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유산 조선왕릉 隆.健陵 그리고 龍珠寺 답사기
보견회(步見會) 첫 탐방지는 28세의 젊은 나이로 뒤주 속에 갇혀 8일만에 생을 마감한 사도세
자(추존 장조)와 한많은 일생을 산 그의 비 헌경왕후(혜경궁홍씨)의 합장능인 융릉(隆陵),
정조대왕과 효의왕후의 합장능인 건릉(健陵) 그리고 비명에 숨진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수호하고 그의 명복을 빌게하는 목적으로 정조대왕의 효심으로 지은 용주사(龍珠寺)-
모두 세곳이다.
전철1호선을 타고 병점역 2번출구에서 오전 10시30분에 일행이 모였다. 2명은 해외출장과 국
내업무로 빠지고 8명이 참가하였다. 마을버스 34번(혹은 34-1)을 타고 15분가량 가면 용주사
가 나오고 다음이 융.건릉이다. 미리 문화해설사를 부탁해 놓았다. 해설사의 얘기를 들으면서
견학하면 훨씬 학습효과가 좋아지기 때문이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2009년)된 조선왕릉
519년 동안 지속된 조선시대 역대 왕들의 무덤으로, 2009년 6월 27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조선왕릉은 조선시대의 27대 왕과 왕비 그리고 사후에 추존된 왕과 왕비의 무덤으로 모두 44기(基)에 이른다.
44기 중 40기가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519년이라는 오랜 기간을 한 왕조가 지속된 사례도 드문데다가 역대 왕과
왕비의 무덤이 모두 남아 있는 경우도 유례가 드물다. 유교와 풍수 등 한국인의 세계관이 압축된 장묘문화의 공간으
로서 왕실의 장례 및 제례 등을 조명할 수 있어 문화재로서 가치가 풍부하다.
조선왕과 왕비의 무덤 44기 중 가운데 북한 지역에 있는 태조의 왕비 신의왕후의 제릉, 정종과 정안왕후의 후릉,
폐위된 연산군묘와 광해군묘 등 4기를 제외한 40기가 2009년 6월 스페인의 세비야에서 열린 유네스코(UNESCO
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융.건릉(隆.健陵)
융릉(隆健陵)/추존 장조와 헌경왕후의 능
"네가 자결하면 종묘사직을 보존할 수 있을 것이다. 어서 자결하라!"
영조의 노여움이 시간이 갈수록 더 격해졌다. 땅에 조아린 세자의 이마에선 피가 흘렀다.
영조가 칼을 들고 자결을 재촉하니, 세자가 눈물로 용서를 빌었다. 그러나 임금의 노여움은
누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살려 달라는 세자의 절규를 외면하고 결국 영조는 끝내 명을
내린다. "세자를 폐서인으로 삼고,뒤주에 가두라" 영조실록 38년 윤5월 13일의 기록이다.
마침내 세자는 폐세인이 되고 뒤주에 갇히어 8일만에 이 세상을 떠났다. 해설사는 드라마 상
에서 뒤주에 구멍을 내어 음식물을 넣었다느니,세자가 몸이 약했다느니 하는 가설은 당치도
않다고 강조한다. 그야말로 물한모금 없이 뒤주 속에서 몸무림치다가 숨이 졌으며, 그는 몸이
건장하고 검을 잘쓰는 무사였기에 인간의 한계를 넘어 8일간이나 견뎠다고 주장한다.
장조(사도세자)는 조선 제21대 영조의 둘째 아들이자 정조의 생부이다.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서예와 무예에 뛰어났으나 영조를 대신하여 정치업무를 보게되면서 노론과 마찰을 빚게 되고
나경언의 고변으로 결국 뒤주에 갇혀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1762년 영조는 28세 나이에 죽은
세자를 슬프하면서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다.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가 즉위하자 존호를
장헌으로 올렸고 1899년 고종 때 장조(莊祖)로 추존되었다.
헌경왕후(獻敬王后,혜경궁 홍씨)는 영의정 영풍부원군 홍봉한의 딸로 1744년 세자빈으로 책
봉되었다. 사도세자가 세상을 뜬 후 혜빈, 정조 즉위 후에 궁호를 혜경으로 올렸다. 혜경궁 홍
씨의 자전적 회고록이자 궁중문학의 백미라고 평가받는 "한중록"을 남겼다. 사도세자가 장조
로 추존되면서 헌경왕후로 추존되었다.
