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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 23.4 km
소요 시간 12h 20m 31s
이동 시간 11h 0m 25s
휴식 시간 1h 20m 6s
평균 속도 2.1 km/h
최고점 1,741 m
총 획득고도 1,523 m
난이도 힘듦
프로로그
김삿갓 김병연의 방랑생활
1807년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나 1863년 사망했다. 스무살 무렵에 지방 과거시험인 향시에서 홍경래란 때 적에게 목숨을 구걸하여 살아 남았던 김익순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글을 써서 시험에 합격한 후 어머니로부터 김익순이 자신의 할아버지라는 말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조상을 욕한 죄로 하늘을 쳐다볼 면목이 없다며 큰 삿갓을 쓰고 금강산 등 전국을 유랑하던 중 잠시 집에 들어와 1년간 머물렀으나, 다시 방랑길에 올라 57세인 1863년 전라도 화순에서 사망할 때까지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유랑중에 뛰어난 문장력과 해학으로 많은 시를 남김으로써 방랑시인 김삿갓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의 일대기를 보면 김병연은 자신의 죄를 뇌우치는 심정으로 관직에 오르지 않은 채 편안한 집안에조차 들어오지 않고 방랑생활을 이어간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는 가족에 대한 책임을 외면하고 자신의 처지를 핑계삼아 전국 방방곡곡 유람을 다닌 무책임한 사람이었다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의 어머니는 시아버지가 역적으로 참수되자 네 명의 아들을 데리고 집안의 하인이었던 사람을 따라 황해도 곡성으로 피신해 가던 중 남편이 죽는 등 극심한 트라우마에 시달리지만 자식들에게 교육을 시키면서 잘 키워 놓고 결혼까지 성사시켰다. 그런 어머니와 부인과 자식을 버리고 혼자의 몸으로 방랑길에 올랐다는 것은 일반적인 사례라고 보기 어렵겠다. 설사 그가 살았던 시대가 유교 봉건주의 사회였다고 하더라도 충과 효를 중요시하는 시대정신에 배치된다고 볼 수 있겠다.
다른 한편 그의 행동을 이해한다면 그는 생의 허무함을 일찌감치 깨우치고 사회적으로 고정된 틀에 묶이지 않고 자유분방한 사고를 갖고 있었던 바 할아버지를 비난하는 백일장 사건이 일어나면서 마음에 충격이 더해졌을 것으로 보인다. 굳이 성인에 비교하는 것은 아니지만 석가모니가 편안한 집안 환경을 버리고 출가한 것이나 예수가 출가하여 사막을 방랑한 것이나 하는 일들이 어찌 보면 짧은 인생에 대한 허무함과 덧없음을 깨닫고 나름대로 큰 몸부림으로 대응한 것으로 보인다.
김병연은 그런 사건이 없었더라도 작은 관직에 머물지 않고 언제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끊임없는 방랑생활을 하지 않았을까 나름 상상해본다. 그러나 그렇게 큰 몸부림으로 일생을 방황했어도 결국 방랑시인 김삿갓이라는 이름만 후대에 남겼을 뿐 한 줌 흙이 되어 강원도 영월에 묻히고 말았으니, 과연 그런 고민과 몸부림인들 무슨 가치가 있었을까. 방랑생활을 하지 않고 집안에 충실하여 가족에게 잘 하고 자식을 키워내는 일에 전념했다면 또 다른 훌륭한 업적을 낳을 수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시쳇말로 인생은 복골복이 아니던가. 즉, 이래도 한 평생 저래도 한 평생이라면 굳이 정해진 삶의 틀에 갇혀서 살다가 죽느니 몸이 고되더라도 새장을 벗어나 훨훨 날아 보는 것이 멋지지 않을까 상상해 본다. 물론 어떤 결정을 하더라도 그 삶에 충실하게 최선을 다해 사는 것이 중요하겠다. 말하자면 거지생활을 하더라도 적극적으로 해서 굶는 일이 없도록 하고, 기업을 운영할라치면 열심히 해서 직원들이 만족할 수 있도록 경영해야 할 것이다.
