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도서관에 있는 고서(古書) 가운데 《신라삼성연원보(新羅三姓淵源譜)》라는 보첩(譜牒) 형식의 책자가 있다. 이 책자에는 신라시대에 등장하였다는 박(朴), 석(昔), 김(金) 세 성씨의 왕(王)과 그 왕들의 후손들 계보(系譜), 신라 개국공신(開國功臣)들에 관한 기록 등이 실려 있다. ‘계림김씨연원보(鷄林金氏淵源譜)’라는 신라계(系) 김씨의 족보 기록도 첨부되어 있다. ‘계림 김씨’란 말은 신라계 김씨를 통칭한 것이었다. 《신라삼성연원보》는 한때 보학계(譜學界), 특히 신라계 김씨 성으로 족보를 만드는 사람들이 크게 관심을 두던 책이었다.
그런데 이 책자의 내용이 사실인지 여부에 관해서는 논란이 많았다. 기존의 정사(正史)나 야사(野史) 같은 데서는 찾아볼 수 없는, 과장하거나 조작으로 보이는 기록들이 적잖게 있다는 것이 이 책의 사실성을 부정하는 사람들의 지적이었다. 비록 보학계의 저술이라 해도 우리 국사(國史)의 내용과 다른 내용을 받아들이기는 어렵다는 것이었다.
사실 보학(譜學) 관련 책에 나오는 내용은 나라의 역사 기록에서 볼 수 없는 게 많다. 각 집안에서는 자기들 가문의 선대(先代)에 관한 기록이라는 이유로 신뢰를 보내지만, 그중에는 검증되지 않는 것들이 적지 않다. 《신라삼성연원보》도 마찬가지다.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조선 인조 때 나왔다는 이 책의 저자는 조선 말기에 출생한 김경대(金景大) 일명 김종거(金鐘鐻)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경주 김씨(慶州 金氏)의 한 종인(宗人)이었다. 그가 《신라삼성연원보》를 발행한 시기는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인 소화(昭和) 9년, 즉 1934년이다. 발행처는 평안북도의 의주(義州)에 소재한 신라박석김연원종약원(新羅朴昔金淵源宗約院)이란 곳이었다. 일제 치하이던 1930년대는 각 성씨의 문중(門中)에서는 우후죽순(雨後竹筍)처럼 족보를 발간하던 때였다.
族譜의 허위 기록들
족보는 조선시대에 가문(家門)의 상징이었다. 양반계층, 그것도 명문(名門)이란 소리를 듣는 계층에서 발행해 내는 보책(譜冊)이었다. 조선시대는 반상(班常)을 엄격히 구별하고 있어서 상인(常人) 계층은 족보 제작을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설사 만든다 하더라도 사회적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다.
족보를 편찬할 때에는 조상들의 이름, 출생, 부인(妻), 사망, 묘소 등도 기록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시한 것은 생전의 벼슬, 시호(諡號) 또는 군호(君號) 등이었다.
시호는 사망 후 나라에서 명신(名臣)이나 공신(功臣)에게 특별히 내려주는 칭호였다. 이를테면 충무공(忠武公)이니 문정공(文正公)이니 하는 것이었다. 시호는 당사자의 생전 품행과 업적을 참고하여 내렸다.
군호는 일명 봉호(封號)라고도 한다. 계림군(鷄林君)이니 의성군(義城君)이니 하는 출신 지역의 이름에 ‘임금’이란 뜻의 글자인 군(君)을 붙인 칭호다. 당사자 생전에 임금이 정승 등 고관(高官)이나 공신들에게 내리는 것이 관례였다.
조상이 시호나 군호를 받았다는 기록은 후손들에게는 큰 자랑이고 문중의 긍지였다. 때문에 족보에 자기들의 조상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근거 없이 시호와 군호를 조상에게 붙여놓기도 했다. 《신라삼성연원보》에도 그런 경우가 많다.
敬順王의 후예들?
그 밖에도 이 책에는 《삼국사기(三國史記)》나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괴이한 기록이 있었다. 그것은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敬順王)에게 석씨(昔氏) 성의 부인이 있고 그 부인의 소생인 아들이 5명이 있다는 기록들이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오로지 박씨(朴氏) 성의 부인 한 명만 등장한다. 그 부인의 이름은 죽방부인(竹房夫人)이다.
