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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한시감상
「욕천」 조식
[ 浴川 曹植 ]
全身四十年前累(전신사십년전루) 온몸의 사십 년 전의 허물을
千斛淸淵洗盡休(천곡청연세진휴) 천 섬의 맑은 물로 다 씻어 좋게 하리라
塵土倘能生五內(진토당능생오내) 티끌이 혹시라도 오장에 생긴다면
直今刳腹付歸流(직금고복부귀류) 지금 당장 배를 갈라 물에 흘려보내리라
〈감상〉
이 시는 제주(題注)에 “기유년(1549) 8월 초에 우연히 감악산 아래에서 노닐었는데, 함양의 문사인 임희무와 박승원이 듣고서 달려와 함께 목욕했다(己酉八月初(기유팔월초) 偶遊於紺岳山下(우유어감악산하) 咸陽文士林希茂朴承元(함양문사림희무박승원) 聞而馳到(문이치도) 侍與之(시여지) 同浴焉(동욕언)).”라 되어 있다.
감안산 아래 시냇물에 목욕하면서 40년 동안 살아오면서 지은 허물을 천 섬의 많은 물로 씻어 내겠다. 혹시라도 씻어 내고도 더러움이 뱃속에 남는다면, 지금 당장 배를 갈라서 더러움을 물에 흘려보내리라.
시가 비현실적이면서도 과격하다. 이것은 조식(曹植)의 기질과도 연관이 될 것인데, 『남명집』의 「행록(行錄)」에 의하면 “보잘것없는 시골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두 남명 선생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학사와 대부로 선생을 알건 모르건 선생을 일컫는 사람들은 반드시 가을 서리와 뜨거운 태양이라고 했다(至於鄙夫野人(지어비부야인) 皆知有南冥先生(개지유남명선생) 而學士大夫識與不識(이학사대부식여불식) 稱先生者(칭선생자) 必曰秋霜烈日云(필왈추상열일운)).”라 할 정도로 조식의 기질은 추상열일(秋霜烈日)이었던 것이다.
〈주석〉
〖累〗 허물 루, 〖斛〗 10말 곡, 〖休〗 좋다 휴, 〖倘〗 혹시 당, 〖刳〗 도려내다 고, 〖付〗 주다 부
각주
1 조식(曺植, 1501, 연산군 7~1572, 선조 5):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건중(楗仲), 호는 남명(南冥). 이황과 더불어 영남 사림의 지도자적인 역할을 함. 성운(成運) 등과 교제하며 학문에 힘썼으며, 25세 때 『성리대전(性理大全)』을 읽은 뒤 크게 깨닫고 성리학에 전념하게 되었다. 26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고향에 돌아와 지내다가 30세 때 처가가 있는 김해 탄동(炭洞)에 산해정(山海亭)을 짓고 학문에 정진했다. 45세 때 어머니가 세상을 뜨자 장례를 치르기 위해 고향에 돌아온 후 계속 고향 토동에 머물며 계복당(鷄伏堂)과 뇌용정(雷龍亭)을 지어 거처하며 학문에 열중하는 한편 제자들 교육에 힘썼다. 1555년 단성현감(丹城縣監)에 임명되었지만 모두 사퇴했다. 사직 시 올린 상소는 조정의 신하들에 대한 준엄한 비판과 함께 왕과 대비에 대한 직선적인 표현으로 조정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모든 벼슬을 거절하고 오로지 처사로 자처하며 학문에만 전념하자, 그의 명성은 날로 높아져 정구(鄭逑) 등 많은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61세 1561년 지리산 기슭 진주 덕천동(지금의 산청)에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죽을 때까지 그곳에 머물며 강학에 힘썼다. 1566년 명종의 부름에 응해 왕을 독대(獨對)하여 학문의 방법과 정치의 도리에 대해 논하고 돌아왔다. 1567년 선조(宣祖)가 즉위한 뒤 여러 차례 그를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고 정치의 도리를 논한 상소문 「무진대사(戊辰對事)」를 올렸다. 여기서 논한 ‘서리망국론(胥吏亡國論)’은 당시 서리의 폐단을 극렬히 지적한 것으로 유명하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상원석」 김인후
[ 上元夕 金麟厚 ]
高低隨地勢(고저수지세) 높고 낮은 건 지면의 형세 따라서이고
早晩自天時(조만자천시) 이르고 늦은 건 하늘의 때로부터이네
人言何足恤(인언하족휼) 사람들의 말 어찌 근심할 만하겠는가?
明月本無私(명월본무사) 밝은 달은 본래부터 사적인 것이 없는데
〈감상〉
이 시는 정월 보름달을 노래한 것인데, 제목의 주(註)에 의하면 “오세작(五歲作)”으로 어린 시절에 지은 시이다.
