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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여행의 일순위를 굳이 꼽자면 가야산 자락 내포지방을 연결했던 교통의 요지인 해미면에 있는
우리나라 읍성의 원형이 가장 잘 남아있다는 해미읍성일 것이다. 매년 해미읍성축제를 열면서
서산지역을 대표하고 있는 읍성에는 관아와 객사, 문루와 정자 등이 잘 보존되어 있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참혹한 박해와 옥사의 장소이기도 하였다.
서산의 한 고을이었던 해미지역에 어떻게 이런 대규모의 읍성이 존재할 수 있었을까.
그 역사를 되짚어보면 서산지역은 예로부터 백제국의 전신격이었던 삼한의 한 축이었던
마한의 54개 지역중 하나인 치리국이 존재해왔던 곳이다. 서산지역은 고려시대까지는 목사가 있던
곳으로 지위가 높았다가 고려말 조선초를 거치면서 서령부로 강등되기도 했지만 서산군으로 회복된 뒤에도
흥망성쇠를 거듭하다가 20세기초에 들어서야 태안을 포함한 서산군으로 다시 태어났다.
예전 태안군까지 서산에 포함시켰을때엔 전국에서 가장 면적이 넓은 지자체중 하나였지만
지금은 태안이 분리되고 서산이 1989년 시로 승격되면서 현재의 도농복합도시로 되었다.
충남의 서북단에 위치해 홍성과 예산, 당진과 태안에 접해있는 서산은 740㎢라는 서울에 버금가는
광활한 평야와 낮은 산들이 점점히 이어진 구릉지대로 서해안시대의 주역으로 거듭나고 있는
멋과 맛을 간직한 문화와 역사, 관광과 자연이 풍요로운 잠재력이 많은 도시이다.
서산에서 예산으로 넘어가는 길, 덕산과 면해있는 가야산 자락 해미의 중심부에 있는 해미읍성은
조선조 태종때인 1414년 태종의 명으로 옆동네 덕산에서 충청병영을 이전해서 만든곳이다.
해미라는 지명은 백제시대에는 우견현으로 고려시대에는 정해현이라 불렸지만, 조선 태종 7년인
1407년에 인근 지역인 정해현과 여미현등 두개 현을 합해 한개의 현을 만들면서 정해의 해자와 여미의
미자를 따서 해미현이라 불린데서 유래한다. 경상도가 경주와 상주를, 전라도가 전주와 나주를
충청도가 충주와 청주를 강원도가 강릉과 원주의 첫머리 글자를 따서 만든 이치와 같은 격이다.
이순신 장군도 이곳에서 근무하였다고 전해지며 해미군으로 승격되었다가 서산 지성면에서 해미면으로
바뀌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바다와 산이 어우러진 걷기좋은 서산 아라메길이 시작되는 해미읍성에서
개심사, 보원사지까지 걸어봐도 좋겠다.
조선 3대왕인 태종이 왕위에 오른지 16년째 되던 해인 1416년에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세종대왕)과 함께
7천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서산과 태안지역을 순회할 때 그당시 해안지역에 출몰하여
민가와 관아를 습격하고 부녀자를 겁탈하며 도적질을 하던 왜구를 소탕하고 방어하기 위해
해미읍성을 축조하라고 지시한다. 그는 지금의 부석사가 있고 천수만이 한눈에 보이는
도비산에서 사냥을 하고 있었는데, 그 강무기간동안 덕산에 있던 병영을 해미로 옮기는 구상을 하게 된다.
이름하여 도비산 구상. 도비산에서 보면 지금의 안면도를 연결하는 안면대교 해협과 천수만을 통해
왜구들이 출물했기에 덕산보다는 해미에 성을 쌓는 것이 왜구에 대한 방비에 적격이라 여겼나보다.
600여년이 흐른 해미읍성은 많이 훼손되고 파괴됐지만 전국에서 뽑힌 일꾼들이 만들었을
해미읍성의 돌담은 지금도 탄탄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둥근 원형의 해미읍성은 전북 고창읍성과 전남 순천 낙안읍성과 더불어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된
읍성의 하나로 손꼽힌다. 예전에 병영이 있을때엔 수많은 무장들이 이곳에서 수련도 하고
무기도 만들면서 군 생활을 하였을 것이다. 활처럼 휘어진 성곽의 모습이 미려하고 듬직해보인다.