융릉의 연혁을 살펴본다. 1789년(정조 13) 양주 배봉산(지금의 동대문구 휘경동)에 있던 영우
원을 지금의 자리로 옮기고 현륭원이라 고쳐 불렀다.1816년(순조 16) 헌경왕후(혜경궁 홍씨
81세 승하)와 합장하였다. 1899년(광무3) 장종으로 추존되면서 융릉으로 높이게 되었다.
곤신지(坤申池
입구에서 해설사를 만나 안으로 들어가니 바로 홍살문이 나온다.
좌측으로 여의주를 상징하는 둥근 못 "곤신지"가 있었다. 왕릉에서는 보기 힘든 원향 연못이
특징이다. 곤신방이란 남서방향으로 풍수지리의 원칙에 맞춰 조영되었다고 한다. 원형 연못은
용의 여의주를 상징하는 것으로 아버지를 연모했던 정조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정자각과 능침의 배열
대개의 왕릉에서 정자각과 능침이 일직선상에 축을 이루는데 이곳 융릉은 일직선을 이루지
않고 홍살문을 들어서면서 바로 능 봉분이 보일 수 있게 설계되었다.정자각은 제물을 차리는
곳이며 좌측에 수라간 반대쪽에 비각이 있다.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박석을 깔아만든 참도
(參道)는 매우 넓고 무반쪽이 문반보다 더 넓은게 특징이다.
아름답게 조각된 병풍석,곡장,석물
융릉의 봉분은 출입이 제한되고 있다. 특별히 입장을 원하는 경우 노란 쪼끼를 입고 입장할 수
있다. 합장묘인 융릉의 봉분 아랫부분은 12지신상 대신 목단과 연꽃 문양이 양각된 12면의
병풍석이 감싸고 있다. 난간석은 없으며, 봉분 뒤쪽으로는 3면의 곡장(曲墻; 나지막한 담)이
둘러져 있다. 석물로는 상석 1좌, 망주석 1쌍, 석양(石羊)·석호(石虎) 각 1쌍, 문인석 1쌍,
팔각 장명등 1좌, 무인석·석마(石馬) 각 1쌍이 배치되었다.봉분의 인석 위 연꽃봉우리 석물
등 그 어느 능보다도 화려하고 정성을 들인 흔적을 볼 수 있다.
건릉(健陵)/정조와 효의왕후의 능
정조는 추존 장조(사도세자)의 둘째아들로 1776년 제21대 영조가 승하하자 왕위에 올랐다.
즉위 즉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천명하고 아버지의 원혼을 위로하기 위해 노력
을 다 했다. 문무를 겸비했던 정조는 규장각을 두어 학문연구에 힘쓰고,장용영을 설치하고
수원 화성을 쌓는 등 조선의 중흥을 이끌었다. 또한 영조의 탕평책을 계승하여 붕당정치의
폐해를 막기 위해 힘썼다. 효의왕후는 좌참찬 청원부원군 김시묵의 딸로 1762년 세손빈에
책정되었고,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홍씨를 지성으로 모셔 영조의 총애를 받았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하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정조의 초기 무덤은 그의 유언에 따라 부친 사도세자의 능의 발치인 '강무당 터 초장지'에 있
었으나 1821년 현재 위치로 천장되었다.
건릉은 병풍석이 없고 난간석만 있다. 부모의 능침인 융릉이 화려한 병풍석만 있고 난간석이
없는 것과 대조적이다. 문무석인의 조각이 사실적인 점이 눈에 띈다.
건릉 주위에는 참나무 숲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고 25만평이나 되는 융건릉 숲길산책은 걷기
코스로 아주 정평이 나 있는 곳이다.
융건릉을 산책하면서 약 1시간 40분가량 둘러보았다. 9월에 들어선 초하루인데도 날씨가 너
무 더워 공부하기에 힘이 들었다. 융건릉 입구 도로 맞은편에 있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데 점심시간이 되니 역시 시장하다. 수원은 갈비가 유명한 곳이다.
식성에 따라 갈비탕과 비빔밥을 시켜 맥주,소주와 함께 배불리 먹고 가져온 과일로 후식 까지.
불과 1.3km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용주사가 있다. 버스로 5분거리.
도로변 입구 입간판
융.건릉 들어가는 산책로/금천교
궁궐연못은 대개 천원지방형(정방형 연못에 둥근섬)이나 융능의 곤신지(坤申池)는 여의주를 상징하여 둥근 못이다.
융릉의 홍살문과 정자각
홍살문에서 보아 정자각 우측 뒤로 봉분이 보인다.
그늘에 앉아 문화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있다.
