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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와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 과거 사건을 어떤 형태로 기억에 남길 것인가는 쉬운 문제가 아니다. 근대 일본은 1945년 패전할 때까지 끊임없이 전쟁을 해왔다. 1931년 만주사변을 시작으로 패전까지를 ‘15년 전쟁’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이러한 전쟁을 통사로 전시하는 국립박물관이 일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시아·태평양 전쟁의 의미를 둘러싸고 일본 내에서도 마찰이 끊이지 않기 때문에 전쟁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에 대해 충분히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일본 내에서도 평화박물관을 만들려는 노력이 꾸준히 있었고, 오키나와 현의 평화 기념 자료관, 히메유리 평화 기원 자료관, 히로시마 평화 기념 자료관, 나가사키 원폭 자료관, 도쿄 대공습·전쟁 자료 센터 같은 시설이 설립되었다. 특히 시민사회의 요구와 지역 역사박물관의 실천으로 1990년대에 본격적인 ‘15년 전쟁’을 대상으로 하는 평화박물관이 설립되었다. 이 중 오사카 국제평화센터(피스 오사카), 교토의 리쓰메이칸대학(立命館大學) 국제 평화 뮤지엄은 전국적 시야를 가지고 일본인의 피해자뿐만 아니라 가해자의 시점도 도입하고 있다.
그런데 나가사키 원폭 자료관의 개장 시 우익은 난징대학살 전시 사진의 진위 여부를 빌미로 가해 사실에 대한 철거를 요구하였다. 또한 이를 계기로 오사카 국제평화센터 등에 대한 우익의 공격이 전국화 되었다. 이에 고야마 히토시(小山仁示)가 반론을 썼는데 주목할 만하다. 고야마는 일본 본토에 대한 미국의 무차별 폭격이 비인도적이라는 것을 규명하고, 이것이 일본의 지배층이 일으킨 침략 전쟁의 결말이며 일본군의 중경(中慶)에 대한 무차별 폭격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일본이 아시아·태평양 지역 사람들에게 보상하지 않는 것이 자국민의 희생에도 책임지지 않는 것으로 연결되며, 그 때문에라도 일본인의 가해와 피해 책임을 밝힐 필요성이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나가사키 원폭 자료관에 대한 공격의 반론이 되고 있다.
일본의 아시아·태평양 전쟁을 다룬 박물관 중 나가사키 원폭 자료관은 1945년 8월 9일에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폭에 의한 피해의 실상을 비롯하여 투하의 경위와 경과 및 핵무기 개발의 역사, 핵무기의 위협과 비인도성을 알리고 세계평화 실현에 공헌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나가사키 원폭 자료관은 원폭 투하 중심지 공원, 평화공원, 자료관 등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원폭 자료관은 ‘1945년 8월 9일’, ‘원폭에 의한 피해 실상’, ‘핵무기가 없는 세계를 목표로’라는 세 개의 테마로 구성되어 있다. 전시 내용을 살펴보면, 원폭 투하 이전 나가사키 번화가의 모습과 풍경, 시민들 일상생활 속의 피폭 상황 등을 보여 주고, 그 모든 것이 한 순간에 파괴되었음을 말해 주는 11시 2분을 가리킨 채 멈춰 버린 시계를 상징적으로 전시하고 있다. 전시물들은 원폭 투하 직후의 나가사키의 참상을 재현하고 원폭의 파괴력과 그 무서운 재해를 호소하고 있다. 그리고 핵무기가 없는 세계를 목표로, 전쟁과 핵무기에 대한 문제, 그리고 평화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다.
박물관에는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폭(모양이 뚱뚱해서 ‘fat man’이라고 불린다)의 모형 또한 전시되어 있다. 나가사키에 투하된 패트 맨은 공중폭발로 폭원이 140m에 달하며 불덩어리의 표면온도가 9,000도, 지상
의 투하 중심지도 4,000도에 이른다고 한다. 나가사키 원폭 자료관의 리플릿에 따르면 당시 나가사키 시의 인구는 약 240,000명인데, 이 중 사망자는 73,884명, 부상자는 74,909명이라고 한다.
