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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고향 三山고을(5) - 1960년대 三山고을의 모습을 되돌아본다.
지역 개관
필자가 태어나고 자란 이곳 삼산고을은 서부 경남에서도 오지 중의 오지라 할 수 있다. 이곳에는 백두대간에서 지리산으로 향하다 소백산맥의 한 줄기로 남덕유산에서 뻗어 내린 황매산(1,108m)을 모산(母山)으로 500~700m 높이의 허굴산(墟窟山), 금성산(錦城山), 악견산(岳堅山) 등 3개의 명산(名山)이 마치 의좋은 3형제처럼 서로 어깨를 나란히 우뚝 솟아 있다.
- 황매산 상봉에서 멀리 바라본 삼산 모습. 세 산이 서로 마주보며 솟아 있는 모습이 아름답게 보인다.
이 세 산 가운데 금성산은 왜구의 노략질이 심하던 고려 말 또는 조선 초기부터 왜구 등의 남해안 외침상황을 한양 도성으로 신속하게 전달하던 봉수대가 있던 곳(이런 연유로 ‘봉화산烽火山’이라고도 부른다)이며, 허굴산과 악견산은 임진왜란 때 곽재우(郭再祐) 홍의장군 등 의병장들과 힘을 합쳐 산 정상부근에 산성을 쌓아 왜군을 물리쳤던, 호국(護國)의 기상이 곳곳에 서려 있는 자랑스러운 고장이다. 그뿐만 아니다. 산마다 기암절벽의 수려한 풍광과 조망권이 뛰어난 명산으로 이를 합쳐 옛날부터 ‘삼산(三山)’이라고 불려 왔다.
이 삼산고을은 오늘날 무분별한 개발로 인해 크게 훼손되고 있는 다른 지역들과는 달리 아직도 옛 모습이 그런대로 잘 보존되고 있다. 그래서 전국의 산행객들이 즐겨 찾는 명소로 떠오르고 있다. 이 3개산의 품속에 양리(陽里), 장단리(長湍里), 성리(城里) 등 3개 법정 리동과 15개 자연마을이 이 산들을 배경으로 옹기종기 터 잡고 있다. 그리고 우뚝 솟은 황매산 자락에서 발원한 물이 양리, 장단리, 성리의 들판을 넉넉하게 적신 후 합천댐 아래의 황강(黃江)으로 흘러내려간다. 삼산고을의 젓줄인 이 냇가를 과거에는 일명 황석탄(黃石灘)이라 불렸다고 하는데, 오늘날 행정명칭으로는 금성천(錦城川)이라 이름 지어져 있다. 아마도 삼산 가운데 하나인 금성산을 한 바퀴 돌아 흘러내려 간다는 데서 그 이름을 붙인 것이 않을까 싶지만 정확히는 알 수가 없다.
- 허굴산 정상 부근에서 바라다 본 양리 전경
- 금성산 정상에서 바라본 장단리 전경
- 금성산 정상에서 바라다 본 성리 전경
지난 1988년 말 합천댐*의 준공으로 인해 대병면의 경지면적 가운데 1/3정도가 수몰되고, 면소재지였던 창리(倉里) 등 4개리 7개 마을이 완전히 없어짐으로써 삼산고을이 면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그 이전보다 더 커지게 되었다.
*합천댐 : 공사기간 1983. 12~1988.12, 발전량 5만㎾, 본댐 높이 96m, 길이 472m
그런데 해발 220m(성리 대밭골 기준) 내외의 고지인 이곳에 예상외의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어 처음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많이 놀란다고 한다. “산골에 이런 넓은 들판이 있다니!” 하고 말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이 지역을 ‘넓은 들’이라는 뜻으로 ‘대평(大坪)’이라 불렀다.
- 네모나게 잘 정리된 성리 들판 모습. 이 농지정리는 영농기계화를 앞당기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일제강점기 초기인 1914년 지방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폐지된 삼가현(三嘉縣) 소속의 고현면(古縣面), 대평면(大坪面), 병목면(幷木面)의 세 지역을 하나로 합쳐 오늘날의 합천군(陜川郡) 소속으로 대병면(大幷面)을 새로 만들었다. 이때 대평면의 ‘대’자와 ‘병목면’의 ‘병’자를 합쳐 오늘날의 ‘대병면’이라는 이름을 새로 작명하였다고 한다.
이 대병면의 유래를 대강이나마 살펴보면, 면내의 창리에서는 5~6세기 대규모 고분군(古墳群)이, 또 역평리에서는 청동기시대의 대규모 지석묘군(支石墓群) 등이 합천댐 건설로 인해 수몰되기 전에 부산 동아대학교 박물관 팀에 의해 발굴된 사실이 있다. 이외에도 장단리, 하금리, 대지리에 삼국시대로 추정되는 고분군이 발견된 사실로 미루어 보아 당시에 강력한 지배세력이 상주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삼국시대에는 신라와 백제의 중간지점에 위치한 탓에 그 당시에 이 지역이 격전지로 알려져 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이곳에 삼지현(三支縣)을 설치하였는데, 제35대 경덕왕(景德王) 때 삼기현(三岐縣)으로 고쳐 강양군(江陽郡, 오늘날 합천陜川의 옛 이름)의 관할이 되었다.
그 후 고려시대에는 제9대 현종 9년(1018년)에 당시 주(州)로 승격된 합주(陜州)의 속현이 되었다가 제31대 공민왕 22년(1373년)에는 감무(監務, 현감縣監)을 두어 다스렸다. 조선시대 개국 초기인 태조 원년(1392년)에 다시 군(郡)으로 격하되어 합천군(陜川郡)이 되었으며, 제3대 태종 13년(1413년)에 삼기현(三岐縣)과 가수현(嘉樹縣)을 합쳐 삼가현(三嘉縣)으로 그 이름이 변경되었다. 이때 현 사무소도 가수현(嘉樹縣, 오늘날의 삼가三嘉)으로 옮겨가면서 그 후부터 대병면 소재지가 있던 곳을 옛 삼기현(三岐縣)이 있던 곳이라는 뜻에서 고현(古縣)이라 부르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 조선총독부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고현면(古縣面), 병목면(幷木面), 대평면(大坪面)을 합쳐 10개리를 관할하는 대병면(大幷面)이 탄생했다. 이 때 고현면은 창리, 회양리, 상천리, 역평리를, 병목면은 유전리, 하금리, 대지리를, 대평면은 양리, 장단리, 성리를 각각 편입하여 오늘날의 대병면이 된 것이다.
