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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7. 31(수) 15시 하늘친구방 / 신난다, 두더지, 민들레, 푸른솔, 바람빛, 미란
정승관선생님을 모시고
사랑어린배움터는 2003년 개교(1~3학년), 2010년 중학과정 개설되었다. 현재 관과 지역사회의 요청, 내부의 질문 등으로 고등과정 개설을 고민하며 정승관선생님을 모셨다.
대체로 대안학교의 초중등 교육과정은 중복되는 것이 많다. 그러나 고등과정은 다른 개념으로 접근해야 한다.
마을교육공동체라는 말은 교실이 마을이 된다는 뜻이다. 마을에 가보면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일을 한다. 모두가 잘 하는 것이 있다. 청소하는 사람도 (책)공부하는 사람 모두가 중요하다. 모두가 자기 할 일을 찾아 잘 하도록 지원해야 한다. 공부는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이다. 스스로 하도록 방법을 찾아줘야 한다. 나이 많은 사람들은 아이들이 하려는 공부에 대해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대신 그것의 옳고 그름은 안다. 그런 역할을 해주면 좋겠다.
꿈틀리를 시작할 때는 ‘학생들이 스스로 시간표를 짜게 해야지.’라는 마음을 먹었다. 처음에는 시간표를 주었고, 한 달 뒤 의견을 받아 다시 만들자고 제안을 하니, 시간표를 다시 짜기를 요구하지 않았다. 다만 시간표에 어떤 시간이 들어가는지를 중요하다 여기더라.
학생들에게 학교를 돌려주는 게 참 어렵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학교를 돌려주려 할 때면 ‘애들이 담배를 모두 핀다면 어떻게 하지? 핸드폰을 24시간 쓴다면 어떻게 하지?’하는 염려가 있다. 그래서 모두 주지 못한다. 틀림없이 아이들이 그렇게 할 것이다. 아이들은 우리를 믿지 않고, 받았다고 여기지 않는다. 아이들은 어른들을 여러 번 시험해 본 뒤에야 결국 믿게 된다. 그때부터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아이들은 어떤 면에서 더 보수적이다.
그룬트비가 ‘삶을 위한 학교’라고 한마디 하니, ‘그렇게 해 보자’ 라고 마음 먹었던 것은 나라가 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급하지 않다. 놓지 못하니 틀을 못 벗어난다. 교사도 장학사도 현재 교육의 한계를 모두 안다. 공교육인 풀무학교에서는 할 수 없는 것을 꿈틀리에서는 마음 먹으면 할 수 있었다. 미리 규정하고 두려워하면 할 수 없더라. 하고자 하는 방향 정하면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다보면 잘 안될 것이다. 그래도 하는 것이다. 1907년 도산이 교육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나라가 덴마크와 같은 상황이었다. ‘나라 다 뺏겼는데 뭘 하려고 하나?’라는 질문에 “10년 누어있던 환자가 있더라도 7년 묵은 쑥이 필요하다면 지금 당장 쑥을 묵혀야 한다.”라고 답했다. 시작한 사람이 끝을 볼 생각을 하면 안 된다. 열매를 먹는 사람들은 원래 있었던 것처럼 안다. 학교를 시작하는 사람들은 실패만 하고 끝날 수 있다.
처음 정부주도로 생겨난 대안학교에는 철학 없이 기존 교육에서 하는 것들 중 좋지 않은 것들을 하지 않겠다만 있었다. 선생님들은 만나는 학생들에 대해 준비 되어 있지도 않았고, 주어진 권한도 없었다. 그럼에도 선생님들은 아이들을 끌어안았다. 선생님과의 관계/생활 생기니 졸업 후에도 학교를 찾아온다. 교사와 학생이 같이 자라는 곳이 학교다. 교사는 가르치는 사람 아니다. 그런 능력 없다. 아이들과 싸우지 않고 진다면, 이후 교사를 따르며 평생 좋은 멘토로서 역할을 하게 되더라.