원폭 사몰자 추도 평화 기념관
자료관과 연결된 원폭 사몰자 추도 평화 기념관에는 원폭 피해자들의 명복을 비는 추모 공간이 있다. 옆으로 6개씩 모두 12개의 직선으로 된 유리 기둥이 바깥과 연결되어 하늘을 향하고 있는데, 이는 평화가 전 세계에 퍼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라고 한다. 정면 선반에는 원폭 사망자의 이름이 등재된 명부가 봉안되어 있고, 위쪽으로 연결된 유리 기둥 바깥에는 물이 채워져 있어 야간에는 피폭 사망자를 상징하는 7만 개의 ‘빛’이 수반 위에서 빛난다.
그런데 원폭 자료관에 대한 비판도 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 자료관의 전시 내용이 지나치게 희생자에 초점이 맞춰져 일본의 중국 침략과 전쟁 기간 조선인 연행 등은 거의 전시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나가사키 자료관은 ‘잊지 말자’는 각오만 있을 뿐 전쟁 원인에 대한 사죄 없이 핵무기 반대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비판이다. 현재에도 남아 있는 일본의 전쟁 책임에 대해 전시하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나가사키 원폭 조선인 희생자 추모비
그런 의미에서 눈길을 사로잡는 것이 있다. 나가사키 원폭 자료관 주변 도로(원폭 자료관에서 평화공원 가는 길의 언덕 위)에 세워진 나가사키 원폭 조선인 희생자 추모비이다. 당시 외국인 중 희생이 가장 많았던 조선인들의 흔적은 나가사키 원폭 자료관 어디에도 없다. 나가사키는 일본 제일의 군함 제조를 자랑하는 미쓰비시 나가사키 조선소를 끼고 있어 일찍부터 군수도시로 성장하였으며, 조선소에만 7,000여 명의 조선인이 강제 징용되어 있었다. 당시 피폭을 당한 조선인은 히로시마에 5만여 명, 나가사키에 2만여 명에 이르며, 이들 중 히로시마에서는 3만여 명이 사망하였고, 나가사키에서는 1만여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나가사키 재일 조선인 인권을 지키는 모임의 대표로 평생을 평화운동가로 활동하던 오카 마사히루(1994년 7월 사망) 모사는 지난 1957년 7월 10일, 나가사키 오루라 모토마치의 조우코인 지하 납골당에서 153명의 조선인 유골을 발견하였다. 일본 정부가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가운데 한국이 좌우 이념 대립으로 유해를 둘러싸고 각기 다른 판단 잣대를 들이대자 이들을 위한 납골당 건립을 결심한다. 그리고 시민 중심의 모금을 이끌어 추도비를 건립하였다. 추도비 뒤쪽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강제 연행 및 징용으로 중노동에 종사 중 피폭사한 조선인과 그 가족을 위해”
다음은 추도비의 자료 일부이다.
1945년 8월 9일, 미군의 원자폭탄 투하에 약 2만 명의 조선 사람들이 피폭하였으며, 그 중 약 1만여 명이 폭사하였다. 우리 이름 없는 일본 사람들이 얼마간의 돈을 모아 이곳 나가사키에서 비참한 생애를 보낸 1만여 명의 조선 사람들을 위하여 추도비를 건설하였다. 지난 시기 일본이 조선을 무력으로 위협하여 식민지로 만들고 그 민족을 강제로 끌고 와 학대 혹사하여 강제 노동 끝에 비참하게도 원폭에 맞아 죽게 한 전쟁 책임을 그들에게 사과함과 동시에 이 세상에서 핵무기의 완전 철폐와 조선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염원하여 마지않는다.
-1979년 8월 9일, 나가사키 재일 조선인 인권을 지키는 모임-
이 추도비는 일본의 전쟁 책임뿐만 아니라 평화를 지향하는 노력을 전시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시사점을 주는 듯하다.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 투하>
제2차 세계 대전 중 태평양을 둘러싸고 미국과 일본 사이에 벌어진 전쟁을 태평양 전쟁이라고 해요. 중국 침략을 시작으로 필리핀, 동남아시아, 인도차이나 등을 점령한 일본은 1941년 12월 7일 이른 아침, 미국 하와이 진주만을 공격했어요.
