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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당 김은호는 (1892~1979) 서화미술회에서 심전 안중식 소림 조석진의 제자로 화과3년 서과3년 과정을 마친 구한말 어진화가였다. 일제시대에는 내선일체를 표방하며 조선 화단을 장악하려 일본작가들의 조선진출을 시도한 총독부의 문화정치를 견제하는 조선화단의 활동의 중심에 있었고 후에 금차봉납도와 님의 부름을 받고 등 친일 전쟁 독려에 이용된 작품을 그려 친일 작가로 분류되어 해방후 화단에서 소외 되기도 했다. 그러나 후소회의 제자들이 대한민국 건국시기 한국화단의 핵심적인 위치에서 활동하는 등 정치적 담론을 걷고 보면 근현대 한국화단의 가장 중추적인 화가로 일생을 살았다.
1919년 3.1운동때는 독립신문을 배포하다가 체포되어 1년 형을 언도 받고 6개월 옥고를 치루기도 했다.
1925년 부터 28년까지 일본유학을 통해 서양화법의 영향을 받은 일본 화풍을 익혔다.
1937년 11월 일제군국주의에 동조하는 내용의 금차봉납도를 의뢰 받아 그렸다.
애국금차회는 1937년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결성된 단체로 국방헌금 조달과 황군 원호에 앞장서기 위해 귀족이나 관료 부인 등이 주축을 이룬 여성단체이다. 애국금차회는 결성식 날 즉석에서 금비녀 11개, 금반지와 금기지개 각각 2개 , 은비녀 1개, 현금 889원 90전을 모아 용산 주둔 조선군사령부 후카자와 중장을 방문하고 헌납식을 가졌다.
이광경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하여 김은호에게 의뢰하였고 2개월 동안 작업하여 11월 <금차봉납도>를 완성하였다. 김복수와 애국금차회 간부들이 총독 미나미에게 이 그림을 증정하고 총독부 내에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공간에 걸어두는 동시에 엽서로 인쇄하여 황군위문대에 넣어 보내게 되었다'라는 기사가 실렸다. 김복수의 남편 윤덕영과 김은호는 친분 관계속에서 제작되었다.
김은호가 어용화사로 발탁되었을 때 윤덕영의 옷을 빌려 입고 궁중에 출입하며 친분을 이어온 관계였다.
1941년 2월 화가로서 천황을 위해 <화필보국 및 회화봉공>하고자 결성된 조선미술가협회에 일본 화부 평의원으로 참여했다.
해방후 , 일제 강점기 활동경력 때문에 해방 직후 결섣된 조선미술건설본부에서 이상범, 김기창, 김인승, 심형구, 김경승, 윤효중 등과 함께 제외당하였다. 그러나 미군정 이후 친일파의 재기용에 힘입어 대한미술협회와 대한민국 미술 전람회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미술계에 영향을 행사했다.
그는 1962년 서울시 문화상, 8.15해방 17주년 기념 문화훈장, 1965년 3.1문화상 예술부문 본상, 1968년 대한민국 예술원상, 1976년 제11회5.16민족상 학예부문 본상을 받았다. 1966년에는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에 선정됐다.
그 그림을 그리던 손으로 이순신, 정몽주, 신사임당, 논개, 성춘향까지는 괜찮다. 안중근, 서재필까지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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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殷鎬(김은호) 畵伯(화백)의 力作(역작) 金釵献納(금차헌납)[3] 完成(완성) 二十日 금차회의 간부로부터 南總督(남총독)에게 進呈(진정)[4] |
그의 친일 행적 중에서 〈금차봉납도〉가 가장 유명하다. 국방헌금 조달과 황군 원호에 앞장서기 위해 귀족이나 관료 부인 등이 주축을 이룬 여성 단체인 애국금차회가 결성식 날, 조선군 사령부 후카자와 중장에게 금비녀 11개, 금반지와 금기지개 각각 2개 , 은비녀 1개, 현금 889원 90전을 헌납하였는데, 〈금차봉납도〉는 이 광경을 기념하기 위하여 김은호가 2개월 동안 노력한 역작이다. 이 작품은 김복수[5]와 애국금차회 간부들의 손을 거쳐 총독 미나미 지로에게 증정되었고 총독부 내에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공간에 걸어두는 동시에 엽서로 인쇄하여 황군위문대에 보내기도 했었다. 이 사실은 당시 기사(『매일신보』, 1937.11.21)에 실렸다.
운보 김기창의 님의 부르심을 받고서, 아들을 보내는 아버지와 수건을 둘러싼 어머니의 애잔한 모습에 속지마라. 이 그림의 목표는 아들을 일본제국주의의 부름을 받고 떠나는 것을 자랑스러워하고 이것이 본분임을 선전하기 위한 그림이다.
[출처] 김주석과 친일화가들의 그림|작성자 Late Bloo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