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대보문화(보령문화) 제 6집(1997년)에 실은 글입니다.
1950년-1960년대의 땔감들
1 머리말
1950년대와 1960년대 우리 고장의 땔감은 산에서 채취하는 나무, 풀, 낙엽 등과 들풀, 그리고 농산부산물 등이었다.
연탄이 생산되기는 했지만 기차의 연료(증기기관차 시절이므로 연탄불을 지펴 그 열로 수증기를 내품게 하고 수증기의 힘으로 기차를 움직였음)로 사용하거나 면사무소 등 극히 일부 관공서에서 연탄을 송편크기로 뭉쳐 말린 일명 조개탄이라고 부르는 것을 난로에 피워 난방을 하기도 하였지만 일반 가정에서는 연탄을 연료로 사용할 시설도 없었고 사용할 엄두도 못냈던 것.
하긴 대도시에서는 1950년대에 벌써 구공탄이 보급되어 땔감의 일대 혁신이 이루어졌지만 시골지역에서는 1970년대가 되어서야 구공탄이 보급되었고, 그나마도 읍소재지나 면소재지 등에서는 이를 사용하였으나 농어촌에서는 1980년대에도 상당수의 가정에서 땔나무를 연료로 사용하였으며 지금도 간혹 그런 집을 발견할 수 있다. 아무튼 집집마다 땔나무를 넉넉하게 쌓아 놓아야 마음 놓고 겨울을 날수 있는 등 식량걱정 다음으로 땔감걱정을 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땔나무가 중요했기 때문에 주인이 있는 산은 모두 자기네가 땔감을 채취하기 위해 남들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말렸고(말리다=못하게 하다) 산이 없는 사람은 면산이라고 부르는 공유임야 또는 주인이 멀리 살거나 손이 딸려(일손이 부족하여) 지키지(말리지)못하는 산에 가서 땔감을 채취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가까운 곳에는 그런 산이 별로 없고 어쩌다 있는 곳은 나무꾼이 수시로 들락거리며 나무(땔나무의 준말)를 하기 때문에 언제나 벌거숭이가 되어 있어 멀리 떨어진 깊은 산에 가서 나무를 해오기도 하고 , 남이 말리는 산에 몰래 들어가 나무를 해오거나 통나무를 마구 베다가 산주인에게 들켜서 도망치다 붙잡혀 지게다리가 부러트림을 당하는 불상사도 심심치 않게 일어나곤 하였다. 그 후 연탄이 대대적으로 보급되고 1980년대 후반에는 연료가 다시 기름으로 바뀌었고 요즈음은 가스보일러로 교체하는 집이 상당수 늘어가는 가 하면 전기히터 등 전기를 이용한 난방도 급속도로 늘어가고 있어 세상 참 많이도, 그리고 빠르게 변한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생각해보면 원시생활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 듯 한 그런 시절이었지만 그래도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아직 기성세대로 살아가고 있기에 그분들에게는 고생스러웠던 젊은 날의 추억을 다시 한 번 회상해 보는 시간을 갖고, 신세대들에게는 할아버지, 아버지들이 얼마만큼 고생하여 오늘날 이같이 풍요로운 시대를 열었나 짐작해 보는 기회를 제공하고자 어려웠던 시절의 땔감들에 대하여 말해보고자 한다.
2 땔감의 종류
땔감의 종류는 우선 산에서 채취하는 임산연료와 논밭에서 얻어지는 농산 부산물로 나눌 수 있다. 물론 이 밖에도 들풀이나 연탄 등이 있긴 하지만 들풀은 양도 적거니와 임산연료와 크게 다를 바 없고 연탄은 직접 채취해서 사용한 것이 아닐뿐더러 50년대와 60년대 시골지역의 땔감이 아니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주로 임산연료와 농산 부산물을 다루어 보고자한다.
가. 산에서 채취하는 땔감
1) 장작
장작은 통나무를 한 자반(45㎝)정도 길이로 자른 다음 도끼로 잘게 쪼갠 것인데 산에 소나무가 많기 때문에 장작도 주로 소나무 장작이 많았지만 참나무, 밤나무를 비롯해서 각종 잡목 등 아무 나무든 상관없이 장작으로 패어(쪼개어) 썼다. 특히 참나무 장작은 화력이 좋아 가정용보다는 도자기를 굽는 곳 등 높은 열을 필요로 하는 곳에서 주로 사용하였다. 아무튼 땔감 중에 가장 고급에 속한 것이 바로 장작이었고 그래서 장작은 읍, 면소재지의 영업집이나 부잣집 등 고급연료를 사용하는 집에서 주로 사 썼고 일반 농촌가정 특히 가난한 집에서는 큰 일(관혼상제)이나 치룰 때를 제외하고는 별로 사용치 않았다. 장작불을 때고 나면 채 타지 못한 불덩이가 남는데 이를 화로에 담아서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보조난방으로 긴요하게 사용하였다. 한편 이 타다 남은 불덩이에 물을 부어 끄면 검은 숯이 되는데, 이는 한데 모아 두었다가 화덕에 넣고 작은 그릇을 사용하여 요리를 할 때 연료로 사용하거나 다리미에 넣고 불을 붙여 빨래를 다릴 때 사용하기도 하였다. 장작을 세는 단위는 한 개비, 두 개비라고 하며 장작개비를 우물정자(井)형으로 한 자 높이로 쌓아 놓고 한 평이라 하며 보통 한 평에 얼마라고 값을 매겨 평을 매매 단위로 한다.
2) 숯
숯가마라고 부르는 구덩이에 직경 두 치~세 치(6~9㎝)정도의 통나무나 쪼갠 나무를 넣고 아궁이에 불을 지핀 다음 나무가 완전히 불덩이가 되었을 때 공기를 차단하여 불을 끈 다음 식히면 검정 숯이 되는데 잘 구워진 숯은 화력도 좋고 연기도 안 나서 고급연료중의 고급연료라 할 수 있다. 나무가 많은 산골에는 숯가마를 설치하고 숯만을 전문적으로 구워서 파는 사람들이 있었고 주로 참나무 종류만을 사용하였으며 지금도 각 지역마다 숯골 또는 숙굴이라는 지명을 흔히 찾아볼 수 있는데 대개는 이곳이 숯을 굽던 곳이었다. 숯불이 연기가 안 나는 것은 이미 신라 전성기에 그으름을 없애기 위해 경주시내에서 숯불만을 사용했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민요 가락중에 ‘석탄 백탄 타는데 연기만 풀풀 나고요, 요 내 가슴 타는 데는 연기도 내도 아니 나네.......’ 하는 가사 중 백탄은 바로 숯을 가리키는 말이다.
