보살로 구성된 수기 삼존형식의 석가삼존불좌상으로 2009년 3월 11일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13호로 지정되었다.
2007년 삼존불에 대한 개금을 진행하던 중 좌협시보살상에서 “좌보처미륵보살(左補處彌勒菩薩)…”이라고 기록된 조성발원문(造成發願文)이 발견되면서 이 삼존불이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미륵보살(彌勒菩薩)·제화갈라보살(提花竭羅菩薩)로 이루어진 수기삼존불(授記三尊佛)임이 새롭게 밝혀졌다.
제작 시기는 강희(康熙) 21년, 즉 1685년(숙종 11)이며, 조각승(彫刻僧)은 마일(摩日), 천기(天機), 법준(法俊), 신학(信學), 회신(懷信), 명옥(明玉), 인문(印文), 상현(尙玄) 등 모두 8명에 의해 제작되었음도 확인되었다.
석가모니불·미륵보살·제화갈라보살로 이루어지는 삼존불의 형태는 주로 응진전(應眞殿)과 나한전(羅漢殿) 등 불법(佛法)의 사자상승을 강조하는 전각에서 많이 조성되지만, 조선후기에는 여수 흥국사 대웅전이나 범어사 대웅전 등의 사찰의 주불전인 대웅전의 삼존형식으로도 많이 제작되었다.
대웅전 내에 봉안된 석가여래삼존좌상은 모두 결가부좌한 좌상의 형태로, 그 제작은 나무를 이어 붙어 제작하는 접목조(接木造) 기법으로 제작되었다. 본존인 석가불은 높이가 132㎝로 조선 후기에 제작된 불상 가운데 중형에 속하는 불상이다. 뾰족한 나발을 가진 머리에는 육계(肉髻)의 경계가 불분명하며, 머리 정상과 중앙에는 원형과 반원형의 계주(髻珠)가 뚜렷하게 표현되었다. 얼굴은 각이져 방형에 가까우며, 눈꼬리가 약간 올라가 반쯤 뜬 눈, 콧등이 편평한 삼각형 코, 살짝 미소를 머금은 얇은 입으로 인하여 전체적으로 엄숙한 인상을 준다.
왼손은 엄지와 중지를 둥글게 맞대어 무릎에 두었고, 오른손은 손가락을 펴고 바닥을 가리키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취하였다. 불신에 두텁게 걸친 대의(大衣)는 오른쪽 어깨를 살짝 드리운 변형통견으로, 대의 끝단이 오른쪽 어깨를 비스듬히 걸쳐 팔꿈치와 복부를 지나 왼쪽으로 넘어가고, 반대쪽 대의가 왼쪽 어깨를 완전히 덮고 내려와 하반신에 S자의 형태로 자연스럽게 펼쳐지고 있다. 노출된 가슴에는 치마의 끝단인 군의자락을 수평으로 접어 단순하게 처리하였다.
석가여래의 좌·우에 위치한 미륵보살과 제화갈라보살은 본존과 같이 상체를 앞으로 내밀어 사바세계를 굽어 살피는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구름과 불꽃무늬가 가득히 장식된 높은 보관(寶冠)을 쓰고, 정수리 부분에도 보계가 높이 솟아 있다. 보계에서 이어진 두 가닥의 보발(寶髮)이 두 귀를 지나 어깨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그러나 동일한 조각승이 제작하였기 때문에 상호 표현이나 조각기법, 그리고 착의(着衣)방법까지 모두 동일하게 표현되었다. 다만, 연꽃을 들고 있는 손의 위치나 크기에서는 차이가 있다.
원통전
1725년 영조 1년에 건립되었다 하며 1726년에 관음상이 봉안되었다 한다. 그러나 현재의 건물은 19세기 경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 된다고 한다.
정면3칸, 측면 2칸이고 내부바닥에 우물마루가 설치되어 있다. 창호는 정면에만 설치되어 있으며 하부에는 궁판이 중앙에는 격자살, 상부에는 교살이 설치되어 있다.
