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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고궁순례/경희궁 2009.12.4
조선의 5대궁의 하나인 경희궁은 다른 궁궐에 비교하여 많이 알려져 있지 않고 어디에 있는지 조차 모르는 시민이 많다. 그도 그럴것이 일제시대 때 아예 궁궐을 없애버리고 그 자리에 일본 인 학교였던 경성중학교가 들어섰기 때문이다. 뒤늦게 정부가 복원작업을 시작해 2002년도 부 터 일반에 공개하였다.
필자는 매주 금요일 논어공부를 마치고 서래마을에 있는 "청해"에서 점심모임을 가진다. 12월4일 아직 본격적인 추위가 시작되기 전에 아까운 오후시간을 이용해 고궁순례를 하기로 계획하고 모임친구들 중 희망자만 동행토록 하였다. 4명이 한조를 이루며 출발했다. 지하철 광화문역에 내려 광화문광장으로 발길을 향했다. 세종대왕동상이 지난 10월9일 한글날 제막되어 서울의 새 명물이 되었으나 아직 접할 기회가 없었는데 경희궁 가는 길에 좋은 구경을 하게 되었다.
경희궁 가는 신문로길을 모처럼 걸어보았다. 새로운 높은 빌딩들이 늘어서 있어 변화발전하는 서울의 위상을 실감했다. 특히 흥국금융그룹빌딩의 조각물 "망치를 든 남자"의 손이 움직이는 모습이 이채로웠다. 경희궁 바로 옆에는 서울역사박물관이 유혹을 한다. 그 앞에는 60년대까지 다녔던 을지로 ~왕십리행 전차가 실제모습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었다. 대학시절 전철을 타고 다녔던 기억이 새롭다. 경희궁 흥화문을 들어서서 부터는 공부하는 자세로 안내판을 일일히 읽어가며 궁내를 둘러 보았다. 아직 복원되지 않은 많은 궁궐이 빨리 복원되어 예전 모습을 볼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 을 가져본다.
나오는 길에 서울역사박물관을 들렀다. 기획전시실에서는 은평구에서 발굴된 역사자료들이 전 시되고 있었다. 기증전시실과 2층 상설전시관을 통해 서울시민들의 일상생활을 엿볼 수 있었 다. 나오려는데 안내원이 '도시모형영상관'을 꼭 보라고 추천했다. 서울의 전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치밀하게 모형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우리집이 어디쯤이냐 집 근처 아파트,큰 빌 딩을 찾아가며 위치 확인하느라 정신없다.
오후의 경희궁 나들이를 마치고 귀가하면서 그래도 뜻있는 오후시간을 보냈다고 자부해 본다. 사진 중심으로 약간의 설명을 붙여 고궁순례 "경희궁"편을 아래에 소개한다.
10월9일 제막된 세종대왕 동상/높이 6.2m,폭 4.3m, 기단높이 4.2m,무게 20톤. 인자한 모습이 인상적이다. 이대희/필자/허진호/장수남 해시계 혼천의 세종대왕을 상징하는 여러모습의 석주 플라워(꽃)카펫으로 서울시민의 사랑을 받았던 곳이 지금은 겨울철 스케이트장 공사로 한창 바쁘다. 세종대왕 동상에서 210m남쪽에 위치한 이순신 장군의 동상/동상 앞에는 분수가 있다. 흥국그룹건물의 조각물/조나단 보로프스키의 조각 "망치질하는 남자"/ 22m높이,무게 50톤의 헤비급 조각 현대인들의 일상을 감성적으로 표현하여 도시민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서울의 명물/망치질하는 손이 계속 움직인다.
왠 전차? / 을지로를 다녔던 전차가 서울 한복판 도로에--
경희궁 경희궁(慶熙宮)은 조선후기의 이궁(離宮)이엇다. 1617년(광해군9)부터 짓기 시작하여 1623년 (광해군15)에 완성하였다. 경희궁의 처음 명칭은 경덕궁(慶德宮)이었으나 원종의 시호인 경덕 (敬德)과 같은 발음이라 하여 1760년(영조36) 경희궁으로 바뀌었다. 경희궁은 도성의 서쪽에 있다고 하여 서궐(西闕)이라고도 불렀는데 이는 창덕궁과 창경궁을 합하여 동궐이라고 불렀 던 것과 대비되는 별칭이다. 인조 이후 철종에 이르기 까지 10대에 걸쳐 임금들이 경희궁에 머 물렀는데, 특히 영조는 치세의 절반을 이곳에서 보냈다.