경순왕에게는 아들이 한 명 있는 걸로 되어 있는데, 그가 세칭 마의태자(麻衣太子)라 하는 기록은 없다. 이 기록과는 다르게 야사류(野史類)에서는 마의태자와 범공(梵空)이란 승명(僧名)의 아들이 있는 것으로 전해져 온다. 이에 의하면 박씨 소생의 아들은 두 명이었다는 것이 된다. 그런데 작금(昨今)에 와서는 신라계 김씨 성들, 특히 경순왕의 후손들이라 하는 집안에서 만든 족보에는 경순왕에게 명종(鳴鐘)이라는 아들이 하나 더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나라의 역사에서 보는 기록들과 다르기 때문에 당연히 의문을 갖게 되지만 경주 김씨들은 그 족보의 기록 내용을 믿고 있었다.
《신라삼성연원보》에서는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에게 석씨 부인과 아들들이 있는 것으로 기록하였는데, 이 기록에 대해 사학계(史學界)에서는 물론 많은 신라계 김씨 사람들도 부정적(否定的)으로 보았다. 위보(僞譜)라는 것이다.
《신라삼성연원보》는 경순왕의 석씨 부인을 송희부인(松希夫人)이라 호칭하면서, 5명의 아들들 이름까지 기록해 놓았다. 그 아들들의 이름은 전(佺), 요(瑤), 곤(琨), 영(英), 분(奮)이었다. 이 이름들에서 대뜸 느낄 수 있는 것은 마치 소설에서나 보는 이름들 같다는 것이다. 전은 신선이란 뜻이고, 요와 곤은 옥(玉)이란 뜻이다. 영은 꽃부리란 뜻이 있고, 분은 떨친다는 뜻이다. 이 이름들을 보면 ‘분’이라는 이름을 제외하면, 석씨 부인 소생은 한결같이 여인들의 이름 같은 느낌이 든다.
麻衣太子의 실체는?
이 책에는 그들 다섯 명의 아들에 대한 간단한 설명도 있다. 전은 첫째 아들로 부왕이 고려에 항복하는 것을 극구 반대하다가 들어주지 않자 통곡하며 자살하였다 한다. 둘째인 요는 완산군(完山君)으로 봉해지고 시호는 문의공(文宜公)이었으며 골산 김씨(骨山 金氏)라는 성을 받았다 한다. 곤은 첫째인 전의 설명과 같은 내용이면서 단지 둘째처럼 골산 김씨로 본관의 성을 가졌다고 하였다. 영에 대해서는 광주군(廣州君)으로 군호를 받았고 또한 본관을 하사받았는데 대구 김씨(大邱 金氏)였다 하는 설명이다. 다섯째인 분은 부왕이 고려에 항복하는 것에 역시 극구 반대하였는데 마찬가지로 들어주지 아니하자 개골산으로 들어갔고 삼대군(三大君)이란 군호를 하사받아 역시 골산 김씨가 되었다고 한다. 분에 대한 설명에서는 마의태자가 개골산(금강산)에 들어간 경우와 같았다. 그러면 두 명의 경순왕 아들이 개골산으로 들어가 속세를 등지고 살았다는 것이 된다.
《신라삼성연원보》의 기록 중에는 마의태자의 이름을 일(鎰)이라 기록한 경우도 있다. 마의태자의 본명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에는 없다. 오로지 마의태자라는 별칭만 보인다. 그런데 《신라삼성연원보》에는 마의태자의 이름이 나오는 것이다.
마의태자의 본명은 그간 누구도 모르고 있었다. 그러다가 조선조 말기에 경순왕의 왕씨 부인(낙랑공주, 고려 태조 왕건의 딸) 소생인 김은열(金殷說)의 묘지를 개성 어느 산 아래서 발견하고 나서 그 묘지(墓誌)의 기록을 보고 마의태자의 이름이 알려졌다. 그때가 조선 정조 8년(1784)이었는데, 그 이전까지는 마의태자의 본명이 어느 자료에도 나와 있지 않았었다.
‘骨山 金氏’를 아십니까?
《신라삼성연원보》의 저자 김경대는 경진생(庚辰生)으로 조선 선조 13년(1580)에 출생하였다고 하기도 하고, 조선 고종 17년(1880)에 출생했다고 하기도 한다. 만일 김경대가 김은열의 묘지가 발견되기 전인 조선 선조 때 사람이라면, 그는 어떤 자료를 통해 마의태자의 이름이 김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까? 물론 그가 조선 고종 때 태어났다면, 그도 김은열의 묘지에 나타난 기록을 가지고 마의태자의 이름을 알게 되어 이 사실을 《신라삼성연원보》에 기록해 놓았다고 할 수 있다.
혹자는 경주 김씨의 어느 한 파(派)의 문중에서 《신라삼성연원보》를 처음 발행한 것은 조선 인조 10년인 1632년이며, 저자 김경대는 선조 때 태어났다고 주장한다. 김경대도 경주 김씨지만, 그도 다른 경순왕의 후손들처럼 1784년 이전에는 마의태자의 이름을 모르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마의태자의 이름이 김일이라는 사실은 김은열의 묘지를 제외하면 어떤 역사기록에도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때문에 김경대는 고종 때 출생한 사람으로 《신라삼성연원보》는 일제강점기 때 처음 나온 것으로 보아야 한다.
