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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초록이네mini0A0 원문보기 글쓴이: 초록이
* 기간 : 2007. 8. 8 ~ 8. 19 (11박 12일)
* 코스 : 네델란드,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 러시아
* 경비 : 430만원 (1인당)
풍차 (네델란드)
현지시간으로 16시50분에 암스테르담 스키폴(Schiphol)공항에 도착. 유럽의 허브라 불리어지는 공항으로 인천공항의 4배의 크기라고 한다.
“풍차의 나라” “히딩크의 나라” “튤립의 나라” “목가적인 나라”로 불리어지는 네덜란드. 이 나라는 육지가 바다보다 낮은 곳이다. 바다에 인접한 곳은 바다보다 높아 바닷물이 잘 들어오지 못하고 그 외 지역(중심부 지역)은 바다보다 낮다. 파도가 높게 치면 경작지가 바닷물에 잠기곤 하여 풍차를 이용하여 바닷물을 퍼내고 있다 한다. 1인당 국민소득 4만 달러, 총인구 1,633만명, 면적은 남한의 42%에 지나지 않는 나라이다.
프레데릭스보그 성의 정원 (덴마크)
한국보다 작은 국토 (남한의43%) 와 인구(540만명-대구:254만명) 이지만 자연 만큼은 풍요롭고 오랜 역사를 가진 나라이다. “낙농의 나라” “바이킹의 나라” “안데르센의 나라”로 알려진 덴마크는 총 483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중 코펜하겐이 있는 “셸란섬”과 “핀섬”이 전국토의 1/4을 차지한다. 해발 173M의 산이 최고로 높으며, 전국토의 해발 평균이 30M 이하라 하니 어떤 모습인지 짐작이 간다.
2006년 기준 1인당 국민소득이 47,000달러로 사회복지, 환경, 노사관계, 인권, 개발협력 등 각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선진국이라 한다. 우리나라와는 1902년 외교통상조약 이후 덴마크 정부 기술지원을 받아 우리나라 최초 전화가 가설되기도 했다. 1959년 을사조약으로 단절되었던 외교관계를 재수립 했다 한다. 6.25전쟁시 병원선을 파견하여 의료 활동을 지원해 주었다하니 고마운 마음이 앞선다.
코펜하겐을 벗어나 기차로 45분 정도 가면 아름답게 자리잡은 도시 헬레뢰드 Hillerφd가 있다. 이 마을은 주변의 비옥한 농촌지역에서 경제적 뒷받침을 받는 번창하는 시장도시이자 철도 교차점이기도 하다. 프레데릭스보그 성 주변으로 농기계 제조업,육류 가공업,벽돌 건축업 등이 발달했다
1602 ∼ 1630년 사이에 국왕 크리스티안 4세가 지은 붉은 벽돌로된 독일 르네상스 형식의 이성은 '덴마크의 베르사이유'로 알려져 있으며 호수 바로 위쪽에 자리잡고 있다
200여 년 동안 7명의 국왕이 이 성에서 대관식을 올릴 정도로 덴마크를 대표하는 유명한 성이다. 1859년 화재로 성의 대부분이 소실되었을 때 왕실에서 이를 재건할 경제적 여유마저 없을 당시 맥주 재벌 칼스버그 야콥센의 기부로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현재는 역사박물관으로 덴마크의 유구한 역사를 알 수 있는 각종 자료와 회화,가구,보물 등을 전시하고 있다
호수에서는 뱃놀이를 즐길 수 있고,매혹적으로 꾸며놓은 정원은 소풍을 즐기기에 이상적인 장소이다. 외관장식이 뛰어난 예배당에서는 Elias Compenius에서 유명한 나무로 만든 오르간을 연주하는 일요 콘서트가 오후 5시에 열린다
성 전면에 조성된 정원을 보고 우리는 사진 찍기에 정신이 없었다. “프레데릭스보르 성”을 중심으로 꾸며진 정원은 하나의 작품이라 하여도 손색이 없다. 나무 한그루 잔디 한포기까지 완전 대칭되게 꾸며졌다는 설명을 듣고 감탄사를 연발한다.
뉘하운 (텐마크)
유럽에서 배를 타는 사람들은 긴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오랫동안 침묵으로 해서,혹은 세상의 이곳 저곳을 돌아다녀서 일단 말문이 열리면 한없이 길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들로 인식되고 있다. 믿기 어려운 허풍을 늘어놓는 사람들 또한 뱃사람들이라고도 하는데 그들의 이런 이야기를 '바다이야기(Nautical Yam)'라고 한다. 역시 바다로 나갈 운명을 가졌던 코펜하겐 사람들의 바다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곳이 바로 뉘하운이다. '새항구 New Harbor'또는 안데르센이 살았다 하여 '안데르센 거리'로도 통하는 곳이다.
17세기 중엽 이래 뉘하운은 교역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고 이에 따라 각처에서 몰려든 선원들은 주로 맥주와 여자에 돈을 퍼부었다고 한다. 그 당시만해도 싸구려 선술집이 모여 있던 곳이지만 지금은 각종 요트와 범선의 정박지가 되어있다. 하지만 아직도 전통적인 가옥과 나무로 만든 배,문신을 새기는 가게 등이 남아있어 옛 정취를 느낄수 있게 한다. 운하의 남쪽(안데르센이 살던)에는 고풍스런 건물들이 들어서 있고 북쪽은 파스텔톤의 창이 많은 건물과 멋진 레스토랑,바 등이 들어서 있는데 그 모습이 한폭의 그림처럼 아름답다.
