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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3 ,6월에 어머님에 갑작스런 사형선고 "위암" 난 무너져 내리는 청천 벽력같은 소식을 접했다.사실 공부하기를 그렇게도 싫어했던 나는 이 소식을 듣기 전 공부에 취미를 붙이고 정말 열심히 공부하고 그것도 발단은 과외를 마치고 밤 12시쯤 귀가할 무렵이면 어머님께서 배가 고플까 봐 삶은 고구마를 싸 들고 그 먼 10리길 을 하루도 거르시지 않고 마중 나오시며 나에게 모든 기대를 하셨을 때다."우리 아들은 우리집에 대들보"난 잊혀지지 않는다.그때 당시 막내 외삼촌 께서 해성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으로 오셨을 때 어머님에 부탁으로 외삼촌 집 에서 학교를 다닐 때다.그러던 어머님께서 위암이라니? 그 소식을 접 하고 뛰쳐나와 그 험한 공동묘지를 거처 막내 이모님께 확인하기위해 그 먼 길을 밤10시에 단숨에 뛰어가 확인을 접했다.밤11시 자고 가라는 이모님에 말씀도 뒤로 하고 그먼 20리길을 뒤돌아오며 무서움도 잊었다.말 이 그렇치 산속으로만 다니는 산길이다.그 무시무시 하다는 각시연못을 지나 집에 돌아오니 밤 12시가 조금 지났다.어머님께는 암이라는 병을 속이고 혼자 어머님 곁에 뜬눈으로 날을 세우다시피 했다.
나의 꿈은 산산 조각이 나고 오직 열심히 공부해서 어머님께 효도 하는 길 고생만 하시는 어머님에 대한 처절한 꿈이었다.지극 정성으로 간호를 하고 새벽이면 황방산 용바위에 가서 물을 떠다 열심히 약을 대려 드리고 하나님 만은 우리 어머님을 살릴 수 있을 거라는 나의 마지막 믿음..그래서 난 철저히 교회를 지금도 싫어한다.
팔복동에 있는 신상교회까지 엎고 다니며 열심히 교회도 모시고 다녔다.그러나 나의 노력은 허무하게 끝이 나고 끝내 어머님은 그해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 날 숨을 거두셨다.
손가락 끝 발가락 끝 코끝 모두가 파랗게 죽어가며….
어머님에 임관식날 어머님은 모시 저고리 바지를 곱게 입으시고 영 돌아올 수 없는 관속으로 들어가셨다.모시적삼은용진셋째고모님께서 포목상을 남부시장에서 하고 계셨기에 마지막가시는 어머님을 진짜모시옷을 입혀 보내기 위해 직접 주문하여
가져 오셨다 하엿다.
집에서 어머님에 상을 치르던 날에도 다른 형제들은 무서움을 느낀다며 꺼려 했지만 난
어머님 곁에 꼬박 2틀밤을 세웠다.친척들이 문상을오고 아버님에 형제분은 3남 5녀다. 그리고 할아버지에 형제분은 6남 3녀로큰집안이다.특히 시누가 5명이다보니
어머님에 시집 살이는 얼마나 고달픈 나날이었을까.그나마 할머니는 어머님 꼴을 못 보시고 고모들 5분께 얼마나 험담은 하였으며 그 소리를 듣고 시누이 5분이 얼마나 엄마를 괴롭혔는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오죽 하였으면 어머님 상을 치르던 날 고모님 한 분 께서는 빨간 옷을 입고 문상을 오셨기에 화가 치밀어 "군에 입대해서 탈영하여 다 죽여
버리겠다".입에 담지못할 말을 했을까.내가 어렸을 적 할머니라는 분은 먹을 것을
드시다가도 내가 들어오면 얼른 벽장속에 숨기는 모습을 목격 했다.어머님이 얼마나
미웠으면 손주 까지도 그리 미워 하였을까.
숨을 거두시기전 너희들을 못 잊어서 죽어서도 너희들 주위를 지키겠다며….