원통전 관음보살
명부전
대웅전 안마당 남쪽에 자리하고 있는 명부전은 자연석 외벌대 기단, 자연석 초석 위에 있다.
정면3칸, 측면 3칸이고 내부는 우물마루를 들이고 정면을 제외한 3면에 불단을 설치하고 그 위에
시왕을 모시고 있다.
측면3칸 중 양쪽은 협칸이고 내부 배면부에 대보 밑까지 기둥이 설치되어 있다. 외벽면 중방 위 회벽면에 궁예 임꺽정 등을 그린 별지화가 그려져 있다.
명부전은 고통받는 지옥중생들을 구제하겠다는 원을 세우신 지장보살을 모신 전각으로 1726년에 건립되었다고 한다. 현재 명부전에는 지장보살과 좌우 협시에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을 모시고 그 좌우로 시왕(十王)을 모시고 있다.
칠장사 명부전 외벽에는 다른 절집과는 다른 벽화들이 그려져 있는데 칠장사에 이야기로 혜소국사가 주위의 일곱 도적을 감화시켜서 도를 이루게 했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의적 임꺽정의 스승인 갖바치가 머물던 곳이 이곳 칠장사라고 한다. 그래서 갖바치가 죽은 후에 병해대사로 불리게 되었다고 하는데, 임꺽정과 갖바치에 관한 이야기도 벽화로 표현되어 있다.
또한 신라의 왕족으로 태어나 후에 후고구려를 세우게 되는 궁예와의 관련성도 있는 절집이 칠장사라고 한다. 그래서 명부전 외벽에는 임꺽정과 병해대사(갖바치), 해소국사와 일곱도적, 궁예에 관한 그림이 삼면에 가득 그려져 있다.
천왕문과 소조사천왕상
경기도 유형문화재 115호로 지정되었다.
사천왕문은 대웅전의 기본 축과는 90도 틀어진 위치에 배치되어 있어 사찰 출입의 기본 동선의 특이한 형태를 보여 주고 있다. 천왕문이 건립된 1726년에 동시에 조성된 것으로 보여지며 조선후기 사천왕의 예 중에는 매우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 된다.
나한전
대웅전을 지나 사찰의 뒤편으로 이어져 있는 길을 올라 나타나는 평지에 계곡과 접해 있는 암반 위에 나한전이 건립되어 있다.
1703년 탄명스님에 의해 건립되었다 한다.
내부에는 여러구의 나한이 봉안되어 있고 현재는 나한전 앞에 유리로 전실을 지어 예배공간으로 이용하고 있다.
혜소국사에 의해 7악인이 7현인으로 제도된 일곱 현인의 화신인 나한전은 조선시대 과거시험에 급제하는데 영험하기로 소문이 나 있으며, 어사 박문수가 나한님한테 조청유과를 공양하고 장원급제를 했다고 전하며 당시의 과거 시제인 몽중등과시의 현장이다. 지금까지고 나한전에는 시험합격을 비는 신도들의 발길이 그치지 않는 곳이다.
[성보문화재]
오불회괘불탱(국보296호)
괘불이란 절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행하기 위해 법당 앞뜰에 걸어놓고 예배를 드리는 대형 불교그림이다. 칠장사 괘불은 길이 6.56m, 폭 4.04m의 크기로, 구름을 이용하여 상·중·하 3단으로 구분되었다.
맨 윗부분은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석가불과 노사나불이 좌우에 모셔진 삼신불을 묘사하고 있고, 중간은 약사불과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여러 보살들이 있어 삼세불을 표현하였으며, 맨 아래에는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이 그려져 수미산 정상의 도솔천궁을 표현하였다. 이러한 3단 배치는 예배자들에게 삼신불과 삼세불의 세계를 통해 진리를 깨우치게 하고,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의 구원으로 도솔천궁에 이를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 괘불의 가장 큰 특징이라 하겠다.
채색은 녹색을 주로 하고 황색과 황토색을 대비시켜 다소 어두워 보이나, 옷 처리를 붉은색으로 하여 경쾌함을 느낄 수 있다.