가난뱅이였던 안데르센은 우리나라로 치면 전, 월세정도 되는 이 거리의 20번지에서 1835년 최초의 동화집인 <어린이들을 위한 동화집>을 완성했으며, 67번지에서는 1845년부터 1864년까지 거주하였다. 18번지에서는 최후의 2년간을 보냈다고 한다. 20번지, 67번지, 18번지 등의 순서로 옮겨다닐 수 있던 그런 동네였다. 지금은 관광객들로 붐벼 주점과 식당들이 많아져 덴마크의 또다른 명소로 등장하고 있다. 그리고 69번지는 안데르센 기념관으로 그와 관련된 많은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인어공주 동상 (덴마크)
코펜하겐의 상징으로 덴마크 방문 기념사진을 찍는 곳이 바로 인의의 상이다. 코펜하겐 북쪽 린게리니(Langeline)거리를 따라가면 해안의 바다위에 앉아있는 모습을 볼수 있을 것이다. 안델센의 동화 '인어공주' 에서 모티브를 얻어 1913년 조각가 에드바르트 에릭슨 Edvard Eriksen에 의해 만들어져 있다. 당시 왕립 극장에서는 발레 <인어공주>가 상영되고 있었다. 그것을 본 칼스버그 맥주회사의 2대 사장인 칼 야콥슨 Carl Jacobsen이 동상을 설치하는 아이디어를 제공했다고 한다. 모델은 극장의 프리마돈나로 절세 미인이었다고 하는데 후에 조각가의 부인이 되었다.
바다의 대왕 막내 공주인 아리엘 과 육지세계 왕자 사이에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끝내 왕자의 사랑을 얻지 못하고 물거품으로 변해 버린다는 아리엘의 슬픈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는 안데르센의 동화 인어공주....
브뤼셀의 오줌싸게 동상, 독일의 로렐라이와 함께 "유럽의 3대 썰렁 명소" 중에 하나인 인어상은 전체 길이가 80cm에 불과하여 생각보다 외소하고 초라하다. 누구나 이곳에 오면 인어상을 보고자 부푼 꿈을 갖지만 실제의 모습을 보면 다소 실망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쓸쓸해 보이면서도 사랑스런 그녀의 모습은 여행자들의 발길을 놓지 않는다. 1964년 4월 23일,24일에는 누군가에 의해 그녀의 머리가 떨어져 나가는 사건이 있었다. 다행이 원래의 상태로 복구되었지만 1984년 또다시 왼쪽 팔이 떨어져 나가는 수난을 겪어야 했다. 지금의 팔은 나중에 제작하여 부착한 것이다. 자세히 보면 복원으로 생긴 이음새가 보인다.
2004년 현재 91세가 된 그녀는 아직도 다소곳한 자태로 세계에서 몰려드는 관광객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고 있다.
DFDS (덴마크)
아틀란틱 로드(노르웨이)
대우 윈스톰 광고에 나오는 곳으로 유명.
광고를 보고 "무슨 차 광고인지 생각은 안나지만 완전 멋진 도로다." 라고 배경만 떠오른다면 실패한 광고?
아니 광고 찰영지 때문에 이슈화 되고 있다면 좋은 광고?
몰데에 있으며 작은 많은 섬들을 이어가는 도로가 너무나 아름답다.
약간의 담력을 가지고 운전해야할 듯.
세계적으로SUV 시운전 장소로 유명한 곳으로 파도가 3미터 이상 올라오는 날에는 차에도 파도가 덮친다고 .........
노르웨이에 대한 이야기로
스칸디나비아 3국(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 연합(1397-1523)의 일원으로서 지구 최북단에 위치하고 있고, 25만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총 면적은 남한의 4배 크기이며, 인구는 460만명에 불과하지만 개발도상국에 많은 원조를 하고 있는 대표적인 복지국가이다. 전국토의 80%는 아직 개발되지 않은 땅으로 10km당 1명의 인구 분포를 이루고 있다 한다. 국토의 길이는 2천 km, 피요르드 해안선의 총 거리는 2만km로 지구의 반 바퀴에 해당한다니 상상이 가질 않는다.
2006년 기준 1인당 국민소득이 64,000달러로 세계 최 상위권에 해당한다. 노르웨이가 이렇게 잘 살게 된 것은 1969년 북해 유전에서 석유가 발견되면서부터란다. “브렌트유”라고 불리어진 이 유전은 베르겐 바로 아래에 위치하고 있으며 품질이 좋다고 한다. 하루 생산량은 300만 배럴, 어림잡아 석유가 국민소득에 기여하는 것이 2만 달러 이상이 된다고 하니 그저 부러울 뿐이다. 이곳의 물가는 높은 국민소득에 걸맞게 매우 비싸다.
이 나라 국민이 되는 방법은 국제결혼이나 난민지위를 인정받는 것뿐이라 하니 쓸데없는 공상은 헛수고일 뿐이다. 우리 교민은 현재 570명이 등록되어 있고 상사직원을 제외한 실 교민은 200명에 불과 하단다.
1950년에 건립된 이곳 시청사는 2000년도 12월 10일 오후 4시30분 시청사 콘서트홀에서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노벨평화식이 거행되었던 곳이다. 시상식 날짜와 시간은 같은 시간 이탈리아 산레모 휴양지에서 숨을 거둔 노벨을 기리기 위해서 정해졌다 한다. 노벨의 뜻에 따라 노벨상 수상자 선정 발표는 스웨덴의 한림원에서, 시상식은 스웨덴 스톡홀름 콘서트홀에서 거행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노벨평화상만은 노벨의 유서에 의하여 노르웨이 퇴임 국회의원 5명으로 구성된 노벨위원회가 발표하며, 시상식 또한 노르웨이 오슬로 시청사에 거행된다
게이랑에르피요르드 (노르웨이)
게이랑에르피요르드(Geirangerfjord)
해발 1500m 에 있는 산맥들 사이에 끼어있는 총 25km의 길이(게이랑에르에서 휄레쉴트까지)를 가진 이 피요르드는 하얀 실 같은 수없이 많은 폭포들로 뒤덮여 있다.
