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내에서의 불교의 위치
1. 전근대 시기의 불교
한국 불교는 굉장히 재밌는 성향을 가졌는데, 바로 현세구복적, 호국적이라는 점이다. 이는 동북아시아의 불교가 종교나 학문으로써 한반도에 전래된 것이 아니라 국가권력에 의해 국가의 통제력을 강화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도입되었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이, 당시 고대에 각 토속신앙으로 분열되어 있던 민심과 지배층을 한꺼번에 불교란 고등종교를 이용해 사상적으로 통합할 필요가 있었다. 삼국시대 등 고대국가의 군주들은 왕즉불(王卽佛) 사상을 개발해 왕이 곧 부처님이라고 선전했고, 따라서 부처를 모시는 승려들은 왕의 병사가 됐다. 이 때문에 삼국시대에는 불교의 상징인 사찰을 수도 한복판에 거대한 규모로 지었다. 이렇게 승려가 지배층의 친위세력이 되면서 호국불교란 개념이 생겼는데, 박노자 같은 극단적 평화주의자는 한국의 호국불교 전통에 대해 '평화의 종교인 불교가 그 성직자가 살인을 하도록 가르치게 하는 것이 어째서 칭송받을 일이냐'라고 비판하기도 했으며, 심지어 도올 김용옥도 호국불교는 지배권력과의 야합이라면서 비판하기도 했다.
김용옥은 <나는 불교를 이렇게 본다>라는 본격 불교 비평서적에서 이차돈도 순교자가 아니라 쿠데타에 동원된 행동대장에 불과하며, 불교 공인은 권력에 의한 보상이라고 주장했다. 고려 시대에 이르러 불교계는 단순한 종교집단에서 벗어나 지배계층으로 대두하여 각종 특혜를 누리며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즉 고려시대 까지의 불교계의 위상은 현재 우리가 상상하는 모습과는 매우 달랐다는 얘기다. 광종 때 이미 승과제도를 도입해 승려의 신분을 보장해 주었고 국사, 왕사 제도를 통해 불교계의 권위를 상징적으로나마 왕권보다 위에 두었다. 또한 국가로부터 토지와 면역이라는 엄청난 특혜를 받아 경제적인 성장의 발판도 마련했다. 대토지를 소유하고 고리대금 등 상업활동에 관여하자 사원의 세속화 문제가 대두되었고 종파적 분열의 양상까지 보여 불교계 내외에서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에 대해 최승로는 시무 28조를 통해 불교계의 경제적 폐단과 정치권에 대한 관여를 비판했다. 불교계의 폐단에 대한 비판은 고려 내에서 개혁운동이 있을 때마다 꾸준히 제기되었다. 한 가지 주목할 점은 불교의 사상 자체에 대한 비판은 고려 시대까지는 거의 가해지지 않았다는 것. 불교의 사상이 도전받기 시작한 것은 조선시대부터다. 불교계 내부에서도 이러한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 수 차례 결사운동이 일어나, 의천은 천태종을 통해 교종을 중심으로 선종을 통합하려 했고 지눌은 무신정권기의 사회적 혼란상을 타파하기 위해 신앙결사운동을 전개해 갔다. 의천의 방식은 불행히도 사상적인 방식이 아닌 일반적인 방식의 통합이였기에 의천 사후 도로아미타불이 되었지만, 지눌의 혁신운동은 사상적인 통합을 기반으로 전개되어 지눌 이후에도 지속되며 상당한 성과를 보았고 사상적으로도 그 제자인 혜심의 유불일치설로 이어져 성리학이 수용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원 간섭기가 되자 몽골의 영향으로 불교계는 점차 사대적인 귀족불교로 회귀하는 모습을 보인다. 법상종은 티베트 불교의 영향을 받아 세속화되었고, 사원은 권문세족과 결탁하여 대토지를 소유하고 고리대금업에 관여하는 등 부패가 심화되었다. 고려 말 대두하기 시작한 세력인 신진사대부들은 이러한 불교계의 폐단을 맹렬하게 공격했다. 이들은 과거의 유학자들이 불교의 폐단만 비판했던 수준에서 그치지 않고 불교의 사상 자체를 비판하는 모습을 보였다. 신진사대부가 건국한 국가인 조선에서 불교계의 위상은 점차 추락하여 교세가 크게 약화되었다. 불교 윤리사상을 유교 윤리사상으로 전환시켜 국가 지도이념으로서의 역할을 빼앗고, 경제적으로도 사원에 예속된 토지와 노비를 국가재정으로 환속했다. 일시적인 숭불책이 수 차례 있었으나 숭유억불의 조류는 꾸준히 지속되었고 불교계는 경제적 기반과 인적 자원을 상실하여 사회적 위상을 잃었다. 그러나 국가 이데올로기로서의 지위를 잃었을 뿐 신앙의 대상으로서는 여전히 궁중과 민간을 가리지 않고 신봉되었고 교리의 발전 또한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불교계가 보여준 호국적인 양상 또한 역사가 깊다. 고려시대에는 몽골의 침입 당시 몽골군 장수 살리타이를 해치운 사람도 승장 김윤후였다. 조선시대의 임진왜란 당시 사명당은 전국 사찰에 격문을 돌려 승병 궐기를 촉구했고, 그렇게 결성된 승군의 규모도 엄청났다. 