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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뽀롱뽀롱뽀롱뽀롱.. 뽀로로.. - 에노크
왜? 분석할 것이 없어서 이젠 '뽀로로'까지 분석하냐? 물으시면 할말이 없습니다만, 5월 가정의 달과 어린이날 특집으로 하면 어떨까?하는 생각에 과거 통일부 공식블로그에 게시되었던 '뽀로로 탄생의 비밀'이란 글을 다시 꺼내 봤습니다. 근데 왜 '뽀로로'냐? 물어 보시겠지만 근래 기사화 되고 또 미리부터 알고 계신 분도 많이 있을 것이라 생각 됩니다. 아시던 분은 그냥 지리한 시기 심심풀이 글 한번 읽는다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우선적으로 얘기한다면, 지난 2003년 EBS TV 애니메이션으로 첫 선을 보인 이 유명한 세계적인 뽀통령의 '뽀로로'는 남북합작 3D 애니메이션입니다. 가정의 달 특집글을 위해 몇일전부터 이것저것 자료를 찾던중 '뽀로로'와 '게으른 고양이 딩가'외에도 경기디지털콘텐츠진흥원과 북한삼천리총회사가‘(주)라비린스’의 애니메이션을 공동 제작. 남북이 공동 제작한 어린이용 3D애니메이션 '상상아 놀자!' 가 2007년 SBS TV를 통해 방영된 적이 있고 당시 KBS에서 방영중인 <사육신>도 남북 공동제작 형식으로 만들어져 애니메이션과 이런 영상분야에서의 남북공동제작은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져 왔습니다. 이글은 '뽀로로'를 중심으로 얘기 하겠습니다. 깊이있지는 못하더라도 자라나는 어린이들의 우상인 뽀통령이 우리 한민족인 북과 남의 협력사업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안다는 것 자체가 어린 새싹들의 통일교육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뽀로로'는 이후 2004년부터 프랑스 TF1에서 방영돼 평균 시청률 47%의 경이적인 기록을 세우면서 화제가 되더니 영국, 인도, 멕시코 등 세계 82개국에 수출되고 애니메이션을 시작으로 온라인, 영상, 출판 등으로 분야를 넓혔고 식음료, 팬시, 패션, 완구, 비디오, 문구, 학습용 게임 등 무려 2000가지가 넘는 캐릭터 상품으로 개발돼 해외 매출은 2,000억원 이상에 달한다고 합니다. 얼마나 인기가 있었으면 2010년 영상물 불법 복제 1위가 바로 `뽀로로`였다는 사실(문화체육관광부)은 이를 대변합니다. `뽀로로`의 불법 복제 건수는 미국 드라마 `프리즌 브레이크`(2,168건)를 능가하는 5,156건에 달했답니다. 또 2004~2008년 국내 `뽀로로` 관련 상품 매출은 1조원을 넘었다고 하네요.
일단 먼저 통일부 공식블로그에 게시되었던 '뽀로로 탄생의 비밀'이란 글을 보겠습니다.
뽀로로 탄생의 비밀
요즈음 아이들의 대통령이라고 불릴 정도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만화가 있다면 단연 바로 귀여운 펭귄 <뽀롱뽀롱 뽀로로>일 것이다. <뽀롱뽀롱 뽀로로>는 사계절 내내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어느 숲 속 마을에 사는 뽀로로와 친구들이 겪는 좌충우돌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뽀로로의 인기는 우리나라를 넘어 전세계 82개국으로 수출되었고, 프랑스에서는 평균 시청률 47%를 달성하는 기염을 토했다.
뽀로로 캐릭터(이미지출처 : http://www.pororo.net)
그러나 일명 '뽀통령'으로 불릴 정도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이 만화가 우리나라 순수 토종 캐릭터, 그것도 남북이 합작해서 만들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뽀로로는 우리나라 아이코닉스가 기획하고 오콘, SK 브로드밴드, EBS, 그리고 북한의 삼천리총회사가 함께 제작한 남북 합작 애니메이션이다. 남북한의 공동제작으로 탄생한 만화영화이기에 전세계 82개국 수출 등, 이러한 성과에 대한 의미는 더욱 크다고 할 수 있다.
사실 북한은 애니메이션 제작에 우수한 인력들이 많이 있다. 북한에서는 모든 미디어가 체제 유지에 이용되기에 아이들이 접하는 만화영화에도 많은 공을 들여 제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북한에서는 이러한 인재를 뒷받침해 줄 기술력이 부족한 게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뽀롱뽀롱 뽀로로>는 이러한 남북의 상황을 적절히 잘 활용한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애니메이션의 남북경협을 통하여 우리나라는 북한의 우수한 인재를 저렴하게 이용하였고, 북한도 우리나라의 IT기술을 전수받아 그들의 애니메이션을 발달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었기 때문이다.
사실, <뽀롱뽀롱 뽀로로>가 첫 남북합작 애니메이션은 아니다. 이미 뽀로로가 제작되기 이전에 하나로 통신과 삼천리 총회사가 제작한 ‘게으른 고양이 딩가’가 존재한다. 딩가의 캐릭터 기획은 우리나라 FACE 회사가 하였지만, 실제 제작은 삼천리 총회사가 3D맥스, 소프트 이미지 등 고급 그래픽 툴을 적용하여 실질적인 제작을 하였다. 편당 1분씩 총 33편으로 이루어졌으며, 움직이기를 너무 싫어하는 아기 고양이 딩가가 게으른 천성 때문에 일상의 어려움을 겪는다는 줄거리를 갖고 있다. 이 애니메이션은 ‘2001 대한민국 영상만화대상’에서 캐릭터 디자인상을 수상하였다.
게으른 고양이 딩가 (출처:하나로통신)
이 애니메이션은 '뽀통령' 뽀로로가 탄생하기 전의 중요한 밑거름 역할을 하게 되어, <게으른 고양이 딩가>가 제작된지 정확히 5년 후 뽀로로가 탄생하게 된다. 뽀로로는 2003년 이탈리아 포지타노에서 열린 ‘카툰스 온더 베이’, ‘프랑스 안시 페스티벌’, ‘서울 SICAF 영화제’ 등에서 경쟁작으로 선정되었으며, 정보통신부에서 주최하는 ‘2003 디지털 콘텐츠 대상’에서 국무총리상을, 문화체육관광부 주최의 ‘2003년 대한민국 만화 캐릭터 대상’에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을 받았다. 현재 치솟는 인기로 우정사업본부에서는 2011년 첫 우표로 뽀로로 우표를 발행하였고, 현재 김연아 우표를 제치고 판매 9일만에 전체 400만장의 80%인 320만장이 판매되었다. 이러한 인기 행진으로 인해 앞으로도 뽀로로 관련 용품들은 계속해서 제작될 전망이다. 이는 북한과 우리나라의 문화적ㆍ기술적 경협의 좋은 예로 기록될 것이며, 앞으로도 이러한 선례를 이어받아 애니메이션 분야 뿐만 아닌 모든 분야에서의 WIN-WIN 전략을 구사하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끝)
출처(통일부 공식블로그) : http://blog.daum.net/mounification/8768535
연이어 최근 오마이뉴스 기사를 보시겠습니다.
뽀로로 출생의 비밀, 아셨습니까? - 2011.05.04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561452&CMPT_CD=P0000
남측의 IT기술력과 북측 인력이 결합된 남북합작 애니메이션
어린이 날을 앞두고 '뽀통령(뽀로로+대통령)'의 인기가 대단하다. 최근 <1박 2일> TV프로에서 '뽀통령' 때문에 아들에게 굴욕당한 강호동의 사연이 소개되면서 인기는 더욱 확산되었다. 최근 뽀로로의 인기를 대변하듯 어린이날을 앞두고 백화점과 대형마트 진열장은 뽀로로 캐릭터 상품이 즐비해 있고, 많은 기업들이 뽀로로를 마케팅에 활용하고 있다. 5월 3일자 <파이낸셜뉴스> 보도에 따르면 '백화점, 대형 마트에서는 어린이날 선물을 준비하는 부모 등을 위해 최대 700종이 넘는 뽀로로 상품을 판매'하고 있고, '베이커리 전문점에서도 진출'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뽀로로 통장과 우표까지 등장했다. 뽀로로의 인기는 국내에 국한되지 않고 프랑스, 영국, 일본, 중국 등 100여 개국에 수출되고 있다. 그중 프랑스에서는 최고 지상파 채널인 TF1에서 57%의 시청률을 기록하기도 했다. 뽀로로의 가치에 대해 올해 초 서울산업통상진흥원(SBA)에서는 브랜드 가치가 3893억 원에 달하고, 연간 로열티는 120억 원이라고 발표했다.
뽀로로는 어느 나라에서 만들었을까?
그런데 국내뿐 아니라 전 세계적 흥행몰이를 하고 있는 뽀로로는 어느 나라에서 만들었을까? 뽀로로는 '자그마한 사람이나 짐승이 부리나케 달려가거나 쫓아가는 모양'을 뜻하는 '뽀르르'라는 순우리말을 변형한 말로, 2002년에 남측의 아이코닉스가 기획하고 에스케이브로드밴드(당시 하나로 통신)과 오콘, EBS와 더불어 북측의 삼천리총회사가 공동으로 제작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남북 합작품인 것이다. 하지만 최근 뽀로로의 인기에 대해 보도하는 많은 언론들 중 뽀로로의 출생의 비밀(?)까지 알려주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뽀로로는 남측의 IT기술력과 북측의 인력이 결합된 남북합작 애니메이션이다. 이외에도 우리는 남북합작의 경험들을 가지고 있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중단되었지만, 남측의 자본과 북측의 자연경관을 합작한 금강산관광과 개성관광이 있었고, 남측의 기술과 자본, 북측의 인력이 결합된 개성공단은 여전히 가동 중에 있다. 남북이 더 많은 합작을 하게 된다면 어떨까? 7000조 원 규모로 추정되는 북의 지하자원과 남측의 기술과 자본이 합작하면 부강해질 것이고, 박지성과 정대세가 같은 팀에서 함께 뛴다면 더욱 강한 축구팀이 될 것이다. 남북은 2007년 10·4선언에서 '유무상통'이란 표현으로 더 많이 합작할 것을 다짐한 바 있으나, 현재 합의사항이 지켜지고 있지 않아 안타까울 뿐이다.
5월 5일은 어린이 날이다. 아이들에게 뽀로로 캐릭터가 담겨 있는 선물을 하게 된다면, 뽀로로의 출생의 비밀도 함께 말해주면 어떨까? 아이들이 그들의 대통령, '뽀통령'이 남북 합작에 의해 탄생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 있는 통일교육이 될 것이다. (기사 끝)
이젠 다 아시겠지만, 오늘의 주제인 '뽀로로'는 우리나라 아이코닉스가 기획하고 오콘, SK 브로드밴드(과거 하나로 통신입니다), EBS, 그리고 북한의 '삼천리총회사'가 함께 제작한 남북 합작 애니메이션입니다. 오마이뉴스 기사에서 당시 남측의 IT기술력과 북측의 인력이 결합된 남북합작 애니메이션이라고 했지만 '농협 전산망 마비가 북한 소행' 이라면 그 IT기술력이 이젠 역전 현상이 온것 인가요? 이건 주제에 벗어나니 그만 얘기하고요, 기사 말미에 '7000조 원 규모로 추정되는 북의 지하자원과 남측의 기술과 자본이 합작하면 부강해질 것'이라는 문구는 마음을 훈훈하게 합니다. 그럼 이쯤에서 '삼천리총회사'는 어떤 곳인지가 궁금해 집니다. 뭐 제가 통일부 관계자도 아니고 뽀로로 애니메이션 제작자도 아닌이상 100% 정확히는 알수 없으나 그래도 무대뽀로 자료 찾아 봅니다. 일단, 북측의 무역기관을 알아야 이해가 가능합니다. 이하 KIEP·조선일보 자료를 인용합니다.
