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파도 일렁이는 동해를 가려면 최단 거리로는 대관령을 넘어야 한다. 대관령을 관통하는 터널 덕분에 영동고속도로로 3시간이면 강릉, 주문진에 닿는다.
- 주문진항구 등대 -
유난히 푸른 바다를 오른쪽으로 끼고 비릿한 내음 가득한 7번 국도를 따라 모래 언덕 너머 파도가 넘실대는 동해를 엿보기로 한다. 아마도 눈앞에 펼쳐지는 곳마다 발길을 멈추게 하리라.
- 끝없이 밀려드는 푸른 물결 -
지경, 남애, 인구, 죽도로 이어지는 아기자기한 포구, 한적한 해수욕장들이 정겹다. 한여름 정열을 뿜어내던 모습과는 반대로 깊은 사유(思惟)에 잠겨 있다. 그래서 삶의 깊이를 음미하고 싶어하는 이들이 겨울 바다를 즐겨 찾아온다. 바다와 포구의 멋에 취해 한참을 달리다 보면 죽도가 나타난다. 반원형 백사장의 오른쪽 끝으로 이어지는 죽도는 높이 50m 정도의 바위산으로 소나무가 대나무가 울창하다. 유난히 대나무가 많이 자라는 탓에 죽도(竹島)라 이름이 붙여진 것이리라. 젊은 날 이 곳 주변 바위에서 여름 피서를 즐기며 낚시를 했던 추억이 새롭다.
- 바위에 와서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 -
다시 북쪽으로 달리면 우리 국토의 38선 경계에 이르고, 이 곳에는 38휴게소가 자리잡고 있다. 휴게소 뒤로 펼쳐진 광활한 바다, 그 바다에 파도가 연신 밀려와 하얗게 부서지는 정경은 보는 이의 가슴을 후련하게 한다. 해안에 쳐놓은 철조망만 없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루 속히 이 곳에 진정한 의미의 안식과 평화가 깃들도록 단절을 의미하는 저 철조망이 걷히는 날을 기대해 본다. 38해수욕장 일명 기사문 해수욕장으로 불리는 해안은 깨끗한 모래밭과 쪽빛 바닷물이 발길을 멈추게 한다.
- 하조대 기암괴석과 노송 -
조금 더 올라가면 하조대가 눈에 들어온다. 하조대부터 낙산까지 이어지는 연장 24㎞의 해안선 주변을 아우르는 낙산도립공원 구간의 시작이다. 하조대 해수욕장은 울창한 소나무 숲을 배경으로 모래밭이 1.5㎞의 길이에 느린 경사로 누워있다. 하조대는 조선 개국공신인 하륜(河崙)과 조준(趙浚)이 고려 말 한때 이곳에 은거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해안에 우뚝 솟은 기암절벽과 노송이 어우러진 경승지답게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고 있다. 푸른 파도가 해안 절벽을 사정없이 할퀴고 있다. 며칠 전 몰아닥친 추위로 파도가 부서져 얼어붙는 바람에 절벽은 하얀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왼쪽의 등대와 오른쪽 조도와 어울려 더욱 아름다운 정경을 연출한다.
- 하조대 바위절벽 아래 출렁이는 파도 -
여기서부터 양양에 이르는 해안에는 동호 해수욕장, 수산 해수욕장, 오산 해수욕장이 연이어 펼쳐진다. 넘실거리는 파도가 아담한 모래사장으로 몰려와 포말을 일으키며 부서진다. 푸른 파도를 보려면 겨울바다를 찾아야 한다는 말이 실감난다. 푸른 바다에 부서지는 파도에 취해 있는 동안 차는 어느새 낙산 도립공원의 북쪽 자락 낙산에 접어들고 있다. 이곳은 불교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 낙산사와 홍련암 및 의상대가 자리잡은 노송 우거진 해안 절벽과 긴 해수욕장이 있어 낙산은 동해를 찾는 이들에게 다양한 볼거리, 즐길 거리를 제공하는 곳이다.