이 괘불은 조선 인조 6년(1628)에 법형(法浻)이 그린것 이다. 괘불에서 보이는 단아하고 세련된 인물의 형태와 짜임새 있는 구도, 섬세한 필치 등은 당대를 대표하는 것으로, 이 작품은 17세기 전반의 불화 연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삼불회괘불탱(보물1256호)
칠장사삼불회괘불탱은 영축산에서 석가가 설법하는 모습을 묘사한 영산회상도이다.
화면 구성은 석가불을 중심으로 한 하단과 노사나불과 아미타불이 있는 상단으로 구성되는데 사각형의 광배를 한 석가불의 주위를 팔대 보살과 십대제자, 사천왕 등이 에워싸고 있는 형상이다. 대좌 아래에는 사리불이 석가의 설법을 듣고 있다. 상단에는 아미타불과 보살처럼 화려한 보관을 쓴 노사나불이 사래보살에 의해 둘려 쌓여 있다. 아미타불과 노사나불 사이에는 보탑을 두어 화면을 구분하고 있다. 보탑 위로 반원형의 큰 광배 안에 9구의 보살을 중심으로 천상세계의 모습을 표현하였다.
숙종 36년(1710)에 그려진 이 괘불은 석가불이 그려진 하단 단독으로도 영산회상도를 묘사할 수 있는 독특한 구성을 보여주며, 상단과 합쳐서는 삼신불을 간략하게 표현한 구성을 하고 있다. 이러한 간략화한 구성 방식은 조선 후기에 유행하는 방법으로 이 괘불은 이런 구성을 잘 보여주는 훌륭한 작품이다.
혜소국사비(보물제488호)
안성 칠장사 혜소국사비(安城 七長寺 慧炤國師碑)는 보물 제488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칠장로 399-18(칠장리 764번지) 칠장사 이다.
고려 전기의 고승 혜소국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석이다. 현재 원통전 뒤 계곡을 따라서 약 20m 정도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혜소국사는 고려(高麗) 광종(光宗) 3년(972) 안성에서 출생하여 10세에 삭발 입산하고 17세 때 칠장사에서 융철(瀜哲)의 가르침을 받았고 통도사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그 뒤 미륵사(彌勒寺)를 거쳐 칠장사로 돌아왔으며 999년 28세에 대사(大師)가 되었다. 덕종(德宗 : 1032-1034)대에는 승통(僧統)이 되어 현황사(玄化寺)에 있기도 하였다. 말년을 칠장사(七長寺)에서 수도하며 이 절을 크게 중창하였다. 1054년 11월 15일에 칠장사에서 83세로 입적하였다. 문종이 절 남쪽 산에 장사를 지내게 하고 시호를 혜소국사라 내렸다. 비석은 입적 후 6년이 지난 1060년에 세웠는데, 비문은 김현(金顯)이 짓고 글씨는 민상제(閔賞濟)가 썼다. 이 비석을 언제 깨어졌는지 알 수 없지만 중단이 깨어진 채로 칠장사에 전해 내려왔다. 1975년에 보호각을 지으면서 비석도 같이 수리하였다.
한편, 비석이 깨어진 배경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왜장 가토기요마사가 이 절에 왔는데, 어떤 노승이 홀연히 나타나 그의 잘못을 꾸짖었다. 화가 난 가토가 칼을 빼어 노승의 목을 베었다. 그런데 노승은 사라지고 자신의 팔만 저렸다고 한다. 나중에 비전(碑殿) 앞에 가보니 혜소국사비가 토막나 있었다고 전한다.