" 북한에서 대외무역을 하는 기관은 민간경제부문과 특수경제부문으로 이원화되어 있습니다. 민간경제부문은 내각 산하 정부부처들과 지방정부 무역기관이 담당하는 무역회사를 말하고, 특수경제부문은 노동당과 인민무력부 등 소위 권력기관들이 독립적으로 운영하는 무역기관들을 말합니다. 민간경제부문은 내각 산하 무역성, 건설 건재공업성, 농업성, 화학공업성 등 30개 이상의 정부부처가 각각의 무역회사를 운영하고 있으며, 11개 도(道)의 지방정부도 별도의 무역회사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 중에서 가장 많은 무역회사를 운영하는 부처가 '무역성'입니다. 무역성은 내각의 대외경제협력 전반을 관장하는 정부행정기관으로 무역업무, 세관업무 및 운송, 무역가격결정, 일부 대남교역 등을 담당합니다."
" 한편 특수경제부문인 노동당 쪽에서는 대성무역총연합회사(대성총국), 광성무역회사 등 무역회사들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특히 노동당의 대남 경협전문기구인 민족경제협력련합회(민경련)는 남한과의 직·간접교역을 위한 기관으로 그 산하에 광명성총회사(피복·경공업·농수산분야), 삼천리총회사(전자·중공업·화학분야), 개선무역회사(농업분야), 새별총회사(피복임가공분야), 금강산국제관광총회사, 고려상업은행 등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총회사별로 업종 분담이 되어 있지요. 한편 북한 군부가 용봉총회사, 용광무역회사, 부광무역회사, 국제화학연합회사, 국제화학합영회사와 같은 무역회사를 운영하면서 군수생산에 필요한 물자와 외화를 조달하고 있습니다." [출처 : KIEP·조선일보 자료인용]
대남 경협전문기구인 민족경제협력련합회(민경련)의 남한과의 직·간접교역을 위한 기관으로 '전자·중공업·화학분야'를 담당하는 것이 '삼천리총회사' 입니다. 아.. 이젠 저도 이해가 가네요. 과거 기사를 몇가지 살펴보니 1995년에도 남북교역의 창구역할을 담당하던 곳이였습니다. 당시 1995년 6월 20일 동아일보 기사엔 직접투자나 쌀지원등이 있었고 당시 남북경협의 창구역할을 해온 '고려민족산업발전협의회'의 기능을 삼천리총회사(현재, 전자·중공업·화학분야), 광명성총회사(현재, 피복·경공업·농수산분야)에 부여한 시점입니다. 몇개의 기사를 더 보시죠.
<1995년 6월 20일 동아일보 기사>
<1996년 4월 30일 매일경제 기사>
<1998년 3월 5일 경향신문 기사>
1996년 4월 30일 매일경제 기사에선 당시 남포공단에 시범사업으로 대우와 삼천리총회사가 50%씩 지분을 가진 '민족산업총회사'를 만들고 사장은 삼천리총회사측이 맡는다고 합니다. 당시는 셔츠, 블라우스, 재킷, 가방등 경공업 부분 이였군요. 1998년 3월 5일 경향신문 기사에는 'IMF 극복'의 차원에서 DJ정부 출범시 대선공약했던 남북간 경협확대로 이어집니다. 당시 대우외에도 LG가 남포지역에 전자제품 공장을 추진하고 삼성도 나진, 선봉지역에 통신센터 건립을 재추진하고 현대도 금강산 개발사업에 적극 나서는등 남북협력사업의 다양화가 시작됩니다. 아마 삼성의 통신센터 건립이 잰행되지 않고 이집트 오라스콤사(75% 투자)하고 북한 체신성(25%를 투자)이 만든 합작회사 ‘고려링크'가 이 역할을 대신한 듯합니다. (출처 : 곽동기의 오늘의 북한산업-13) 이런 차원에서 '뽀로로'의 북남간 협력사업도 50%던 그 이상이던 각기 지분이 있을 것이라는 예상이 됩니다. 그 이후 2005년 몇가지 기사를 참고 차원에서 더 올립니다.
북한 삼천리 기술회사와 단말기 공동개발 - 2005
http://www.dailynk.com/korean/read.php?cataId=nk09000&num=12493
중견 휴대전화 제조회사인 VK[048760]는 북한 삼천리 기술회사와 세계 최초로 한글지원이 가능한 GSM(유럽통화방식)폰과 VK 계열사인 VMTS 기술 기반의 소프트웨어(SW)를 공동 개발하기로 했다고 28일 밝혔다. VK는 2003년 9월부터 삼천리 기술회사와 수차례에 협의를 진행한 끝에 지난 26-27일 이철상 대표 등 경영진 3명이 방북, 구체적인 실천계획을 최종 합의했다. 이에 따라 삼천리 기술회사의 박사급 연구원 10명은 다음달 20일께부터 중국 베이징(北京) 소재 VK연구소에 2년간 상주하면서 VK 연구원들과 함께 공동 연구개발을 진행할 예정이다. 이철상 대표는 “이번 합의를 계기로 북한과 경협사업이 서로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확대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면서 세계 최초의 한글입력 방식 GSM폰 개발에 큰 기대감을 표시했다. 삼천리 기술회사는 중국의 정보기술연구단지를 방문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소프트웨어 집중 육성 지시에 따라 전자업종을 중심으로 한국과 경제협력사업을 수행하던 삼천리 총회사가 한국 기업들과 소프트웨어개발 및 관련 사업 공동추진을 위해 지난 2002년 평양에 설립한 회사이다. 주요 사업 부문은 소프트웨어 개발 및 제작, 3차원(3D) 애니메이션 제작, SW 개발인력 양성, 인터넷, 휴대전화 등이다. 최근 북남교역과 공동으로 휴대전화용 모바일 게임 ’독도를 지켜라’의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등 한국 기업들과 다양한 협력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끝)
KT, 북측 삼천리총회사 및 조선컴퓨터센터와 공동 심포지엄 - 2005
http://www.etnews.co.kr/200511020013
남북한이 음성인식, 홈네트워크 서비스등 9개 분야에서 공동 연구과제를 수행하게 될 전망이다. 2일 북한의 금강산호텔에서 개막된 남북한 공동 심포지움에서 KT는 음성인식 등 5개 연구과제를 북측의 삼천리총회사와 조선콤퓨터쎈터에 공동 수행할 것을 제안하기로 했다. 북측도 KT에 홈네트워크 서비스등 4개 공동 연구과제를 제안할 예정이다. 4일까지 사흘간 계속되는 이번 심포지엄은 지난 4월 KT와 삼천리총회사가 체결한 남북공동연구개발협약서 후속 조치로 양사는 올해 남북공동연구개발 협약을 통해 ‘연속 음성인식프로그램 개발’ 등 2개 과제를 함께 연구하기로 하고 연구기간 중 남북 공동 기술협의를 갖기로 했다. KT는 “공동 연구과제로 채택된 과제에 대해서는 개발을 위한 세부 추진절차 및 일정까지 협의하기로 해 향후 지속적인 교류와 협력이 가능할 것”이라고 밝혔다. (끝)
하나로텔레콤, 북한 삼천리총회사와 뽀로로 후속편제작 계약 - 2005
http://www.dt.co.kr/contents.htm?article_no=2005051302010631673002
하나로텔레콤(대표 윤창번)은 북한 삼천리 총회사와 함께 전면(Full) 3D 애니메이션 `뽀롱뽀롱 뽀로로`의 후속작 `뽀로로와 친구들(가제ㆍ사진)'을 제작하기로 합의하고 최종 계약을 체결했다고 12일 밝혔다. 하나로텔레콤은 2000년 8월, 초고속인터넷 장비의 임가공 및 바둑 프로그램 등 북한이 제작한 소프트웨어 수입 계약으로 삼천리 총회사와 첫 인연을 맺은 이래, `게으른 고양이 딩가'와 `뽀롱뽀롱 뽀로로' 만화영화를 공동 제작해 왔다. 이 회사 관계자는 "남북경협을 통해 하나로텔레콤은 북측의 우수한 인력을 상대적으로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었고, 북측은 남측의 우수한 IT 기술력을 전수 받아 자체적인 IT 경쟁력을 높이는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고 그간의 사업을 평가했다. 특히 만화영화 제작 부문에서 2001년, 국내 최초 남북합작 만화영화로 주목받았던 `게으른 고양이 딩가'는 당시 스팟 형식의 1분짜리 만화영화로 출발했지만 5년이 지난 지금은 5분 분량의 `뽀롱뽀롱 뽀로로'를 공동 제작할 수 있을 정도로 북한 IT기술의 향상을 이끌어냈다. 이번에 하나로텔레콤이 삼천리총회사와 공동제작하는 `뽀로로와 친구들'은 양 사를 비롯, 오콘, 아이코닉스, EBS 등 우리나라 업체들이 공동 참여하는 5분 분량의 52편 짜리 3D 애니메이션으로, 오는 11월 국내 TV를 통해 첫 선을 보일 계획이다. 하나로텔레콤의 권순엽 부사장은 "남측과 북측의 경제 협력은 민족간 교류라는 역사적 의미도 있지만 서로가 필요한 것을 주고받는 경제적인 측면에서 더욱 의미가 크다"면서, "앞으로 하나로텔레콤은 IT 분야의 대북 경제협력에 일익을 담당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끝)
'삼천리총회사'의 주요 사업 부문은 소프트웨어 개발 및 제작, 3차원(3D) 애니메이션 제작, SW 개발인력 양성, 인터넷, 휴대전화 등이었네요. 세계 최초로 한글지원이 가능한 GSM(유럽통화방식)폰과 VK 계열사인 VMTS 기술 기반의 소프트웨어(SW)를 공동 개발 그리고 음성인식, 홈네트워크 서비스등 9개 분야에서 공동 연구과제를 수행, 2001년 국내 최초 남북합작 만화영화로 주목받았던 `게으른 고양이 딩가'에 이어 `뽀롱뽀롱 뽀로로`의 후속작 `뽀로로와 친구들'을 제작하는등 지속적으로 진행되어 왔네요. 당시 최초의 '뽀로로'인 3차원 만화영화 ‘뽀로로와 친구들’을 공동제작하기로 합의하고 계약을 체결할때 북측의 저작권에 대한 남쪽에서 행사하는 부분도 다뤄집니다. 현재까지 어떻게 저작권이 관리되는지는 알수 없으나 당시 자유아시아방송의 기사로 대신합니다.
북한, 남한에서 저작권 행사 - 자유아시아방송(저작권 관련)
한주간의 북한경제소식을 전해드리는 ‘라디오 장마당’, 오늘은 '북한, 남한에서 저작권 행사'편이 되겠습니다. 진행에 이규상 기자입니다. 사실상 남한에서 불법으로 유통됐던 북한의 저작물들이 남한에서 저작권리를 찾게 됐습니다. 사단법인 남북경제문화협력재단은 지난달 24일 기자회견을 갖고 북쪽의 저작권 이용은 북측 저작권 사무국의 공증 확인서와 저작권자의 승인이 함께 있어야 한다는 내용으로 북한 저작권 이용 절차에 대한 합의를 했다고 밝혔습니다. 이에 따라 남한에서 유통되는 모든 북한 노래와 영상물 그리고 서적 등은 앞으로 북한 측에 사용료를 지불하도록 됐습니다.