3) 고지백이
나무를 베어내면 뿌리부분이 남는다. 표준말로는 그루터기라고 하는데 우리 지방에서는 이를 고지백이라고 부른다. 우선 고지백이 주위를 괭이로 파면서 옆뿌리가 나오면 도끼를 이용하여 끊는다. 고지백이하면 대개는 소나무 밑동이고 소나무는 곧은 뿌리나무이므로 뿌리가 곧고 굵게 아래로 뻗어 있기 마련이다. 한쪽을 깊이 파고 도끼로 뿌리아래 가늘어진 부분을 찍어 반 이상 잘라지면 도끼 뒤통수로 고지백이 윗부분을 퍽퍽 힘껏 내려치기를 좌우로 대 여섯 번 거듭하면 뿌직하면서 고지백이가 넘어지는데 덩치가 큰 고지백이는 여러 조각으로 뽀개어(쪼개어) 캐내기도 한다. 이렇게 캐 낸 고지백이는 집에 짊어지고 와서 잘게 쪼갠 다음 쌓아 놓았다가 마른 후 땔감으로 사용하였다. 큰 나무를 베어낸 밑둥은 고지백이라고 하지만 지름이 5㎝이하의 작은 나무를 잘라낸 밑동은 새발고지백이라고 한다. 아마 캐내어 놓으면 새발(닭, 꿩, 오리 등)처럼 작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리라. 새발고지백이는 끝이 날카로운 괭이로 뒷부분 땅을 비스듬히 내리 찍으면서 뿌리 밑 부분을 자른 후 괭이를 확 제끼면 쑥 뽑혀 나오게 된다. 역시 말려서 땔감으로 쓴다. 꽃장다리라고 하는 것도 있다. 고지백이도, 새발고지백이도 없고 채취할 나무가 없으면 진달래 등컬을 캐다가 땔감으로 썼는데 이를 꽃장다리라고 한다. 물론 도토리나무, 짜구나무(자귀나무) 등, 갖가지 잡목들의 등컬을 닥치는 대로 캐지만 진달래 등컬이 주종을 이루고 굵은 뿌리가 없이 잔뿌리로 이루어져있어 캐기도 쉽기 때문에 주로 진달래 등컬들이 희생(?)의 대상이 되었다. 아무튼 꽃장다리는 불을 지펴 봐도 잔뿌리만 피그르하고 타고는 원등컬은 불쌈도 없어(불꽃이 시원찮고 화력이 없어) 땔감으로서 별 호평을 받지 못했다.
4) 솔가지
소나무를 베면 통나무는 목재로 사용하고 끝단(나무 윗부분=가지와 잎이 있는 부분)은 도끼로 족작거려(자르고 다듬어 땔감이나 기타 용도에 맞게 만들어) 마들가지(굵은 가지)는 장작으로 만드는데 이때 남은 잎이 달린 잔가지를 솔가지라고 한다. 솔가지는 단(우리 고장에서는 뭇이라 하고 세 뭇을 짊어지면 장정 짐으로 한 짐 정도 되는 크기임)으로 묶어 놓았다가 빨갛게 마르면 땔감으로 사용하였다. 소나무를 세워 놓은 채로 아래가지를 쳐주고 빽빽한 잔솔을 솎아 내어 솔가지를 만들기도 하는데 이렇게 아래가지를 쳐주는 것을 따쟁이 따준다고 하며 높은 나무의 따쟁이를 따려면 긴 장대 끝에 육철낫(무쇠낫)을 묶어가지고 사용한다.
추운 겨울 땔나무가 떨어지면 할 수 없이 눈이 하얗게 쌓인 산에 가서 생솔가지를 쳐다가 불을 때는데 화다닥 하면서 검은 연기를 내품으면 불 때던 사람은 그 매운 연기에 눈물을 철철 흘리기도 한다. 아래가지를 안 쳐주면 자연적으로 죽어 잎이 떨어지고 마르는데 이를 ‘삭장가지’라고 하며 이 또한 좋은 땔감이 된다. 어린 소나무를 통째로 베기도 하는데 이는 ‘보데기 도린다’고 한다. 아무튼 잘 마른 솔가지는 화력이 좋아 고급땔감에 속하였다.
5) 솔가루
지방에 따라서는 솔고루, 솔걸, 갈비, 솔갈비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부르는데 내가 살던 곳에서는 솔가루라고 불렀다. 가을이 깊어가고 활엽수들이 단풍으로 곱게 물들면 소나무들도 밑 부분의 잎이 노랗게 변색하고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10월말부터 11월까지 낙엽으로 떨어지면 이것이 바로 솔가루이다. 땅에 떨어진 솔가루들은 마르면서 검붉은 색으로 변하는데 이를 갈퀴로 긁어다가 땔감으로 사용하면 불쌈도 좋고(불이 괄하고=화력이 좋고) 마뎌서(헤프지 않고 천천히 오래 타서) 그야말로 일류 땔감이었다. 가랑잎이나 잡풀 잎 등에 비해 솔가루는 나무꾼들에게 인기가 높았으며 솔가루를 땔 때 나는 연기는 별로 독하지도 않고 약간 구수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6) 솔방울, 관솔괭이, 버급쟁이
소나무 열매를 솔방울이라고 한다. 지방에 따라서는 꽁방울이라고도 하는데 솔씨가 여물면 엉글하게 벌어져 속에 있던 씨가 빠져나가고 빈 껍질만 남게 되고 한 해가 지나면 하나둘씩 서서히 떨어진다. 힘이 약한 부녀자나 어린 소년들은 망태기(우리 고장에서는 구럭이라 한다)에다 이 솔방울을 주워 담아다가 땔감으로 썼는데 화력이 좋은 편이다.