사명당은 이들 승군을 통솔하는 명목상 직책인 승군도총섭(僧軍都摠攝)에 임명되기도 했다. 조선조의 억불정책에 많은 피해를 입긴 했으나 임진왜란 당시의 활약으로 이전에 비해 억압적인 면모가 꽤 줄었다고 한다. 조선 후기로 가서 성리학이 쇠퇴하면서 이러한 경향은 더욱 커져, 한때 불교 억제정책을 강화했던 정조마저 나중에는 이를 사실상 철회하고 수원에 용주사를 건립했으니 말 다한 셈. 하지만 승려 자체는 계속 낮은 신분이었기에, 사찰의 재물을 노리고 공격을 당하거나 아예 절을 빼앗아 무덤을 만드는 경우도 늘어났다. 그런데 여기에서 재미있는 주장이 나왔는데, 조선시대의 호국불교는 당시 불교가 지니고 있던 사회적인 문제점을 해소하기 위해서 라는 주장이다. 당시 불교는 조선 정부의 전형적인 숭유억불 정책에 의해서 여러가지로 탄압을 받아왔기 때문에 극히 반조선적 성향을 띠었으나,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해서 속칭 말하는 '이렇게 우리가 도와주고 나면 우리의 사정도 괜찮아지겠지?' 라는 생각으로 물심양면으로 조선 정부를 도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쟁 이후에는 오히려 조선 정부 측에서는 '오! 이런 양질의 노동력이 있었나?' 하면서 승려들을 부역에 더더욱 많이 동원했다는 후새드한 후일담이 있다... 심지어는 임진왜란 등으로 공납할 장인들이 모자라자 절 등에 공납의 의무를 부과하기도 하였다(...) 낮에는 예불 밤에는 공작 여하튼 불교에 대한 조선 왕조의 자세가 다소 완화된건 임진왜란 전후라는건 확실하다. 우선 상기한 대로 불교계가 조선 왕조 수호에 한 몫을 한 것도 있고, 전후 흉흉해진 민심을 달래는데는 전란을 피해 멀리 도망가 있던 양반들의 전유물인 성리학보다 전란에도 대중의 곁을 지키며 역사적으로도 오랫동안 함께 해온 불교가 더 유리했고, 전쟁으로 조선을 포함한 주변 국가들이 죄다 갈아 엎어지면서 다른 최중요 과제들이 잔뜩 늘어난데다가, 이후 인조반정, 양대호란 등을 위시한 정치적, 사회적 혼란들이 연이어 터지면서 발등에 수차례 떨어진 불 끄기도 바쁜 조선 왕조가 불교 탄압에 예전만큼 신경 쓸 겨를이 줄어들었기 떄문이다. 아무튼 이렇게 조선 왕조에게 억압받은 시기 때문에 한국 불교에서는 수도에 전념하는 이판승과 행정이나 대외 부역참여 등에 무게를 두는 사판승의 이원론적 체계가 생겨났다. '이판사판'이라는 말의 유래이기도 하다. 지금도 그 영향이 남아 한국 불교에서는 각 절의 관리자가 2명씩 있다. 행정업을 맡는 주지와, 종교적 업무/승려 교육을 전담하는 방장. 종교 지도자도 마찬가지라 조계종의 경우 행정업 전담인 총무원장과 종교적 업무 전담인 종정이 따로 있다. (타 종파의 사례는 추가바람) 일단 전조인 고려시대에 불교가 행했던 영향력과 악행들도 있고, 유교의 원칙을 국가 이념으로 택했던 조선시대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본다.
이러한 호국 불교에도 불구하고 불교 자체에 대한 정부와 사회의 취급은 그때도 여전했다. 그 예로 도첩제가 있다. 승려가 되기 위해서 거액의 포를 바치거나 부역에 몇 개월 동안 무보수로 일해야 도첩을 얻을 수 있었다. 이는 숭유억불 정책에 근거한 것이지만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도첩제 자체가 양인의 승려화를 막기 위해서였는데 이유는 간단하다. 승려는 세금을 안내니까. 대한제국 이전까지 승려는 천민계급 중 하나였다. 신량역천도 아니고 법제적인 천민도 아니지만, 성리학적 규범과 양반 사회가 확립되면서 사회적으로 규정된 팔반사천(八般私賤)중에 하나였다. 그리고 도성 출입도 불가능했다. 그런데 왕실의 원찰이나 승려가 도성에 들어온다고 승려 도성출입 금령을 자주 내린 걸 보면 잘 지켜지긴 했는지 의문이다. 승려의 도성 출입이 공식적으로 허가된 것은 구한말 시기로서, 일본 불교인 일련종의 일본인 승려 사노가 일본 공사관의 후원을 통한 적극적인 로비로 출입 허가를 받아냈다. 물론 이렇게 사노가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일본 불교의 종지로 한국 불교를 개종시켜(일본 불교의 교리를 한국에 심어), 결과적으로 한국 불교를 일본 일련종이 집어삼키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당시 조선 정부는 봉원사의 승려인 이동인의 건의로 이미 종교 자유의 일환으로 승려의 도성 출입 허가를 논의중이었다. 그런데 공로는 다 사노에게 넘어갔으니(...)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사람이 챙긴 셈. 그러게 진작에 논의를 끝냈어야지? 그런데 애초에 이 이동인이라는 승려부터가 일본식 불교승려로, 개화파 중에서 골수 친일파였다. 또한 최초로 창씨개명을 한 인물로 일본 이름은 아사노 도진(淺野 東仁). 그러니 어떤 의미에서는 밑밥깔기에 가까웠다고 하겠다.
