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방Ⅰ- 온막들, 당나무, 자미산, 본 마을
호방(好方) 이야기
오늘 우리 마을의 운석농장 대표 이시형 선생께서 드론으로 마을의 구석구석을 촬영하여 동영상 파일을 보내왔다. 아무리 작은 마을이라도 전체를 한눈에 관망하기가 쉬운 일이 아닌데 일전에 내가 부탁한 말을 잊지 않고 촬영해 주셔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내가 사는 청도군 매전면 호화리 호방(好方) 마을은 30여 호의 작은 시골 마을이다. 마을 뒤로는 자미산(紫嵋山 250m, 一名 虎頭山)을 등지고, 내 고향 김해평야(金海平野)에 비할 수는 없겠으나 면내에서는 제일 넓은 온막들을 바라보는 남향으로 취락(聚落)이 형성되어 있다. 동으로는 사철 수량이 풍부한 동창천(東倉川)이 인접해 있어 들이 넓고 수리(水利)가 좋은 여건하에 배산임수(背山臨水)의 기본요건을 갖추고 형성된 마을로 늘 풍요로운 기운이 가득한 곳이다.
우리 마을의 유래를 살펴보면 동창천이 자주 범람(汎濫)하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지금보다 서쪽으로 명대(明臺) 마을에 좀 더 가까운 자미산 남서쪽 구릉 지대부터 마을이 형성되었을 것 같고, 제방이 축조되고 홍수의 위험이 덜해지면서 동쪽 평지로 한집 두 집 옮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1996년 청도문화원에서 발행한 '마을 지명유래지(地名由來誌)'에 의하면 “자미산 기슭에서 간간이 출토(出土)되는 토기편(土器片)은 신라초기(新羅初期)의 것으로 본군(本郡)의 주거지(住居址) 중에서도 선사시대(先史時代)부터 주민이 거주했던 지역으로 손꼽히고 있다.”는 기록과 들 건너 용전(龍田) 마을에서 출토된 요령식 비파형동검(遼寧式 琵琶形銅劍)과 최근 폐교된 매전초등학교 운동장 느티나무 아래 고인돌 덮개석 성혈(星穴)이 현재에도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고 있었던 곳이 분명하다.
마을 뒤 호두산(虎頭山)은 모양과 이름뿐만 아니라 실제로 호랑이가 살았다.
1400년경 호방에는 밀양박씨 밀성군파(密陽朴氏 密城君派) 문중의 박윤손(朴閏孫)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의 생몰일(生沒日)은 알 수 없으나 조선조 인종(仁宗) 때 좌의정을 지낸 유관(柳灌,1484∼1545)이 그의 외손자임을 고려하면 대략 짐작해 볼 수 있겠다.
박윤손의 아버지는 수군(水軍) 박동(朴同)이다.
부친이 병역(兵役)에 나간 사이 당시 17살 난 박윤손은 그의 집에서 어머니를 도와 다듬이질을 하고 있는데(일설에는 빨래를 하고 있었다고도 함) 갑자기 뒷산에서 나타난 호랑이가 어머니를 물고 가자 왼손으로 어머니를 붙잡고 오른손으로 돌멩이를 던지는 등 사투를 벌이면서 5리 정도를 추격했다. 이를 본 이웃 사람들이 달려오자 호랑이는 이들을 버리고 달아났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크게 다친 어머니는 그날 밤중에 숨을 거두고야 말았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문(旌閭門)을 내리고 조세를 면제해 주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오산지(鰲山志)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내가 확인했고, 인근 국도변에는 후세 사람들이 세운 박윤손 효자비가 남아있다.
또 '마을지명유래지'에 의하면 서기 1500년 중엽에 인동장씨(仁同張氏)가 입동(入洞) 하여 마을을 개척했고, 서기 1600년 말경에 고성이씨(固城李氏) 이관공(李琯公)이 택리(擇里)하여 지금까지 고성이씨 종족(宗族) 마을로 번성하고 있다고 한다.