김경대의 《신라삼성연원보》는 김은열을 김감(金鑑)이라 표기하기도 했다. 김감은 경순왕과 왕씨 부인 소생이다. 하지만 경순왕 후손들 족보에서 김은열을 김감이라고 기록한 다른 기록은 없다. 그렇다면 김경대가 김은열을 김감이라고 한 기록은 오기(誤記)가 아니면 조작일 것이다.
석씨 부인 소생의 아들들에 대한 기록도 역시 다른 경순왕의 후손 족보에서는 볼 수 없었다. 이 역시 조작일 것이다. 골산 김씨라는 것 자체가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이 ‘골산’이라는 말은 금강산의 별칭인 개골산에서 나온 것이다. 한국의 성씨 중에서 지역이 아니라 산(山) 이름을 가지고 본관으로 삼은 성씨는 없다. 이 역시 《신라삼성연원보》가 위작(僞作)이라는 근거이다.
석씨 부인의 아들들이 완산군이니 삼대군이니 하는 군호를 받았다는 것 역시 거짓이다. 신라에는 그 같은 군호제도가 없었다. 설사 고려에서 받은 것이라 하여도 그들이 고려를 등졌기 때문에, 고려에서 그 같은 군호를 내려줄 리 만무했다.
《신라삼성연원보》에는 경순왕의 아들 영이 대구 김씨로 성을 받았다고 하였는데, 대구 김씨 족보 중에는 그가 시조이거나 조상의 한 사람이라고 기록된 게 없다. 대구 김씨의 족보에 의하면, 대구 김씨의 시조는 경순왕과 왕씨 부인 소생인 김은열의 후손으로 되어 있다.
20大家 功臣
《신라삼성연원보》에는 신라개국공신20대가(新羅開國功臣二十大家) 표제(表題)의 기록도 나와 있다. 20대가의 공신은 백선장(白善長), 고영시(高靈是), 이두창(李頭昌), 임의신(任儀信), 지충강(地忠江), 김관령(金寬齡), 정선엽(丁善燁), 정지석(鄭之碩), 홍식(洪息), 양선태(梁善泰), 조공흠(趙公欽), 조익관(趙益寬), 양지백(梁之伯), 조대정(趙大正), 추자평(秋子平), 임동방(林彤芳), 강이태(康二太), 신초시(申初是), 한영구(韓寧龜), 이형익(李衡翊) 등이다.
이들 20대가에 대해서 간략한 설명도 있었다. 이 설명을 적어보면 백선장은 벼슬이 태평대위(太平大位)이고 변한(弁韓)에서 항복해 온 공이 있다고 한다. 고영시는 벼슬이 중랑(中郞)이고 역시 변한에서 투항해 온 공이 있다고 한다. 이두창은 벼슬이 우장군(右將軍)으로 옥저(沃沮)에서 말(馬)을 헌납해 온 공이 있고, 지충강은 벼슬이 평장사(平章事)로 역시 옥저에서 말을 헌납해 온 공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여기에 언급된 벼슬 그 자체가 당시 신라나 옥저, 고구려에 있었는지 의문이다. 정지석, 홍식, 양선태 등 몇 명은 고구려 왕 고주몽(高朱蒙)이 화친을 청하게 한 공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 기록에 의하면 신라 개국 때 이미 백(白), 고(高), 이(李), 임(任) 등의 성씨가 있었다는 것이 된다. 하지만 이는 6촌(村) 출신의 여섯 성씨(李, 鄭, 崔, 孫, 裵, 薛)만 나오는 《삼국사기》의 기록과는 다르다.
《신라삼성연원보》에 의하면, 김씨 성의 경우는 신라에서 최초로 김씨 성을 가졌다는 김알지(金閼智) 이전에 옥저에서 말을 가지고 와 헌납하였다는 김관령이 최초의 김씨가 된다.
麻衣太子와 太守 金謙用
《신라삼성연원보》의 저자 김경대의 이름이 등재되었다는 경주 김씨 족보는 1924년에 발행한 갑자보(甲子譜)였다. 이 족보도 그가 발행한 것이었다. 그런 그가 어찌 조선 선조 때 출생이라 하겠는가. 갑자보는 경주 김씨 벽동파(碧潼派) 중심으로 발행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경주 김씨 전체의 족보는 아니었다.