달이 높고 낮은 것은 그 달을 보는 사람이 있는 장소가 높은가 낮은가에 따라 높게도 보이고 낮게도 보이며, 달이 일찍 뜨건 늦게 뜨건 그것은 모두 하늘의 운행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들이 “왜 높이 뜨지 않지?”, “왜 낮게 뜨지?”, “왜 일찍 뜨지 않지?”, “왜 늦게 뜨지?”라고 자신들의 상황에 맞추어서 하는 욕심 섞인 말에 대해 근심할 것이 없다. 왜냐하면 밝은 달은 본래 사적인 것이 없이 누구에게나 똑같기 때문이다. 이것은 “명천리(明天理)”하여 “정인심(正人心)”할 것을 말한 것이다.
권별(權鼈)의 『해동잡록』에 그의 간략한 생평(生平)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본관은 울산이요 자는 후지(厚之)인데 스스로 하서(河西)라 호를 하였다. 중종 때에 급제하고, 뽑히어 홍문관(弘文館)에 들어갔다가 영전되어 수찬(修撰)에 이르렀다. 인조가 승하하자, 임금이 여러 차례 불렀으나 병으로 나가지 아니하였다. 항상 시국을 개탄하고 시와 술에 기탁하여 마음을 달래었다. 문집이 있어 세상에 전한다(蔚山人(울산인) 字厚之(자후지) 自號河西(자호하서) 我中廟朝登第(아중묘조등제) 選入弘文館(선입홍문관) 轉至修撰(전지수찬) 及仁廟賓天(급인묘빈천) 以疾屢徵不起(이질루징불기) 常慨念時事(상개념시사) 托於詩酒(탁어시주) 以寓懷(이우회) 有集行于世(유집행우세)).”
「행상(行狀)」에는 그의 시재(詩才)에 대한 일화(逸話)가 실려 있다.
“하서(河西)가 여섯 살에 능히 시를 지었는데, 객이 와서, ‘네가 짤막한 시를 지을 수 있느냐?’ 하고, 이내 하늘을 가리키면서 지으라고 하니, 곧 쓰기를, ‘모양은 둥글어 지극히 크고 또 지극히 현묘한데, 넓고 빈 것이 땅의 주변을 둘렀도다. 덮여 있는 그 가운데 만물을 용납하는데, 기나라 사람은 어찌하여 하늘 무너질까 걱정했던가.’ 하였다. 사당을 훌륭히 하고 제사의 차림을 푸짐히 하여 반드시 정성을 다하였으며, 초하루와 보름의 참배와 제철의 물건을 올리는 예가 시종 끊이지 아니하였다(河西六歲能詩(하서륙세능시) 客至曰(객지왈) 汝可作小詩(여가작소시) 因指天爲題(인지천위제) 卽書曰(즉서왈) 形圓至大又窮玄(형원지대우궁현) 浩浩空空繞地邊(호호공공요지변) 覆幬中間容萬物(복주중간용만물) 杞國何爲恐顚連(기국하위공전련) 祠堂之美(사당지미) 祭享之腆(제향지전) 必罄其誠(필경기성) 朔望之參(삭망지참) 時物之薦(시물지천) 終始無間(종시무간)).”
이 외에도 『성소부부고』에는 김인후의 시에 대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는 활달하고 밝으며 화평하고 순수한데, 시 역시 그 인품과 같았다. 송천(松川) 양응정(梁應鼎)은 그의 「등취대시(登吹臺詩)」를 극찬하여 고적(高適)·잠참(岑參)의 높은 운이라 했다고 한다. 그 시에, ‘양왕이 노래하고 춤추던 곳에, 오늘은 나그네가 올라왔노라. 구름을 넘는 강개한 흥취, 옛것을 조문하는 처량한 마음이로세. 긴 바람은 먼 들에 일어나는데, 밝은 해는 층층의 산 뒤에 숨어 버리네.
그 시절의 번화한 일들은 아득하니 어디에서 찾아보리오.’라 한 것은 침착하고 준위(俊偉)하여 가늘고 약한 태를 일시에 씻어 버렸으니, 참으로 귀중히 여길 만하다(金河西麟厚高曠夷粹(김하서인후고광이수) 詩亦如之(시역여지) 梁松川極贊其登吹臺詩(양송천극찬기등취대시) 以爲高岑高韻云(이위고잠고운운) 其詩曰(기시왈) 梁王歌舞地(양왕가무지) 此日客登臨(차일객등림) 慷慨凌雲趣(강개릉운취) 凄涼弔古心(처량조고심) 長風生遠野(장풍생원야) 白日隱層岑(백일은층잠) 當代繁華事(당대번화사) 茫茫何處尋(망망하처심) 沈着俊偉(침착준위) 一洗纖靡(일세섬미) 寔可貴重也(식가귀중야)).”
정조(正祖)는 『홍재전서(弘齋全書)』 「일득록(日得錄)」에서 다음과 같은 평들을 남겼다.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는 학문과 문장이 당세에 우뚝하였고 시대의 급류에서 기미를 알아차렸기 때문에 원우(元祐)의 난(송(宋)나라 원우(元祐) 연간에 일어난 당파 싸움을 가리킨다. 당시에 사마광(司馬光)을 위시하여 문언박(文彦博)·소식(蘇軾)·정이(程頤)·황정견(黃庭堅) 등이 결속하여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을 반대하였다. 그 후 사마광의 구당(舊黨)과 왕안석의 신당(新黨)이 계속해서 대립하였는데, 역사에서는 이 사건을 원우당인(元祐黨人)이라고 부른다. 여기에서 원우의 난이라고 한 것은 우리나라의 당파 싸움을 가리키는 말로, 하서가 당시 홍문관 부수찬으로 있었는데 윤원형(尹元衡)과 윤임(尹任)의 당파 싸움이 일어날 것을 염려하다가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장성으로 하향해 버린 일을 가리킴)에서 온전할 수 있었으니, 그 절의의 큼과 출처의 바름은 비길 만한 사람이 드물었다.
