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 있어서 생로병사처럼 중요한 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인간 존재의 본원적인 고뇌가 바로 생로병사인 것입니다. 태어나서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은 인간이 살면서 반드시 겪어야만 하는 과정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아프지 않고 오랫동안 건강하기를 바랍니다. 인류 역사에서 장수는 항상 중요한 화두 되고 있습니다. 문명의 발전으로 평균수명은 이미 80세를 넘어 섰고, 국내에도 100세 인구 2천명 시대가 다가왔다. 그렇다면 건강하게 장수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무병장수의 비결로 많은 의학전문가들은 건강한 정신을 위한 ‘생활습관’을 강조합니다. 인간의 수명은 유전자에 영향을 받는다고 알려졌지만 올바른 섭생과 적절한 운동, 그리고 스트레스 관리 등 후천적인 노력을 통해 얼마든지 건강하게 장수할 수 있습니다.
“1992년 오선환 전 순청향대 학장이 한 권의 책을 선물했다.
나무 그림이 있는 첫 장의 자서(自書)에 눈길이 끌렸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단 한 번도 가난한 집안, 가난한 부모를 원망해 본 일이 없고, 세상이나 나라를 원망해 본 일도 없다.
사업을 하다가 실패했을 때조차 나는 남을 탓하거나 원망하지 않았다.
나는 열심히 살았고, 땀 흘리며 살았고, 솔직하게 살았고, 성실하게 살았다.
그래서 내가 살아온 인생에 후회는 없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인생 70을 후회없이 살도록 보살펴 주고, 가르쳐 주고, 이끌어 주고, 격려해 주고, 도와준 이 세상 모든 분들에게 다시 한 번 머리 숙여 감사드리면서 훗날의 자료로 삼도록 이 부끄러운 초당자전(草堂自傳)을 기록해 둔다.
’ 이 문구가 김기운 회장과의 인연의 끈이 됐다.” 박광서 한국경영사상연구원 원장이 강연의 서막을 열면서 밝혔던 사연이다.
백제약품과 초당제약 창업자이자 백제여상과 초당대학 설립자인 초당 김기운 회장(92). 박 원장은 적수공권(赤手空拳)으로 자수성가(自手成家)한 이 단신의 국내 최고령 현직 CEO를 ‘작은 거인’, ‘위대한 보통사람’, ‘입지전적 인물’, ‘꿈을 넘어 꿈을 이룬 개척자’ 등의 헌사로 상찬했다.
“초당 김기운 회장은 1921년 전남 무안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서당과 보통학교를 마치고 16세에 지인의 소개로 목포에 있는 일본인 상회에 취직했다.
상호인 이등삼화점(伊藤三貨店)은 이토 사장이 의약, 전기, 초자 등 3개 분야 제품을 다루는 도매상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약품부에 견습점원으로 배속된 초당의 첫 월급은 3원이었지만 불평하지 않았다.
이토 사장은 새벽 6시에 일어나 밤 10시까지 청소와 배달 등 온갖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고 정직하고 성실하게 일하는 이 소년을 주목했다.
초당 역시 목포시 상공회의소 수석부회장을 맡고 있던 이토 사장의 검소, 절약, 독서 등 좋은 습관을 따라 배웠다. 사장은 입사 1년 만에 초당을 정식사원으로 승격시키고 경리, 도매 같은 중요한 업무까지 맡겼다.”
십년수목(十年樹木) 백년수인(百年樹人)
박 원장은 초당이 18세가 되던 해에 두 가지 사건을 겪으며 구체적인 인생의 비전과 목표를 세우게 됐다고 밝혔다.
이토 사장도 자신처럼 보통학교밖에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 첫 사건이었다.
학력(學歷)은 낮지만 와세다대 통신강의록으로 학력(學力)을 키우고 매일 독서하는 사장의 모습을 보면서 ‘나도 상회 사장이 될 수 있다’는 꿈을 키웠다.