제작년에 꿈틀리에 갔을 때 나눴던 대화가 충격이었다. 유아를 위한 준비를 하려고 한다고 말씀드리니, 지금 아이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한가한 소리 한다고 하셨다. 무슨 고상한 교육을 한답시고 죽어가는 아이들을 못 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라는 질문을 하게 되어, 고등과정 준비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올해 홍순명 선생님 뵈니, 고등과정 꼭 필요하다고 하셨다. 지역사회(관청 등)의 요청도 있었다. 새로운 고등학교에 대한 지역 학부모의 요청과 함께 학교 밖 아이들에 대한 고민도 있다. 새로운 학교 세우는데 많은 돈과 시간이 필요한데, 순천에는 사랑어린배움터가 있으니 좋은 방법이 없을까 하여 지금에 왔다. 제도 내에서 지원하는 방법은 ‘위탁교육기관’과 ‘각종학교’가 있다. 그런데 기관장이나 담당공무원이 풀무학교를 모른다. 이 일을 함께 하기 위해 많은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현실에 대한 정리가 필요하다. 또한 다른 3의 길이 있을 것이라 본다. 현재 졸업하는 아이들이 바로 진학하지 않는다. 이 친구들이 방치되어 있다.
전남에는 가까운 한빛고가 있어 담당공무원들에게 참고가 될 것이다. 현재 인천에서 ‘대안교육 위탁기관 지정 자문위원’이다. 그러나 공무원들이 대안교육을 모른다. 이명박 정권 때 대안교육을 특성화 교육의 한 귀퉁이로 넣으며 없애버렸다. 그 전에는 특성화학교가 대안학교였다. 이후 대안학교이 양극화가 되었다. 이명박 정권 때 일제고사 등이 생기며, 대안학교 쪽으로 몰렸다. 나름대로 공부 잘 하는 아이들도 모였다. 그 때 대안학교 가기는 어려워졌다. 그렇게 되면서 대부분의 대안학교들이 중심을 잃고 일반학교와 똑같이 가버렸다. 그리고 국가가 관심을 안 가지니 너도나도 만들었다.
이후 위스쿨, 위클래스를 만들었고, 다시 대안교육 위탁교육이 생겼다. 그리 성공하지는 못했다. 교육부에서는 부적응 학생들을 위해 대안학교를 만들고 싶은데, 교육청에서는 모른다. 그 때 요청해 와서 홍순명선생님과 제가 가서 강의를 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할 수 있지만, 당신들이 하는 일이 안 맞는 일이어서 우리는 할 수 없다.”라고 했다. 이 아이들이 왜 부적응인지, 왜 문제를 일으키는지 알아야 한다. 떼어놓으면 될 것이라 생각하는데 절대 아닌데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 이 개념에 절대 손뼉을 쳐 줄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사실 관과의 사이에서 불편해진다. 교육청에서는 관내에 대안학교가 있으면 부담이다. 현재 교육법에서는 ‘학교’라는 이름을 쓰면 불법이다. 꿈틀리도 처음 만들 때, 인천교육청 대안교육 담당자가 뭘 요구하는지 물어왔다. 그 때, “요구하는 것 없고 법적으로 문제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인천교육에 득이 되지 해가 되지는 않을 터이니 걱정 말고 어려움 있으면 이야기하라.”고 하니 안심을 했다. 그들은 요구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 이곳은 요구가 있다. 그렇다면 불편해질 수 있으나 옛날 같지는 않다. 요즘은 프로그램 등으로 지원을 많이 해 주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원하는 것을 다 할 수는 없다. ‘풀무학교’와 같은 곳이 있었으면 한다는 의견까지만 참고해야 한다. 처음부터 망가질 아이가 아니었다. 그 아이들이 같이 살 수 있도록 만들어줬으면 더 잘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놓고 그 아이를 문제아라고 한다. 풀무학교에는 1등도 꼴등도 없다. 입학할 때 성적으로 본다면 차이가 있지만, 3년을 살고 보면 정말로 1:1로 살고 있다. 성적은 안 달라지지만 3년 뒤엔 꼴등인 아이가 훨씬 더 리더쉽을 발휘할 때도 많았다. 분리시켜 교육하고자 하는 학교는 시대착오적이다. 그러나 병리적인 어려움을 가진 아이들은 선생님이 감당하기 어렵다. 인천에 참사랑병원이라는 정신신경과 병원인데 그곳에서 대안교육 위탁교육기관을 만들어 치료와 교육을 지원하는 학교가 있다.