이 대병면은 합천읍에서 서쪽으로 약 18km 떨어진 곳에 황강(黃江)과 합천호수를 중심으로 황매산과 삼산이 우뚝 솟아있는 산세가 수려한 고장이다. 총면적은 63.2.㎢이나 합천호수가 상당한 면적을 차지하고 있으며, 인구는 2,264명(2016년 11월 기준)이다. 지난 1965년경에는 한때 1만5천명에 육박했다고 하는데, 이렇게 인구가 크게 줄어든 것은 전국적인 이농현상과 함께 1988년 합천댐 건설로 인한 수몰을 그 원인으로 들 수가 있겠다.
이 삼산고을에는 언제부터 들어와 살았는지에 대해선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오늘날 합천댐 아래 지역에서 고려 말에 유명한 무학대사(無學大師)가 태어났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고려 후기 이후부터가 아닐까 싶다. 관내 집성촌의 입향조(入鄕祖)를 살펴보면 대개 조선 초기 또는 중기로서 지금으로부터 약 400~600년으로 나타나 있다.
지역 인구
우리 삼산 고을은 행정구역으로 양리(陽里), 장단리(長湍里), 성리(城里) 등 3개 법정 리동과 15개 자연마을로 형성되었다.
먼저 양리에는 도현동(바랑거리)을 비롯한 고정(높은정), 송정 마을이 있고, 장단리에는 원장단을 비롯한 대산동(한정울), 금성동(서재밑), 조항동(귀이목), 쌍암동(맞바구), 봉기(벌터), 당동(땅골) 마을이 있으며, 성리에는 죽전동(대밭골)을 비롯한 송지(송터), 지동(못골), 오동골, 평학 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악견산 아래 황강변에 위치한 평학마을은 행정구역상으로는 성리에 소속돼 있으나 생활권은 대병면 소재지로 편입돼 있다.
이곳의 많은 마을은 집성촌을 이루고 있었는데, 예를 들면 장단리의 원장단은 초계(팔계)정씨, 한정울은 벽진이씨, 서재밑은 밀양박씨, 귀이목은 밀양박씨와 안동권씨, 성리의 대밭골과 송터는 안동권씨, 못골은 진주강씨, 오동골은 남평문씨 등 있다. 양리 마을의 경우에는 특정 집성촌이 없이 각 성씨들이 고루 분포되어 있었다.
1948년 삼산국민학교(1995년에 ‘초등학교’로 바뀌었다)가 개교할 당시 학생수가 20~30명 정도였다가 1970년대 초에는 120여명까지 늘어난 것을 보면 지역 주민수가 상당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 후 이농현상이 심해져 하향곡선을 그리던 1986년(합천댐 건설로 인한 수몰 전)에는 인구통계에 따르면 양리 78가구 374명, 장단리 163가구 747명, 성리 158가구 724명(평학동 26가구 130명 별도) 등 모두 399가구 1,845명으로 나타나 있다.
아쉽게도 그 이후 계속 줄어들어 마지막 해인 1998년에는 불과 5명만을 배출한 다음 폐교가 된 것을 보면, 아마도 이농현상으로 인해 1970년대 초에 정점을 찍은 후 내리막길을 걸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에는 젊은 세대들이 거의 없고 60대 이상의 촌로들만이 지역을 지키고 있어 앞으로 이 삼산고을이 어떻게 변모해 나갈지 크게 걱정 하고 있다.
1988년 말 합천댐 준공은 이 지역을 크게 변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면소재지를 포함한 경지면적의 1/3이 수몰되었을 뿐만 아니라 면소재지가 황매산 중턱의 회양리로 이전(오늘날 신성동新成洞이다) 해야만 했다. 이에 따라 많은 수몰지의 주민들이 정부로부터 얼마간의 보상금을 받고는 정든 고향을 떠나 서울, 부산, 대구 등 외지로 이주해야 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 대병의 지형을 크게 바꾼 합천댐과 합천호 모습
그런 한편으로는 댐 건설로 인해 합천읍에서 합천댐까지, 또 합천호수 주위에는 새로운 도로망이 형성돼 과거보다 교통이 편리해 졌다. 댐 건설에도 불구하고 우리 삼산 고을은 수몰지역보다 상대적으로 지대가 높은 곳에 위치해 있어서 직접적인 큰 변화는 없었다.
하지만 수몰로 인해 대병면 전체 인구수가 크게 줄어들어 초등학교와 중학교가 통폐합되거나 학생 수가 급감하게 되고, 지역 중심으로서 4일과 9일에 매일 열리던 5일장도 사실상 없어지게 되었으며, 농협단위조합 또한 인근 용주면 단위조합과 통합되는 등 그 면세(面勢)가 전해 비해 크게 떨어졌다. 합천군의회 의원 선출을 위한 선거구도 합천읍, 용주면과 합쳐져 있으며, 그나마도 인구수가 가장 적은 면이 되었다. 합천댐 건설 이전에는 대병면이 용주면보다 인구가 훨씬 많았었다.
따라서 5일장도 되살리고, 중학교도 이전해 문을 여는 등 지역중심으로서의 입지를 다시 세우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근래에는 교통 편리함 등으로 인해 경제권이 합천권역으로 편입되고 말았다. 과거에는 삼가(三嘉)와 상대적으로 인적 및 물적 교류가 많은 편이었다.
그나마 전국적으로 농촌인구가 해마다 줄어드는 것이 보편적인 현상임을 감안할 때 요즈음 우리 대병면만은 합천호수가 바라보이는 전망 좋은 곳이 많아 외지로부터 귀향, 귀농인구가 조금씩 유입되고 있어 지역 발전의 청신호가 되고 있다.
지역 교통
이 지역은 황매산 기슭의 고지대라 외지와의 교통이 아주 불편했다. 그나마 대병면 소재지를 중심으로 양리방면에는 부산, 진주, 대구로 갈 수 있는 지방도 1089호선(경남 산청군 신등면 단계리 ~ 경북 김천시 부항면 월곡리 구간)가 있었고, 성리 방면에는 부산, 합천으로 갈 수 있는 지방도 1026호선( 산청군 산청읍 산청교차로 ~ 합천군 대양면 정양삼거리 구간)가 개통되어 있었다.
