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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말들
백지은
ARCADE 0013 ∣ 2022년 5월 10일 발간 ∣ 정가 20,000원 ∣ A5(138×210) ∣ 272쪽
ISBN 979-11-91897-18-0 03810 ∣ 바코드 9791191897180 03810
(주)함께하는출판그룹파란 ∣ (10387) 경기도 고양시 일산서구 중앙로 1455 대우시티프라자 B1 202-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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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간 소개
비평은 누구에게나 언제나 어느 때나 자연스럽고 필연적이다
[그때 그 말들]은 백지은 평론가의 평론에세이집으로, 42편의 평론과 시평(時評)이 실려 있다.
백지은 평론가는 읽는다. 김경욱과 김병운과 김봉곤, 김숨, 김중혁, 김초엽, 백민석, 백수린, 신해욱, 안보윤, 윤성희, 임성순, 임솔아, 장강명, 장혜령, 전하영, 정소현, 조우리의 소설을 읽고, 김미현의 문학평론집을, 허문영과 남다은의 영화비평집을 읽는다. 드라마(「질투」)도 읽고, 영화(「곡성」)도 읽는다. 예능 프로그램(「아육대」)도, 개그 프로그램(「코미디 빅리그」)도 읽는다. 「우남찬가」도 읽고, 밥 딜런(과 노벨문학상)도 읽는다. 그리고 또한 읽는다. ‘문단 내 성폭력 사건’과 ‘강남역 살인 사건’을, 행정자치부가 만든 ‘대한민국 출산 지도’를 읽는다. ‘개저씨’와 ‘헬조선’을 읽고, ‘구의역 참사 사건’과 안철수의 말을 읽고, 개그 프로그램 「아무 말 대잔치」와 박근혜의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읽는다. ‘가짜 뉴스’와 ‘팩트 체크’와 ‘인터넷에 떠도는 사과문 작성법’을 읽고, ‘문화계 블랙리스트’와 새누리당의 선거 퍼포먼스, 교육부 정책 기획관 나모 씨의 ‘개돼지 발언’과 어버이연합과 최순실을 읽는다. 그리고 마침내 2017년 3월 10일 오전 11시 21분 헌법재판소장 권한 대행 이정미 재판관의 주문과 ‘촛불집회’를 읽는다. 요컨대 백지은 평론가는 전방위적으로 이 세계의 ‘말들’을 읽는다. 그리고 비평을 쓴다.
그런데 백지은 평론가는 왜 이렇게 열심히 읽고 쓰는가? 이유는 명백하다. “더 잘 경험”하기 위해서다. 백지은 평론가는 말한다. “읽기란 무엇보다도 텍스트-말을 경험하는 행위”다. 그리고 “비평은 다양한 관점의 체계 또는 다양한 해석의 공동체 중에서 선택을 하는 행위가 아니다. 비평의 의무는 경험이라는 개별적 지각, 즉 스타일의 자기 체험을 전개할 수 있는 지평을 (선택이 아니라) 발생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경험을 해명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더 잘 경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 잘 보고, 더 잘 듣고, 더 잘 느끼고, 더 잘 생각하기 위해, 비평은 누구에게나, 언제나, 어느 때나, 자연스럽고 필연적이다.” 이런 맥락에서 백지은 평론가가 쓴 [그때 그 말들]은 지난 한때의 ‘말들’에 대한 단지 성실한 읽기가 아니라, 바로 ‘그때’ 자신이 그 ‘말들’을 하나하나의 사건으로 ‘경험’한 ‘지평’들을 ‘발생’시킨 결과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삶이 글쓰기/읽기의 수행으로 이루어진다고 하기보다 글쓰기가 삶의 수행 혹은 삶의 형식”이다. 그리고 “나의 글, 나의 이야기, 나의 쓰기란, ‘나에 대하여’ 쓴 것이 아니라 ‘내가’ 쓴 것이다.”
백지은 평론가가 “내가”를 꼭 묶어 적은 까닭은, 다시 말하는 셈이지만, 읽기와 쓰기의 주체를 재구성하거나 강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읽기와 쓰기를 통해 새삼 ‘발생’시켜야 할 ‘우리’의 경험의 지평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예컨대 “민중은 개돼지다. 먹고살게만 해 주면 된다”라는 어이없고 참담한 말을 들어야 했던 바로 ‘그때’, 그리고 “바르게 역사를 배우지 못하면 혼이 비정상이 된다”라는 말을 들으며 정말이지 어안이 벙벙해 있었던 바로 ‘그때’, 마침내는 “주문.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라는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 결정문이 낭독되던 바로 ‘그때’, 잊을 수도 없으며 결코 잊어서도 안 될 뿐만 아니라 이미 다시 반복되고 있는 ‘그때’ ‘그 말들’과 그 경험들의 “텍스트적 운동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일” 말이다. 지금 당장 [그때 그 말들]을 읽어야 할 이유다.