옛날에는 위탁교육기관이라고 하면 부적응아 대상이 다니는 학교라 여겼는데, 세상이 달라졌다. 서울 오디세이 학교는 보편적인 아이들로 시작했다. 서울 오디세이 학교는 위탁교육으로 시작해 3년 뒤에 각종학교로 전환하겠다는 계획으로 시작했다. 서산 꿈의학교라는 곳은 평생교육기관으로 만들었다.
학교라는 것을 만들 때 어떤 과정을 구체적으로 밟아야 할까.
2015년 4월에 포럼을 해서 풀무학교를 소개해 달라고 해서 갔는데 그 때 오연호씨가 이러한 학교를 만들면 어떠냐는 의견을 묻기에 좋겠다라고 대답을 했다. 한 달 뒤에 연락이 와서 ‘학교를 만들자’라는 제안을 했고 우리 사회에 이러한 학교가 필요하다는 공감은 얻을 수 있을 것 같아 학교를 하자고 했다. 그리고는 당장 내년에 개교를 하자고 하니, 제일 먼저 사람을 어떻게 구해야하나 생각했다. 풀무학교 졸업생을 생각했다. 나는 기숙사교육을 믿는 편이라, 학생으로 경험한 사람, 그리고 젊은 사람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졸업생을 제일 먼저 떠올렸다. 성공회대에서 덴마크 교육 강의를 들은 여학생 2명과 문화활동을 하던 남학생 1명이 함께 시작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돈은 받아야 하지만, 너무 비싸서 다가올 수 없는 학교는 만들고 싶지 않았다. 부족한 돈은 오연호씨가 맡아서 해결하고 있다. 풀무를 살았던 3명의 젊은 교사들이 더 전문가이다. 처음에는 오랫동안 학생부장을 한 아내와 공동교장을 하며, 부엌살림을 맡았다. 젊은 교사와 싸워가며 아내가 1년 동안 학교 틀을 만들고 빠졌다.
처음에는 교사들이 학교에 살았고, 나는 밖에서 지냈다. 한 달 동안 굉장히 힘들었다. 선생님들이 헤매며 원망도 많이 했다. 달보고 출근하고 별보고 퇴근했다. 아내는 왜 젊은 교사들에게 알려주지 않고 가만히 있느냐며 나에게 물었다. 저들이 갔다 와야 한다. 거기까지 갔다가 찾아서 와야 자신의 경험이 된다. 나 역시 한 번도 안 해본 것이라 다음 단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 그리고 기숙사에 살았던 경험이 오히려 독이 되어 작은 일에도 그 다음 일을 떠올려서 더 힘들어했다. 그래서 방을 구해 한 명씩 돌아가며 들어가고 머리를 식히게 했다. 3개월 지나니, 교사들이 저를 타이르고 아이들은 이렇게 키우는 것이라고 말하며 익숙해지더라. 1년 지나고 생각하니 젊은 교사들이 했던 것들에 대해 내가 못마땅했던 것을 이야기 하지 않았던 것을 참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더라. 그들이 옳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아이들이랑 감성을 맞추느라 힘들었던 것이었다. 나는 평생 교사노릇 한 것으로 꼰대짓을 하려했던 것이었다. 제발 젊은 교사들을 믿고 맡겨라.
우리나라에도 자유학기제를 한다. 자기하고 싶은 것을 하며 실패도 해 보고 하며 자기주도성을 기르자는 것인데 아이들은 시험 안 본 것만 기억난다고 한다. 아이에게 그런 자율성을 줄 수 있도록 교사들에게 권한을 주어야 하는데, 매달 보고를 하라고 한다. 젊은 교사들이 자기들이 하고자 하는 것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평생 풀무학교에서 하고 싶은 일을 막혀본 적이 없다. 학생들과 활동하는 것에 대해(학생들의 실수를 감추다가) 때로는 비난을 받았지만 그것 때문에 너는 선생이 아니라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교사들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집, 학교 등에서 누구나 가르치는 경험을 했기에 모두가 잘 할 수 있다. 저는 요즘 할 것이 없다. 가끔 문제가 생기거나 외부손님이 오시거나 또는 선생님들이 젊다보니 학부모님과의 대화 등을 도울 뿐 사실 내가 할 줄 아는 것이 없더라. 젊은 교사들이 더 뛰어나다. 학교는 교사의 자율성이 중요하다.