예전에는 하루아침마다 대병에서 부산과 진주, 대구로 향하는 정기버스가 8시, 9시 경에 떠나면 한 낮에는 잠잠하다 오후에는 5시, 6시경 다시 대병으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그 다음날 다시 나가는 방식으로 운행되고 있어서 주민들의 불편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필자가 합천중학교를 다니던 1960년대 후반에 마침 부산에 갈 기회가 한번 있었다. 이때는 장단2구 맞바구에서 약 40분을 걸어 성리삼거리(개목정)까지 이동한 후 아침 8시경에 비포장 도로 위를 털털거리며 달리는 천일여객 버스를 타고서 합천, 창녕, 부곡(후에 온천단지로 그렇게 크게 개발될 줄은 당시에 아무도 몰랐다), 수산(요즘의 밀양 하남)과 넓디넓은 김해평야를 거쳐 종점인 부산의 버스터미널(조선방직공장이 있었던 곳이라 해서 흔히 ‘조방’이라고 불렀다.)에는 오후 4시경에 도착했다. 버스 탑승시간만 장장 8시간이었다. 당시에는 부산과 마산을 잇는 간선도로 외에는 거의 비포장 도로였었다. 부산 조방에 도착한 후 서면지역에 살던 누나 집까지 시내버스로 이동하는 시간 등을 감안한다면 거의 하루 종일 걸린 셈이다. 승용차로 2시간 남짓 쌩쌩 달리는 요즘과는 비교가 되질 않는다. 그나마 굴곡이 유달리 심하고 절벽 위로 아슬아슬하게 달리던 황계 재(嶺)는 눈이 조금만 와도 운행이 중단되기도 하는 등 불편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실제로 필자가 군청소재지의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니던 1967년부터 6년 간 합천읍과 장단리 맞바구에 있던 필자의 집까지 약 20㎞구간을 수십 차례 걸어 다닌 경험이 있다. 토요일 집에 왔다가 정기버스가 고장이 나거나 눈이 내리는 등으로 인해 불통이 되면 되돌아 가는 길은 둘 가운데 하나를 택해야 했다. 가장 지름길로 의룡산 아래에 있는 오동골과 용주면 둔덕동을 거쳐, 황강백사장, 용주면사무소, 손목리 코스가 있고, 또 하나는 황계리, 장전리, 용지리, 손목리 코스가 있었다. 이 가운데 둔덕동 코스를 많이 이용했던 것 같다. 그런데 둔덕동과 용주면사무소 사이에 황강을 따라 펼쳐진 백사장을 걸을 땐 진도가 영 나질 않아 참 힘들어 했던 기억이 남아 있다.
그러나 어쩌면 이 정도는 약과라 할 수 있다. 1950년대 후반 이전에는 정기적으로 운행하는 버스조차도 아예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20㎞ 정도의 거리인 합천의 군청소재지나 지역 근거지인 삼가면 소재지까지를 옛 사람들은 경조사로 인해 친인척이나 지인(知人) 집을 방문하거나 시장을 보기 위해 걸어서 그 먼 길을 종종 왕래했다고 한다.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 세대와 그 윗 세대들은 그 당시에 얼마나 고달팠을까. 더구나 무덥거나 추운 날씨에도 한 가득 등짐을 지거나 머리위에 얹은 채 힘들게 다녔을 그 모습이 눈에 아른거린다.
오늘날에는 도로포장도 되고, 정기버스도 자주 운행하는 등 교통상황이 많이 좋아졌다. 또 시골이지만 많은 집에서 승용차를 소유하여 운행하고도 있다.
이런 가운데 오늘날 대병면의 하금삼거리에서 양리삼거리, 장단리, 성리를 거치는 이 도로는 지방도 1026호(경남 산청군 산청읍 산청교차로 ~ 합천군 대양면 정양 삼거리)의 일부로 포함되어 있고, 특히 양리삼거리에서 성리삼거리까지의 구간은 ‘대병3산로’로 명명되어 있다.
- 아래 귀이목 마을 인근에 세워진 도로 안내판. 이 성리~양리 간 도로는 지방도 1026호의 일부로 지정되었다.
합천읍을 오갈 때 주민들은 성리와 황계폭포로 연결된 1026호 지방도로 운행하는 정기버스를 이용하고 있으나 승용차를 이용할 경우에는 시간단축을 위하여 합천댐에서 황강을 따라 합천읍까지 새로 시원하게 뚫린 왕복 4차선 포장도로를 이용하는 추세다.
한편, 가회면에서 양리, 대병면 소재지를 거쳐 봉산면으로 연결되는 도로는 지방도 1089호(경남 산청군 신등면 단계리 ~ 경북 김천시 부항면 월곡리 구간)의 일부로서 이 가운데 합천군 가회면 장대삼거리와 거창군 신원면 수원삼거리까지 구간은 ‘서부로’로 명명되어 있다.
- 양리 도현 마을 인근에 설치된 1089호 도로 입간판
따라서 양리삼거리와 하금삼거리까지의 도로는 지방도 1026호와 1089호가 겹쳐 있는 셈이다. 이 도로들은 개통 후 오랫동안 비포장 상태로 있다가, 정부에서 합천댐 건설공사가 한창 진행되던 1984년경에 아스팔트로 깔끔하게 포장해 도로 이용률이 그 이전보다 크게 높아지게 되었다,
교육
옛날 어린이들은 요즈음 말로 사설교육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서당(書堂)에서 주로 공부했다. 어릴 적 서당에 입교하면 대개 천자문(千字文)을 시작으로 동몽선습(童蒙先習), 자치통감(資治通鑑)까지 공부하는데, 더 깊이 공부를 하는 어린이들은 사서(四書, 논어. 맹자. 대학. 중용)와 삼경(三經, 시경. 서경. 주역)까지 공부했다고 한다. 이러한 전통적인 교육 방식은 이곳에 신식 교육기관인 삼산초등학교*가 문을 연 이후에도 지속되다 1970년대부터 점차 없어지고 말았다.
신식 교육기관인 이 삼산초등학교는 광복 후인 1948년 3월, 대병면 장단1구 755번지에 문을 열어 1998년까지 49회에 걸쳐 2,612명의 동문을 배출하였는데, 앞서 말한 허굴산, 금성산, 악견산 등 3개 산이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다하여 삼산초등학교라고 이름 지었다.
그에 앞서 1940년 10월에는 조금씩 농촌인구가 늘어나 삼산간이학교 설립인가를 받았으나 학교건물이 없자 청강사(晴岡寺)를 창건한 故 정규락(鄭逵洛) 진사가 학교 부지와 함께 건물 한 채를 기증을 기증해 1942년 4월에 대병심상소학교(尋常小學校, 당시 일제 강점기로서 일본식 이름이다) 장단분교로 운영되었다. 그러다 해방 후인 1948년 4월 1일, 드디어 삼산초등학교로 정식 개교하였다.
처음 학교 문을 연 초기에는 20~30명씩 입학을 하다 한창 농촌인구가 많을 때인 1970년 초에는 120여명까지 늘어나기도 했다. 당시에는 이웃면인 용주면의 황계리 택계 마을 학생들도 오랫동안 삼산초등학교를 다녔다. 지형적으로 볼 때 황계폭포보다 높은 곳에 자리 잡은 이 마을은 행정관할인 용주면 소재 초등학교보다는 거리가 상대적으로 짧아 왕래가 편리했던 점이 작용했던 것이다.