이후 1898년 고종황제가 원구단에 제사를 올리려고 할 때 한 승려가 겁도 없이 주위를 둘러 친 장막의 틈새를 열고 들어와 초능력으로 황제의 운명을 점치겠다고 난동을 피운 일이 발생했다. 잡아서 문초를 하니 개운사 출신이란 것이 밝혀졌다. 그 외는 미상. 이런 흠좀무한 사건이 일어나 3년만에 다시 승려 출입이 금지되었고, 실질적으로 완전히 승려 출입이 자유롭게 된 것은 1905년이다. 조선시대의 불교 탄압은 흔히 잘 모르고 넘어가지만 상당히 심각한 수준이었다. 개국공신 정도전 부터가 숭유억불을 내세웠으며 불교를 논리적으로 공박한 불씨잡변을 쓰기도 했다. 태종은 특히 불교를 혐오하여 불교 종단의 해체, 파괴를 시도했다. 많은 절이 폐쇄되었으며, 심지어 유학 양반들은 이러한 분위기를 타고 산 속에 숨어있는 절까지 올라와서 행패를 부리거나 불태웠다(...) 태조 이성계가 기거했던 회암사조차 고의적인 테러로 불태워졌으니 그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현실적으로, 조선 시대에 불교가 기댈 수 있었던 곳은 오직 왕실 뿐이었다. 조선 후기 왕실의 손이 귀해지자 왕실은 불교에 기대었고, 신하들도 강력히 반대하지 못했다. 영조의 경우 아들이 안 태어나자 신하들이 불사를 권하기도 했다. 왕실의 여성이나 몇몇 임금의 개인적인 신앙심이 불교를 유지해주었던 것이다. 나름대로 불교를 믿었던 태조나 세조, 많은 왕후들의 비호 아래 암암리에 왕족들은 불교를 믿어왔으나, 문정왕후를 마지막으로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된다.
지금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왕릉 근처에서 왕실의 제사를 지내고 왕실을 위해 기도하는 원찰이 딸려 있었다. 선비들이 평범한 절이라고 생각해서 이런 데 들어가서 행패를 부렸다가는 "니놈이 감히 왕실을 능멸하느냐?!"고 불호령을 당하고 곤장을 얻어맞았다.(…) 비슷한 것으로 조포사라는 절도 있었는데, 왕릉 근처에 있으면서 왕릉을 지키고 관리하며 제사가 있을 때 제수용품으로 쓸 두부를 마련하는 사찰이라 해서 두부 포 자를 써서 조포사라고 불렸다. 이 역시 왕실과 관련된 사찰이었기에 선비들이 함부로 건드리지 못했다. 수원시에 있는 용주사가 대표적인 조포사. 또한 조선왕조 실록을 지키고 보관하는 수호사찰이 있었다. 봉화(奉化)의 각화사(覺華寺), 무주(茂朱)의 적상산성(赤裳山城), 강화(江華)의 전등사(傳燈寺), 강릉(江陵)의 월정사(月精寺)를 말한다. 이 수호사찰의 경우 주지승에게 실록수호총섭(實錄守護摠攝)이라는 직책을 주었다. 이 직책은 단순한 명예직이 아니라, 병부를 갖고 있어 유사시 실록 수호를 위해 지역 군대를 동원할 수 있는 상당히 강력한 권한을 가진 실무직이었다. 깽판쳤다간 코로 고춧가루 탄 곡차 한사발
이외에 조선시대에 사찰들이 유생들의 탄압을 피하는 일종의 편법으로 태조 이성계를 절에 모시고 공양을 올리기도 했다. 유생들이 멋도 모르고 절에서 행패를 부렸다가 승려들이 "아이고오 태조 즈어어어언하아아아아~~~~~"하면서 어진이나 위패 앞에서 향피우고 통곡하면 유생들은 그저 데꿀멍+상소가 올라가면 왕실 능멸로 처벌크리(...) 이게 생각보다 잘 먹혀서 나중에는 태조 이성계를 사찰이 모시는 사찰이 지나치게 늘어나 나라에서 제제를 가하기도 했지만,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를 모신다는 점 때문에 조선 정부에서도 다 쓸어버리자니 께름직하기도 하고 알아서 건국자를 모시고 받들어 주니 나름 기특하기도 한지라 작은 절 몇군데 시범 케이스로 조금 단속하는 선에서 크게 나아가진 않았다.