이 피요르드는 여름에만 통행이 가능한데, 주요한 볼거리로는 세계적인 수준의 골든 루트(Golden route), 브릭스달(Briksdal) 빙하, 7자매 폭포, 그리고 달스니바(dalsnibba) 전망대,플리달스주베(Flydalsjuvet) 전망대등이 있으며, 웅장한 폭포들은 배위에서도 볼 수 있다.
“피요르드”란 지금부터 4-5만년 전에 이 지역을 덮고 있던 두께 1-2km에 이르는 빙하가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내려앉으면서 거듭된 침식작용으로 만들어진 U자 또는 V자 형태의 계곡을 의미하며, 그 계곡으로 바닷물이 유입되면서 오늘날과 같은 특이한 모습을 갖게 된 것이다. 한마디로 피요로드는 자연이 인간에게 준 종합선물이라 할 수 있겠다.
지구상의 피요르드는 노르웨이, 뉴질랜드에서만 볼 수 있는 희귀한 지형이다.
수십억년 전부터 지구상에는 4번의 빙하기가 있었는데 이곳 피요르드는 마지막 4기 빙하기에 만들어졌다 한다.
게이랑에르피요르드- 7자매 폭포 (노르웨이)
폭포 줄기 182m의 암반 절벽을 타고 일곱 줄기로 쏟아지는 “7자매폭포”는 게이랑에르 피요르드 관광의 극치이다. 7자매폭포의 맞은편에는 “총각폭포”가 큰 줄기를 이루며 떨어지고 있다. 한국어 안내방송(안내방송을 녹음한 여자를 산악열차에서 만났다. 이젠 할머니에 가까운)을 통해 7자매폭포에 관한 전설을 들려준다.
옛날 이곳 해안 왼쪽에 위치한 총각이 맞은편 일곱 자매에게 차례대로 구혼을 청하였으나 모두 거절당하자 상심하여 술로 세월을 보내다가 마침내 폭포로 변했다 하며, 지금도 폭포 중간에는 술병모양의 무늬가 선명하게 남아있다고 한다.
바다와 절벽과 구름과 폭포의 조화가 한폭을 그림이다.
가파른 절벽위에 사람이 살지 못할 것 같은 곳에 농가가 있다. 지금은 비어 있지만 그 옛날에는 농부가 양을 치며 살다가 세무공무원이 세금을 매기기 위해 기르는 양의 숫자를 실사하러 농장을 찾아올 때면 사다리를 걷어 올려 올라오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브릭스달 빙하(노르웨이)
다이나믹한 빙하, 7인승 전동차를 타고 빙하 입구 가까이 까지 올라갈 수 있다. 빙하로 가는 도중에 아름다운 폭포를 감상할 수 있었다.
빙하! 지구상에 10%가 남아 있으며 그 중에서 1%가 노르웨이에 있고, 그 중에서 80%가 이곳 브릭스달에 남아 있단다. 노르웨이에 있는 빙하는 곡빙하로 평균 두께가 560m이며, 1일 최대 2m씩 움직인다 한다. 계곡에 흐르는 물은 지금까지 보아왔던 것(뉴질랜드, 캐나다)과 같이 우유 빛 물이다. 빙하에 머물러 있는 석회석이 함께 녹아 흘러내린 것이다.
브릭스달 빙하는 해발 1,450m에 있는 요스테달 빙하(Jostedal Glacier) 국립공원(1991년 국립공원 지정)내에 있다. 15분정도 오픈카를 타고 가다 하차한 후, 도보로 25분정도 걸으면 거대한 얼음덩이가 산꼭대기에서부터 골짜기까지 누워있는 빙하를 직접 만져 볼 수 있다
파란색으로 촬영된 사진모습이 그저 신기하다. 빙하 속에 푸른빛이 도는 것은 빙하가 햇빛 중 파란색을 흡수하지 못하기 때문(?)이란다. 겉으로는 얼음 덩어리가 산위에 걸쳐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얼음 밑에는 쉴 새 없이 녹아 흘러 강물을 만든다 한다.
브릭스달 빙하를 내려오면서
트롤(요정) 조각상 (노르웨이)
북유럽의 신화나 전설
<트롤이야기>
트롤들은 초능력을 가지고 있어 자신들의 모습을 변형시킬수 있는데 종종 여자트롤들은 믿기힘들정도로 아름다운 인간여자로 변신하기도 한다. 이들은 숲속의 님프(Nymph : 산·강·연못·숲 등에 사는 예쁜 소녀 모습의 정령,요정)라고 불렸는데 그들은 숲속으로 사냥나온 인간남자들이나 순진한 농촌의 소년들을 유혹하기도 한다. 이들에게 유혹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뒷모습을 보면 되는데 모습은 변하지만 소꼬리모양을 한 이들의 꼬리는 감출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남자트롤들 또한 산 속에서 일하는 농촌의 여인들이나 소젖을 짜러나온 처녀들을 마법을 걸어 산속으로 데리고 가기도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여인들중 대부분은 마을로 되돌아오곤 한다.