어느 산에 큰 소나무를 베었거나 벌매(벌목=산에 있는 나무를 팔기 위해 모두 베는 것)를 할 때면 나무가 쓰러지면서 많은 솔방울이 떨어지므로 솔방울을 줍는 사람들은 웬 횡재냐 하면서 몰려들게 되는데 솔방울뿐이 아니고 삭장가지 부서진 것, 관솔괭이 부러진 것, 버급쟁이(벗겨진 나무껍질), 기타 나무 부스러기 등 땔감이 될 만한 것은 모두 주워다가 땔감으로 사용하였다. 여기에서 관솔괭이란 소나무 큰 가지를 칠 때 가지가 나무에 붙은 부분을 육철낫으로 찍은 다음 가지 밖의 부분을 잡아 다녀 부러뜨리므로 가지가 잘려나간 부분이 삐죽하게 뻗혀있게 되는데 이 부분에 송진이 나와 굳어버리고 몇 년이 지나면 가지와 송진이 한데 합해져 붉은색으로 단단하게 변한다. 이를 잘라다 불을 지피면 기름불처럼 화력이 좋으므로 저녁에 화리질(냇물에 불을 켜들고 다니면서 물고기를 잡는 짓)을 하는데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 송진과 함께 굳은 나무괭이를 관솔 또는 관솔괭이(광솔 또는 광솔괭이라고 발음하기도 한다)라고 하는데 일제시대 때 제2차 세계대전에 소요되는 항공기 기름이 부족하자 관솔기름을 짜서 충당했다고 하며 이를 위해 강제로 주민들에게 관솔을 채취해 오라고 할당량을 매기는 등 횡포가 심했다고 한다. 이렇게 관청에서 거두어들인다 해서 관솔(官솔)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7) 갈잎, 가랑잎
밤나무 잎이나 참나무 잎 떨어진 것을 갈잎이라 하며 떡갈나무 잎과 기타 잡목들의 잎은 통틀어서 가랑잎이라고 한다. 갈잎이나 가랑잎은 갈퀴로 긁어다가 때는데 부실부실해서 나뭇짐 쌓기도 어렵고 불을 지피면 헤퍼서 별로 인기 없는 땔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솔가루와 섞어서 긁거나 마른 풀, 키 작은 나무 등을 뜯어 놓고(낫으로 몽글게 베어 놓고=잔풀까지 깨끗이 베어 흩어놓고) 갈잎과 섞어서 긁으면 나뭇짐 쌓기도 좋고 땔감으로도 손색이 없어 나무꾼들이 그런 식으로 채취한다. 갈잎(가랑잎 포함)을 밟거나 채취하려면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요란해서 떠들기를 잘하는 사람이 어쩌다 조용한 성격의 사람이 큰 소리로 말할 때 시끄럽다고 하면 ‘갈잎이 솔잎보고 나무란다.’라는 말로 비꼬기도 한다.
8) 푸장나무(칠월나무)
8월(음력7월)쯤이면 산풀과 나무순들이 억세져서 나무로 채취하기에 적당한 시기가 된다. 잘 드는 낫으로 풀이며 갖가지 잡목, 송충목(송충이가 뜯어 먹어 죽은 소나무), 빽빽하여 솎아 주어야 할 어린 소나무 등을 싸잡아서 베어 널어놓았다가 바싹 마른 후 집으로 운반하여 쌓아 놓고 땔감으로 사용하는데 이것을 푸장나무라고 부른다. 음력 칠월달에 뜯기(낫으로 베기) 때문에 칠월나무라고도 하며 화력이 좋은 땔감이다. 농촌에서 주업인 논농사를 6월(음력)까지 김매기를 다 해놓고 벼이삭이 패기만 기다리며, 밭농사도 콩밭매기 등을 얼추 끝내놓은 상태이므로 칠월이야말로 농한기이고 또한 풀과 나무들이 약이 올라(억세져서) 푸장나무 뜯기에 안성맞춤인 것이다.
9) 비나무
여름에 푸장나무를 안 한 곳은 가을에는 농번기이므로 나무를 할 시간이 없고 겨울까지 가서 키 큰 풀들이 모두 말라죽어 하얗게 변하는데 이를 비나무라고 부른다.
낫을 잘 들게 갈아가지고 베어다 때면 화력도 좋고 깔끔하여 인기 있는 땔감이지만 겨울이기 때문에 날씨가 춥고 때에 따라서는 흰 눈이 쌓인 곳에 발을 빠져가며 베어야하는 등 채취하기에 어려움이 따르기도 하였다.
10) 물거리
산이 없어 땔나무하기도 어렵고 나무할 시간도 부족한 사람들은 짧은 시간에 오래 땔 수 있는 나무를 채취하기위해 궁리를 하게 되는데 통나무를 베어다가 때면 좋겠지만 남의 산에서 도둑으로 벨 수 없고 또 베어다 놓아도 산림감수(산림직 공무원 또는 산림조합직원)한테 들키면 벌금을 물어야 하므로 그럴 수도 없는 터, 그래서 할 수 없이 남들이 채취하지도 않고 산주인이 말리지도 않는 가시덤불을 베어다가 족작거려(도끼로 잘게 잘라) 땔감으로 썼는데 이 가시덤불을 물거리라고 한다. 물거리는 가시덤불이기 때문에 찔레덩쿨, 산초나무, 녹아지나무(노간주나무=杜松), 멍가나무, 꾸지뽕나무 등 가시돋힌 나무들과 넝쿨 속에 섞여 있는 자귀나무 물푸레나무, 자작나무 등등 갖가지 잡목들이 섞여 있어 이를 땔감으로 족작거릴 때 제대로 하지 않고 대충대충 잘라 놓으면 아궁이에 잘 들어가지도 않고 잘못하면 가시에 손을 찔리기도 하는 등 불 때기에 아주 좋지 못한 질 낮은 땔감이었다.