언뜻 독일어 교과서에 실렸던 글이 생각난다. 열 마리의 염소가 있었는데 한 마리가 우리를 뛰쳐 나가 산위로 올라가 뛰어 놀다가 밤에 늑대에게 물려가고 말았다. 이를 두고 학생들끼리 과연 어떤 것이 나을까 토론을 하는데 밖에 나가면 늑대에게 잡혀먹을 것을 뻔히 알고 있는 상황에서 자유가 억압당하더라도 우리안에 있겠다는 학생과 하루를 살더라도 자유롭게 사는 것을 선택하는 학생, 그리고 이를 절충하여 낮에는 산에 가서 자유롭게 풀을 뜯으며 놀다가 밤이 되면 다시 우리로 돌아오겠다는 학생들로 의견이 분분하였다. 과연, 나의 삶은 어떤 것일까. 자유로운 영혼을 갖고 있으면서 안전한 사회의 규범속에 살아가는 절충적인 삶을 사는 것이 아닐까.
새삼 과감하게 우리를 박차고 뛰쳐나간 김병연 김삿갓의 삶이 나에게 크게 와 닿는다.
산행기
지난 8월 26일 엄청난 폭우와 벼락의 위험으로 천왕봉에 오르려던 백두대간 산행이 중도에 로타리산장에서 중단되었던데 대한 아쉬움과 지리산과 친해지려는 생각에 추석명절 전 무박산행을 신청했다. 지리산은 규모가 큰 탓에 한번에 다 둘러 볼 수는 없고 여러 번 각기 다른 코스로 산행을 해야 그나마 산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설악산은 서울에서 가까이 위치하고 있어 자가용이나 대중교통이나 산악회 버스를 이용하여 수월하게 갈 수 있으나 지리산은 무박산행이나 숙박산행이어야 하는 까닭에 아직 제대로 친해지지 못했었다. 여느 산처럼 늘 갔다오면 좋고 그 여운이 오래 남는 곳이 지리산이다.
이제까지 다닌 산중에 어느 산이 제일 멋있던가요? 나는 산에서 만나는 산객중에 등산을 오래 했다는 사람에게 늘 이런 질문을 한다. 나는 마음속으로 설악산을 제일 꼭대기에 올려 놓고 질문을 하는데 많은 사람들의 대답은 의외로 지리산으로 쏠린다. 산이 크면서도 기암괴석으로 커다란 성을 쌓아 놓은 듯한 설악산이 밋밋하면서 크기만 한 지리산에 뒤진단 말인가. 백두대간을 하면서 3번 지리산행을 하고 산악회를 따라서 한 번 천왕봉에 올랐었고 첫 직장 휴가때 어쩌다 한 번 둘러 보았던 지리산이다 보니 아직 지리의 참맛을 모르는 것이 오히려 당연하다는 생각을 해 본다. 그리고 그런 지리산을 좀 더 자주 찾아 제대로 산맛을 보고 싶다.
함양휴게소에서 이른 아침식사를 위해 한 번 들른 후 산악회 버스는 성삼재까지 끙끙대며 올라가 종주팀을 내려주고 다시 그릉그릉 소리를 내며 반선계곡을 내려와 백무동에 나머지 산객들을 내려 놓았다. 추석연휴 시작이라서 그런건지 버스에 탄 인원이 많지 않다. 종주팀이 열한명이고 백무동팀이 또 그정도 된다. 지난 번 백무동에서 장터목산장을 거쳐 천왕봉 코스를 걸었으니 이번에는 한신계곡을 통해 세석까지 갔다가 시간이 허락된다면 지난번 백두대간 코스에서 누락된 벽소령까지 갔다가 되돌아서 천왕봉을 거쳐 중산리로 하산할 계획이었다.
새벽 3시 45분 버스에서 내려 지체없이 전등을 밝히면서 세석평원쪽으로 방향을 잡고 걸었다. 사방이 고요한데 식당에서는 손님맞을 준비를 시작하는가 보다. 편의점에도 불빛이 환하게 켜져 있다. 국립공원 관리소를 지나면서 속세의 불빛은 내 머리위의 헤드랜턴과 손전등 뿐이다. 오른쪽 계곡에서는 물흐르는 소리가 요란하다. 어제까지 내린 빗물이 계곡을 가득 메운 채 흘러간다. 풀벌레 우는 소리는 계절이 가을로 성큼 다가 왔음을 확인시켜 준다. 이제 찬 바람이 불면 각자 정해진 곳에 알을 까 놓고 자기 할 일을 다한 양 사라져 갈 것이다. 그러니까 저 소리는 벌레들이 우는 소리가 아니라 암컷이 수컷을 부르는 세레나데인 것이다. 전등불에 비친 칡잎이 하얗게 빛난다. 바람이 나뭇잎을 한 바탕 휘젓고 달아난다. 하늘에는 오리온 자리 큰개자리 등 눈에 익은 별자리가 수억년을 지켜온 그자리에 앉아 꾸벅 꾸벅 졸고 있다. 그리고 나는 어두운 낯선 산길을 따라 걷는다.