진주만 공격은 미국에 엄청난 피해를 주었어요. 단 한 번 공격으로 2000명이 넘는 미군이 사망했고 부상자도 1000명이 넘었지요. 또한 진주만에 정박해 있던 8척의 전투함과 180대가 넘는 비행기가 완전히 파괴되었답니다. 일본은 곧 승리를 맞는 듯했어요.
그러나 1942년 6월 벌어진 미드웨이 해전으로 태평양 전쟁은 전환점을 맞았습니다. 항공모함 3척과 전투함 35척, 비행기 233대를 동원한 미군에 대항하여 일본군은 항공모함 4척과 전투함 43척, 비행기 285대를 동원했어요. 외형에서는 일본군이 앞섰지만 일본군의 암호를 입수한 미군이 크게 승리하였고, 전쟁의 주도권은 미국으로 넘어가게 되었답니다.
이후 미군은 승리를 거듭하여 1945년 4월에는 일본 남서쪽에 있는 오키나와 섬에 상륙했어요. 그리고 19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지요. 원자폭탄이 투하되자 1945년 8월 15일 일본 천황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였고 태평양 전쟁도 끝나게 되었습니다.
일본 중부 지방의 산업 발전을 알리던 히로시마 상업 전시관은 만 30년이 되던 해에 역사적인 교훈의 현장으로 탈바꿈했습니다. 1945년 8월 6일 이른 새벽, 사이판 남쪽의 작은 섬 티니언의 활주로에서는 미국 해군 조종사 폴 티베츠 대령이 B-29 폭격기를 타고 이륙했습니다. 몇 시간 뒤 폭격기는 히로시마 상공에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1945년 8월 6일 8시 15분, 원자폭탄이 히로시마에 투하되었습니다. 검은 구름 띠와 함께 발생한 열과 폭풍은 순식간에 도시 전체를 삼켜 버렸지요.
원자폭탄이 투하된 장소는 히로시마 상업 전시관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어요. 원자폭탄이 떨어진 곳 주변은 건물 몇 채를 제외하고는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어요. 모토야스 강변을 기준으로 주변 5km 거리에 세워진 건물의 90%가 파괴되었지요. 도시를 구성하고 있던 건물 9만여 채 가운데 약 6만 5000채가 원자폭탄이 떨어지고 불과 몇 분 만에 파괴되었습니다.
원자폭탄 투하로 가장 피해를 본 건 두말할 것도 없이 사람입니다. 1945년 8월 무렵 히로시마의 인구는 34만 명이 조금 넘었습니다. 원자폭탄이 투하되자마자 이 중 14만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살아남은 사람 중에도 뒤늦게 목숨을 잃거나 후유증으로 고통받다 죽은 사람이 엄청나게 많았습니다.
원자폭탄 폭발로 목숨을 잃은 사람 중에는 일본인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여러 나라에서 이주해 오거나 강제로 끌려온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외국인은 대다수가 우리 선조였지요. 강제로 징용된 사람들과 히로시마에 살았던 수만 명의 우리 선조들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평생 투병하다 이국땅에서 눈을 감기도 했고, 해방 후 조국으로 돌아온 피해자 중에는 지금도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도 있답니다.
원폭이 투하된 곳을 공원으로 만들면서 시민들 사이에는 유적지를 철거할 것인지를 두고 뚜렷하게 의견이 엇갈렸어요. 1953년 시작된 유적지 철거에 관한 논의는 20년 넘게 계속되었지요. 결국 히로시마 시의회에서는 1966년 원폭 돔과 주변을 그대로 보존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성금을 모아 보수 공사를 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원폭 돔으로 부르게 된 것도 이때부터입니다.
히로시마 평화 기념 공원은 인류가 만든 부끄러운 문화유산입니다. 평화 기념 공원의 상징인 원폭 돔을 바라보고 있으면 인간이라는 사실이 너무 부끄러워 쥐구멍이라도 찾아 숨고 싶은 생각이 절로 든답니다. 반쯤 날아간 벽면과 앙상한 골격만 남아 있는 돔은 바라보기만 해도 공포감이 느껴집니다.
평화 기념 공원을 찾는 사람들의 표정은 여느 문화유산을 찾는 이들과 너무 다릅니다. 유적지를 둘러보기가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하고 걷는 사람들도 보이고, 수십 명씩 그룹을 지어 희생자에게 묵념을 올리는 방문객과 선생님의 말씀을 작은 수첩에 적어 가며 유적지를 둘러보는 어린 학생들까지 참으로 다양합니다.