세종대왕은 기본적으로 유학자 입장에서 불교에 비판적이었으나 한글로 불경을 많이 지었다. (심지어 2번째 한글 작품은 불은(佛恩)을 기리는 월인천강지곡) 또 세종대왕 당시에는 효령대군이 불교를 많이 후원하였다. 세조는 드물게 불심이 깊었던 왕으로 불교를 많이 밀어줬다. 하지만 성종 때 한 번 날아갔다. 연산군은 딱히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모든 인간을 다 괴롭혔기 때문에(…) 불교도 된서리를 맞았다. 원각사를 헐어 버린 것이 대표적인 예. 문제는 연산군 이후에 유학자들의 입김 때문에 타격을 받은 게 복구되지 않았던 것이다. <연산군일기>에는 연산군이 정업원의 늙고 추한 비구니를 몽둥이로 패서 내쫓고 7~8명의 젊은 비구니를 겁탈한 이야기도 있다. 겁탈의 배경이 되는 정업원(淨業院)이란 곳은 자식이 없는 후궁이나 남편을 일찍 잃은 왕족 부인들이 비구니가 되어 여생을 보내는 곳이다. 연산군의 일은 한마디로 자기 친인척을 겁탈했다는 이야기. 명종 때 수렴첨정을 했던 문정왕후는 보우를 무학대사 이래로 비어 있었던 국사 자리에 임명하는 등 강력한 불교 진흥책을 펼쳤다. 그러나 문정왕후 개인에게 의지한 불교 진흥은 한계가 있어서 문정왕후 사후에는 오히려 강한 역풍을 맞았다.
정조 같은 경우 초기에는 억불정책을 시행하였으나 강하게 장기적으로 추진하지는 않았다. 수원에 조포사인 용주사를 지을 때는 오히려 앞장서서 후원하였고, 부모은중경을 좋아했다고 한다. 또한 임진왜란 이후에는 지방에서도 사찰이 어느 정도 늘어갔다. 다시 말하자면 정치에서는 완전히 쫓겨났지만 민간 신앙적으로는 비교적 관대하게 대한 셈이다. 그리고 부녀자들 측에서도 불교에 대한 신앙은 깊었으며, 이는 심지어 사대부 부녀자들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들을 중심으로 향유되었던 규방소설 같은 작품들을 보면 사대부 남성들은 기를 쓰고 불교를 반대하지만, 여성들은 그 신앙을 존중하거나 직접 믿는 한편 절에 불을 지르려 들다가 봉변을 당하는 사대부들을 그리는 등의 장면들이 많이 나온다. 정치 제도상 으론 열심히 억제하려 했어도 실제로는 여전히 신자가 많았던 셈. 하지만 이전 시대와 달리 유력 귀족이나 국가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었기에 조선후기의 큰 절들은 절의 유지와 확장 등을 위한 돈을 주로 신자들의 시주에 크게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사찰에서 기복신앙 행위의 증가와 무속과의 결합이 커지는 것도 이 시기의 영향이다.
2. 일제강점기 시절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는 숭유억불의 조선이 사라지자 친일과 결합하여 주변을 착취하는 경우도 적잖이 나타났다. 사실 철저한 유교 국가를 지향한 조선시대에서 불교의 사회적 취급은 국가의 노비 취급, 도성 출입금지 등 말 그대로 개차반이라 오히려 일제강점기의 대접이 훨씬 나았다. 물론 일제에 적극 협력한 승려들에 한해서만. 하지만 인과관계를 반대로 해석할 수도 있다. 조선인들을 이간질시켜 통치를 용이하게 하려던 일제의 계책이긴 해도 어쨌든 일제는 불교계를 대접해 줬으며, 그 결과 수많은 승려들이 친일로 변절하고 결국 당시의 한국불교는 거의 일본화되었다. 심지어 중일전쟁 시절엔 친일 승려들이 '탁발보국'이란 명목으로 비행기 등 군수품을 만들기 위한 위문 헌납금 모집 운동을 벌여나갔다. 친일 승려의 악행은 임혜봉 스님의 저서인「친일불교론」과 「친일 승려 108인」에서 낱낱히 고발되었다. 임혜봉 스님은 「친일 승려 108인」때문에 해당 책에 실렸던 최범술 스님의 유족들에게 너 고소를 당했지만 [법원이 무죄를 선고하였다.] 문제가 되었던 효당 최범술 스님은 독립운동가이면서도 정치가였는데, 불령선인회에서 덴노 암살을 모의했으며, 불교 계열 항일비밀단체 '만당'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해방 이후엔 정치가로서 제헌의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 다이쇼 대학에서 불교를 배워온 대처승이란 이유로 같은 불교 내에서 평가 절하 되었는데, 북지황군위문단 이라는 관립 친일 불교단체에서 활동해서 친일 논란에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임혜봉 스님은 「친일 승려 108인」뿐만 아니라 대놓고 「최범술 : 불령선인회와 만당에서 활동 그리고 친일」이란 저서에서 최범술 스님의 친일행각을 고발하였다. [「친일 승려 108인」에 대한 소개.]
물론 그 와중에 불심 깊은 촌부들을 꼬셔서 전 재산과 같은 논, 밭 등을 헌납하게 하는 경우도 적잖이 있었다. 그 동안 조선이라는 왕조 하에서 수백 년을 억눌려 있었으니 쌓였던 불만이 한꺼번에 터진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친일을 하며 사리사욕을 탐한 점은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만해 한용운의 예와 같이 일본과 일본의 불교에 맞서서 민족의 독립과 한국의 불교를 수호하고자 했던 훌륭한 승려들도 있었다. 당시 외국 교민들의 불교계는 교민 사회를 중심으로 독립 운동을 주도하였다.