벌써 30년은 되었나 보다. 1986년 여름 휴가때 승찬이와 영윤이 그리고 경숙씨랑 같이 이곳 한신계곡에 텐트를 치고 밥을 지어 먹고 잠을 잔 적이 있다. 그 때의 기억을 회상하며 걸어가는데 주변은 칠흑 같은 어둠에 싸여 있으니 쉽게 기억이 이어지지는 않는다. 크게 울리던 징소리도 귀를 째는 듯한 꽹과리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30년의 세월이 그리 쉽게 다가올 수는 없는 노릇이다. 더군다나 그 때는 무더운 여름날이었었다.
길가에 석산(꽃무릇)꽃이 랜턴빛에 화들짝 놀란다. 누가 일부러 심어 놓은 것인지 빨간 꽃이 군락을 이뤄 피어 있다. 지난 번 백두대간 반야봉 코스에서 보았던 촛대승마도 이슬을 흠뻑 먹은 채로 고개를 푹 숙이고 서 있다. 그 옆에는 산수국이 수정을 다 마쳤다는 표시로 헛꽃을 뒤집은 채 열매가 익어간다. 모두 가을을 준비하는 바쁜 일상을 시작하려 한다.
다른 이들은 모두 장터목으로 오른 모양인데 세석으로 오르는 산객과 조우했다. 이미 백두대간과 정맥 지맥을 다 마치고 백두대간길의 산이름 등에 관한 글을 책으로 엮어 냈다고 하는 현오 권태화님이다. 백무동(百巫洞)에는 용유담이 있고 그 가까운 곳에 용에게 제사를 지내는 용유당이 있었으며 그와 더불어 숱한 무당들이 이 백무동 자락에 모여 살면서 '무당이 많은 마을'이란 뜻으로 백무동이라 불렀다는 이야기에서부터 한신계곡의 유래 등에 관해 재미나게 설명해 주었다. 자유인 산악회 한문희 총대장님도 알고 산행을 하면서 눈에 익은 시그널의 주인공 준.희 님 등 수 많은 산행 고수들을 꽤고 있다. 지리산 산신령을 만난 것 같았다. 영신대, 운장바위, 한신바위 등 내가 모르는 지명을 술술 쏱아내는 모습에 고수의 카리스마가 느껴진다.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따라가도 괜챦은지 물어보니 내 걷는 것을 보고 그만하면 되었다며 흔쾌히 허락한다.
어두운 계곡길에 간간이 폭포수 소리가 들리고 산길은 서너 차례 다리위로 계곡을 건넌다. 최근 비가 많이 내린 때문인지 물흐르는 소리가 장관이다. 랜턴으로 비춰봐도 물흐르는 모습은 뚜렷하지 않다. 무박산행의 단점이다. 이 한신계곡을 낮에 올랐으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물과 나무와 바위가 조화를 이루며 펼쳐진 계곡의 비경을 포기해야 한다.
지리산에 관한 현오님의 지식은 광대하다. 한신계곡 이름은 지리 주 능선에 있는 한신바위에서 유래된 것이며 한신바위는 또 중국 초한지의 한신장군을 숭모하는 무당들이 영험한 힘을 얻으려 바위에 이름을 붙여준 것일 거라 한다. 마찬가지로 관우 장군을 신으로 모시는 의미에서 운장바위가 생겨났다는 것이다. 세석평원(잔돌평원)에서 농사를 지었었다는 이야기며 천왕봉 아래 할미당이 있었는데 이를 지금의 노고단으로 옮기면서 이름도 한자어인 노고단으로 바꿨다는 이야기는 이미 들었던 것을 재확인해 준다. 나는 나름대로 세웠던 산행계획을 버리고 현오님을 따라 다니기로 마음먹었다.