처음에는 1년 뒤에 홍성에 다시 내려간다고 하신 것 같다. 그리고 1년 과정을 2년, 3년으로 늘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원래 홍성에서 할 일이 정해져 있어 학교 만드는 것까지 하고, 1년 뒤 홍성으로 내려가려고 했다. 그러나 책임 있는 사람이 없으면 학생모집이 안 되더라. 꿈틀리는 오마이뉴스와 풀무학교라는 두 개의 브랜드 덕에 올 수 있었다. 시작이 되니, 망하지도 흥하지도 않는, 안정되지도 않고 포기할 상황도 아닌 상황이다. 사실 지난 1학기에 마치면 간다는 결정을 했는데 교사들이 또 막았다. 그 때 이곳에서 ‘내가 필요하지 않다’라고 할 때까지는 하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대신 홍성 일을 하지 않을 수가 없어 매주 오가고 있다.
꿈틀리 인생학교는 대안교육과 다르다. 전환기 교육은 이를 통해 그 다음 교육의 바탕이 되게 한다는 것이 기본 취지이다. 덴마크 애프터스콜레, 아일랜드 전환학년제도 그런 의미이다. 그럼 이런 학교는 1년의 과정을 충실히 하면 된다. 우리 학교는 이것저것 가르치는 곳이 아니다. 이곳은 진로를 탐색하는 곳이 아니다. 진로를 탐색할 수 있는 내력을 길러가는 곳이다. 자기가 생각해서 자기를 찾아갈 수 있는 곳 말이다. 처음에 교훈을 만들자라고 하여, 이곳에는 교훈이 필요없다고 했지만, 교사들이 교육목표를 세우자고 했다. 영어 1년 가르쳐 뭐가 되겠냐? 자기가 영어를 공부할 수 있도록 방법을 찾는 게 필요하다.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살게 만드는 것이다. 중3 보다 고1 아이들이 더 잘 지낸다. 학교를 답답해하던 고1 아이들이 꿈틀리에서 1년 살고 난 뒤 굳은살이 생겨 학교에서 자기 공부를 하더라. 꿈틀리 인생학교를 나온 친구들이 2/3 정도 학교를 가고, 1/3은 학교를 안 가더라. 굳이 학교를 갈 필요를 못 찾는다. 이우학교의 17살 인생학교를 준비할 때 졸업 후 어디로 갈 수 있는지에 대한 안내를 하려고 하더라. 나는 그것을 짜면 거기에 갇히게 된다고 말했다. 그렇게 되면 건강하다고 할 수 없다고 짜지 말라고 했다.
그럼 이곳은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두 가지 다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반 공교육은 교육과정에 짜여 져 있는 대로 수행해야 한다. 그런데 거기에는 문제가 있다. 우리 경우 나이 20살이면 모든 것이 결정되었다고 전제한다. 절대 결정되지 않는다. 이곳에서는 아이들과 생활을 하고 지적 능력을 주되 자기가 추구할 수 있는 것을 한다던가, 작은학교에서 모든 걸 다 할 수 없기에 미리 특정 분야를 정해 공표해서 그런 친구들이 와라라고 할 수도 있다. 꿈틀리에서 1년을 해보니, 3년이라는 기간의 유용성을 느낀다.
4년을 해보니, 30명이 어떤 아이들이 들어오느냐에 따라 매년 새로운 학교가 되더라. 쉼이 도태된 아이들은 뭘 해도 잘 해야 한다. 좋아하는 것만 잘 하는 것이 아니고, 빈 시간도 뭔가를 채워야 한다. 처음에는 어른들이 칭찬이 자자하다. 빈 시간을 감당을 못한다. 자기검열이 철저하여 참고 간다. 그러나 결국 폭발하며, 상대에 대해 못 참고, 용서 못한다. 우리 사회에서 10%을 위한 교육을 한다는데 과연 그럴까? 10% 아이들이 가장 힘들 수 있다. 부적응한 아이들이 없으면 우리 아이들이 잘 살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야 잘 살아갈 수 있다.
비인가 대안학교의 현실을 어떻게 보는가? 우리의 현실을 객관적으로 본 적이 없다.