11) 북데기
산소마당(묘 주위)이나 나무가 없는 잔디밭 등 잔풀이 많은 곳을 낫으로 몽글게(거친데 없이 풀을 뿌리부분만 남도록 짧게) 깎은 다음 갈퀴로 긁어모으면 북데기가 되는데 불을 지피면 ‘피그르’하고 금방 타 없어지므로 헤프고 불쌈도 없는 질 낮은 땔감이었다.
12) 먼산나무, 동나무, 갈퀴나무
이것들은 땔감의 종류가 아니라 나무의 채취장소, 나뭇짐 형태 및 채취하는 도구에 따라서 붙여지는 이름이다.
○ 먼산나무 : 가까운 산(야산이라고 함)에는 채취할 나무가 적으므로 할 수 없이 나무가 흔한 멀리 떨어진 산간지대에 가서 해오는 나무를 먼산나무라고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4~5km이상 떨어진 산까지 가기도 하는데 점심을 싸가지고 가기도 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누룽지나 고구마 같은 것을 가지고 가서 점심으로 때우기도 하면서 나무를 한 짐씩 해가지고 저녁때 돌아온다.
○ 동나무 : 야산에서 잠깐씩 해오는 나무는 지게에 바작(바지게)를 달아서 그 위에 나뭇짐을 쌓지만 먼산나무와 같이 한 번에 많은 나무를 해올 때는 튼튼한 줄 두 개로 긴 풀 등은 직접 묶고 갈퀴나무는 밑에 긴 풀 등을 놓은 다음 허물어지지 않게 차곡차곡 쌓아가며 묶는데 동그랗지 않고 길쭉하게 타원형으로 묶는다. 이 나뭇짐을 동나무라고 하며 지게발목을 동나무 아래 1/3부분에 박은 다음 일으켜 세워서 짊어지고 온다. 잘 짜여진(만들어진) 나뭇짐은 모양도 예쁘고 튼튼하여 한번쯤 부려먹어도(잘못하여 넘어지거나 나뭇짐을 땅에 굴려도) 별로 허물어지지 않지만 잘못 짜여지거나 단단히 묶지 않은 나뭇짐은 짊어지고 오는 동안 기울거나(한쪽으로 무게가 쏠리거나) 나뭇짐의 형태가 변하거나 심지어 허물어져 애를 먹기도 한다. 한편 나뭇짐이 작으면 사람들이 까치집만큼 해온다고 놀리기도 한다.
○ 갈퀴나무 : 갈퀴를 사용해서 긁어모으는 솔가루, 갈잎, 가랑잎, 북데기 등을 통털어서 갈퀴나무라고 하는데 대개 바작을 단 지게에 나뭇짐을 싸서 짊어져 나르며 비나무와 섞어서 동나무로 만들기도 한다.
나. 땔감으로 사용한 농산 부산물
1) 볏집
농산부산물중 가장 대표적인 땔감이다. 벼농사를 주업으로 하였기 때문에 생산량이 많아 자연히 땔감으로 사용하였던 것, 하지만 짚을 직접 땔감으로 사용하는 경우보다는 이엉(우리 지방에서는 나래라고 함)으로 엮어 초가지붕을 덮었다가 1~2년 지난 다음 개초(초가지붕을 새 이엉으로 덮는 것)할 때 겉에 있는 묵은 이엉을 걷어내려 땔감으로 사용하였다. 이를 석은새라고 부르는데 잘 마른 석은새는 화력도 보통은 되고 특히 타고 남은 재가 많이 생산되어 보리 갈 때 밑거름으로 긴요하게 썼다.
2) 보릿짚
벼농사 다음으로 많이 짓는 것이 보리농사이므로 보릿짚의 생산도 많았는데 썩혀서 거름으로 쓰는 외로는 용도가 없어 여름철 땔감으로 사용했다. 불쌈도 별로 좋지 못하고 특히 장마철 습기가 차서 눅눅하면 불때기가 고약스러웠다. 불 땐 후 재가 많이 남아 아궁이가 차므로 자주 재를 치워야하는 번거로움도 있었다.
3) 밀짚
밀짚은 보릿짚보다는 윗질로 치는 땔감이었다. 밀대방석을 엮어 사용하기도 하고 꺼적대기를 엮어서 외양간이나 헛간 등에 비가 들어오지 않도록 둘러치기도 하기만 주로 연료로 사용하였다.
4) 콩대, 팥대
콩이나 팥, 녹두 등 콩과작물들을 수확하고 나면 빈대와 깍지 등이 남게 되는데 불을 지피면 화력도 좋은 편이고 마뎌서 훌륭한 땔감으로 쳤다. 콩대나 팥대는 큼직하게 묶어 깍지동으로 쌓아놓는데 뚱뚱하고 큰 몸집을 가진 사람을 깍지동만 하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5) 수숫대, 옥수숫대, 스슥대(조대)
수숫대는 엮어서 고구마 북장(방 한쪽에 둥글게 둘러치고 그 속에 고구마를 저장하는 곳)을 만들거나 집을 지을 때에 흙벽의 기초가 되는 외를 엮는데 사용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땔감으로 썼다. 옥수숫대나 스슥(조)대와 함께 훌륭한 땔감으로 쳤다.
6) 왕겨
방앗간에 벼를 가지고 가서 방아를 찧으면 벼껍질인 왕겨가 남는다. 요즈음이야 거름으로 쓰거나 축사에 톱밥과 함께 넣어 가축의 오물을 정화시키는데 쓰지만 옛날 땔감이 귀한 집에서는 이를 땔감으로 사용하였다. 왕겨 불을 때려면 불무(풀무=바람을 일으키는 기구)로 바람을 계속 일으키며 한 손으로는 끊임없이 왕겨를 뿌려주어야 하므로 약간의 기술(?)이 필요하였다.
7) 기타
이 밖에도 고춧대, 고구마줄기, 메밀대, 들깻대, 참깻대 등 불어 타는 농산 부산물은 뭐든지 땔감으로 사용하였으니 지금 생각하면 땔감이 부족하던 그 시절이 꿈같이 느껴진다.
