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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간정淸澗亭>
1.방문지대강
명칭 : 청간정
위치 : 강원특별자치도 고성군 토성면 동해대로 5110
입장료 : 없음
방문일 : 2024.2.28.
3. 청간정
동해와 정자가 만났다. 동해의 근엄한 아름다움만으로도 일품인데 정자가 더해지니 화룡점정이다. 우리 건물이 아름답지 못한 이유는 자연이 아름다워서라고도 한다. 구조물까지 아름다우면 아름다움 독식으로 부작용이 난다는 것이다. 아름답다는 그리스의 산토리니도 뜯어보면 해안의 건축물 덕이다.
바다는 우리 동해바다만한 바다도 없다. 아니 바다는 다 아름다운데, 산을끼고 있나 모래사장을 끼고 있나? 거기에 화룡점정인 인간의 흔적이 더해지면 아름다움은 완성되는 것, 우리의 흔적은 그냥 생활의 모습, 외관을 별로 의식하지 않아 풍광이 그만그만해진 것이다. 대부분 산을 끼고 있는 우리 바다는 어디나 아름답다. 거기에 산토리니처럼 건축물까지 모두 아름다우면 한류에 자연물까지 독식하는 셈이 되니 자중해야 한다.
어쩌다 세워놓은 정자는 풍광의 아름다움에 점을 그리는 것이다. 정자가 세워진 곳은 차경을 누린다 하지만, 정자 자체도 아름다운 경관의 차경이 되어 서로 니가 내가 되고, 내가 니가 된다. 더구나 정자는 달랑 하나의 건축물로 일대 풍광에 살짝 인간을 덧칠하여 풍광값을 높이니 가장 경제적인 화룡점정인 셈이다. 그중 동해안의 정자들은 압권이다. 여러 집을 동원하지 않아도 산토리니보다 우아하고 편안한 풍광을 만들어 낸다.
오만한 동해바다가 정자로 하여 온순해진 인간의 바다가 된다. 시퍼런 바다도 정자 앞에서는 인간과의 조화를 앞세우며 온순해진다. 단 하나의 정자로만 장식하였으니 온동네 하얀집으로 장식한 산토리니와 달리 자연 자체에 머무르므로 또 하나의 한류로 유명세를 타도 저항은 줄일 거 같다. 자연과의 상생은 저렇게 해야 되는구나, 새로운 지향이 될 수도 있을 거 같다.
관동팔경 淸澗亭과 고성팔경 천학정이 연이어 있으니 물좋고 정자 좋은 동해 명승을 누리는 축복을 산토리니에다 대겠는가.
3-1 청간정 소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건물.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2호. 설악산 연봉(連峰)에서 발원한 청간천이 동해로 흘러드는 하구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으며 관동팔경의 하나이다.
127개의 긴 주초석으로 받쳐진 이 정자의 창건연대와 건립자는 알 수 없으나 1520년(중종 15) 간성군수 최청(崔淸)이 중수한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추측된다.
그 뒤 1884년(고종 21) 갑신정변 때 타고 없어져 그대로 방치되었다가, 1928년 토성면장 김용집(金鎔集)의 발기로 재건하였다. 이곳은 휴전선에 가까운 지역으로 민간인 출입이 통제되고 있다.
그러므로 정자는 풍우에 시달린 채 난간은 허물어져 선인들의 시문을 새긴 수많은 현판만이 옛 정서를 말해주고 있을 따름이다. 추녀 밑에 걸려 있는 ‘淸澗亭’ 현판은 1953년 이승만 대통령이 쓴 것이라고 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전재)
언제 쓴 글인지 민간인 출입이 통제된다고 했다. 30년 전에 왔을 때도 편안하게 들어갔던 곳인데. 자료만 보고 쓰는 글의 폐단이 아닌가 싶다.
편액은 깨끗하다는 정자의 의미를 보여주는 '청간'에 초점을 둬야 하는데 '정'자가 너무 커서 어색한 느낌이 든다. 편액은 우암송시열의 글씨란다.
정자의 현판은 이승만 대통령의 글씨라는데, 대통령이 정자 편액을 쓰는 것도 구시대적 면모이다. 조선조 왕도 아니고 시인묵객도 아닌 정치인의 흔적을 정자의 편액에서까지 봐야 하는지 의문이다.
3-2. 관동팔경
관동팔경(關東八景)은 강원도와 경상북도 동해안 일대의 여덟 명승지로 ①총석정(통천), ②청간정(고성), ③낙산사(양양), ④삼일포(고성), ⑤경포대(강릉), ⑥죽서루(삼척), ⑦망양정(울진), ⑧월송정(울진)을 말한다. 이 중에서 총석정과 삼일포는 현재 북한지역에 위치해 있어 이곳 청간정이 관동팔경의 으뜸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관동팔경 중 최북단에 위치한 곳이어서 더 의미가 있는 곳이다.