조선 초기의 성곽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전국에 몇곳 안되는 중요한 문화재이다. 이곳은 해미읍성이라는
번듯한 이름도 있지만 가시가 무시무시한 탱자를 성곽 외곽에 심어놓아 탱자성이라고도 불렸다 한다.
해미읍성의 정문인 진남문. 화강암으로 만든 정면 세칸과 측면 두칸의 팔작지붕의 단층 문루인데,
문이 좀 낮은 편이며 문 중앙 대청마루에는 커다란 북이 하나 있다.
성문 내축의 인방석에는 '皇明弘治四年辛亥造' 라는 각자가 새겨져 있어 성종 22년인 1491년에
대대적으로 중수했음을 알 수 있다. 전남 여수에 진남관이 있다면 충남 서산에는 진남문이 있다.
읍성안에는 이 지역을 다스리던 동헌이 있는데, 예전 수령들은 행정과 군사를 겸해서 사무를 봐왔기
때문에 병영이지만 행정청의 역할도 겸했던 것으로 보인다. 평시에는 행정을 보다가 전시가 되면
읍성의 본연의 역할인 군사기지로의 임무를 다하였다.
읍성에는 동문인 잠양루와 서문인 지성루, 남문인 진남루의 세곳에 문이 있었는데,
전란과 화재 등으로 인하여 동문과 서문은 없어졌다.
지금의 정문인 진남루의 남문만이 본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동문과 서문은 해미읍성을
본래의 모습으로 복원하면서 1974년에 다시 만들어서인지 좀 옛맛은 떨어지는 편이다.
진남문 위 누각에 있는 커다란 북의 모습.
읍성에서는 무예시범도 보이고 신명나는 탈춤공연과 연날리기, 제기차기 등 많은 볼거리와
즐길거리가 있어 이곳을 찾은 사람들에게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병영과 옥사가 있었다는
옛시절의 모습을 아는지 모르는지 가을하늘 아래 그저 평화로운 모습이다.
해미읍성은 덕산에서 이주한 병마절도사가 주둔하던 서해안 방어의 요충지였는데,
약 5년간의 축성을 거쳐 1421년부터 1651년 청주 상당산성으로 병영이 옮겨갈때까지
약 230여 년간 종 2품의 절도사가 관할하는 충청병영의 중심지였다.
원래의 이름은 해미내상성이었다. 성안에는 병영이 있을때와 읍성의 기능을 다했을 때에는
더 많은 웅장하고 다양한 건물들이 있겠지만 세월이 흐른 지금은
동헌과 객사, 옥사 정도가 복원되어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다.
읍성으로 들어가면 넓은 잔디정원이 있어 아이들이 뛰어놀기 좋고 성곽을 따라 한바퀴 둘러보며
옛시절을 떠올려 볼 수 있다. 1.8km에 높이 5m에 이르는 약 6만 여평의 넓은 성안에는
작은 언덕의 전망대도 있고 민가와 옥사 등 볼곳이 많아 두어시간은 준비해야 해미읍성을
찬찬히 둘러볼 수 있다. 이 성을 만들기 위해 인근 주민뿐만 아니라
청주, 충주, 상주, 제주, 부여 등지에서도 차출된 부역꾼들이 동원됐기에 아마 일꾼들은
많은 불평을 했을것이다. 변변한 장비나 도구가 없었을 시절에 오로지 사람의 힘과 가축을
이용해 만들었을 성곽은 백성들의 고충과 땀이 함께 했을 건축물이다.
물론 중국의 만리정성이나 남한산성 등에 비하면 보잘 것 없지만.
해미읍성은 지방 조그만 마을의 읍성이라지만 종2품의 병마절도사가 주둔했던 군사중심지였다.
종2품이면 지금의 도지사나 광역시장급 정도. 군대로 치면 정2품이 병조판서인 국방부장관 격이니
군사령관급 정도는 됐을 것이다.
