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의 나라 조선은 음악을 중시했다. 바른 음악이 사람의 마음을 교화해서 좋은 세상을 만든다고 여겼고, 음악이 어지러우면 임금의 통치가 그릇된 데 이유가 있다고 보았다. 예와 악을 앞세우고 형과 벌을 뒤로 하여 다스리는 이른바 '예악사상'에 따라 음악을 관장하는 국립기관을 여럿 두어 연주자를 길러내고 음악 책을 펴내며 악기를 만들고 제사나 잔치, 조회 등 왕실과 나라의 여러 행사에 음악을 시행했다.
성종 24년(1493년) 예조판서 겸 장악원 제조 성현 등이 편찬한 '악학궤범'은 조선 전기의 음악을 집대성한 책이다. 앞서 세종 시대에 이뤄진 대대적인 음악 정비의 성과를 바탕으로 당시 음악의 모든 것을 기술하고 있다. 9권 3책의 내용은 음악이론, 악기 편성과 연주 절차, 악기 제작과 연주법, 음악에 따르는 춤의 내용, 거기에 쓰이는 온갖 의상과 소품까지 글과 그림으로 정리하고 있는데, 그대로 따라 하면 될 만큼 매우 상세하고 구체적이다.
이를테면 악기편에서는 악기 형태, 부분별 치수와 색깔, 재료, 줄 고르는 법, 연주법까지 그림과 더불어 빠짐없이 적고 있다. 춤을 설명할 때는 연주자와 춤추는 이 몇 명이 어느 방향으로 어디에 자리잡는지, 춤의 절차는 어떠한지, 시시콜콜 기술하고 있다. 61종의 악기, 20여 곡의 음악, 30여 종의 춤, 70여 종의 의상과 소품이 가지런히 망라돼 있다.
'궤범'이라는 제목 그대로 이 책은 음악 시행의 기준이자 실용적 지침서가 됐다. 임진왜란으로 많은 음악인이 죽거나 일본으로 잡혀가고 여러 악기와 문헌이 타버리자 광해군은 '악학궤범'을 다시 찍어 음악을 복원했다. 이후 효종과 영조도 이를 재간행했다. '악학궤범'이 없었더라면, 조선의 음악이 제대로 전승될 수 있었을까 의심스러울 만큼 모델이자 길잡이로 중요하다.
성종은 당시 음악기관인 장악원에 악학궤범 편찬을 명했다. 장악원이 갖고 있던 의궤와 악보가 오래 되어 헐었고 남은 것들도 간략하거나 틀리니 보정하라는 어명이었다. 편찬을 주도한 성현은 문관이면서도 음악에 밝았다. 그가 정치적 마찰로 인해 외직으로 밀려나자 장악원 제조 유자광이 임금에게 진정했다. "경상도 관찰사는 딴 사람도 할 수 있으나 장악원 제조는 (음악을 잘 아는) 성현이 아니면 안된다"는 청에 성종은 바로 다음날 성현을 예조판서로 고쳐 임명, 예조 산하인 장악원을 계속 맡겼다.
오늘날 일반 독자가 '악학궤범'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국역본이 있다 하나 어려운 음악이론을 밝히고 있는 제 1권부터 벽에 부닥친다. 그러나 당대의 여러 악기를 설명한 부분이나 제사나 잔치, 조회 등 왕실과 나라의 여러 행사에 쓰인 춤을 다룬 대목은 약간의 상상력을 발휘한다면 당시 음악이 시행되던 광경을 눈 앞에 보는 듯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다.
국악 전공자를 비롯한 연구자들에는 물론 필독서이다. 우리 음악의 역사가 매우 깊고 성대했음에도 문헌이나 이론적 정비가 불충분하기 때문에 '악학궤범'은 더욱 귀하다. 음악사 뿐 아니라 국어국문학, 전통무용학, 복식사, 의물(공연 소품) 연구에도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사료이다. 체계적이고 종합적으로 쓰여진 이 책의 정밀한 기술 방식은 오늘날 민족 음악학 체계에 비추어 보아도 나무랄 데가 없다. '악학궤범' 연구의 최고 권위자인 음악학자 이혜구 박사는 "추상적인 표현을 쓰지 않고 사실을 있는 그대로 구체적으로 상술한 '악학궤범'의 기술 방식은 우리나라 옛 문헌으로는 보기 드문 것이자 근대과학의 방법론에 비춰 봐도 놀라운 것"이라고 평가한다.
15세기 말 이만한 음악 책을 펴낸 민족도 없을 것이다. 중국에서 먼저 나온 여러 음악 책이 있지만, 내용 면에서 '악학궤범'의 세밀함과 풍부함에 못미친다. '악학궤범'은 조선 최고의 음악 기준서일 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전통음악과 춤을 연구하고 재현할 때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완성도 높은 책으로 자리잡고 있다.
'악학궤범'은 목판으로 인쇄됐다. 나무판에 글씨를 파고 그림을 새기고, 악기나 소품, 의상 등을 일일이 점검하고 칫수를 재어 자료를 정리하는 데 얼마나 많은 사람의 노력이 들어갔을까. 이로 미루어 '악학궤범' 편찬이 당대의 문화 역량을 쏟아부은 국가적 대사업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악학궤범의 역사적 의의
1. 악학궤범 서문에 기술된 것처럼 [시간 예술인 음악]의 형체와 시행하는 법을 기록하여 음악의 전승이 단절되지 않도록 한 것, 악보, 악기 그림, 음악을 시행하는 법에 관한 기록을 통해 보완함, 조선왕조의 음악은 여러 차례의 전쟁과 국가 혼란으로 인해 의례 음악의 단절이 불가피한 때에도 악학궤범을 참고로 국가 예약 제도를 전승할 수 있었다.
2. 조선 전기에 이루어진 폭넓은 악론 연구의 내용을 보여준다. 조선의 독자적인 악학 연구 방법론과 수준 및 한국 음악 이론의 역사적 전개 과정을 알려준다.
3. 궤범이란 기록된 내용을 그대로 따라 하기만 하면 되는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내용을 기술하였다. 국가의 여러 의례에 참여하는 음악인의 수, 의상, 계기, 절차 등을 세밀하게 기록, 악기 설명, 악기 제작 방법, 조현법, 연주법 등을 그림으로 그려 상술, 특히 향악기에 관한 내용은 국악기 연구에 전무후무한 기록으로서 정보의 다양성과 구체성에 국악기에 관한 전 역사상 가장 중요한 기록이다.
4. 삼국 시대 이래로 궁중 공연을 통해 전승되어 온 노래들이 기록
5. 음악뿐만 아니라 국가 의례에 소용된 악가무를 종합적으로 다루었으며, 특히 궁중 정재의 공연 내용 및 의복과 소품 등을 상세히 기록, 국가 의례에서 음악과 춤이 불가분의 관계였음을 보여주며 악가무의 균형 있는 전승이 예악의 위용을 온전히 전승하는데 중요하다는 점을 알려줌, 이처럼 악학궤범의 체계와 상세하고 정확한 정보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드문 음악 관련 기록물임
[악학궤범 악론 연구 | 남상숙 / 민속원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