•― 책머리에
협소한 영역에 한정된 읽고 쓰는 생활이지만, 그 미미한 지속에서 나는 ‘문체’라는 말을 ‘문학’보다도 더 굳게 붙잡은 것 같다. 어떤 초심처럼 심중에 두어져 버린 그것은, ‘스타일’이라고 바꿔 말하든 아니든, 나의 함의와 타인의 함의가 일치하지 않아 상호 오해를 유발할 때도 적지 않다. 협소하지 않은 영역에서 두루 쓰이는 단어이므로 이 단어를 붙드는 광범위한 맥락에서 나의 함의는 왜소하거나 편향됐으나 어떤 핵심의 겹침이 감지되는 한에서 놓지 않았다. 내게서 너무 단단해져 버렸을 이 말이, 일상에 뭉쳐진 나의 읽기를 흔들어 보는 데도 내게는 필요했고 또 적절하다고 오랫동안 믿었다. 느낌과 상념이 통과하는 길에 ‘스타일의 자기 체험’이라는 말 외의 것을 불러내지 못했다. 더 잘 경험하려는 시도의 몇몇 조각들을 모아 내놓으며 이제는 이 말이 내게서 풀어지고 흩어지기를 소망한다.
경험이라고 했지만 대개 세상의 말(言)들 주변에 붙박이고 마는 일상의 한계 탓에 나의 쓰기는 임의의 문학 텍스트로부터 촉발되었거나 특정 시점의 내가 불쑥 닿아 버린 텍스트에 빚진 행위가 대부분이고, 이 책의 절반 이상도 그 결과물이다(제1부와 제5부). 바로 그때 만난 그 말들이 아니었다면 나는 한 편의 글도 쓰지 못했을 것이다. 분량은 절반 이하지만 목록의 길이는 한참 긴 다른 절반쯤은 세상의 흔한 말들에 직면하여 스스로 ‘텍스트적 운동’의 일부가 되기를 기도했던 흔적들이다(제2, 3, 4부). 세상 돌아가는 뉴스가 불편하여 견디기 힘들었던 특정 시기의 마인드가 집중적으로 드러난 그 글들이 이 책의 또 한 표정이 될 것을 생각하면 어색해서 죽을 것 같다. 그때 그 말들과 어느새 5년여의 시간적 거리를 두게 된 것도 난감하다고만 생각했는데, 20대 대선 이후 ‘세상 돌아가는 뉴스로부터 눈과 귀를 최대한 차단하려 애쓰는 사람들’이 늘어났다는 이야기가 들리는 요즘, ‘그때 그 말들’을 환기하는 어떤 기분이 난감함을 뚫고 흘러나와 어색함을 무릅쓰게 만들었다. 냉소인 듯 체념인 듯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던가’라고 중얼대는 주위 친구들에게 같이 푸념이라도 하며 이 기분이 더 이상의 좌절이나 절망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힘내 보자고 말하고 싶은 심정으로 지금 이 책을 세상에 밀어낸다. 어떤 항심으로 밀고 온 나의 글쓰기는, 십수 년 전 시작하는 마음일 때와 지금도 같은 마음이라고 느끼는 것과는 별개로 ‘스타일’이 좀 변했는지도 모르겠다. 읽기(크리틱)와 쓰기(에세이)의 동행에서 발생했을 그 스타일을, 읽기와 쓰기에 다 충실하고픈 바람을 담아 ‘크릿세이’라고 불러 보기로 한다. 아무래도 뚱해 보일 이 책의 표정을 내가 어떻게 책임져 줄 수 있을지는 못내 걱정이다. 다만 이제 나는 쓰기 위한 읽기가 아닌 읽기의 수행성으로 열린 쓰기로써 이 표정을 더 자주 지어 보겠다고, 그리하여 내 손끝에서 ‘크릿세이’도 점점 자연스러워지고 부드러워지길 바란다고, 지금은 그저 이런 다짐과 바람뿐이다.
•― 저자 소개
백지은
문학평론가.
비평집 [독자 시점] [건너는 걸음], 비평에세이집 [그때 그 말들]을 썼다.
•― 차례
005 책머리에 크릿세이(critssay)를 향하여
제1부 기어이, 함께 살자는 말
015 빌려 온 시간 속에서
024 우주의 주인공이 되느라—인본주의의 위상 1
030 이토록 유사한 권리의 징표—인본주의의 위상 2
035 이후의 인간을 위하여—김숨의 [나는 염소가 처음이야]로부터
047 멜랑콜리 사회학—안보윤의 [비교적 안녕한 당신의 하루]로부터
058 더 나은 고통이 있을까—정소현의 [가해자들]로부터
064 공생의 밤
제2부 모쪼록, 우리를 지키는 말
075 일탈이냐 탈선이냐
079 우연인가
083 Yes는 Yes, No는 No
088 죽어야 사는 남자
093 이야기는 계속되어야 하는데
097 지도 말고 의도
102 너도 꼭 너를 지켜
105 추억이 미래를 향해야 할 때
제3부 도무지, 무지한 무시의 말
113 무시와 무지는 하나
118 ‘오만하고 무례하다?!’