충장 이순신 장군도 이곳에서 병마절도사가 주둔할 때 훈련원봉사로 10개월정도 근무했다는데,
이후 1651년 청주로 병영이 옮겨가면서 빈 자리에는 해미현을 다스리는 관아가 들어와서 해미읍성이 되고
문무를 겸한 무장이 현감인 겸영장이 배치되어 호서좌영으로 명칭이 바뀌게 된다.
겸영장의 현감은 고을 수령의 임무와 함께 내포지역 12개 군현을 다스리는 병권도 겸하는 위치였다.
이후 일제강점기 해미가 서산에 통합되면서 해미읍성은 그 기능을 잃어버리고 관아에 있던 건물들이
매각되거나 훼손되면서 그 자리에는 면사무소나 초등학교, 파출소 등이 들어서게 된다.
예전 수원성 안의 화성행궁이 있던 자리에 일제 치하 보건소와 경무국, 학교, 관공서 등이
들어서면서 폐허가 되기에 이르렀던 과정과 비슷하 것이다.
물론 지금은 완전하지 않지만 발굴과 복원을 통해 그 자리를 어느정도 찾긴 했지만.
커다란 나무 아래서 해미읍성을 찾은 시민들이 한가롭게 휴식을 취하고 있다.
준비해 온 도시락도 먹고 음료수도 마시면서 쉬고 있는 모습이 가을 하늘처럼 여유있고 행복해보인다.
이곳 해미읍성은 무료이다. 물론 인근 다른 유적지들도 모두 무료이다.
다른 관광지라면 최소한 천원정도는 입장료를 받겠지만.
충청병마절도사가 머무를 당시에는 상주인원이 850여명이나 되는 대부대였고
충청도의 병권의 지휘소로써 국방은 물론 내란 방지, 포호등의 임무도 맡고 있었다.
처음 축성했을 당시에는 동서남북으로 문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지금은 북문이 문루가 아닌 성벽아래 암거형식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북서쪽에는 방비를 위한 해자가 있는데 성벽에서 15m 정도 떨어진 곳에 5m 넓이에 2m 정도
깊이로 그 흔적이 일부 남아있다. 이곳 해미읍성에는 동헌과 아사 및 작청 등의 건물이 읍지를 살펴보면
빼곡하게 차 있었다는데, 폐허와 전란, 화재로 대부분이 소실되어 역사의 뒷길로 잠들어버렸다.
하지만 1980년대에 조사와 발굴로 객사와 아문지, 옥사의 주춧돌 등을 발견하면서 복원공사를 거쳐
현재의 모습을 이루었다. 물론 현재도 계속하여 복원공사를 하고 있으니
완벽한 읍성의 모습을 언젠가는 볼 수 있을것이다.
읍성의 서문쪽 넓은 잔디광장에서는 커다란 연을 날리는 사람들이 많다.
서해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직접 만든 연을 날리며 즐거워 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
옥사 앞에는 20 여m는 훌쩍 넘을 듯한 커다란 회화나무 한그루가 있다.
일명 호야나무라 불리는데, 300년 이상된 고목이라고 한다.
이 회화나무에서는 옥사에 수감되었던 천주교 신자들을 나무에 철사줄로 묶은 채로 매달아
고문을 했다하니 평온해 보이는 저 나무는 끔찍한 현장을 조용히 지켜봤을
역사의 산증인으로 지금도 말없이 과거를 회상하고 있는 듯했다.
해미읍성내에 있는 옥사이다. 성리학과 유교가 국가의 근본사상이었던 조선왕조에서는
평등과 왕조부정, 계급철폐 등을 내세우는 서학과 천주교에 대해 부정적인 시선으로 대했던 것은
당연했을 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하나의 학문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 점차 왕조의 부정과
양반 계급을 무시하는 전면적인 자세의 천주교로 변질하니 조정에서는 곱게 볼리 없었고
점차 그 본원의 싹을 잘라내기 위해 무지막지한 처형의 날을 세웠던 것이다.
지금도 전국 각지에 있는 천주교 탄압과 박해의 성지들이 그 모습의 일면을 알려주고 있다.