그에게서 들었던 얘기 중에 우천 허만수에 관한 것이 흥미를 끌었다. 지리산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산신령 대접을 받는 사람이라고 한다. 1916년 진주에서 부유한 집안에 태어나 이미 10살 때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가 동정산악회에 가입하여 일본에 있는 산을 알게 되었다. 동정(童貞) 산악회의 성격상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는다는 원칙에 따라 결혼도 하지 않으려 함에 부모가 그를 귀국시켜 같은 동네 여인과 혼인을 시켰다. 다시 부인과 함께 일본으로 들어가 살면서 경도 전문대학에 입학하여 철학을 공부하였으나 1945년 그가 29살 되던 해 일제가 패망하여 우리나라가 독립하자 그는 부인과 함게 세 자녀를 데리고 진주로 돌아와 서점을 운영하였다. 그러나 서점 운영은 뒷전이고 산에 미친 나머지 2년 후에는 아예 서점 문을 닫고 홀로 가출하여 경남 의령에 있는 자굴산에 들어가 토굴을 파고 야인생활을 시작하였다. 또 다시 2년 후 그는 지리산 세석평전에 들어와 초막을 짓고 살았다. 지리산에 들어와 산 지 4년 째 되던 해 여름 그의 부인이 토담집을 찾아와 3일간 머물면서 이제 하산하여 같이 지내자고 설득하였으나 우천 허만수는 그 말을 듣지 않고 계속 산에 머물기를 고집하였다.
우천이 지리산에 머무는 동안 지도를 제작하고 자비로 안내판을 만들어 세웠으며 위험한 구간에는 나무 사다리 등을 설치하고 조난당한 사람들을 구출하고 또 사냥꾼들이 잡아가는 동물을 돈을 주고 사서 방생하거나 땅에 묻어 주었으며 지리산 꽃씨를 나눠주기도 했다. 그는 중산리 법계사 부흥을 위해 애쓰던 손(청화)보살과 천왕봉 아래 토굴에 살던 김순응 노인과도 서로 교분을 쌓으며 지냈다. 가끔 산에서 내려와 중산리 곰탕집에 들르면 맘씨 좋은 식당 주인이 영양보충을 시켜주었다. 또한 그는 진주까지 걸어서 다녀오기도 하였다. 우천의 맏딸( 허 덕임 진주 한평초등학교 교사 )은 한 달에 한 번 학교로 찾아 왔다고 말한다.
이런 내용은 내가 산행을 다녀온 후 인터넷을 검색하여 찾아낸 것들이다. 산행중에 현오가 우천에 대해 여러 번 언급하였지만 그의 행적에 대해 구체적인 내용이 없는지라 이렇게 검색하여 살펴보았으나 지금도 우천이 왜 가족을 떠나 지리산에 묻혀서 살아야 했는지, 그리고 왜 종국에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사라져 버렸는지, 그리고 제일 궁금한 것은 그가 지리산에서 33년간 지내면서 남겨 놓은 기록 ( 글이나 그림 등 )이 있는가 하는 것들인데 이에 대한 설명은 찾을 수 없었다. 모든 글이 위에 언급한 단순한 내용들이다. 즉, 그는 가족을 버리고 산에서 움막을 짓고 살만큼 지리산을 사랑했다는 것이다. 참으로 의아스러운 일이다.
어쨌든 나는 이번 산행에서 현오 권태호씨를 만나 우천 허만수와 더불어 점필재 김종직 등 선인들이 쓴 지리산 산행기에 대한 관심을 얻게 되었다.
이런 저런 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어두운 산길에 불을 밝히면서 가다 보니 어느덧 어스름하게 빛이 흘러 내려 위를 올려다 보니 산 마루금 위로 푸른 빛의 하늘이 보인다. 아침 여섯시가 가까워 지니 벌써 두시간 넘게 계곡길을 걸은 것이다. 산길 오른쪽에 자그마한 폭포가 하얗게 쏱아지고 물소리가 우렁차다. 주변 초목이 보이기 시작한다. 오래된 나무 뿌리가 바위를 덮고 있는데 그 나무 뿌리에는 푸른 이끼가 두텁게 끼어 있어 원시림의 면모를 가감없이 보여준다. 이제서야 내가 지리산에 들어와 있슴을 실감한다.
세석산장까지 700 미터 남았다는 이정목에서 산 능선까지는 가파르다. 숨을 세차게 몰아 쉬며 능선에 이르니 넓은 하늘이 푸르스름하게 열린다. 뒤돌아본 마천 고을과 앞쪽 거림 마을쪽 모두 산안개에 잠겨 있다. 능선에서 조금 내려서자 세석 대피소가 보인다. 산길에는 산오이풀이 져가고 있고 개쑥부쟁이와 산구절초가 앞다투어 피어 난다. 갈대도 이삭을 피워 가을을 준비한다. 이슬에 젖은 과남풀은 가을하늘보다 더 짙은 푸르름으로 빛난다.