융릉 안내판과 상설도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가는 참도에는 궁궐처럼 박석이 깔려 있다.
정자각과 내부
정자각 오르는 계단의 아름다운 구름무늬/능 봉분 주위에는 비공개 출입금지 팻말이~
전서체로 쓰여진 비각내 비석
융릉의 봉분,병풍석,곡장,석물들
석물 석등 / 무인석 문인석
봉분 둘레에 병풍같이 돌려 세운 돌(병풍석)에 십이신의 모양을 조각,또 십이신 글자를 연꽃 봉우리에 넣었다.
융릉탐방을 마치고 건릉으로/건릉의 홍살문
홍살문 앞에서 보견회원들
정자각
건릉/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용주사행 버스를 타고 5분 후에 도착
용주사(龍珠寺)
용주사는 본래 신라 문성왕 16년(854년)에 갈양사로 창건된 청정하고 이름 높은 도량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병자호란 때 소실되었던 것을 조선 제22대 정조대왕께서 보경스님으로부
터 부모님의 넓고 높은 은혜를 설명한 부모은중경 설법을 듣고 크게 감동하여 아버지 사도세
자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1790년 용주사를 세웠다. 보경스님을 전국 8도도화주로 임명하고
정조대왕의 지원과 백성들의 정성스런 시주로 7개월만에 용주사를 건립하고 비명에 간 아버
지 사도세자의 극랑왕생을 발원하였다.
대웅보전 낙성식 전날밤 정조대왕이 꿈을 꾸었는데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했다고 하여 절
이름을 용주사라 하였다. 용주사는 또한 정조대왕의 효심을 계승하기 위해 효행교육원을 설
립, 운영을 통해 인성교육을 사회로 회향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용주사 건립은 성리학이 성했던 조선후기에 불교는 전혀 발을 부치기 못하던 당시의 정치적.
사회적 여건으로서는 대단한 일이었다.정조의 효심으로 발원된 사찰이므로 효찰대본산으로
불린다. 사천왕문으로부터 용주사 탐방이 시작되었다.
사천왕문(四天王門)-불법을 보호하고 악귀의 출입을 막아 사찰의 청정함을 유지하기 위해
세워졌다. 지국천왕,광목천왕,증장천왕,다문천왕 등 사천왕상이 모셔져 있다.
홍살문-조선시대 마지막 원찰인 용주사는 사도세자와 정조대왕의 위패를 모신 능침사찰이다.
왕의 위패를 모셨기 때문에 경건한 마음을 지니도록 하기 위해 홍살문을 세웠다.
효행박물관- 일반 사찰에서는 성보박물관이 있지만 효찰답게 효행박물관이 홍살문 좌측에
자리한다. 정조대왕이 기증한 부모은중경을 비롯,보물 제1095호 봉림사 아미타불 복장유물,
정조대왕의 친필인 봉불기복게, 김홍도의 사곡병풍 등 용주사가 소장하고 있는 격조높은 문화
재를 전시하고 있다. 박물관 안은 마지막 나오면서 귀중한 전시품을 관람하였다.사진을 찍을
수 없어 용주사 홈페이지 효행박물관 유물 자료화면을 소개한다.
삼문(三門)-다른 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궁궐양식이다. 좌우에 7칸의 행랑을 지닌 맞배지붕
양식으로 동서의 옆문과 중앙의 대문에 각각 문이 나 있어 삼문이라 부른다. 기둥에 각각
"龍.珠.寺.佛"로 시작되는 주련이 걸려 있다. 문루에 龍珠寺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竹濃 안순환의 글씨이다.
천보루(天保樓)와 5층석탑
경기도 문화재 제36호. 1790년 창건 당시 지어진 정면 5칸,측면 3칸의 2층누각이다. 목조기둥
아래에는 석조기둥과 같은 높은 초석이 건물을 받들고 있는데, 이는 궁궐건축과 유사하다.
보통의 누마루는 좁고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는데 반해 이곳 천보루는 출입구가 넓고 팔각 돌
기둥이 큰 것이 특징이다. 5층 석탑에는 부처님의 사리 2과가 봉안되어 있다.
대웅보전(大雄寶殿)-1790년 창건 당시 지어진 정면 3칸, 측면 3칸의 석가모니불과 약사여래
불,아미타불을 모신 아름다운 전각이다. 특히 내부에 봉안되어 있는 삼세여래후불탱화는 조선
중기 최고의 화가였던 단원 김홍도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는 귀중한 성보이다. 초등학교 5학년
국어교과서에 김홍도가 그린 용주사 탱화가 올라 있다.