이 비석은 귀부, 이수, 비신 등을 모두 갖추었는데 조합되어 있지 않고 따로 보관되어 있다. 귀두는 용머리 형상으로 머리를 치켜들고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보습니다. 목이 거의 없어서 등에 붙은 모습이다. 입은 벌리고 이를 드러내고 있으며 수염과 목 지느러미도 묘사하였다. 귀 뒤에는 지느러미가 크게 표현되어 있는데, 이 같은 양식은 고려 전기에 세워진 비석들에서 보이는 공통된 현상 중 하나이다. 등에는 이 중 6각형의 귀갑을 표현하였고 귀갑 주변에는 특이하게도 연주문을 돌렸다. 네 발은 모두 앞으로 향하고 있는데, 발가락의 표현이 형식적이다. 고리는 우측을 향하고 있다. 귀부 중앙에는 직사각형의 비좌가 마련되어 있는데 고려 초기의 비석에 비하여 높이가 현저히 낮다. 상면에는 연화문을 새겼지만 전면과 후면, 양 측면에는 문양이 없다. 전반적으로 귀부는 고려 초기의 석비에 비하여 조각이 얕고 입체감도 떨어진다. 귀두도 용머리보다 괴수(怪獸)의 머리를 연상시키고 있다.
비신은 흑대리석으로 만들었다. 현재 새로 소정한 방형 미좌에 세줘져 있다. 전면 상단에는 제액을 증시혜소국사비명(贈諡慧昭國師碑銘) 8자를 횡으로 새기고 그 밑으로 경계선을 그어 본문을 새겼다. 비신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측면에 조각을 한 것이다. 두 마리 용이 여의주를 가운데 두고 서로 엉켜있는 형태를 비교적 정교하게 조각하였다. 이는 비문에 대한 보호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수는 구름 위를 날고 있는 용을 조각하였다. 환조에 가까울 정도로 깊게 조각하고 입체감도 있어서 귀부에 비하여 훨씬 세련된 조각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이전 시기의 비석에 비하여 간략화된 모습이다. 상면에는 따로 용 한 마리 더 조각하고 그 위로 연화문이 조각된 원판형 석재를 올려놓았으나 원래 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이 비석은 신라 말 고려 초 석비의 양식을 계승하면서도 고려화한 석비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비신의 측면에 새겨진 용과 이수의 형태는 아주 독특한 것이다. 이 비석의 이수와 형태가 유사한 것으로 법천사지광국사현묘탑을 들 수 있다. 하지만 세부적인 양식에서는 차이가 많다. 또한 이수가 비신에 비하여 너무 커서 전체 비례가 맞지 않고 안정감도 떨어진다. 비신이 깨져나간 것도 이와 관계있지 않은가 한다.
비석은 현재 보호각 속에 귀부, 비신, 이수 등을 각각 따로 분리하여 세워놓았다. 이수가 무거워 비신에 올리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보호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1975년에 세워졌다.
인목왕후어필칠언시(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4호)
선조(宣祖)의 계비(繼妃)인 인목왕후(仁穆王后, 1584~1632)가 큰 글자로 쓴 칠언절구의 시이다. 종이바탕에 4행으로(각행 7자) 썼으며 근대에 족자로 장황되었다. 어필 아래에는 서예가 배길기(裵吉基)의 1966년 발문이 있다. 바탕은 보존이 양호한 편이며 다만 줄[行] 사이가 좀 더 밝다. 한편 어필 칠언시 28자의 점획 안에는 제월당(濟月堂)이란 스님의 발원문 29자가 작은 글자로 진하게 쓰여 있다. 칠장사는 인조가 반정으로 등극한 1623년에 인목왕후가 친정아버지와 아들(영창대군)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원당(願堂)으로 삼아 중창한 사찰로 이곳에는 인목대비가 썼다는 <금광명최승왕경(金光明最勝王經) 사경>이 전래되었는데(현 동국대박물관 소장), ‘인목왕후 칠언시’와 서풍이 같다. 인목왕후의 글씨는 선조어필과 비슷하며 그의 딸 정명공주(貞明公主)가 따라 썼다.
이 어필을 나무판에 모각한 것(명안공주관련유물(明安公主關聯遺物, 보물 제1220호))과 검은비단에 금니로 모사한 것이 전하는데(국립중앙박물관, 德 2053) 모두 이 어필과 자형이 같다.
