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한일미래불교연구
 
 
 
카페 게시글
일본에 관한 자료 스크랩 가유약 장군
진관 스님 추천 0 조회 168 19.01.08 14:2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가유약  장군

가상 유격장군   

가침 병부종사관 

3대의 충효: 2충 1효

 

    구분     충신

    시대     조선

   

내용 :

명나라 병부상서 가공 휘 유약의 자는 무경이고 호는 자백당이며 중국 소주를 본관으로한 한국의 소주가씨의 증시조이시다.

공은 원래 중국인으로서 명나라 신종서의 병부상서겸 직방사 계요도찰사를 지내시던중, 1592년에 선조 25년에 왜적이 36추 제도병력을 합하여 60만대군을 청정, 행장등 30여추가 이끌고 대마도로부터 동래의 부산에 몰려 침습하여 불과 20일만에 서울이 무너지고 평양과 의주로 천도하는 유사이래 미증유의 대란위급(大亂危急)에 조정에서는 이덕형등으로 명조에 구원을 청하였던바 명나라 신종제 혁노하사 단호섬왜지의 전후 7년간을 속발(續發) 30여만의 군사를 이제 독 여송과 도어사 양호와 1593년 계사(癸巳)에 상소공 가유약 께서 명제의 조서를 받아 옥절보도를 가지고 동원 제장에게 정공행상(定功行賞 : 공차를 정하여 시상을 함)하고 격우시주(소를 잡아 술로호군함)하여 대호군인하니 제군의 환성이 우뢰와 같았고 사기가 충천하여 그 기세로 왜적을 물리치게 되어 평양의 왜적이 패하고 서울 이남으로 도망하므로서 서울이 수복되었다. 1596년 7월에 복명(復命)하시되 왜적이 청항중(請降中)이나 아직 그 군세가 강함에 대비할 것을 주달(奏達)하였다. 과연 1597년 정유에 왜적은 야욕만행을 고치지 못하고 재란을 일으킨지라 마귀, 만세덕, 유적, 진린등 제장과 더불어 상서공 가유약도 아들 유격장군공 상과 손자 병부종사관공 침을 데리고 우리 나라를 돕고자 들어왔다. 아들 유격장군은 휘하 정예부대 일만이천이백(12,200)명을 거느리고 먼저 안주에서 마제독을 만나본후 각지를 전전하며 싸우다가 소사평에서 큰 승리를 거두고 적을 추격하여 울산, 동래, 부산포구에 이르렀다.

그런데 그 아들은 자신의 재주와 무용만 믿고 너무깊이 적중으로 쳐들어갔다가 라자성(고등형으로 돌고돌아 올라감)안에 겹겹으로 포위되어 수만명의 큰적과 격전하여 무수히 베었으나 끝내는 빠져나오지를 못했다. 이때 아버지 상서공은 나머지 병사를 재촉하여 곧장 적의 소굴에 쳐들어가 구하려 하다가 아들과 같이 분전 격투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장렬히 전사를 하였다. 손자 침공은 마제독 영내에 있다가 이 급변을 듣고 원수를 갚고자 돌진하려 하였으나 마제독의 만류로 뜻을 못 이루고 조여부(組與負)의 시체를 거두어 경상도 울산 도독동 남록에 안장하였고 마제독이 비를 세웠다.

아 슬프도다. 삼세가 원정 나왔다가 부조는 동순하시고 홀연이 이국유고(異國遺孤)가 된 손자 침공 고지호천 통곡해도 천추의 한이 풀리 수는 없었을 것이다.

종전 후 마제독이 본국으로 돌아갈 때 침공을 데리고 돌아가려 하였으나 공은 "부·조의 무덤을 두고 감히 어디로 떠나 가리오"하고 굳이 거절하자, 장군은 이를 가상히 여기고 집과 여막을 지어주고 돌아갔다고 한다. 그리고 침공께서는 애호로써 조여부의 묘소를 수호하시고 왜적의 방향을 향하여는 앉지도 아니하셨으며 원수를 갚고자 하는 뜻은 한시도 잊지 아니 하셨다하며 이역만리 이국땅에서 부·조를 잃고 묘소만 수호하시며 외롭고 슬픔에 멍든 인생을 어떻게 참고 견디셨을까? 후손 된 자들도 마음이 뭉클했다.

그 후 철종조에 와서 부조지전이 내려져 태안군 남면 양잠리에 충효사가 세워져서 이충일효를 기리며 매년 음 10월 14일에 제향하고 있다.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