마을 이름도 이관 공이 동민 모두 잘되고 잘 살아야 한다는 뜻으로 호화(好化) 또는 호방(好方)이라 했다고 하며 각종 지리지에는 호고(好古), 호고방(好古方)으로 등재되어 있다. 원래는 뒷산의 형상이 범이 엎드려있는 모습과 닮았고 마을 옆에 흐르는 동창천의 맑은 물을 연상해서 ‘호뱅이’로 부르며 호계(虎溪)라 쓰기도 했다.
옛날 조선조(朝鮮朝) 때부터 우리 마을에 궁답(宮畓)이 있었다.
궁답(宮畓)이란 조선 시대 왕실(王室) 또는 궁방(宮房) 소유의 전답으로 백성들의 개인 땅(私田·民畓)과 구별되며, 궁답은 지역 주민에게 도지(賭地)로 임대하여 도지세로 일정한 쌀이나 채소 등을 거두어 가는 제도다. 이때 궁답에서 소출(所出)한 곡식을 보관하는 창고인 고방(庫房)이 우리 마을에 있어 일설에는 ‘호고방’이라는 마을 지명이 유래되었다고도 한다.
호방 궁답은 내시가(內侍家)로 알려진 금천면 임당리 김일준(金馹俊) 가에서 대를 이어 관리하다가 일제강점기에 그의 소유로 되었다. 궁답의 정확한 위치와 면적은 알 수 없으나 호방의 호화교 주변 옥토였고, 1960년대부터 20여 년간 시행된 낙동강 연안개발사업으로 동창천의 물줄기가 바뀌면서 대부분 하천으로 흡수되었다고 한다.
마을 입구에는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없는 노거수(老巨樹) 두 그루가 있다.
그중 한 그루는 마을 앞 도로 가에 있는데 추정 수령(樹齡) 400여 년의 느티나무 수종(樹種)으로 이 마을에서는 당(堂)나무라고 부른다. 마을에 전해오는 말로는 이관공이 택리하면서 이 나무를 심었다고 하는데 수령으로 볼 때 연대가 비슷하여 타당성(妥當性)이 있는 말이라 여겨진다.
옛날에는 다른 마을의 노거수처럼 정월 보름에 동제(洞祭)를 지냈을 것인데 지금은 동제를 지내지는 않지만 매년 막걸리 여러 말(斗)을 나무 밑에 붓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매년 봄에 이 느티나무 잎이 일찍 무성하면 풍년이 오는 징조(徵兆)로 믿고 있다.
이 느티나무는 원래 두 그루가 남과 북으로 나란히 서 있었는데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말인 1944년경 일본 군수공장(軍需工場)에서 소총 개머리판으로 사용할 목적으로 남쪽에 있는 나무는 강제로 베어 가버렸고, 그중 하나만 남았는데 마을에서 보호해 오다가 1998년 군(郡) 보호수로 지정되어 이후 청도군에서 관리해 오고 있다.
다른 한 그루의 나무는 마을의 전 이장 댁 앞에 있는 추정 수령 250~300년 되는 은행나무다. 군 보호수로 지정되지는 않았지만, 이 마을에서는 느티나무 못지않게 애지중지하고 있다. 1981년 청도군에서 발행한 '내 고장 전통문화'에 의하면 옛날 이 은행나무에 선비같이 기풍(氣風)이 우아한 학(鶴)이 살고 있었는데 한 포수(砲手)가 이 학을 잡으려고 총을 겨냥하자 갑자기 번개가 치고 천둥이 울리면서 학이 하늘로 승천(昇天)하였다고 한다. 이때 은행나무의 윗부분이 벼락을 맞아 잘려져 나가고 지금까지 그 흔적이 남아있다는 전설이다.
호방 마을의 이 두 노거수는 온막들을 바라보며 우뚝 서서 일제(日帝)에 수탈(收奪)당한 우리 백성들이 나무 그늘에 앉아 한숨 쉬는 탄성(歎聲)과 1919년 3월 동창천 너머 장연리(長淵里)에서 바람결에 들려오는 '대한독립 만세' 함성도 들었을 것이다.