- 낙산사 경내에 우뚝 선 해수관음보살상 -
양양군 강현면 전진리 동해로 길쭉하게 뻗은 야트막한 오봉산에 세워진 낙산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 신흥사의 말사로서 671년(신라 문무왕 11)에 의상(義湘)이 세웠다. 우리나라 3대 관음도량의 하나로 꼽힌다. 경내에는 7층석탑을 비롯하여 원통보전(圓通寶殿)과 그것을 에워싸고 있는 원장(垣墻) 및 홍예문(虹霓門)과 동종, 그리고 경내의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는 국태민안과 동해의 어부들을 보살피는 16m나 되는 해수관음보살상이 자리잡고 있다. 또 그 아래 바닷가 쪽으로 송강 정철이 관동8경의 하나로 노래한 의상대, 홍련암 등이 있어 예로부터 불자를 포함하여 시인과 묵객들이 많이 찾았다. 특히 의상대는 산사 창건자인 의상대사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절벽 위에 세운 정자로 뒤로는 소나무 숲을 배경으로 끝없이 맑고 푸른 동해바다를 마주하고 있어 경관이 빼어나며, 동틀 무렵 일출을 보려고 찾아오는 탐방객으로 항상 붐빈다. 송강은 일찌기 낙산 의상대에 올라앉아 일출을 보며 '상운(祥雲)이 지피는 듯, 육룡이 바퇴는 듯 바다에 떠날 제는 만국이 일위더니 천중의 티뜨니 호발(毫髮)을 헤리로다'라고 그의 관동별곡((關東別曲)에서 노래했다.
- 낙산사에 딸린 암자 홍련암 -
낙산사(洛山寺)의 부속 암자인 홍련암은 암자 법당 바닥에 10cm 정도의 구멍을 내어 절벽 사이로 드나드는 바닷물을 직접 볼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홍련암으로 가는 길옆에는 원효가 설악산 영혈사(靈穴寺)의 샘물을 끌어왔다는 설화를 간직한 석간수(약수)가 있어 오가는 사람들의 갈증을 풀어주고 있다. 또 낙산해수욕장은 경포대와 함께 동해안 최대의 해수욕장이다. 길이 4㎞ 정도의 드넓은 백사장은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있고 수심이 얕아서 해수욕하기에 안전하다. 여름이면 거대한 오토캠프장과 텐트촌이 형성된다. 낙산사 아래 해안 언덕 위에 세워진 낙산비치호텔은 동해안에서 가장 경치가 좋은 리조트 호텔 중의 하나이다.
- 낙산 해수욕장에서 해수욕을 즐기는 모습 -
이어지는 설악해수욕장, 정암해수욕장은 낙산의 규모에 눌려 눈에 잘 들어오지 않지만, 오히려 호젓하게 가족과 함께 즐기기에 적당한 곳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파도를 따라 올라가면 물치항에 이르고, 해산물의 집산지인 물치항 어판장에서는 싱싱하고 다양한 어종을 인근 대포항보다 염가로 판매하고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이윽고 설악산 지구. 설악동으로 들어가는 길의 우측 바닷가에는 깔끔하게 해맞이공원을 조성해 놓았다. 입장료 없이 동해로 떠오르는 해를 감상하기에 제일 적합한 곳이다. 잠수함 해저 탐험의 시발점이기도 하다. 조성된 공원에는 각종 조각 작품들이 있어 이곳을 찾는 이들을 즐겁게 해주고 있다.
- 설악 해맞이공원에서 본 일출 장면 -
해안도로를 끼고 고깃배들이 무시로 들고나는 아기자기한 대포항을 지나 해안도로를 따라가면 속초해수욕장에 이르고, 곧바로 돌아 나오면 청초호가 펼쳐진다. 면적 1.38 km2. 둘레 5 km. 좁고 긴 사주(砂洲)에 의해 동해와 격리된 청초호는 북쪽에 입구가 열려 있다. 이 호수는 선박들이 외해(外海)의 풍랑을 피할 수 있는 천연의 조건을 갖추고 있으므로, 조선시대에는 수군만호영(水軍萬戶營)을 두고 병선(兵船)을 정박시킨 일도 있다. 청초호 주변 바닷가에 있는 "가을동화"의 촬영지 은서네 집과 청초호 주변의 정비된 도로를 따라 엑스포 전망대를 둘러보고 속초항에서 항구의 정취를 맛보는 것 또한 여행의 큰 즐거움이다. 속초항을 나와 북으로 오르면 송강이 선유담(仙遊潭)이라 일컬은 영랑호(永郞湖)와 맞닿은 바다가 또 이어지고 장사동 횟집단지를 지나면서 봉포, 아야진, 천진 해수욕장에 이른다.