원폭 돔에서 모토야스 다리를 건너면 평화 기념 공원이 나옵니다. 원폭이 투하된 곳에 세워진 공원에는 평화의 종, 기념 동산, 원폭 어린이 동상,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 일본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 평화 기념 자료관 등 다양한 조각과 기념물들이 세워져 있습니다.
평화 기념 공원에서 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곳은 원폭 돔도 위령비와 자료관도 아닙니다. 한 소녀가 학을 받쳐 들고 있는 동상입니다. 이 동상이 세워지게 된 데는 사연이 있답니다. 원폭 피해를 입은 한 소녀가 일본에서 장수와 행복을 상징하는 종이학 1000마리를 접으면 병이 나을 것으로 믿고 종이학을 접기 시작했어요. 그러나 964마리의 종이학을 접은 뒤 숨진 상태로 발견되었지요. 이 사실이 알려지자 일본 각지의 어린이들이 종이학을 접어 보내기 시작한 것입니다. 지금도 종이학은 계속 늘고 있어 보관 공간도 계속 늘어나고 있습니다.
평화 기념 공원에는 두 개의 위령비가 있습니다. 공원 가운데에 세워진 원폭 희생자 위령비와 서쪽에 세워진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입니다. 커다란 아치형 조형물과 학이 날개를 펴고 있는 형상의 조각상, 자그마한 비석으로 이루어진 위령비에는 ‘편안히 잠드소서. 다시는 이런 잘못이 없으리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습니다. 누구나 희생자에 대해 한번쯤 생각하고 애도를 표하는 곳입니다. 위령비 사이로 원폭 돔을 바라보면 제국주의에 대한 분노의 감정이 들고, 동시에 전쟁으로 희생된 이들의 명복을 빌게 만드는 아주 묘한 곳입니다.
원폭 희생자 위령비 서쪽 나무 숲 속에는 강제로 끌려와 이국땅에서 희생된 우리 선조들을 추모하기 위해 일본에 사는 한인들이 성금을 모아 세운 위령비가 있습니다. 원폭 피해로 희생된 우리 동포는 2만 명에 달합니다. 희생자 중에는 유학을 온 학생이나 사업을 하기 위해 온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강제로 끌려와 노동을 하던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실은 위령비 뒤편에 새겨진 글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한국인 원폭 피해자 위령비를 보고 있자면 가슴속에 남아있던 화가 불쑥불쑥 솟아오르는 것을 억제할 수 없습니다.
평화 기념 공원 남쪽 끝에는 원폭에 관련된 자료관과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 만든 추모 기념관, 여러 개의 조각품과 기념물이 있습니다. 평화 기념 자료관은 원폭 투하 10주년을 맞아 1955년에 일본 정부에서 세운 것입니다. 원폭이 투하될 당시 히로시마 시가지 사진과 자료가 보관되어 있어 많은 학생들이 찾고 있습니다.
자료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희생자를 위한 추모 기념관이 세워져 있습니다. 차분한 음악을 배경으로 원자폭탄에 대한 자료와 희생자에 관한 영상물이 전시되고 있어, 자연스럽게 희생자에 대해 숙연한 마음을 갖게 된답니다. 일본인 관람객보다 외국인이 더 많이 찾는 유일한 장소이기도 합니다.
히로시마 도심에 자리한 평화 기념 공원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주는 유적지입니다. 원폭으로 인한 피해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고 다시는 이런 참사가 없기를 바라며 만든 곳이지만 이곳을 둘러보다 보면 아쉬움을 지울 수 없습니다. 일본의 제국주의 만행으로 희생되고 약탈당한 사람들이 히로시마에서 희생된 숫자보다 수십 배나 많고 그 피해는 수백 배가 넘지만 자신들의 잘못을 반성하거나 사죄하는 글귀 하나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본의 이중적인 자세 때문에 이곳은 많은 방문객들의 가슴속에 새로운 분노를 갖게 만드는 지구상에 하나뿐인 부끄러운 문화유산입니다.
