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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아이를 사랑해야 하나
야누쉬 코르착 1. 어떻게, 언제, 얼마나 - 왜? 나는 많은 질문들이 대답을 기다리고, 많은 의구심들이 해명을 바라고 있음을 느낀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모르겠다고. 당신이 책을 밀쳐놓고 당신 스스로 생각의 실을 잦기 시작한다면, 그 책은 의도했던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지시와 처방에 따라 재빨리 책장을 넘긴다든지, 그리고 이 책이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관대하게 미소를 짓거나, 아니면 도움 말이나 참고할만한 사항을 찾는다면, 그것은 작가의 의도에 따른 것은 아니고, 다만 그 의도와는 상반된 결과에 이른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나는 내가 알지 못하는 부모들이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내가 알지 못하는 아이를 어떻게 키울지 모르겠고, 알 수도 없다. 나는 단지 “키우기를 원하는지”라든가, “키워야 하는지”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을 뿐이다. 이 같은 “나는 모른다”라는 대답이 학문에서는 새로운 생각을 떠오르게 하는 원초적 안개와 같은 것이라면, 학문적인 사고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고통스럽고 공허한 대답이 될 것이다. 나는 아이들과의 관계에 대해 말하는 현대의 학문에게 하나의 경이롭고, 생명과 매혹적인 놀라움으로 가득차고 창조적인 “나는 모른다”라는 대답을 이해하고 사랑하도록 가르치고자 한다. 어떤 책이나 어떤 의사도 우리 자신의 깨어있는 생각과 조심스러운 관찰을 대신할 수 없다는 점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이따금 우리는 모성애가 한 여인을 고상하게 만든다는, 즉 여자는 어머니가 될 때 비로소 정신적으로 성숙해진다는 견해를 대하게 된다. 그렇다. 이 불타오르는 모성이라는 말은 외적이고 정신적인 삶의 모든 영역을 포괄하는 질문들이 나타나도록 한다. 그런가 하면 우리는 이 모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방치하거나, 그 책임을 비굴하게 먼 미래로 연기하거나, 그 책임을 돈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에 분개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에게 이런 식의 생각을 끝까지 밀고나가, 완성된 해답을 달라고 요구해 보라. 그 생각이란 어떤 낯선 한 여자에게 당신의 아이를 낳아달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다. 우리에게는 스스로 고통스럽게 낳아야 하는 생각들이 있는 법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가장 값진 것이다. 그 생각은 어머니인 당신이 아이에게 젖을 줄지 우유를 줄지, 그 아이를 인간으로 키울지 혹은 여자아이로 키울지를, 아이를 이끌어야 할지, 아니면 강요라는 고삐로 매달고는 앞에서 끌고 갈지, 아이가 아직 어릴 동안만 함께 놀아줄지 어떨지, 아이와 애정을 주고 받으면서 당신 배우자의 인색하거나 달갑지 않은 애무에 대한 대체물을 찾을지를 결정하는 역할을 맡는다. 하지만 이제 아이가 자라게 되면 당신은 그 아이를 혼자 내버려두거나 적대적으로 대립할 것이다. 2. 당신은 “나의 아이” 라고 말한다. 임신 기간동안이 아니라면, 당신은 언제 아이에게 가장 큰 권리를 가지겠는가? 복숭아 씨 만한 작은 심장에서 울리는 고동소리는 당신 맥박의 메아리이다. 당신의 호흡은 아이에게 공기 중의 산소를 전달해 준다. 그 아이와 당신 속에 같은 피가 흐른다. 어떤 붉은 핏방울도 그것이 당신에게 있을는지 아이에게 있을는지, 혹은 그 피가 흘려질른지, 혹은 임신과 출산의 비밀에 의해 죽게 될른지 당신은 알지 못한다. 당신이 삼키는 한 조각의 빵은 아이가 걷는 두 다리를 만드는 재료가 되고, 아이를 감쌀 피부와 보는 눈과 생각하는 뇌와 당신을 향해 뻗을 손과 “엄마”라고 부르면서 짓는 미소를 만들 재료가 된다. 당신들은 결정적인 순간을 함께 경험해야 한다. 당신들은 함께 고통을 나누어야 한다. 종이 울리고 기도문은 - “준비하라”고 말한다. 그리고 동시에 아이는 “나는 내 삶을 살 거예요”라고 말하고, 당신은 “이제 너 자신의 삶을 살아라”라고 말한다. 경련을 일으킬 것 같은 내면의 두려움과 함께 당신은 아이의 고통을 고려하지 않은 채 그를 세상에 내놓아야 하고, 아이는 당신의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고 힘차고 단호하게 뛰쳐나갈 것이다. 잔인한 행동이 아닌가. 아니다. 당신이나 아이는 알아챌 수 없을 만큼, 미세하고, 기막히도록 익숙하게 수천 번도 더 몸을 떤다. 