- 영랑호의 여명 -
고성군 초입인 토성면 사무소 소재지인 천진 해수욕장은 전형적인 어촌의 정취를 느끼며 해수욕을 즐길 수 있는 곳으로 소설 '국화꽃 향기'에 등장하는 곳이다. 해수욕장 북쪽에 기암괴석과 어우러진 방파제가 있어 바다 낚시에도 적합하리라. 토성을 지나자마자 발길은 청간리 해안에 자리잡은 또 하나의 관동8경인 청간정(淸澗亭)에 닿는다. 송강 정철, 봉래 양사언 등의 사랑을 받았고, 숙종 임금이 이곳 풍광에 반해 시를 읊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팔작지붕의 2층 누각을 12개의 돌기둥이 받치고 있는 특이한 형태의 청간정은 북설악 신선봉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청간정이 동해로 들어가는 해안 기암절벽 위에 세워져 있다. 오래된 소나무 숲 사이 층계와 오솔길을 따라 정자에 올라서서 노송의 가지 사이로 펼쳐진 푸른 바다와 모래사장에 몰려오는 파도를 보는 멋 또한 일품이다. 모래사장에는 오리를 비롯한 바닷새들이 무리 지어 한가롭게 오수를 즐기고 있다. 여기도 해돋이의 명소로 꼽히는 곳이다.
- 노송의 숲 속에 우뚝 선 청간정 -
차는 곧 이어 삼포리에 닿는다. 삼포 해수욕장이 소나무 숲으로 덮여 있기는 다른 곳과 매한가지다. 그런데 이 곳에는 해당화가 유난히 많이 핀다는 것과 '우는 모래'라는 뜻의 명사(鳴沙)로 유명하다. 조선조의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동해안의 모래는 빛깔이 눈같이 희고 더욱이 고성지방의 모래는 사람이 밟으면 소리를 내는데, 그 소리가 쟁쟁하며 마치 쇳소리와 같다"라고 적고 있다. 또 흑도, 백도, 호미섬을 가까이 거느리고 있어 아기자기한 느낌을 준다. 여기서 지척의 거리에 있는 죽왕(오호리)에 이르면 송지호다. 송지호는 화진포와 함께 고니(백조) 도래지로 알려져 있다. 둘레 4km, 면적 66만㎡(약 20만평)로서 울창한 송림과 더불어 주변 경관이 수려한 호수다. 송지호는 옛날에 호수가 아닌 바다였다고 한다. 지금도 바다와 물길이 이어져 있어 도미와 전어 같은 바다 물고기와 잉어 같은 민물고기와 함께 산다. 특히 주변에는 송호정(松湖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송지호는 1977년 국민관광지로 지정되면서 호수와 이어진 백사장이 해수욕장으로 개발되어 피서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백사장 길이가 2km, 폭 100m의 모래가 깨끗하고 수심이 얕고, 전면에는 경관이 수려한 죽도와 어우러져 천혜의 해수욕장으로 알려져 있다.
- 송지호에 날아든 철새들 -
공현진 해수욕장을 지나 진부령과 거진으로 갈라지는 대대리 삼거리에서 통일전망대로 향하는 우측 바닷길로 달리면, 반암리, 송포리를 지나 전형적인 동해안 어업전진기지인 거진항을 들러볼 만하다. 항구 북쪽으로는 활어회를 즐길 수 있는 먹거리촌도 형성돼 있고, 주변 식당에서는 배에서 갓 내린 싱싱한 생선을 구입해 요리하는 생태찌개, 도치알탕 등 지역 특유의 음식들을 맛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거진항은 90년대 이전 명태 등의 어획량의 급증으로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며 형성된 어항이었으나 요즘에는 명태의 어획량이 급격히 줄어들어 활기를 잃은 편이지만 그래도 철을 따라 다양하게 잡히는 어획물로 풍성한 편이다. 부두에선 아낙네들이 1-3월에 많이 잡히는 이면수를 그물에서 따내느라 분주하게 손을 놀리고 있었다.