일본이 주장한 ‘대동아 공영권’
1. 들어가며
아시아·태평양 전쟁은 1941년 12월 8일부터 45년 8월 15일까지, 일본 대 미국, 영국, 중국 등의 연합국과의 전쟁이다. 국제적으로 보면 제2차 세계대전의 일환이며, 일본의 입장에서는1937년부터 시작된 중국으로의 침략 전쟁과도 얽힌 전쟁이었다.
전쟁이 시작된 2일 후 일본 정부는 대본영 정부 연락 회의에서 전쟁을 ‘대동아(大東亞)전쟁’으로 부르기로 결정했다. 지금까지 ‘지나 사변(支那事變)’이라던 중일전쟁도 포함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 명칭은 너무나 이데올로기 과잉의 호칭이고, 연합국 군 총사령부(GHQ)의 지령으로 공문서에서 사용되는 것을 금지했기 때문에 이후 미국 측이 사용하고 있던 ‘태평양 전쟁’이라는 호칭이 점차 정착되었다. 그런데 ‘태평양 전쟁’역시 미일전쟁 본위의 호칭으로, 중국전선이나 동남아시아 점령지의 중요성을 놓치게 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므로 최근 학계의 동향을 따라 여기에서도 ‘아시아·태평양 전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자 한다. 여기에서는 당시 전쟁의 목적으로 제기된 ‘대동아 공영권’의 의미를 알아보고, 아시아 태평양 전쟁의 시작과 전개를 통해 전쟁의 성격을 정리해 보고자한다.
2. ‘대동아 공영권’*의 의미와 구조
1940년 8월 1일 마쓰오카 요스케(松岡洋右) 일본 외상은 담화를 발표해 처음으로 대동아공영권을 주창했다. 그 요지는 아시아 민족이 서양 세력의 식민지배로부터 해방되려면 일본을 중심으로 동아시아에 동남아시아를 더한 대동아공영권을 결성하여 아시아에서 서양 세력을 몰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1943년 11월 도조 히데키 수상은 ‘대동아 공영권’의 대표들을 도쿄로 소집하여 대동아 회의를 열었다. 일본군이 점령한 곳에 만들어진 괴뢰 정부(만주국), 중국(난징의 왕징웨이 정권), 타이, 버마, 필리핀, ‘자유 인도 임시 정부’의 대표들이 소집되었다. 도조 히데키 수상은 이 회의에서 “미국과 영국은 자국의 번영을 위해 타민족을 억압하고 대동아에 대해서는 침략, 착취를 자행하여 대동아를 예속화하고 안정을 해치려고 했다. 이것이 대동아 전쟁의 원인이다. 대동아 각국은 제휴하여 대동아 전쟁을 완수하고 대동아를 미국과 영국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켜 공존공영, 자주독립, 인종적 차별이 없는 공영권을 건설함으로써 세계 평화의 확립에 이바지하고자 한다.”라고 선전하였다. 회의는 표면적으로 아시아에 새로운 질서가 형성된 것을 과시하였다. 그러나 공영권의 인민들은 대동아 회의 참가자들이 인정한 일본의 지배를 받아들이는데 상당한 거부감을 보였다.
한편, 대동아 공영권의 구조 또한 일본의 군사적 진출 정도와 그 이해관계의 정도에 따라 다양하게 논의되었다. 1942년 의회연설에서 도조 히데키 수상은 대동아 공영권을 다음 네 지역으로 분류하였다. ① '내부적 중핵'으로는 종래의 일본·한국·만주·중국에 타이·베트남이 추가되었고, 그 외 지역은 ② 일본의 직할령(홍콩·말레이반도), ③ '독립'예정 지역(필리핀·버마) ④ 반항하면 군사적으로 정복할 지역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호주·중국)등이다.
1942년 일본군부가 '대동아성(大東亞省)'의 설치를 추진하면서 제시한 '동아 공영권의 예상형태'는 대동아 공영권의 확대된 구조를 다음과 같이 보여주고 있다.
① 홍콩·말레이시아·보루네오·뉴기니아·필리핀,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의 요항(要港), 유전지대, 버마·호주·인도의 요항 등 제국의 국방상·경제상 요지는 영구 영유해야 한다.
② 필리핀, 베트남, 버마, 인도네시아, 호주, 인도 등은 제국의 보호 아래 서구로부터 독립하여 대동아 공영권의 일원이 되어야 한다(단, 요지는 일본이 영구 영유한다.)