이 족보 발행 시기는 일제강점기였다. 일제강점기에 각 성씨에서 위보가 많이 나왔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국립중앙도서관이 갖고 있는 김경대의 《신라삼성연원보》에는 소화 9년, 즉 1934년에 발행한 것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리고 재발행이란 표기는 없다. 역시 일제강점기에 나온 그것이 초판이었다.
《신라삼성연원보》는 또 마의태자 김일에게 겸용(謙用)이란 자(字)가 있고, 김해군(金海君)이란 군호까지 붙여놓았다. 당시에는 왕의 아들인 태자(太子)가 일반 백성들이나 신하들처럼 이름 외에 자(字)를 갖지는 않았다. 더욱이 신라에서는 군호 같은 게 없었다. 설사 고려 조정에서 내려준 군호라 하여도 마의태자에게 군호가 있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고려사》에서 태조 재위 14년의 기록을 보면, “신라왕이 태수(太守) 겸용(謙用)을 보내어 다시 고려왕과 만나기를 청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동국사략(東國史略)》에도 태수 겸용이란 이름이 보인다. ‘태수’는 신라시대 큰 고을의 수장(首長)을 칭하는 벼슬이었다. 김경대는 ‘태수’라는 벼슬을 ‘태자’로 오인하면서, ‘겸용’을 마의태자의 자(字)라고 했을 가능성이 있다.
《고려사》 태조편에 보면 “왕이 어전에서 백관들을 모아놓고 의례를 갖춰 왕의 맏딸 낙랑공주를 신라왕의 아내로 삼았다”는 내용과 “(경순왕) 김부(金傅)를 정승으로 임명하여 품위(品位)가 태자 이상으로 되게 하고 1년 녹봉을 1000석씩 주었으며 신란궁(神鸞宮)을 지어주고 그 시종들을 전부 등록시켜 토지와 녹봉을 넉넉히 주었으며 신라국을 폐지하여 경주(慶州)로 바꾸고 그 지역을 김부에게 줘 식읍(食邑)으로 삼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김부는 경순왕의 이름이다. 경순(敬順)이란 시호는 고려 5대 경종 재위 3년(978)에 사망하였을 때 내린 시호였다.
어떤 책이 僞譜인가?
이처럼 김경대의 저서 《신라삼성연원보》의 내용은 매우 의심스럽기 때문에, 이 책은 일제강점기에 많이 나왔던 위보, 즉 가짜 족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조선 후기에 성씨 관계나 족보 관계의 자료들을 모아 객관적으로 편찬한 책으로는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만성대동보(萬姓大同譜)》 《청구씨보(靑丘氏譜)》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 등이 있다. 이 중에서 《신라삼성연원보》를 인용한 책은 없다. 김경대가 조선 선조 때 태어난 사람이고 《신라삼성연원보》가 조선 인조 때 발행되었다면 이들 저서들도 당연히 이 책을 인용했어야 할 것이다.
족보의 허구 여부를 판별하는 몇 가지 방법이 있다. 부인에 대한 기록이 없고, 조상이 어느 왕조에 탄생하였거나 존재하였는지 하는 기록도 없이 막연하게 조상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에다 1세(一世), 2세(二世)니 하는 대수(代數) 표기만 한 것이나, 조상의 벼슬을 표기하면서 어느 왕조의 관직이란 기록이 없거나 실재했던 벼슬과 다른 벼슬 이름이 기록되어 있으면, 그 기록은 의심해 봐야 한다. 예를 들어 신라시대 조상으로 기록해 놓고 고려의 벼슬로 표기해 놓은 경우 믿을 수 없는 것이다.
신라계 김씨 성의 어느 문중은 자신들을 마의태자의 직계 후손이라 하며 그들의 족보에다 마의태자를 시조로 표기해 놓았다. 그리고 마의태자에게는 아들이 두 명 있는 것으로 기록하였다. 이 기록에서 신라가 망할 때 마의태자는 몇 살이었고, 부인이 누구인가 하는 것은 없다. 그때 부인이 있었다면 어린 자식이 있었을 것이고, 함께 개골산으로 들어가 망국(亡國)의 한(恨)을 품고 고려를 등지고 살았을 것이다. 그 자식들은 자라서 뒷날 후손들을 두었을 것이다. 그 후손들은 본관제도가 등장한 고려에서 어느 김씨 성의 본관 시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내력의 기록은 그들 족보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심지어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金富軾)을 마의태자의 직계 후손으로 기록해 놓은 족보도 있다. 김부식이 마의태자의 직계 후손이었다면 왜 《삼국사기》를 지으면서, 마의태자의 이름과 행적 기록, 부인과 아들들에 대한 언급을 해놓지 않았겠는가? 이런 족보 역시 위보라고 할 것이다.