그토록 나을 아끼고 사랑해 주셨던 어머니….나의 고등학교 졸업도 못 보시고,그리고 막내 초등학교 졸업식 여동생 중학교 졸업 모두를 못 보신 채..내가 막 공부에 취미를 느끼고 새벽 2시까지 공부를 할 때면 밤참 거리며 심지어는 담배 까지도...그때당시도 고1때부터 피우던 담배를 끊지 못하고 늦도록 공부 할 때도 담배가 떨어지면 난 안절부절을 못했다.그것을 보신 어머님께서 아버님 머리맡에 놓아둔 담배 한 가치를 살며시 가져와" 요 놈아 이것만 피우고 끊어"하시며 건내 주기 까지 하셨다,어머님은 내가 공부를 마치는 그 시간까지도 돈을 벌기 위해 매꾸리(방석)를 만들었다.잠이 오면 생 쌀을 한 두 개식 깨물어 드시면서... 왼손 세끼 손가락 마디는 굵직한 공이 가 베겨 있다. 닞에는
아버님은 돈 하고는 남이었고 걸어서 20분거리에 복숭아 과수원도 돌보지 않아 초여름이면 저희끼리 열매를맺고, 찾아가면 빨간 복숭아가주저리 주저리 많이도 열려있다.어머님께서는 도둑이 따갈까봐 어스름 땅거미가 질때면 긴 막대기를 들고 나는 뒤를따라 나선다.주위에서 소쩍새가 그리 슬피울면 어머님께서 소쩍새에 대한 슬픈 이야기를 나에게 들려주시며 20분거리의 복숭아 과수원에 다다른다.
나무야 미안하다.소독은 물론 쌓아주지도 못해 복숭아가 빛을 받아 아주 빨갛다.
벌레가 먹어 먹으면 반 타작이지만 달고도 너무 맛이 있다.그래도 성한 놈이 반 쯤은 된다.따면서도 미안했다.
그리고 아래 동내에 1000평 정도에 밭이 있다.그것 마저도 돌보지않고 엄마 누나들 그리고 나 채소를 가꾸어 리어카에 가득 실어 남부시장에 팔러 간다.나는 앞에서 끌고
엄마는 뒤에서 밀면 앞에서 끄는 사람은 보이질 않는다.그때가 국민학교 4-5학년쯤
되었을 것이다.집에서 남부시장 까지는 20리가넘는거리다. 야깡(시장)에 채소를 경매에 넘기고 돈을 받아오기를 한달 이상 반복 하다보면 그해 여름이 간다.그리고 엄마는 얼마나 배가 고프면 봄이면 집 앞에 버드나무 잎이 새파랗게 올라올 무렵에 먹을수만 있다면 저 나뭇잎을 따다 실컷 삶아서 나물로 묶혀 먹어봤으면 하셨다니...어찌 가엽고 불쌍한 어머님을
잊을 수 있을까.가슴을 치고 땅을 치고 울어 보아도 나에 슬픔은 더해만 갔다.
그 뒤로 나의 방탕 생활은 시작이 되고 그땐 수능시험이 아니라 예비고사 였다.
예비고사 마저 떨어지고 재수를 한답시고 학원비라고 속이고 그 돈으로 술로 생활을 보내고 용돈이 떨어지면 외상술에 싸우고 경찰서에 끌려가고 친구에 옷을 맡겨 놓고 술을 마시고.취하면 밤새 울고 그 세월이 1년 반 아버님은 물론 형제들은 나를 보고 어땠을까? 막내동생 어린것은 어땠을까?나에게는제일소중한나이에 나의 슬픔만 알고 주위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이 시점에 아버님께서 새 어머니를 맏이 한다며 나에게 의사를 물었다.
처음엔 무조건 반대했다. 며칠 후 곰곰이 생각하니 홀로 살아가실 아버님을 생각하니
반대 할 수가 없어 조건을 내 걸었다. "그러시다면 새 어머님과의 사이에서 자식 만 은 없게 해 주십시요"간절히 요구하고 승낙을 받아 새 어머니를 맏이 했다.새 어머님 또한 나에게 얼마나 많은 고통에 시달렸을까?
이 이야기는 밝히기가 망설여진다.아버님께서 오죽 하였으면 그때 돈 10만원을 마당에 던지시며 집을 나가라 하셨을까? 난 그 돈을 들고 검은 스모르 나팔바지에 머리는 덥수룩한 채로 무작정 서울로 향해 갈 곳이 없어 큰 누나집에 묵으며 일거리를 찾았다. 이때가 큰 조카 명수가 아장아장 걸을 때다.그때 일명 돼지 라고 했다.
