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월급
외국서 돈 개념 없이 살다가
한국만 오면 돈을 계산하게 되고, 이웃들과 차와 집을 비교하게 된다.
외국서는 빨리 한국 가서 한국음식도 먹고 여행도 하면서 쉬어야지 생각하고, 들어오면
친구 따라 덩달아 바빠지고, 경쟁하는 데에서 은근히 피곤을 느낀다.
왜 이리도 남의 일에 관심들이 많으신지 몰라 ???
한국에 머무는 기간이 많지 않은 내가
왜? 차가 필요하며, 더군다나 큰 차가 필요한가?
너는 아직 한국을 몰라?
작은 차 끌고 다녀봐라 얼마나 무시하는데 ...
이 말을 몇 년 듣다보니까
요즘은 작은 차를 몰고 호텔 앞에서면 은근히 신경이 쓰인다.
나도 빨리 돈을 벌어서 큰 차를 사야할까?
오늘은 한국인이 좋아하고
또 크리스마스 이브에 어울리는
러시아 돈 이야기를 풀어 보고자한다.
1995년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살 때의 일이다.
러시아 “카펠라 아카데미 상트 페테르부르그” 오케스트라를 지휘할 기회가 있었는데
무슨 이유인지 초청장을 받는데 기간이 한 달 이상 걸려서 지휘를 하지 못했다.
초청장 하나 만들어서 보내는데 뭐? 그렇게 오래 걸리는지 당시는 이해가 안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러시아니까” 하고 당연히 이해가 된다.
12년 동안 공식적인 초청장과 “거주등록” 때문에 격은 일화를 책으로 역어도 될 것이다.
지금까지 25여개의 러시아 오케스트라와 200여회의 음악회를 지휘하면서 느낀 점과
급속도로 올라가는 러시아의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월급상황을 함께 공유하고 싶다.
2001년 니즈니 노브고로드 오페라극장에서
한번 오페라를 지휘하고 받은 지휘료가 60만원이었다.
러시아에서는 오페라를 하면 보통 이틀 전에 솔리스트와 연습하고
전날 오전에 오케스트라와 연습, 저녁에 전체연습을 하고
공연당일은 연습 없이 저녁에 바로 공연하는 스케줄이다.
호텔이나 차편은 제공하지만 비행기를 내가 끊어야 하기에 1번 공연하면 적자였다.
그래서 항상 몇 개의 공연을 연결해서 여러 도시를 돌았다.
그런데 2012년 11월24일 백조의 호수를 지휘하고
25일 오페라 갈라 음악회를 지휘했는데 극장의 발전상에 놀랐다.
월 20회로 공연이 늘어남은 당연하지만 단원들의 월급이 엄청 많이 올라있었다.
예전에는 지휘자에게
모스크바에서 니즈니 노브고로드까지의 기차표(그것도 2등칸) 값만 지불했는데
이번에는 모스크바에서 왕복 항공료를 지불해 주었다.
지휘료가 몇 배로 올랐음은 물론이고 호텔에서 3식을 할 수 있게 배려해 주었다.
차량은 필요시 언제나 제공되고, 오케스트라 등 모든 수준이 예전보다 좋아져있었다.
11월14일과 18일날 지휘한 모스크바 심포니는 지방보다 훨씬 많은 변화가 있었다.
갈 때마다 변하는 것을 보면서, 앞으로 러시아 오케스트라가 어떻게 변화할지 기대가 된다.
그래서 2013년 부터는 좀 더 많은 시간을 러시아에 투자하려고 한다.
러시아의 첫인상은 참담했다.
12년 전 처음으로 극동 “블라디 보스톡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공연을 가졌다.
그때는 김해공항을 통하여 출국했는데 교통편의 문제로(?)
출국20분전에 공항에 도착했더니 수속카운트는 이미 철수하고 아무 흔적이 없었다.
이런 상황을 보고 황당하다고 표현하는지?
지방공항에서 출국하다보니 국내선으로 잠시 착각을 했는데,
다음 비행기는 3일후에 있다고 하였다.
나야 3일후에 가도 되지만
내일 아침 연습장에 나타나서 지휘자를 기다릴 단원들을 생각하니 도저히 안 갈수가 없었다.
일단 안내직원에게 블라디보스톡 항공사 직원을 호출하라고 했다.
“내가 오늘 출국하지 않으면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3일간 연습을 못하고 쉬어야한다고” 하자
상황이 심각함을 직감했는지 - 어디론가(아마 기장에게) 연락을 하더니 -
급하게 비행기를 세웠다.
직원은 나의 짐을 모두 들고 공항활주로를 달려서 바로 기내로 들여보내 주었다.
역시 한국 직원은 민첩하고 상황판단이 빨랐다.
러시아였다면 “그것은 당신 사정이다” 나를 귀찮게 하지 말라고 거절했을 것이다.