대안학교가 300~400개 되는데 하나의 카테고리로 넣을 수 있을까? 몇몇 대표적인 대안학교(간디와 산돌 등)와 발도로프 학교가 있고, 요즘 교회에서 하는 국제학교 등이 있더라. 비인가 대안학교에서 보편적인 교육을 하는 학교가 잘 없더라. 다문화 아이들, 자폐를 가진 학생들을 위한 교육을 하는 학교가 생기고 있다. 혁신학교 등이 생기면서 보편교육을 하는 비인가 대안학교가 어려워지고 있다. 정권이 바뀌며 지원이 많아졌으나 프로그램 등의 한시적 지원밖에 못해준다. 지속적인 지원을 하려면 하나의 틀을 만들어야 한다. 대안교육법을 만든 적은 있으나, 그것에 맞출 수 있는 학교가 없다. 지금은 교육청과 협의해서 방법을 우리가 만들어줘야 한다. 그들이 만든 방법에 우리가 들어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시간을 기다리면서 스스로 존립하는 방법은 없나?
내적 힘을 내서 되는 길은 불가능하지는 않으나 100개 중 90개는 못 견딜 것이다. 내실이 있는 학교는 살아남겠지만 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대안학교의 장점은 작다는 것이다. 풀무학교가 그래서 버텼다. 규모가 있었으면 벌써 무너졌다. 그렇게 보면 내실을 가지고 있으면서 작게 간다면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교육청과 협의하여 새로운 틀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다시 대안학교법을 만드는 것은 어려우니, 도에서 조례로 할 수 있는 것은 뭐가 있을까? 생각해보자. 학교밖 아이들을 학교안 아이들만큼 지원해 줄 수 있는 법을 서울시에서 만들었다.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것을 시청보다 교육청에서 하면 더 좋으나, 교육청이 더 잘 안 바뀌더라. 어렵더라. 그러나 그들이 결심만 하면 되는데.. 경기도 교육청도 궁리하며 제안하고 있다. 전주시청에서도 애프터스콜레 만든다고 1년을 궁리하던데 아직도 못 만들고 있다. 방법을 모른다. 꿈틀리 만들고 저도 놀랐다. 배우는 사람 있고 교실 있고 또 교사 있으면 된다. 여기 있는 사람들에게도 공감하는 것 있어 보인다. 그것을 아이들 만나서 풀어가는 것이지 써서 되는 것 아니다. 꿈틀리는 하나의 사례로 그대로 두고 법적으로 가두지 않아야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다. 법은 마지막이다. 함석헌 선생이 그랬다. “세상에 있는 학교를 하나 더 만들려고 한다면 하지마!”라고. 어려움을 감수해야 할 때도, 싸워야 할 때도 있다. 교육청에서 사람이 와서 학교 평가를 오면 중간은 갔다. 그러나 시스템화하니 꼴지더라. 기계적으로 하니 하나도 맞지 않아 꼴지가 된다. 불가원 불가근이라고. 그들의 진심은 이해하되 그들의 방식으로 하면 안 된다.
고등학교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우리 사회가 학교 안 다니는 아이들에 대한 아무런 준비가 안 되어 있어 그런 공간들이 필요하다. 교육선진국은 그러한 곳이 많다. 꽤 많은 부모 역시 학교 필요하다 생각하지 않으나, 학교 가지 않으면 부모가 99% 감당해야 한다.
관과의 관계는 처음이라, 역사적으로도 성공사례도 없고, 저 개인도 조심스럽고 집단 역시 조심스러운 부분 있다.
관은 사람이 바뀐다. 사람이 바뀌면 처음부터 다시 이야기해야 한다. 새로운 사람 올 때 마다 무시하고 들어오기도 하더라.
작년과 올해가 많이 바뀌었다. 그 전에는 채찍을 가지고 왔다. 올해 와서 태도가 바뀌었다.
요즘 자유학기제, 마을공동체, 학교밖 학생들을 주로 말하나 한계가 있다. 가치를 모르면 돈을 쓰지 못한다. 대안교육 그게 교육이야? 라고 보는 담당자들도 있더라. 감사만 두려워한다. ‘저기 유럽에서 하는 것 한번 해 봐!’ 하고 홍순명선생님이 부추긴다. 새로운 실험을 하게 되면 불법이 된다. 감사를 두려워하면 못한다. 상황이 그렇기에 그들이 더 그렇다.