인생에서 당신들의 몫을 요구하기 위해, 그리고 거기서 태고로부터 적용되는 일반적인 법칙에 따라 당신들에게 속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취하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내 아이”. 아니다. 임신한 몇 달 동안도 내 아이가 아니다, 출산의 몇 시간 동안도 그 아이는 당신에게 속하지 않는다. 3. 당신이 낳은 아이의 무게는 10파운드 정도다. 그 중에 8파운드는 물이고 한 줌 정도의 탄소와 칼크, 질소, 황, 인, 칼륨과 철이 있다. 당신은 8 파운드의 물과 2파운드의 재를 낳은 것이다. 그리고 당신 아이 속의 물 한 방울은 때로는 구름의 증기이고, 눈의 결정이고, 안개고, 이슬이고, 개울이고, 도시 운하의 하천이다. 탄수화물과 질소의 원자들은 모두 수백만 가지 다른 결합의 부분일 뿐이다. 당신은 단지 이미 있는 것을 한데 합쳤을 뿐이다. 끝없는 공간 속에서 떠도는 흙, 당신의 가까운 반려자인 태양은 5천만 마일이나 떨어져 있다. 우리의 작은 지구는 십 마일 정도의 딱딱하게 굳은 얇은 표피를 가진 삼 천 마일의 불타고 있는 덩어리이다. 불덩이로 채워진 이 얇은 껍질, 바다 한 가운데 있는 한 줌의 육지인 것이다. 육지에는 나무와 수풀과 곤충들과 새들, 짐승들 사이에 사람들이 우글거린다. 수천만 명의 사람들 중에서 당신은 하나의 지푸라기, 하나의 작은 먼지를,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세상에 낳았다. 아이는 너무나 약하다. 수천 배로 확대해야 비로소 하나의 점처럼 보이는 박테리아까지도 그 아이를 죽일 수 있다... 그러나 이 “무”는 바다 속의 파도와 폭풍우와 번개와 태양과 은하수의 형제이다. 이 작은 먼지는 곡식 이삭과 풀과 참나무와 야자수 나무의 형제이다. 그리고 둥지 속의 갈색부리새와 새끼 사자와 망아지와 어린 강아지의 형제이다. 그 속에는 느끼고, 조사하고, 인내하고, 갈망하고, 기뻐하고, 사랑하고 신뢰하고 증오하고, 믿고 의심하고, 좋아하기도 하고 배척하기도 하는 그 무엇이 들어있다. 이 작은 먼지는 자신의 생각으로 모든 것을, 별과 대양과 산과 계곡을 파악한다. 그렇다면 영혼의 내용은 가없는 우주 만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것은 인간적인, 사라 없어질 먼지로 이루어진 존재 속에 있는 모순이며, 그 속에 신이 내재한다. 4. 당신은 “나의 아이”라고 말한다. 아니다. 그것은 공동의 아이, 아버지와 어머니의, 조상과 그 조상의 조상의 아이이다. 선조들의 고리 속에서 잠자고 있던 어떤 먼 “나”, 오래 전에 잊혀진 부패하고 관 속에서 나온 목소리가 갑자기 당신의 아이에게서 말을 한다. 3백년 전 전쟁 혹은 평화 속에서 어떤 사람이 이리저리 교차하는 인종과 민족과 계급이라는 만화경 속에서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는 권력을 얻었다. 때로는 동의에 의해, 때로는 완력으로, 또 때로는 경악과 사랑으로 도취된 순간에 말이다. 그는 기만하거나 유혹했고, 하지만 아무도 누가 언제 했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예정론의 책에 기록하셨고, 인류학자들은 두개골의 형태와 머리카락의 색깔로 그 수수께끼를 풀어내고 싶어한다. 어떤 예민한 아이는 이따금 자기를 주워온 아이라고 상상한다. 꼭 맞는 말이다. 그를 만든 사람은 이미 오래 전에 죽었다. 아이란 당신이 단지 부분적으로만 해독할 수 있는, 아주 작은 상형 문자가 빽빽이 적힌 양피지 사본이다. 그러나 당신은 많은 것을 지워 버리거나 삭제하고, 자신의 내용으로 채울 수 있다. 잔인한 법칙이라고? 아니다. 훌륭한 인식이다. 그 인식은 모든 아이들에게서 끝없이 연결되는 세대들의 최초의 마디를 만들어낸다. 당신에게 낯선 당신의 아이 속에 잠들어 있는 당신 자신의 작은 부분을 찾아 보라. 어쩌면 당신은 그것을 찾아낼 수 있고, 그것을 활짝 피어나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이와 측정할 수 없는 것. 아이와 영원. 아이- 무한한 공간 속의 작은 먼지 아이- 시간 속의 한 순간. 5. 당신은 “그 아이는 ... 되어야 해, 혹은 그 아이가 ... 하기를 원한다” 고 말한다. 그리고 당신은 그 아이가 닮아야 할 모범을, 당신이 아이에게 바라는 삶의 형태를 찾는다. 주변에 회색의 평범함이 지배한다는 것은 아무 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스스로를 만들어야 하고, 이러저러한 것들에 도달하려고 한다. 작은 걱정거리와 무의미한 노력, 진부한 목표들... 채워지지 않은 희망과 고통스러운 분노, 영원한 동경... 불의가 지배한다. 차가운 무관심은 얼음처럼 굳어지게 하고, 기만이 숨을 막히게 한다. 발톱과 이빨을 가진 것들은 공격하고, 조용한 품성을 가진 것은 자신 속으로 숨어 들어간다. 그리고 그들은 단지 고통을 받을 뿐 아니라 해를 입기도 한다. 그런 아이에게서 무엇이 이루어질 것인가? 전사(戰士), 혹은 노동자, 지휘관 혹은 일반 사병? 혹은 아이는 오로지 행복하기만 할 수 있을까? 행복은 어디에 있고, 그것은 무엇인가? 당신은 그 길을 아는가? 도대체가 그것을 아는 사람이 있을까? 