* 초등학교 : 광복 50주년이 되던 1995년에 정부가 국민학교라는 이름이 일제(日帝) 잔재라는 이유로 초등학교로 바꾸었다.
- 필자의 1967년 2월, 앨범 속의 삼산초등학교 졸업 사진. 학생들의 복장이나 헤어스타일이 1960대 당시 시대상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그 이후 국가의 경제개발에 따른 인구 도시집중과 자녀 출산율의 감소로 학생 수가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결국 1998년 2월에 2,612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후 아쉽게도 면소재지에 위치한 대병초등학교로 통합되었다. 이 후 이 학교건물은 합천자연학교로 15년간 운영되다 2014년 말에는 그마저도 문을 닫자 학교건물 일체가 완전히 철거되고 말았다.
오늘날에는 학교부지 일부가 지역 주민들의 건강 증진을 위한 게이트볼 장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학교 정문 옆에는 지난 2016년 5월 15일 전국의 학교동문들이 모금해 건립한 ‘삼산초등학교 옛터’라는 이름표를 단 약 2.5m 높이의 교적비가 묵묵히 학교터를 지키고 있다.
필자의 초등학교 시절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가 둘 있다.
첫째 우리 모교가 합천군종합체육대회에 참가하여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는 점이다. 4.5학년 때 고만부 선생님, 6학년 때 송기옥 선생님의 열정에 힙 입어 벌터(봉기) 출신 송호암(宋鎬岩), 장단 출신 이판남(李判南) 등 여러 남여 유망선수를 발굴, 맹훈련 끝에 군 대회에 나가 B그룹(12개 학급 이하 20개교)에서 종합 3위라는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던 일이 있었다.
- 대회가 끝난 후 선수들과 선생님들이 함께한 기념사진
당시만 해도 합천군의 인구가 최고 19만8천명(1965년 기준) 명에다 초등학교 수가 59개 정도나 될 정도였는데, 산골의 작은 학교로서는 크게 선전한 셈이었다. 개교 이래 올린 첫 쾌거였다. 필자는 합천중학교 운동장에서 열린 이 대회 개막식에 처음 참석해 스탠드에서 입장 모습을 지켜보았는데, 각 학교별로 “둥둥둥~~”소리를 내며 악대를 앞장세우고 입장하던 선수단 입장 모습이 가슴을 마구 들뜨게 했다. 필자의 모교는 작은 산골 학교여서 악대가 없던 터라 경이롭게 이 광경을 지켜봤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러나 오늘날 합천군은 농촌인구 감소로 통폐합을 거듭해 불과 4만7천여 명의 인구에 19개교만 남아 있으며, 그마저도 학생 수가 계속 감소추세라고 하니 앞날을 예측하기 힘들 정도다.
또 하나는 추억의 수학여행이다. 필자의 선배들은 법보종찰 해인사 등 비교적 가까운 지역에 수학여행을 다녀왔다고 한다. 물론 드물게 서울행도 있었지만, 그런데 필자가 속한 6학년 때는 1966년 가을에 대형버스 1대를 전세 내 부산, 경주를 1박2일 일정으로 다녀왔다. 떠나는 전날 밤, 처음 산 검정운동화를 머리맡에 두고서 너무 설레는 마음에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새벽 일찍 출발해 버스가 부산으로 향해 달리던 중에 함안군 군북 부근에서 우연하게 열차가 “칙칙 푹푹~~” 소리를 내며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이때 담임선생님은 버스를 세우게 한 후 학생들이 열차 둑에 뛰어 올라 길게 뻗은 경전선 철길을 구경하도록 했다. 당시로서는 첨단 교통수단이었던 열차를 난생처음 보게 되었다.
이어서 도착한 부산의 하루 두 번 들어 올리던 영도다리, 광복동의 휘황찬란한 네온사인, 아직도 건재하고 있는 미화당백화점의 구내 계단을 통해 올라 본 용두산 공원의 야경 등 하나하나 인상적이지 않은 것이 없었다. 당시 어린 우리 눈에는 별난 세계로 비쳐줬다. 인파로 뒤섞인 광복동을 지날 때는 누가 혹시 대열에서 이탈할까봐 겁이 나 몇 명씩 서로 손을 잡고 걸었다. 새 검정운동화에다 빡빡 깍은 머리, 그리고 검정색 교복을 차려 입은, 촌티 물씬 풍기던 그 당시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난다.
광복동 거리에서는 이런 우리들의 모습을 보고선 가끔 어른들이 “너거들(너희들) 어디서 왔노?”하고 물었다. 처음에 “합천에서요~~!”하고 대답했다. 그런데 반응이 별로였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 누가 물을 때는 “합천, 해인사에서요~~!”라고 하니 “응, 좋은데서 왔구나!”하는 것이었다. 이에 신바람이 난 우리는 누가 또 물으면 손을 잡은 한쪽 무리는 “합천!”, 다른 한 무리는 “해인사요!”라고 자신감 있게 대답하길 반복했다. 오늘날에도 필자가 서울에서 생활하며 다른 사람과 첫 인사를 나누다 고향을 물을 때면 역시 해인사를 동원(?)한다. 그래서 “경남 합천입니다”라고 하기보다는 “해인사가 있는, 합천입니다”라고 대답하곤 한다. 역시 이런 대답이 되돌아 온다. “아, 좋은 데서 태어났네요!” 그만큼 예나 지금이나 해인사에 대한 우리 국민들의 높은 인지도는 변함이 없는가 보다.
아무튼 용두산 공원 뒤 합천 가야출신 향우가 운영한다던 ‘가야여관’에서 우리 악동들은 밤늦게까지 어울려 놀았다. 다음날 경주로 이동해 첨성대, 안압지, 불국사 등을 관람한 다음 대병으로 돌아왔다.
- 경주 불국사에서 한 컷, 남학생들의 까까머리와 검정 학생복에, 여학생들의 똑같은 헤어스타일이 눈길을 끈다.
당시 수학여행 경비는 920원 정도인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당시에는 적지 않은 금액인데, 가정형편이 어려운 일부 학생들이 불참해 참 아쉬웠다. 어쨌든 이 수행여행은 필자가 시골 대병을 벗어나 처음으로 부산, 경주 등 바깥 세계의 존재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안목을 높여주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다시 본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이곳 삼산초등학교를 졸업하고서 대병면 역평리에 세워진 사립학교인 대병중학교(1951년 개교)에 대부분 진학한 후 부산, 대구, 진주, 거창 등지의 고교나 대학까지 다니기도 하였다. 그런데, 삼산고을까지는 걸어서 통학하기에는 어려움이 커 진주, 합천 등의 외지 중학교로 진학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 대병중학교는 합천댐 건설로 인해 수몰돼 1986년경 황매산 기슭의 현재 면소재지로 이전한 바 있다.