族譜도 역사다
이런 허구의 족보는 비단 일부 김씨 문중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에도 옛날에 나온 족보를 바탕으로 현재의 후손 이름을 올리는 족보 제작이 성행하고 있다. 하지만 족보에 나타난 오기를 바로잡으려는 노력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내용에 오류를 발견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선대의 조상이 이미 만들어 놓은 족보를 후손이 고치는 것은 불경(不敬)하다는 생각에서 그러하기도 할 것이다.
한국인은 족보를 중시한다. 여기에는 숭조사상(崇祖思想)이 내면에 깔려 있다. 그렇다고 해서 《신라삼성연원보》처럼 심하게 사실을 왜곡해서야 되겠는가?
족보는 씨족(氏族) 간에 만들어진 계통(系統)의 기록으로, 일족(一族)의 역사다. 나라의 역사를 왜곡해서 전할 수 없듯이, 한 가문의 역사도 거짓된 내용을 후세에 전할 수는 없다. 가짜 족보는 조상과 자신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책자의 내용이 사실인지 여부에 관해서는 논란이 많았다. 기존의 정사(正史)나 야사(野史) 같은 데서는 찾아볼 수 없는, 과장하거나 조작으로 보이는 기록들이 적잖게 있다는 것이 이 책의 사실성을 부정하는 사람들의 지적이었다. 비록 보학계의 저술이라 해도 우리 국사(國史)의 내용과 다른 내용을 받아들이기는 어렵다는 것이었다.
사실 보학(譜學) 관련 책에 나오는 내용은 나라의 역사 기록에서 볼 수 없는 게 많다. 각 집안에서는 자기들 가문의 선대(先代)에 관한 기록이라는 이유로 신뢰를 보내지만, 그중에는 검증되지 않는 것들이 적지 않다. 《신라삼성연원보》도 마찬가지다.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조선 인조 때 나왔다는 이 책의 저자는 조선 말기에 출생한 김경대(金景大) 일명 김종거(金鐘鐻)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경주 김씨(慶州 金氏)의 한 종인(宗人)이었다. 그가 《신라삼성연원보》를 발행한 시기는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인 소화(昭和) 9년, 즉 1934년이다. 발행처는 평안북도의 의주(義州)에 소재한 신라박석김연원종약원(新羅朴昔金淵源宗約院)이란 곳이었다. 일제 치하이던 1930년대는 각 성씨의 문중(門中)에서는 우후죽순(雨後竹筍)처럼 족보를 발간하던 때였다.
《신라삼성연원보》 서문의 일부. |
族譜의 허위 기록들
《신라삼성연원보》에 수록되어 있는 내용의 목록 부분. |
족보를 편찬할 때에는 조상들의 이름, 출생, 부인(妻), 사망, 묘소 등도 기록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시한 것은 생전의 벼슬, 시호(諡號) 또는 군호(君號) 등이었다.
시호는 사망 후 나라에서 명신(名臣)이나 공신(功臣)에게 특별히 내려주는 칭호였다. 이를테면 충무공(忠武公)이니 문정공(文正公)이니 하는 것이었다. 시호는 당사자의 생전 품행과 업적을 참고하여 내렸다.
군호는 일명 봉호(封號)라고도 한다. 계림군(鷄林君)이니 의성군(義城君)이니 하는 출신 지역의 이름에 ‘임금’이란 뜻의 글자인 군(君)을 붙인 칭호다. 당사자 생전에 임금이 정승 등 고관(高官)이나 공신들에게 내리는 것이 관례였다.
조상이 시호나 군호를 받았다는 기록은 후손들에게는 큰 자랑이고 문중의 긍지였다. 때문에 족보에 자기들의 조상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근거 없이 시호와 군호를 조상에게 붙여놓기도 했다. 《신라삼성연원보》에도 그런 경우가 많다.
敬順王의 후예들?
《신라삼성연원보》에서 신라 경순왕과 아들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부분. |
경순왕에게는 아들이 한 명 있는 걸로 되어 있는데, 그가 세칭 마의태자(麻衣太子)라 하는 기록은 없다. 이 기록과는 다르게 야사류(野史類)에서는 마의태자와 범공(梵空)이란 승명(僧名)의 아들이 있는 것으로 전해져 온다. 이에 의하면 박씨 소생의 아들은 두 명이었다는 것이 된다. 그런데 작금(昨今)에 와서는 신라계 김씨 성들, 특히 경순왕의 후손들이라 하는 집안에서 만든 족보에는 경순왕에게 명종(鳴鐘)이라는 아들이 하나 더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나라의 역사에서 보는 기록들과 다르기 때문에 당연히 의문을 갖게 되지만 경주 김씨들은 그 족보의 기록 내용을 믿고 있었다.