다만 모본에서는 칠언절구 28자를 3행으로 배열하고(각행 10자) 글자 사이를 조절하였다. 조선시대 열성(列聖)의 어필이 많이 모각되었는데, 이처럼 모각된 어필의 원적(原蹟)이 남아 있는 예는 매우 드물다. 특히 왕후의 글씨는 간찰체제로 자필 또는 서사상궁의 필치로는 전하고 있지만 한자 대자(大字)는 명성왕후의 예필을 빼면 현재로서는 ‘인목왕후 칠언시’외에 사례가 발견 되지 않고 있다.
칠장사삼층석탑(경기유형문화재 제179호)
칠장사 대웅전 앞에 있는 삼층석탑이다. 원래는 죽산 마을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부재를 합해서 일죽면 죽림리 460번지 성원목장에 복원한
것이었는데, 2005년 11월 28일에 지금의 장소로 옮겨 왔다.
석탑의 전체 높이는 363㎝이고 지대석(址臺石)은 가로 약 171㎝, 세로 약 140㎝이다. 석탑의 주재료는 화강암이다. 기단은 1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위에 사각형의 탑신(塔身)을 쌓았다. 1층 탑신은 2장의 석재로 이루어져
있으며, 옥신(屋身)에는 양쪽에 기둥 모양의 우주(隅柱)을 새겨 넣었다. 옥개석(屋蓋石)은 곡선이 완만하고, 옥개받침은 4단이다. 상륜부(相輪部)는 직사각형의 노반(露盤)만이 남아 있다.
탑신부와 옥개받침 등을 미루어 볼 때 고려 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2002년 4월 8일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79호로 지정되었다.
동종(안성시향토유적 제25호 )
칠장사 대웅전 내에 있는 이 동종은 종신에 새겨진 명문을 통해 정확한 조성연대를 알 수 있어, 조선후기 범종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어 준다.
동종의 상단 용 모양은 쌍용으로 옆에 지름 2cm의 원공(圓孔)이 있으며, 용은 여의주를 물고 있다. 상대(上帶) 대신 원좌(圓座)내에 범자(梵字)를 8군데 조각하고 범자 밑에는 4유곽(乳廓)과 원형두광(圓形頭光)의 보살입상(菩薩立像)을 서로 바 꾸어 조각했다.
중앙에는 일조의 원대(圓帶)가 있고 그밑에 명문이 있으며, 하대에는 별다른 조식이 없다. 유곽 은 주연에 사선문양이 있으며 단엽의 9연좌 중심에 9유두가 있다. 명문은 「건륭사십칠년임인십 일월일시(乾隆四十七年壬寅十一月日時) 죽산도호부사이언충(竹山都護府李彦忠)」이라 했는데,
건륭47년은 조선조 제22대
정조6년(1782)이다.
칠장사 철당간(경기도 유형문화제 제39호 )
혜소국사와 관계 있는 철제당간과 지주로 칠장사로부터 약 700m 거리에 세워져 있다. 전설에는 칠장사가 있는 지형이 배 모양과 같아 돛대로써 이
당간지주를 세운 것이라고도 하는데, 조선 시대 풍수설과도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당간과 지주의 형태는 화강암으로 만든
두 지주가 마주 서 있고 그 사이에 원통으로 된 철제당간을 세웠다. 당초에는 원통 모양의 철제당간이 30마디였으나 현재는 15마디만이 남아 전해
내려오는데, 당간의 직경은 43㎝에, 높이는 9.9m이며, 총 높이가 11.5m에 이른다. 이 당간을 받치고 있는 지주의 높이는 3m에 달한다.
당간지주를 지탱하고 있는 지주석은 매우 소박하고 단아하다. 지주석 사이에 견고하게 끼여 솟아 있는 이 당간은 풍수설에 관련된 전설을 지니고
있다. 칠장사의 지형이 마치 배 모양과 같은 형국이어서 이 당간을 돛대에 비유해 세웠다는 것이다. 땅도 사람 몸과 같이 허약한 부분이 있다고
한다. 이 허약한 부분을 보(補)해주기 위한
방법으로 탑을 주로 세웠는데, 칠장사 당간이 그런 전설을 지니고 있다.