당신은 행복을 이룰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어떻게 미래를 내다보고 어떻게 아이를 보호할 것인가? 물거품 이는 삶이란 급류 위에서 날고 있는 한 마리 나비 같은 아이에게 어떻게 그의 비행이 힘들지 않도록 지속성을 부여하고 강인하게 하고, 그 날개를 지치지 않게 할 것인가? 자신의 본보기를 통해, 도움과 충고와 좋은 말을 통해서 말인가? 아이가 그것을 거부한다면? 15년 후에 아이는 미래를 향해 단호한 시선을 던질 것이며, 당신의 시선은 과거로 향할 것이다. 당신 속에서는 회상과 습관이, 아이 속에서는 동요와 고집스러운 희망이 지배하고. 당신은 의심에 휩싸이고, 아이는 기대를 품고 신뢰하고, 당신은 두려워 하지만 아이는 두려움을 모른다. 청소년들은 만일 그들이 조롱당하고 저주바도고 경멸당하지 않으면, 항상 부족함으로 가득한 과거를 변화시키려고 한다. 당연히 그래야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잘못된 길을 가지 않는다면 길을 찾을 것이며, 떨어지지만 않는다면 기어올라갈 것이고, 손이 찢겨 피가 날 정도가 아니라면 자신의 힘으로 파헤칠 것이다. 그러나 조심스럽게, 조심스럽게 말이다. 아이는 말한다. “내 생각은 달라요. 날 돌보는 일일랑 그만 두세요.” 그렇다면 넌 신뢰하지 않니? 너는 나를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니? 나의 사랑은 네게 귀찮기만 하니? 인생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철부지 아이, 감사할 줄 모르는 불쌍한 아이 같으니라구! 6. 고마와할 줄 모르는 것: 지구는 태양이 빛을 비쳐주는 것을 고마워하는가? 나무는 씨앗에서 나왔기 때문에 씨앗에 감사하는가? 나이팅게일은 어미 새의 깃털이 자기를 따뜻하게 해주었다고 어미 새에게 노래를 불러 주는가? 당신은 아이에게 당신이 부모로부터 받은 것을 다시 주는가, 아니면 당신이 사업에서 하듯이 모든 것을 기록해 두었다가 이자까지 계산해서 되돌려 받으려고 빌려줄 따름인가? 사랑이란 대가를 요구하는 하나의 업적인가. “어미 까마귀는 미친 듯이 이리저리 날갯짓을 하며, 새끼의 어깨에 닿을 듯이 앉아 나무 막대기를 세차게 깨물고, 그 바로 위에서 공중을 떠돌며, 머리를 망치처럼 나무 줄기에 부딪치기도 하고, 작은 가지들을 부수고, 절망에 차서 지치고 쉰 목소리로 까악 까악 운다. 장난꾸러기 소년이 새끼 한 마리를 둥지에서 꺼내 땅바닥에 던지면 어미 까마귀는 날개를 질질 끌며 땅으로 내려와 계속 울지만, 더 이상 울음소리조차 나지 않고, 미친 듯이 날개를 치며 새끼의 발 밑에서 퍼드득거린다. (...) 사람들이 그 어미 까마귀의 새끼들을 모두 죽이면 어미는 나무 위로 다시 올라가 텅 빈 둥지를 내려다본다. 그리고 그 위를 선회하면서 어미 새는 뭔가 곰곰 생각한다.” (체롬스키1)) 모성애란 근원적인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자기 방식대로 변화시켰다. 모든 문명 세계는 문화를 접촉하지 않은 집단을 예외로 하고는 유아 살해를 행하고 있다. 12명의 아이를 가질 수도 있음에도 두 명의 아이를 가진 부부는 태어나지 않은 열 명의 아이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 있고, 그 중에는 바로 “그들의 아이”일 수도 있었을 한 아이가 있다.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 가운데 그들은 어쩌면 가장 값진 아이를 죽였을지도 모른다. 어리석은 교만이다. 오랫동안 나는 사람들이 태어나게 될 아이들을 계산해 보고 노심초사하는 것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점령군 치하의 부자유 속에서 나는 시민이 아니라 하인으로서, 학교와 공장과 병원과 생존을 위한 문화적 여건과 시설이 생겨나야 한다는 것에 대해 염려하지도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 나는 오늘날 이루어지고 있는 (인간문명의) 경솔한 증대와 확장을 부당하고 무책임한 범죄라고 느낀다. - 우리는 어쩌면 우생학과 인구 정책의 관점에서 정해진 새로운 입법의 전야에 있는지도 모른다. 7. 아이는 건강한가? 아이가 더 이상 자신과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은 어머니에게는 여전히 이상할 것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둘로 겹쳐진 생명을 이끌어나감에 있어 아이에 대한 염려는 자신을 조심스럽게 돌보는 일에 일부였다. 그녀는 모든 것이 지나가고 이 순간이 끝나기를 갈망했다. 그러면 염려와 어려움으로부터 자유로와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오히려 이전에 아이는 더 가깝고, 더 밀접하게 그녀에게 속했으며, 아이의 안전도 더 확실했고, 그 안전함이 더 당연하게 보이는 것은 기이한 일이다. 경험많고, 빌린, 자신만만한 낯선 손들이 아이를 돌보게 된 순간, 그녀는 혼자가 된 것 같고 옆으로 밀려나, 불안해한다. 