3. 현대에 들어 일제강점기 당시 대부분의 한국 불교는 사찰령으로 인해 피해를 입었다. 사찰령은 이른바 승려들의 활동부터 주지 임명까지 전부 총독이 관리하고 "기혼자"에게 절의 주지 역할을 맡기도록 하는 것. 이때 임명된 주지들은 전부 일본인 아니면 결혼한 대처승이었다고 한다. 해방 후에도 대처승들이 엄청 많았다고 한다. 민중의 꾸준한 지원으로 각 사찰이 소유한 토지 및 재산은 적지 않았는데, 여기에 주목한 자유당측에 의해 사단(불교 정화운동)이 발생하게 된다. 불교 정화운동의 명분은 일본의 잔재를 없앤다는 것이었지만 참 목적은 기존 사찰 보유 자산을 활용한 "정치자금 확보" 및 휘하 단체 지원이었다.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던 이승만 대통령을 의식한 최인규 내무부 장관의 작품이었다는 소문도 있었는데, 실제로 오늘날 대도심의 시내에 있는 보이스카웃, YMCA 건물 중 연혁이 오래된 곳은 본래 사찰 소유 건물 혹은 토지였던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한다. 본래 해방 후 비구승과 대처승 간에 타협을 보아 "송광사와 해인사 등 주요 사찰을 우선 돌려받고 나머지는 추후 시간을 두고 조계종으로 전환한다"는 요지의 결론까지 내려진 상태였던 것.
실제로, 2004년 세수 91세(법랍 77세)로 입적한 [서옹 스님]의 生前 증언에 따르면, 해방 전후 백양사에는 17세인 서옹스님 (당시는 동자승)만 비구승이고 다른 분들은 모두 대처승이었기 때문에, 중요한 행사 때는 서옹 스님만 법당 안에 들어가고 다른 분들은 법석을 깔고 밖에서 예불을 드렸으며, 더이상 대처승의 상좌(제자, 후계자 개념)를 들이지 않는 등 철저하게 타협안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하지만, 최인규 내무부 장관 측이 불교성지순례 등 타협에 참가한 조계종 지도층의 공백기를 이용해 혈기왕성한 젊은 승려들을 부추겼고, 일부 사찰에는 지원을 명목으로 "머리 깎은 주먹들을 승려로 위장시켜" 보냄으로써 비구승VS대처승 간에 큰 충돌이 나는 사단이 난 것이다. 일제 잔재 청산이라는 정부 측의 여론몰이까지 겹쳐 결국 대처승 측이 한국불교태고종을 만들어 떨어져 나갔으며 오늘날 좌선수행 및 출가를 근간으로 하는 한국 불교의 기본 형태가 다시 조성되었다.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조계사 문서를 참조할 것. 태고종 자체는 삼국시대 고구려 소수림왕에 전해져 계속 법맥이 이어졌지만 한국불교태고종이란 종단은 불교정화운동에 밀려나 잔존한 대처승들이 1970년대에 고려시대 명승 보우대사를 종조로, 박대륜을 종정으로 삼아 창시되었다. 태고종은 현재도 '대중교화'를 이념으로 삼고 있어서 머리를 기를 수 있고 결혼도 할 수 있었다. 물론 이런 대중불교주의는 만해 한용운이 주장한 것이니 태고종 자체를 친일의 잔재로 볼 수는 없다. 또한 현대의 한국 태고종은 더이상 대처승을 인정하지 않으며, 어디까지나 출가하기 전 아내와 자식을 둔 가장이 출가해서 스님이 될 경우 가족과 함께 살며 부양할 것을 허가한다지 이미 스님이 된 사람이 결혼을 하거나 자식을 두는 것을 허락하지는 않는다. 조계종에서 태고종을 언급할 때는 아직도 태고종의 이런 편견을 일반화시키는 경우도 있으니 그런 편견을 듣게 된다면 적당히 가려서 듣는것이 좋다. 단, 이 때문에 결혼을 위해 잠시 승적을 파계한 뒤, 다시 승적을 회복하는 경우도 종종 있으며 이것만은 태고종도 암묵적으로 허용한다.