123 자기가 오직 자기여서는
128 좋은 게 좋은 것이 가장 나쁘다
133 웃게 해 달라
138 ‘아무 말’의 해악
143 문해력의 기초
148 팩트 폭력 체크
152 최대한의 지성과 용기를
제4부 어떤 한국에서 2015-2017
159 말솜씨 얘기가 아니다
164 위트 앤 시니컬
168 절박쇼, 최악(질)의 공연
172 누가 개돼지냐
177 계몽을 해 봅시다
181 원래 그런 일은 없다
185 두 자괴감과 한탄
191 비합리라는 사악함
196 촛불의 ‘의미’
제5부 아무튼, 읽는 동안
203 전염을 위하여
214 일인칭 관찰자가 하는 소설
222 최선의 미래를 기억하기
231 불길의 흔적을 찾아라
236 어떻게 웃플 것인가
244 병든 기억의 구도(構圖/求道)
250 영화인의 세상
259 심지와 신뢰
266 독자 시대의 문학과 쓰는 개인의 형식
•― 책 속으로
인류 전체의 공생을 염려하는 것이 너무 거창한 얘기가 아니라는 게 현재 우리가 처한 위기의 본질이다. 인간을 위협하는 자연(전염병)으로부터 인간이 살아남기 위해 인간끼리의 공생이 아니라 인간 아닌 것(자연)과의 공생을 도모해야 한다는 것은 역설도 아닐 것이다.(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니까.)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라고, 돌이킬 수 없는 일을 통탄하거나 변동의 당위를 수긍할 때 우리는 종종 말해 왔지만(지난 몇 년간 우리는 이 말을 얼마나 자주 해 왔던가), 세계의 진행이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을 향해 직진하는 것은 아닐 터이다. 우리는 코로나 이전은커녕 오늘 아침으로도 되돌아갈 수 없지만, 우리의 미래가 지속될 수 있는 까닭은 멀리 있는 끝으로 뻗어 나가는 힘이 아니라 언제든 멈춰 서고 뒤돌아보고 선회할 수 있는 능력에 있지 않을까. 빌려 온 시간은 영원하지 않고, 다만 조금씩이라도 갚으며 살지 않는다면, 우리는 미래라는 말조차 가질 수 없다.(pp.22-23.)
동물은 인간에게 직접 소비될 뿐만 아니라, 인간에게 유의미한 이미지로 인식되고 전시됨으로써 개체와 종을 존속시킬 수 있다. 인간은 모든 동물에게 인간의 필요와 의미를 강조하면서 그들(동물)이 우리(인간)와 유사하다고 상상하고, 우리의 필요와 의미에 장악되지 않는 부분은 배제하면서 그들이 우리보다 열등한 피조물임을 한 치도 의심하지 않는다. 오늘날 인간 외의 모든 동물은 그 개체와 종 전체가 인간에게 전적으로 착취당하는 한편 어떤 동물 종이나 개체도 인간보다 우선시될 수 없는 운명 속에서만 살아남아 오직 인간(중심)적인 의미로서만 개체의 생명과 종의 번식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p.25.)
인간의 형상을 한 동물 캐릭터들의 관습적 은유로 된 서사는 동물 상호작용을 인간 상호작용에 등치시키는 환상을 창출한다. 이는 동물의 생명적 질서를 왜곡하는 동시에 인간의 사회적 편견을 자연화할 뿐만 아니라 인간-동물 간 위계에 작동하는 권력과 모순을 은폐하는 역할도 한다. 그리고 바로 이와 같은 인간 지배적인 습관의 징표가 “구조적으로 남성 중심적”이라는 점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동반자로서의 동물에 대한 서사가 인간의 감상적인 자기 투사와 도덕적 우월감을 해소하는 의미화 체계로 작동하듯, 동반자로서의 여성에 대한 서사가 남성의 감상적인 자기 투사와 도덕적 우월감을 해소하는 관습의 편견을 쌓아 놓은 어떤 현실이 자꾸 떠오르기 때문이다.(pp.31-32.)
오늘날 우리는, 인간이 동물을 지배하고 지구의 주인, 우주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바로 그 이유들로 인해, 앞으로 우리가 지구상의 무엇으로 되어 갈지를 예측해야 하고, 동시에 우리가 여전히 지구상의 동물임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생태계를 황폐화하고 지구의 법칙을 유례없이 바꿔 버린 인간은, 기후변화가 생존 위기로 다가온 이 시대에 우리가 어떻게 주인의 자리를 차지했었는지, 그 자리에서 무엇을 자행해 왔는지를 반드시 물어야만 한다. 최근에 읽은 김숨의 이야기들이 ‘인간’에 대해 유례없는 질문을 갑자기 던진 것은 아닐 것이나, 오랫동안 동물의 신이었고 우주의 주인공이었던 그 ‘인간’을 다시 돌아봐야 한다는 요청이 마치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한 요건처럼 이미 우리 삶의 매 자리에 깊숙이 퍼져 있었던 게 아닐까.(pp.45-46.)
행복과 행운은 똑같은 뜻이 아닌 줄 아는데, 불행과 불운은 거의 같은 것으로 생각되는 때가 적잖다. (행운이든 불운이든) ‘운’이란 분명한 원인으로 설명할 수 없는, 예측이나 보장이 안 되는 불확실성을 암시하므로, 일시적 요행의 기운이 드리워진 ‘행운’이란 말이 삶의 다양한 질감에 대한 주관적인 느낌을 표현하는 행복이란 말을 대체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게 느껴진다. 불행과 불운은 어떤가? 여자로 자랐는데 어느 날 제 몸에 남자의 성기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가 친구나 연인은 물론 부모 형제도 떠난 자리에서 외롭고 서럽다면, 그의 불행은 만 명에 한 명이나 될까 말까 한 기형을 타고난 불운의 탓인 듯만 싶다(「비교적 안녕한 당신의 하루」).(p.50.)
층간소음에 대해선 각자 조금씩 참고 상대를 이해해 보자고 점잖게 끝내기가 잘 안 된다는 게 진짜 문제다. 참고 이해할 만한 소음이었다면, 고통도 아니었을 것이다. 아니, 문제는 소음이 아닐 수도 있다. 우리 사회의 공동주택 거주자들, “천장과 바닥과 벽을 타인과 공유하고 사는 주민들은 누군가가 만들어 내는 소음과 진동에 어느 정도는 지쳐” 있을 정도니 ‘시끄러운 소리’가 고통스럽다기보다 그로 인해 생기는 갈등의 구도가 고통스러운 것이다.(p.59.)