십여 년을 공교육에서 근무하다 퇴직을 했다. 학교 밖에서 다양한 가능성을 찾아보고 싶어 학교를 그만 뒀다. 학교에서 잘 살아가는 친구들이 아니라, 학교 안에서 제 길을 찾지 못하는 친구들이 제 눈에는 훨씬 많았다. 좀 전에 말씀하셨듯이 학교밖 친구들에 대해 사회가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현실에서, 공교육 밖에 있는 좋은 경험과 자원들이 이런 친구들과 잘 만나지는 것이 바람이다. 저 역시 비인가 대안학교에서 청소년, 청년들을 만나보고 있다. 제가 봤을 때는 필요한 것들, 에너지가 여기에 많이 있는데 잘 만나지지 않는 것에 아쉬움이 있다.
학교밖에는 좋은 것들이 많으나 찾아다니느라 아이들이 품을 많이 팔아야 한다. 그러나 실망하지 않는다. 역사상 그렇게 준비된 적은 없었다. 덴마크 역시 90년 동안 등한시 했다. 자기네들끼리 애를 쓰고 살았다. 그렇게 어려운 과정에서 얻어지는 가치들도 있다고 본다. 그리고 사실 학교 밖에 나와 있는 아이들은 그렇게 걱정이 안 된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쫓아다니니까. 부모가 봤을 때, 5시에 자서 4시에 일어나는 아이들에 답답해하지만 그 친구들에게도 생각이 있다. 정말 걱정은 학교 안의 아이들이다. 중학교 아이들이 중2병과 또 다르게 무너져가고 있다. 공부도 잘 하고 말도 잘 듣던 아이들이 학교를 못 다니겠다, 자해를 한다.. 는 일이 나오고 있다. 우리가 애들을 키울 때 공부를 잘 하면 될 거야. 하지만 초등학교에서 이미 나는 서울대 갈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시킨다. 하는 만큼 좋은데 갈거야 하는 생각에 시키는데, 이제는 공부 잘 하는 사람도 취업이 어렵다. 아이들은 학교 다니기 싫어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아이들은 아무 목적 없이 8시간을 앉아있을 수 없다고 하소연을 하는 것이다. 옛날에는 부모도 아이들이 미리미리 사고를 쳐서 예방주사를 맞아 견딜 수 있는데, 아무 문제 없던 애들이 그러니 엄마들이 넘어가 버린다. 대부분 애들이 거기서 실패한다. 자해하는 것도 피가 나야 숨을 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학교 밖 아이들이 갈 수 있는 공간이 이곳저곳에 있다. 또 아이들이 열심히 찾아다닌다고 생각한다.
저는 초등 아이들을 주로 만난다. 중2병과 다르게 힘들어 하는 아이들이 쏟아져 나온다고 했는데, 초등과정의 교사나 부모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저는 초등 아이들을 대해 본 적은 없다. 그런데 초등 아이들을 2살 위로 보고 상대해주시면 좋겠다. 아이들은 이미 커 있는데, 애기 보듯 한다. 손녀딸이 서울 강남 **에 다닌다. 얘가 친구가 없다. 학원 마치는 친구들과 릴레이로 놀다가 이제는 학원 안가는 친구들이 없단다. 아이들은 손녀딸에게 학원 안가서 좋겠다고 하니, 너희들도 안 가면 되잖아 라고 손녀딸이 말했단다. 그러니 아이들이 뭐라고 했을까? 혼나서 가는 건 아니다. ‘내가 안가면 우리 엄마가 죽어.’라고 말했단다. 우리가 애들이 못할 것이라고 지레짐작해서 생각하면 아이들은 선생님과 다른 세상을 살 것이다. 애들은 자신들끼리의 세상을 살고, 선생님과는 선생님에 맞춰 살며 두 가지 세상에 살 것이다. 아이들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은 선생님과 부모다. 아이들을 가르쳐 조각해 만들 대상으로 본다. 잘 하는 것은 안심이 되는 것이고, 못하는 것은 어떻게든 하게 하다보면 아이들과 호흡을 못한다. 아이들과 호흡을 같이 하는 것이 중요하다. 선행학습을 지나치게 하는 것도 문제다. 조물주는 우리에게 2가지 좋아하는 것을 주신 것 같다. 흙 만지는 것과 배우는 것. 아기들 보면 알 수 있다. 어느 순간 우리는 두 가지를 다 짐으로 만들어 버렸다. 안 배우고 오면 학교 와서 배우고 싶은 것이 생겨 배운다. 다른 아이들이 다 배워가지고 와도 학교에서 따라가는데 얼마 안 걸린다. 그럼에도 두려운 것이다. 교육을 하려면 부모나 교사 모두 용기를 내야 한다. 그래야 좀 쳐져도 두고 볼 수 있다.