젊었을 때 인묘(仁廟)에게 인정을 받아 출중한 은혜를 받았고, 인묘께서 늘 그가 숙직하는 곳에 직접 가서 차분히 토론하였으며, 그가 올린 묵죽시(墨竹詩, 인조(仁祖)가 동궁으로 있을 때 늘 하서 김인후가 숙직하는 곳에 가서 토론을 벌였고, 직접 묵죽을 그려 하사하였는데, 하서가 그것을 시로 읊었다. 『하서전집(河西全集)』 「행상(行狀)」)는 지금 보아도 사람을 격앙시킨다.
심지어 천문(天文)과 지리(地理), 의약(醫藥)과 복서(卜筮), 음양(陰陽)과 율력(律曆), 명물(名物)과 도수(度數)에 이르기까지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대개 그의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 스스로 터득하여 그렇게 된 것이다(金河西學問文章(김하서학문문장) 迥出當世(형출당세) 見幾於急流(견기어급류) 得爲元祐完人(득위원우완인) 其節義之大(기절의지대) 出處之正(출처지정) 罕與爲比(한여위비) 而少時受知仁廟(이소시수지인묘) 恩遇出常(은우출상) 每親臨直廬(매친림직려) 從容問難(종용문난) 其所進墨竹詩(기소진묵죽시) 至今見之(지금견지) 令人激仰(영인격앙) 至於天文地理醫藥卜筮陰陽律曆名物度數(지어천문지리의약복서음양률력명물도수) 無不通曉(무불통효) 蓋天姿卓絶(개천자탁절) 自得而然也(자득이연야)).”
“도덕과 문장과 절의를 겸비한 사람은 오직 문정공(文正公) 김하서(金河西)가 그 사람일 것이다. 뒷날 그의 유집(遺集)을 보니, 기상이 청명하고 시원스레 트여서 천 년이 지난 뒤에도 사람을 흥기하게 하였다. 송선정(宋先正)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비문에 자세한 내용이 잘 기록되어 있으니, 대개 김하서가 송선정의 비문을 얻고 나서 이름이 더욱 드러나게 된 것이다(道德文章節義兼備者(도덕문장절의겸비자) 惟河西金文正其人乎(유하서김문정기인호) 後見其遺集(후견기유집) 氣象淸明灑落(기상청명쇄락) 可令人興起於千載之下(가령인흥기어천재지하) 而宋先正所撰碑文中發揮甚詳(이송선정소찬비문중발휘심상) 蓋河西得先正(개하서득선정) 而名益彰也(이명익창야)).”
“세상에서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의 사칠왕복서(四七往復書)가 대부분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의 손에서 나왔다고 한다. 대체로 기고봉은 김하서의 생질인데 하서의 누에 실과 소털 같은 세밀한 분석과 변론은 당시의 제현이 미치지 못하는 바였다. 문청공(文淸公) 정철(鄭澈)이 평생 깨끗한 지조를 지켰는데, 한번 김하서를 만나서 가야금과 술잔을 늘어놓고 통음하면서 도를 논하다가 문득 정신이 취하고 마음이 감복됨을 느꼈다고 한다.
이 몇 가지 일에서 조예가 탁월하고 기상이 호걸스러움을 알 수 있으니, 선인들이 김하서를 조선 400년간의 제일 인물이라고 하는 말은 참으로 맞는 의논이다(世謂奇高峯四七往復書(세위기고봉사칠왕부서) 多出於河西之手(다출어하서지수) 蓋奇是河西之甥(개기시하서지생) 而其蠶絲牛毛(이기잠사우모) 剖析辨破(부석변파) 當時諸賢之所不能及(당시제현지소불능급) 而鄭文淸以平生潔介之操(이정문청이평생결개지조) 一見河西(일견하서) 張琴列樽(장금렬준) 暢飮論道(창음론도) 便覺神醉而心服(편각신취이심복) 於此數事(어차수사) 可以見造詣之超絶(가이견조예지초절) 氣象之豪邁(기상지호매) 先輩以河西爲四百年第一人物者(선배이하서위사백년제일인물자) 誠格論矣(성격론의)).”