세상이 벌써 아이를 빼앗아간 것이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도록 강요된 이 긴 시간동안 많은 질문들이 떠오른다. 나는 그 아이에게 무엇을 주었는가? 나는 필요한 것을 모두 주었는가? 그 아이의 안전을 위해 무엇을 준비했는가? 등등. 아이는 정말로 건강한가? 대관절 왜 우는 걸까? 왜 아이는 말랐고, 젖을 잘 빨지 않으며, 잠도 자지 않는가? 혹은 너무 많이 자는 것은 아닌지? 아이의 머리는 왜 저렇게 크고, 굽은 다리와 꽉 쥔 주먹을 하고, 왜 저렇게 붉은 피부와 코 위에는 작은 물집이 있고, 왜 사팔뜨기처럼 쳐다보고 딸꾹질이나 재채기를 하고, 구토를 하고 목이 쉬었는가? 그것은 당연한 것일까? 어쩌면 사람들이 그녀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이 작고 속수무책의 아이를, 길거리나 공원에서 마주치던 작고 이빨도 안 난 아이들과는 전혀 달리 보이는 아이를 관찰한다. 삼 사 개월 지나면 내 아이도 저렇게 될까...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착각은 아닐까? 어쩌면 그들이 아이를 진지하게 여기지 않을까? 어머니는 불신감을 가지고 의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의 눈과 어깨짓과 눈썹을 치켜올리는 모습과 찌푸린 이마에서 뭔가 진실을 찾으려 한다. 그 의사가 결정을 못하고 있는지, 충분히 정신 집중을 하고 있는지를 읽어내려는 눈빛으로 그를 좇는다. 8. “아이는 과연 예쁠까? 그건 내겐 중요하지 않아.” 교육 문제에 관한 한 진지하다고 자부하는 솔직하지 못한 어머니들은 그렇게 말한다. 아름다움, 우아함, 몸매, 듣기 좋은 목소리, 그것들은 당신이 아이에게 부여한 재산이다. 건강이나 판단력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살아가는 여정에서 도움이 된다. 하지만 우리는 아름다움을 과대평가해서는 안되고, 더욱이 그것이 다른 재능과 연결되어 있지 않다면 오히려 해가 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럴수록 깨어있는 주의력으로 바라보는 것이 더 필요하다. 예쁜 아이를 키우는 것은 못 생긴 아이를 키우는 것과는 다르다. 그러나 아이가 관여되지 않는 교육이란 없기 때문에, 우리는 미모와 우아함의 문제를 아이들 앞에서 숨겨서는 안 된다. 바로 그렇게 한다면 아이를 해칠 것이기 때문이다. 미모에 대한 이 같은 꾸민 무관심은 중세의 유물이다. 꽃과 나비와 풍경화의 아름다움에 대해 그렇게 예민한 사람이 인간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무관심하게 대할 수 있단 말인가? 당신은 아이가 예쁘다는 사실을 아이에게 숨기려 하는가? 집에서 아이 주변에 있는 사람들 중 아무도 아이에게 그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 해도, 길거리나 가게나 공원이나 도처에서 낯선 사람들은, 어른이건 또래 아이건, 경탄이나 미소나 눈빛으로 그 사실을 말할 것이다. 못생겼거나 무례한 아이들이 자기를 따라오면 아이는 자신이 예쁘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아이는 자기 손이 자기가 사용할 수 있는 것임을 아는 것처럼 훌륭한 외모가 특권을 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나약한 아이가 훌륭하게 자랄 수 있고 건강한 아이가 불행한 사건에 희생될 수 있는 것처럼 예쁜 아이도 불행할 수 있지만, 추한 외모로 탱크처럼 무장되어 있어 두드러지거나 눈에 띠지 않지 않는 아이들도 행복하게 살 수 있음을 당신은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인생이란 아이가 가치 있다고 인식한 모든 장점들을 빼앗거나 가로채려 하기 때문이다. 수천 가지로 흔들리다가 간신히 찾은 균형 상태에서 아이는 때로 보모에게 “왜?” 라는 고통스러운 질문을 던진다. “내게는 미모는 중요하지 않아!” 당신은 잘못되고 진실되지 못한 상태로 시작할 위기에 처해있는 것이다. 9. 아이는 영리한가? 어머니는 처음에는 불안하게 이같은 질문을 제기하다가 곧 아이가 영리하기를 바라게 된다. 배가 부르고 구역질이 나더라도 먹어. 그리고 가서 자. 이런 식의 명령은 아이가 눈물을 흘리고 잠들기 까지 한 시간이나 기다려야 할지라도 이루어져야 한다. 네가 건강하기 위해서 이렇게 하는 것이란다. 난 말이지 네가 튼튼하게 자라기를 원해. 모래에서 놀지마, 단정한 바지를 입고, 머리가 엉클어지게 하지 마. 나는 네가 예쁘게 보이기를 원해. “이 아이가 아직 말을 안 해요... 누구누구보다 나이가 많은데도 말이죠... 아이가 공부를 못해요...” 인식하고 알기 위해 관찰하는 대신, 우리는 “성공한” 아이의 가장 좋은 보기를 들어 우리 아이에게 이 모범과 닮을 것을 요구한다. 부유한 부모의 자식이 막노동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어쩌면 그 아이는 불행하고 부도덕한 인간이 될 수도 있다. 아이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부모의 이기심이, 개체의 안녕이 아니라 큰 무리들의 야심이, 갈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이 아니라 틀을 묶어놓는 것이다. 