세석 대피소는 토요일 아침인데도 한산하다. 이때쯤이면 응당 대피소에서 잠을 자면서 산행을 즐길 사람들이 많을 줄 알았는데 우리가 주방에 들어가 음식을 먹는 동안 산장에 머무는 사람은 한명도 안보이고 우리처럼 새벽에 산에 오른 사람들만 두 명 보았다. 우리는 각자 싸온 빵과 과일을 나눠 먹고 물을 마셨다.
그 이후의 여정은 현오님의 발걸음을 따랐다. 세석산장에서 천왕봉과 반대쪽으로 조금 올라가니 영신봉이다. 백무동에서 굿을 하다가 신의 음덕을 받지 못하면 우리가 걸어온 한신계곡을 따라 올라와 이 영신봉에서 기도를 이어갔을 것이라고 현오님이 설명해 준다. 거기에 한신봉이 있고 또 능선길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운장바위가 있다. 운장바위에 서서 보니 반야봉쪽으로 시야가 끝까지 이어져 노고단까지 눈에 들어온다. 그 반대쪽 천왕봉쪽은 마침 해가 천왕봉 위에 높이 떠 있는데 맑은 안개구름이 천왕봉 제석봉과 연하봉을 가볍게 덮고 있어 신비감이 돈다.
한신바위 위에 서서 서남쪽을 바라보며 ‘저 반야봉에서 쏟아지는 법문이 아래 산줄기를 타고 흘러내려 ㅎㅎㅎ산 (이름을 까먹었슴)밑으로 떨어지는데 그 법문을 받는 곳에 절을 지어 문수사라 이른다’고 현오님이 설명한다. 난 산그리메를 보면서 산이름을 꿰는 걸 보고 참 대단하다고 느낀다. 내 눈으로 보일 듯 말 듯 한 산줄기를 보고 저건 무슨 산이고 저쪽 능선은 무슨 능선이라면서 설명을 하는데 난 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보면서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이다.
이어서 영신사 뒤쪽에 위치한 좌고대라는 바위에 잠시 올라가 신비한 바위를 감상하고 171개의 계단길을 따라 급경사로 내려섰다. 반야봉쪽으로 향하던 우리의 발걸음은 이곳에서 끝이 나고 현오님은 왼쪽 수풀쪽을 가리키며 이곳이 예전에 다니던 산행길이라고 설명한다. 지금도 가끔 비탐방길을 찾는 사람들이 지나다닌 흔적이 흐릿하게 남아 있다. 그 비탐방길로 들어서서 조금 내려오니 꽤 너른 공터가 나온다. 영신사터라고 한다. 뒤쪽에는 가섭대라는 커다란 바위벽이 있는데 바위형상이 석가모니의 제자인 가섭이라 한다. 고려시대 일본의 해적이 쳐들어와 대장인 아지발도가 천왕봉 성모상과 이 가섭대를 칼로 내리쳐 목에 칼자국이 나 있다고 하는데 내 눈으로는 특이점이 보이지 않는다.
영신사터는 적어도 앞뒤로 3칸짜리 암자를 지을 수 있을 만큼 널찍한 공터인데 평소 이곳에서 비박하는 이들이 꽤 있다고 한다. 누군가 나무를 태운 흔적이 남아 있다. 풀밭주변에는 과남풀과 개쑥부쟁이 그리고 산수국 꽃이 피어 있다.
다시 옛길을 따라 세석쪽으로 오르는데 아침에 세석대피소 주방에서 눈인사한 산객이 맞은편길에서 내려오다가 우리와 마추진다. 우리는 서로 얼굴을 알아보고 인사하는데 그분 ( 이카루스 )은 대뜸 우천 선생의 기도처에 가보았느냐고 묻는다. 이에 현오님과 나는 오던 길을 되돌아가 이카루스가 안내하는 대로 우천 기도처를 찾아갔다. 커다란 바위아래 2단으로 돌을 쌓아 놓고 또 작은 단을 하나 더 만들어 매그러운 돌을 여러 개 심어 놓았다. 이카루스는 그 돌들을 어루만지며 기도를 드리는 모양새를 취한다. 옆에 있는 큰 바위 아래는 높지는 않지만 꽤 깊은데 그 안에 낙엽이 잔뜩 쌓여 있는 것이 동물이든 사람이든 추위를 피해 하룻밤 지내기에 큰 불편함이 없어 보인다.