이 해미읍성에도 천주교 신자들을 박해하고 고문과 처형을 했던 옥사와 순교성지가 있다.
옥사 안에는 천주교 신자들을 가두었던 감옥이 있고 그 안에는 모형들이 족쇄와 형틀에 갖힌 채
신념을 굽히지 않고 정좌하고 있다. 그 자신의 밀려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알지만 굽힐 수 없던
천주교에 대한 신념을 위해 부릅뜬 눈으로 순순히 형을 받아들인 모습이 의연하다.
물론 속으로는 무지 무서웠겠지만. 마당에는 장형을 위한 곤장대가 있는데,
사람들이 서로 누워서 곤장맞는 체험을 하면서 그 당시를 재현해보인다.
1790년 신해박해 때부터 근 100여년 동안 수많은 천주교인들이 처형당했던 순교성지의 한곳이다.
몸서리 치도록 춥고 배고픈 감옥 안에서 얼마나 모진 고초를 당했을지.
얇은 모시옷 한벌과 짚신 한짝으로 창틀을 통해 들어오는 매서운 바람을 견디며 그들은 이 자리에 있었다.
1790년 정조때부터 병인박해를 정점으로 하여 1880여년까지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극심했는데,
특히 병인박해 때에는 천주교 신자를 천여명이나 이곳에서 처형했다고 한다.
이곳 내포지방에는 천주교 신자들이 많았고 1868년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 묘를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도굴하려는 시도까지 일면서 해미읍성의 겸영장은 행정과 군사, 재판권까지
있었기에 이 지역의 신도들을 대대적으로 체포해 처형시켰던것.
지금도 그 때의 흔적을 간직한 회화나무와 사형대 등이 그 처참했던 현장을 말해준다.
이 때에 한국 최초의 사제인 성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인 비오 김진후도 10여년간의
옥살이를 하다 이곳에서 순교했다고 전해지며 회화나무에는 신자들의 머리채를 묶어 매달아서
고문했던 흔적으로 철사줄이 지금도 박혀있다.
지금도 죄인을 자리갯질(돌 위에 몸을 들어 메어치는 것)쳐서 죽였던 자리갯돌이 서문 밖에 있고
많은 신도들을 한줄로 묶어 생매장시키거나 물에 빠뜨려 수장시키기도 했던 터가 여숫골에 있어
천주교 성지로 해마다 수많은 순례객이 찾아오고 있다. 많은 천주교도들을 처형하기가 어려워서
해미천에 큰 구덩이를 파고 생매장을 시켰는데, 생매장할때 천주교도들이 예수마리아를 부르며
기도하면서 죽음을 맞았기에 주민들이 여숫골이라 불렀다 한다. 참 가슴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조선시대 부농과 상인 및 관아에서 근무했던 서리의 집 등 세채의 조선시대 초가로 만든 민가를 재현해놓았다.
집 안에는 당시의 생활상을 볼 수 있도록 방과 부엌, 화장실과 싸립문이 있고 모형들의 표정이 생생하다.
옥사와 민가를 지나 동헌으로 가다보면 커다란 나무들이 호위하는 계단이 보이는데,
계단을 올라가면 넓은 솔밭이 있고 사각지붕을 한 청허정이란 정자가 있다.
높은 대에 올라 주변 읍성의 풍경을 감상하거나 잠깐 쉬기 좋은 정자이다.
해미읍성의 동헌의 모습. 커다란 나무 한그루가 동헌 앞을 지키고 있고 입구의 호서좌영이란
명판이 있는 문은 2층의 누각으로 지어져 그 멋과 위엄을 더해준다. 이곳에서는 한때 충청지역을
관장했던 병마절도사가 기거했고 겸영장이던 현감의 집무실이기도 했는데, 일반적인 고을의
행정업무와 함께 군사, 재판까지 함께 이루어지던 해미현의 중심지역이다. 왠지 사극에서 보면 관아란
말만 꺼내도 덜덜떨게 만들었떤 그런 지역이니 민간인에게는 출입이 껄끄러웠던 곳이었다.
호서좌영이라는 현판이 남아있는 동헌의 입구.