<남한, 북한 저작권 이용 절차 합의>
벽초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을 무단 출판해 오던 남한의 출판사가 이 소설에 대한 저작권료 15만달러를 북측에 지불하기로 했습니다. 남한의 한 영화사가 홍명희의 손자이자 북한 작가인 홍석중의 소설 ‘황진이’를 영화로 만들 계획입니다. 이 영화사는 저작권료를 북측에 지불하게 됩니다. 이러한 움직임은 남한의 남북경제문화협력재단과 북한 저작권사무국 측과의 합의에 따른 것입니다.
<북한, 남한에서 저작권 행사>
지금까지 북한의 문학작품들이나 음반, 영상물들은 남한에서 무단 출간을 해도 별 문제가 없었습니다. 북한은 지난 2003년 국제 저적권 보호조약인 ‘베른조약’에 서명을 했지만, 그동안 남북간 저작권 교류 제도가 마련되지 않아 저작물들에 대해 보호를 받지 못해 왔습니다. 이 시간에는 한국문예학술저작권협회의 조성렬 사무국장으로부터 앞으로 북한의 저작물들이 남한에서 어떻게 보호를 받고 또 어떤 혜택을 볼지에 대해 알아봅니다.
질문) 최근 남북경제문화재단이 북한의 저작권 사무국 그리고 민화협 등과 실무회담을 열어서, 북한 저작권 이용절차에 대한 합의를 했는데 남북 간에 왜 이런 협의가 필요한 것인가?
조성렬: 북한도 당연히 저작물을 보호받아야 한다. 지금까지는 보호 받을래야 받을 절차가 없어서 무단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러한 계약 절차가 합의됨으로써 북한 저작물들에 대한 보호 범위가 넓어지는 것이다.
질문) 지금 남한에는 이미 많은 북한의 노래나 서적, 영상물 등 여러 형태의 저작물들이 들어와 있는데, 지금까지 아무런 문제가 없지 않았나?
조성렬: 북한의 저작권법이 개정되기 이전에 들어온 저작물 사용도 다 저작권 침해다. 그러나 저작물을 사용하려 해도 북한의 저작자 허락을 받을 수 있는 그런 통로가 없었다. 그랬기 때문에 저작권을 침해하는 줄 알면서도 사용하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
질문) 북한도 최근 국제적인 저작권 보호조약인 베른 조약에 가입을 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 조약은 어떤 것이며 조약에 가입함으로서 어떤 혜택을 얻을 수 있는 것인가?
조성렬: 베른 조약은 국제간의 큰 틀에서 저작권을 보호하자는 협약이다. 남한은 가입한지 꽤 됐고 북한은 최근 가입을 했다. 북한은 사유재산제가 아닌 국유재산제이기 때문에 저작권을 국가가 보호를 하다가 북한이 저작권법을 개정하면서 개인의 권리를 인정해 주는 부분이 생겼다. 이렇게 개인의 재산권을 인정해 줌으로 해서 국제조약에 가입했고 또 남한에서의 사용절차를 마련한 것이다.
질문) 이 조약이 국제적인 조약인 만큼 북한의 저작물이 남한 이외에도 다른 국가에서도 보호받을 수 있다는 얘기인가?
조성렬: 그렇다. 상호주의 원칙에 따라 상대방이 보호해 주면 상대방도 보호해 줘야 하기 때문에 외국에서도 당연히 저작권을 보호받을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됐다.
질문) 앞으로 남한에서 북한의 저작물들은 어떻게 사용이 될까?
조성렬: 그전에 무단으로 사용됐던 ‘휘파람’같은 노래나 북한의 소설, 시 같은 저작물들을 이제는 정식으로 허가를 받고 그에 따른 저작권 사용료를 지불하고 하는 그런 시대가 온 것 같다.
질문) 구체적으로 남한사람이 북한 저작물을 사용하려면 어떤 절차를 밟아야 하나?
조성렬: 현재는 남북경제문화협력재단 쪽에 문의를 해서 그 곳에서 관리하는 저작물들을 확인해서 허가를 받고 사용료를 지급하고 하는 그런 절차가 가장 빠른 것으로 알고 있다. (끝)
그럼 이쯤에서 쉬어가는 차원으로 '뽀로로'를 잠시 소개합니다.
< 뽀로로 캐릭터 소개! >
<뽀로로가 수출되고 있는 세계의 여러 나라들>
'뽀로로'는 한국 상품 중 국외에서 제 가격을 받고 메이저 시장에서 런칭한 최초의 상품이고 현재 약 70~80개 나라에서 방영 중(2007년에는 ‘아랍권의 CNN’으로 불리는 알자지라 방송에까지 방영이 되면서 전 세계 82개국에 수출 되었다고 합니다)이며 아동 시청점유율 거의 1위라고 합니다. 위에서도 언급되었지만 프랑스같은 경우에는 '뽀로로가' 57%라는 최고 시청점유율 기록을 세웠다고 하지요. 세계의 뽀통령 답게 참 대단합니다. `뽀로로`엔 개릭터 된 아이들만 존재하고 어른들은 없습니다. 온갖 사건들이 터지지만 모든 문제는 `뽀로로`와 그의 친구들이 스스로 해결한다는데 아주 '자주적이고 주체적(?)' 입니다. 이런 부분이 다른 유아용 콘텐츠와 달리 높은 교육적 효과를 갖고 있을수 있다고도 생각됩니다. 사실 아이들 키울때 일찍이 스스로 혼자 해결하는 습관을 키우려는 것이 부모의 바램입니다. 예전 세대의 마징가, 꺼벙이, 둘리등의 흥미, 재미 위주보다 오늘날의 어린이들에겐 이 뽀통령이 재미와 흥미에 더하여 스스로 자립심을 키우는 교육까지 첨가된 셈입니다.
이런 '뽀로로'가 최근 자꾸 회자됩니다. 언론에 자주 오른내린다는 얘기입니다.
민경욱 앵커 화제…뽀로로 넥타이 메고 뉴스 진행
http://sports.donga.com/3/all/20110506/36975046/2
KBS 민경욱 앵커가 어린이날을 맞이해 뽀로로 넥타이를 메고 뉴스를 진행해 시선을 모았다. 민경욱 앵커는 5월 5일 어린이날 뉴스 방송에서 뽀로로가 프린팅된 붉은색 넥타이를 매고 뉴스를 진행해 시청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또 자신의 트위터에 “뽀로로 넥타이 반응이 좋네요. 조수빈 앵커의 아이디어였습니다.”라며 “뽀통령 넥타이, 조수빈 앵커와 함께”라는 글과 함께 사진을 올렸다.
'어린이의 대통령' 뽀로로, 전 세계 발명선생님 된다
http://n.ccdailynews.com/sub_read.html?uid=211545§ion=sc2
'어린이의 대통령(일명 뽀통령)'이라고 불리는 '뽀로로(사진)'가 전 세계 어린이들을 발명과 창의력의 세계로 안내하게 된다. 특허청과 '뽀롱뽀롱 뽀로로' 애니메이션 기획·제작사인 ㈜오콘은 4일 서울 강남구 소재 한국지식재산센터에서 '뽀로로' 캐릭터를 이용해 지식재산권에 관한 어린이용 국제교육 애니메이션을 공동제작하기로 하고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 이번 업무협약 체결에 따라 앞으로 특허청과 ㈜오콘은 세계지식재산기구(WIPO)와 공동으로 전 세계 어린이들의 창의적 사고력을 키우고, 발명, 특허, 상표 등 지식재산권의 기본 개념을 익힐 수 있도록 하는 국제적 발명교육 애니메이션을 공동 제작하게 된다. 이번 업무협약은 작년 세계지식재산기구(WIPO)가 어린이용 국제교육 컨텐츠의 필요성을 제기함에 따라, 그간 WIPO, 특허청, ㈜오콘간 협의를 거쳐 2012년 개봉 예정인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 '뽀로로의 레이싱 대모험'의 설정과 캐릭터를 활용하여 컨텐츠를 제작하기로 합의함에 따라 추진하게 된 것이다. 동 애니메이션은 창의발명, 특허, 상표 등에 관한 3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되며, 한국어와 영어로 1차 제작되어 WIPO를 통해 전 세계로 보급될 예정이고, 향후 프랑스어, 스페인어, 러시아어, 아랍어, 중국어 등 UN 공용어로 확대해 나갈 예정이다. ㈜오콘의 김일호 대표는 "어린이의 친구인 뽀로로가 전 세계 어린이의 발명교육 선생님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특허청과 적극 협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아리랑TV, '토종 캐릭터 뿌까 & 뽀로로' 방송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1/05/04/0200000000AKR20110504150500005.HTML?audio=Y
"뽀로로가 대통령이면 차기 대통령은 폴리죠"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1/05/04/0200000000AKR20110504203900005.HTML
EBS 애니 '로보카 폴리', 초대박..완구 품귀현상
<부처님오신날 '뽀로로등' 해프닝>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1/05/04/0200000000AKR20110504164000005.HTML
'뽀로로등' 사용금지 요청 업체, 입장 번복, 이미 폐기..서울 연등축제 때 볼수없어
연등축제때 뽀로로등 못본다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1/05/03/0200000000AKR20110503184200005.HTML
저작권자, 사용금지 요청.."지나친 처사" 지적도
조계종, 부처님오신날 남북공동법회 추진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1/04/30/0200000000AKR20110430061900005.HTML?did=1195r
조계종, '남북 공동법회' 열지 않기로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5045181
위에 몇몇기사에 대하여는 얘기를 안겠습니다. 가벼운 예측을 삼가하는 것이 더 좋구요, 어떤 의견을 달더라도 그것은 예측과 상상레 불과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상 자세하진 않지만, 수박 겉핧기 식으러 나마 '뽀로로'에 대하여 알아 봤는데요. 저도 가끔 봤지만 참 잘 만들었습니다. 아이들을 키우다 보면 집에만 있다가 유아원, 유치원에 보내면 별안간 애가 확 달라지는데요, 그곳에서 이전 부모님과는 틀린 친구들과의 접촉과 생활을 접하면서 사회성이 한층 업그레이드 되는 것 같습니다. 제가 '뽀로로'를 봤을때 그런 것을 유아기부터 배울수 있는 계기가 될수 있는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유치원 가기전에 일명 '뽀로로원'을 다녀온 셈이 되지요. '뽀로로' 이전에 2001년에 '게으른 고양이 딩가'가 먼저 남북합작으로 제작되었다고 했는데요. 이곳저곳 자료를 찾던중 당시 '당가'의 제작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한동일 애니메이션 감독의 제작기가 있어 같이 올립니다. 당시 초기에 시작부터 북을 방문하여 나눈 얘기들을 적은 것인데요. 재미있는 문구들이 있네요.