마치 막내 이모부께서 막내 이모부님과 합자로 벽시계 월부 장사 할 떼여서 활부금을 주지않고 도망간 사람을 찾아 시계를 회수하는 일이었다.몇 달을 일에 매달리다. 12월 초쯤 영장이 날아 왔다는 소식을 접하고 입대하기 10흘전 서울에 성수 친구가 송별식을 해준 다기에 참석하여 엄청 많은 술을 마시고 또 큰 실수를 하고 말았다.집에 돌아오는 중에 통금시간에 걸려 들은 것이다. 잡아가려는 경찰을 때렸다는 죄목으로 경찰서에 끌려가 재판을 받게 되었다.판사에게 군 영장이 나와 9일 박에 남지 않았으니 용서해달라고 애원 하였지만 끝내 들어 주지않고 일주일간의 구속이 떨어져 유치장 신세가 되었다.군에 입대할 사람이 나타나지 않으니 수 소문 끝에 작은 누나 큰누나가 유치장에 면회를 온 것이다.난 얼굴을 들지못했다.
유치장에서 나와 입대일이 2틀박에 남지않아 고향집에 내려와 입대준비를 하고 다음날 어머님 산소에 들러 어머님께 고하고 바로 군용열차에 몸을 실었다.
그날이 동지 날 어머님이 돌아가신지 2년째 차창밖을 보며 한없이 울었다.너무도 엄마가 보고싶어서..그리도 귀한 아들이 군용열차에 실려 가는데 엄마는 보이질 않는다.
순진했던 나의성격.그리고 술은 입에 대지도 못했었다.마시면 토하고 그래도 마시고 그러다 보니 술이 아니면 잠을 들 수가 없고 너무도 보고싶은 엄마 왜 그토록 나에게 그 많은 정을 주시고 홀로 떠나셨을까.약을 드시고 조금이라도 기운을 차리시면 난 엄마를 등에 엎고 집마당을 몇 바퀴식 돌며 좋아했다.밤새 간호를 하며 엄마 젖을 만지다 잠이 들곤 했다. 다큰 고등학생이…내생각에도 그 뒤로 나의성격은 너무도 난폭해지고 두려움을 몰랐다. 팔복동이며,초상집 그리고 술집, 싸우지 않는 날이 거의 없었다. 오죽하였으면 내가 군에 입대하니 누나 동생들이 그리도 속이 편할 수가 없다고 했을까.
논산훈련소에 입소하여 6주간의 훈련을 마치고 기갑학교에 착출 되어 광주 기갑학교로 팔려갔다.
엄마 생각할 틈도 없이 너무도 고되고 배 고픈 나날이다. 8주간의 장갑차 조종교육을 마치고
다시 군용 열차에 몸을 싣고 의정부 101 보충대로 향했다.
101 보충대에서 자대로 팔려 가기 위해 대기하면서.기갑학교 재식 훈련은 너무도 정교하고 모두가 직각이다.대기중에 우리는 재식 훈련 시범을 보여주며 우리 기갑에
위상을 상기 시켰다.다음날 난 878대대(연천군청산면 백이리)로 자대 배치를 받고 일등병을 달고 도착했다. 이때부터 난 파란 만장 한 군생활이 시작 되었다.
몇 달은 자대 파악하느라 정신이 없었다.장갑차 M119 부조종수로 임명 받고 얼마 안되어
인사계상사께서장교식당에근무를명받고하루가지나고건의하여못하겠다며다시조종수로바꾸어달라요청했다. 그런대다른병사들은그자리가최고라며왜그좋은자리를
바꾸냐며 말들이 많았다.그래도 난 단호이 거절하고 며칠 후 27톤 8인치 자주 포 조종수로 위임 받았다.그때 병 월급이 2000원쯤 되었는데 PX에 들어가 옥수수 막걸리 한 두 잔에 안주로 빵 몇 개면 오버가 되었다.쫄따구가 벌써 PX오바나 시킨다며 벌로 완전 군장에 운동장을 몇 번을 돌고도 또 다음달 오버를 시킨다.너무도 먹고 마시고 싶어서
그 당시에 막 군이 좋아지려 할 때다.1식 3찬이라고 반찬도 3가지가 나오고
자대 배치를 받고 제일 아니꼬운게 일반 하사들이 고참 병들을 너무도 함부로 대하고
계급이 높다는 이유로...어짜피 군은 짬밥인대 병이나 하사나 달만 채우면 제대 하는데
하사들이 너무 눈꼴 사나웠다.그러던 난 고참하사들에 몇번을 얻어터지고 나에 복수심은 나날이 늘었다.그리고 나이는동갑이나 일년이 빠른 김기웅 상병 요것이 되게 못살게 괴롭혔다.요걸 언젠간 봐주기를 마음먹고 때를기다렸다.마치그때 보초병에게실탄을 지급 할 때라 그 녀석 교대 시간만을 벼르고 있을 때 마침 새벽 3시쯤 보초 근무중 내 앞에 나타났다.미리 적당히 술은 마셨겠다.내가 먼저 시비를 걸어 안되면 사살까지 마음을 먹었으니 지금 생각하면 너무도 어리석은 생각이었다.몇대를 후려치고 분이 풀리지않아 총대로 후려쳤다.이 소식은 내무반에 알려지고 내무반 고참과 그 동기들에 무참하게
당하고 여러 명에 얼마나 맞았는지 다음날 일어나지도 못하고 왠지 오른팔이 퉁퉁 부어 있었다.훈련을 받는 도중에도 팔이 너무 아파 인사계에 보고하고 병원에 후송되어 사진을 찍고 밖에서 동기들과 이야기 중 인대 날 급하게 찾으시는 분 "팔에 큰 바늘이 들어 있으니 수술을 해야 하니 빠리 오라는 것이다.지금도 내 오른팔엔 수술자국이 그대로다.