3 땔감 채취 및 운반에 쓰던 도구들
가. 땔감 채취에 쓰이던 도구들
1) 톱
나무를 자를 때에 쓰이는데 큰 통나무를 베는 큰 톱은 두 사람이 마주보고 앉아 톱을 양쪽에서 잡은 다음 밀었다 잡아당겼다 하면서 나무를 벤다. 흥부가 부인과 둘이서 박 탈 때도 큰 톱으로 이와 같은 방법을 사용하였다. 중간크기의 톱(그도라고도 부름)은 혼자서 톱질을 하며 작은 통나무를 자를 때 사용하였고 작은 톱은 땔나무 채취에는 사용치 않고 목수들이 사용하였다.
2) 도끼
나무를 자르거나 장작을 패는데(쪼개는데) 사용하였고 고지백이를 캘 때도 큰 역할을 하는 도구였다. 예로부터 나무꾼하면 도끼를 연상할 정도로 많이 사용하였으며 동화 중 ‘금도끼와 은도끼’에서도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3) 괭이, 곡괭이
괭이와 곡괭이는 땅 파는데 쓰이는 연장이지만 고지백이를 캘 때 없어서는 안 될 도구이었다.
4) 낫
낫은 양철낫, 강철낫, 육철낫, 황새낫 등 종류가 다양하지만 양철낫은 벼 벨 때나 보리 벨 때 사용하였고 푸장나무나 비나무를 할 때는 강철낫을 사용하고, 따쟁이를 따거나(솔가지를 치거나) 잡목 등의 가지를 칠 때, 물거리를 할 때 등은 튼튼한 육철낫이나 황새낫을 사용하였다.
5) 갈퀴
갈퀴는 대나무를 가늘게 쪼개어 한쪽 끝을 일정하게 구부려 불에 구워 갈퀴발을 만든 다음 이를 엮어 가지고 부채살 모양으로 한쪽은 펴지게 하고 한 쪽은 모아서 묶고 자루에 단단히 매면 되는데 솔가루, 갈잎, 북데기 등 갈퀴나무를 긁는데 사용하는 도구이다.
나 땔감 운반에 쓰이던 도구들
1) 지게
지게는 대개 소나무로 만드는데 길이 4자정도(120~130㎝), 지름 2~3치(6~9㎝)정도로써 가지가 60정도 벌어진 나무토막 두 개를 잘 깎아 말렸다가 나란히 세우되 위는 약간 좁고 아래는 약간 넓게 한 다음 간대대 3개로 연결시킨 후 등태(짚으로 엮음)와 멜방 2개를 달아 만든다. 이렇게 만든 지게는 통나무, 장작, 동나무 등을 짊어져 나르는데 사용한다. 하긴 어디 나무뿐인가? 볏단, 보릿단, 쌀가마 등 농산물이나 이삿짐, 장짐, 돌덩이 등 혼자서 질 수 있는 모든 것을 나르는 도구로서 긴 세월을 우리 서민들과 함께 해왔고 아직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아 간간히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2) 바지게
우리 지역에서는 바작이라고 한다. 싸리를 엮어서 만든 바지게는 지게위에 올려놓고 고정시킨 다음 그 위에 갈퀴나무, 솔방울, 기타 나무부스러기 등 알지게에 짊어질 수 없는 나무들을 올려가지고 운반한다. 지게와 마찬가지로 나무 운반에만 쓰는 것이 아니라 재, 두엄 등 농사에 필요한 짐이나 흙, 자갈 등 공사에 필요한 짐 등 알지게에 질 수 없는 모든 물건을 나르는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도구이었다.
3) 달구지
달구지는 대개 소가 끌기 때문에 소달구지라고 부르는데 일본말의 잔재가 남아서 구르마라고 많이 불렀다. 신작로(새로 만들어 넓은 길)가 난 소재지 지역으로 통나무를 나를 때 사용하였다. 달구지 역시 나무보다는 장짐이나 곡식 가마 등 무거운 짐을 나르는데 더 많이 이용하였다. 한편 달구지가 다닐 수 없는 산길로 나무를 나르거나 또는 달구지가 없는 사람은 말이나 소의 등에 나뭇짐을 직접 실어 나르기도 하였는데 이와 같이 마소의 등에 직접 실은 나뭇짐을 짐바리 또는 나뭇바리라고 하였다.
4 나무하던 시절의 추억
가. 소년나무꾼
1950~1960년대의 시골 어린이들은 어려서부터 나무를 하면서 자랐다. 나도 초등학교 취학 전부터 나무하러 다닌 기억이 난다. 처음에는 다섯 살 위인 형을 따라가서 조금씩 같이 하였고 8~9세 때 부터는 구럭을 짊어지고 가서 솔방울, 버급쟁이, 솔가루 등을 담아오곤 하였다.
내가 난생 처음 지게를 지고 나무하러 간 것은 초등학교 2학년, 그러니까 아홉 살 되던 해 늦여름으로 기억된다. 집에서 작은 들을 건너 500~600m정도 떨어진 불걱산(흙이 붉은 황토로 된 산이라서 그리 불렀음)이란 작은 야산에 가서 푸장나무를 해 왔던 것.