③ 독립(보호)국 및 점령지역 전반의 정치·외교는 물론, 경제개발·무역·금융통화·교통통신 등은 일본의 강력한 통제·지도 아래 계획적으로 운영되어야 한다.
대동아 공영권은 공존공영의 개념으로 치장되었지만, 본질은 일본 제국주의의 아시아 침략논리였다. 이러한 성격은 대동아 공영권의 구조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그 군사적 진출 정도에 따라 직할 식민지·괴뢰국가·사실상의 보호국·군사점령지역 등으로 구분되는 다양한 지배관계로 구성되어 있었다.
*‘대동아 공영권’ 주장 이전에도 일본은 만주를 침략하기 직전인 1931년에 일본․조선․만주․중국․몽골의 다섯 민족이 서로 화합해야 하고, 일본과 만주가 블록을 결성해야 한다는 '일만(日滿)블록'과 같은 슬로건을 선전하였다. 이 슬로건은 만주를 점령한 후인 1933년에는 중국을 합한 '일만지(日滿支) 블록'으로 발전하였으며, 1938년 중일전쟁이 일어난 이후에는 일본․만주국․중국이 주도하여 '동아 신질서'를 건설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발전하였다. 동아신질서는 크게 네 분류로 구성된다. ‘황아(皇亞)론’, ‘일·만·지 경제블록론’, ‘동아연맹론’, ‘동아협동체론’이 그러하다. 먼저 황아론은 극단적인 천황주의, 황국사관에 입각한 논의로서 중국·영국·미국을 적으로 한 아시아 대전에 대비하여 황국인 일본이 황아규모로 확대된 대륙적 황국을 건설하는 것이 동아신질서의 목표임을 강조하였다. 일·만·지 경제블록은 중일전쟁의 지구전화 그리고 구미 제국주의와의 갈등에 의해 빚어진 경제적 곤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본을 맹주로 한 자급자족권을 수립하는 것이 동아신질서의 내용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황아론과 일·만·지 경제블록은 총력전의 진행과정에서 일본의 사상전과 경제전의 영역을 담당하였으며 1940년대 초를 전후하여 지정학적 생존권론, 즉 대동아공영권으로 이어지게 된다.
3. 아시아·태평양 전쟁의 성격
아시아·태평양 전쟁의 성격에 대해서는 다양한 논의가 있지만 왜 일본이 미국과의 전쟁을 단행했는지 살펴보는 것이 전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일본은 수도 난징(南京)을 함락시키면 중국은 함락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장제스(蔣介石)가 이끄는 국민 정부는 벽지의 충칭(重慶)을 임시 수도로 정하고 항전을 계속하였다. 이를 영국과 미국이 지원하여 중일전쟁은 수렁 상태로 빠져 들어 일본군은 대미영 개전까지 18만 8천 여 명이라는 전사자를 냈다. 한편, 히틀러가 이끄는 독일이 유럽에서 전쟁을 일으켜서 프랑스와 네덜란드를 항복시켰다. 일본은 독일, 이탈리아와의 삼국 군사 동맹을 맺어 미국과 영국에 압력을 가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화근이 되어 미국의 강경 자세를 부르게 되었고, 당시의 일본은 석유 수입의 대부분을 미국에 의지하고 있었으나, 1941년 8월 미국은 전면적인 대일 수출 금지를 결정하였다. 일본은 미국의 석유 수출입금지에 의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국면에 처하게 되어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했다. 선택지는 둘 중에 하나였다. 석유 등 중요 물자를 얻기 위해, 네덜란드령이었던 인도네시아와 영국령의 말레이시아 등을 무력으로 제압하는 것, 즉 장제스 정권을 타도하기 위해서라도 미국과 영국과의 전면전을 단행하는 것이다. 아니면 중국에서 철병 등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쇼와(昭和)천황도, 당시의 고노에 후미마로 수상도 전쟁은 피하고 싶었다. 미국은 자동차의 생산 대수만을 비교하더라도 일본의 100배나 되는 압도적인 공업 분야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육군이 중국 철병을 완강히 거부했다. 그 주장을 잘 말해주는 것이, 10월 14일 내각 회의의 도조 히데키(東条英機) 육군성 장관의 발언이다. 도조 히데키는 “철병 문제는 심장 그 자체이다. (중략) 미국의 주장에 그대로 복종한다면 지나사변(중일전쟁)의 성과는 괴멸하고 만다. 만주국도 위험하다. 나아가 조선 통치도 불안정해진다.”고 주장하였다. 일종의 도미노 이론이지만, 이에 따라 교섭타결의 전망을 잃어버린 고노에 내각은 어쩔 수 없이 총사직을 하여, 10월 18일에는 도조 히데키를 육군성 장관을 수반으로 하는 도조 내각이 성립한다. 육군은 식민지 통치에 미칠 영향은 물론, 호락호락 군사를 철병하는 것은 메이지 이래의 육군 주도의 대륙 정책을 부정하는 것이며, 위신 실추로 이어지게 된다고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석유 수출입 금지를 계기로 도조 내각은 개전을 결의하게 된다.