어린 트롤들 또한 믿기 힘든 마법을 사용하는데 어른트롤들은 마법을 쓰며 장난치는 어린 트롤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으며 화를 낸다.
트롤들과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좋다. 인간들은 트롤들을 괴롭히고 못살게 구는 것을 꺼리는데 그 이유는 트롤들을 못살게 굴 경우 가축들에게 질병과 저주를 옮겨 죽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트롤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경우 가축들의 젖에서 보다 많은 우유가 나오게 하며 털에 윤기가 흐르고 더욱 건강하게 만들어준다.
쿄스포젠(Kjosfossen)폭포 (노르웨이)
달리던 기차가 정차한 곳은 왼쪽 높은 산위에서 굉음을 내며 흘러내리는 웅대한 폭포 쿄스포젠(Kjosfossen)폭포가 있는 곳이다. 이곳은 해발 699m로 플롬역에서 15.6km 떨어진 지점이다. 산 정상에 있는 만년설이 녹아 레이눙가호수(Reinunga Vatnet)를 이루고 이 호수물이 넘쳐 거대한 폭포를 형성하고 있는데, 일명 훌드라 폭포라고 한단다.
이곳에서는 관광객을 위한 훌드라 요정의 전설을 재현하는 깜짝 퍼포먼스가 연출된다. 거칠게 내리치는 물줄기 바로 옆 바위 위에 빨간색 긴치마를 입은 훌드라 복장을 한 요정(아르바이트 대학생)이 홀연히 나타나 음악소리에 맞춰 춤을 추다 자기를 따라 오라는 손짓을 하며 사라진다
전설에 의하면, 어느 날 밤 신기한 음악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훌드라 요정이 나타나 마을 남정네들을 홀린다. 이 기이한 음악소리를 들은 마을의 남자들은 요정의 뒤를 따라 산 위로 올라갔고, 훌드라 요정은 따라온 남자 모두를 양으로 변하게 하여 폭포 속으로 몰아 사라지게 한다. 그 이후 사라진 남자들은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알 수 없다는 전설이 프롬스탈렌 마을에 전해져 내려온다 한다.
뮈르달 역 (노르웨이)
이곳은 산악열차로 와서 일반열차로 갈아타는 산 중턱에 있는 조그마한 역으로 오슬로와 베르겐까지 가는 정기노선 중간역이기도 하단다
<플롬으로 가는 길의 풍경 >
푀드의 호텔에서 출발하여 버스로 피얼란드 터널을 지나 송네 피요르드의 일부인 만헬러-포드네스 구간을 훼리로 이동하고 산악열차를 타고 게일로를 거처 다시 버스로 빙하의 침식으로 형성된 절경을 감상하며 헴세달 고개넘어 골 경유 크뢰단 호수를 지나 오슬로에 도착하여 호텔에 이르는 긴 여정.
204km의 길이로 세계에서 가장 길며, 가장 깊은 곳이 1309m나 되는 “송네 피요르드!”
배에서 내린 버스는 세계에서 제일 길다는 라르달 터널을 지난다. 라르달 터널은 24.5km로 2000년에 준공된 2차선 도로다. 규정 속도 80km 3군데 과속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다 한다. 7,000억원에 이르는 공사비를 아울라시에서 전액 지원했기 때문에 통행료는 없다.
(57㎞구간, 2017년 완공예정인 취리히∼밀라노간 알프스 산악 지대를 관통하는 고타르트 베이스 터널(1996년 착공)이 완공할 때까지 기록은 유지될 것 같다. 시속 250km의 고속열차 운행 예정)
스톡홀름의 시청사 내부(스웨덴)
스톡홀름시의 상징적 건물로 1911년부터 1923년에 걸쳐 라그나르 오스트베리의 설계로 만들어져 20세기의 가장 뛰어난 건물이란 평가를 받고 있다. 내셔널 로만 양식의 건물로 800만개의 벽돌과 1900만개의 금도금 모자이크로 지어졌다.
은은하면서도 고상한 기품을 느끼게 해주는 건물에 2층에는 '황금의 방'이 있는데 매년 12월 10일 노벨상 수상자들을 위한 만찬과 파티가 열리는 곳으로 유명하다
노벨상시상은 물리학상, 화학상, 생물/의학상, 경제학상, 문학상은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열리지만 평화상은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거행된다. 전체 여섯 부문이다. 수학상이 만들어지지 않은 것은 당대 최고의 수학자 레플러와 사이가 좋지 않아서란다.
<스웨덴>
1인당 국민소득 4만2천 달러, 국가경쟁력 세계3위, 국가혁신도 EU 1위, R&D 투자 EU 3위의 나라 스웨덴은 1930년 이후 복지국가를 확립하였으며 면적은 남한의 4.5배, 인구 910만명이라 한다. 수도 스톡홀름에는 178만명이 살고 있단다. 스웨덴은 6.25전쟁 때 우리를 지원 해준 나라이며 1953년 외교관계가 수립되었다. 현재 스웨덴에 거주하는 한국인은 2,000명에 이른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중의 하나로 꼽히는 스톡홀름은 도시 전체를 감싸고 흐르는 발틱해 와 마라렌(Malaren) 호수가 만나는 곳에 14개의 섬이 57개의 다리로 연결되어 이루어져 있다. 유서 깊은 건물이 즐비해 “북유럽의 베니스”라 불리는 스톡홀름은 1523년 수도로 정해진 이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성장해 왔다.
세르겔 광장을 중심으로 반경 2-3km 이내에 주요 관광명소가 몰려있다.