1980년에는 10.27 법난이 있었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나라의 지원금을 제일 많이 받는 종교이긴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중요 문화재 중 불교계에 예속된 것이 많기 때문이다. 유지/보수를 끝마치고 나면 오히려 불교계는 가난한 편이다. 전통사찰 대부분을 가지고 있는 조계종 1년 예산이 200억 정도다. 국가예산은 한정되어 있기에 작은 절 같은 경우는 시주도 뜸해 그야말로 황폐화되는 경우도 있는 듯. 사실 절마다 형편이 큰 절은 웬만한 교회보다 잘 살고 작은 절은 못 사는 부익부 빈익빈. 오히려 큰 사찰은 불교 TV에 CF를 찍기도 한다. 불교가 한국의 주요 산을 전부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가장 돈 많은 종교라고 주장하는 모양새가 보이는데 도심지와 산지의 땅값 차이만 고려해봐도 이게 얼마나 신빙성이 떨어지는 알 수 있다 그래도 땅을 대상으로 정부와 지자체와 법적 분쟁을 일으킨 적은 몇 번 있었다. 예를 들어 지율 스님 도롱뇽 사건이나 진주 성전암 임야지 사건. 혹자는 삶의 터전 때문이라고 하지만 지율스님 같은 경우엔 환경단체들은 동의하지 않겠지만 님비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고, 진주 성전암 임야지 사건은 한 예수쟁이가 성전암 주지와 말다툼을 하다 홧김에 불을 질러 암자 건물이 전소된 탓에 진주시에서 복구하는 상황에서 임야지를 불법적으로 썼다는 사실이 들통났기 때문에 벌어진 것이라 딱히 삶의 터전이라 보긴 어렵다. 오히려 상대적으로 가난한 종교이기 때문에 비교적 높은 액수의 기도비 걷기, 대규모 재 봉행, 기왓장 불사, 사찰 근처의 전통찻집이나 불교용품점, 식당 운영 등의 행동을 보인다. 도심과 좀 떨어져 있는 오프라인 매장이라는 점을 고려해도 가격이 꽤나 높아서 폭리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지만 어디까지나 신도들의 신앙심에 맡기는 자율행위인데다 구속력도 없다. 다만 오히려 그런 구속력이 없어도 폭리가 잘 이루어지는 환경이다. 절 인심이 좋지 않으면 다른 절로 옮기기 쉽다는 불교도의 주장이 있었고 이는 신앙적으로 본다면 일리가 있는 말이다. 성직자의 신성과 같은 성도와의 관계도 중요시 여기는 다른 종교와는 달리(특히 기독교) 불교는 소승이든 대승이든 신앙의 주체가 자기 자신에게 달려있는 지극히 개인적인 종교이기 때문. 또한 도시 곳곳에 있는 교회와는 달리 절은 머나먼 산간벽지에 많은 편이라 절쪽에서 섣불리 행동하기 어렵다는 견해가 있으나, 오히려 멀리 떨어져 있기에 석가탄신일이나 중요한 불사가 있는 날엔 차를 돌려서 다른 절로 가기가 어렵다. 게다가 49일, 100일, 1,000일 등등의 신앙심이나 기복을 위한 장기 기도에 들었을 땐 절이 신도를 붙잡아두는 역할도 있다. 때문에 이런 경우엔 이사 등 특별한 사정이 아닌 이상 쉽게 다른 절로 옮기는 경우는 드물다. 평시라면 몰라도 어느 절에 기도비 내고 100일 기도를 하다 중도에 다른 절로 옮겨서 승계하는게 절 입장에서 봐줄만한 일이 아니고, 신도 입장에서도 힘들기 때문. 불교 내부적으로도 신도들의 신앙심이 타 종교에 비해 낮다는 점을 [지적]하며, [올곧은 재가신도를 양성하자]는 캠페인을 벌이고 조계종에서는 주도적으로 재가신도를 대상으로 한 학습서/수행서적들을 발간하고 있지만, 덧글에 지적하듯 스님들부터 문제라며 신도들의 반응은 미지근하다. 링크한 불교 언론사가 친 종단적 언론임에도 이 정도. 근래에는 포교당(혹은 도심 선원)이라고 해서 산중이 아니라 도심이나 마을에 위치한 암자와 비슷하거나 좀 더 큰 수준의 절도 있다. 평은 극과 극. 같은 조계종 소속인데도 불교 욕먹인다는 소리를 듣는 [마애사 포교당] 같은 곳이 있는가 하면 [한마음선원]처럼 좋은 평가를 받는 곳이 있다. 한마음선원의 경우 아예 자체적 네크워크가 있어 각 지역/외국의 사원들과 본원이 연결되어 있다. 일반적인 포교당과는 달리 개신교보다는 천주교나 주류 종단의 일반적인 사찰 관리 구조와 비슷한 모습. 반면 무속인이 사찰 형태로 운영하는 경우도 있으니 이 점은 주의할 필요가 있다. 무속인은 애초에 불교와 관련 없는 사람들이다. 무속인이 불교 공부를 해서 정식 법사 자격증이라도 있으면 모르지만 그런 경우는 드물다. 다만 일반인 법사가 운영하는 포교당이나 선원은 의외로 흔하다. 태고종이나 여타 군소종단의 경우에는 아예 도심이나 마을 안에 정식으로 절을 짓는 경우가 많아서 신도들이 사는 곳을 벗어나지 않고 간편하게 다닐 수 있도록 해놓았다. 물론 조계종의 경우에도 도심에 사찰이나 불교문화원을 지어 포교하고 있다.
참고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불교도 비율이 높은 지방은 영남(경상도)지방으로, 말 그대로 타 지역을 압도할 정도로 불교 신앙이 깊은 곳이다. 아마 한국사상 가장 독실한 불교 국가였던 신라의 영향이 남아 있는 듯. 영남의 위력 이러한 이유로 우리나라에서 기독교(천주교+개신교)도 비율이 가장 낮은 곳도 영남이다. 반대로 호남(전라도)지방은 불교도 비율이 가장 낮고 기독교도 비율은 가장 높다. 사실 수도권과 충청도의 기독교 신자 비율과 큰 차이는 없긴 하다. 그리고 불교-기독교 신자 비율의 차이가 호남보다는 영남이 압도적으로 큰 차이를 보인다. 사실 개신교 비중이 가장 큰 도인 전라북도 에서도 농촌 및 산간 지역은 불교세가 꽤 강한 것에 비해, 영남 지방은 대도시 지역에서도 불교세가 강하다.