《신라삼성연원보》에서는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에게 석씨 부인과 아들들이 있는 것으로 기록하였는데, 이 기록에 대해 사학계(史學界)에서는 물론 많은 신라계 김씨 사람들도 부정적(否定的)으로 보았다. 위보(僞譜)라는 것이다.
《신라삼성연원보》는 경순왕의 석씨 부인을 송희부인(松希夫人)이라 호칭하면서, 5명의 아들들 이름까지 기록해 놓았다. 그 아들들의 이름은 전(佺), 요(瑤), 곤(琨), 영(英), 분(奮)이었다. 이 이름들에서 대뜸 느낄 수 있는 것은 마치 소설에서나 보는 이름들 같다는 것이다. 전은 신선이란 뜻이고, 요와 곤은 옥(玉)이란 뜻이다. 영은 꽃부리란 뜻이 있고, 분은 떨친다는 뜻이다. 이 이름들을 보면 ‘분’이라는 이름을 제외하면, 석씨 부인 소생은 한결같이 여인들의 이름 같은 느낌이 든다.
麻衣太子의 실체는?
이 책에는 그들 다섯 명의 아들에 대한 간단한 설명도 있다. 전은 첫째 아들로 부왕이 고려에 항복하는 것을 극구 반대하다가 들어주지 않자 통곡하며 자살하였다 한다. 둘째인 요는 완산군(完山君)으로 봉해지고 시호는 문의공(文宜公)이었으며 골산 김씨(骨山 金氏)라는 성을 받았다 한다. 곤은 첫째인 전의 설명과 같은 내용이면서 단지 둘째처럼 골산 김씨로 본관의 성을 가졌다고 하였다. 영에 대해서는 광주군(廣州君)으로 군호를 받았고 또한 본관을 하사받았는데 대구 김씨(大邱 金氏)였다 하는 설명이다. 다섯째인 분은 부왕이 고려에 항복하는 것에 역시 극구 반대하였는데 마찬가지로 들어주지 아니하자 개골산으로 들어갔고 삼대군(三大君)이란 군호를 하사받아 역시 골산 김씨가 되었다고 한다. 분에 대한 설명에서는 마의태자가 개골산(금강산)에 들어간 경우와 같았다. 그러면 두 명의 경순왕 아들이 개골산으로 들어가 속세를 등지고 살았다는 것이 된다.
《신라삼성연원보》의 기록 중에는 마의태자의 이름을 일(鎰)이라 기록한 경우도 있다. 마의태자의 본명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에는 없다. 오로지 마의태자라는 별칭만 보인다. 그런데 《신라삼성연원보》에는 마의태자의 이름이 나오는 것이다.
마의태자의 본명은 그간 누구도 모르고 있었다. 그러다가 조선조 말기에 경순왕의 왕씨 부인(낙랑공주, 고려 태조 왕건의 딸) 소생인 김은열(金殷說)의 묘지를 개성 어느 산 아래서 발견하고 나서 그 묘지(墓誌)의 기록을 보고 마의태자의 이름이 알려졌다. 그때가 조선 정조 8년(1784)이었는데, 그 이전까지는 마의태자의 본명이 어느 자료에도 나와 있지 않았었다.
‘骨山 金氏’를 아십니까?
《신라삼성연원보》의 저자 김경대는 경진생(庚辰生)으로 조선 선조 13년(1580)에 출생하였다고 하기도 하고, 조선 고종 17년(1880)에 출생했다고 하기도 한다. 만일 김경대가 김은열의 묘지가 발견되기 전인 조선 선조 때 사람이라면, 그는 어떤 자료를 통해 마의태자의 이름이 김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까? 물론 그가 조선 고종 때 태어났다면, 그도 김은열의 묘지에 나타난 기록을 가지고 마의태자의 이름을 알게 되어 이 사실을 《신라삼성연원보》에 기록해 놓았다고 할 수 있다.
혹자는 경주 김씨의 어느 한 파(派)의 문중에서 《신라삼성연원보》를 처음 발행한 것은 조선 인조 10년인 1632년이며, 저자 김경대는 선조 때 태어났다고 주장한다. 김경대도 경주 김씨지만, 그도 다른 경순왕의 후손들처럼 1784년 이전에는 마의태자의 이름을 모르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마의태자의 이름이 김일이라는 사실은 김은열의 묘지를 제외하면 어떤 역사기록에도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때문에 김경대는 고종 때 출생한 사람으로 《신라삼성연원보》는 일제강점기 때 처음 나온 것으로 보아야 한다.