“약품부에서 근무하던 초당에게 어느 날 한 조선인이 찾아왔다. 평소 도립병원 약국에서 일하며 약사의 지시를 받고 가끔 심부름을 왔던 사람이었다.
‘내가 장흥 수문포에 약방을 개업하게 됐으니 비치할 약품을 챙겨주시오.’ 처음에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강의록으로 독학해서 도청이 시행하는 약종상(藥種商) 면허시험에 합격했다는 설명을 듣고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열심히 공부하면 약종상 면허를 딸 수 있다.
나하고 똑같은 조선 사람도 그걸 해 냈다!’ 순간 초당의 심장이 물 밖으로 나온 활어처럼 펄떡였다. 곧바로 일본에서 강의록을 주문한 다음 근무가 끝나는 밤 10시부터 새벽 2시까지 공부했다. 생전 처음 보는 전문용어와 약품기호를 외우는 것은 고역이었다.
몰려오는 잠을 피하기 위해 각성제까지 먹었다.”
그것은 처절한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2년 후 면허시험에 도전, 1차에 합격했다.
그날 너무 기뻐서 펑펑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신원조회 결과 20세가 안 됐다는 이유로 합격이 취소됐다.
과로로 쓰러져 병원에 실려 갔다가 폐병 말기라는 진단을 받았다.
설상가상이었다. 주저앉고 싶었지만 오기와 투지가 발동했다. 투병생활과 시험공부를 병행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다. 초당은 일제에서 해방되던 해인 1945년 11월 약종상 면허시험에 합격했다.
그리고 마침내 1946년 8월 6일 목포에 2평짜리 백제약방을 열었다. 상호에는 ‘많은 사람을 구하고 많은 병을 고친다’는 의미를 담았다. 천성인 정직, 성실에 조상에게 물려받은 상재(商材)까지 더해지면서 가마니로 벌어들인 현찰을 저울로 달아서 헤아려야 할 정도로 치부했다.
자신감이 넘치면서 지인들의 권유를 수용해 메리야스, 주정(酒精) 등 타 업종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하지만 그것은 과욕이었고, 본업인 약방까지 문을 닫아야 할 처지가 됐다.
자살 유혹을 가까스로 이겨내고 재기하면서 ‘한 우물만 판다’, ‘은행 융자나 사채는 쓰지 않는다’, ‘도와준 사람에게 은혜를 갚고 신용을 지킨다’는 3가지 원칙을 세웠다.”
신용을 목숨처럼 여긴 초당은 정직과 성실, 정확한 거래, 신속한 배송으로 거래처의 신뢰를 확보했다. 그러자 유한양행, 동화약품 등 제약회사가 먼저 약품을 제공하고 팔리는 대로 대금을 받아주는 방식으로 지원했다.
판매보다 관리가 우선이라는 체험적 신념을 가지고 ‘백제형 상품관리제도’를 정립해 ‘겉으로 벌고 속으로 망하는’ 당시 업계의 관행도 극복했다.
““엄청난 부를 축적한 초당이 결심한 다음 단계의 사업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실천에 옮기는 것이었다. 그가 고심 끝에 선택한 것은 조림(造林)과 육영(育英)이었다.
적합한 조림지를 고르려고 전국의 산과 들을 헤매던 초당은 1968년 전남 강진군 칠량면에서 적지를 찾아냈다.
20명으로 작업반을 편성하고 삼나무, 백합나무 등 몇 가지 수종을 선정한 다음 이듬해 봄부터 본격적인 조림사업에 착수했다.
햇빛을 좋아하는 나무를 응달에 심었다가 낭패를 보는 등 몇 차례 시행착오를 겪기도 했다.
하지만 지난 40년 동안 500만 그루가 넘는 나무를 심었고, 황량했던 민둥산이 생명력 넘치는 청산으로 변했다. 임학회(林學會) 소속 교수들이 이곳에 비석을 세우고 ‘초당림(草堂林)’으로 명명했으며, 국가에선 훈장을 수여했다.”