먹고 살기에 바빴던 그 시절에는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었다. 필자의 선배 기수가 졸업하던 1966년까지는 한 동네에 중학생이 불과 한 두 명일 정도로 진학률이 높질 않았다. 전반적인 생활수준이 조금씩 나아진 1967년경부터는 6학년 졸업생 중에 거의 절반 정도가 중학교로 진학했다. 이렇게 삼산초등학교와 대병중학교 등에서 배출된 우리 모교 출신들이 오늘날 고위공직자, 학자. 법조인, 기업인 등으로 성장해 사회의 각계각층에서 크게 활약하고 있다.
주민 복지
필자가 어릴 적의 주민에 대한 복지환경은 너무나 취약했다고 할 수 있다. 나라의 형편이 어려우니 자연히 주민의 복지혜택이 어려울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오늘날에는 마을마다 마을회관이 있어서 더운 여름에는 주민들의 쉼터로, 추운 겨울에는 함께 모여 보내는 생활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거기에다 연료비, 음식비까지 행정당국에서 지원한다고 한다. 그 당시에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기껏해야 부양가족이 없는 고령의 할머니, 할아버지에게는 행정당국에서 생활보호자로 지정해 미국산 밀가루를 조금씩 제공하는데 그쳤다. 필자의 초등학교 시절에 생활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대상으로 학교에서 미국산 옥수수 죽을 끓여 주기도 했다.
이 지역의 의료 환경도 마찬가지로 좋을 리가 없었다. 그런 가운데도 장단리 한정울 마을의 백소(白笑) 이만기(李萬基) 선생이 관내 유일한 한의사로, 또 서재밑 마을의 박종석(朴鍾碩) 선생이 소규모 약방을 운영하며 주민들의 건강을 돌보았다.
그러다 나라의 형편이 점차 나아지던 1983년 5월에 합천군보건소 소속의 장단보건진료소가 장단리 웃귀이목(상조항) 동네에서 처음 문을 열었다. 그러다 지난 2004년경 도로 옆의 현재 위치에 현대식 건물을 신축해 이전했다. 처음 문을 열 때부터 오늘날까지 이 진료소의 책임을 맡아온 문복순 소장(간호사 겸 조산사)은 도중에 가회면 대기보건진료소에서 근무한 4년을 제외한 29년간을 줄곧 삼산고을 주민들의 건강 돌보미로 일해 왔다. 찾아오는 환자들을 부모님처럼 성의를 다해 돌봐 드리자 소문을 듣고 인근 지역의 주민들까지 진료 차 찾아올 정도였는데, 2017년 12월 정년퇴직을 해 주민들이 크게 아쉬워할 정도였다.
- 윗 귀이목 마을에 현대식으로 지은 장단보건진료소 모습
이처럼 의료혜택으로부터 소외되었던 오지였는데, 오늘날에는 그만큼 지역 주민들을 위해 국가의 복지시스템을 확충한 결과라 할 수 있다. 평균수명도 그 당시에는 짧은 편이라 60세가 되면 회갑잔치를 크게 벌이곤 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회갑잔치는 아예 생략하고, 칠순에는 가족끼리 모여 식사를 하거나 해외여행을 보내드리는 것으로 대체하며, 팔순 때가 되어서야 이웃과 친지들을 초청하여 잔치를 벌이며 무병장수를 축하할 정도로 수명이 길어졌다. 이는 어릴 때부터 영양공급이 원활해지고, 건강에 대한 관심과 의료기술이 향상되는 등 삶의 조건이 전에 없이 좋아진데 따른 것으로 보고 있다. 참고로 인구 통계에 의하면 1960년의 우리나라 평균수명이 남자 51.1세, 여자 53.7세인데 비해 2013년에는 남자 78.5세, 여자 85.1세로 크게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지역 산업
시골 오지라 마을마다 몇 집의 부잣집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영세한 농가이거나 소작농으로 가정살림이 어려웠다. 동네마다 손꼽히는 몇몇 부잣집만이 기와집이었을 뿐 대부분은 초가집에서 살았다. 이 초가집들은 1970년대 초 전국적으로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자”라며 들풀처럼 일어난 '새마을운동'으로 인해 대부분 슬레이트지붕으로 개량하거나 새로운 양옥집으로 바뀌는 등 주거 환경이 크게 개선되었다. 그 당시에는 각 가정마다 젊은이들이 산에서 고사목과 깔비(가을에 누렇게 변해 떨어진 소나무 잎)를 채취하고, 심지어는 살아있는 나무를 베어 말려 땔감으로 이용했다. 그러나 요즈음은 주 연료가 기름보일러로 대체됨에 따라 등산코스가 아니면 산에 오르기 어려울 정도로 숲이 우거져 있다. 그만큼 나무가 연료에서 밀려난 셈이다.
이 지역에서의 주곡은 쌀을 비롯해 보리, 밀이었으며, 또 고구마, 감자 등 구황작물을 많이 재배하기도 했다. 주민 숫자에 비해 경지가 좁은 터라 쌀 한 톨이라도 많이 수확하기 위해 열심히 농사지었으며, 심지어는 산 중턱까지 개간하여 곡식을 심고 가꾸었다. 당시 집집마다 재산목록 제1호는 소였다. 소는 농사를 짓는데 아주 필수적이었으며, 가격면에서도 돼지 보다 월등히 높은 편이었다. 농가에서는 소나 돼지를 키워서 목돈을 만들어 자녀들을 외지로 유학 보내기도 했다. 이렇게 오랫동안 농촌을 짓눌러 왔던 가난은 1980년대를 전후해 새로 개발된 ‘통일벼’가 전국에 보급됨으로써 단군 이래로 처음 식량을 자급자족하는 바탕이 마련되었다.
요즈음에는 집을 지을 수 있는 밭이 가장 비싼데 비해 그 당시에는 논이 가장 비싸고, 그 다음이 밭, 산 순이었다. 논 가운데서도 보리를 재배할 수 있는 논을 상답(上畓)이라 하여 가장 높게 처 주었다. 한해에 쌀과 보리를 차례로 재배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상품을 생산하는 공장이란 전혀 없었으며, 1960년대에는 농가마다 뽕나무를 심어 누에를 길렀고, 그 이후에는 빵의 재료가 되는 밤나무를 대량 재배하여 농가소득을 올리기도 했다.