태극문양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옛 관아와 병영의 흔적이 남아있다.
좌측에는 이 지역을 찾아온 귀빈이니 사신을 맞이하고 접대했던 객사가 있다.
건물의 중앙 정청에 궐자가 새겨진 전패를 모시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관원들이 국왕에 대해 예의를 갖추었던 곳이기도 하다.
동헌을 빠져나오다 보면 서문인 지성루가 가는 길이 나온다.
서문 근처에는 넓은 잔디밭이 있어 아이들과 함께 뛰어놀기 좋은 곳이다.
서문에서 뒷편 솔밭길로 걷다보면 옛날 적을 방어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해자가 있는데,
일본의 궁궐이나 유럽의 고성들에서 많이 보던 형식이지만 상대적으로 조금 작은 편이다.
하지만 국내의 성곽중에 해자를 만든 사례가 비교적 적기에 그 의미는 크다.
이 해자를 만들었을 당시에는 해자를 건너는 다리도 있었을테고 해자에는 물이 흘렀을 것이다.
해자야 넓지 않고 그 깊이도 비교적 얕아 전쟁중 큰 의미는 없겠지만
수레나 군사들의 이동을 잠시간은 막고 있기에는 용이했을 것이다.
진남문 옆쪽 잔디광장 앞에는 전통주막이 있어 성곽을 한바퀴 돌고 와서 부침개와 함께
막걸리 한잔하면 좋겠다. 성안에서 맛보는 막걸리는 식당에서 먹는 맛과는 다른 멋을 보여줄테니.
국내에 남아있는 읍성의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다는 해미읍성은 장방형의 원을 그리고 있어
성벽을 따라 산책 겸 둘러보기 좋다. 느린걸음으로 걸어도 30여분이면 족하다.
가야산의 품에 안긴채 도비산을 굽어보고 있는 해미읍성의 가을바람은 달콤하고 상쾌했다.
서산을 한바퀴 돌아볼 수 있는 17개코스의 아라메길이 만들어지고 있다.
바다와 구릉, 농촌과 어촌을 연결해주는 그 길.
해미읍성은 아라메길 1구간의 종점에 있고 2구간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아직 1구간만이 열려있지만 언젠가는 모든 코스가 열려
바다와 산하, 농촌을 아울러 볼 수 있는 명품길이 될것이다.
서산의 지도는 해마와 독수리를 섞어놓은 묘한 모습이다. 어떻게 보면 쥬라기 시대의 공룡같기도 하고.
인근 가볼만한 여행지
예산 덕산온천, 수덕사, 천수만 철새탐조지, 버드랜드, 간월암, 부석사, 개심사, 보원사지, 마애삼존불상 등.
해미읍성 근처 맛집
구수한 곰탕을 잘하는 읍성뚝배기집, 한서대학교 근처 장어와 파가 만난 산수파김치장어,
보리밥의 명가 향수가든, 매콤한 짬뽕의 맛이 일품인 영성각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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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음,,대단혀,,대단혀,참말로 대단혀,,,,무지 무지,,대단혀~~ 흐
폭풍 포스팅이구만,,,ㅋ 저건 자료도 아니고,,,걍 말로하듯,,,쫘악 써내려가는 참말로 제대로된 설명글인디,
아는것이 많아서 먹고 싶은것도 많은거 같어,,ㅋㅋ
감사해유.. 해미는 자주 갔던 곳이라 그런가봐요.. 먹고 싶은건 별로 없어요. 그저 신선한 해산물에 소주 한잔 걸치면...
해미읍성은 겨울에 다녀왔었어요. 그것도 십년도 더 된듯..
잎이 무성할 때 다시함 가보고 싶네요.
네, 해미읍성 가을에도 좋지만 꽃이 많이 피는 봄철에도 운치있지요~~
해리슨포들님은 해미읍성의 4계절을 모두 보셨나요?
네, 5계절까지도 보았네요!! ㅎ 거창하진 않지만 그냥 서산여행에서 가볼만한 곳인듯해요!
서산에 친한 동생이 살아서 살아 있는한 가끔은 가 볼 듯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