남북한 공동 프로젝트 3D 애니메이션 <딩가> 제작기
글 / 한동일 (애니메이션 감독)
출처 : http://www.siggraph.org/asia2010/kr/community/view.php?id=art&no=345
남북한 공동 프로젝트 3D 애니메이션 <딩가> 제작기 #1
처음 딩가를 시작하게 된 것은 조금은 황당한 시작이었다. 모 회사의 소개로 하나로 통신의 김종세 팀장님을 만남으로부터 시작된다. 내가 하나로 통신을 찾아 갈 때의 상황은 어떤 외주를 따 낸다거나, 아니면 어떤 일을 하나로 통신과 하고자 하는 희망에서가 아닌 단순히 하나로 통신이 대북사업에 조언을 받기를 원한다는 얘기를 듣고, 아무 생각 없이 3D 애니메이션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설명하기 위함이었다. 막상 하나로 통신에 가서 얘길 들어 보니 하나로 통신의 사장님이 북한에 다녀 오면서 콘텐츠 사업을 남북공동으로 진행하는 일을 제안하게 되었고 그 중에 한 가지가 애니메이션 사업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막상 실무진들이 북한에서 이미 2D 애니메이션을 많이 제작하였다는 사실을 근거로 2D 애니메이션을 북측에 제안하였을 때, 북의 반응을 2D 가 아니라 3D로 하자는 대답을 듣고 당황했다는 것이다. 삼천리 총회사라고 하는 곳에서 3D 기술을 가지고 있으니 3D를 해 보자는 얘기인 것이다.
사실 2D 는 이미 북한과 유럽에서 활발하게 제작이 진행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3D로 북한이 애니메이션을 제작한다는 것은 아직까진 확인된 바 없기 때문에 당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하나로 통신은 서둘러 2D 기획을 3D로 제안을 황급히 바꿔야 하는 상황인 것이었다. 얘기를 듣고 있자니 좀 황당한 얘기였다. 30분물 13부작 기획을 그것도 2D로 기획된 것을 3D로 바꿔서 다시 제안 하겠다는 것이었다. 단 한번도 같이 일해 본 적이 없는 북한하고 같이 한다? 적어도 10여억원의 자금을 투자해야 하는 상황에서 제작비를 회수한다는 것은 정말 모험처럼 보였다. 여기서 내가 조언할 수 있는 것은 하나로의 리스크를 줄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국내에서도 많은 3D 애니메이션이 기획되고 제작도 했지만 투자를 한 만큼이라도 다시 회수된 작품이 거의 없다는 다실을 얘기 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제작 능력이 검증이 안된 북한하고 공동 제작을 한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라고 말이다.
차라리 30초짜리로서 먼저 사업을 시작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는 질문을 던졌다. 여기에 하나로는 반응을 했고 나는 그 당시 한참 제작중인 ‘아코’ 를 보여 주었다. 김종세 팀장은 ‘아코’를 흥미롭게 보는 듯 했다. 다음날 나는 뜻밖의 전화를 받았다. 하나로 통신의 사장님의 미팅이 잡아졌으니 하나로 통신으로 들어오라는 것이다. 나는 일단 허겁지겁 하나로 통신 본사로 찾아 갔다. 바로 사장님과 미팅이 이루어졌고, 나는 머리가 띵~ 한 얘기를 들었다. “이분이 바로 북한에 들어 가실 분인가?”, “예!” 하나로 통신 사장님과 김종세 팀장의 대화였다. 나는 순간 북한과 공동 project를 같이 하게 됐구나.. 하는 생각과 내 인생에 아무런 관계도 없을 것 같았던 북한에 가게 됐다는 사실이 머리를 띵하게 만들었다. 하나로는 새로운 기획을 원했고 나는 그 당시 머리에 고양이를 소재로 기획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참이었다. 하나로와 협의 끝에 1분짜리 30편을 기획하게 된 것이다.
처음엔 ‘딩글딩글’ 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하였다. 맨날 놀고 먹는 게으른 고양이라는 설정때문에 집에서 딩글딩글 이라는 의미로 정한 것이다. 하지만 별로 하나로에서 좋아하지 않았다. 이름에서 풍기는 이미지가 별로 좋지 못하단 것이다. 구명서 피디의 의견으로 ‘딩가’ 라는 이름으로 고치고 결국 ‘딩가’라는 이름으로 정하게 되었다. 초기에 딩가의 이야기를 설정하는 것이 무척 힘들었다. 게으르다 라는 것이 가지고 있는 갈등이 제한적이기 때문이었다. 이야기에는 갈등과 해소 라는 요소가 작용해야만 재미의 요소가 발생한다면 '게으르다'는 반대급부의 부지런함이라는 요소나 아니면 더 게으름이라는 급부와의 갈등이 일어 나야 하는데. 이런 설정으로 이야기를 만든다는 것은 무척 나를 힘들게 만들었다. 결국 우리는 ‘푸코’ 라는 존재를 만들어 냄으로써 이를 해소할 수 있었다. 딩가의 애완견 ‘푸코’로 하여금 딩가와의 갈등적인 관계설정을 함으로서 계속적인 이야기를 이끌어 갈 수 있는 여지가 생겨나게 된 것이다.
사실 ‘아코’ 같은 경우는 보다 이야기를 만들기가 쉬웠다. 뜻대로 되는 것이 없다! 라는 설정 하나만으로도 많은 이야기가 쏟아질 수 있었고 캐릭터도 아코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이야기가 만들어 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딩가는 혼자서 이야기를 끌어가기엔 정말 힘든 캐릭터 이다. 우리의 설정을 하나로 통신에선 그대로 받아들여졌고 캐릭터 디자인과, 설정 그리고 캐릭터 모델링 작업이 이루어 졌다. 이렇게 해서 항상 졸려 보이는 눈의 주인공 ‘딩가’의 기본 설정이 정해진 것이다. 이런 상황은 북한에도 전달되었고 우리는 먼저 3편만 샘플로 만들어서 북한에 전달한 이후 CG Quality를 맞추어 가면서 작업하기로 하였다. 여기서 상황이 조금씩 지연되기 시작하였다. 하나로 통신과 삼천리 총회의 상황이 미묘하게 시간을 끌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약 4개월 가량 이런 상황을 그냥 지켜 보는 수밖에 없었다. 50년 동안 같이 일을 해 본적이 없었던 탓인지 남북관계의 정치적 영향에 휘둘리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잠시 딩가는 중지 되었고 2000년 10월부터 진행된 project가 2001년 4월까지 아무런 경과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4월 초에 하나로 통신 사장님의 결단으로 일단 전체 제작 우리가(페이스) 가 진행하는 것으로 결정되었고 5월 5일을 오픈 계획으로 빠르게 Project가 갑자기 시작되었다. 그전에 준비했던 5편의 스토리보드가 우선적으로 진행되었고 우리는 갑자기 바빠지게 되었다. 홈페이지부터 시작해서 시나리오 제작 포스트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을 진행해야만 했다. ‘딩가’ 에서도 ‘아코’와 마찬가지로 털 질감과 보다 평면적인 조명방식이 사용되었다. 내부 디자인 팀과 3D 팀이 ‘붕가부’와 ‘아코’의 경험을 바탕으로 차근 차근 진행해 나아갔다. 5월 5일부터 딩가는 하나로 통신을 통해서 노출되기 시작하였고 초기 반응은 신선하다는 반응으로부터 시작해서 좋은 반응으로 일축되었다. ‘아코’와 마찬가지로 일상적인 소재를 다룬 작품이다 보니 ‘심심하다~’ 하는 의견도 많이 나왔다. 이렇게 시작된 딩가는 한동안 반쪽 제작에 일축되었다. 다시 말해서 북한을 제외한 진행이 계속된 것이다. 2001년 7월부터 다시 하나로 통신과 삼천리총회의 진행 타협점에 이루게 되었고, 다시 제작물량의 일부를 북한에서 제작하기로 결정되었다.
한동안 또 잊고 있었던 북한제작이 다시금 시작된다는 말을 듣고 ‘이제 같이 일을 하긴 하는가 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8월 말에 북한에 들어가는 것으로 스케줄이 잡혔고. 우리는 북에서 제작할 3편의 스토리 보드를 허겁지겁 만들었다. 앞에서 만들어 나가는 스토리때문에 북에서 작업 한다고 해서 갑자기 스토리를 더 쉽게 만들 수도 없었다.
남북한 공동 프로젝트 3D 애니메이션 <딩가> 제작기 #2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북한에 들어 가는 절차에 대해서 궁금해 할 것이다. 나 같은 일반인(민간인)이 어떻게 북에 들어 갈수 있을까? 하는 것에 대한 의문에서 말이다. 비행기는 일단 북경에서 평양으로 들어가는 비행기편을 이용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일단 북경에 먼저 가야 할 것이다. 북경에서 평양으로 가는 비행기편은 화요일과 토요일 밖에 없기 때문에 월요일이나 금요일에 북경에 먼저 도착해서 서류를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북경에 가기 전에 북한의 단체로부터 초청장을 받아야 하면 이를 통일부에 신고해야 하고 통일부에는 북한주민접촉신고서와 같은 서류를 제출해야 하며 북한에 처음 들어가기 전에는 통일 교육원에서 3시간 정도 하는 북한 주민 접촉 통일 교육을 받아야 한다. 또한 북한에 들어가는 비행기를 타려면 북경의 북한 대사관에서 초청장 확인과 동시에 비자 발급을 받고 비행기를 하루 전에 예매해야 한다.
이러한 절차를 거쳐서 평양에 들어 가게 되는데. 8월에 처음 북한에 들어 갈 때는 하나로 통신 직원 2분과 세종대 한창완 교수님과 저, 그리고 우리회사 직원인 이상익씨와 같이 평양에 들어 가게 되었다. 삼천리총회사에서는 딩가의 제작 자료와 가종 S/W 의 한글판 교재들을 제공해 줄 것을 원했고 우리는 서점에서 쉽게 구입할 수 있는 국내에서 만들어진 몇 가지 교재들을 구입하여 가지고 가기로 하였다. 간단한 복장과 ‘라면 한 박스’ (북에서 인기가 있다고 함), ‘교재’, ‘딩가자료’ 들을 가지고 우리는 북경으로 향하는 KAL기를 타고 북경으로 출발하였다. 북경은 이번에 2번째 항상 올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정말 중국은 빨리 변화하고 있다라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Mac Donald 부터 TGA, KFC, Mr. Pizza 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가맹점들이 이미 다 들어와 있었고, PC 방도 대학 주변으로 확산되고 있었다. 중국이 한가지 특이한 점 중에 하나는 교통 위반 시에 딱지(벌금)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보니 대로에서도 무단 횡단이 자유롭고 아무 곳에서나 유턴을 하는 것이 가능한 곳이다. 하지만 항상 느긋한 중국 사람들 성격에 사고는 별로 없는 듯 보였다.
북경에는 하나로 통신의 중간 업무 대행사가 있다. 이곳에서 이화련씨라는 분이 북한에 사업진행업무를 도와 주고 있은 분이다. 이분은 조선족 출신으로서 중국어와 한국어가 능통한 분이었다. 중국에선 북한 비자 발급과 비행기 예매만 하면 되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있었다. 전통식 중국 요리 식당에서 값싼 가격으로 이것 저것 먹으면서 우리는 간단하게 맥주를 마시고 내일 북한에서 할 일들을 정리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특히 한교수님의 요리왕 애니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이 재미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요리들을 맛보면서 우리는 내일 평양에 들어갈 긴장을 풀고 있는 것이다. 다음날 아침 일찍부터 짐을 다시 챙겨서 우리는 평양에 가기 위한 수속을 밟기 시작했다. 북경공항 한편에 자리 잡고 있는 ‘고려항공’ 이라는 글씨가 눈에 들어 왔다. 순간 ‘정말 가긴 가는 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재미있는 것은 탑승을 하기 전에 풍경이다. 북경공항에서 정해 놓은 것인지 아님 원칙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대한항공’ 비행기와 ‘고려항공’ 비행기의 탑승구가 나란히 옆에 마주 보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비교라도 하듯이 말이다.