경희궁에는 정전인 숭정전을 비롯해 편전인 자정전,침전인 융복전, 회상전 등 100여동의 크고 작은 건물이 있었다. 그러나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점하면서 경희궁은 수난의 역사를 맞이하였 다. 1910년 일본인 학교였던 경성중학교가 들어서면서 대부분의 궁궐이 헐려 나갔고, 그 면적 도 절반 정도로 축소되어 궁궐의 모습을 잃어버렸다. 서울특별시에서는 경희궁지에 대한 발굴 을 거쳐 숭정전 등 정전지역을 복원하여 2002년부터 시민들에게 공개하고 있다.
흥화문(興化門)/서을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9호,경희궁의 정문/ 원래는 현재의 구세군빌딩 자리에서 동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제가 1932년 흥화문을 이토히로부미(伊藤博 文)를 위한 사당이었던 박문사(博文寺)의 정문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떼어 갔던 것을 서울특별시에서 1988년 경희궁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현재의 위치에 이전하여 복원하였다.
숭정전(崇政殿)으로 들어가는 숭정문 숭정전(崇政殿)/경희궁의 정전 경희궁 창건공사 초기인 1618년(광해군10)에 건립되었다. 국왕이 신하들과 조회를 하거나 궁중 연회,사신접대 등 공식행사가 행해졌던 곳이다. 특히 경종,정조,헌종 등 세 임금은 이곳에서 즉위식을 거행하엿다. 그러나 일제가 경희궁을 훼손하면서 1926년 숭정전 건물을 일본인 사찰인 조계사에 팔았는데 현재는 동국대학 교 정각원(正覺院)으로 남아 있다. 현 위치의 숭정전은 복원된 것이다.
숭정전 내의 옥좌/옥좌 뒤에는 일월오악(오봉)의 병풍이 둘러쳐져 있다. 자정전(資政殿)으로 들어가는 대문인 자경문 자정전 오르는 계단 답도/ 봉황문양과 아름다운 꽃무늬의 석조각이 새겨져 있다. 자정전(資政殿)/경희궁의 편전 1617년~1620년(광해군9~12) 사이에 건립되엇다. 국왕이 신하들과 회의를 하거나 경연을 여는 등 공무를 수 행하였던 곳이다. 숙종이 승하하였을 때는 빈전(殯殿)으로 사용되었으며, 선왕들의 어진(御眞:초상화)이나 위 패를 임시로 보관하기도 하였다. 일제가 헐어내었던 것을 서울시에서 발굴하여 확인한 자리에 서궐도안에 따 라 현재의 건물을 복원하였다.
서암(瑞巖)/태령전 뒤에 있는 기이한 모양의 바위. 암천(巖泉)으로 불리는 바위 속의 샘이 있어 예로부터 경희궁의 명물이었다. 본래는 왕암(王巖)으로 불리었는 데 그 이름으로 인하여 광해군이 이 지역에 경희궁을 지었다는 속설도 있다. 1708년(숙종34)에 이름을 서암으 로 고치고 숙종이 직접 '瑞巖' 두 글자를 크게 쓰서 새겨 두게 하였다. 그러나 현재 서암을 새겨두었던 사방석 은 전해지지 않는다.
태령전(泰寧殿) 영조의 어진(御眞:초상화)을 봉안하였던 곳. 본래 특별한 용도가 지정되지 않았던 건물이었다. 그러나 영조의 어진이 그려지자 1744년(영조20)에 이 곳을 중수화여 어진을 봉안하였다. 일제에 의해 흔적도 없이 파괴되었 지만 2000년 서궐도안에 따라 정면 5칸,측면 2칸의 건물로 복원하였다. 현판은 석봉 한호의 글씨를 집자하여 만들었다. 영조의 어진(御眞) 예술적인 처리로 단장된 아름다움 드므/소화용이라기 보다 불예방용 /불귀신이 처마로부터 내려오다 거울에 자기모습을 보고 놀라 달아난단다.
편전인 숭정전 앞에서
서울역사박물관 입간판 서울역사박물관 입구/연말이 가까워온 것을 느끼게 한다. 서울역사박물관 내부 기획전시실에서는 "은평발굴 그 특별한 이야기"(11.4~12.13)가 전시되고 있다. 전시실 중 회갑을 맞은 대원군 이하응의 초상화가 있어 실어본다. 서울의 도시모형/ 현재 서울의 전체모습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서울도시모형으로 서울의 발전상과 미래 비전을 담고 있다. 한강을 중심으로 본 서울의 도시모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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