2012년 5월 들어와서 석가탄신일 얼마 안 남겨두고 몇몇 사찰에서 승려들의 도박 및 온갖 추태들이 드러나서 망신을 당하기도 했다.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들 가운데서는 노태우 전 대통령이 불교도였으며 {2012년에 기독교(개신교)로 개종}, 전두환 전 대통령은 천주교 신자에서 백담사에 은거하면서 감금 당하면서 불교로 개종한 사례다. 흔히들 박정희 전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도 불교 신자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정작 박정희 본인은 종교가 없었다. (대신 육영수 여사와 이후락이 불교도였다), 박근혜 대통령은 가톨릭계 미션스쿨인 성심 여자중학교, 성심 여자고등학교, 서강대학교를 졸업했고 본인도 가톨릭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가톨릭 신자가 아닌가 싶지만, 두루 여러 종교들을 믿었던 편이라 '기불천교(기독교·불교·천주교)'라는 이야기도 나왔다. 때문에 딱히 불교도라 할 수도 없다. 사실 전두환도 비록 퇴임 후 백담사에서 불교로 개종 했다지만 그다지 독실한 불교도라 보기는 어렵다. 노무현 대통령의 경우 사시를 공부하던 시절에는 집 근처의 절에서 주로 공부했다고 전해지며, 불경도 틈틈이 외웠다고 한다. 이후 변호사 시절에는 천주교에서 세례를 받으며 '유스토'라는 세례명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다지 신앙심을 갖고 활동했던 것 같지는 않다. 대통령 시절에는 종교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은 채 프로필에도 '무교'라 적혔지만, 불심이 깊은 영부인을 따라 親 불교적인 활동을 몇번 벌인 적은 있었다.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해인사를 무려 3차례나 방문해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최다 방문을 하였다. 현재 불교를 포함한 종교계 90%이상이 변질되었다고 비판여론이 계속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종교인들과 종교신도들은 매우 불쾌해하고 있다.
2005년 기준으로 한국 주요 불교 종단은 다음과 같다. 대한불교 조계종 : 사찰 735개 (81%) 대한불교 천태종 : 사찰 144개 (16%) 한국불교 태고종 : 사찰 102개 (11%) 대한불교 법화종 : 사찰 22개 (2%) 선학원 : 16개 (2%) 대한불교 원효종 : 5개 (1%) 기타 : 27개 (3%)
4. 탁발승 문제 탁발이란 승려가 먹고 입는 것을 돌아다니며 동냥으로 받은 것만으로 해결하는 것을 말하며, 초기불교에서는 필수적인 것이었고 지금도 일본과 남방불교계에서는 계속 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1962년 대한불교 조계종에서 공식적으로 탁발을 중단한 이후로, 대부분의 종단에서 탁발을 중단한 상태다. 물론 종단에서 특별한 의미를 담은 [행사를 겸해 탁발을 한 적] 은 있지만, 원칙적으로 승려 개개인의 탁발은 지금도 금지되어 있다. 그 이유는 승려를 사칭하는 가짜들이 무리한 탁발을 요구해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고, 불교의 위상을 저하시켰기 때문. 그러나 이 사실을 의외로 모르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아, 지금도 역이나 공원 등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곧잘 불전함이나 바릿대를 놓고 목탁을 두들기거나, 가게에 불쑥 들어와 목탁을 두들기며 시주를 요구하는 정체불명의 승려들을 흔하게 볼 수 있다. 특히 2번째의 경우 손님이 있으면 일부러 더욱 목청높여 독경을 하며 돈을 줄 때까지 안 나가거나, 대놓고 들어 오자마자 돈을 요구하면서 행패를 부리는 경우가 있다. 독경하는 것도 잘 들어보면 불교상에서 파는 불자보감이나 얇은 독경용 불경에 실린 일반 불자들도 자주 읽는 경전들로, 가장 많이 읽는 것은 천수경이다. 이 경우 위 사실을 말해주면 바로 나가니 이런 가짜 중들에게 시달리는 위키러가 있다면 참고할 것. 하지만 나가면서 투덜거리거나 욕하는 정도는 감안해야 한다. 이런 가짜 중들의 불법탁발(?)은 조선 시대부터 이미 사회문제였으며, 심지어 1900년대에는 아예 [탁발을 하려면 공인증서를 갖추어야 했던 때도 있었다고 한다.] 타 종교인이라 하더라도 이런 점을 기억해두어서 유사시 가짜에게 속지 말도록 하자.
물론 수행하면서 개인적으로 탁발을 부탁하는 스님들이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조계종에서 금지한 이래 현재는 과거 악명을 떨친 두타스님처럼 가짜 중들이 탁발을 요구하는 경우가 훨씬 많은 게 사실이고, 특히 남의 가게에 들어와 민폐를 끼친다면 그건 누가 봐도 승려라 볼 수 없다. 애초에 승려 시험은 아무나 쉽게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만만한 게 아니다. 현재 대부분의 사찰에서는 자체 조리시설을 갖추고, 스님과 신도에게 공급되는 식사를 자체 조리하여 공양한다. 신도들에게 보시받은 돈을 가지고 식재료를 자체 구매하는 경우도 있고, 신도들이 보시한 쌀과 식재료 등을 가지고 조리하는 경우도 있다. 장이나 김치의 경우 대부분 자체적으로 담그거나 관련 업체에서 구입해 충당하며, 일부 대형사찰이나 단체에서는 팔기도 한다.