탑승구에도 마찬가지로 북에 가는 사람과 남으로 가는 사람이 나란히 마주 앉아 있다. 우리는 여기서 처음으로 북한 주민을 접촉하게 되는 것이다. 왼지 옆집 아저씨 같은 북한에 주민들을 우리는 탑승구에서 먼저 만나고 그들의 말을 듣게 됐다. ‘보라! 이거이 어드렇게 하는 줄 아나?’ ‘왜에.. 내가 이런 것도 모를 까봐 기레이? 이리 동전 하나 줘 보레이?’ 자판기에서 콜라를 빼내는 평양 소년의 말투에서 나는 그 동안 TV 의 드라마에서나 봐왔던 아니 최근 JSA 영화 에서나 들어 봤던 말투를 자연스럽게 하는 사람들 속에 서있게 된 것이다. 우리는 (하나로 통신 관계자2명 한창완 교수 나와 페이스 이상익씨) 고려항공 Board 신호 (탑승신호)가 내리자 가슴을 조금 두근거리면서 비행기에 올라탔다. 재미있는 것은 생각보다 꽤 많은 외국인들이 같이 탑승한다는 것이다. 인도, 이집트, 중동, 이스라엘, 미국, 등등의 국적을 가진 사람들의 얼굴이 인상적이었다. 선입견이 있어서 인지 모두 수수한 옷에 화려해 보이는 사람은 거의 없고, 좀 나이든 사람들이 많았다. 뭐 항상 북한에 방북 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었던 것은 아니니 이런 사람들만 북한에 방문한다는 것은 억지일 것이다.
물론 이들 중에는 북한 현지인들이 가장 많았다. 대부분 상당히 많은 양의 짐을 챙기느라 정신 없어 보였다. 북한 현지인들의 짐의 대부분은 전자제품인 듯하다. 컴퓨터나 모니터 같은 것들이 가장 많아 보였다. 비행기에 올라타는 순간 고려항공의 분위기를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조금은 짠밥이 있어 보이는 비행기의 의자와 우리의 예전 이발소 분위기의 기내 칸막이 예전 우리들의 영원한 언니 엄앵란, 김자옥 언니들의 예전 젊은 모습을 보는 듯한 스튜어디스들, “안녕하십네까? 반갑습네다” 언니들의 인사이다. 기내식 또한 옛 향기가 물씬하다, 삶은 달걀과, 쏘시지 2조각, 그리고 샐러드와 밥에 얹은 이름 모를 소스, 여기에 서양인들의 입맛을 고려해서 빵 두 개까지 같이 준다. 북경에서 평양 공항 까지는 약 1시간 30분이면 도착이다. 내가 처음 평양에 가던 날은 너무도 화창한 날이었다. 여름이라고 하기엔 너무 맑은 하늘이었다. – 나중에 돌아와서 안 사실이지만 서울에서도 무지 화창했다고 한다, 난 그것도 모르고 평양이라서 특별이 더 화창한 줄 알았지만, 하지만 공기가 맑은 건 사실이다 -
어느덧 평양공항에 도착했다. 기대와 걱정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내 앞에 보여지는 광경은 정말이지 생전에 잊지 못할 기억을 남기는 순간들이 벌어질 것이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평양공항에 비행기가 착륙할 당시부터 예사롭지 않다. 일단 착륙하는 비행기가 우리가 탄 비행기 한 대라는 사실과, 공항의 크기가 활주로를 제외한 공항 건물크기만 얘기하자면 지방 조금 큰 고속 터미널보다 좀 작은 크기라는 사실이다. 북경에선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북적북적하다가 평양에 도착하는 순간 모든 것이 썰렁 해지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좋게 표현한다면 아주 고요해진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복잡한 도시를 떠나 시골로 여행와서 아무도 찾는 사람 없는 고요함이라고나 할까? 그 넓은 활주로에 홀로 내린 비행기의 모습 또한 흔치 않은 광경이다. CG로 표현하자면 Modeling도 많이 못하고, Rendering도 오래 걸릴까봐 활주로 mapping에다가 비행기 하나 올려 놓고 만든 Ani라고나 할까. 공항건물에 도착할 때 가장 눈에 들어오는 것은 아무래도 북한의 인민군들이었다.
사실 나도 아직까지 예비군훈련을 받는 사람으로서 인민군의 모습은 약간 섬뜩하게 느껴지긴 했지만 여기가 평양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그냥 편하게 생각하며 넘어갔다. “한 선생 이번이 처음입네까?” 입국 심사를 받을 때 들은 심사관의 얘기이다. “예!” 나는 짧게 대답했다. 재미있는 것은 나중에 한번 더 평양에 왔을 때도 같은 심사관이였다는 것이다. 사실 이때 봤던 공항의 직원들 중에 몇몇은 계속 얼굴을 보게 되었다. 아마도 내가 인상이 강한 사람이라면 그들도 나를 기억할 것이다라고 생각하니 재미있다.
남북한 공동 프로젝트 3D 애니메이션 <딩가> 제작기 #3
평양사람들의 억양은 부산 사람들처럼 조금 억세고 강하게 느껴진다. 어쩔 땐 싸우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지만 자꾸 듣다 보면 익숙해진다. 우리 일행을 이미 삼천리 총회분들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한번 평양에 와봤던 하나로 통신의 이상열과장의 리드로 우리는 졸졸 따라 다녔다. 이미 우리를 앞으로 계속 운반할 봉고와 운전기사 아저씨가 대기 중이었다. 처음 보는 삼천리 총회 식구 김선생, 리 선생과 인경련 참사(우리의 안기부) 이선생과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 되었다. 급하게 봉고를 타고 평양시내로 들어가는 도로를 달렸다. 다들 처음 만남이어서 그랬는지 인사를 하고도 잠시 침묵이 흘렀다. “선생들 이제 평양에 처음 와서 긴장들 할 텐데 긴장들 풀라우.” 사실 이 말이 우리를 더 긴장시켰다. 하지만 ‘허허허허~’ 긴장된 웃음을 지으며 조금씩 얘기를 꺼내면서 긴장을 풀려고들 노력하였다. 평양은 정말 서울이나 북경하고도 정말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 같은 하늘 아래 이렇게 다르게 자라난 북한과 남한이 같은 민족이라는 것이 신기할 정도이다.
평양은 도시 내에도 아직도 논이나 밭이 보이기도 하고 일단 오염은 없는 듯 공기도 맑고 신선했다. 건물들은 거의가 당의 계획아래 지어졌다는 느낌이 확연하게 보였고, 붉은 색의 굵은 글씨로 “김일성 장군님은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신다!” 라는 글이 맨 처음 눈앞에 들어왔다. 시민들은 대부분 비슷한 의상 (인민복) 차림이고 여성들은 아직도 흰 저고리에 검은 치마를 입고 다니는 사람이 많은 듯했다. (조총련 또한 같은 의상이다) 신기할 정도로 높은 100층이 넘는 호텔 건물부터 허름하게 시멘트 색이 드러난 아파트 건물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모습들이 한꺼번에 눈에 들어왔다. 기본적으로 평양은 아주 조용하게 보였다. 자동차도 우리의 10분의 1정도도 안돼 보일 정도이다. 그러다 보니 교통 체증이 있을 리 없다. 중국처럼 시민들의 대중교통은 자전거가 많고, 신호등대신 여자 교통순경의 손짓에 맞춰서 운전을 한다. ‘내가 지금 영화 세트에 와 있나?’ 라는 생각이 문뜩 들었다.
일단 공항에 도착한 모든 사람들은 반드시 김일성 동상 앞에서 한번 예의를 갖춰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공항에서 봤던 많은 사람들을 김일성 동상과 만경대를(김일성의 생가) 방문할 때까지 계속 또 보게 된다. 그뿐이 아니라 북경으로 가는 고려항공 비행기가 토요일밖에 없기 때문에 토요일에 또 대부분 다시 만난다. 만경대에 올라서 평양을 보면 한눈에 평양 시내가 다 보인다. 우리처럼 한강 주의에 아파트가 없어서 그런지 평양에 흐르는 임진강을 중심으로 형성된 평양이 전부 한눈에 들어 오는데. 정말 시원하게 보이는 도시의 전정은 멋있게 보였다. 어떻게 보면 SFX에서나 볼만한 미래도시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60~70 년대의 계획된 도시 같기도 하다. 사실 평양에서 비행기로 서울 까지는 1시간도 안 걸리는 거리일 텐데 참 멀게 느껴진다. 또 사실 더럽게 멀리 돌아서 왔지 않는가? 사실 멀게 느껴지는 것은 비단 멀게 돌아서 와서만은 아닐 것이다. 50년 만에 처음으로 교류를 하는 상황에서 생겨나는 현상일 것이다.
사실 내가 50넘은 노인도 아니니 평양의 50년 전의 모습은 알 리가 없다. 하지만 평양에 50년 전에 사셨던 분이 이곳에 오셨다면 나처럼 멀게가 아닌 가깝게 느꼈을 지도 모른다. 평양을 잠시 쳐다보면서, 마치 내가 여태껏 관심도 없고 느끼지도 못했던 역사의 소용돌이 속의 한 곳에 서 있는 듯한 이상야릇한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여지껏 내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왔다는 나의 생각을 뒤엎고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커다란 역사라는 힘에 의해 내가 알지 못했던 감정을 맛보고 마치 미지의 세계를 여행하는 마치 어두워서 한치의 앞을 내다볼 수는 없고 무엇이 나를 기다릴지 모르는 동굴 속으로 내가 아닌 커다란 힘에 의해 떠밀려 들어가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사실 한편으론 몰라던 형제를 만난 어색함과도 비교될만한 느낌도 많이 받았다. 일단 평양주민들은 말이 통하는데다가, 먹는 음식도 거의 비슷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평양에 있는 보통강이라는 강 옆에 있는 보통강려관 (보통강호텔)에 투숙하였다. 호텔에 도착한 시각이 5시정도 돼서 삼천리총회에 가서 업무를 보는 것이 조금 늦었기 때문에 간단하게 일정을 정리하고, 저녁에 총회 부사장님과 저녁을 먹고 쉬기로 한 것이다.
지금은 조금씩 상황이 바뀌고 있기는 하지만 그때까지도 저녁만찬이나 평소 식사에 대한 모든 계산은 남측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계산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다 보니까 밥값만하더라도 몇 백 만원씩 쓰게 되는 것이 보통이라 한다. 통일교육원에서 교육을 받을 때도 이런 부분에 대해서 언급하기도 하였는데 몇몇이서 북한 안내원들과 같이 식사를 하게 되면 유난히 이것저것 많이 시키게 되고 남측사람들도 유난히 허세를 부리기 좋아하다 보니 괜히 많이 시켜서 먹지도 못하고 돈만 많이 쓰게 된다. – 외국인 대상으로 하는 식당의 음식가격은 우리보다 쬐금 싼 정도이다. -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날의 만찬 또한 하나로에서 계산했다는 얘길 들었다. 정말이지 북한 사람들은 대부분 술을 아주 잘 마시는 것 같다. 항상 술을 마실 때보면 맥주와 양주를 같이 섞어서 마신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폭탄주인 것이다. 맥주는 음료수로 마시고 소주나 곡주 또는 과일주 같은 것을 같이 마시는 것이 보통 이였다. 술을 잘 못 마시는 나로서는 조금 곤혹스러웠다. 예전의 우리 아버지 세대들처럼 술을 조금 억지로 같이 마시게 하는 성향이 있기 때문이었다.