이 소설을 처음 읽을 땐, 서로 사랑하진 않지만 서로 없으면 안 되는 결혼 생활, 그런 것을 지속하는 삶은 얼마나 나쁘고 아프냐고, 사랑 없는 삶에 의미는 없다고 말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사랑 있는 결혼 생활, “빛나는 순간”으로 가득한 부부의 이야기는 어느 소설에 있나. 아직도 떠오르지 않아서, 붉은 햇빛이 가득 찬 차 안에서 ‘진우’의 주머니 속 오팔 반지가 ‘서인’의 손가락에 끼워지는 장면을 나도 모르게 바라게 되었나 보다.(pp.71-72.)
알량한 권력을 무기 삼은 폭행은 악랄하고, 여러 사람을 기만하여 제 욕정의 수단으로 삼은 추행은 흉악하다. 그중에서도 더욱 졸렬하여 문학예술인들의 공분을 산 것은 ‘예술은 본래 뭔가를 넘어서야 하는 것’이라든가 ‘일탈을 해야 문학을 알 수 있다’고 하며 저지른 폭력이 아닌가 싶다.(p.76.)
현실의 한복판에 불가해하게 뚫린 구멍과 함께 나타나 마침내 모두가 외면하는 한 주체를 그려 낸 저 의미심장한 소설의 기억할 만한 제목은 “타자의 탄생”이다. 만약 당신이 서울 강남역이라는 도심 한가운데서 벌어진 피해자 추모를 반대하고 외면했다면, 모든 남자가 범죄자는 아니라며 억울함 또는 부당함을 자꾸 들먹였다면, 그것이 혐오인 줄도 모르고 ‘여성’을 타자화하는 조롱, 멸시, 걱정, 경고 들을 오늘도 당신은 집에서, 일터에서, 커피숍에서, 술자리에서 끊임없이 탄생시키고 있는 중이리라.(p.82.)
무엇이 어려운가? 스스로 찻잔을 들고 차를 마시면 오케이, 좀처럼 찻잔을 들지 않는다면 지금 차 마시기 싫다는 뜻. 그러니까 마시면 Yes고 안 마시면 No다. 대답을 뒤집어 자기의 바람대로 해석하는 것, 가령 “안 돼요”가 울려서 “돼요”로 들린다는 것은, 대부분 자기 욕망만 움켜쥔 얼간이의 이기적인 상상일 뿐이다. 그러니 함께할 건지 묻는 이나 답하는 이나 한 번 더 명심합시다. “Yes는 Yes이고, No는 No입니다.”(p.87.)
모든 아저씨들이 다 엉망인 것도 아닌데, 비하와 조롱의 뉘앙스가 짙은 말을 자꾸 입에 올리는 것이 왠지 껄끄럽다는 느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신조어의 유행에 어떤 기능이 있으리라는 사실을 외면할 수도 없을 것이다. 이 말은, ‘개저씨’인 누구누구를 적발하여 그에게 반성을 촉구하는 일보다 ‘개저씨스러운’ 행각들의 추악함을 인식시키고 근절하고 추방하는 데 제 역할이 있다.(p.91.)
‘헬조선’을 채우는 이런저런 현상과 에피소드가 얼핏 어떤 현실 논리를 반영한 서사처럼 얽혀 보이지만, 실상 그것은 형편없는 현실을 반영한 이야기가 아니고, 현실이라는 이야기를 미처 옮기지 못한 형편없는 말들에 불과했다.(p.96.)
여성(의 삶)을 임신, 출산, 육아와 떼어 생각하기가 어렵다면, 그럼 차라리 남성(의 삶)을 임신, 출산, 육아와 떼지 말고 생각해 보기를 권한다. 말할 필요도 없이, 임신, 출산, 육아는 남성 없이 여성에게만 일어날 수는 없는 일이고, 다른 많은 일이 그렇듯 남성도 여성만큼 주도적으로 잘할 수 있는 일이다. 남성이 끼어들어야 맘고리즘이 멈출 수 있다. 임신, 출산, 육아를 멈추지 않으려면 맘고리즘을 멈춰야 한다. 이때 필요한 자료가 있다면, 가임여성을 계몽하려는 ‘지도’가 아니라 남성(의 삶)을 개조하려는 ‘의도’일 것이다.(pp.100-101.)
어쩌면 미경은 정말로, 많은 젊은 여자들이 그러듯이, 웃기지도 않고 웃고 싶지 않을 때도 자주 웃었는지도 모른다. 사회생활의 기본자세를 지키려고 그랬을까? 아니, 많은 젊은 여자들과 마찬가지로 “그 시간을 견디는 다른 방법을 알지 못해서였을 것이다.”(p.103.)