이카루스와 헤어지고 그는 반야봉쪽으로 내려가고 우리는 그와 반대방향인 세석쪽으로 길을 잡았다. 수풀을 헤치고 조금 올라가자 정상적인 등산로와 만나고 그 길을 따라 아래쪽으로 또 내려가자 커다란 바위 (마치 설악산 흔들바위처럼 생겼다)가 앉혀진 깊은 낭떨어지가 보이는데 그곳이 창불대(唱佛臺)라 한다. 어떤 이는 자살바위라고 부르기도 한다는데 누가 여기까지 와서 자살을 할 만큼 만만해 보이지는 않는다. 설사 자살을 꿈꾸며 이곳을 찾아와도 오는 도중에 지쳐서 마음이 바뀔 것 같다. 더구나 그곳에서 보는 암름의 경관이 조선시대 수묵화를 보는듯 아름다워 아마도 흔히 얘기하는 죽을 정도로 아름답다는 표현이 와전되어 자살바위까지 이어진 것이 아닌가 싶다. 창불대라는 이름은 아름다운 경관이 마치 저 피안의 세계처럼 아득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 아닐까 여길 만큼 발 아래 펼쳐진 암봉과 그 위에 자란 소나무는 끝없이 펼쳐지는 산군의 그림자와 함께 지리산의 아름다움을 대변하는 듯 하다. 아직 단풍은 좀 이른 듯 하고 군데 군데 시닥나무가 부지런하게 먼저 산에 붉은 물감을 들인다.
창불대에서 청학연못을 찾아가는 길은 조금 험난하고도 길다. 낙남정맥길을 따라 거림방향으로 조금 내려가자 전망이 확 트여 동쪽으로는 천왕봉으로 이어진 지리 주능선이 보이고 남쪽으로는 낙남정맥 끝간곳 너머엔 겹겹이 싸인 산능선들이 아련하게 펼쳐지는데 양지바른 구석 한켠에 조그만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평소 고인과 함께 산행하던 동료들의 마음을 담아 61세 정정한 나이에 사고를 당해 고인이 된 사람을 추모하는 글이 적혀 있다. 정작 죽은 이는 아무 것도 알 수 없을 테고 실제로 천국이 있다 해도 그까짓 재 한 줌 땅에 묻는다고 고인의 혼이 이곳에 머물리 없다는 걸 산 사람들도 잘 알고 있을 테지만 이승에서 일어나는 일은 또 산 사람들의 몫이니 그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행동할 따름이다.
우거진 조릿대를 헤치고 또 길이 나지 않은 숲속을 걸어 작은 시내를 건너고 램블러 앱에 표시된 바위를 찾아 헤맨지 거의 한 시간 만인 10시 55분 마침내 청학연못에 도착했다. 숲에 들어가면 인터넷으로 앱을 작동시킬수도 없고 나무에 시야가 가려 멀리 바라볼 수도 없으니 대략 방향을 정하고 걷기만 해야 한다. 창불대에서 청학연못까지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으나 이처럼 숲속에 들어와 별다른 이정표 ( mile stone )가 없는 가운데 인터넷마저 작동하지 않으면 목표물을 찾는데 애를 먹을 수 있다.
청학연못은 촛대봉 아래에 있다. 커다란 바위 아래 길이 10 미터 너비 5 미터쯤 되어 보이는 연못인데 물이 맑고 그 안에 수초가 자라고 있다. 바위가 있는 북쪽을 제외한 세면이 나무숲으로 둘러 싸여 있고 연못 둑은 낮은데 그 위로 사람들이 다녀 길이 나 있다. 바위에 간 금은 언뜻 보면 꼭 호랑이 머리 모양이다. 이곳에 물고기가 살고 있을건지 현오님이 물어보는데 난 눈을 부릅뜨고 찾아봐도 물고기 움직임은 없다.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겨울에도 얼음아래 공간이 생길 테니 미꾸라지 같은 작은 물고기가 살기에 적당할 것처럼 보이지만 누가 일부러 물고기를 가져와 방생하지 않았다면 자생하지는 않을 듯 싶다.
다시 촛대봉을 향해 오르는 길은 사면이 트여 동쪽으로는 연하봉 너머 제석봉 천황봉까지 그리고 서쪽으로는 반야봉과 노고단까지 보이고 남쪽으로는 가까이 시루봉이 우뚝하고 그 왼편으로는 그 겹겹이 싸인 마루금이 끝도 없이 펼쳐진다. 전망 좋은 바위에 걸터 앉아 휴식을 취한다. 현오님이 오면서 휴게소에서 사온 떡이 허기진 배에 요기가 된다.