실자라인을 타고(스웨덴)
실자라인은 스톡홀름(스웨덴)과 헬싱키(필란드)를 있는 발틱해의 초호화 유람선이다.
ㅇ 선 명 : 실자세레나데
ㅇ 캐빈수 : 986 실
ㅇ 승객정원 : 2,862 명
ㅇ 중량 : 58,400 그로스 톤
시벨리우스 공원(필란드)
만네르헤이민 거리 남쪽의 스웨덴 극장 앞에서 24번 버스로 약 10분 정도 달리면 핀란드의 대표적인 작곡가이며, 세계 최고의 작곡자인 시멜리우스(1865∼1957)를 기념하여 에일라 힐투넨이 제작한 스테인리스 파이프 기념비와 시벨리우스 초상 릴리프가 왼편에 나타나는데 이 기념비가 있는 곳이 시벨리우스 공원이다.
수백개의 강철 파이프로 된 이 강렬한 은빛의 조각품은 이제 헬싱키 최고의 여행지가 되었다. 바로 옆에 시벨리우스의 데드마스크가 있다.
바실리섬의 해전 기념 원주 (러시아)
<러시아>
9세기 후반 동슬라브족을 중심으로 국가를 성립하였으며, 수많은 전쟁을 거친 후 17세기말 표르드 대제가 성 페테르부르그를 수도로 근대러시아를 성립하였다. 계속된 왕권 정치의 부패로 인하여 1917년 2월 니콜라이2세를 마지막 왕으로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그 해 11월 7일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성공한 레닌이 세계 최초의 공산 정권을 수립하고, 1918년 수도를 모스크바로 옮기고, 러시아, 우크라이나, 백러시아, 카프카즈로 이루어진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을 구성하였다. 1024년 레닌 사망후 권력을 잡은 스탈린은 집단농장을 건설하고, 1936년 스탈린헌법 <소비에트 헌법>을 제정하고 이 법을 기초로 노동자, 농민, 학자, 문화인 등 막대한 인원을 체포하여 처형하였다. 이 후 말멘코프, 후르시쵸프, 브메즈네프, 안드로포브, 체르넨코 등을 거쳐 1985년 3월 고르바쵸프가 서기장에 임명되어 페레스트로이카, 글라스노스트로 대표되는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개혁 정책을 폄으로써 오늘에 이르렀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면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인 러시아에서 제2 도시다. 발트해 핀란드만 동쪽 끝 네바강 하구에 위치하고 있다. 관광객이 연 2500만~3000만명에 이르는 세계적 관광 도시로 지금은 인구 460만의 제2 도시이자 시가지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아름다운 문화ㆍ예술의 중심 도시다.
노르웨이 핀란드 스웨덴 등 북유럽 3국과도 인접해 유럽의 관문 역할을 하고 있는데, 러시아 내에서 가장 유럽다운 도시로, 네바강을 중심으로 한 도시 풍경은 마치 파리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도시 곳곳을 아름답고 장엄하게 장식하고 있는 궁전, 성당, 동상은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의 영화가 어디까지 이르렀는지 짐작하게 해준다. 도시 건설 당시 지어진 집들이 지금의 시가지를 이루고 있는데, 단 한 집도 같은 디자인이 없을 정도로 독특하고 다양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또한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북구의 베니스`라고 부르는데 이는 세느강보다 아름답다는 네바강에 연결된 수많은 운하와 600여 개 다리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특히 러시아 근대사에 큰 획을 그은 '피의 일요일' '부르주아 혁명' '볼세비키 혁명' 등 이 나라 3대 혁명이 이 도시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혁명의 도시'라고도 부른다.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성스러운 페테르의 도시'라는 뜻으로
성스러움을 뜻하는 saint(세인트, 쌍, 상트, 셍트, 장크트)란 라틴어이고 베드로 성자를 뜻하는 piter(피에트로, 피터, 피테, 뻬쩨르)의 러시아식 이름이며. 부르그는 도시라는 독일어에서 따온 이름으로 뻬쩨르브르크가 러시아 원어에 가깝다.
이렇게 이름이 요란한 도시를 붉은 혁명 때 레닌그라드로 개명했다가 지금은 다시 원상복귀했다.
그러나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대도시로서는 이례적으로 300년 동안 네 차례나 그 이름이 바뀌었다.
1617년 스웨덴 군대가 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 지역을 점령하고 있을 때에는 이름조차 없는 습지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라는 도시의 이름을 갖게 된 것은 표트르 대제가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기 위하여 공사를 시작한 1701년이다.
200년 이상 상트페테르부르크라는 지명을 사용하다가 1914년 독일군이 침공하자 시민들에게 애국심을 고취시킬 목적으로 표트르 대제의 이름을 따서 페트로그라드(Petrograd)로 이름을 바꿨다.
표트르의 도시(Petrograd)라는 의미다..
그러나 페트로그라드로 이름을 바꾼 지 겨우 10년이 지난 뒤, 볼셰비키 혁명의 영웅인 레닌이 죽자 그를 기리기 위하여 1924년부터는 레닌그라드(Leningrad)라고 불리게 되면서 이 후 67년 동안은 공산주의 혁명을 상징했다.
1991년 공산주의 체제가 붕괴되자 시민들은 옛 지명인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사용할 것을 요구하였다.
결국 시민 투표를 통해 압도적인 지지를 얻어 처음 사용했던 상트페테르부르크라는 지명을 다시 찾게 되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탄생>
표트르 대제는 1701년 서구 문화를 받아들이기 위하여 장대한 도시계획을 세우고, 핀란드 만과 네바 강이만나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할 것을 발표했다.