활발한 아이와 수동적인 아이들, 생기 넘치는 아이와 무감각한 아이들, 지구력이 있는 아이와 변덕스러운 아이들, 잘 따르는 아이와 반항적인 아이, 창의적인 아이와 모방하기 좋아하는 아이, 잘 현혹되는 아이와 굳건한 아이, 사실적인 아이와 문학적인 재능이 있는 아이가 있다. 또는 탁월한 기억력을 가진 아이와 적당히 평균적인 기억력을 가진 아이, 습득한 지식을 활용하는 기치와 성실한 사고, 타고난 독재성과 사려깊음, 비판적인 안목이 있는가 하면, 일찍 발달하는 아이와 늦게 발달하는 아이, 편협한 관심과 다양한 관심 등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누구에게 문제가 되는가? “아이는 대학에 가야 해.” 라고 부모들은 좌절감을 가지고 말한다. 육체 노동의 화려한 르네상스를 미리 예감하면서 나는 사회의 모든 계층에서 육체 노동의 후보자들을 본다. 그 동안 부모와 학교는 특이한, 비전형적인, 균형잡히지 않은 낮은 지능을 가진 아이들을 가지고 이리저리 부딪쳐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아이가 얼마나 똑똑하고 영리한가 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현명하고 지혜로운가 하는 물음이다. 어려운 일이지만 자발적으로 포기하라고 부모들에게 순진하게 호소한다. 지능 검사와 심리 기술적인 실험들은 이기주의적인 야심을 효과적으로 제한시켜 줄 것이다. 하지만 이는 당연히 먼 미래에 대한 희망이다. 10. 착한 아이. 우리는 착한 것과 편한 것을 혼돈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아이는 거의 울지 않고, 밤에도 깨지 않으며 친밀하고 밝다. 그렇다면 착한 것이다. 변덕스럽고 눈에 띠는 이유 없이 울고 어머니에게 사랑스러운 느낌보다는 괴로운 느낌을 더 많이 불러일으키는 것은 나쁜 것이다. 신생아들은 자신의 상태와는 무관하게 유전된 성격에 따라 더 잘 참기도 하고 덜 참기도 한다. 후자의 아이는 한 가지 느낌을 열 번 우는 것으로 반응하고, 전자의 아이는 열 번의 마음에 들지 않는 요소를 한 번의 울음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한 아이는 잠을 많이 자고 느릿느릿 움직이며, 천천히 젖을 빨고, 생생한 긴장감이나 격렬함이 없이 운다. 다른 아이는 자극적이고 활발히 움직이며, 잠도 가볍게 자고 힘차게 젖을 빨고 한 번 울면 숨이 넘어갈 정도가 된다. 아이는 숨이 끊어질 듯 기침을 하여 거의 질식할 정도이다. 아이가 다시 정신을 차리도록 하기 위해서는 온갖 힘을 다 기울여야 한다. 그제서야 아이는 아주 힘들게 되살아난다. 나는 이것이 간유와 인과 유액이 없는 다이어트로 치료할 수 있는 병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이 병은 젖먹이를 강한 의지력과 근본적인 생명력, 창의적인 정신력을 가진 어른으로 자라게 할 수 있다. 나폴레옹도 갓난아기 때 자지러질 듯이 울곤 했다. 모든 현대 교육학은 편안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 노력한다. 끊임없이 그리고 단계적으로 아이의 의지와 자유를 만들어내는 모든 것을, 즉 아이의 강인한 영혼과 갈망하는 힘과 의지력을 무디게 하고 억압하고 근절시키려고 애를 쓴다. 아이가 내적으로 자유롭지 못하고 삶에 성실하지 않게 된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얌전하고, 순종적이고, 착하고, 편안한 아이로 키우려는 것이다. 37. 조심하라! 우리는 지금 우리 자신을 이해시키지 않으면 영원히 헤어진다. 몰래 빠져나가고 숨겨지기 원하는 생각들과 자기 자신에게 맡겨지고 구속받지 않는 감정에 질서를 부여해야 하고, 명령하는 의지에 따라 구속받아야 하는 것이다. 나는 아이를 위한 기본법으로 자유 대헌장2)을 주장한다. 다른 것도 있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세 가지 기본권을 찾아냈다. 1) 아이들이 죽을 수 있는 권리 2) 오늘 하루에 대한 아이들의 권리 3) 아이들의 원래 모습대로 있을 수 있는 권리. 이 같은 권리들을 유지하면서 가능하면 잘못을 적게 범하기 위해 우리는 아이들을 알아야만 한다. 오류가 있는 것은 틀림없지만, 우리는 겁을 내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아이의 측정할 수 없는 능력과 강한 저항력을 약화시키지 않으면 그는 놀라울 정도의 주의력을 가지고 스스로 수정한다. 우리는 아이에게 너무 많거나 적당하지 않는 것을 먹으라고 준다. 우유를 너무 많이 주거나, 신선하지 않은 계란 등을 말이다. 그러면 아이는 토해낸다. 우리는 아이들이 소화할 수 없는 지식을 전달하려고 애를 쓴다. 그러면 아이는 이해하지 못한다. 쓸데없는 충고를 하면 아이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 충고를 따르지 않는다. 우리는 아이들의 건강한 이성과 의지를 교육적인 영향이나 교훈적인 계획에 따르도록 강요할 수 없는 것은 인류를 위해서는 참으로 다행이고, 그것은 공허한 말장난은 아니다.