전기시설이 없었던 그 시절에는 냇가의 물을 끌어들여 위에서 떨어지는 힘(낙차)으로 수차를 돌려 방아를 찧었는데, 관내에는 바랑거리(도현동), 맞바구, 원장단, 개목정(성리1구) 등 네 곳에 이러한 물레방앗간이 있었다.
또 당시에는 살기 위하여 일 년 내내 바쁘게 일했다. 특히 여자들은 여름에 길쌈을 해 삼베를 짰고, 목화씨에서 나온 면을 구해 무명옷을 만들어 가족들을 입혔으며, 남자들은 겨울철에 사랑방에서 볏짚으로 농가에 필요한 가마니를 짜고, 왕골로 돗자리를 짜기도 했다.
오늘날에는 주력상품인 쌀 이외에도 일반 국민들의 건강을 증진하는데 도움이 되는 양봉(벌), 양파, 마늘, 고사리, 생강 등의 특용작물을 많이 재배하고 있다. 겨울 들판에도 양파와 마늘을 심은 비닐이 덮여있는 모습을 여기저기에서 쉽게 볼 수 있다. 그리고 허굴산의 동쪽 기슭인 벌터 마을 부근에는 대규모 양계장 등 농장이 여럿 있고, 서쪽 기슭의 맞바구 마을 건너편에는 버섯을 인공적으로 재배하던 제법 규모가 큰 공장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런데 이 공장이 부도가 나 장기간 비워있다가 오늘날에는 대한통운이 이를 인수하여 리모델링한 다음 물류창고로 이용하고 있다.
과거에는 과자, 빵, 학용품 등을 구입할 수 있는 소규모의 구멍가게(당시에는 ‘점방’이라 불렀다)가 마을마다 거의 다 있었으나 교통의 편리함으로 인해 요즈음에는 모두 사라지고 없다. 농촌인구 감소에 따라 수요자가 크게 줄어들고, 교통이 편리해지자 가까운 대병면소재지나 합천읍에 가면 언제든지 신선하고 품질도 좋은 물품을 구입할 수 있게 된데 그 이유가 있다고 할까.
그간 이 지역의 주업이라 할 수 있는 농업과 관련된 환경도 많이 바뀌었다. 과거에는 연못 아래나 하천 부근 등 일부 목이 좋은 논을 제외하고는 거의 천수답(天水畓)으로 하늘에 기대어 농사를 짓는 편이었다. 따라서 가뭄이 심할 때는 이웃한 농지 주인끼리 서로 자기 논으로 물을 댈 욕심으로 물싸움을 벌이던 광경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그러나 1988~1990년 사이에 이 지역을 관할하는 합천군청 주관으로 삼산고을의 들판 대부분이 경지정리가 되고, 또 2010년부터 황매산 기슭의 금성천 상류(대병면 양리와 가회면 두심리 경계지점)에 비교적 규모가 큰 농수용 저수지(댐)가 건설돼 일 년 내내 농수를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어 물 걱정이 없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농사방식도 전적으로 인력에 의존하던 방식을 벗어나 요즈음은 경운기, 트랙터, 콤바인 등 농기계를 이용해 생산성도 크게 높아졌다.
지역 문화
- 종교
삼산고을 주민들은 무교 아니면 대부분 불교를 신봉하였으며, 유교의 전통도 무시할 수 없었던 고장이기도 했다. 먼저 불교 쪽을 알아보자. 당시 삼산 가운데 맏형격인 허굴산 기슭에는 일제 강점기 때 세워진 청강사(晴岡寺)가 있었다. 관내의 유일한 사찰이라 할 수 있었다.
이 청강사에는 반드시 불교신자가 아니더라도 음력 4월 초파일(부처님오신날)에는 누구나 한번쯤 찾아가 참배하곤 했다. 이때만 해도 인근 지역에 사찰이 없어 삼가, 가회, 용주, 봉산면의 주민들까지 올 정도로 그 날에는 청강사가 붐볐다. 만개한 벚꽃이 장관이었던 그곳에는 초파일에는 그야말로 성시를 이루었다. 그 건너 초등학교에서 공부하던 우리 학생들은 빨리 수업이 끝나길 학수고대했다. 청강사에 가면 맛있는 음식을 얻어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몸은 학교에, 마음은 그 곳에 미리 가 있었다. 이후 세월이 흘러 농촌인구가 크게 줄어 들었을 뿐만 아니라 허굴산의 서쪽 기슭에 황룡선원(黃龍禪院)과 금성산의 합천댐 방향 기슭에 대원사(大元寺, 엿새미 재 부근)가 새로 문을 열어 신도가 분산되어 과거와 같은 전성기를 다시 구가하긴 어렵지 않나 싶다. 오늘날에는 음악(기타 전공)을 하던 정진사의 증손자인 혜광스님(속명 정현세)이 주지가 돼 절을 관리하며 해마다 봄에 그의 기타 솜씨를 살려 벚꽃축제를 열고 있다.
아울러 이 고장은 500년간 내려온 조선시대의 유교적 분위기가 아주 강하게 내려온 곳이기도 하다. 이에 따라 이 지역사회의 어른으로서 후학을 양성하던 꽤 알려진 유림도 적지 않았다. 오동골의 오강(五岡) 문존호(文存浩) 선생을 비롯해 대밭골의 만재(萬齋) 권재춘(權載春), 원장단의 모산(某山) 임종택(林鍾澤), 대밭골의 설암(雪嵒) 권옥현(權玉鉉) 학자 등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불어 닥친 서구식 문화의 영향으로 인해 유교적 전통이 서서히 쇄락해 가는 가운데, 지역을 대표하는 일부 유림들이 관할인 삼가향교의 전교(典校, 향교 책임자), 장의(掌議, 향교 임원) 등의 직책을 맡아 사회 활동을 하기도 했다
이렇듯 불교와 유학 중심의 이 지역사회에 금성산 아래 서재밑 동네(금성동)에 소규모 장단교회가 뒤늦게 1991년에 처음 문을 열었다.
- 장례와 제사
유교적 분위기가 지배적인 지역사회인 연유로 조상을 모시는 일에 모두가 열중이었다. 먼저 장례식이다. 어릴 때 가끔 친척이나 우리 동네의 어른이 별세하면 장례준비를 돕거나 장례행렬에 참가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당시에는 동네 어떤 어른이 별세하게 되면 고인의 사랑방에 빈소를 차려놓고 상주들이 조문객들을 맞이하였다. 그리고 3일장(葬)의 마지막 날에는 발인제(發靷祭)를 마친 후 장례행렬을 거쳐 산지에 마련한 장지에 안장하는 것이 우리 지역의 오랜 장례풍습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장지로 떠나는 장례행렬이 기억이 오래 남는다.