3-3. 청간정 소재 시편
한달에 걸쳐 동해안을 유람한 윤휴의 기록을 백호전서를 통해서 본다. 여기 소개된 청간정과 청간정을 노래한 시인묵객의 현판시들을 살펴보면서 당대 명사들의 감상과 오늘날 나의 감상을 함께 더한다.
백호전서(白湖全書)
-조선후기 문신·학자 윤휴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1927년에 간행한 시문집.
-윤휴(尹鑴, 1617~ 1680)는 종부시 지평 등을 거쳐 공조판서 겸 이조판서 등을 지낸 조선 후기의 문신, 성리학자. 남인의 거두이며, 청남의 중진이자 예송 논쟁 당시 남인의 주요 논객이었다. 본관은 남원(南原). 자(字)는 두괴(斗魁), 희중(希仲), 호는 백호(白湖), 하헌(夏軒). 학행(學行)으로 시강원진선이 되었다. 윤선도, 허목과 함께 서인 공격의 선봉장이었다.
임자년 윤7월 24일(정유) 맑음. 아침에 배와 대추 등 과일을 사당에다 차려놓고 풍악(楓岳)에 다녀오겠다는 뜻을 고하였다. 그리고 나서 출발하여 통제(統制) 외삼촌 댁에 도착하였다. 내가 가지고 가는 것이라곤 《주역》 두 권과 일기책 한 권뿐이고, 그 나머지 일행들의 필요한 여행 도구는 모두 외삼촌이 챙기셨다. 부평 사는 외삼촌도 오셔서 나더러 멀리 가 너무 오래 있지 말라고 타일렀다. 통제 외삼촌과 함께 출발하여 동소문 밖에 나가 누원(樓院)에서 말에 꼴을 먹이면서 지나가는 중 덕명(德明)이라는 자를 만났다. 그 중은 일찍이 풍악산 구경을 했던 자로서 우리에게 대충 풍악의 뛰어난 경치를 말해주었다. 늦게야 양주읍(楊州邑)에 도착하여 외삼촌은 양주 목사를 찾아가고 나는 민가에 부쳐 있었는데, 양주 목사 이원정(李元禎)이 찾아와서 간단한 술자리를 마련해 주었고 유군 여거(柳君汝居)-이름은 광선(光善)임- 가 따라왔다. 유군은 원래 모르는 사이였는데 외삼촌을 통해 와 좌중에서 서로 인사를 나눈 사이이다. 그 민가에 벼룩이 많아 잠자리를 고을 서당(序堂)으로 옮겼는데 고을 주수의 아들인 정자(正字) 담명(聃命)이 찾아왔고 주좌(州佐)인 우(禹)와 한(韓) 두 사람도 왔다. 날씨가 매우 더웠다.
(중략)
12일(갑인) 맑음. 주인의 집이 바다 부근에 위치해 있어 해돋는 광경을 볼 수 있었으므로 여러 벗들과 시간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때마침 구름이 살짝 가렸다. 주인 말에 의하면, 언제나 해돋이 구경을 하려고 하면 구름과 안개가 늘 가려 버려 확실히 볼 수 있는 청명한 날은 드물다고 한다. 그 곳을 일찍 출발하여 간성(杆城)의 북천교(北川橋)를 건너고 읍성(邑城)을 지나 소나무숲 속으로 10여 리를 가니 중간에 둘레가 3리쯤 되어 보이는 호수 하나가 있었다. 남쪽에는 묏부리가 못 속까지 들어와 있고 고색창연한 바위에 모래알들은 하얀데 게다가 푸른 소나무가 울창하고 못 안에는 순채잎이 가득하여 그야말로 ‘천리호 순채국에다 된장만 풀지 않은 격’이었는데, 이른바 선유담(仙遊潭)이라는 곳이었다. 서로 말을 달려 올라가서 한참을 감탄하며 보다가 내가 일행들에게 말하기를,
“우리들 행색이 너무 맑아 흥을 도와 줄 만한 물건 하나 없으니 이곳 경치가 좋기는 하지만 무작정 오래 있을 수는 없겠네.”
하고, 드디어 길을 떠났다. 길가에 기러기들이 떼지어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마부 한 사람을 시켜 총을 쏴 보라고 했으나 맞추지 못해 서로 한바탕 웃었다. 30여 리를 와 한 곳에 다다르니 붉은 기둥으로 된 높은 누각이 바다를 향하여 있고 어촌(漁村)이 저자를 이루고 있었는데 구름과 물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말에서 내려 난간에 올라 보니 마음까지 시원하였고, 옛날에 이른바 청간정(淸澗亭)이라는 곳이었다. 청간이라는 명칭은 역(驛)의 이름을 따라 붙여졌던 것인데 지금은 창해정(滄海亭)이라고 이르고 있다. 일행 모두가 하는 말이,
“우리가 지금까지 구경을 다녀 보았지만 이렇게 경치 좋은 곳은 일찍이 보지를 못했다. 참으로 한평생 제일 좋은 구경이요 천하의 장관이라고 하겠다.”