예전의 우리 아버지 세대들은 그렇지 않는가? 맥주하고 소주하고 박스로 사다 먹고, 맥주 소주 닥치는 대로 섞어먹고, 물론 아직도 그런 사람들이 가끔 있기는 하지만, 북한 남성 또한 흡연율이 상당히 높아 보였다. 대부분의 장소에서 흡연이 가능해 보였고, 또 많이 흡연하는 것 같았다. 다행이 공기가 좋아서 금새 공기는 상쾌해지니까, 흡연을 안 하는 나로서는 참을 만 했다. 만찬 뒤에 우리는 안내원들과 뒤풀이로 가볍게 맥주를 한잔씩 마셨다. 사실 놀라운 일은 여기서부터 시작이었다. 삼천리총회의 김선생이라는 분의 첫마디가 기가 막혔다. “그.. 시네픽스 조신희 사장의 규빅스는 요즘 어드럽습네까?”, “예?” 너무나도 뜻밖의 질문이었다. 시네픽스라는 회사가 서울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도 신기한데. 조신희 사장님의 이름과 규빅스가 미국에 투자를 이끌어 낸 사실과 미국에서 방영될 계획이라는 사실까지 모두 자세히 알고 있었다. 사실 이것을 질문이라기 보다 알고 있는 것을 확인하려고 하거나, 김선생이 서울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 뒤로 얘기하는 하나로 통신의 기술과 인터넷의 사업방향 및 서울에서 일어나고 있는 많은 콘텐츠사업과 통신 산업에 대해서 혀를 내두를 정도로 자세히 알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기 선생이 얘기할 때마다 대답을 하기가 힘들 정도로 혀를 내두르며 진땀을 빼기도 했다. “김선생님은 남측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어떻게 그렇게 상세히 알고 계십니까?”, “내레, 모두 신문에서 봤디오 고럼! 신문에서 봤지!” 사실 저녁 만찬 때 삼천리 부사장님의 말에 의하면 내가 신문기사에 났던 것들을 봤다는 말을 들었다. 익히 얼굴을 알고 있었다는 말도 들었다. 후~ 한숨이 절로 나왔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우리는 어느 정도는 북한에 우리가 하는 사업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에 이미 관심대상이 이미 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일단 북경을 거쳐 평양에 온 이후 줄 곳 긴장을 한 탓 인지 피곤함이 몰려 왔다. 일단 방으로 돌아와 취침 준비를 했다. 호텔이라고 하지만 사실 좋은 여관 정도의 시설과 뜨거운 물이 아침과 저녁에 정해진 시간만 가능하다는 안내 글이 눈길을 끌었다. 아무래도 평야의 전력 상황이 안 좋다는 사실이 사실인가보다 생각했다. 밤 풍경을 보기 위해 창 밖을 보았을 때 이런 사실은 더 피부에 와 닿았다. 그것은 정말 평양 시내의 전경은 정말 아주 어두운 밤이었기 때문이 중요한 곳만 빼고는 모두 소등한 상황같이 보였다. 간간히 보이는 자동차와 자전거의 전등 들이 잘 보일 뿐 불을 켜고 있는 건물은 그리 많지 않아 보였다. TV를 켰다. 북한 방송 2채널과 호텔을 감안해서인지 일본HNK와 중국 CCTV를 볼 수 있었다. 물론 가까운 서울에서 방송하는 채널은 볼 수 없었다. 간혹 HNK 에서 한국 뉴스를 일본어로 번역해서 보여주는 것을 간혹 볼 수 있었다. 사실 서울에선 유선전화, 핸드폰, 인터넷, TV 등등을 통해서 정보를 주고 받고 하지만 일단 평양으로 온 이상 나는 완전히 고립된 것이나 다른 없는 것이었다. 전화나 팩스는 북경에 보낼 수 있다고는 하지만 호텔에서 보내본 일이 없다는 하나로 통신 이상열 과장의 말을 들으면 암튼 서울과는 연락을 취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하루는 보낸 우리는 내일 아침 일찍 삼천리 총회를 방문하는 것으로 일정을 시작하기로 하였다. 우리는 하루를 보통강호텔에서 보내고 다음날 어제 탔던 봉고를 타고 삼천리 총회를 방문하였다. 삼천리 총회건물은 외관으로 봐선 서울처럼 회사인지 아니면 공공기관인지 좀 구분하긴 힘들어 보이긴 하지만 내부는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삼천리 총회사에선 기술회사의 박부사장님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바로 이분이 여기선 가장 오랫동안 CG 작업을 해오신 분이라는 설명이었다. 나는 인사를 하고 우리가 가져온 자료들과 서점에서 사온 MAX , Lightwave, Maya 등의 매뉴얼을 보여 드렸다. “이 선생이 이번에도 수고를 하셨구만” MAX 매뉴얼을 보면서 저자를 보고 하는 얘기다. 이미 전 버전의 책을 봤다는 얘기다. 인상적인 것은 북에서도 Light wave를 광파라고 부르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박부사장 여태까지 해 온 것들 좀 우리 남측에서 온 선생들에게 보여드리라우~”, “크~ 뭐 그러디오~” 삼천리 기술회사의 부사장님이신 박부사장님의 안내로 삼천리 기술회사에서 작업한 CG 작업들을 볼 수 있게 되었다. 8.15 광복 이후 본국으로 돌아오던 한국교민들을 태운 일본함선을 침몰시킨 (우끼시마)사건을 영화 한 장면에서 바다와 함선 그리고 침몰직전의 폭파효과 등을 모두 CG 작업으로 만들 것과 그밖에 작업한 몇몇 가지 작품들을 볼 수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바다와 폭파하는 effect 들을 모두 자체적으로 Programming 해서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바다라는 표상이 그리 간단치가 않아서 애를 많이 먹이더구만”, “파도를 표현하는 알고리즘을 하나라도 빼먹으면 바다 같잖게 보이는데 환장하게 만든단 말이요”, “그래서 우리 연구사들이 며칠 날밤 패면서 만든거디요” 정말로 바다와 배의 모습이 사실적으로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단지 북한에서 녹음한 뽕짝 같기도 하고 가곡 같기도 한 배경음악이 익숙해져 있지 않은 나에겐 배경음악이 상당히 어색하게 느껴지기는 했지만 북한에서도 이런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이 상당히 고무적으로 느껴졌다.
남북한 공동 프로젝트 3D 애니메이션 <딩가> 제작기 #4
“야~ 이거…, 동영상을 남측으로 가져가도 됩니까?”, “이거 인터넷에 올리면 엄청 반응이 있을 것 같은데…”, “……” 공식적으로 남측에 공개된 적이 없는 것이라서 그런지 우리와 다르게 공개하는 것을 꺼려했다. 우리 같으면 데모를 여기저기 뿌리는 것이 자랑스러울 텐데 선뜻 공개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우리는 삼천리에서 작업한 작품들을 보면서 잘할수 있을것 같다는 생각과 불안한 생각이 아직도 교차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딩가’는 그리 대단한 기술을 필요로 하는 것도 아니고 대단한 effect 가 나오는 것도 아니지만 캐릭터의 모션이 중요하고 lighting 과 mapping 을 ‘딩가’의 이미지에 맞게 만들어 내는 것이 중요한 상황에서 정작 우리는 삼천리가 해온 캐릭터 모션은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우리는 작업실을 둘러보았다. 작업 환경은 우리와 그리 다를 것은 없었다. 당시 1G hz의 컴퓨터에 16~17인치 모니터 쾌적한 공간에 시원한 에어컨시설. “우리보다 더 좋은 환경인데요~ 헤헤헤” 라고 얘기하며 나를 째려보는 우리회사 이상익씨의 말이다.
사실 강남의 건물관리상의 문제로 우리회사엔 에어컨을 달지 못해서 모든 직원들이 찜통 속에 작업하고 있는 것이 페이스의 상황이었다. 순간 회사의 대표인 나로서는 평양까지 와서도 환경이 여기가 더 좋다는 우리회사 직원의 농담 아닌 진실이 미안한 생각을 내심 더 강하게 만들었다. 사실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우리나라의 CG 상황이 그리 좋은 것은 아니지 않는가?
북한과 제작을 공동으로 한답시고 오기는 했지만 서도 우리도 그들에게 선뜻 이런 것들을 해서 이런 성과를 가져왔고 그래서 우리는 그들보다 한 수위다! 라는 식의 말을 꺼낼 것이 없다는 사실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항상 서울에 있을 때도 앞으로의 CG계의 가능성만을 얘기했지 큰 결과를 세운 것도 없지 않는가?, 그래서 ‘큐빅스’ 같이 해외에서 성과를 내는 project 에 북한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지도 모른다.
작업실에서 우리랑은 크게 다른 것이 있다면 어느 방에나 걸려 있는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장군의 사진과 아직도 검은 치마 흰 저고리를 입고 있는 여직원(여성 연구사)의 의상일 것이다. 우리 같으면 벽에 이것저것 포스터도 붙이고 할 터인데 말이다. 우리는 다시 회의실로 내려와서 우리는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서 얘기를 나누었다. 여기서 우리는 조금은 황당한 얘기를 듣게 된다. 그것은 이미 스케줄을 북측에서 모두 세워 놓았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북한관광에는 그리 관심이 없고, ‘딩가’를 설명하고 짧게 일정을 잡은 CG에 대한 교육일정을 빨리 완수하고 빠르면 1주정도 후에 바로 서울로 돌아가고자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삼천리측은 개선문, 소년궁전, 주체탑, 서해갑문 등을 관람하게끔 이미 계획을 모두 세워 놓았다는 것이다. 사실 하나로측과 한교수님이야 이왕 온 거 볼거리를 많이 보고 가고 싶으셨겠지만 나와 우리 이상익씨는 1주일이 아니라 2주 동안 있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서 내심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또한 이러한 일방적인 발언은 앞으로의 일에 대한 불안감을 더하기에 충분했다. 다음 계약상의 문제에 대한 여러 안건을 놓고 합의사항에 대한 협의를 하였다. 일단 나로서는 북에서 해온 방식을 바꾸지 말고 다만 모션이나 이미지를 ‘딩가’에 맞추는 작업에 협조해 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제작 결과물을 북한에서 사용하는 Pal 방식대로 제작하기로 하고 검수 과정에 대한 방식에 대해서 얘길 나누기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나는 서울에서 겪는 관점상의 문제를 평양에서도 얘기하게 되었다. Character Animation를 기술적인 면에서 이해하고 있는 사람과 감성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과의 대화라고나 할까? 자꾸 기술상의 문제를 들에 대한 담보(확신)를 제시하고 그것에 대한 합의를 한 후에 제작에 들어 가야 한다는 얘기와 반드시 생겨날 Retake를 어떤 방식으로 검수하고 수정할 것인가에 대한 나의 얘기가 자꾸 꼬이는 것이었다. 북에 의견대로 기술에 대한 담보를 모두 한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retake 는 걸릴 것이라는 나의 의견에 상당히 처음에는 당황해 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런 나의 발언에 대해서 내가 받아내고 싶은 대답은 감독의 의도대로 나올 수 있도록 모션에 대한 교육이나 수정을 어떠 어떠한 방식으로 수정을 하겠다는 대답을 듣고 싶었다. 하지만 기술에 대한 담보와 함께 충분한 자료를 받는 다면 Retake가 걸리지 않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에서 인지 감성적인 작업이기 때문에 초기에는 무조건 많은 Retake 가 생길 것이라는 나의 의견에 삼천리측 관계자들은 내심 불편한 심정을 내비쳤다. 급기야 최종 수정을 페이스에서 하면 어떻겠냐는 의견까지 나오고, 하나로 측에서도 웬만하면 Retake 안 하면 되지 않겠는가? 하는 한심한 얘기까지 나왔다. 결국 우리는 평양에 있는 동안 이러한 문제에 합의를 보기로 하고 일단 짜여진 일정에 들어가기로 하였다. 나는 갑자기 남대북이 아닌 혼자서 여럿을 상대로 제작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 내야 하는 깝깝한 상황에 봉착하게 되었다. 물론 ‘딩가’가 역대 최고의 수작이라던가 최상의 quality를 고수하는 작품은 아니지만 적어도 페이스에서 제작해온 quality를 조금이라도 유지할 수 있기를 바랬기 때문에 상당히 심각한 걱정을 하게 되었다.