〈주석〉
〖上元(상원)〗 정월 보름. 〖恤〗 근심하다 휼
각주
1 김인후(金麟厚, 1510, 중종 5~1560, 명종 15): 본관은 울산. 자는 후지(厚之), 호는 하서(河西)·담재(澹齋). 10세 때 김안국(金安國)에게서 『소학』을 배웠다. 1531년(중종 26) 성균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했다. 성균관에서 이황(李滉)과 함께 학문을 닦았으며, 노수신(盧守愼)·기대승(奇大升)·정지운(鄭之雲)·이항(李恒) 등과 사귀었다. 제자로는 정철(鄭澈)·오건(吳健) 등이 있다. 1540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에 올랐다. 이듬해에 호당(湖堂)에 들어가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홍문관저작이 되었으며, 1543년 홍문관박사 겸 세자시강원설서, 홍문관부수찬에 이르렀다. 1545년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장성으로 돌아가 주자학연구에 전념했다. 그 뒤 성균관전적·공조정랑·홍문관교리·성균관직강 등에 임명되었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야지」 이황
[ 野池 李滉 ]
露草夭夭繞水涯(노초요요요수애) 고운 풀 이슬에 젖어 물가를 둘렀는데
小塘淸活淨無沙(소당청활정무사) 조그마한 연못 맑고 깨끗해 모래도 없네
雲飛鳥過元相管(운비조과원상관) 구름 날고 새 지나는 것이야 제 맘대로이나
只怕時時燕蹴波(지파시시연축파) 단지 때때로 제비가 물결 찰까 두려워라
〈감상〉
이 시는 『퇴계언행록(退溪言行錄)』에, “선생께서 젊었을 때 우연히 연곡(燕谷, 온계(溫溪)에 가까운 마을 이름)에 놀러 간 일이 있었다. 연곡에는 조그마한 못이 있는데, 물이 매우 맑았다. 선생께서 시를 지었다.”라고 제작 유래를 밝히고 있으며, 담담한 가운데 깊은 의미를 담고 있는 송풍(宋風)의 시이다.
연곡에 있는 조그마한 연못가에 고운 풀이 이슬에 젖어 물가를 둘렀다. 연못은 맑고 깨끗해 모래도 보이지 않는다. 그 연못 위로 때로는 구름이 날고 새가 지나는 것이야 괜찮다. 연못의 물에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지 걱정스러운 것은 때때로 제비가 날아와 물결을 차서 수면이 일렁이는 것이다(사람이 지닌 순수한 본성이 인욕(人慾)의 개입으로 순수성을 상실할 수 있음을 비유적으로 제시한 것이다. 그래서 제자인 김부륜(金富倫)이 『퇴계언행록(退溪言行錄)』에서, “이것은 천리(天理)가 유행(流行)하는데 혹시 인욕(人慾)이 낄까 두려워한 것이다[천리유행(天理流行) 이공인욕간지(而恐人欲間之)]”라 하였던 것임).
〈주석〉
〖夭〗 예쁘다 요, 〖繞〗 둘러싸다 요, 〖塘〗 못 당, 〖管〗 주관하다 관, 〖怕〗 두려워하다 파, 〖蹴〗 차다 축
각주
1 이황(李滉, 1501, 연산군 7~1570, 선조 3):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퇴도(退陶)·도수(陶搜). 이황의 학문은 주자학을 기반으로 형성되었다. 주자의 서간문(書簡文)을 초록한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20권은 그가 평생 정력을 바쳤던 편찬물이다. 이황의 성리학은 정자(程子)와 주자(朱子)가 체계화한 개념을 수용하여 이를 보다 풍부히 독자적으로 발전시켰으며, 이(理)를 보다 중시하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이란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는 이(理)를 모든 존재의 생성과 변화를 주재(主宰)하는 우주의 최종적 본원이자 본체로서 규정하고 현상세계인 기(氣)를 낳는 것은 실재로서의 이(理)라고 파악했다. 이황의 학문·사상은 이후 영남(嶺南)·근기(近畿) 지방을 중심으로 계승되어 학계의 한 축을 이루었다. 영남지방에서 형성된 학통은 유성룡(柳成龍)·조목(趙穆)·김성일(金誠一) 등의 제자와 17세기의 장현광(張顯光)·정경세(鄭經世)를 이어 이재(李栽)·이상정(李象靖) 등 한말까지 내려왔다. 근기 지방에서는 정구(鄭逑)·허목(許穆) 등을 매개로 유형원(柳馨遠)·이익(李瀷)·정약용(丁若鏞) 등 남인(南人) 실학자(實學者)에게 연결되어 이들 학문의 이론적 기초로서 기능했다. 한편 이들의 학통계승은 17세기 이후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각 학파·당파의 정치투쟁과 궤를 같이하면서 전개되는데 이들은 남인 당색하에, 이이의 학문을 사상적 기반으로 기호지방에서 성장한 서인과 치열한 사상투쟁·정치투쟁을 벌이며 조선 후기 사상계·정치계의 한 축을 이루었다.
「무제」 이수 서경덕
[ 無題 二首 徐敬德 ]
其一(기일)
眼垂簾箔耳關門(안수렴박이관문) 눈은 주렴을 드리웠고 귀는 문을 닫았으니
松籟溪聲亦做喧(송뢰계성역주훤) 솔바람 시냇물 소리 또한 시끄럽구나
到得忘吾能物物(도득망오능물물) 나를 잊고 사물을 사물로 볼 수 있음에 이르렀으니
靈臺隨處自淸溫(영대수처자청온) 마음은 처한 곳에 따라 절로 맑고 온화해지네
〈감상〉
이 시는 서경덕과 자연이 하나가 되는 경지에 대해 노래하고 있다.