이 계획을 발표하자 관리들은 물론이고 왕족들까지 깜짝 놀라며 크게 반대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당시 북유럽에서 오랫동안 러시아에 대적했던 스웨덴과 너무도 가까운 거리에 있었고, 척박한 오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대를 무릅쓰고 표트르 대제는 계획을 강행했는데 1703년 이곳의 수비를 목적으로
페트로 파블로프스크 요새를 짓기 시작함으로써 도시건설의 기반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새 도시를 짓기에는 이 지역의 자연환경이 좋지만은 않았다.
연 평균 기온은 4.2도에 일조량은 31일 정도이고, 매년 한 번씩 홍수가 터져서 곤혹을 치른곳이었으며 또 원래 습지였던 지역으로 도시를 바로 짓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한편 도시를 짓기 위해서는 석조 토대가 필요했는데, 이 때문에 도시를 지을 때 돌을 쏟아부어 습지를 메울 필요가 있었으며, 습지를 메우는 데에는 어마어마한 양의 돌이 필요했다. 이에 표트르 대제는 돌을 충당하기 위해 도시를 들어오는 모든 선박과 사람들에게 돌을 가져오라고 칙령을 내렸다.
선박은 크기에 따라 30kg이상의 돌을 10~30개 가져와야 했으며, 육로로 들어올 경우에는 15kg이상의 돌을 세 개씩 가져와야 했다.
수많은 노예들이 습지를 돌로 메우는 데에 이용되었으며 가혹한 자연과 고된 노동을 이기지 못하고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였다.
이때 죽은 노예를 습지로 던져버렸기 때문에 이 도시에는 ‘뼈 위에 세운 도시’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이 있다.
이 때는 석조 건축물을 짓는 것도 금지되었으며, 각종 물건들에도 세금이 붙었고 교회의 재산도 국가에 귀속시켜 버렸다.
표트르 대제는 호화로운 모스크바 궁전을 마다하고 작은 오두막에서 생활하면서 공사를 직접 점검했다. 오두막에는 코트와 나침반, 노를 저어 이동할 수 있는 작은 보트 정도만 있을 정도로 표트르 대제는 검소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1709년 스웨덴과 벌인 폴타바 전투에서 러시아가 승리하면서 관리들의 반대는 자연스럽게 사그라지게 되었다.
폴타바 전투에서 승리하자 표트르 대제를 지지하는 관리들과 상인들은 완성되지도 않은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주하여 살기 시작했다.
도시가 어느 정도 틀을 갖추기 시작한 1712년에는 수도를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겨 왔다.
표트르 대제의 오랜 꿈이자 러시아의 저력을 유감없이 보여 준 계획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이렇게 탄생하게 되었는데 1917년 2월과 10월 볼셰비키 혁명 후 1918년 레닌이 수도를 다시 모스크바로 옮겨가기 까지 206년간 제정 러시아의 수도로서 로마노프 왕조가 영화를 누리던 곳이며, 러시아 혁명의 시발점으로서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곳이기도 하다.
성피터스버그의 발상지인 표트로 바블롭스키 요새(러시아)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는 당시 스웨덴의 해군과 대치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 때 스웨덴 군대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상트 페테르부르그에 있는 토끼섬에 요새를 건설했다고 한다. 스웨덴도 마찬가지로 러시아의 침입을 막기 위해 요새를 세웠지만, 러시아는 단 한 번의 침입으로 스웨덴을 완전히 제압해 버렸다. 결국 양국의 요새 모두 그다지 소용이 되지 않았던 셈이다. 러시아의 페트로파블롭스키 요새는 이것이 위치한 장소가 섬이라는 것에 착안하여 감옥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현재 남아 있는 요새는 네바 강 근처의 산책로로 사랑 받고 있다고 한다. 요새의 출입문마다 새겨진 독수리 장식은 황제를 상징하는 것이며, 금붙이로 만들어진 장식 또한 아름다워 사람들이 많이 찾는 장소이다
순양함 오로라(러시아)
러일전쟁때 4대의 함대가 우리나라에 왔을 때 일본에게 3대가 격침당하고 1대가 돌아왔는데 그 배가 오로라호이다.
천안함보다 더 큰 배를 파견하여 우리나라를 차지하려고 했던 순양함 뒤로 삼성 광고판이 크게 보인다.
에르미타쥐 박물관-겨울궁전-(러시아)
예카테리나 여제가 러시아를 통치했던 아름다운 궁전
로마노프왕조 때 러시아의 문화 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해 궁정에서 수집한 미술 작품을 중심으로 설립하였다. 지금의 에르미타슈는 엘리자베타 여제(女帝) 이래 역대의 궁전이었던 동궁(冬宮)과, 증축한 소(小)에르미타슈,극장,구(舊)에르미타슈(모두 18세기 후반),신(新)에르미타슈(1851)의 5개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당대 제1의 수집가였던 예카테리나 2세 때에 이미 3926점의 회화가 수집되었으며, 현재의 소장품은 약 250만 점이라고 하며, 6개 부문(원시문화사, 고대그리스, 로마세계, 동방제민족문화, 러시아문화, 서유럽미술, 고화폐)으로 나뉘어 소장 공개되고 있다. 궁정의 관할하에 있었던 1852년부터 미술관으로서 일부 인사에게, 혁명 후에는 국유화하여 1920년부터 일반에게도 공개되었다. 353실의 방대한 전시품 중 동궁을 포함하여 125실을 차지하는 서유럽미술의 소장품은 역대 황제에 의하여 수집된 르네상스에서 근세에 이르는 명화에 시추킨, 물로조프 등의 대수집가에 의한 프랑스 인상파와 에콜 드 파리의 작품을 포함하여 러시아뿐만 아니라, 세계 제1급 미술관으로서의 면모를 자랑한다.