촛대봉은 여러가지 형상을 한 바위로 이뤄진 봉우리다. 가까이 세석평원이 내려다 보인다. 한때 산객들의 야영장으로 이용되었고 그 이전에는 이런 저런 사연으로 도시나 농촌에 살지 못하고 쫒겨온 사람들이 땅을 일궈 농사도 지어먹었다 한다. 세석(細石)이라는 말이 곧 잔돌이라는 뜻이니 이 너른 땅에 밭을 일궈 농사를 짓다 보면 잔돌이 오죽 많았겠나. 어느 시대에 이곳에서 농사를 지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평온해 보이는 이 세석평전은 오랜 시절 수많은 애환을 안고 있을 터이다. 지금은 세석 대피소에서의 숙박은 허용되지만 그 밖의 야영은 금지되어 있다. 옛날 야영지였던 곳은 철쭉과 수많은 야생화가 자라고 또 공단에서 심어 놓은 구상나무도 제법 크게 자랐다. 앞으로 10년쯤 지나면 구상나무가 더욱 커져 이 세석평원은 또 다른 풍경을 보여줄 것이다.
촛대봉 주변에는 사람들의 발길에 파헤쳐진 흙을 다시 퍼올리고 흘러내리지 않도록 나무둥치로 막고 군데군데 대나무를 꽂아 놓고 구절초와 개쑥부쟁이 씨를 뿌려 놓았는지 아주 훌륭한 화원이 만들어졌다. 이곳 지리산에는 가을꽃인 용담과 과남풀과 투구꽃도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촛대봉에서 비탐방길로부터 벗어나 정상탐방루트로 들어갔다. 현오님은 시간이 너무 지체되어 천왕봉까지 가지 말고 장터목에서 중산리로 하산할 것을 제안한다. 산에 가면 늘 정상을 밟아야 후련함을 느끼지만 오늘 산행은 정상을 밟은 것보다 더 소중한 것을 잔뜩 얻어가는 풍성한 산행인데다 내 체력도 어지간히 소진된 상태라 난 망설임 없이 동의했다. 오른쪽 발바닥에 물집이 생겼는데 손으로 피부를 떼어낸다는 것이 잘못하여 생살이 드러나게 된 후로 오래 걸으면 얇아진 피부가 다시 터져서 아파온다. 무의식적으로 오른발에 무리가 가지 않게 걷다 보니 왼쪽 발목이 시큰해지더니 그 통증이 왼쪽 무릎에서 허리쪽으로 이동하는 느낌이다. 그런 와중에 장터목에서 산행을 접고 하산한다고 하니 내딴엔 환영할 일이다. 앞으로 자주 올 터이니 지금 제석봉 천왕봉을 오르지 않는 것이 별수럽지 않다.
연하봉으로 넘어가는 길목이 제법 넓게 펼쳐지고 큰 나무가 없어 먼데까지 조망이 트였다. 길가의 풀들은 이제 색깔이 바래 가을색을 피우고 산비탈에는 시닥나무 단풍잎이 빨갛게 물들어 계절을 가을로 끌고 간다. 군데 군데 구상나무가 마치 크리스마스 트리처럼 아래는 긴 가지를 늘어뜨리고 위는 뾰족한 첨탑처럼 새 가지를 세우고 있다. 연하선경, 평소 안개구름이 얇게 드리워지면 주변의 산세와 함께 아름다운 그림처럼 멋진 풍경을 자아낸다는 지리산 10대 경관중 하나이다. 지금은 안개가 걷히고 맑은 가을햇살이 쏟아져 안개 못지 않은 아름다운 풍광을 연출한다. 아침나절 천왕봉 주변에서 노닐던 안개구름은 날개옷을 입은 듯 살포시 날아 올라 푸른 하늘에 옷고름을 헤치며 흘러간다. 천지사방 어느 곳을 보아도 아름다운 한폭의 그림이 펼쳐져 있다.
1시 30분 장터목 대피소에 도착했다. 옛날 야영객들에게 자리를 내주었던 너른 마당에는 무엇에 쓸 요량인지 커다란 저수조가 여러 개 놓여 있다. 진한 밤색 건물 지붕에는 눈에 띄지 않을 만큼 태양광 발전판막이 설치되어 있다. 경유를 써서 전기를 만들던 것을 이제는 태양광발전으로 일부 보충하는가 보다. 마당을 둘러싸고 하얀 쑥부쟁이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백무동에서 올라온 사람, 천왕봉에서 내려온 사람, 중산리에서 올라온 사람과 성삼재, 반야봉쪽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거쳐가는 곳인 만큼 다른 대피소에 비해 사람들이 많다. 그들의 얼굴 표정은 하나같이 밝다. 힘들어도 즐거운 것이 지리산 산행이다.