눈은 주렴, 즉 눈꺼풀을 드리우고 보지 않으려 하고 귀는 문을 닫아 듣지 않으려 한다. 그런데 나를 잊지 않은 상태에서는 나라는 주체가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에 그 소리가 여전히 들려와, 솔바람 소리와 시냇물 소리가 시끄럽게 귀를 울린다. 하지만 나 자신을 잊고 사물을 사물 그대로 볼 수 있는 경지에 이르자, 내 마음은 어디에 처하든 절로 맑아지고 온화해진다. 자연과 동화(同化)되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서경덕은 「무현금명(無弦琴銘)」에서, “거문고이면서 줄이 없는 것은 본체는 그대로 두고 그 작용을 버린 것이다. 진실로 작용을 버린 것이 아니라 고요함이 움직임을 품고 있는 것이다. 소리를 통하여 거문고 소리를 듣는 것은 소리 없이 듣는 것만 못하다. 형체를 통하여 거문고를 즐기는 것은 형체 없이 즐기는 것만 못하다. 형체가 없이 그것을 즐기므로 그 오묘함을 체득하게 되고, 소리 없이 그것을 듣게 되므로 그 묘함을 체득하게 된다. 밖으로는 형체로 체득하지만 안으로는 무형(無形)에서 깨닫게 된다.
다만 그런 가운데에서 흥취를 얻게 되는 것인데, 어찌 줄에 대한 노력만을 일로 삼는가(琴而無絃(금이무현) 存體去用(존체거용) 非誠去用(비성거용) 靜其含動(정기함동) 聽之聲上(청지성상) 不若聽之於無聲(불약청지어무성) 樂之形上(악지형상) 不若樂之於無形(불약악지어무형) 樂之於無形(악지어무형) 乃得其徼(내득기요) 聽之於無聲(청지어무성) 乃得其妙(내득기묘) 外得於有(외득어유) 內會於無(내회어무) 顧得趣乎其中(고득취호기중) 奚有事於絃上工夫(해유사어현상공부))?”라 하여, 위의 시와 마찬가지로 체용(體用)을 동시에 체득해야 흥취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주석〉
〖簾〗 주렴 렴, 〖箔〗 발 박, 〖關〗 닫다 관, 〖籟〗 소리 뢰, 〖做〗 짓다 주, 〖喧〗 시끄럽다 훤, 〖靈臺(영대)〗 마음.
각주
1 서경덕(徐敬德, 1489, 성종 20~1546, 명종 1): 본관은 당성(唐城). 자는 가구(可久), 호는 부재(復齋)·화담(花潭). 그의 집안은 양반에 속했으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무반 계통의 하급관리를 지냈을 뿐, 남의 땅을 부쳐 먹을 정도로 형편이 어려웠다. 18세에 『대학』을 읽다가 격물치지(格物致知)장에 이르러 “학문을 하면서 사물의 이치를 파고들지 않는다면 글을 읽어 어디에 쓰겠는가?”라고 하여, 독서보다 격물이 우선임을 깨달아 침식을 잊을 정도로 그 이치를 연구하는 데 몰두했다. 이 때문에 건강을 해쳐 1509년(중종 4) 요양을 위해 경기·영남·호남 지방을 유람하고 돌아왔다. 1519년 조광조에 의해 실시된 현량과에 으뜸으로 천거되었으나 사퇴하고 화담에 서재를 지어 연구를 계속했다. 1522년 다시 속리산·지리산 등 명승지를 구경하고, 기행시 몇 편을 남겼다. 그는 당시 많은 선비들이 사화로 참화를 당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과거에 뜻을 두지 않았다. 1531년 어머니의 명으로 생원시에 응시, 합격했으나 벼슬길에는 나가지 않았다. 1540년 김안국(金安國) 등에 의해 조정에 추천되고, 1544년 후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계속 화담에 머물면서 성리학 연구에 전력했다. 이 해에 병이 깊어지자, “성현들의 말에 대하여 이미 선배들의 주석이 있는 것을 다시 거듭 말할 필요가 없고 아직 해명되지 못한 것은 글을 만들어 보고 싶었다. 이제 병이 이처럼 중해졌으니 나의 말을 남기지 않아서는 안 되겠다.”고 하면서 「원리기(原理氣)」·「이기설(理氣說)」 등을 저술했다. 그의 문하에서 박순(朴淳)·허엽(許曄)·이지함(李之菡) 등 많은 학자·관인들이 배출되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한국 유학사상 본격적인 철학문제를 제기하고, 독자적인 기철학(氣哲學)의 체계를 완성했으며, 당시 유명한 기생 황진이와의 일화가 전하며, 박연폭포·황진이와 더불어 송도삼절(松都三絶)로 불렸다.