한편 단원 김홍도의 낙관이 없고 그의 작품으로 보기 어렵다는 설과 제자 화원들의 작품이라
는 설 등 다양하게 화제에 오르고 있다. 현재 대웅보전은 개보수공사로 12월말까지 관람이 불
가하며 내부의 세부처님과 탱화 3점(삼장탱화,신중탱화,감로왕탱화)이 관음전에 이관되어 있
다. 삼세여래후불탱화는 개수작업 중에도 대웅보전에 그대로 있어서 볼 수가 없었다.
천불전(千佛殿)-천분의 부처님이 모셔져 있으며 누구나 수행하면 부처님이 될 수 있다는 법
화경의 사상이 깃들어 있다.
시방칠등각(十方七燈閣)-칠성과 산신,독성이 탱화로 모셔진 곳으로 시방칠등각은 칠성각의
다른 이름이다.
호성전(護聖殿)과 부모은중경
호성전은 사도세자의 혜경궁 홍씨, 정조대왕과 효의왕후의 위패를 모셨다.
불설부모은증경판(佛說父母恩重經板)은 부모의 은혜가 한량없이 크고 깊음을 설하고 그 은혜에 어떻게
보답할 것인가를 제시한 경전으로 조선시대에 널리 간행되었다.
용주사 효행박물관에 소장된 불설부모은중경판은 목판, 동판, 석판의 3종류가 있다. 목판은 용주사가 창건
되고 정조가 억울하게 이승을 떠난 아버지 사도세자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정조의 지시에 의해 1796년
제작하여 용주사에 하사되었다. 동판과 석판은 순조2년(1802)에 용주사로 하사되었다.
목판은 변상도(變相圖), 한문판, 한글판으로 되어 있고 석판은 한문판, 동판은 변상도이다.
변상도(變相圖)는 경전의 내용을 그림으로 나타낸 것인데, 당시 도화서 최고의 화원이었던 김홍도가 그렸다
고 전해진다.
범종각(梵鐘閣)-국보 제 120호로 지정된 고려초기의 범종이다. 범종에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삼존불과 비천상이 아름답게 조각되어 있다. 음각이 특징이며 용,연뢰와 연봉이 사방 네곳에
9개의 꽃봉우리로 장식되고 종치는 자리가 네군데로 지정되어 있다. 전국 4대범종의 하나이다.
법고각(法鼓閣)-대웅보전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다. 안에는 법고가 있으며 축생들을 위해 울
리는 사물(四物) 중 하나이다.
전강대종사 사리탑(田岡大宗師 舍利塔)
전강큰스님은 만공선사의 법맥을 이어 불조의 혜명을 밝히신 한국불교의 큰 스승이다.2005년
열반 30주기를 맞이하여 사대부중의 뜻을 모아 수행과 위덕을 기리는 사리탑을 조성했다.
보견회 첫 탐방지 융릉과 건릉 그리고 용주사 관람은 오전 11시부터 시작되어 오후 3시에 모
두 마쳤다. 날씨가 더워 어려움이 있었지만 모두 진지한 학구적 자세로 탐방을 만족스럽게 마
쳤다. 워낙 유명한 역사탐방지라 간략히 서술하고 주로 사진 위주로 설명을 붙였다.
참가한 회원님들 수고 많았습니다.
용주사 입석판
사천왕문
사천왕상은 대웅전을 향하여 칼을 들고 있는 동방지국천왕(東方持國天王)과
당(幢)과 탑을 들고 있는 북방다문천왕(北方多聞天王),
비파를 들고 있는 남방증장천왕(南方增長天王)과
용과 보주를 들고 있는 서방광목천왕(西方廣目天王) 등이 있다.
到此門來 : 이 문을 들어오는 사람
莫存知解 : 알음알이(헛된 망상)를 피우지 말라.
홍살문을 들어서고 있다.
용주사 효행박물관
용주사 삼문(三門)
용주사 삼문(三門) 기둥의 주련/우측부터 용으로 시작,용-주-사-불의 네기둥 주련을 풀어본다.
龍 蟠 華 雲 : 용이 꽃구름 속에 서리었다가
珠 得 造 化 : 여의주를 얻어 조화를 부리더니
寺 門 法 禪 : 절문에 이르러 선을 본받고
佛 下 濟 衆 : 부처님 아래에서 중생제도 하도다.
삼문 대문 위에 걸린 龍珠寺 현판/죽농(竹濃) 안순환의 글씨이다.