또 1933년 6월에는 호방 마을의 대화재(大火災)로 인해 온 마을이 불타버리는 안타까운 모습도 지켜보았을 것이고, 1950년 한국전쟁 때 길고 긴 여름엔 윗지방에서 밀려 내려온 피난민들이 여기 나무 그늘에서 지친 몸을 쉬었을 것이다. 지금도 명절에는 객지(客地)에 나갔다가 고향을 찾아오는 이 마을 자녀들을 부모의 마음으로 길게 고개를 빼고 원전(院前) 쪽을 바라보면서 기다릴 것이다.
마을의 오래된 건물로는 1827년 고성이씨(固城李氏) 문중의 동윤(東潤), 동계(東桂), 동상(東尙), 동연(東淵) 님이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세운 서당(書堂)인 미산제(嵋山齋)가 190년의 역사를 지닌체 아직 남아있다.
1960년대 초 우리 마을 출신의 재일교포 이정기(李貞基) 회장은 고향을 위해 요즈음 가치로 수십억 원에 상당하는 한화 1,300만 원을 희사하여 이 돈으로 청도읍 유천에서 온막리 명대를 경유 우리 마을까지 장장 30리 거리에 전기원선 도인(電氣原線 導引)공사를 해서 두메산골에 전등불을 밝히게 했고, 또 1962년 모국방문단의 일원으로 청도에 왔다가 사라호 태풍이 영남 일대를 휩쓸고 지나가 동창천이 범람하여 그의 고향 호방 마을이 물에 잠기는 큰 피해를 본 지가 몇 해가 지났어도 여전히 고향 친척들이 실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고 당시의 거금 300만 원을 희사해서 제방복구공사를 실시토록 하여 고향 사람에게 새 희망을 주기도 했다.
마을 사람들은 고마운 마음을 담아 1962년과 1988년 각각 마을 동쪽 제방 아래 ‘이정기호계제의연불망비(李貞基虎溪堤義捐不忘碑)를 세웠고, 당시의 나무전봇대 하나가 기념이라도 하는 듯 수야댁 감밭 가에 아직 서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우리 마을은 새마을 운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넓고 기름진 농토와 발달한 수리시설을 바탕으로 온 주민이 부지런히 일한 결과 한때는 주위에서는 가장 잘 사는 부자 마을로 평가받기도 했다. 그러나 곧이어 산업화 시대를 맞으면서 점차 농촌인구가 감소하기 시작하여 주민은 고령화되어가고 마을에선 어린아이 울음소리가 그친 지 오래되었다.
다행히 몇 해 전에 최희달 장로님이 별세하면서 도시에 살던 아들 최종기 집사가 아들 둘을 데리고 귀농해 또 한 명을 더 낳아서 마을 주민의 평균 연령을 확 줄여놓았다. 나는 이 아이들을 통해서나마 마을의 미래를 바라볼 수 있어 이들이 내 손녀만큼이나 사랑스럽다.
한 가지 덧붙일 것은 2000년대 이후 동창천 건너에는 새로운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2010년 호롱소(포구소) 동쪽 산기슭에 전원주택 ‘능소화마을’이 조성되고, 2014년 호롱소 앞에 ‘운석농장’과 2015년 구 대성농장 자리에 ‘농업법인 캠프원’ 대형 캠프장, 2016년에 ‘장연생태공원’이 잇달아 준공 및 개장하였다. 우리 마을에 조성된 생태공원에 엉뚱한 지명을 붙인 행정 당국의 조치가 이해되지는 않으나 고무적인 것은 1983년경 동창천 위 호화교가 잠수교로 건설되어 차량통행이 불편했던 점을 해소하기 위해 올해부터 새로운 호화교 건설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어 이 일대가 제2의 호방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호방Ⅱ- 동창천, 생태공원, 운석농장, 캠프원야영장, 능소화 마을
http://blog.naver.com/kjyoun24/221052726655
첫댓글 내 고향 호방의 내력들
너무너무 잘읽었습니다..배산임수자체의 고즈녁한 호방..!
이곳에 태어나자람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짝짝짝
이승진 님, 김욱 국장 감사합니다.
오늘 이글의 후반부에 몇줄을 더 보태고, 동영상을 하나 더 올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