드라마 외적으로 강력한 트렌드를 몰고 온 이 현상, 바로 이로부터 「질투」와 트렌디드라마에 대해 오늘날 특히 재고해 볼 수밖에 없는 대목이 부각된다. 개인이 자기 존재의 기반을 확신할 공통의 의제나 신념이 회의되는 현대사회에서, 더 구체적으로 보자면 집단 이념의 시대라 불리던 1980년대가 막을 내리고 사적 체험과 욕망의 가치가 부각되던 1990년대 초반에, 새롭게 퍼진 라이프스타일을 구성하는 취향은 개인의 자율적 체험을 정초하는 기반이자 한 개인을 다른 개인과 구별하는 척도처럼 여겨졌다. 그런데 「질투」와 트렌디드라마로부터 오인된 도시적 취향(들)은, 취향의 주체인 개인, 즉 인물(들)에게 개별적 주체성을 부여하기보다, 취향의 대상인 물건이나 공간, 즉 상품과 장소를 집단적인 욕망의 소비 대상으로 이끌었다. 결국 개인의 취향이 되지 못한 그 라이프스타일은 오히려 대중에게 획일적인 취향을 주입했을 뿐이었다.(p.108.)
이런 황당한 사건이 벌어진 건, 자유경제원 측의 심사 위원이 이합체시를 몰라볼 만큼 문학에 ‘무지’해서가 아니다. 구습에 매몰된 인식으로 문학을 치장하고는 (문학의 핵심인) ‘말의 위의(威儀)’를 ‘무시’했기 때문이다. 아니다. 무지하니까 무시하는 거고, 무시하니까 무지한 거라 말하는 게 더 맞겠다.(p.116.)
‘문학’은 “세상에서 생각되고 말해진 최선의 것”을 가리키는 (주어가 아니라) 술어(여야 한)다. 그 술어는 글, 책, 도서관에서만 찾아지는 게 아니라 노래, 거리, 자연에서도 발견된다고 할 때, 그때 갱신되는 요소는 어떤 것들일까? 주로 문학작품에서 만났던 ‘최선의 것’이 다른 데서도 똑같이 보일 때가 아니라, 문학작품으로는 보지 못했으나 다른 데서 ‘최선의 것’으로 나타난 무엇을 만났을 때에야, 파격 또는 해방의 쾌감을 조금이나마 맛볼 수 있는 것이 아닐지.(pp.121-122.)
논리적으로는 간단할 수도 있다. ‘누군가’의 일이 ‘우리’가 원하는 일이면 되니까. 어떻게? “위험을 무릅쓴” 대가를 많이, 아주 많이, 안정적으로 지불하라. 그리고 적은 업무에는 당연히 적은 돈을 지불하라. 명료하지 않은가? 그렇게 안 되는 이유가 너무 많다고? 글쎄, 이성과 합리를 벗어난 탐욕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따져 보면 되려나……. 아, 그러기엔 지금은 너무 여유가 없다.(p.127.)
제발 그런 식으로 말하지 좀 말았으면 좋겠다. 프로그램 자체의 천박함보다도, 그것을 ‘좋은 게 좋은 것’ 아니냐며 엉너리 치는 뻔뻔함과 심지어 스스로 그것이 진짜 ‘윈-윈’이라고 여기는 비열함이 더 역겹다. 더 이상, 스타의 화려함을 좇는 헛된 환상이라 치부할 수도 없게 된, ‘아이돌’이라는 이름의 욕망. 그것은 공명과 허영을 부추기는 문화 산업의 마케팅이나 로또식 인생 역전을 꿈꾸는 신분 상승의 목적으로만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거기엔 이미 이 시대 ‘미생’들의 고난과 애환이 있고 노래와 춤과 연기에 들린 어린 천재들의 재능과 열정이 있다는 걸 누구도 모르는 게 아니지 않은가.(pp.131-132.)
어떤 개그를 보고 누군가 웃을 때 다른 누군가가 웃지 않았다면, 문제는 그 웃음이 반향을 일으킨 범위의 속성에 있다. 웃음을 ‘주려고’ 한 축과 웃음을 ‘받은’ 축이 공통으로 합의한 ‘일종의 공범 의식’에 대해, 그런 의식이 마련될 수 있었던 관습이나 관념에 대해, 웃지 않은 누군가는 동의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바꿔 말하면, 웃음을 주고받은 축이 합의한 관념 쪽에서 배제한 누군가가 있다. 웃지 않은 누군가가 모욕감을 느꼈다면, 그 배제는 혐오와 차별에 가까운 것이리라.(pp.135-136.)
가장 문제적인 ‘아무 말’은, 의미 연관은 되는 것 같은데 실상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말이다. 소문난 명문(?)이기도 한 다음과 같은 말이 대표적이다. “우리의 핵심 목표는 올해 달성해야 할 것이 이것이다 하고 정신을 차리고 나아가면 우리의 에너지를 분산시키는 것을 해낼 수 있다는 그런 마음을 가지셔야 한다.”(p.140.)
온갖 날조된 사실, 허위 정보, 거짓 사연 들을 퍼뜨려서 사람들을 선동하려는 악의적인 행태는 이전에도 없지 않았지만, 단순히 루머를 퍼뜨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뉴스’, 즉 기사 또는 보도문의 양식을 차용하여 ‘생산’한다는 점이야말로 최근 가짜 뉴스의 특징이다.(p.145.)
문제는, 담화 상황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욕망으로 자기의 진술에 일단 ‘팩트’라는 단어를 사용/오용하게 되고, 그럼으로써 실은 화자의 공격성이나 무례함이 포함된 의견이 마치 사실인 것처럼 호도될 수 있다는 점이다. 또는, 간혹 확률 통계 수치를 대며 오직 그것만이 ‘팩트’의 확실한 근거인 듯 내세워지는 때, 다른 이들의 올바른 판단이나 주장도 무조건 근거 없는 견해, 비사실적인 의견으로 몰아붙여지기도 한다는 점이다.(p.150.)