김경대의 《신라삼성연원보》는 김은열을 김감(金鑑)이라 표기하기도 했다. 김감은 경순왕과 왕씨 부인 소생이다. 하지만 경순왕 후손들 족보에서 김은열을 김감이라고 기록한 다른 기록은 없다. 그렇다면 김경대가 김은열을 김감이라고 한 기록은 오기(誤記)가 아니면 조작일 것이다.
석씨 부인 소생의 아들들에 대한 기록도 역시 다른 경순왕의 후손 족보에서는 볼 수 없었다. 이 역시 조작일 것이다. 골산 김씨라는 것 자체가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이 ‘골산’이라는 말은 금강산의 별칭인 개골산에서 나온 것이다. 한국의 성씨 중에서 지역이 아니라 산(山) 이름을 가지고 본관으로 삼은 성씨는 없다. 이 역시 《신라삼성연원보》가 위작(僞作)이라는 근거이다.
석씨 부인의 아들들이 완산군이니 삼대군이니 하는 군호를 받았다는 것 역시 거짓이다. 신라에는 그 같은 군호제도가 없었다. 설사 고려에서 받은 것이라 하여도 그들이 고려를 등졌기 때문에, 고려에서 그 같은 군호를 내려줄 리 만무했다.
《신라삼성연원보》에는 경순왕의 아들 영이 대구 김씨로 성을 받았다고 하였는데, 대구 김씨 족보 중에는 그가 시조이거나 조상의 한 사람이라고 기록된 게 없다. 대구 김씨의 족보에 의하면, 대구 김씨의 시조는 경순왕과 왕씨 부인 소생인 김은열의 후손으로 되어 있다.
20大家 功臣
《신라삼성연원보》에는 《삼국사기》에 나오는 신라6촌의 촌장들은 상단에 ‘신라좌명공신 6부 대인’으로 기록되어 있고, 아래에는 ‘신라개국공신 20대가’라는 것이 첨부되어 있다. |
이들 20대가에 대해서 간략한 설명도 있었다. 이 설명을 적어보면 백선장은 벼슬이 태평대위(太平大位)이고 변한(弁韓)에서 항복해 온 공이 있다고 한다. 고영시는 벼슬이 중랑(中郞)이고 역시 변한에서 투항해 온 공이 있다고 한다. 이두창은 벼슬이 우장군(右將軍)으로 옥저(沃沮)에서 말(馬)을 헌납해 온 공이 있고, 지충강은 벼슬이 평장사(平章事)로 역시 옥저에서 말을 헌납해 온 공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여기에 언급된 벼슬 그 자체가 당시 신라나 옥저, 고구려에 있었는지 의문이다. 정지석, 홍식, 양선태 등 몇 명은 고구려 왕 고주몽(高朱蒙)이 화친을 청하게 한 공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 기록에 의하면 신라 개국 때 이미 백(白), 고(高), 이(李), 임(任) 등의 성씨가 있었다는 것이 된다. 하지만 이는 6촌(村) 출신의 여섯 성씨(李, 鄭, 崔, 孫, 裵, 薛)만 나오는 《삼국사기》의 기록과는 다르다.
《신라삼성연원보》에 의하면, 김씨 성의 경우는 신라에서 최초로 김씨 성을 가졌다는 김알지(金閼智) 이전에 옥저에서 말을 가지고 와 헌납하였다는 김관령이 최초의 김씨가 된다.
麻衣太子와 太守 金謙用
《신라삼성연원보》의 저자 김경대의 이름이 등재되었다는 경주 김씨 족보는 1924년에 발행한 갑자보(甲子譜)였다. 이 족보도 그가 발행한 것이었다. 그런 그가 어찌 조선 선조 때 출생이라 하겠는가. 갑자보는 경주 김씨 벽동파(碧潼派) 중심으로 발행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경주 김씨 전체의 족보는 아니었다.
이 족보 발행 시기는 일제강점기였다. 일제강점기에 각 성씨에서 위보가 많이 나왔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국립중앙도서관이 갖고 있는 김경대의 《신라삼성연원보》에는 소화 9년, 즉 1934년에 발행한 것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리고 재발행이란 표기는 없다. 역시 일제강점기에 나온 그것이 초판이었다.