철당간은 전국을 통틀어 몇 안 된다. 그 중 충북 청주
시내의 용두사터 철당간과 계룡산 갑사의 철당간이 유명하다. 청주 용두사터 철당간은 조성년대와 철통의 척수가 새겨진 명문이 있어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칠장사 철당간은 조선 중기 작품으로 밝혀졌으나 명문은 없다. 초파일 때면 연등이 환하게 주위를 밝힌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9호이다.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들]
혜소국사와 7인의 도적
혜소국사의 속명은 이정현(李鼎賢)으로 광종 23년(972) 경기도 안성에서 출생하여 10세 때 광교사(光敎寺) 충회(忠會)에게서 구법하고, 죽산 칠장사(七長寺) 융철(融哲)에게 배우고, 17세에 영통사(靈通寺)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성종 15년(997) 미륵사의 5교대선(五敎大選)에 뽑혔으며, 목종 2년(999) 대사(大師)가 되었으며, 현종 3년(1012) 수좌(首座)가 되었다. 덕종 2년(1033) 덕종이 법천사(法泉寺)로 옮겨 거주하게 했다가 다시 승통(僧統)으로 삼아 현화사(玄化寺)의 주지로 삼았다. 1045년 삼각산 사현사관을 개창했다.
이곳은 원래 산짐승이 많고 산적들이 들끓던 지역이었는데, 사현사관을 지어 묵어가도록 하여 사람들이 거주할 수 있게 한 것이다. 1046년 문종이 즉위하자 내전에서 <금고경(金鼔經)>을 강했으며, 1048년에는 문덕전(文德殿)에서 <금광명경(金光明經)>을 강설하여 비가 내리도록 빌었다. 1049년 왕이 봉은사에 거동하여 왕사(王師)로 삼았다. 1054년 다시 국사(國師)로 봉하여 대부경 김양(金陽)과 승정 도원(道元)으로 하여금 칠장사까지 모시고 가게 했다. 산에 돌아와서부터는 승상(繩床)에 앉아 옷 1벌만을 해 입고, 모든 인연을 끊고 있다가 오래지 않아 입적했다. 문종 8년(1054) 세수 83세였다. 시호는 혜소(慧昭)이다.
혜소국사가 칠장사에 머무를때 7도적과의 전설같은 이야기가 내려온다. 일곱도적이 절에 와서 못된 짓 을 일삼고 하던 어느날 도적 한명이 절 약수터에서 물을 먹던중 물 박아지가 황금으로 되어있는 것을 보고 몰래 품에 감추어 소굴에 돌아왔는데, 와서보니 평범한 표주박으로 변하는 일을 당한다.
다음날에는 다른 도적이 또한 이와같은 일을 겪고, 다음날은 다른도적이 또한 같은 일을겪는 수수께기 같은 일이 계속 벌어진다. 7도적 모두가 이 같은 경험을 다 겪고 나서야 "이 일은 분명 혜소국사님이 도력으로 우리를 시험하고 있는 것이다" 라 하여 바로 혜소국사에게 찾아가 잘못을 뉘우치고 제자로 받아 줄 것을 간청한다. 이에 혜소국사는 흔쾌히 허락하자 7도적은 열심히 수행하고 공부하여 모두 훌륭한 아라한의 경지까지 이르게 되었다는 설화다.
이때부터 절 뒷산 이름을 칠현산(七賢山), 절 이름을 칠장사(七長寺)라 했다고 한다. 재미있게도 이 일곱 도적들이 어린아이들이었다고 하여 오늘날에 와서는 사탕이나 초콜릿 같은 과자들을 불단에 올리는 불자들이 많다.
어사 박문수
조선중기에 천안에 박문수라는 선비가 과거시험을 보러 한양에 올라가는길에 칠장사에서 하룻밤을 묵게된다. 어머니의 말씀도 있으셨고 해서 나한전에 유과를 올리고 나한님께 불공을 드린후 잠을 청했다.
신기하게도 그날밤 꿈에 나한님이 나타나서 과거시험의 시제를 알려주며 총 8줄의 답안중 7줄을 가르쳐주고 나머지 한줄은 박문수 니가 알아서 써내라 하였다고 한다.