이렇게 시작된 나무하기는 학교에 안가는 공휴일이나 방학 때는 물론 평일에도 집에 돌아왔을 때 어둡기 전까지 한 시간 정도의 여유만 있으면 나무하러 산으로 가는 생활로 이어졌다. 시계가 없던 시절(한 동네에 한 두개정도 있었음)이었으므로 시간을 측정하는데 서산에 기우는 해를 기준으로 하여 그날그날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서산으로 해가 넘어갔으면 나무하러가지 않는 날이고, 아직 해가 보이면 나무하러 가는 것으로 정해놓고는 해가 넘어가기 전에 집에 도착하기 위해 빨리 뛰어오던 기억들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요즈음 초등학생들이 집에 가서 일을 하기 위해 빨리 달려가는 학생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그러나 그때는 많은 학생들이 으레 그렇게 하는 걸로 알았고 어린이, 어른 할 것 없이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노력했기에 어려운 시절을 극복하고 오늘날의 풍요를 이룰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중학생 때의 어느 일요일엔 5~6km정도 떨어진 통점절(용주암, 주산면 금암리 소재)부근에 가서 먼산나무를 해오는데 도중에 학교가 있는 면소재지를 거쳐야했다. 그때 신나게 뛰어놀던 같은 반 친구들이 나뭇짐을 지고 지나가는 나를 발견하고는 고생한다며 눈깔사탕을 주었을 때 배고픈 참에 먹던 그 맛이 어찌나 좋던지 그 후 아직까지도 그렇게 좋은 맛은 다시 보지 못한 것 같다. 어느 땐가는 집에 땔나무가 떨어져 그 날 저녁밥 지을 나무도 없는 형편에 이를 때가 있었다. 고3인 형과 중1인 나, 그리고 초등학교 5학년인 동생 등 3형제가 짜기를 “우리가 오늘 학교를 결석하고 나무를 하기로 하자.”라고 의견을 모은 후 이 사실을 아버지께서 아시면 날벼락이 떨어 질 터이니 비밀에 부치기로 하였다. 선친께서는 당시 우체국에 근무하셨기 때문에 아침 일찍 출근하시는데 우리는 꾸물꾸물 책보를 챙겨가지고는 천천히 집을 나오다가 아버지께서 서낭댕이(성황당) 고개를 넘어가셔서 안보이게 되자 집으로 돌아가서는 나무를 한 기억도 난다.
나. 쐐기 쏘이고, 벌 쏘이고, 독사 물리고, 손 베이던 푸장나무
더운 여름 날씨에 푸장나무를 하려면 여러 가지 어려운 점이 많다. 땀으로 멱감으며 나무를 뜯거나 짊어 나르는 것은 기본이고.
○ 나뭇잎에 붙어있는 쐐기는 곤충의 애벌레인데 등에 나있는 수많은 가시가 모두 독침으로 되어있다. 종류에 따라 독성도 차이가 있고 쏘였을 때 아픈 정도도 차이가 나지만 아무튼 모두가 보호색을 띄고 있어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방심하고 나무하는 사람의 손이나 팔뚝이 닿으면 ‘톡’하고 쏘는데 그 통증이 대단하고 퉁퉁 부어올라 하루 이틀 정도 가므로 나무꾼들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며
○ 정신없이 나무를 뜯다보면 모르는 사이에 벌집을 건드려 갑자기 덤벼드는 산벌을 미처 피하지 못하고 쏘여서 고생하는 수도 종종 있게 된다. 그나마 왕탱이(말벌)는 덩치가 크고 동작이 떠서 윙윙 소리를 듣고 피하기도 하고(한방만 쏘여도 크게 고생함) 바다리도 동작이 빠르지 못하며 몇 마리가 덤비는데 불과해 피할 수도 있지만 옷빠시(땅벌의 일본말) 집을 건드렸다간 작고 날쌘 놈들이 수백 마리가 한꺼번에 덤벼오는 통에 아무리 동작 빠른 사람이 재빨리 도망쳐도 한두방에서부터 많게는 십여방까지 쏘이는 일이 예사여서 얼굴이 퉁퉁 부어 가지고 다니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 또한 칠월독사란 말도 있듯이 독사들이 한창 살이 찌고 독이 오른 푸장나무철에 한번 물리기만 하면 크게 고생하고 심지어 죽기까지 하는데(핏줄을 물리면 죽는다고 함) 푸장나무를 하다보면 종종 뱀을 볼 수 있고 재수 없이 물려서 고생하는 사람도 가끔 있었다. 푸장나무 말린 것을 걷으려고 들어 올리면 그 밑에 뱀이 또아리를 틀고 있다가 대가리를 번쩍 들어 놀래키는가 하면 나무전을 들어 올릴 때 그 속에서 뱀이 툭하고 떨어져 혼비백산하는 경우도 있었다.
○ 어디 그 뿐인가, 서툰 낫질은 물론 숙달된 나무꾼도 손을 버지기(베이기) 일쑤인데 산에서 손을 베이면 고운 흙가루를 상처에 뿌려 피를 굳게 하기도 하고 담배가루나 쑥잎을 짓이겨 붙여 지혈을 시키기도 하며 상처가 심한 경우에는 메리야스를 찢어 묶어 매기도 하였지만 웬만큼 다쳐서는 상처를 응급처치한 후 그대로 나무하기를 계속한다. 낫으로 베이는 것 이외에도 왁새(억새)잎으로도 흔히 손을 베었고 가시에 손을 찔리거나 등컬에 다치기도 하는 등 수난이 많았다. 그래서 나무꾼(특정인이 아니라 시골사람 거의가 농한기에는 나무꾼임)들의 손은 온통 상처투성이가 되고 그때 그분들의 손은 20~30년 동안 나무를 하지 않고 세월이 흐른 지금 보아도 옛날의 상처자국이 흐릿하게 보인다.
다. 산말림과 도둑나무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듯이 산은 대부분 주인이 있어 남들이 나무를 못하게 말린다. 대개의 산주인은 산 아래 가까운 곳에 살기 때문에 가끔 자기네 산을 바라다보고는 나무하는 사람이 있으면 큰 소리로 “나무 하지 마아~.”하고 외친다. 그래도 나가지 않고 나무를 하면 쫓아가며 소리를 지르는데 그러면 슬그머니 다른 산으로 나가버린다. 간혹 고약한 산주인은 소리 없이 다가가 나무하는 사람을 붙잡아 혼을 내주거나 아예 지게를 빼앗아 버리기도 하고 나무꾼이 생나무를 베었거나 솔가지를 쳤을 땐 홧김에 지게를 부수어 버리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산말림과 관련하여 웃지 못 할 이야기를 한 가지 소개하면 어느 성씨 종중이든 대개 조상 산소가 집단화된 종산에는 산지기를 두고 산을 지키며 벌초도 하고 시제 때 제물도 장만하도록 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인데 산지기는 대개 가난한 천민출신들이 하게 마련이었다. 양반계급이 없어졌다지만 당시엔 양반 상놈을 따지는 사람들이 많던 때였다.