만약 페이스가 만든 ‘딩가’와 삼천리가 만든 ‘딩가’가 상당이 다른 모습을 보여주면 이것은 정말 하느니만 못할 것이란 생각이 내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고 있었다. 또한 이것은 감독의 이름을 걸고 만드는 기획작품이 아닌가? 과연 관객은 남한 ‘딩가’와 북한 ‘딩가’가 많은 차이를 보일 때 어떻게 받아 들일 것인가? 별로 염두 해 보고 싶지 않는 생각이다. 분명 감독의 연출에 실망감을 표시할 것이 뻔하지 않은가?, 이렇듯 나는 ‘딩가’ project 의 최악의 상황에 대해서 걱정을 하기 시작하였다. 저녁에는 북에만 있다는 털게 찜(진짜 털이 난 게)을 먹고 술을 마셨다. 사실 나는 술을 잘 못하기 때문에 술자리는 항상 부담스럽다. 근데 북한 사람들은 정말 술 잘 마신다. 항상 소주와 맥주를 섞어 마신다. 나는 계속 권하는 술을 뿌리치기가 힘들었다. 저녁을 먹고 밤에 식당에서 나오니 밤하늘에 별이 많이 보였다. ‘역시 공기가 좋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숙소까지 걸어갑시다!” 하나로 이상열 과장의 의견대로 약 200메타 정도 되는 거리를 걸어가기로 하였다. 근데 정말 어두웠다. 전기 상황이 안 좋아서인지 가로등도 전혀 없고 건물에 불이 들어와 있는 것도 별로 안보였다. 밤길을 걸어 다니는 사람들도 손전등을 들고 다니다가 누군가가 다가오면 몇 번 반짝이면서 지나간다는 신호를 보내는 모습이 보였다. 이렇게 어두운 길을 걷기도 정말 처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달빛으로 평양 길을 걷다 보니 어느덧 숙소에 닿았다. 숙소에 돌아와서도 걱정은 계속되었다. 하지만 결론은 하나 밖에 없었다. ‘모든 작품의 책임은 감독이 진다!’ 라는 원칙이었다. “처음으로 해외 여행을 온 곳이 북한 이라니~!” 우리 이상익씨의 말이다. 한참 심각하게 고민을 하다가 그의 말에 웃음을 참지 못하고 한참을 웃었다. 어두운 밤 평양 도시를 보고 있자면 가끔 지나가는 차들의 불빛이 유난히 낯설게 느껴진다. 그리 멀지 않는 서울의 네온 빛이 가득한 밤거리를 이 곳에 있는 사람들이 본다면 뭐라고 얘기할까? 궁금해졌다.
사실 딩가는 이미 상당부분 만들어져 있는 상황이었고 이미 자료를 먼저 삼천리 측으로 보낸 상황이었다. 그래서 딩가의 게으른 고양이 컨셉이라든지 캐릭터의 이해를 이미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남측에서 올라온 배 나오고 수염 기른 감독이 설명하는 딩가에 대한 설명이 재미있었나 보다. 설명하는 동안 내내 손으로 입을 가리고 ‘크크크’ 웃음을 참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크게는 웃지 않더라도 얼굴에 웃음이 가득한 사람도 보였다. 사실 어떤 사람들을 만나더라도 첫 만남에서부터 활짝 웃으며 만난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애니메이션을 북한하고 같이 제작하게 되었기 때문에 첫만남이 즐거울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지기 북한에서도 많은 애니메이션이 제작 되어왔다. 그 중의 대표작이 “영리한 너구리” 라고 한다. 대부분의 내용이 계몽적이거나 권선징악의 기본적인 소재로 착하게 살면 복 받고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다 라는 식의 내용이 대부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재미보다는 교훈적인 내용에 비중이 더 많다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재미가 우선이고 교훈적인 내용 같은 것은 있으면 좋은, 없더라도 재미있으면 그만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딩가가 과연 북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 것인가? 하는 것이 궁구했었다. 그러나 의외로 재미있게 보는 것 같았다. 역시 사람의 감성이란 사회가 다르더라도 크게 다를 것이 없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북한의 도시나 건물 안을 보면 정말 우리와는 다른 환경 속에서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간판과 화려한 네온 빛이 가득한 서울의 모습과 조금이라도 비슷한 곳은 한 곳도 없는듯하다. 반대로 얘기하면 이곳 평양과 비슷한 곳은 아마 서울엔 아무 곳도 없을 것이다. 커다란 김일성 동상과 붉은 색으로 크게 써 놓은 여러 가지 구호들이 시선을 끈다. ‘자력갱생’,’당이 결정하면 우리는 한다’, ’조선을 위하여 배우자!’ 들의 구호들이 도시 한 복판에 붉은 글씨로 커다란 서울의 간판대신 쓰여져 있다. 도시에 있는 주민들의 의상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다들 겉보기에도 비슷비슷한 의상들을 입고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은 것은 도시 곳곳에 걸려 있는 포스터 그림들인데, 한결같이 강인한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번 평양방문에선 많은 곳을 방문하도록 계획이 이미 삼천리 측에서 세워져 있었다. 우린 그냥 그 순서에 맞게 같이 다니면 되도록 되어 있었다. 사실 나는 이곳 저곳 방문하고 구경하는 것이 못마땅한 상황이었다. 왜냐하면 ‘딩가’를 생각하면 이렇게 힘들게 온 평양에서 편하게 놀러 다니는 것이 불편하기만 했다. 빨리 기술적인 확인과 전수 그리고 제작에 들어갈 준비를 완비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찌하겠는가? 혼자서 남아서 교육이나 작업을 하겠다고 얘기해 본들 꼭 다같이 다녀야 한다고 못을 박는 말에 그냥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이상익씨와 나는 1주일 동안 모두 ‘딩가’에 대한 자료를 전수 할 수 있도록 계획을 새워 왔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중간에 다른 곳을 관광한다면 스케줄을 지킬 수 없기 때문에 2주 정도 머물러야 하는 부담이 있는 상황이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2주를 머무르기로 하고 하나로통신 식구와 한교수님은 1주 후에 서울로 가기로 계획을 세웠다.
일단 2주를 머무르기로 했으니 이곳 저곳 들리는 것에 부담 없이 같이 다녔다. - 1주일 단위로 있어야 하는 이유는 북경으로 가는 비행기 편이 화요일과 토요일 2회 밖에 없기 때문이다 - 우리가 구경한 곳을 나열하자면 ‘개선문’, ’주체탑’, ’소년궁전’, ’옥류관’, ’서해갑문’ 등이다. 하지만 이곳들을 설명하자면 이야기가 길어지니 www.unikorea.go.kr 에서 참고 하시길 바란다. 하지만 평양의 이곳 저곳을 다녀본 소감을 요약해 본다면 우선 공기가 좋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든다. 서울 저녁하늘 많은 별을 볼 수 있는 날이 얼마 없을 것이다. 그러나 평양은 공기가 맑아서 인지 저녁 하늘 초롱초롱 떠 있는 별을 볼 수 있었다. 개선문이나 주체탑 같은 경우는 김일성 수령을 찬양하고 숭배하는 북한 사람들의 상징적인 건축물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모두 크고 장대하게 만들어 졌다. 한가지 특이한 곳 중에 한곳이 소년궁전이었는데, 쪼만한 7살짜리 아이들이 대부분인 거 같은데 노래, 연주, 그림 같은 것을 귀신처럼 해내는 아이들을 모아 놓은 곳이다. 사실 관광객들은 아이들이 춤추고 노래하는 모습을 보고 좋아하고 박수치고 했지만 난 속으로 남한이나 북한이나 주입식 교육은 똑같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어려서 교과서 달달 외우는 교육에 얼마나 치를 떨고, 공부하기 싫어했는지 모른다.
삼천리의 안내원 중에서 김선생이라는 분은 남측에서 벌어지는 IT 분야에 상당히 관심이 많은 분이었다. ADSL 이나 무선 이동통신 같은 분야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는 듯 했다. 하지만 역시 보수적인 사회인지 우리 이상익씨의 염색한 노랑머리가 계속 김선생의 기분을 언짢게 만드는 것 같았다. 말을 하다가도 이상익씨의 머리만 보면 “허~ 그 이선생 남자머리가 그~ 쯧쯔~” 하는 식이다. “다음부터 평양에 들어 올려면 그 머리부터 자르고 들어와야겠습네다” 하지만 우리 이상익씨는 신기하게도 기가 죽지 않고 말대꾸를 했다. “왜요? 한번 해보세요 기분 좋아요~”, “서울에서는 이 정도는 한 것도 아니에요, 머리 전체를 노랗게 하는 사람도 있는데~ 헤헤헤” 이상익씨의 말을 듣던 김선생과 이선생 안내원 두 분은 이상익씨의 머리를 다시 유심히 보다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설래 설래 고개를 흔든다. “그~ 한감독 선생 머리 긴 것은 뭐~ 좀 이해가 감내다만, 머리 노란 것 이해가 안 감내다. 하지만 한감독 선생도 머리만 깎으면 더 미남인데~” 이상익씨의 발언에 불똥이 내게로 튀었다. “허허허” 나는 그냥 웃고 넘겼다.
사실 평양에서 우리 두 사람이 눈에 튀는 것은 사실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리를 외국인으로 보는 것이 사실이었다. 1주간의 일이 모두 끝나고 먼저 하나로 통신분 들과 한교수님은 먼저 토요일 비행기로 서울로 떠났다. 사실 상익씨와 내가 다른 분들을 서울로 보내고 일주일을 더 평양에서 보내게 됐을 때는 답답한 마음이 앞서 있었다. 그간 하지 못한 일들을 해야 하는 것과, 서울과는 벌써 1주일 동안 전화 통화 한번 못하고 지냈으니 답답한 마음은 당연한 것일 것이다. 그렇다고 편지를 보낼 수도 없고. 사실 북한에는 아직까지도 internet 이 되는 곳이 없다. - 4곳에서 internet이 가능하다고 하는데 확인할 방도가 없다 - 전화도 북경까지 밖에 안되고, FAX도 북경 사무소를 거쳐서 승인을 받아서 해야 하며, TV도 남측 방송은 나올 리가 없다. 다행이 호텔에 TV 에서 NHK 방송과 중국 방송이 나와서 가끔 한국에 대한 뉴스가 나올 때 조금씩 그림으로 한국의 뉴스를 접할 수는 있었지만 뭐라고 하는지 통 알 수가 없어서 몇 번 보려고 하다가 관두고 말았다.