천보루와 5층석탑
(3) (2) (1)
(6) (5) (4)
(1)自笑一聲天地驚 스스로 웃는 웃음 한마디에 천지가 놀라고
(2)孤輪獨照江山靜 외로운 달 홀로 비추니 강산이 고요하다.
(3)心得同時祖宗旨 마음과 동시에 조사의 종지를 얻으니
(4)傳持祖印壬午歲 조사의 인가 전하고 간직하니 때는 임오년
(5)叢木房中待釋迦 총림숲에서 석가모니 부처님 기다리니
(6)眞歸祖師在雪山 진귀조사(문수보살)는 설산에 계시네
대웅보전/대웅보전 내외부 수리공사로 내부 입장이 불허되었다.
삼존불과 탱화 3점이 관음전으로 임시 이관되어 있었다.
단원 김홍도 작품으로 알려진 용주사 대웅보전 삼세여래 후불탱화
대웅보전에 모셔졌던 삼존불(석가모니불,아미타불,약사여래불)이 관음전에서 친견할 수 있었다.
관음전에 옮겨놓은 탱화
감로왕(甘露王)탱화
삼장탱화
신중탱화
(좌)지장전(地藏殿)
(우)호성전 안에 모셔져 있는 사도세자(장조), 혜경궁홍씨(정조대왕 어머니), 정조대왕, 효의황후(왕비) 의 위패
호성전(護聖殿)과 부모은중경
시방칠등각과 법고루
천불전(千佛殿)
천의를 휘날리며 구름을 타고 하늘을 나는 비천상
범종각/비천상과 삼존불이 음각으로 조각된 국보 제120호 고려초기의 범종
구름을 타고 하늘을 나는 삼존상 - 옷자락이 가볍게 휘날리고 있다
전강영신대종사 사리탑
용주사 효행박물관
효행박물관 내 전시된 그림과 유물들
사곡병풍(四曲屛風)은 단원 김홍도의 작품으로 전하는 4폭 병풍이다.
매화.모란.오동.단풍을 각 폭에 그렸다.
정조대왕이 왕실에서 사용하던 것을 하사한 것이라 전해진다.
예쁜 아기가 안내하는 해우소
나오는 출구 한 구석에 혜경궁홍씨 읍혈룩 문학비가 서 있다.
감사합니다.
<-다음달 탐방일(10월6일)을 기다리며->
<회비정산> 회원 10명 입회비 500,000원
7월모임시 식대조 회비 9명 90,000원 입금 (식대 회장 스폰서)
9월1일 월회비 입금 (8명) 160,000원
당일 식대 - 76,000원
결산이자 1,875원
잔액 675,875원
*9월8일 추가입회 장세원 50,000원
합계잔액 725,875원
보견회는 현재 11명으로 매달 첫번째 목요일에 유적답사를 하고 있습니다.
추가로 회원가입 희망자는 전화로 신청하시면 됩니다. 010-9395-1975 김수철
<회원: 고초근,김문헌,김민효,김수철,박정륭,서강조,이의춘,장극두,장세원,최문택,허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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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회장님 감사합니다. 근교에 있는데도 못가본 그곳을 이번답사에 큰 보람을 가졌으며
동기들도 같이 보았으면 좋았는데--역사는 아는만큼 좋네요--
답사당일 느낌보다 회장님 답사기 읽는것이 훨씬 더 실감미 나고 공부가 되네요. 보견회 회장님은 우리가 제데로 모신것 같습니다.
앞으로 더 좋은 답사 기회 만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나이들어 하루를 보람있게 보낼 수 있는 즐거움이었고 회장님 답사기가 더욱 빛납니다. 다음달이 기다려 짐니다.
읽기가 늦었네요. 이런 멋진 글을 지금에야 읽다니 ..... 발이 아파 그늘에서 쉬느라 보지 못한 탱화, 범종의 비천상까지 소상하게 어느 하나 빼지 않고 카메라에 담아 게시 해 주시니 고맙기 그지 없심더.
앞으로 골치 아픈 비용 계산이나 게시는1년에 한번만 하심이 ......
"스스로 웃는 웃음 한마디에 천지가 놀라고 외로운 달 홀로 비추니 강산이 고요하다." 정말 그렇네요. 步見의 깊은 뜻을 알만 하네요. 계속 이런 경지로 우리를 인도하시기를...미전님 홧팅!!!
아직 몸이 성치 못하여 동행을 못했지만, 이렇게 가만히 앉아서 이런 명문후기를 보니 참으로 황송하고 마치 직접 눈으로 보는듯 하다.. 미전님! 고맙슴니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