장례 당일 오전에 고인의 유족들이 모여 빈소에서 발인제를 지내는 동안 가까운 넓은 공터에서는 장례행렬을 준비한다. 오색의 인조 꽃으로 화려하게 치장한 상여 앞에는 여러 개의 만장(輓章, 죽은 사람을 애도하여 지은 글을 천에 적은 깃발)이 앞서고, 상여에는 15명 내외의 장정들이 어깨에 상여를 메고, 그 앞에 소리꾼이 위치한다. 상여 뒤에는 삼베옷으로 된 상복을 입은 상주들과 고인의 일가친척, 그리고 동네 주민들이 따른다. 고인이 오랫동안 정들어 살던 집을 이별하고 북망산천으로 장례행렬이 떠날 때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 장례행렬이 장지로 향하는 모습
"에헤 에헤야 어화 넘자 너화 너", "이제 가면 언제 오나~ "하며 상여 앞을 이끄는 소리꾼이 꽹과리를 치며 구슬프게 인생 무상함과 함께 망자의 혼을 달래는 소리를 크게 선창하며 장례행렬이 출발할 즈음이 가장 절정을 이룬다. 이때 여자 상주들의 호곡에, 특히 고인의 딸들로부터 흘러나오는 구슬픈 곡소리에 모두들 너나할 것 없이 눈가에 눈물을 훔치곤 했다. 중간에 노제(路祭)를 지내고 산지에 자리 잡은 장지에 도착해 안장한 후 3일 째 되는 날에 삼우제(三虞祭)를 지냈다. 그리고 3년 후에야 탈상(脫喪)을 했을 정도로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돌아가신 조상들을 정성스럽게 모시고 기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농촌의 장례 풍속도가 크게 달라졌다. 자녀들이 핵가족에다 도시생활을 하는 등의 시대변화로 인해 장례문화도 많이 간소화된 것이다. 주로 병원의 영안실에서 빈소를 마련한 후 3일장으로 치르되, 산소에 안장하기 보다는 화장을 한 후 사찰에서 49재를 지내며 고인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추세다. 따라서 과거처럼 장례행렬을 보기가 아주 어렵게 될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탈상이 끝난 다음해부터 제사를 지냈다. 가난했지만 어느 가정이나 제사가 있을 경우 부녀자들이 새벽이면 밥에다 국, 전 등을 담은 제삿밥을 머리에 이고 이웃집에 배달하여 나누어 먹는 풍습이 있었다. 추운 겨울철에 어둠을 뚫고 집집마다 제삿밥을 배달하였던 부녀자들의 노고가 얼마나 심했을까 싶다.
가을 추수가 끝난 후에는 각 문중마다 전통적인 흰 두루마기에 검정 갓을 쓴 어른들이 모여 허굴산이나 금성산 등의 산기슭에 위치한 문중의 중요한 산소에서 시제(時祭, 당시 묘사墓祀라고 불렀다)를 지내곤 했다. 당시에는 제법 연세 드신, 많은 종중 인사들이 모여 엄숙하게 의식을 진행했던 것 같았다. 이 시제가 있는 날이면 학교수업이 끝나자마자 그 곳으로 달려가 줄 서서 떡 몇 개를 얻어먹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다.
- 결혼 풍습
당시에는 외부와의 교류가 그리 활발하질 못한 때라 자녀들의 결혼이 면내는 물론 가까운 이웃면의 거주자 간에 이루어졌다. 동네 새댁의 택호를 보면 그리 멀지 않은 동네 이름이 이를 증명해 주고 있다. 우리 면내로는 대밭골댁, 오동골댁, 바드리댁, 도롱골댁 등이 있으며, 한 동네에서 짝을 맺은 커플도 여럿 있다. 또 이웃면으로는 우곡(용주면)댁, 이사리(용주면)댁, 비기(가회면)댁, 술곡(봉산면)댁, 가말(쌍백면)댁, 평구(쌍백)댁, 토동(삼가면)댁 등등이 있다. 아마도 쌍방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이 중매로 연결해 주는 방식이어서 그런가 보다. 그러므로 먼 타 지역과 혼인을 맺는 경우는 아주 드물었다.
결혼방식은 주로 전통혼례 방식으로 거행했다. 혼례 식장은 신부의 집 마당. 여기에 넓은 멍석과 돗자리 위에 혼례청이 차려졌다.
신랑이 혼례청에 들어서면 식이 시작됐다. 흰 두루마기를 입은 동네 어른이 주례가 돼 식을 진행했다. “신랑, 입장!”, “신부, 입장!”, “신랑, 북향 재배!”하는 식으로 말을 하면 신랑 신부는 그에 따랐다. 맨 먼저 신랑이 짝을 잃으면 다른 짝을 찾지 않고 홀로 지낼 정도로 영원한 사랑의 징표인 기러기를 드리는 의식인 전안례(奠雁禮)를 한 후 신랑 신부가 맞절을 하는 교배례(交拜禮). 두 사람이 백년해로를 서약하는 절차다. 이어 신랑 신부가 표주박을 둘로 나눈 잔으로 술을 마시는 합근례(合巹禮) 등으로 식이 진행되었다. 어린 시절에 이런 모습들을 호기심 가득 어른들 사이에서 끼여 지켜보기도 했다.
식이 끝나면 바로 잔치가 시작됐다. 마당에 깔린 멍석 위로 가득 놓인 교자상에 둘러앉아 음식과 술을 나눠 먹었다. 즐거우면 노랫소리도 저절로 나왔다. 이 잔치에 참석하지 못한 어른들의 경우에는 어느 사랑방에서 여러 사람이 함께 모여 있으니 음식을 보내달라는 단자(單子)를 아이들 편으로 보냈다. 그러면 혼주 측에서는 술(막걸리), 묵, 전 등을 준비해 두었다가 건네주기도 했다. 필자가 중학생 무렵 동네 형들을 대신해 어른들이 계시는 어느 사랑방에서 심부름을 왔다는 핑계를 대고 음식을 얻어와 나눠먹은 기억도 있다.
이 당시에 마을사람들은 요즘과 같이 현금을 내는 것이 아니라 혼례잔치에 필요한 술, 단술, 묵 등 먹거리를 직접 만들어 부조를 했었다.
- 놀이 문화
어릴 적에는 놀이문화가 아주 발달했었다. 그런데 이 놀이는 계절마다 또 남녀에 따라 조금 달랐다. 날씨가 따뜻해 놀이를 하기에 아주 좋은 봄가을에 남자 애들은 놀이종목이 많았다. 예를 들면 ‘―’형으로 땅에 홈을 판 후 30㎝ 내외의 긴 막대로 10㎝ 내외의 짧은 막대를 치며 노는 자치기, 종이로 만든 4각형 딱지를 땅바닥에 놓고 다른 딱지로 그 귀퉁이를 쳐서 땅바닥의 딱지가 뒤집히거나 일정한 선 밖으로 나가면 따먹는 때기(딱지)치기, 5색 유리구슬을 땅에 던져놓고 다른 구슬로 맞혀서 따먹는 구슬놀이며 제기차기, 술래잡기 등 다양했다.