어떤 양반이 자기네 종산에 들어가서 나무를 하는데 산지기가 이를 보고는 “나무 하지마아.” 하면서 쫓아오는 것이 아닌가, “아니 저놈이 양반을 몰라보고 반말을 하네! 괘씸한 놈!” 하면서 나무를 계속하다가 산지기가 가까이오자 “야 이놈아 양반보고 함부로 나무 하지마?” 하면서 씨근덕거리니까 산지기가 하는 말, “그럼 누군지도 모르는데 ‘나무 하지 마시오.’ 하나요? 그렇게 반말이 듣기 싫으면 나무를 하시지 말면 될 거 아니요.” 하고 따지고 들으니 이 양반(사실은 양반일 것도 없는 다 같은 서민처지이나 성씨 덕분에 양반입네 하는 것뿐이지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산을 지키는 일은 이렇게 민간차원에서 이루어지기도 하였지만 정부차원에서 훨씬 더 엄하게 다루었다. 우리나라의 산림은 일제시대의 착취, 해방 후의 무분별한 남벌, 그리고 6.25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크게 훼손되어 삼천리금수강산이 벌거숭이산으로 변해 버렸고 땔감으로 계속 채취하기 때문에 정부에서 아무리 치산녹화를 부르짓어도 그 효과가 미미하였다. 결국은 1970년대 대대적인 지붕개량으로 짚이 땔감으로 사용되고 이어서 연탄이 보급되어 땔감의 일대 혁신을 이루면서 우리 산들이 푸르름을 되찾았지만 그러기전인 50~60년대에는 나무베기를 엄격히 통제하고 산림조합과 산림직공무원들을 앞세워 민간인들이 몰래 나무를 베고 솔가지 치는 것을 감시하도록 하였다. 이들은 가끔씩 돌아다니면서 불법으로 나무 베는 사람들을 적발하는데 이들을 속칭 산림감사(산림감시)라고 불렀으며 이들 산림감사들의 서슬이 어찌나 퍼렇던지 어느 동네에 산림감사가 나타났다하면 집집마다 장작개비, 생솔가지 등을 감추느라고 온 동네가 완전히 비상이 걸리고 말았던 것. 그러다가 들켜서 애걸복걸 사정하거나 잘 아는 사람에게 부탁하여 빼기도 하고(빼다=없었던 것으로 해주다) 끝내 해결치 못하고 벌금(또는 과태료)을 물기도 하였다.
한편 그 시절에 세무서에는 밀주 단속을 심하게 하였는데 그 또한 산림감사 못지않게 악명(?)이 높아 ‘산림감사’와 ‘술조사’는 시골지역이 가장(?) 무서운 존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라. 나무꾼의 쉼터
나뭇짐을 짊어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중간 중간에는 쉴 바탕이 있다. 아무리 무겁고 힘들어도 도중에 쉬는 일은 별로 없고 모두들 참고 쉴 바탕까지 와서야 나뭇짐을 받쳐놓고 쉬는 것이다. 쉴 바탕은 대개 모이마당(산소마당=묘의 둘레)과 같이 널찍하고 지게를 바치기 쉽도록 언덕이 진 곳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한꺼번에 5~10명씩 와서 쉴 수 있는 것, 해가 서산에 뉘엿뉘엿 할 때쯤이면 여러 개의 나뭇짐들이 나뭇길(나무하러 다님으로서 난 좁은 산길)을 따라 일렬로 내려오는 광경이며 쉴 바탕에 짐을 받쳐놓고 땀을 닦으며 왁자지껄 떠들며 농담하던 기억들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간혹 양심 나쁜 사람들은 묘 봉분에다 지게를 바치기도 하고 근처 고구마 밭에서 고구마를 캐먹기도 한다. 배고픈 김에 캐먹는 고구마의 맛이야 좋겠지만 밭주인의 입장에서 보면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한 두 사람도 아닌 여러 사람들이 계속 캐 먹으면 고구마 농사는 완전히 망쳐버리는 것이므로 고구마 밭에 아카시아나무를 쳐다가 덮어놓기도 하고 나무꾼들이 돌아오는 시간쯤이면 밭에 나와 지키기도 해보는 등 안간힘을 쓰지만 그 피해는 상당히 컸다.
마. 나무 따먹기
사람이 사는 곳엔 으레 노름(도박)이 있기 마련인가, 나무꾼들이 산에서 나무내기 노름(?)을 하기도 하는데 이를 나무 따먹기라고 한다. 나무가 귀한 봄판(겨울동안 모두 채취했으므로 봄에는 채취할 나무가 적음)에 따뜻한 양지편 모이마당에 둘러앉아 잡담도 하고 씨름도 하고 실컷 놀다가는 집에 돌아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으면 2~3명이 갈퀴나무 한전(한 아름 정도)씩을 내놓고 갈퀴치기 또는 낫치기로 승부를 가려서 이긴 사람이 몽땅 가져가는 것인데 나무를 딴 사람(이긴 사람)이야 의기양양해서 나무를 짊어지고 가지만 잃은 사람은 집에 빈 지게를 지고 갈 수도 없고 할 수 없이 날이 어둑어둑 해지면 통나무를 베거나 생솔가지를 쳐가는 등 불법행위로 이어지기도 하였다.
○ 갈퀴치기
갈퀴의 자루는 땅에 대고 갈퀴발 중 맨 끝의 것 한 개를 한손으로 잡아 갈퀴 전체가 지상과 40~50도 정도로 비스듬하게 한 다음 흔들흔들 하다가 갈퀴가 뱅그르르 여러 바퀴 돌아 땅에 떨어지도록 힘껏 돌려서 던지는데 갈퀴가 엎어지면 이기는 것이고 잦혀지면(배 부분이 위로 오르면) 지는 것이 되며 모두가 엎어지거나 반대로 모두가 잦혀지면 갈퀴 돌리기를 계속해서 승부를 낸다.