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자신의 인물에 대한 우리의 고찰과 판단에 적극 관여하는 것이 부인할 수 없는 아이들의 권리라는 이해는 내게 아직도 형성되지 않았고 입증되지도 않았다. 우리가 아이에게 존경과 신뢰를 보낸다면, 그리고 아이 스스로 신뢰를 갖고, 스스로를 표현하는 권리를 가진다면 의심이나 실수는 더 적을 것이다. 38. 아이에 대한 뜨겁고, 사려깊고 균형잡힌 엄마의 사랑은 이 아이의 때 이른 죽음에 관한 권리를 고백하게 한다. 지구가 태양을 60번 돌고 난 후가 아니라 한 번 혹은 세 번의 봄이 지난 후 자신의 생애를 끝낼 권리이다. 산욕(産褥)에 필요한 수고와 비용을 한 번 혹은 두 번 이상 부담하기를 원치 않는 사람에게는 지나친 요구이다. “주시는 이도 하나님이고, 거두시는 이도 하나님이다.” 자연스럽게 느끼는 단순한 사람들은 그렇게 말한다. 그들은 모든 씨앗이 다 싹을 내지 않고, 모든 병아리가 살아갈 능력을 갖고 태어나지 않으며, 모든 묘목이 나무로 자라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프롤레타리아 사이에는 유아 사망률이 높을수록 더 힘있는 세대가 살아남고 성장한다는 견해가 있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약한 아이들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열악한 생활 환경은 힘있고 건강한 아이들도 약화시킨다. 그에 반해 부유한 어머니가 가능할지도 모를 아이의 죽음을 두려워하면 할수록 아이는 육체적 정신적 발달을 위해 훨씬 더 부적절한 조건을 가진다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흰 페인트를 칠한 방의 한가운데 흰 옷을 입고, 흰 라커 칠을 한 기구들과 흰 장난감으로 둘러싸인 창백한 아이를 얼마나 자주 보는가. 그러나 나는 어린아이에게 어울리지 않는 수술실같은 이 방에서 피가 모자라는 육체 속에 텅 빈 영혼이 자라나는 것을 고통스럽게 느낀다. “구석마다 전기 램프를 켜놓은 이 흰 살롱에 있는 사람들은 틀림없이 간질병에 걸릴 것이다.” 라고 클라우디나는 말한다.3) 보다 정확한 조사에 따르면 너무 많은 밝은 빛은 어두운 지하실에 빛이 부족한 것과 같은 정도로 신경과 조직에는 해롭다고 한다. 우리는 “자유”라는 개념을 위해 swoboda(불구속성)과 wolnosc(자율성)이란 두 가지 단어를 사용한다. 나는 swoboda는 소유 관계를 나타낸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나는 나의 인격을 이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wolnosc속에는 Wola (의지), 즉 의지의 욕구에서 생긴 행위가 들어있다. 가구가 대칭적으로 배치된 아이들 방, 반짝거리게 쓸어놓은 시립 공원들은 swoboda가 나타날 수 있는 장소가 아니고, 아이들의 활발한 의지(wolnosc)가 실현될 수단을 가진 작업장도 아니다.4) 아이를 위한 방은 원래 분만실에서 발전되었고, 이 분만실은 무균 상태라는 규정에 따른다. 디프테리아 박테리아로부터 아이를 보호하려는 노력에서 그들을 지루함과 의지박약이라는 곰팡내나는 분위기 속으로 옮겨놓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야 한다. 여러 번 사용하는 기저귀의 나쁜 냄새는 오늘날에는 거의 접할 수 없지만, 반면 요오드포름의 냄새는 자주 맡을 수 있다. 여기서도 많은 것이 변했다. 흰 라커칠을 한 가구 뿐만 아니라 해안의 모래 사장, 피크닉, 스포츠, 소년단 활동 등이 있다. 하지만 아직 시작도 채 안된 상태다. 구속은 약간 줄었지만, 아이들의 삶은 여전히 짓눌리고 억압받는다. 39. 쿠쿠, 요 귀염둥이, 너의 아픈 데가 어디지? 아이는 오래된 생채기의 아주 작은 흔적을 겨우 찾아내고, 좀더 세게 부딪쳤더라면 멍든 자국이 났을지도 모르는 부분을 가리킨다. 아이는 종기나 피부 반점, 그리고 상처난 흔적을 찾는데는 대가이다. “아프다” 란 말에 어쩔 줄 모르는 당혹함과 절망적인 체념의 어조와 몸짓과 표정이 뒤따른다면, “아이구, 미워”란 말은 혐오나 구역질의 표현과 연결된다. 아이가 초콜릿이 잔뜩 묻은 손을 내밀고는 엄마가 흰 손수건으로 깨끗이 닦아줄 때까지 아주 싫은 듯이 바라보는 것을 한번 보아야 한다. “아이가 의자에 부딪치면 의자를 한 대 때려주는 것이 더 낫지 않는지, 세수를 하다가 눈에 비누가 들어가면, 침을 뱉고 유모를 발로 찬다?.......” 문 - 아이는 엄지 손가락을 찧었다, 창문 - 아이는 밖으로 몸을 기대다가 떨어진다, 과일 씨 - 아이의 기도가 막힌다, 의자 - 아이가 그것을 밀쳐서 그 밑에 깔린다, 칼 - 아이는 심하게 다친다, 막대기 - 아이의 눈이 찔린다, 아이는 상자 하나를 들었다, - 아이는 감염된다, 성냥불 - 아이는 불에 댄다. “너의 손목이 부러질거야, 사람들이 너를 차에 치게 할거야, 개가 너를 물거야. 자두 먹지 마, 찬물 마시지 마, 맨발로 다니지 마, 햇볕이 뜨거울 때 돌아다니지 마, 목도리 둘러. 왜 너는 쫓아가지 않니. 이제 넌 절름발이가 될 거야, 이제 너의 눈이 아플 거야. 맙소사! 너 피를 흘리는구나! 