진금부도(眞金不鍍) 무언실천(無言實踐)
박 원장은 초당에게 “돈도 안 되는 나무를 왜 심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랬더니 “어린 시절 동산에서 맡았던 신선한 풀 냄새가 너무나 좋았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때로는 옛 추억과 그리움이 미래로 달리는 열차의 레일이 되기도 한다. 십년수목(十年樹木) 백년수인(百年樹人), 난향천리(蘭香千里) 덕향만리(德香萬里)라고 했다. 초당의 육영 철학이기도 하다..
“초당은 고향 무안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하고 싶었다.
그가 찾아낸 것은 학교를 세우는 일이었다. 간절하게 꿈을 꾸면, 그것도 ‘나’만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꿈이라면 반드시 이루어지게 마련이다.
실제로 초당은 1980년 세상을 먼저 떠난 아내가 남긴 목돈으로 부지를 마련해 백제여상을 설립했다. 장애인 슬로프, 수세식 화장실, 통학용 스쿨버스 등 당시로서는 서울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파격적인 최신식 건물과 선진적 시설을 갖춘 학교였다. 교육감과 군수의 간청을 받아들여, 갈 곳이 없어 방황하던 한 여중의 핸드볼 선수들을 장학생으로 선발해 입학시키고 체육관도 지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들이 전국대회를 휩쓸자 설립허가를 막 받아 사옥과 기숙사도 없던 초당약품에 핸드볼 실업팀을 신설했다.”
초당의 사랑을 받고 실력을 키울 수 있었던 비인기 종목의 시골 소녀들은 은혜에 보답했다. 그들이 주축을 이룬 여자핸드볼 국가대표팀이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내는 쾌거를 이뤘다.
언론이 ‘우생순 신화’라고 불렀던 감동 드라마의 뿌리에는 초당의 노고가 있었다. 한 기업인의 ‘꿈을 넘은 꿈’이 무명의 시골 처녀들을 세계적 유명 인사로 만든 것이다.
“앞의 ‘꿈’은 경제적 성공, 뒤의 ‘꿈’은 사회적 책임을 상징한다. 사회적 책임을 다하려 꿈을 꾸면 주변의 눈치를 보지 않고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다.
실제로 초당은 백제약품 서울사무소에 취업본부를 만들어 졸업생 취업을 알선했고, 1994년에는 백제여상 가까이에 자신의 호를 붙인 초당대학을 설립했다.
대학에서의 인성교육을 중시한 초당은 나에게 <인간, 자연 그리고 사랑>이라는 제목의 교재를 쓰도록 했다.
진금부도(眞金不鍍) 무언실천(無言實踐). 초당이 자서전 서문에서 소개했던 구절이다.
‘진짜 금에는 도금을 하지 않는다’는 진금부도에는 ‘진실한 재주가 있는 사람은 꾸밀 필요가 없다’는 의미가 있다. 무언실천은 ‘말을 앞세우지 말고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라’는 뜻이다. 진금은 도금하지 않아도 빛나는 법이다.”
정리=정지환 인간개발연구원 편집위원/감사나눔신문 편집국장 lowsaejae@gamsa.or.kr
박광서 원장의 이력
▲ 고려대 경제학과 졸업 ▲ 단국대 경제학 석사 ▲ 美 퍼시픽웨스턴대 경제학 박사 ▲ 단국대 경제학 박사 ▲ 고려생명보험 기획조사부장 ▲ 한국포플러위원회 사무국장 겸 상임이사 ▲ 한국동서경제학회 상임이사 ▲ 한국경영사학회 부회장 ▲ 한국전문경영인학회 부회장 겸 사무국장, 회장 ▲ 순천향대 경제금융보험학부 초빙교수 내무부장관표창 신경영사, 신경제사, 보험실무, 세계화와 현대경제, 경제학실사 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