하고, 드디어 그 곳에서 유숙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그 곳 벽 위에는 여러 사람들의 시가 걸려 있었는데, 노소재(盧蘇齋)ㆍ차식(車軾)ㆍ최간이(崔簡易)의 시 두 수를 차운하였다.
부상에는 아침에 해가 뜨고 / 扶桑朝出日
밤이면 창해에 바람 이네 / 滄海夜生風
속세 일들 누워 생각하니 / 臥想塵間事
허공의 한 점 구름일레라 / 如雲點太空
또 차운하기를,
저 멀리서 돛단배는 둘씩둘씩 오고 있고 / 天外風帆來兩兩
구름가 물새들은 쌍쌍으로 날아가네 / 雲邊水鳥去雙雙
창망한 예 오른 뜻 다 풀 길이 없어 / 蒼茫不盡登臨意
한밤중 창해루의 들창을 밀친다네 / 滄海樓中夜拓窓
했는데, 이 시는 차군(車君)의 작품을 다소 새로운 의미로 화답해 보았을 뿐이다. 노소재의 본운(本韻)은 이러했다.
하늘은 동해에 뜬 달을 아끼는가 / 天靳東溟月
한 밤중 바람에 시름을 못 이기네 / 人愁夜半風
선사가 아직 닿을 시간이 못 되어 / 仙槎應未泊
휘파람 불며 푸른 하늘 생각한다네 / 孤嘯想靑空
소재 아버지가 간성 원이 되어 왔을 때 소재가 따라왔다가 이 정자에 올라 이 시를 누대 기둥에다 써 놓고 그 곁에다, 군자(郡子) 노수신(盧守愼)이라고 써 놓은 것을 후인들이 현판을 만들어 걸었다고 하는데, 소년 시절의 작품이지만 이미 소[牛]를 삼킬 만한 기개가 있었다. 그리고 최간이의 시는 이렇다.
이 마음이 저 바다와 더 크기를 겨루다가 / 此心與海堪爭大
하늘 땅이 승락 안 해 쌍벽 이루고 말았다네 / 未許乾坤只作雙
끝까지 장애물이 없을 수는 없겠기에 / 終始不能無物障
연하 한 점 없는 곳에 들창문을 달았다네 / 煙霞盡處着軒窓
간이가 일찍이 이 고을 원을 지냈기 때문에 이 시를 쓴 것인데, 시가 매우 힘이 있기는 하지만 어딘가 억지로 다듬은 흔적이 남아 있다. 그리고 차식의 시는,
성긴 비에 갈매기는 둘씩둘씩 날아가고 / 疏雨白鷗飛兩兩
석양의 고깃배들 쌍쌍으로 떠 있네 / 夕陽漁艇汎雙雙
동천에 해가 돋는 그 모습 보기 위해 / 擬看晹谷金烏出
화각의 동쪽 머리에 창을 달지 않았다네 / 畫閣東頭不設窓
라고 읊었는데, 붓 끝이 생동감이 있고 퍽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러나 속담으로 전해오고 있는, ‘양양백구비소우(兩兩白鷗飛疏雨)’라는 것이 바로 이 시의 선창이 아니겠는가.
차식(車軾)은 송도(松都) 사람으로 아들 둘을 두었는데 그들이 운로(雲輅)와 천로(天輅)이다. 늙은 소명윤(蘇明允)이라면 식(軾)과 철(轍) 두 아들을 두었던 것 역시 당연한 일일 것이다.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의 시는,
푸른 바다에 붉은 무리 해는 이미 한나절인데 / 碧海暈紅窺日半
이끼 푸르고 바위 흰 것 갈매기와 연파로세 / 蒼苔嵒白煙鷗雙
금은대 위에 앉아 휘파람 한 소리에 / 金銀臺上發孤嘯
드넓은 천지가 팔방으로 활짝 열리네 / 天地浩然開八窓
했는데, 이 시 역시 의사가 소통하고 보는 이를 깨우쳐 주는 점이 있어 그런 대로 좋았다. 그리고 또 벽 위에 걸려 있던 박 승지 길응(朴承旨吉應)의 시 두 수도 생각과 운치가 매우 좋았었는데, 미처 화답을 못했던 것이 한이고 지금은 기억할 수도 없다.