빼어낸 바늘을 나에게 보이며 주는 간호사 그 큰 바늘이 어떻게 그 깊숙히 박혔을까?
맞으며 몸부림 치다 모포 마늘질을 하다 꽃아 놓은 바늘이 들어간 모양이다.
난 군생활중 고참 선임들한테는그렇게 두들겨맞았다. 그러나 내밑에 후임 병들한테는
폭행이나 기압 한번을 주지않았다. 상병을 달고 나보다 고참 하사들이 제대를 하고
나보다 한 두 달 빠른 하사들만 남았다.때는 이때다 싶어 새벽 1-2시에 제일 고참부터
깨워 샤워실로 데려가 반 죽도록 때려주고 고참 병들 한테 함부로 대하지 않을 때까지.
무자비 하게 다스렸다.그때당시 선임 하사도 알아 차렸지만 눈감아 주었다.
드디어 내가 갈망하던 하사들을 평정하고 모두가 짬밥 순으로 바뀌었다.
내가 가장 아끼던 후배 조종수 들 지금도 눈에 선하다.정 태항,정 충식,김 기만,장 정수,
승 관배,양 승인,전 숙희,권 재한,윤 창수….지금도 눈에 선하다.
27톤 궤도차에 포병들을 싫고 연천 전곡으로 포사격을 다닐 때가 엊그제 같은데
년중마다 포대 테스트가 있다.대대장을 평가하는 제일 중요한 훈련 테스트다.
대대장은 땅딸 막은 작은 키에 전주상고 출신이다.한번은 연천으로 포대 테스트 훈련중인데 내 바로 뒤 포차가 조종사의 실수로 모래속에 퀘도가 벗겨지어 정지하고 말았다. 제일 중요한 포대 테스트며 대대장 진급에도 악 영향을 받는 테스트 훈련이다.난 내가 몰던 포차를 부 조종수에 맏기고 감독관에 들키지 않케 서서히 몰고가라며 지시하고 서있는 포차로 뛰어 가 궤도를 잇고 아 마 그 시간이 10분 도 되지 않은 것 같앗다.다행히 감독관 눈에 띄지않고 무사히 작전을 수행하고 진지에 도착하니 대대장님께서 그 광경을 보셨는지 대단한 칭찬을 해 주셨다.
우리 조종수들은 작전 시에는작은햇지속에서조종을하기때문에 개인화기는 권총을 지급 받는다.진지에 들어가 포차 방열만 끝나면 조종수 들은 자유다.근처에 가서 몰래 술도 마시고,한번은 조종수 끼리 모여 술을 마시다.건아 하게 취기가 올라올 무렵
유병장 권총집에 빈집만 보인 것이다.총기를 잃어 버리면 유치장감이다.
찾기 위해 민가 화장실을 뒤지고 눈 한지라 많이 와서 찾기에는 역 부족이었다.
포대장에 보고하고 포대 전원이 투입되어 겨우 찾은 일이 있다.그 사건으로 인해
조종수들에 후폭풍은 말이 아니었다.
이제야 밝히지만 졸병 때부터 PX는 늘 오버가되어 별 수없이 거짓 말로 큰누나에게
전화를 해서 혹한기에 나의 과실로 밧데리가 동파되어 변상을 하게 되었으니 돈을좀 부탁한다고..
사실 어머님도 안계시고 그렇다고 말썽만 피우던 아버님께 부탁 할 수가 없었다.
그 뒤로 한번 큰누나와 여동생이 면회를 와줘 돈을 받고 말끔히 PX오바된 금을 갚았다.지금도 어렵게 생활하는 큰누나에게 죄을 많이 지었다. 지금까지도 실토하지 못했다.