「보자계상 유산지서당」 이황
[ 步自溪上 踰山至書堂 李滉 ]
花發巖崖春寂寂(화발암애춘적적) 꽃이 가파른 벼랑에 피어 봄은 고요하고
鳥鳴澗樹水潺潺(조명간수수잔잔) 새가 시내 숲에 울어 시냇물은 졸졸 흘러가네
偶從山後攜童冠(우종산후휴동관) 우연히 산 뒤에서 제자들을 이끌고
閑到山前問考槃(한도산전문고반) 한가히 산 앞에 와 고반을 묻는다
〈감상〉
이 시는 제자들을 데리고 계상부터 걸어서 산을 넘어 서당에 도착하여 지은 것으로, 성리학적(性理學的) 수양(修養)의 최고 경지를 보여 주는 시라 일컬어지는 작품이다.
꽃이 가파른 벼랑에 피고 새가 시내 숲에 울어 시냇물이 흘러가는 것은 자연의 이(理)이다. 이것은 ‘연비어약(鳶飛魚躍)’, 즉 솔개는 연못에서 뛰어놀 수 없고 물고기는 하늘을 날 수 없듯이 솔개는 하늘에서만 날고 물고기는 연못에서만 뛰어노는 것이 이치인 것이다. 천지자연의 이치가 유행(流行)하고 있음을 말한다. 자연의 이(理)가 흐르는 곳을 우연히 산 뒤에서 제자들을 이끌고 한가히 산 앞에 이른 것은 자연과의 혼연일체(渾然一體)를 의미한다.
이것은 다시 말해 천리(天理)에 순응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퇴계의 제자인 이덕홍(李德弘)이 「답이굉중(答李宏仲)」에서, “읊으신 ······라는 시는 위아래의 조화가 같이 유행하여 만물이 각기 제자리를 얻은 신묘함이 있는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所詠花發巖崖春寂寂(소영화발암애춘적적) 鳥鳴磵樹水潺潺(조명간수수잔잔) 偶從山後携童冠(우종산후휴동관) 閒到山前看考槃之詩(한도산전간고반지시) 似有上下同流(사유상하동류) 萬物各得其所之妙(만물각득기소지묘) 如何(여하))”라 하였던 것이다.
『퇴계선생언행록(退溪先生言行錄)』에 의하면, “‘임금과 신하의 이(理)가 진실로 나에게 갖추어 있다면 초목의 이(理)도 나와 같습니까?’라고 물었더니, 선생은 ‘같다는 말을 써서는 안 된다. 단지 하나일 뿐이다. 만일 형체가 있는 물건이라면 저것과 이것의 구별이 있겠지만, 이(理)는 형체가 없는 사물인데 어찌 저것과 이것을 구분할 수 있겠는가?’라 답했다(問君臣之理(문군신지리) 固具於我(고구어아) 草木之理(초목지리) 亦皆與我同(역개여아동) 曰(왈) 不可下同字(불가하동자) 只是一而已(지시일이이) 如有形之物(여유형지물) 則必有彼此(칙필유피차) 理無形底物事(이무형저물사) 何嘗分彼此(하상분피차)).”라 하여, 퇴계(退溪)는 이(理)를 매개로 인간과 자연은 동질성(同質性)을 지녔다고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석〉
〖崖〗 벼랑 애, 〖潺〗 물 흐르는 소리 잔, 〖攜〗 끌다 휴, 〖童冠(동관)〗 청소년으로, 여기서는 제자를 말함. 제주(題注)에 “이복홍(李福弘) 덕홍(德弘) 금제순배종지(琴悌筍輩從之)”라 되어 있음.
〖考槃(고반)〗 『시경』의 편명(篇名)으로, 은둔한 선비의 생활을 찬미하여 노래한 것인데, 고반의 해석은 일정하지 않다. 여기서는 한 가지 거처할 터를 말함인 듯함.
각주
1 이황(李滉, 1501, 연산군 7~1570, 선조 3):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퇴도(退陶)·도수(陶搜). 이황의 학문은 주자학을 기반으로 형성되었다. 주자의 서간문(書簡文)을 초록한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20권은 그가 평생 정력을 바쳤던 편찬물이다. 이황의 성리학은 정자(程子)와 주자(朱子)가 체계화한 개념을 수용하여 이를 보다 풍부히 독자적으로 발전시켰으며, 이(理)를 보다 중시하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이란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는 이(理)를 모든 존재의 생성과 변화를 주재(主宰)하는 우주의 최종적 본원이자 본체로서 규정하고 현상세계인 기(氣)를 낳는 것은 실재로서의 이(理)라고 파악했다. 이황의 학문·사상은 이후 영남(嶺南)·근기(近畿) 지방을 중심으로 계승되어 학계의 한 축을 이루었다. 영남지방에서 형성된 학통은 유성룡(柳成龍)·조목(趙穆)·김성일(金誠一) 등의 제자와 17세기의 장현광(張顯光)·정경세(鄭經世)를 이어 이재(李栽)·이상정(李象靖) 등 한말까지 내려왔다. 근기 지방에서는 정구(鄭逑)·허목(許穆) 등을 매개로 유형원(柳馨遠)·이익(李瀷)·정약용(丁若鏞) 등 남인(南人) 실학자(實學者)에게 연결되어 이들 학문의 이론적 기초로서 기능했다. 한편 이들의 학통계승은 17세기 이후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각 학파·당파의 정치투쟁과 궤를 같이하면서 전개되는데 이들은 남인 당색하에, 이이의 학문을 사상적 기반으로 기호지방에서 성장한 서인과 치열한 사상투쟁·정치투쟁을 벌이며 조선 후기 사상계·정치계의 한 축을 이루었다.