날씨가 더워지는 여름엔 놀이터가 냇가로 바뀐다. 동네 앞개울의 물속까지 보이던 1급수에서 물장구치며 멱을 감고, 가재나 피라미 등 물고기를 잡으며 놀았다. 때론 비가 많이 내릴 때는 물고기를 잡아 집에 가져가 매운탕이나 추어탕으로 끓여 먹기도 했다.
날씨가 추운 겨울철에는 허름한 의복에다 운동화도 아닌 고무신을 신고 냇가 얼음판에서 스케이트를 타고 놀다 물에 빠지기도 하고(이때 다른 애들이 “메기 잡았다”고 놀려댔다), 축구공이 귀하던 시절이라 음력 설날 전후로는 동네에서 제수용으로 잡은 돼지의 오줌보를 어른들에게 졸라 받아 그곳에 물을 채워 넣은 다음 논(畓) 등 넓은 공간에서 축구경기를 하기도 했다, 또 설날 전후부터 정월 대보름 까지는 연날리기를 하다 보름날 저녁에 보름집을 태울 때 하늘로 날려 보내기도 했다.
이와 반면에 여자 애들은 고무줄놀이와 술래잡기, 공기놀이를 주로 하였다. 당시에 여자 애들보다는 남자 애들의 놀이가 훨씬 다양했던 것 같다. 이런 여러 가지 민속놀이들이 1970~1980년대에 생활방식의 변화에 따라 거의 없어지고 말았다. 오랜 풍속이 우리 대에 와서 끊어져 아쉽기 그지없다. 오늘날에는 민속박물관에 가야 볼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어른들은 때에 따라 여럿 모이면 술을 마시다가 흥이 나면 술상을 손으로 치며 노래를 불렀다. 또 화투놀이를 즐겨하기도 했는데, 그 정도가 너무 지나쳐 상습적인 화투놀이로 인해 패가망신하는 경우도 있었다. 화투놀이는 당시에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면화투’와 그보다 조금 머리를 써야 하는 ‘육백’이라는 방식이 있었는데, 전문꾼들은 ‘고리짓고땡’이라는 방식을 선호했다고 한다. 게임 중에 머리를 많이 써야 하는 일명 ‘고스톱’은 훨씬 나중에 등장했다.
- 노래자랑대회와 가설영화 상영
시골에서 여름철에는 큰 마을마다 청년회가 주최하는 노래자랑대회(당시 콩콜대회라 불렀다)가 이곳저곳에서 열리곤 했다. 이때는 주위 여러 동네 사람들이 모여들어 자신의 목소리를 뽐냈는데, 우수자에게는 상금 대신 생활에 필요한 주전자, 세수대 등을 상품으로 주기도 했다.
우리 삼산고을에서 열리는 노래자랑대회에서는 성리2구의 못골 마을 가까운 작은 동네인 새양골 출신의 오녹섭 형(1948년생)이 단골손님으로 초대되었다. 앞을 못 보는 맹인임에도 음악성이 있었던지 기타를 독학으로 익혀서 늘 노래자랑대회에서는 반주를 독차지하였기 때문이다. 어릴 적 이들 노래자랑에서 ‘목숨보다 더 귀한 사랑이건만 창살 없는 감옥인가 만날 길 없네~~’로 시작되는 가수 박재란의 ‘님’, ‘못 견디게 괴로워도 울지 못하고~~’로 시작되는 가수 이미자의 ‘울어라 열풍아’ 등의 히트곡이 많이 불러졌던 것으로 지금까지도 기억된다. 이때만 해도 집안 형편이 나은 집에만 소형 트랜지스터라디오를 갖고 있을 정도였는데, 이 라디오를 통해 위와 같은 유행가가 멀리 시골구석까지 보급되었다.
그리고 여름철에는 어쩌다 한 번씩 삼산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임시로 천막을 쳐서 만든 가설극장이 서기도 하였다.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시는 대병면민 여러분!, 안녕 하십니까~~?”하면서 광고방송을 한 후 유행가를 틀어놓으면 마음이 들떠 집에서는 공부가 제대로 될 리 없었다. 저녁을 빨리 먹고 가봐야 하니 말이다. 이럴 때면 지역의 많은 사람들이 운집하여 가설극장에 입장해 영화를 감상하기도 하였는데, 이웃 동네의 젊은 청춘 남녀 간에 연애장소로 활용되기도 했다고 전해온다.
이글을 마무리하며..
세월은 말없이 흘러간다. 오늘도 쉼 없이 흘러간다. 이 세월 따라 우리네 삶도 바뀌어 가고, 우리가 나서 자랐던 삼산고을도 바뀌어 간다.
전형적인 산간벽지 이곳에서도 세월의 흐름에 따라 많은 변화를 보이고 있다. 그 큰 원동력은 아무래도 외지와의 인적 물적인 교류가 가능한 도로 개설과 의식(意識)을 일깨워주는 학교 설립이 아닐까 싶다. 그 이후에 전기와 전화가 들어오고, 농지가 구획 정리되고, 또 많은 초가집들이 양옥집으로 변신하고, 영농방법도 현대화되고 있다. 더구나 인근 지역에 다목적 합천댐이 건설되어 우리 인근 지역의 지형을 크게 바꾸는 변화도 있었다. 이런 변화의 한편으로는 많은 젊은 층들이 일자리를 찾아 대도시로 나가 농촌인구 감소라는 초유의 사태를 맞아 앞날을 예측하기 힘들다.
그간의 이러한 여러 변화에도 불구하고 이 삼산고을은 다른 지역에 비해 1960년대의 당시 모습에서 외형상으로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정말 다행이다 싶다. 여전히 어릴 적 고향의 모습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 이 삼산고을이 황매산(모산재, 철쭉제) – 합천댐과 합천호수 – 황강(영상테마파크, 청와대 등) – 해인사(소리길, 대장경테마파크 등)로 연결되는,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관광벨트에 포함돼 있어 앞으로 힐링의 명소로 각광받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아무쪼록 앞으로 이 지역이 어느 지역에 못지않은 청정지역으로 풍요로운 농촌, 산자수려한 관광지로의 발전이 이어지길 기대한다. 끝
☞ 2016년 말 최초 작성 후 2019년 6월에 1차 수정 보완<운영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