○ 낫치기
낫치기는 낫자루 부분을 잡고는 앞으로 뱅그르르 여러 바퀴 돌아서 떨어지도록 힘껏 돌려서 던진 후 낫이 땅에 떨어져 꽂히면 이기는 것이고 안 꽂히면 지는 것이 되며 승부가 나지 않으면 던지기를 계속하여 승부를 가린다.
5 맺음말
동화 ‘금도끼와 은도끼’에서는 마음씨 착한 나무꾼이 산신령으로부터 금과 은으로 된 도끼를 얻어 팔자를 고치게 된다.
그리고 전설 ‘나무꾼과 선녀’에서도 마음씨 착한 나무꾼이 선녀를 아내로 맞아 잘 살게 된다. 이 두 이야기에서 엿볼 수 있듯이 우리의 조상들은 오랜 세월동안 나무를 하며 살아왔다. 산간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나무를 도시에 내다 팔아서 살림을 꾸려나가는 전문적인 나무장수요, 그 밖의 시골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각자 자기집의 땔감을 구하기 위해 산을 오르는.......
그러니까 모두가 다 나무꾼이었던 것이다. 어른, 학생, 아이 할 것 없이 모두가 나무를 하러 다녔고 남자들이 나무할 여건이 안 되는 집은 여자들도 나서서 나무를 하였던 것이다.
물론 나무를 채취해 팔아서 생계를 꾸리는 전문 나무꾼 외에도 자기집 땔나무를 해놓고 여유가 있으면 부업으로 나뭇짐을 팔아 가용 돈을 보태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고 그러다보니 나무를 사서 때는 사람들이 많이 사는 읍, 면소재지 등 소도시에는 나무시장이 형성되었다. 지금도 대천동에서 동대교를 잇는 부분에 나무장터라는 이름이 남아있고 이를 한자로 목장리(木場里)라고 부르고 있다.
대천 지역에 사는 50~60세 이상 되는 사람들이 옛날 성주산에 가서 나무 해 오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리라. 저녁때면 각자 나뭇짐을 지고 허기진 배를 움켜진 채 무거운 발길로 긴 나뭇짐 행렬에 끼어 터벅터벅 걸어오던 그 어려웠던 시절, 성주에 살면서 그래도 대천에 있는 학교를 다닐 수 있었던 선택받은(?) 학생들도 아침에 나뭇짐을 짊어지고 대천에 와서 팔고는 등교하여 공부를 한 후 하교할 때 빈 지게를 지고 집에가 는 생활을 되풀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 회고하는 사람들도 있다. 요즈음 세상이야 너무 잘 먹어 살이 찌고 운동이 부족하여 체력관리를 위해 등산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지만 옛날에는 틈만 있으면 나무를 하기위해 지게를 짊어지고 산판을 헤매야 하였던 것, 작대기로 지게발목을 ‘타닥타닥’두드려 장단을 맞추며 “어떤 놈은 팔자 좋아 고대광실 높은 집에 지집 찌고(계집 끼고) 누웠는데 이 내 팔자 어이해서 지게다리 짊어지고 지리산을 헤매이나.”하고 어디서 들은 풍월로 잘 맞지도 않는 민요가락을 흥얼거리며 산자락을 오르내리는 나무꾼들, 가난하던 시절이었기에 잘 못 먹어 비쩍 마른 체구에 햇볕에 그을려 검고 꾀죄죄한 얼굴, 거친 손발, 그리고 입은 것 또한 남루한 차림새, 더구나 겨울 같은 때에는 목욕마저 자주 할 형편이 못되어 땟국이 주르르 흐르는 외모, 오죽하면 ‘땔나무꾼’이란 말이 생겼을까? 얼굴이 시커멓고 외모가 변변치 못하며 꾀죄죄하면 “에이 그 사람 순 땔나무꾼처럼 생겼더라.”고 표현함으로서 나무꾼을 못나고 무식한 사람의 대명사로 사용하기도 하였던 것.
참으로 생각하고 싶지 않은 우리들의 과거이지만 그러나 불과 30년 전에 있었던 숨길 수 없는 엄연한 우리들의 과거가 아니겠는가, 그토록 어려웠던 시절을 이기고 놀라운 경제성장으로 오늘날 물질의 부를 이루어 잘 먹고 잘 살 수 있게 되었지만, 그 시절을 겪지 않은 20~30대 젊은이들은 이런 이야기를 어떤 감정으로 받아들일까? 과연 실감이나 날까? 의심스럽다. 아니 말 그대로 동화나 전설 같은 이야기로 흘려버리고 말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아버지들이, 그리고 50대 이상 늙어가는 우리의 기성세대들이 굶주리며 이를 악물고 열심히 일하고 절약하여 오늘의 풍요를 이룬 것을 젊은이들은 알아야 할 것이다.
끝으로 땔나무와 관련한 말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나무 : 땔나무의 준말
○ 나무꾼 : 땔나무를 하는 사람
○ 나무하다 : 땔나무를 마련하다. 땔나무를 채취하다.
○ 나뭇간 : 땔나무를 쌓아두는 헛간
○ 나뭇광 : 땔나무를 쌓아두는 광
○ 나뭇길 : 나무꾼들이 나무하러 다님으로서 난 좁은 길 , 초경(樵逕), 초로(樵路)
○ 나뭇단 : 다발로 묶어 놓은 땔나무
○ 나뭇더미 : 나무를 쌓아 놓은 더미
○ 나뭇동 : 나무를 큼직하게 묶은 덩이
○ 나뭇등컬 : 나무를 베어내고 남은 밑동, 그루터기 부분
○ 나뭇바리 : 마소의 등에 실은 나무의 짐바리
○ 나뭇지게 : 나무꾼이 나무하러 지고 다니는 지게
○ 나뭇짐 : (사람이 지거나 마소에 싣거니 한)땔나무의 짐
○ 땔거리 : 땔감
○ 땔나무 : 땔감이 되는 나무, 화목(火木), 시목(柴木)
○ 땔나무꾼 : 땔나무를 해오던 나무꾼, 나무꾼, 초부(樵夫), 아주 순박하기만 한 사람을 농조로 이르는 말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