「분성증별」 김안국
[ 盆城贈別 金安國 ]
燕子樓前燕子飛(연자루전연자비) 연자루 앞에 제비가 날고
落花無數惹人衣(낙화무수야인의) 지는 꽃은 무수하여 사람의 옷을 물들이네
東風一種相離恨(동풍일종상리한) 봄바람은 한결같이 서로 이별의 한을 심으니
腸斷春歸客又歸(장단춘귀객우귀) 애달프다, 봄이 가니 객도 돌아가네
〈감상〉
이 시는 1511년 일본 사신 붕중(弸仲)을 전송하려고 김해에 들렀을 때 분성에서 이별하면서 지은 시이다.
김해 도호부 호계 위에 있는 연자루 앞에 제비가 날고, 지는 꽃은 무수하여 사람의 옷에 달라붙었다(연자루 주변 봄에 대한 경치를 노래한 사경(寫景) 부분). 봄바람은 언제나 서로 이별에서 오는 한을 돋우니, 애달프게도 봄이 가고 객도 또한 돌아가 이별을 하게 되었다(이별의 정을 노래한 사정(寫情) 부분).
정조(正祖)는 『홍재전서(弘齋全書)』 「일득록(日得錄)」에서 김안국이 문(文)에 뛰어났으며 후진 양성에 매진했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은 타고난 성품이 뛰어났고 평소에 수양을 쌓아 기묘제현(己卯諸賢)의 영수(領袖)가 되었다. 나라를 위하여 성의를 다하고 관직을 맡아서는 직분을 다하였으니, 비록 옛날의 현자 중에서 구하더라도 이런 사람은 많이 얻기가 쉽지 않다. 그가 태학사(太學士)로 있을 때 사대(事大)와 교린(交隣)의 응제문자(應製文字)는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는데, 매번 초고를 지을 때마다 문을 닫고 손님을 거절하고서 며칠을 읊조려서 한 자도 구차하게 쓰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글은 전아하고 명쾌하여 중국에서까지 칭송하였다. 그러나 박학한 문장에 비해 수약(守約) 공부가 조금 미진하였기 때문에 후세의 의논이 정암(靜菴)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평가하였으나, 후학을 육성하여 사도(師道)를 담당함으로써 한때의 사류들이 모두 그의 훈도를 입었으니, 이 점에 있어서는 정암이 도리어 양보함이 있는 것이다.
그의 아우 사재(思齋) 김정국(金正國) 역시 사우(師友)의 연원(淵源)이 있어 학문이 높은 경지에 올랐고, 문장이 여유 있고 민첩하여 시도 붓을 들면 그 자리에서 바로 완성하였다. 문집은 비록 한 권이지만 볼만한 것이 많다(金慕齋資性過人(김모재자성과인) 充養有素(충양유소) 爲己卯諸賢之領袖(위기묘제현지령수) 爲國竭誠(위국갈성) 當官盡職(당관진직) 雖求之古賢(수구지고현) 不易多得(불역다득) 其爲太學士時(기위태학사시) 事大交隣應製文字(사대교린응제문자)
皆出其手(개출기수) 每出草時(매출초시) 閉戶謝客(폐호사객) 吟哦屢日(음아루일) 一字不苟(일자불구) 故其文典雅明快(고기문전아명쾌) 見稱於中國(견칭어중국) 第其博學文章(제기박학문장) 差欠守約工夫(차흠수약공부) 故後來之論(고후래지론) 雖以爲不及靜菴(수이위불급정암) 而其成均敎胄(이기성균교주) 以師道爲任(이사도위임) 一時士類(일시사류) 咸被其陶甄之功(함피기도견지공) 此則靜菴反有讓焉(차칙정암반유양언) 其弟思齋亦有師友淵源(기제사재역유사우연원) 學問超詣(학문초예) 文章贍敏(문장섬민) 詩亦操紙筆立就(시역조지필립취) 文集雖一卷(문집수일권) 亦多可觀(역다가관)).”