삼천리 측에게는 그간 오전과 오후 시간을 몇 번식 시간을 내서 CG 이론 교육을 실시 하였다. Modeling, Motion Control, Material Editing, Rendering 같은 이론적인 내용을 내가 설명하고 딩가를 작업해 왔던 방식을 이상익씨가 실무적인 부분을 교육하였다. 삼천리에서 사용하는 컴퓨터의 사양은 당시 ‘페이스’ 의 장비들보다 더 우수한 기종들이었다. 단지 전기 상황이 좋아 않아서 작업도중에 정전이 되면서 UPS (unlimited power system) 들의 ‘삐~’ ‘삐~’ 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서 마치 새들이 합창하는 소리처럼 들렸다. 이미 삼천리에선 Softimage, Maya, max, light wave에 대한 기능들은 한번씩 검토를 해본 것 같았다. 공대출신의 연구사(작업자)와 예술대 출신의 연구사(작업자) 들이 같이 있는 구조이어서 그런지 툴에 대한 이해는 빨라 보였다. 재미있는 것은 조금씩 우리사 사용하는 용어가 좀 다르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아래와 같다
작업을 끝낸다 / 작업을 떨군다
밤 새운다 / 밤 팬다
열심히 한다 / 전투한다
cd-rom 굽니다. / cd-rom 쓴다
깨진다 / 튕겨나간다
괜찮다, 할 수 있다 / 일 없다
현상이 나타난다 / 표상이 나타난다
맥스 / 맥슈, 막스
광파 / 광파
컴퓨터 / 계산기
팀장 / 조장
작업자 / 연구사
프리뷰 / 미리 보기
하지만 설명을 한 뒤에 질문을 받아보면 아무런 질문이 없었기 때문에 잘~ 알아들었는지 아닌지는 알 수가 없었다. 우리는 기본적인 동작단계 과제를 내주고 결과를 지켜 보기로 하였다. 동작단계 과제란 ‘페이스’ 가 신입사원에게 모션 트레이닝을 하기 위해 내주는 과제인데 이를 삼천리 연구사 들에게 과제로 내 준 것이다. 걷기부터 시작하여 기기, 장애물 넘기, 다리걸기, 몸으로 웃기 등의 4단계로 짜여 있는 과제이다.
하나로 식구와 한교수님이 평양을 떠나는 날 우리는 삼천리 부사장님으로부터 할 얘기가 있으시단 소리를 들었다. “묘향산에 다녀오시는 것이 어드렇습네까?”, “예? 아직 할 일들이 많이 있는데요?”, “먼 곳까지 오셨는데 묘향산에 못 가보면 안되지요”, “꼭 가야 합니까?”, “선생님들 묘향산에 가시면 좋습니다, 이미 계획을 다 잡아놓아서 뒤집을 수가 없습네다” 우리는 두 사람은 3일 동안 묘향산에 머무르게 되었다. 묘향산은 마치 설악산을 축소해 놓은 것 같은 산이다. 아주 가파르고 아기자기한 산이다.
이곳에 묘향산 호텔이 있는데 이곳에서 우리는 2박3일 동안 머무르게 되었다. 북한 사람들이 묘향선녀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바로 묘향산 호텔의 여자 안내원들이다. 요즘에는 산에서 고기를 구워 먹는 사람들이 거의 없지만 북한에서는 흐르는 개울물 옆에 자리를 잡고 고기를 구워 먹는 것이 아주 별식인 것 같았다. 이렇게 개울가에서 고기를 구워 먹을 때는 묘향산 선녀들이 와서 서빙도 하고 같이 술도 마시고 하는데. 정말 술 잘 먹고 넉살도 좋았다.
아침에 등산을 하자고 해서 같이 올라갔다가 무거운 몸에 지쳐서 다리에 알이 배기고 끝까지 다 오르지도 못하고 내려오니 이미 개울가 옆에 선녀가 자리를 잡고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서 점심때부터 술판이 벌어졌는데. 북한 사람들은 정말 술을 자알 마신다. 나는 소주 3잔 마시고 몸이 무거워 그냥 바위 위에 누워서 퍼져서 잠시 잠이 들었는데. 우리 이상익씨는 선녀와 술 대결이라도 한 듯이 엄청 술을 먹었나 보다. 잠이 깨서 쳐다보니 우리 이상익씨가 술이 완전히 취해서 개울물에서 개헤엄을 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더니 미끌미끌한 바위 때문에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고 비틀거리고 있었다. ‘오 마이 갓, 유 노우미~ 아 갓으로 고~’ 하는 식으로 계속 말도 안 되는 영어로 중얼거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보다 못한 북한 안내원들이 이상익씨를 향해서 소리를 쳤다! ‘조선말을 하라구~ 조선말을~’ 여기서부터 내심 조마조마한 심정에 나는 걱정이 됐다. 혹시라도 술김에 말 실수라도 하면 큰일 아닌가! ‘김정일 ~ 어쩌구 저쩌구’ ‘김일성 어쩌구 저쩌구’ 라는 식으로 한마디라도 말을 한다면 큰일 아닌가? 하지만 다행이 계속 말도 안 되는 영어로만 계속 중얼중얼 할 뿐이었다.
나는 상익씨 덕분에 술도 덜 마시고 상익씨를 부축하고 숙소로 돌아 왔다. 그날 이후부터 술을 우리들에게 술을 많이 권하지 않았고. 우리는 묘향산 선녀가 무섭게 보였다. 그 후 우리는 국제친선 관람관이라는 김일성과 김정일 수석이 해외로부터 받은 선물들을 모아서 전시한 곳과, 용문대굴이라고 하는 엄청나게 큰 동굴 등을 구경하고 다시 평양으로 돌아왔다. 우리는 돌아오자마자 묘향산으로 떠나기 전에 과제로 주었던 동작 4단계 과제를 검수 하기로 하였다. 작업자들 중에 2명 정도의 작업자는 생각보다 좋은 결과를 보여 주었다. 사실 내심 걱정스런 생각이 많이 있었는데. 의외였다. 박부사장님의 말에 의하면 원화 교육을 대학에서 받은 사람들이란다. 역시 기본기가 중요하다는 것이 북한에서도 여실이 증명된 것이라고나 할까? 원화 교육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손으로 그림을 그려서 원동화 작업을 해본 사람들이라는 예기이다. 우리는 이로서 모든 계획을 실행하고 서울로 돌아 왔다. 그 이후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의 시점에서는 2번 더 북한에 다녔는데. 결과만 놓고 얘기한다면 상당히 고무적인 결과를 가져왔다고 나는 생각한다.
현재 만들어진 딩가 시리즈중 17화부터가 북한에서 작업한 것들인데. 사실 앞에서 작업한 내용과 그리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현재 24화까지 완성된 상황이고 나머지 33화까지는 현재 북한에서 작업을 하고 있는 중인데. 크게 문제가 일어난 적이 없다. 물로 정치적 이유 때문에 모든 결과물이 북경을 거쳐서 오기 때문에 중간 검수하는 데만 하더라도 받는데 8일 보내는데 8일 정도 시간이 걸리다 보니 16일정도의 시간이 걸리는 것이 무척 안타깝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미 2D 는 유럽의 하청 작업을 많이 하고 있는 상황이고, 3D 는 딩가가 처음이기는 하지만 기본 교육이 잘 되어 있기 때문에 빨리 적응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또한 중국에 경우 납기를 맞추기 위해 밤을 새운다거나 늦게 까지 작업을 한다거나 하는 것이 인식의 부족으로 힘든 상황이지만 2번 더 북한 방문하면서 검수 하는 과정에서 내내 밤새워 작업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북한 하고 3D 애니메이션을 공동으로 하는 것에는 넘어야 할 숙제들이 많다. 딩가의 경우는 1분짜리 인데다가 Internet 로만 노출을 하고 있기 때문에 납기를 못 맞춘다거나 해서 방송에 지장이 생긴다거나 그런 일은 없다. 그러나 만약에 북한하고 방송용 3D 애니메이션을 공동으로 제작한다고 한다면 18일이나 걸리는 검수 시간을 감당하기는 무척 힘들 것이다. 또한 북한에 체류 하는 체류 비용에도 상당이 문제가 있다. 호텔비용과 식비만을 계산하더라도 서울에서 같은 수준으로 체류하는 것 보다 1.5 배정도의 비용이 더 발생하고, 안내원들의 식비까지 같이 지불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는 것이다. 가장 어려운 부분이 바로 제작 비용의 협상인데. 이것은 아직까지 북한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 구조를 잘 이해하지 못함에 의해서 생겨나는 문제라고 생각이 되지만. 3D 애니메이션의 제작 단가를 정하는 북한내의 정확한 기준이 없다는 것이다. 같은 수준의 질을 내더라도 가격이 더 저렴한 것이 보다 경쟁력이 있다는 식의 논리를 아직까지 잘 이해하지 못 하는 것 같다. 또한 애니메이션의 내용상에 사상이나 종교, 또는 이념적인 내용이 있는 소재는 공동제작이나 하청제작을 안 하고 있는 것 또한 우리가 그들을 이해해야 하는 문제인 것 같다.
그러나 계속적인 접촉과 공동제작이 계속 이루어 진다면 이러한 문제들은 하나씩 해결되리라 생각된다. 애니메이션을 산업이기 이전에 하나의 우리의 문화라는 생각을 한다면 이익을 추구하기 이전에 보전하고 발전하는 것이 우리들의 몫이라는 것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 할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남북 합작 애니메이션 은 같은 문화로 남북이 공동으로 제작하는 것에는 큰 의의 가 있을 것이다. 갑자기 너무 거창하게 얘기한 것 같다. 흐흐흐. 사실 통일에 대해서는 뭐라고 얘기할 것이 없지만 주위에서 하도 통일사업 통일사업이라고 많이 부르다 보니까~ 한마디 해야 할 것 같아서~ 주절 주절 떠들어 보았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국내 애니메이션이 영화 쉬리처럼 좀~ 제발 기어코, 마침내, 결국은, 비로소 쾅! ~ 하고 번쩍번쩍 반짝이는 날이 오는 것이 가장 바라는 바이다. (끝)
이상 장황하게 '뽀로로'의 뒷조사를 해봤는데요. 그냥 재미있게 보셨다면 다행입니다. 어린이날 특집글로 올리려 했었는데 몇일 늦었네요. 시간이 꽤 오래 걸렸습니다. 좀 특이한 분석글이라 '이거 뭐니?' 하시는 분도 계시 겠지만 제가 주지하고자 했던 것은 '뽀로로'가 어떻게 탄생이 되었고 누가 이렇게 재미있는 뽀통령을 만들었는지 알리는 것은 후대 한반도의 미래에 그만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서 입니다. 장시간 긴글 보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끝)
첫댓글 히야 저보다 더 많은 자료 역시 이 카페에선 배울게 아주 많습니다
선리플 이제 읽어야지 ㅋㅋ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