5. 훈민정음 불교 관여설 일단 이름부터가 흠좀무한 이 주장은 현재 한국 최대 종단인 대한불교 조계종의 정식 인가를 받은 서적에도 실려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포교원에서 펴낸 '한국불교사-조계종사를 중심으로'라는 책 (2011년 2월 28일 1판 1쇄본 기준) 에 실려있다. 대략 구성을 보면 이렇다. 통념과는 달리 집현전 학사들은 한글 창제에 관여하지 않았다. 세조 시절 불서 변역/간행에 깊이 관여하여 원각경, 선종영가집, 수심결을 직접 번역한 사람은 신미대사로, 이는 훈민정음을 잘 몰랐다면 불가능하다. 더욱이 신미대사는 세종 당시 왕의 침전에서 법문을 하기도 하였다. 세종은 한글 창제 후에도 활용/배포에 승가의 도움이 필요했고, 그것은 다양한 불경 간행으로 나타났다. 신미대사는 어학에 능해, 산스크리트어와 티베트어에 능했다. 그런데 공적기록은 없고 어용승이라는 비난 기록만 있는 것은 왜냐고? 그건 세종의 밀약으로 자신의 행적을 다 감춘 거라능! 물론 이를 증명할 근거는 없다. 정황상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 사관들이 승려인 신미를 곱게 보지 않아서 그랬으리라는 추측만 있을 뿐. 한글 창제의 과정이나 그 주역이 아직까지 정확하지 않은 지금, 신미 대사의 역할에 대해 심도있는 연구가 필요하다. (결론이자 이 책 모든 내용의 핵심) 그런고로 훈민정음 창제에는 한국 불교의 지원이 크며, 한국 불교의 정통인 조계종은 정통 한국 민족종단이다! 기승전조계종
신미대사의 한글 창제를 주장하는 법회. 2014년 10월 4일 정각원 토요법회. 2014년 10월 4일 조계종 정각원 토요법회다. [자세한 내용은 이쪽에서 확인], 물론 신미대사가 불경 언해에 깊숙히 관련되었다는 사실만큼은 왕실에서 불경을 간행하기 위해 설치한 기관인 간경도감에서 간행한 한글본 불경의 간행기에서 빠짐없이 신미의 이름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확고한 사실이다. 다만 훈민정음이 배우기 쉽다고 하더라도 불경에서 사용하는 각종 불교 용어를 한글로 번역하는 과정은 신미가 집현전 학자만큼이나 훈민정음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이는 불가능한 작업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아예 불교계에서 훈민정음 창제 자체에 영향을 주었다는 건 분명히 엄청난 논리 비약이다. 물론 한국 사학계에서도 환빠들의 주장과는 별개로 한국에 고유문자 자체는 있었다는 주장도 있고, 조선시대 실학자인 신경준도 저서인 '훈민정음운해' 에서 한글 창제 이전에도 민간에서 쓰던 속용문자가 있었다는 기록을 남겼으나 훈민정음 창제 시 이를 참고했다거나 가림토의 원형이라는 주장은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속용문자는 제도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아 쓰기 불편하다고 기록했다. 이 외에 1910년대까지 5진법에 기초한 결승문자를 사용하였다는 기록은 있지만, 결승문자는 소수의 관념 이상을 설명하기는 힘들다. 이두의 경우 사실상 중국과는 다른 독창적인 문자 기록법이긴 하지만. 불교 서적에 쓰였던 각필문자가 영향을 끼쳤다는 설도 있다. 물론 이에 대한 반론도 있다. 세종이 불교에 관심이 많았고 각필문자의 형태가 자형모양에 영감을 줄 수는 있지만 창제원리가 이미 상세히 기록된 훈민정음 해례본이 있는 상황에서 특정한 문자가 기원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각필기원설], [각필기원 반박])
5.6 신분제도 속의 불교 고려왕조 때까지는 공식 국교로 지정되었기 때문에 승려들은 고려왕이나 왕족 및 호족들 못지않은 우대를 받았으며 이 당시까지만 해도 국사(國師) 및 국승(國僧)이 배출되기도 하였다. 후에 조선왕조를 건국하게 된 이성계의 정치적 동반자로 알려진 무학대사도 고려왕조부터 승려로 지내왔다. 그러나 조선왕조 때부터는 사정이 달라져서 유림을 위시한 양반들에게 기득권이 넘어가고, 불교는 유교에 밀려 국교지위까지 상실하였고 승려들은 천민층으로 분류되어서 궁궐, 양반댁, 관료댁 등은 들릴 수 없고 포교활동도 할 수 없었다. 또한 양반 및 유림들은 대부분 유교사상에 숭상한 영향 때문에 불교와 승려를 매우 적대시하거나 천시하는 편이어서 이들에게 포교전래는 통하지 않았다. 그러나 유교 및 유림과는 관계없는 단순한 일반평민과 천민층으로부터는 신앙대상이 되어서 대체로 우호적인 편이었다. 국교지위를 상실하고 승려들의 신분도 천민으로 내려갔지만 평민과 천민층을 대상으로 포교활동이 이어지기도 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과 1895년 을미개혁 때 신분제도의 폐지화와 함께 유교에 자리를 내주었던 국교지위를 되찾았으며 오늘날에는 가톨릭, 개신교 등과 함께 한국의 대표적인 종교로 꼽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