누가 네게 칼을 줬지? 엄마는 한 대 맞는 것이 혹이 나게 할 뿐 아니라 뇌종양이 될까봐 두려워한다. 구토는 식사가 소화 불량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다가온 성홍열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도처에 추락과 위험이 도사리고 있고, 모든 것은 위협적이고 불행을 알리는 것이다. 한 아이가 이 말을 다 믿고 덜 익은 자두 한 파운드를 몰래 먹지 않거나 어른들의 주의력이 느슨해졌을 때, 한쪽 구석에서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성냥 장난을 하지 않았다면, 아이가 수동적으로 순종하며, 신뢰를 가지고 요구에 굴복하고, 모든 경험을 피하고, 모든 모험을 거부하고, 모든 의지의 흥분을 피한다면, 아이는 무엇을 하게 될까? 아이가 자신의 내면에서 뭔가를 느끼고, 놀라고, 가슴이 불타오르고, 마음이 찌를 때 말이다. 당신은 생후 첫해부터 여러 중간 단계를 거쳐 성숙기까지 어떻게 이끌어야 할지에 대해 확고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 소녀가 눈 깜짝 새 최초의 월경에 이르고, 남자 아이들은 발기와 사정(射精)에 마주치게 된다면 말이다. 그렇다. 아이는 아직 엄마 품에 누워 있다. 그러나 나는 벌써 그 아이가 어떻게 생식하고 출산을 할지 묻는다. 그것에 대해 생각해 보기에는 20년도 길지 않은 시간인 것이다. 40. 죽음이 아이를 빼앗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우리는 아이를 생명에서 멀리 한다. 죽음을 피하기 위해 우리는 아이를 제대로 살게 하지 않는다. 썩어가는 환경 속에서조차 무엇이 나타날지 초조하게 기다리며 자란 우리는 항상 기적으로 가득 찬 미래를 향해 서둘러 나아간다. 가치있는 내일을 맞을 준비를 하기 위해 오늘, 여기서 아름다움을 찾으려 하지 않는 우리는 얼마나 나태한지. 내일은 우리에게 새로운 비상을 가져다주어야 한다. “아이가 벌써 걷고 말도 할 수 있다면” 이란 말은 히스테리와 같은 기다림 외에 무엇이겠나? 아이는 걸을 것이고, 참나무 의자의 딱딱한 모서리에 부딪칠 것이다. 아이는 말을 할 것이고, 침침한 일상의 말을 지껄일 것이다. 왜 아이들의 “오늘”이 그들의 “내일”보다 더 못하고 가치가 덜 하단 말인가? 수고가 문제가 된다면 내일은 더 많은 수고를 가져올 것이다. 마침내 그 내일이 되면 우리는 또다시 기다릴 것이다. 아이는 아직 아무 것도 아니며 그는 뭔가가 될 것이고, 아이는 아직 아무 것도 모르고, 뭔가를 알게 될 것이며, 아이는 아직 아무 것도 할 수 없지만, 뭔가를 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근본적인 생각은 우리에게 끊임없는 기다림을 강요한다. 전체적인 의미에서 보자면 인류의 절반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의 삶은 허튼 말에 불과하고, 그들의 노력은 순진하고, 그들의 감정은 지나갈 것이며, 그들의 생각은 우스꽝스럽다. 아이들은 어른들과 구분된다. 그들의 삶에는 뭔가가 빠져 있다. 그러나 그들의 존재에는 우리의 삶보다 분명치 않은 “더 많은 것”이 있다. 우리의 삶과 다른 그들의 삶은 현실이지 예견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인식하고 아이들이 존재하고 성숙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 아이의 삶에 대한 불안은 아이가 다칠 수도 있다는 두려움과 결부되어 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은 다시금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청결에 대한 염려와 연결된다. 여기서 금지의 항목들은 새로운 각도로 바뀐다. 옷과 양말과 넥타이와 손수건과 신발의 청결과 다치지 않고 온전함, 더 이상 이마에 난 구멍이 아니라 바지에 난 구멍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아이의 건강과 안녕이 아니라 우리의 명예욕과 지갑이 주역을 담당한다. 금지와 계명의 새로운 항목들은 우리 자신의 편리함이라는 바퀴를 굴러가게 만든다. “그렇지 걷지 마, 넌 마차 밑에 깔릴 거야. 땀이 나니까 걷지 마. 더러워질 테니까 걷지 마, 내 머리가 아프니까 걷지 마!” (그러나 우리는 근본적으로 아이들에게 걷는 것을 허용한다. 그것은 우리가 허용하는 유일한 삶의 표현이다.) 이 유령 같은 기계는 아이의 의지를 파괴하고, 에너지를 분쇄하고, 그의 생명력을 연기 속에 날려버리기 위해 해마다 작용한다. 내일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오늘 아이를 기쁘게나 슬프게 만들고, 놀라게 하고, 화나게 하거나 흥미를 주는 것을 사소하게 여긴다. 아이가 이해하지도 이해할 필요도 없는 내일을 위해 사람들은 인생은 길다며 아이들을 속인다. “아이와 물고기는 목소리를 갖지 않아. 넌 아직 시간이 있어, 네가 클 때까지 기다려. - 오호라, 넌 긴 바지를 입었군, 넌 벌써 시계를 찼군. 보자, 벌써 수염이 났네.” 