C.모네, C.피사로, J.밀레, A.르누아르를 비롯하여 P.세잔, V.고흐, P.고갱, E.드가, G.쿠르베, P.피카소, H.마티스, 렘브란트 등의 걸작이 포함되어 있다.
1,050개의 전시실이 있으며 창문의 수는 2,000개를 헤아리고 120개의 계단이 있다. 방의 총 면적은 4만6천㎡, 이 거대한 건물 안에 소장되어 있는 15,000개의 회화,12,000개의 조각품,60여 만개의 발굴품 등 총 컬렉션은 약 250만점이 넘는다. 지붕위엔 176개의 조각품이 서 있다.
전시되어 있는 모든 작품들을 한 점당 1분씩만 감상해도 5년이 걸린다는 곳이다. 소장품의 종류와 그 예술적 가치는 최고의 수준이고 미술관이 된 궁전 자체도 매우 훌륭하여 로마노프 왕조 러시아 황제의 권력과 화려한 생활을 엿볼 수 있다.
겨울궁전의 첫 건설은 1711년 피터1세에 의해 이루어진다. 1712년 자신의 재혼 피로연 장소로 이용했던 장소이기도 하다. 현재의 겨울궁전 모습은 피터 1세의 딸인 “에리자베타”에 의해 1767년 재건된 것으로 건축적으로 바로크 양식의 절정기에 해당된다. 큰 곡선과 넓은 유리창을 과시하며 화려한 장식이 가미된 “에리자베타”식 바로크 양식이었고 그 백미가 “겨울궁전”이다.
“에리자베타”는 처녀로 왕위에 올라 21년간 재임하는 동안 프랑스 문화에 심취해 있었으며 박물관 이름조차 ‘휴식공간’이라는 의미의 프랑스 말 “에르미타쥐”라 지었다 한다. 겨울 궁전을 짓기 위해 백성들로부터 더 많은 세금을 거두기 위해 그녀의 신하들은 주화의 무게를 늘리고, 주세를 거두기 시작한다. 그것은 백성들이 생활은 궁핍해지고 주머니 속의 동전은 무거우면 그만큼 보드카를 많이 마실것이며 그러면 주세를 많이 거둔가는 것이다. 그녀의 20년 재위 기간동안 제 1의 황금기를 맞이한 귀족들은 여황제의 허영심을 부추키며 백성들의 피와 땀으로 이 궁전을 짓기 시작한다. 엘리자베쓰는 죽었을 때 옷장에서 1만5천여 점이 넘는 옷, 구두, 가발 등이 나왔
제 2의 귀족들은 황금기를 맞이한 에카테리나 2세 때(1764) 유럽으로 4,000여 점의 회화를 수집한다. 이후에도 소장품은 계속 늘어나서 회화뿐만 아니라 세계의 문명에 관한 귀중한 자료로 궁전이 가득차게 되었다. 에르미타쥬에서 가장 볼 만한 것은 서구 미술의 전시품으로 러시아, 이집트, 그리스, 로마, 페르시아 , 터키, 인도, 중국, 비잔틴, 일본 등 세계의 고대 유물과 예술품이 많이 전시되어 있으며, 고대 러시아 문화와 스키타이 문화에 대해서도 알 수 있다. 125개의 전시실을 차지하고 있는 서유럽 미술관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라파엘, 미켈란젤로, 루벤스와 렘브란트 등 우리와도 친숙한 화가들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일반인에게 공개되지 않는 지하 보물실에는 제정러시아 시대의 각종 보석과 장신구,왕관 등이 보관되어 있다.
미술관의 규모가 광대하기 때문에 목표를 정해 놓지 않으면 에르미타쥬의 미아가 되기 쉽다. 워낙 인기가 있는 곳이기에 시즌에는 내국인 뿐 아니라 외국인 여행객의 참관이 많아 2개의 출구를 줄을 서서 입장하고, 내부에서도 줄을 서서 다녀야 할 정도이다.
다고 한다.
이곳은 런던의 대영 박물관, 파리의 루부르 박물관과 함께 세계 3대 박물관으로 손꼽힌다. 담록색의 벽에 하얀 기둥이 조화를 이루고 주말 밤이면 야외등을 모두 밝히는 이 박물관은 네바강이나 광장 쪽에서 바라만 보아도 러시아의 번영과 제황시대의 기품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러시아가 세계에 자랑하는 초일류 미술관으로 이 도시의 제일 가치 있는 문화유산이기도 하다.
박물관을 대표하는 것은 회화 작품이다. 미술을 전공하는 이들에게 이곳은 하나의 성지와도 같다. 에르미타주에서는 이탈리아 , 네덜란드, 플랑드르 회화의 최고봉을 쉽게 만날 수 있다. 라파엘로의 ‘마돈나 코네스타빌레’, 조르조네의 ‘유디트’,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베누아의 성모’ ‘리타의 성모’가 언제나 관람객을 반갑게 맞아준다. 이외에도 렘브란트의 작품 25점, 루벤스의 작품 40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 회화의 주된 경향, 즉 인상파·후기인상파·야수파, 입체파에 해당하는 전시 작품들이 가득하다. 박물관에 있는 이 시대 그림들의 컬렉션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성 바실리 대성당(러시아)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에 있는 러시아 정교회 성당이다. 모스크바 대공국의 황제였던 이반 4세가 러시아에서 카잔한국을 몰아낸 것을 기념하며 봉헌한 성당이다. 1555년 건축을 시작하여 1560년 완공하였다. 러시아 양식과 비잔틴 양식이 혼합되어 있다. 47미터 되는 팔각형의 첨탑을 중앙으로 하여 주변에 8개의 양파 모양의 지붕들이 배열되어 있으며 예배당을 형성하는 4개의 다각탑과 그 사이 4개의 원형탑이 솟아 있어 총 9개의 탑이 있다. 탑들은 서로 무질서하게 배열되어 있으나 그 곳에서 조화로움이 보인다.