- 어업 전진기지 거진항에 정박되어 있는 어선들 -
거진항을 둘러보고 돌아나와 거진항 진입로에서 5분 정도 해안도로를 타고 가면 백섬이라는 섬이 보인다. 이 백섬은 고성지역에서는 가장 가까이 보이는 기암괴석의 섬이다. 여름에는 이곳에서 해수욕을 즐길 수도 있다. 이곳은 거진항과는 달리 한가로운 분위기를 연출하는 곳이다. 바다 풍광에 취해 있는 동안 차는 곧 화진포에 도착한다. 화진포는 동해와 연접해 자연풍광이 수려하고 호안선 길이 16 km, 면적 72만평에 달하는 광활한 호수로 강원 지방기념물 제10호로 지정되어 있는 곳이다. 주위에 울창한 송림이 병풍처럼 펼쳐진 국내 최고의 석호(潟湖)이다. 담염호(淡鹽湖)로 연어·숭어·도미·숭어·향어 등 어족자원이 많고, 염도가 높아 잘 얼지 않는 데다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물과 갈대 숲 속에 먹이가 풍부하여 철새들에게 알맞은 휴식처가 된다. 겨울에는 천연기념물 제201호인 고니 등 수많은 철새들이 찾아와 장관을 이루는데, 새하얀 고니떼가 노니는 모습은 '백조의 호수'를 연상케 한다.
-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화진포 호수 -
주변의 풍광이 빼어난 곳에 수복 전까지 김일성이 사용했다는 김일성 별장이 있고, 호수 주변에는 이승만 대통령 별장과 부통령 이기붕의 별장이 있다.
- 화진포 호반에 자라잡은 이승만 별장 -
호수와 바다와 사이에는 수만 년 동안 조개껍질과 바위가 부서져 만들어진 모래로 뒤덮여 있는데, 이 모래 역시 모나즈 성분으로 이중환의 택리지에 한자로 '명사(鳴砂)'라 기록돼 있고, 해변은 수심이 얕고 물이 맑을 뿐더러 가까운 거리에 금구도(섬)가 있어 절경을 이뤄 해수욕장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 김일성 별장에서 바라본 화진포 앞섬 금구도 -
김일성 별장 앞에 서서 탁 트인 바다를 바라보면 막혔던 가슴이 일시에 풀리는 듯하고, 북쪽 해안으로 아슴한 시야로 통일전망대 뒤 지금은 북한 지역에 있는 그 유명한 삼일포를 볼 수 있다. 또 해안 가까운 곳에 세계적 희귀 조개, 산호 물고기 화석 등 1,500여종, 4만여 점을 전시한 화진포 해양박물관이 있으며 지석묘 등 문화유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 화진포의 쪽빛 바다 -
파도 넘실대는 파도를 따라 더 북쪽으로 올라가면 민통선을 넘어 민간인 출입 통제선에 위치한 통일안보교육관(거진읍에서 11㎞ 거리)이 있고, 이곳이 통일전망대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여기서 간단한 출입신고 절차를 거쳐 15분 짜리 안보영화를 관람한 후 차량출입증을 받아, 여기서부터 명파리, 저진리, 송현진리를 거치는 10㎞ 지점의 해발 700m 능선 위에 세워진 통일전망대에 당도한다. 우리나라의 가장 북쪽에 있는 관측소인 셈이다. 이 곳에 휴전선 이북에 있는 금강산과 해금강의 신비한 경치를 볼 수 있는 전망경을 설치해 놓고 있다.
- 주차장 쪽에서 올려다본 통일전망대 모습 -
금강산 육로 관광이란 특수한 목적 이외에는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땅. 그래서일까. 이 곳 경내에는 통일기원 범종과 통일기원미륵불상, 성모마리아상, 전진십자철탑, 351고지 전투전적비가 세워져 있으며, 각도의 특산 바위 13개로 우리나라 지도 모형으로 만든 '민족의 웅비석탑'이 전시되고 있다. 해안을 따라 설치된 철조망이 육지로 이어져 격리되어 있는 저쪽 땅을 밟을 수 있는 날이 언제일까. 전방을 주시하고 서있는 경비병의 눈초리에 경계를 풀 수 있는 날은 언제 올 것인가. 나는 여기서 안타까움을 안고 동해를 따라 신나게 달리던 차를 이쯤에서 되돌려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