그리고 아이는 생각한다. “난 아무 것도 아냐. 하지만 어른들은 뭐야! 난 이미 나이가 들었는데도 여전히 아무 것도 아냐. 몇 해나 더 기다려야 하지? 내가 어른이 되기만 한다면...” 아이는 기다리고, 그렇게 살아간다. 아이는 기다리고 자유롭게 숨을 쉴 수가 없다. 아이는 기다리고, 뭔가를 기다리고, 아이는 기다리며, 침을 꿀꺽 삼킨다. 아름다운 유년이라고? 아니다. 그것은 단지 지루할 뿐이다. 아이가 몇 번의 아름다운 순간을 가진다면 그 순간들은 억지로 빼앗은 것이거나 속여서 얻은 것이다. 일반적인 수업, 마을의 학교, 공원이 있는 도시들, 오솔길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없다. 이 모든 것은 여전히 너무나도 비현실적이고 절망적일 정도로 멀리 있다. 한 권의 책은 글쓴이의 경험과 체험의 범주 속에서 움직이고, 그의 정신적인 영역과 자신의 작업실이 어떻게 보이며, 그의 정신적인 토양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에 따라 생겨난다. 그래서 우리는 낯선 권위에 대한 순진한 견해들을 그렇게 자주 보게 된다. 41. 그렇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허락해야 하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그것은 지루해하는 노예에서 거만한 폭군을 만들 뿐이다. 우리는 금지를 통해 스스로를 지배하고, 체념 속에서라도 의지를 강화시키고, 좁은 공간에서 활동하기 위한 상상력을 발전시키고, 통제에서 벗어나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아이의 비판력을 일깨워야 하는 것이다. 아이들도 물론 일면적이지만 인생을 위한 준비로서 가치를 가진다. 모든 것을 허락하는 동안 우리 스스로 점점 더 많이 욕망에 빠져들어 점점 더 심하게 아이의 의지력을 제한하지 않도록 주의하자. 후자에서 우리는 의지력을 약화시키고, 전자에서는 그것에 해를 끼친다. “네가 원하는 것을 하라.” 그리고 “나는 네가 좋아하는 것은 뭐든지 하고, 사 주고, 네가 좋아하는 것을 모두 주겠다. 그러니 단지 내가 네게 무엇을 사 주고, 너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요구만 하라. 네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되도록, 내가 계산할게. 그리고 네가 내 말을 듣도록 내가 계산할게.”라는 말로는 되지 않는다. “네가 커틀렛트를 먹으면 엄마가 책 사줄게. 밖에 나가지 마, 그러면 네게 초콜릿을 줄게.” 반대로 어린아이다운 “주세요.”란 말이나 아무 말 없이 내민 손은 우리의 “안 돼”란 말에 부딪친다. 그리고 대부분의 교육이 “넌 그걸 가질 수 없어.” “그건 안돼.” 혹은 “그건 금지되었어.”와 같은 말과 연결되어 있다. 어머니는 이 같은 질문을 밀쳐두려고 한다. 그녀는 이 모든 것을 편리하고 비겁하게 차라리 소파 위에 밀쳐두거나 나중으로 미루고 싶어한다. 그녀는 아이를 키울 때 정당하지 못하고, 실현될 수 없거나 성숙하지 못한 소망이 경험에 근거한 어른들의 금지와 불가피하게 충돌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공동의 영역에서 서로 다른 두 가지 희망 사항이나 권리가 더 비극적으로 충돌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아이는 타고있는 촛불을 입 속으로 넣으려 한다. 아이는 칼을 가지려 하고, 나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나는 아이가 다칠까봐 두려워한다. 아이는 꽃병을 향해 손을 뻗고, 나는 그 꽃병 때문에 안타깝다. 아이는 나와 공놀이를 하고 싶어하지만, 나는 책을 읽기를 원한다. 우리는 그의 권리와 나의 권리 사이에 경계를 정해야 한다. 아이는 유리를 잡으려 하고, 엄마는 내민 손에 입을 맞춘다. 그래도 소용이 없으면 엄마는 아이를 한 대 때린다. 그것조차도 도움이 안 되면 그녀는 이 유혹적인 대상을 감춰버린다. 아이가 손을 치우고 딸랑이를 던지고, 눈으로 숨겨진 대상을 찾으며 화난 듯이 엄마를 쳐다보면 나는 과연 누가 옳은지를 묻는다. 아이를 기만하는 엄마가 옿은가 아니면 그녀에게 고집을 피우는 아이가 옳은지? 금지와 명령의 수가 얼마 되지 않을 때 그 문제를 철저하게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은 그 숫자가 많아지면 지게 된다. 1) 폴란드 시인 스테판 체롬스키 (Stefan Zeromski, 1864-1925)의 문장을 의미상으로 인용했음. 2) Magna Charta Libertatum: 자유 대헌장. 1215년에 귀족들과 성직자들이 존 왕에게 서 얻어낸 특권, 영국 의회주의의 바탕 3) 클라우디나: 프랑스 여류 소설가 시도니 가브리엘 콜렛트Sidonie-Gabrielle Colette의 이야기에 나오는 주인공 4) 이 단락에서는 독자들에게 일반적으로는 “자유”라는 단어 하나 뿐인데 비해 두 개의 폴란드 어 swoboda와 wolnosc를 설명하는 것이 중요하다. (괄호) 속의 단어는 역자가 첨가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