이반 4세는 완공된 성 바실리 대성당의 모습에 반해 이런 아름다운 건물을 두 번 다시는 못 짓게끔 건축을 담당했던 '바르마'와 '보스토니크'의 눈을 멀게 했다고 하는 전설이 있으나,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보스트니크가 완공 이후에도 활동했다는 기록이 있다.)
붉은 광장 옆 국영 굼 백화점인 (러시아)
성 이삭성당은 러시아 정교회성당으로, 지어질 당시에는 러시아에서 가장 큰 규모로 지어졌다. 높이 101.52m, 성당의 둥근 천정이 21.83m인 이 성당은 64~114톤에 이르는 72개의 거대한 원형의 돌들로 둘러싸여 있다.
성 이삭성당 광장에 있는 니콜라이 1세의 기마상.
<여름 궁전>
러시아어로 '페트로 드보레츠' 라고하며 '표트르의 궁전' 이라는 뜻이다. 표트르 대제가 주로 여름을 보내기 위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여름 궁전'이라고 불린다.
검소한 실용주의를 추구했던 표트르 대제가 건설한 건축물 가운데 유일하게 호화로운 건축물이다.
여름궁전은 1709년 표트르 대제가 스웨덴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조성했는데 프랑스의 전제군주였던 루이 14세가 건설한 당시 유럽에서 가장 크고 호화로운 베르사유 궁전을 의식하여 그에 못지않은 호화로운 궁전을 건설 하고자 하였다.
총 면적 1,000ha(3,025,000평)로 위 공원과 아래공원으로 나뉘는데, 그 이유는 궁전 뒤편에 있는 위 공원이 아래공원 보다 높기 때문이라 한다.
물의 낙차를 이용해서 분수를 만들었는데, 두 공원에는 총 144개의 분수와 7개의 작은 공원, 가로수실, 그리고 작은 궁전들이 배치되어 있다. 1714년 포트르 대제의 명령에 따라 수많은 건축가들과 조경기사, 조각가가 여름궁전 건설에 참여하였는데 정원은 알렉상드로 르블링이 꾸몄다.
대궁전은 도미니크 트레치니가 설계했는데 핀란드만에서 점점 높아지는 테라스 모양의 지형을 이용하여 공원과 궁전을 짓고 분수와 조각상을 만들었다.
표트르대제가 사망한 1725년까지 11년에 걸쳐 완성되었지만 현재의 바로크풍 장식은 겨울궁전을 건축한 '라스트 렐리'에 의해 1745년부터 10년간의 공사로 만들어진 것으로 1752년에 증축하여 호화로운 궁전이 되었다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독일군이 궁전을 불태웠지만 1958년까지 복구되었다.
결국 표트르 대제는 제대로 이 궁전을 이용도 못해보고 죽은 셈이다.
언덕 위에 위치한 대궁전(발쇼이 드바레츠)은 흰색과 황금색이 잘 조화된 장중한 건물이다. 길이 300m의 2층 건물인데 제 1테라스에서 위용을 자랑한다. 제 2차 세계대전 때에 독일에 의해 파괴되었다가 1958년까지 완전히 복구되었다.
건물 중앙의 지붕에는 제정러시아 로마노프 왕가의 상징적 문장인 쌍두 독수리의 모형이 높이 세워져 있고, 대궁전 죄우 옆에는 황금색 왕관모형의 큰 첨탑과 작은 첨탑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러시아는 비잔틴 제국(동로마)에 이어 쌍 독수리 문장을 쓰는데 전통적인 로마제국의 독수리 문장을 계승하면서 교권과 신권을 통합한 황제라는 뜻을 갖고 있다. 비잔틴 제국이 멸망한 뒤 모스크바 공국의 이반 3세가 동로마 제국 마지막 황제의 조카딸과 결혼했으므로 이반3세가 로마 황제의 후계자라는 이유에서다.
표트르대제의 대궁전 내부는 370점의 초상화와 너무 많아서 감각이 무뎌질 정도의 화려한 금장식으로 이루어져 있고, 심지어 화장실 변기까지 금으로 장식되었다한다.
언덕위의 궁전 테라스 난간 앞에서 핀란드만 쪽으로 보여 지는 전경이 일품이다.
계단식으로 만들어진 조각상과 분수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는 분수대를 지나 푸른 녹음의 아래공원사이로 핀란드만까지 연결된 운하가 눈에 들어온다.
이 운하는 핀란드만까지 연결되어 있는데 예전에는 초청객들이 이 운하를 통해 배를 타고 여름궁전까지 들어왔다고 한다
여름궁전의 중심 공원은 핀란드 만과 접해있는 아래공원으로 공원의 폭이 500m나 되는 평지에 아름다운 가로수 길과 각가지 모형의 분수, 그리고 작은 궁전들을 숲 속과 분수사이 곳곳에 세워져 아름다운 운치를 더해주고 있다.
아래공원에는 여러 모양의 분수가 수없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