사과를 하는 데 정해진 방법이 있다는 발상도 어이없지만, 이런 식의 매뉴얼이 통용된다면 사과의 본의가 대체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사과문 작성법’으로 검색되는 얘기들의 공통된 요지는, 변명으로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는 것과 책임질 방도를 빠르게 구체적으로 밝히는 것이 ‘사태 수습’에 가장 좋다는 것이다.(p.154.)
말이란 ‘정신활동’과 ‘확고한 행위’로써 생성되는 것, 바꿔 말하면 말이란 육체와 정신을 통합적으로 다스리는 작용인 ‘혼(魂)’이 하는 일이라 할 수도 있는데, ‘잡음어’는 혼이 (비정상인 상태가 아니라) 빠진 상태에서 배출되는 말이라는 얘기다. “잡음어는 사이비 말”이며, “말해지는 어떤 것이기는 하되 그것은 결코 말이 아니”다. 잡음어는 타인에게 전해져서 무엇을 해내는 말이 아니라 “자신이 존재하고 있음을 자기 자신에게 증명해야 하기 때문”에 그저 이어지는 말이라는 것이다.(pp.162-163.)
“블랙리스트…… 문화계에선 존재를 이미 알고 있었지만, 1만 명 수준이라니…… 다들 어떻게 살고 계신지 마음이 아픕니다.”(문성근 배우) 이런 말에서 묻어나듯 이건 놀랍거나 무서운 일이라기보다 차라리 ‘마음 아픈’ 일인 듯하다.(p.165.)
희한하게도 무릎을 꿇고 눈물을 보였던 그때 왜 그들이 더욱 오만해 보였는지, 비로소 알 것 같다. 언제나 국민 위에 군림해 있던 그들이 잠깐 몸을 낮춘 그 순간 역설적으로, 그동안 그들이 국민을 자기 앞에 무릎 꿇은 자로 대해 왔다는 사실이 명백해졌기 때문이다.(p.170.)
사실 내가 이 사건에 대해 화가 난 건 이때부터인 것 같다. ‘솔직함’이라고?! 자기 자신의 솔직한 생각이라는 것도 실은 어떤 이데올로기에 대한 충실한 믿음이고, 솔직한 표현이라는 것 역시 그 믿음을 표면에 드러낸다는 뜻일 수 있지만, 아무것도 고려하지 않고 오직 탐욕만을 내세우는 인간의 야만적인 상상이 사악하게 드러난 것을 어떻게 ‘솔직하다’고 말할 수가 있을까? 자기 머릿속의 일념이 다 자기를 기만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어떤 이데올로기가 자기를 기만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기기만이 나쁜 이데올로기를 만드는 것이다.(p.174.)
흥미롭지 않은가? “명확한 근거와 논증적 대화를 통한 상호이해”를 목적으로 하는 실천 강령을 ‘문명인의 행동 양식’으로 정하고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이성적 대화와 소통의 바탕에 필요한 것이 논리 수업이나 대화의 기술이 아니라는 것. 그보다는 공생을 위한 약속을 숙지하고 그에 맞게 자기 습관을 교정하는 일이 급선무라는 것. 사실 이 점은 흥미로운 게 아니라 민망한 것이다.(p.179.)
“청와대 행정관이 몸담았던 뉴라이트 성향의 단체 ‘시대정신’에 출처 모를 후원금 21억 원이 입금됐다는 주장이 나왔다”와 같은 뉴스가 또 들려와도, “원래 그랬잖아?”라고 하지는 말자. 마치 그런 괴상한 얘기는 지금 처음 들어 본다는 듯 충격을 받자. 세상에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냐고 화들짝 놀라자. 더러운 냄새에 길들지 말고 계속해서 코를 싸쥐고 버럭버럭 화를 내자.(pp.183-184.)
이렇게까지 엉망이었다고는 정말 믿고 싶지 않았는데,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무수한 사태들이 이와 같은 ‘광기 혹은 최면’의 정치 혹은 ‘신정정치’의 위세 때문이었음을 알아차리고 말아 우리는 이토록 억울한 자괴감에서 헤어 나오기 힘든 것이구나. 화가 나다 못해 슬퍼진다. 백만의 촛불 속에서 문득문득 가슴이 뻐근해진 건 격분이라기보다 비통이었다.(pp.189-190.)
처음 ‘국정 농단 의혹’이 제기되어 ‘대통령이 사교(邪敎)의 교주 격인 민간인의 사주를 받아 국정을 운영했다’는 보도가 나오기 시작했을 때 누군가 “(최순실이) 정말 용한 점쟁이면 어쩌려고”라고 한 말이 회자되었던 게 생각난다. 이 나라에 점 보는 사람이 한둘인가? 대통령에게도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라?!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광기, 최면, 주술에 인간이 무너지는 게 아니라 인간이 무너지는 것이 곧 광기, 최면, 주술이다.(pp.194-195.)
그날, 그 순간. 한 번 더 적어 본다: “주문.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 이 말이 대한민국 모든 사람들의 귀에 꽂힌 그 순간, ‘대통령 파면’이라는 사건이 발생했고 그와 동시에 이 사건은 저와 이웃하고 있던 사건(들) 중 촛불집회와 이어짐/계열화됨으로써 비로소 촛불집회의 (잠재적이었던) 의미를 결정하게 되었다. ‘불법과 위헌을 일삼았던 그이는 더 이상 대통령이 아니다.’ 비로소 촛불의 ‘의미’가 탄생한 것이다.(pp.198-199.)