다음날 일어나 한양으로 올라가는 도중 내내 나한님이 가르쳐주신 글과 마지막 싯구를 생각하며 걸어 걸어 한양 과거시험장에 도착하여 시험을 보는데 과연 나한님이 가르쳐준 시제라 깜짝 놀라고 만다.
나한님이 알려준데로 7줄을 쓰며 나머지 한줄을 써내려 가는데 일필휘지라!
낙조토홍괘애산(落照吐紅掛碍山) : 넘어가는 해는 붉은 빛을 토하면서 푸른 산에 걸렸는데,
한아척진백운간(寒鵝尺盡白雲間) : 찬하늘 갈가마귀는 자로재는듯 흰구름 사이로 날아가네
문진행객편응급(問津行客鞭應急) : 나루터를 묻는 나그네 말채찍은 빨라지고
심사귀승장불한(尋寺歸僧杖不閑) : 절을 찾아 돌아오는 중의 지팡이는 한가하지 않구나
방목원중우대영(放牧園中牛帶影) : 방목을 하는 들판에는 소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우고,
망부대상첩저환(望夫臺上妾低환) : 남편을기다려 높은 누대위에 섰는 아내의 쪽그림자가 낮다
창연고목계남로(蒼然古木溪南路) : 푸른 고목이 들어선 냇가 남쪽 길에는,
단발초동농적환(短髮草童弄笛還) : 단발한 초동이 피리를 불며 돌아오더라.
이 답안으로 박문수는 장원급제를 한다.
박문수가 나한님께 유과 공양을 올리고 기도한 덕에 나한님께서 답을 가르쳐 주셨겠지만 그의 인품으로 보았을때 효성과 사람 됨됨이가 나한님도 감동받을 정도의 성품이라 나한님께서 큰 선물을 주신것일 것이다.
이곳 나한전은 조선시대 어사 박문수가 과거를 치르러 가면서 칠장사에 머물던중 꿈에 나온 시제가 과거 시험에 그대로 나와 장원급제를 하였다는 전각으로서 지금도 입시철이 되면 수많은 학부모들이 이곳 나한전을 찾아 기도를 한다.
궁예와 임꺽정
칠장사에는 여러 구전이 내려오는데 궁예가 10세까지 활쏘기를 하며 유년기를 보냈다는 활터가 남아있으며 의적 임꺽정이 갖바치스님 병해대사에게 바친 꺽정불이야기등이 있다.
칠장사는 임꺽정의 스승인 병해대사(갖바치스님)를 만나 이봉학등과 의형제를 맺은 곳이다. 갖바치는 이곳에 머물면서 주민들에게 가죽신 깁는 법을 가르쳐 가죽신이 안성유기와 더불어 안성 특산물이 되기도 하였다.
임꺽정이 난을 일으켰을 때 관군들을 피해 머물던 곳이기도하다.
SBS드라마 임꺽정(1996~7년)도 칠장사에서 촬영된바 있다.
임꺽정이 봉안한 것으로 전해져 ‘꺽정불’로 불리고 있는 안성 칠장사 소장 목조불상이 충북대 연구팀의 연대측정결과 1540여 년인 조선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밝혀졌다.
벽초 홍명희의 대하소설에서 <임꺽정>과 병해대사 이야기가 널리 알려진 가운데 임꺽정이 스승 병해대사를 위해 조성했다는 꺽정불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지만, 그 동안 불상의 진위를 놓고 의견이 엇갈려왔다.
그러나 충북대 연구팀이 꺽정불 밑 부분에 ‘봉안 임꺽정(奉安 林巨正)’이라고 쓰여 진 삼베 조각 등을 연대측정 한 결과 “1540년을 중간연대로 ±100년의 방사선 연대측정”이라는 결론을 내려 실제 임꺽정(?~1562)이 불상을 봉안했을 것으로 확실시 된다.
꺽정불은 예전부터 전란과 수많은 화마를 피해 내려온 칠장사의 귀중한 유물로서 문화재지정을 앞두고 있다.
첫댓글 잘 배우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