(중략)
내 늙고 병들어 비록 비로봉 절정에 올라 깊은 구룡연을 내려다보면서 아주 높고 으슥하고 험한 곳까지 샅샅이 다 보지는 못했으나, 그래도 풍악산 겹겹이 쌓인 구름 속의 산빛이나 늦가을 풍경에 관하여는 그런대로 볼만큼 보았다. 그리고 나서 고성(高城)을 경유 해산정(海山亭)에 오르고, 삼일포(三日浦)를 거쳐 청간정(淸澗亭)에서 거닐었으며, 선유담(仙遊潭)ㆍ영랑호(永郞湖)에서 쉬기도 하였다. 또 양양의 낙산사(洛山寺)에서 묵으면서 동해를 바라보며 부상에 떠오르는 해를 구경하기도 하고 중추에 바다에 뜬 달도 완상했다. 그리고 다시 신흥사(神興寺)에 들러 설악산을 바라보고 천후산을 답사했으며, 또 춘천에 들러 회강(淮江)을 건너고 몽□(夢□)에 올라 우수(牛首 춘천의 옛이름) 평야를 굽어보고 경운산(慶雲山)ㆍ화악산(華岳山)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돌아왔다. 비록 사방을 두루 돌아보고 싶은 뜻을 다 이루지는 못했으나 그래도 평생의 소원을 다소는 풀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번 길에 들른 고을이 15개 주에 달하고, 길은 1천여 리 길이었으며, 왕복에 한 달이 걸렸다. 돌아다니는 동안 작은 일기책에다 날씨와 그날그날 가고 구경한 곳을 적어 옛분들 유행록(遊行錄)에 대신하였고, 또 동정부(東征賦) 한 편을 써서 거기에 나의 영귀(詠歸)의 뜻을 대강 펴 보았다.
임자년 9월 일 침석정(枮石亭)에서 쓰다. (한국고전종합 탑재분 전재)
계단과 나무와 정자의 위치로 인해 제대로 된 모습이 카메라 각에 잡히지 않는다. 눈에 직접 담아가라는 의미로 해석한다. 물좋고 정자좋은 청간정, 관동팔경의 의연한 아름다움이 카메라는 못 잡아도 맨눈은 잡아낸다.
물좋고 정자좋은 곳은 없다 했는데 사실은 정자 있는 곳은 대부분 물좋은 곳이다. 모두 구비한 곳이다.
훗날 다시 새겼음직한 청간정 시가 적힌 현판들이 관동팔경 위상과 어울린다.
정자에서 바라보는 설악산 설악 풍광이 웅장하고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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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래는 천학정
고성군에 해안가 경치가 뛰어난 곳으로 잘 알려진 청간정 말고도 잘 알려지지 않은 천학정이 있는데, 청간정에서 북으로 10분 정도 달려 아야진 고개를 넘어 교암리라는 마을에 위치하고 있다. 천학정은 1931년 지방유지 한치응, 최순문, 김성운 등이 발의하여 정면 2칸, 측면 2칸, 겹처마 팔각지붕의 단층으로 건립되었으며 정자의 정면에는 천학정 현판이 게판되어 있고, 정자내에는 천학정기와 그 좌측으로 천학정 시판이 게판되어 있다. 천학정은 동해의 신비를 간직한 기암 괴석이 깍아지른 듯한 해안 절벽위에 자리잡고 있으며, 정자 주위에는 1백년 이상이 된 소나무가 자리잡고 있어 풍치를 더해 주고 있다. 이곳은 일출명소이다. 보통 동해안 일출은 낙산사 의상대를 연상하는데, 이곳은 높은 기암 절벽 위 정자이며, 주위에 송림이 우거져 천하절경의 일출을 연출한다. 천학정에서 일출을 즐긴 후 북으로 난 해안도로를 따라 문암리 항구를 들르는 것도 좋다. 문암리 포구는 작은 포구이지만 기암 괴석이 바다로 뻗어나와 있고 한적한 어촌의 정취를 느낄수 있다. 문암포구의 능파대 위에서 맞는 일출은 동해안의 어느 해변 못지 않게 아름답다. 조용한 아침의 일출을 감상하기 위해 문암 포구를 찾는 것도 좋을 듯하다.
(대한민국 구석구석)
천학정 현판. 예서체가 정자와 잘 어울린다. 특히 근처 소나무와 조화가 좋다. 현판을 쓴 모암은 윤양희(茅菴山人 尹亮熙, 1943~)다. 충남 청양 출생으로 ‘한국미술협회’ 서예분과위원장, ‘대한민국서예대전’ 운영위원장과 심사위원장, ‘한국전각학회’ 이사로 활동하였으며, 계명대학교 서예과 교수를 역임하였다. 서예와 전각에 전념하는 분이다. 예사롭지 않은 글씨가 저력을 짐작케 한다.
현판을 이런 분이 써야 하지 않겠는가. 시까지 한다면 더욱 좋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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