언어는 말이나 글 이전에 미리 구성된 의미를 외적으로 표현하는 수단으로써의 도구만이 아니다. ‘문학’의 언어에 상수(常數)는 없지만, 언어가 도구이기만 한 건 아니라는 사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을 때의 언어의 용법은 ‘문학적’ 사용/작용과 유사하다고 말해 볼 수 있다. 또한 언어 사용은 언어공동체 내에서, 타인과의 관계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따라서 말이나 글이 어떤 문장으로 나타날 때 그 문장은 말하는/쓰는 이를 드러내면서도 그 드러남은 그 발화자에게만 속한 것이 아니라 언어공동체 즉 타인들과의 관계에도 속한 것이 된다. 때문에 언어는 그 사용자의 주관성이 표출된 것에 머물지 않고 그가 주재할 수 없는 장(場)의 일부로서 효과를 내는 객관적 상관물로 존재할 수 있다. 요컨대, 우리가 어떤 문장을 접할 때 먼저 받아들이는 것은 필연적으로 발화자가 구성한 ‘의미’이지만 그 의미는 그 문장이 우리에게 가져온 모든 것 중의 일부라는 사실, 이 사실이 더 유의미해지는 때가 바로 우리가 문학적인 글을 만났을 때라고 해도 될 것이다.(p.212.)
퀴어의 삶을 발화하는 ‘당사자’의 중요성을 당연하게 여길 때, 어쩌면 우리는 이 사회에서 퀴어의 입장이란 “어떻게든 보이길 원하는 사람이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숨어 버리는 사람”이 되어 버리고 마는 그 일상적 모순 또는 폭력의 상황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게 아닐까. 이 소설에서 퀴어 당사자인 ‘나’가 한밤에 두고 온 저 무대, 또 다른 퀴어의 사연이 남들의 불필요한 시선에 얽히지 않고 ‘오직 두 사람’의 시간으로 남을 저 무대는,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가르는 어떤 선”에 의해 정상 규범과 직접 불화하는 장면을 피하게 하지만, 그럼으로써 또 다른 퀴어 테크놀로지를 창안할 가능성을 품은 것이 아닐까. “영화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굳게 믿”는 비당사자 감독의 영화에 유부남 클로짓 게이로 출연할 ‘나’가 이왕이면 그 원대한 꿈의 희생자가 아니라 조력자가 되기를 응원해 보는 건, “벅차오르는 기분”으로 내일을 기다리며 “똑바로 걷”는 그 역시 “이야기 속 주인공”임을 우리도 여기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p.218.)
아무것도 찌르지 않고 아무것에도 찔리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인간은 서로에게 선인장과 같아서 자기를 다치지 않고 남도 다치지 않게 하는 방법을 잘 알지 못한다. 상처는 삶의 변수가 아니라 상수다. 그리고 소설은 서로 찌르고 찔린 상처의 기록이다. 이것은 상처와 소설에 관한 개념적인 이야기지만, 개념이 아니라 진짜 서로 찌르고 찔리는 소설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한다. 두 편이나, 나란히 읽은 것이다. 칼을 든 아이가 있고, 앞에 선 아이는 “찔러 봐”라고 말한다. 둘 다 찔렀다. 한쪽은 끝내 찔림으로 되돌려 받을 것이고 또 한쪽은 끝내 찌름으로 되돌려준 것이었다. 상처는 변수가 아니라 상수. 소설은 상처의 기록일 뿐 그것을 치유하는 지혜를 줄 수는 없지만, 상처의 기록은 상처 이전의 시간으로부터 미래를 분리시킨다. 찌름과 찔림은 그들의 삶에서 무엇이 되는가.(p.222.)
‘쓰고 싶다’라는 욕구는 누구나 가질 수 있는 평범한 충동 혹은 태도일 수 있지만, 쓰인 모든 글들이 그것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쓰려는 충동과 쓰는 행동이 구별되지 않는 한에서 ‘쓰기-의지’는 쓰인 글에 속할 수 있으며, 그렇게 ‘쓰기-의지’가 이미 글쓰기의 재료 자체가 되는 한에서 (과학적 담론에 대립되는) 문학의 위상을 정의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라는 얘기는 롤랑 바르트의 강의록에서 읽었다). 가령 무엇을 이해하기 위해 소설을 써야겠다는 목적이 있다면, 그 목적은 무엇에 대해 알게 된 바를 써 냄으로써 이루는 것이 아니라 무엇에 대해 다만 썼다는 사실로써 이루어진다.(p.233.)
‘웃프다’는 말은 원리상 어떤 자연스러운 상황 혹은 기분을 가리키기에 불가결한 것이 아닐까? ‘웃기다’와 ‘슬프다’를 한꺼번에 표현하는 이 단어는 언제부턴가 일상에서도 본디 있던 말처럼 자연스럽게 쓰이는 중인데, 웃김을 감지하는 지성과 슬픔에 공명하는 감성이 동시 발흥하는 순간은 생각보다 빈번하고, 사전에도 없는 이 단어는 그때마다 상당히 유용해진다. 웃김은 감정을 제거해야 하고 슬픔은 지성이 멈춰야 하는 상태라면, 순수한 웃김이나 순수한 슬픔은 단지 추상적인 상태일 수밖에 없다.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 경험이 있는 우리에겐 대체로 그냥 웃음보다 웃음+α의 상태인 ‘웃픔’이 더 맞고 더 잦다. 이 시대, 우리의 웃음에는 무엇이 플러스되어 우리를 웃프게 하는가. 세 편의 소설을 읽어 본다.(p.237.)