오후 5시에 출발하는 산악회 버스 시간에 맞춰 내려가는 것은 문제 없어 보인다. 내리막길을 만나자 현오님은 날개를 단 듯 발걸음이 빨라진다. 난 내리막길에 걸음을 빨리 할 수 없다. 간격이 점점 벌어지자 현오님이 길가에 앉아 기다리길 두어번, 난 그에게 먼저 내려가라 하고 느긋한 산행을 즐기기로 했다. 왼쪽 무릎 통증이 조금 더 심해진다. 배낭에서 소염진통제 한 알을 먹고 길가 바위에 앉아 쉬면서 여유를 부려본다. 길 옆으로는 풍부한 수량을 자랑하듯 계곡물이 세차게 흐르고 벼랑을 만나면 금새 커다란 폭포가 되어 포말을 뿌린다. 돌을 깔아놓은 등산로가 제법 가파르다. 거꾸로 중산리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이 숨을 몰아쉬며 옆으로 비껴간다. 힘들어도 기쁜 사람들, 그들은 한 주간 열심히 일하고 주말에 보상을 받으려 지리산을 찾아오는 사람들이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계곡은 넓어지고 집채만한 하얀 바위들이 계곡을 메우고 있고 그 사이 사이 세찬 물줄기가 곡예를 하듯 흘러 내린다.
3시 30분 칼바위에 이르기 전 천왕봉과 법계사에서 내려오는 길과 만난다. 중산리까지 1.3 km 남았다. 장터목에서 4 km 되는 길을 2시간만에 내려왔으니 앞으로 한 시간 채 걸리지 않고 산행을 마칠 수 있겠다. 이곳부터는 거의 평지성 산길이다. 길도 넓고 평탄한데다 다리 통증도 좀 가라 앉으니 걷기가 훨씬 수월해졌다. 옆에서 흐르는 계곡도 넓어지니 물흐르는 소리가 점점 작아진다. 그늘진 산길을 걸어가는 것이 마치 무성영화를 보는 듯 하다. 모든 것이 한가롭기만 하다.
마침내 4시에 통천길에서 나와 아스팔트 차도를 만났다. 길가 모퉁이에 우천 허만수를 기리는 추모비를 바라보는 마음이 전보다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山을 위해 태어난 山사람’, 하늘을 지붕삼아 풍찬노숙하면서 일생을 산에서 산 山사람이었다. 그에 대한 평가는 각자 다를 수 있겠지만 어쨌든 청년시절부터 수명을 다 할때까지 산속에 묻힌 채 일생을 살았다는 것은 분명히 일반인들과 크게 다른 삶이었다.
버스 탑승장소인 거북이 식당에 도착하자 벌써 샤워하고 술판을 펼쳐놓은 현오님이 반겨준다. 난 갈아입을 옷을 준비하지 않아 샤워를 할까 말까 망설이는데 친절하게 샤워장 위치까지 가르쳐 주고 맥주를 시켜 한 잔 따라준다. 술에 약한데도 산행후에 마시는 맥주 한 잔의 맛이 이제는 시원하게 느껴지는 것이 나도 술이 늘었나 보다. 샤워장를 마치고 보니 갈라진 발바닥에서 핏물이 배어나온다. 지난번 반야봉 코스때도 이처럼 발바닥이 아팠는데 상처가 아물지 않은 상태에서 장거리 산행을 하면서 다시 갈라진 모양이다. 비빔밥 한그릇에 연거퍼 따라주는 맥주를 두 잔이나 마셨더니 취기가 느껴진다. 화장실 거울에 비친 얼굴이 고추잠자리마냥 빨갛다. 그 덕에 서울로 올라오는 버스에서 금방 잠이 들고 아주 상쾌한 기분으로 깨어났다. 집을 나선지 꼭 24시간만인 밤 9시에 집으로 돌아왔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같은 사람인가. 아니면 조금 달라졌을까. 많이 달라졌을까. 적어도 내 몸속에 고운 최치원과 점필재 김종직과 우천 허만수라는 인물이 한자리씩 차지하고 앞으로 살아갈 인생에 길잡이 역할을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