《신라삼성연원보》는 또 마의태자 김일에게 겸용(謙用)이란 자(字)가 있고, 김해군(金海君)이란 군호까지 붙여놓았다. 당시에는 왕의 아들인 태자(太子)가 일반 백성들이나 신하들처럼 이름 외에 자(字)를 갖지는 않았다. 더욱이 신라에서는 군호 같은 게 없었다. 설사 고려 조정에서 내려준 군호라 하여도 마의태자에게 군호가 있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고려사》에서 태조 재위 14년의 기록을 보면, “신라왕이 태수(太守) 겸용(謙用)을 보내어 다시 고려왕과 만나기를 청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동국사략(東國史略)》에도 태수 겸용이란 이름이 보인다. ‘태수’는 신라시대 큰 고을의 수장(首長)을 칭하는 벼슬이었다. 김경대는 ‘태수’라는 벼슬을 ‘태자’로 오인하면서, ‘겸용’을 마의태자의 자(字)라고 했을 가능성이 있다.
《고려사》 태조편에 보면 “왕이 어전에서 백관들을 모아놓고 의례를 갖춰 왕의 맏딸 낙랑공주를 신라왕의 아내로 삼았다”는 내용과 “(경순왕) 김부(金傅)를 정승으로 임명하여 품위(品位)가 태자 이상으로 되게 하고 1년 녹봉을 1000석씩 주었으며 신란궁(神鸞宮)을 지어주고 그 시종들을 전부 등록시켜 토지와 녹봉을 넉넉히 주었으며 신라국을 폐지하여 경주(慶州)로 바꾸고 그 지역을 김부에게 줘 식읍(食邑)으로 삼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김부는 경순왕의 이름이다. 경순(敬順)이란 시호는 고려 5대 경종 재위 3년(978)에 사망하였을 때 내린 시호였다.
어떤 책이 僞譜인가?
《신라삼성연원보》 후면. 저자의 이름과 발행처, 발행연도가 표시되어 있다. |
조선 후기에 성씨 관계나 족보 관계의 자료들을 모아 객관적으로 편찬한 책으로는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만성대동보(萬姓大同譜)》 《청구씨보(靑丘氏譜)》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 등이 있다. 이 중에서 《신라삼성연원보》를 인용한 책은 없다. 김경대가 조선 선조 때 태어난 사람이고 《신라삼성연원보》가 조선 인조 때 발행되었다면 이들 저서들도 당연히 이 책을 인용했어야 할 것이다.
족보의 허구 여부를 판별하는 몇 가지 방법이 있다. 부인에 대한 기록이 없고, 조상이 어느 왕조에 탄생하였거나 존재하였는지 하는 기록도 없이 막연하게 조상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에다 1세(一世), 2세(二世)니 하는 대수(代數) 표기만 한 것이나, 조상의 벼슬을 표기하면서 어느 왕조의 관직이란 기록이 없거나 실재했던 벼슬과 다른 벼슬 이름이 기록되어 있으면, 그 기록은 의심해 봐야 한다. 예를 들어 신라시대 조상으로 기록해 놓고 고려의 벼슬로 표기해 놓은 경우 믿을 수 없는 것이다.
신라계 김씨 성의 어느 문중은 자신들을 마의태자의 직계 후손이라 하며 그들의 족보에다 마의태자를 시조로 표기해 놓았다. 그리고 마의태자에게는 아들이 두 명 있는 것으로 기록하였다. 이 기록에서 신라가 망할 때 마의태자는 몇 살이었고, 부인이 누구인가 하는 것은 없다. 그때 부인이 있었다면 어린 자식이 있었을 것이고, 함께 개골산으로 들어가 망국(亡國)의 한(恨)을 품고 고려를 등지고 살았을 것이다. 그 자식들은 자라서 뒷날 후손들을 두었을 것이다. 그 후손들은 본관제도가 등장한 고려에서 어느 김씨 성의 본관 시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내력의 기록은 그들 족보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심지어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金富軾)을 마의태자의 직계 후손으로 기록해 놓은 족보도 있다. 김부식이 마의태자의 직계 후손이었다면 왜 《삼국사기》를 지으면서, 마의태자의 이름과 행적 기록, 부인과 아들들에 대한 언급을 해놓지 않았겠는가? 이런 족보 역시 위보라고 할 것이다.
族譜도 역사다
필자가 경순왕 世系에 대해 문의한 내용에 대한 국사편찬위원회의 회신. |
한국인은 족보를 중시한다. 여기에는 숭조사상(崇祖思想)이 내면에 깔려 있다. 그렇다고 해서 《신라삼성연원보》처럼 심하게 사실을 왜곡해서야 되겠는가?
족보는 씨족(氏族) 간에 만들어진 계통(系統)의 기록으로, 일족(一族)의 역사다. 나라의 역사를 왜곡해서 전할 수 없듯이, 한 가문의 역사도 거짓된 내용을 후세에 전할 수는 없다. 가짜 족보는 조상과 자신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첫댓글 ==근하신년== 새해에는 우리님 모두 웃을일이 풍성한-
-기분좋은 한해 되시길 기원합니다--- 건강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