한편, 전쟁이 하와이가 아니고 말레이 반도의 코타발루에서 시작한 것 역시 아시아·태평양 전쟁의 성격이 아시아 침략 전쟁이었음을 드러내는 부분이다. 다카시마 노부요시 류큐대 명예교수는 “일본이 1941년 12월 8일 진주만을 공습하기 1시강 이상 전에 일본 육군이 말레이 반도 코타발루에 상륙, 영국군과 전투를 개시한 것은 방위성이 편찬한 전쟁사 등에도 나오는 명백한 사실”이라고 하였다. 일본우익은 일본이 아시아를 대표해 서구의 침략에 맞선 성전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 가운데 자주 등장하는 것이 진주만 공격의 신화이다. 전쟁의 시작이 하와이가 아니라는 것은 이를 반박하는 중요한 근거이다. 다카시마 교수는 “일본이 코다발루를 공격한 것은 미국이 일본의 중국 침략을 견제하기 위해 석유 등 자원 수출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이론은 자원이 부족해 졌는가. 중국과 전쟁을 벌이면 쉽게 이길 것이라 생각했지만, 아시아 민중들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중일전쟁이 장기화 됐기 때문이다. 이런 점들을 떠올려 본다면 태평양 전쟁의 본질은 아시아 민중에 대한 침략전쟁이었음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전쟁의 목적은 ‘자급자족’체제를 확립하기 위해서, 영국과 네덜란드의 식민지를 무력으로 제압하여 석유 등 여러 자원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영국령 등을 공격하면 미국과의 전쟁은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해 태평양 측의 거점을 공격하였던 것이다.
결국, 전쟁은 19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투하와 소련의 참전으로 일본이 연합국 측의 포츠담 선언에 의한 항복 권고를 받아들임으로써 종결되었다. 군인과 일반 국민들을 포함한 일본의 사망자 수는 약 310만 명으로 추산되지만 생사 불명자와 원폭으로 사망한 수가 뚜렷하지 않아 사실상 피해자는 더 많은 것으로 여겨진다.
4. 나가며
근대 일본은 대만, 조선, 중국 등을 침략하면서 서구 열강의 아시아 침략에 맞선 ‘동양의 평화’를 표면적 명분으로 내걸었다. 흥아론, 탈아론, 아시아 연대론, 동아연맹론, 동아협동체론, 동아신질서, 대동아 공영권 등의 논리적 배경은 ‘서양’에 대한 ‘동양’이라는 문화적, 지역적, 인종적 개념을 대치시켜 서구 열강에 대항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동양이 서구열강의 위협에 직면했을 때보다 일본 자신이 아시아로 진출하고자 하였을 때 이러한 논리가 부각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러한 논리의 본질은 일본의 아시아 지배를 의도한 것이었다.
아시아·태평양 전쟁 시기 일본이 내건 ‘대동아 공영권’도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고 난 뒤,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마련한 것이었다. 따라서 원래 공영권의 뜻은 ‘평화적 호혜평등, 기회균등의 상호협력적인 일정한 광역 경제권’을 일컫는 것이지만, 그 본질은 일본제국주의의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침략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였다. 그 본질이 아시아의 주변 약소국을 식민지, 종속국으로 편입시킨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논리에 동조하는 세력과 동남아 일반 민중 사이에 일본을 ‘해방군’으로 기대하는 풍조를 만들어 낼 정도로 교묘한 슬로건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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