그리고 학부모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풀무가 학부모 문화를 잘 만들었다. 생각 있는 부모는 선생님 하시게 놔둬야 한다고 말한다. 1학년 학부모에게서 4~5월쯤 불만이 나온다. 그런 문제에 대해 학부모회에서 학부모들끼리 이야기를 한다. 거기서 이야기를 해서 의견을 제안하기도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훨씬 유연하다. 홍동의 초중등학교가 풀무학교보다 오히려 마을교육공동체를 더 잘 실현하고 있다. 왜 그렀냐면 풀무학교는 외지 아이들이다. 초중등학교는 이 동네 아이들이고, 이미 이 동네 부모들은 이미 그 정도의 성숙이 있다. 학부모가 바꾸면 확실히 학교가 바뀐다. 학교가 가진 문화도 학부모 문화가 잘
풀무학교 교사공동체가 있지 않나? 풀무학교의 ‘더불어 사는 평민’이란 정신을 표현하는 것은 교사들이 그것을 아이들에게 전하고, 부모들에게도 들어날 것이다. 풀무학교는 어떻게 그 정신을 교사공동체가 어떻게 지켜내고 있나? 교사공동체를 어떻게 운영해야 할까?
제가 4년 일찍 명퇴를 했다. 정년을 안 채운 이유 중 하나는 제가 정년을 채우면 그해부터 7~8년 동안 매년 한 명씩 나가는 식이 되었다. 모두가 나이가 많았다. 예전에는 우리가 젊은 세대였는데, 지금은 아니다. 세대교체를 능동적으로 하려면 아내와 내가 먼저 나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25년, 30년을 같이 산 사람들이다. 면면을 따져보면 풀무학교를 가치를 이해하고 들어온 사람들이 아니다. 나 역시 나도 1년만 하고 나가야지 했는데 남았다. 풀무학교를 바깥에서 공부하고, 여러 가지 해보고 모든 것 다 내려놓고 온 사람은 다 나갔다. 남은 사람은 봉급도 적은 이 학교에 왜 남았나? 어중이 떠중이가 남은 것이다. 그런데 여기의 가치가 체화된 것이었다. 내가 무엇을 하는지 모르고 하는 것이 무서웠다. 선생님들 사이에서는 편안하게 하나의 의견이 공유되어 본 적이 없다. 교장을 교장으로 안 본다. 무두무미라고 해서 다같이 논의하게 되어 있다. 제 의견은 거의 다 짤렸다. 그러나 나는 불만이 없다. 저 사람 의견이 되었어도 그 의견에 내 생각이 고려되어 있다. 계속 싸우는데 싸움이 길지 않다. 만족하는 회의를 하는 것이 아니라 싸우는 그 가운데에 잘 하고 있는 것이다. 저는 여기에 선생님들은 충분히 많은 생각을 하고 계시고 있다고 인정이 된다. 그럼에도 교사공동체를 잘 만들지 못해 걱정이라고 하신다. 이게 교사공동체라고 생각하며 그것을 기계적인 방법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할 수 있는 누군가가 하는 것이 아니라 같이 할 수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각자의 고민의 지점이 다를 수밖에 없다. 정말 내 눈에는 저 사람 정말 아니야! 해도 아이들에게 지지받는 사람이 있다. 교사들 사이에서 잘 지내도, 학생들과 잘 만나지 못하면 결국 학교를 떠나더라. 지금까지 한 것 중 헛개비 같은 것이 있다면, 바로 ‘교사가 하나 되었으면 좋겠어!’라는 것이다. 별 것을 다했다. 그렇다고 원수가 돼서 싸운 적도 없다. 홍순명선생님은 할 수 없는 것을 가져와서 하라고 하면, 중간에 있는 내가 잘 말씀드려 돌아가시게 한다. 그럼 다음날 아침에 와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 교사들에게는 홍순명선생님은 원수다. 그런데 홍순명선생님이 퇴직을 하시니, 교사들끼리 앉아 이야기를 하니 모두가 홍순명 아바타들이 되었더라. 연수효과다. 실행 된 것, 안 된 것, 미래에 해야 하는 것 있다. 계속 집어넣으신 것이다. 사람들은 홍순명 선생님을 이론가, 이상가라고 한다. 퇴직 후 우리교육에서 홍순명선생님에 대해 정리해달라고 해서 정리한 글이 있다. 그것을 하면서 발견한 것이 있다. 홍순명선생님은 실천가라는 것. 이론가는 이론만 공부하면 되지만 실천가는 실행방법까지 찾아야 해서 공부를 더 많이 해야 한다. 게다가 끈기도 있어야 하고 욕먹을 맷집도 있어야 한다. 우리는 홍순명선생님이 제안해서 이런 시도, 저런 시도 별별 것을 다 했다고 생각했는데 풀무학교는 설립자인 이찬갑 선생이나 남강 선생의 뜻에서 한 치도 안 벗어났다. 새로운 것을 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제대로 된 가치를 실천하기 위해 지금까지 움직이고 있다. 정리해보니 모두가 하나의 맥락 안에 있더라. 학교장 할 때는 몰랐다.