이 소설은, 어느새 스스로 구도를 행하는 이야기, 어쩌면 구원의 길조차 어렴풋이 알아 버린 이야기로 나아가고 있었다. 어째서인가. 어느 날, 태양만 빼곤 모든 게 더러웠던 시 외곽의 빈민가에서 그는 저 “태양” 같은 것(찬란하기만 한 의미이거나 아니면 내리쬐기만 하는 무의미인 그런 것)에 대해서는 “하고 싶은 말”도, “해야 할 말”도 없다는 것을 깨달으며, “그렇지만 나는 무슨 생각인가 하고 무슨 말인가 해야 했다”고 다급한 어조로 털어놓는다. 그에게 “발작처럼 찾아오는 어떤 인상들”(인도에서의 첫날 밤 이후 내내 기억의 틈새에 박혀 버린 구겨진 형상의 검은 소년, 대형 슈퍼마켓 벽면에 파리 떼처럼 달라붙어 있던 실업자 신세의 사내들, 기차역 광장을 뒤덮은 갈 곳 없는 거지와 노숙자들……), 즉 신들의 사원이 아니라 인간들의 진흙탕에서 마주친 그 형상들을 그는 “기억의 질병들”이라 부르며, 바로 “그것이 내가 하고픈 말이었고 해야 할 말이었다”라고 선언한 것이다.(p.246.)
비평가로서 살아간다는 자각에는 크게 두 차원의 행위가 지속적으로 필요하다. 비평의 대상에 대한 관심과 감상과 공부를 놓지 않는 것이 하나이고, 그 과정에서 생겨난 다른 감각과 사유를 비평문으로 쓰는 것이 또 하나다. 문학평론의 경우 읽기와 쓰기가 필요하고, 영화평론의 경우 영화 보기와 쓰기가 필요하며, 음악평론의 경우 음악 듣기와 쓰기가 필요하다. 다른 쓰기와 달리 비평에는 쓰기 이전에 한 단계가 더 있다. 혹은 쓰기의 두 단계가 있다. 글쓰기가 일이라기보다 삶이라면, 삶이 두 단계인 셈이다. 즉 비평가에게는 삶이 곧 읽기(보기, 듣기)와 쓰기다. 다른 글은 쓰기 이전에 혹은 쓰기와 더불어 세상 자체를 보고 듣고 읽는다. 비평이 쓰기 이전에 혹은 쓰기와 더불어 보고 듣고 읽는 세상은 비평 대상의 세계다. 비평 대상을 (편의상) ‘텍스트’라고 한다면, 요컨대 비평은 텍스트를 산다(生). 이것은 비유적인 표현이 아닌데, 비평의 근거와 범위가 대상 텍스트에 한정(대체)되는 조건 때문만은 아니다. 비평가의 삶을 채우는 시간 중 텍스트와 함께인 시간의 비중이 ‘텍스트를 산다’고 말해도 될 만큼 절대적으로 크기 때문이다.(p.251.)
문학 텍스트는 빛나는 텍스트일까. 모든 텍스트는 아직 어둠 속에 있다. 스스로 빛을 내지 않는다. (텍스트는 빛을 만들어 품거나 발하는 존재가 아니라 말/글의 짜임으로 된 대상일 뿐이다.) 그러나 어떤 빛이, 가령 ‘문학’이라는 이름의 빛(조명)이 그것들 위로 비추어질 때 유독 눈부신 것들, 반짝이는 것들이 나타나 빛을 발한다. 그때 빛나는 것을 문학 텍스트라 부르자. 빛나는 그것들과 맞닿은 지면에는 반드시 그림자가 나타날 것이다. 빛과 그림자는 언제나 함께 있고, 빛이 강하면 그림자는 진하고 빛이 약하면 그림자는 희미하다.(p.259.)
다시 말해 ‘쓰기’에 대해서는, 삶이 글쓰기/읽기의 수행으로 이루어진다고 하기보다 글쓰기가 삶의 수행 혹은 삶의 형식이라고 하는 편이 더 맞는 듯하다. 삶을 쓰는 것보다 씀을 산다는 것? 어느 때보다 읽을거리가 넘치고 읽기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시대, 세상의 무수한 쓰인 것들에 보태지는 ‘내가 쓴 것’의 의미는, ‘무엇’을, ‘왜’ 쓰는가보다 ‘내가’ 쓴다는 것으로 모아지는 것 같다. ‘나’의 고통과 사랑과 인생을(무엇을), 세상과 소통하고 공감하고 위로를 주고받고 싶어서, 그리하여 더 나은 사람이 되고 더 좋은 세상을 이루고 싶어서(왜), 대개 이런 동기로 ‘나’는 글을 쓸 터인데, 하지만 그런 동기들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런 이유들의 최종 심급에 ‘내가’ 그것을 썼음이, 그리하여 그 쓴 것이 바로 ‘나’임이, 가장 의미 있게 자리한다. 글을 쓰는 이들 각자에게 ‘쓰기’의 궁극적 위상이 바로 이 점이 아닐까 싶다. 나의 글, 나의 이야기, 나의 쓰기란, ‘나에 대하여’ 쓴 것이 아니라 ‘내가’ 쓴 것이다.(pp.270-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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