제대를 두 달 남기고 나에게 간섭 할 사람은 별로 없었다.날마다 면회 온 병사, 휴가 갖다 온 병사 한테서 술은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또 난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제대 2주을 남기고 한참 술이 무르익는데 저녁 점호에 참석하라는 연락을 받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내무반에 들어가니 삼 월 후임 김 득기 병장이 나로 인해 기압을 받았다며 투덜대기에 마시다 남기고간 소주병을 깨어 도망가는 뒤에 등을 찍어버렸다.
후임병은 쓸어지고 내무반에 난리가 난 것이다.
다음날 난 남한산성 육군 교도소 행이다.머리를 밀고 느티나무 밑에 꿇어앉아 대기하라는 포대장의 명령이 떨어졌다.대대로 치료 받기 위해 후송간 후임병이 궁굼 하였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까?
몇 시간후에 대대장의 호출로 포대장과 함께 찝차를 타고 대대로 불려가 대대장 앞에 무룹 꿇고 사죄했다. 대대장은 포대장에게 의무대장을 호출하여 후임병에 상태을 듣고
의무대장에 지시을 내려 최대한 대대에서 치료 할수 있는 방법을 찾으라며 지시하고
포대장과 난 대대장에 훈계를 들었다.그때 대대장은 전주 상고 출신이고 대대 테스트때 나에 큰 공을 기억하고 어찌 이런 일이 있었냐며 포대장과 함께 심하게 꾸중을 듣고 있을때 대대장에 전화벨이 울렸다.간호 장교다.자기가 최대한 치료할 수 있다는 보고다. 난 한숨을 내쉬고 다행이 허파까진 들어가지 않았다며 천만 다행이라는 것이다.
만약 내가 대대훈련 에 큰 공이 없었다면 어찌 됐을까? 제대 할때 가져가겠다며 나의 포차 밑에 은밀하게 묻어놓은 뱀술,제대하는날 이 사고로 생각도 못했다. 그러니까 지금쯤 40년이 넘은술 그대로 있겠지?
그래도 제대하는 날 나의 후배 조종수 그리고 포병들 모두가 나을 환송해 주었다.
제대를 하고도 집에는 갈 수 없고 누나집에 들러 치료차 필요한 약값을 부대에 전달하고 오기위해 용돈이 필요하다 며 속이고 그때 돈 3-4만원을 받아 들고 다시 부대에 돌아와 의무대장에게 전달하고 돌아왔다. 이제라도 후임 병 김득기 병장 에게 진심 한 사과를 드리고 대대장님께도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그땐 1년에 한번 25일 휴가를 보내줘 첫번째 2번째휴가는 그래도 고향에서 즐길 수 있었으나 마지막 휴가때는 새엄마와 고향집을 팔고 이사를 갖다는 소식을
듣고 열차속에서 속이 너무 상했다. 혼자 술을 얼마나 마셔 댔는지 집을 찾기 위해서는 고향집에 친구를 만나 물어봐야 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공동묘지를 거처 들어가야 되는데 아침에 눈을 뜨니 공동묘지 앞 도로에서 잠이 들었다. 일어나 보니 이른 새벽 군복은 흙 투성이고, 새벽에 친구집을 찾았다.친구와 친구 가족은 내 꼴을 보고 얼마나 놀랐을까. 탈영한줄 알았던 모양 이었다.군복은 벗어 친구 여동생에 맡기고 친구 옷으로 갈아입고 친구을 따라 전주에 있는 세빵 살이집을 찿아 같다.주인집을 거처 안으로 들어가니 새엄마와 아버님이 계셨다.동생들은 보이지 않고 난 너무도 허무하고 속이 상해 이런 저런 말 한 마디없이 친구와 함께 친구집에 돌아와 고향 친구들과 어울리다가 귀가했다.
그래도 둘 쩨 휴가때는 버스 정류장 까지 둘째 누나 결혼할 분과 함께 마중 까지 나와 고향집에 머무를 수 있었는데…...
귀가해서 제대후에 나의 인생 설계가 너무도 복잡하고 어수선하다.
집까지 팔아 치우고 그것도 셋방 살이 아버님 직업도 없고 대체 제대후에 부모님을 어떻게 부양을 하고 남은 동생들 학비는 어떻게 마련할지 이런 저런 고민에 쌓이다가 그 엄청난 사건을 만든 것 같다.
이제야 나의 파란 만장 했던 34개월 군 생활의 마감과 엄마생각도 점차 잊혀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