퇴직한 뒤에 홍순명선생님께 당신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홍순명 선생님은 이찬갑 선생님과 같이 있었던 시간이 6개월 밖에 안 된다고 하는데, 이찬갑 선생님이 연탄가스로 쓰러져 가시면서 홍순명 선생님께 지저분한 두루마기를 주고 가셨다더라. 옛날에는 수제자에게 그랬다더라. 홍선생님은 꼭 수제자가 아니더라도 그것의 마음의 짐은 평생 있었다고 하시더라. 홍선생님은 거의 무학인데 7개국어를 하신다. 17살에 교사 검정고시를 보는데 합격을 했는데 나중에 불합격 통지를 해서 이유를 보니 나이가 한 살이 덜 차서 불합격이 된 것이다. 그 때 심사위원 중에 최현배 선생이 있었다. 최현배선생은 홍선생님 글을 보고 홍선생님을 와 보라고 했다. 그리고 이야기를 해보더니 시키자고 해서 초등선생님을 한 것이다. 홍선생님 집안이 횡성의 어마어마한 유교집안에서 자랐는데, 가난하니 형 한 사람만 학교를 보냈다. 원주에 있던 형이 늘 읽던 책을 보내줬는데 그렇게 재밌었다더라. 춘천에서 근무하다 다시 중등 시험을 쳐서 춘천농고를 갔고 군에 갔다. 제대 후 학교를 가려고 했는데, 어떤 사람이 홍성에 조그마한 학교가 생겼는데 복직하기 전까지 거기 가서 좀 도와주라고 해서 갔더니, 그 옛날에 자기 형이 보내준 책에 있던 사람들이 여기와 관련이 있더라. 그러니 떠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리고 최규철 선생님이 동연배이다. 두 분의 생각이 비슷하니 얼마나 재밌었을까? 두 분이 똑같은 워커 신고 옷도 같이 입고, 책상도 같이 맞추고..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다 최규철 선생님은 기회가 되어 덴마크로 갔다. 최규철 선생님은 최고의 학벌이었다. 서울 시립대 수의학과를 나온 분이었다. 덴마크를 다녀와서 학교 복귀를 안 하고 부산의 장기려 박사님에게 가서 사고가 났다. ..
풀무학교 그만 두고 꿈틀리 하기 전에는 무얼 하셨는지?
처음 2년을 의도적으로 홍동을 떠났다. 2년 있다 내려가려고 했는데, 아내가 손녀딸들을 봐 줄 상황이 되어 2년 더 봐주기로 했다. 그러다 오연호씨를 만났다. 여러 가지 강의 요청도 있고, 개인적으로 풀무학교 졸업생을 다 만나보고도 싶었다. 60년 동안 졸업생이 천여 명이 되는데 꿈틀리 시작하기 전까지 7백 명을 만났다. 그들을 만나며 풀무학교 정체성을 알게 되었다. 그 친구들이 갖고 있는 몇 가지 특징이 있더라. 옳은 일 피하지 않고 함부로 그른 일 차용해서 쓰지 않고 어떤 일을 해도 별로 두려워하지 않고. 나는 이 친구들이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을과 도서관, 협동조합 이야기가 빠졌다. 이어서 대중 강연과 내일 만남에서 이야기 나눴으면 좋겠다. 대중강연 마치고 도교육청 장학사와 도의원과 뵐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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