나 때문에 비행기가 한참 연착 되었는데도
러시아 승객들은 아무 일도 없는 듯이 시장바닥처럼 시끄럽게 떠들면서 놀고 있었다.
수속을 안했으니 나는 좌석권이 없었기에 기장 바로 뒤의 제일 앞자리로 안내 하였다.
비행기의 도색은 벗겨져있고, 앞의 식사받침대는 나무로 대충 짜 맞추어 놓았다.
바깥이 잘 보이지 않는 허름하고 흔들거리는 창문을 보는 순간,
아니?
이런 비행기가 정말 이륙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고
혹시 하는 예감에, 갑자기 가족들의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참 신기하게도 비행기는 이륙했는데 구형 프로펠러의 소음이 심해서 귀가 아플 정도였다.
겨우 마음을 안정시키고, 음료수를 마시고, 밥을 얻어먹고 조금 쉬려고 의자를 뒤로 젖히자
곧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하니 의자를 바로세우라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아니 한국에서 이렇게 가까운 곳이 러시아란 말인가?
러시아 항공기는 북한 영공을 통과할 수 있기에 두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비행기가 활주로에 닫는 순간 짐칸의 짐들이 아래로 우수수 떨어졌다.
이런 일을 처음 당하는 한국 승객들은 소리를 지르고 날리였다.
이런 풍경은 이후에도 모스크바를 가면서 수시로 경험했던 일이라 요즘은 자연스럽다.
그런데 최근에는 러시아가 돈을 많이 벌었는지 비행기를 좋은 것으로 교체했다.
블라디보스톡 공항은 말이 국제공항이지 한국의 시골공항보다 형편이 없었다.
가을비가 줄줄 내리는데,
입국장 건물에서 몇 백미터 떨어진 곳에 항공기가 서더니 걸어서가라고 했다.
양복에 비를 맞으면서 걸어가려니 참 어이가 없었지만,
처음 러시아를 갔었기에 “러시아는 다 이런가” 하고 눈치만 보면서 남 따라 행동했다.
그런데 더욱 놀랐던 것은
비가 오는 와중에 사람들이 비행기 짐칸에서 무엇을 하나씩 내리고 있었다.
비를 맞으면서 그냥 걷는 것도 어이가 없는데
“짐칸에서 자기 짐을 받아서 입국장까지 직접 끌고 가라는” 것이었다.
한국 사람들은 뭐 이런 경우가 있냐고 아우성이었지만 러시아 사람들은 아무 불평이 없었다.
러시아 사람들은 이런 일을 흔히 경험하는 것처럼 비를 맞으면서 앞서서 걷고 있었다.
비가 오는데 버스도 준비시키지 않고 ...
한국 같았으면 데모를 넘어서 전쟁이 일어날 상황이었지만
경제적인 어려움에 직면했던 당시의 러시아는 사람을 배려할 경황이 없었다.
여러해 전에 첼로단원의 남편이 도로를 건너다가 차에 치어 숨졌는데
경찰서에 갔더니 보상은 고사하고
조심성 없이 길을 건넜다고 도리어 꾸중을 들었다고 했던 말이 생각난다.
한때 러시아에서는 차에 받히면, 사람을 먼저보기보다 차가 부서지지 않았는지 살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러시아에서는 아직 친절이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았었다.
비를 맞으면서 짐을 끌고 가는 모습이 피난민의 행렬처럼 처량하게 보였다.
고난의 행군을 끝내고, 또 오랜 기다림 끝에 비자수속을 마치고 빠져나가자
오케스트라감독 알렉산드가 기사를 대동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기사는 예의도 없이 좁은 차안에서 계속 줄담배를 피워서 목이 불편했는데,
비가오니 창문을 열수도 없었다.
그런데다가 알렉산드는 알아듣지도 못하는 러시아말로 계속 이야기를 시키니 정신이 없었다.
당시 블라디보스톡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월급이 5만원 이었는데 하루 호텔비가 6만원이었다.
아니 호텔비가 무슨 단원들 한 달 월급 보다 비싸냐고 했더니,
현대호텔은 하루 12만원이란다.
호텔에 들어서자 직원은 “왜 자기호텔로 왔느냐는 듯이” 귀찮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공산주의의 잔재인지 “상대에 대한 배려나 친절”이라는 단어는 아직 몸에 익숙하지 않았다.
다음날 오전 9시 반에 연습이 시작되었는데
여러 명이 지각을 하였고 누구는 잇빨이 아프다며 조퇴를 원하였다.
하는 짓거리를 보니 한두 번 우려먹은 수법이 아니었기에 무시했다.
월급이 적으니까 허술했고, 일부 단원들은 연습 후에는 다른 악단에서 연주를 하거나
택시를 몰면서 생계를 유지하고있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지휘자 노태철
러시아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월급 2 를 읽어보세요.
첫댓글 2탄이 .. 흥미진진하겠습니다~ 무슨 연재 소설 읽는 기분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