〈주석〉
〖盆城(분성)〗 김해(金海). 〖燕子樓(연자루)〗 김해 호계(虎溪) 위에 있던 정자. 〖惹〗 엉겨 붙다 야
각주
1 김안국(金安國, 1478, 성종 9~1543, 중종 38): 본관은 의성. 자는 국경(國卿), 호는 모재(慕齋). 김굉필(金宏弼)에게 배웠으며, 조광조·기준(奇遵) 등과 사귀었으며, 당시 시를 잘 지었던 시인으로 알려졌고 회문시(回文詩)나 율시(律詩)를 잘 지어 상을 받기도 했다. 1501년(연산군 7) 생원시·진사시에 합격했고, 1503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로 벼슬을 시작한 뒤 홍문관박사·부수찬·부교리 등을 지냈다. 이어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1517년 경상도관찰사로 있을 때 각 향교에 『소학(小學)』을 나누어 가르치게 하였다. 같은 해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는 사사(賜死)되고, 김정(金淨)·김식(金湜)·김구(金絿) 등은 절도안치(絶島安置), 윤자임(尹自任)·기준 등은 극변안치(極邊安置)되었다. 이때 김안국도 아우 김정국 등 32명과 함께 파직되었다. 그 뒤 고향인 이천의 주촌(注村)과 여주의 폐천녕현(廢川寧縣) 별장에서 20여 년 동안 은거하면서 후진들을 가르쳤다. 대개의 지배층 관료가 그러했듯이 김안국도 재지(在地)의 사회경제적 기반 위에서 그를 찾아오는 사람들과 시와 술을 즐기고, 학문을 강론했다. 김인후(金麟厚)·유희춘(柳希春) 등 『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에 실린 그의 문인 44인 중 상당수는 이 시기에 관계를 맺었을 것이다. 그 뒤 정광필(鄭光弼) 등이 그를 다시 기용할 것을 거론했으나 기묘사화를 주도한 남곤(南袞)·심정(沈貞) 등이 집권하고 있을 때는 물론이고 김안로(金安老)가 집권하고 있을 때에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김안로가 사사된 뒤인 1538년 홍문관 등의 현직(顯職)은 맡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벼슬길에 다시 올랐다. 이어 예조판서·대사헌·병조판서·좌참찬·대제학·찬성·판중추부사·세자이사(世子貳師) 등을 지냈다.
「동도악부」 칠수 김종직
[ 東都樂府 七首 金宗直 ]
怛忉歌(달도가)」
怛怛復忉忉(달달부도도) 놀랍고 놀랍고 또 근심스럽고 근심스러워라
大家幾不保(대가기불보) 임금이 하마터면 목숨을 보존하지 못할 뻔했네
流蘇帳裏玄鶴倒(유소장리현학도) 오색 장막 속의 현학금이 거꾸러지니
揚且之晳難偕老(양차지석난해로) 훤칠한 왕비가 해로하기 어렵게 되었구려
忉怛忉怛(도달도달) 슬프고 근심스럽고 슬프고 근심스러워라
神物不告知柰何(신물불고지내하) 귀신이 안 알렸으면 어찌되었을까?
神物告兮基圖大(신물고혜기도대) 귀신이 알려 주어 나라 운수 길어졌네
〈감상〉
이 시는 김종직이 30대 초반에 지은 『동도악부(東都樂府)』 7수 가운데 하나로, 지조를 잃고 음탕하여 군자를 섬기는 도리를 잃은 것을 풍자한 시이다.
이 시를 지은 연유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을 덧붙이고 있다.
“소지왕 10년에 왕이 천천정에서 노니는데, 어떤 노옹(老翁)이 연못 속에서 나와 글을 바쳤다. 그런데 그 외면(外面)에 쓰여 있기를 ‘뜯어보면 두 사람이 죽고, 뜯어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는다.’고 되어 있으므로, 왕이 말하기를 ‘두 사람이 죽는 것보다는 뜯지 말아서 한 사람만 죽게 하는 것이 낫겠다.’ 하니, 일관(日官)이 말하기를 ‘두 사람은 서민(庶民)이고 한 사람은 왕입니다’ 하였다. 그러자 왕이 두려워하여 그것을 뜯어서 보니, 그 글에 ‘금갑을 쏘아라’고 쓰여 있었다. 그래서 왕이 궁에 들어가 금갑을 보고는 벽을 기대고 그를 쏘아 넘어뜨리고 보니, 바로 내전(內殿)의 분수승이었다. 왕비가 그를 데려다 함께 간통을 하고 인하여 왕을 시해하려고 꾀했었으므로, 이에 왕비도 복주(伏誅)되었다. 그 후로는 나라의 풍속이 매년 정월의 상진일·상해일·상자일·상오일에는 온갖 일을 금기하여 감히 동작을 하지 않고 이를 지목하여 ‘달도일’이라 하였다.
그런데 굳이 4일을 지목한 것은 그때에 마침 오(烏)·서(鼠)·시(豕)의 요괴가 있어 기사(騎士)로 하여금 추격하게 한 결과 인하여 용(龍)을 만났기 때문이다. 또는 16일을 오기일(烏忌日)로 삼아 찰밥으로 제(祭)를 지내었다(照知王十年(조지왕십년) 王遊天泉亭(왕유천천정) 有老翁自池中出獻書(유로옹자지중출헌서) 外面題云(외면제운) 開見二人死(개견이인사)
不開一人死(불개일인사) 王曰(왕왈) 與其二人死(여기이인사) 莫若不開(막약불개) 但一人死耳(단일인사이) 日官云(일관운) 二人者(이인자) 庶民也(서민야) 一人者(일인자) 王也(왕야) 王惧(왕구) 拆而見之(탁이견지) 書中云射琴匣(서중운사금갑) 王入宮(왕입궁) 見琴匣(견금갑) 倚壁射之而倒(의벽사지이도) 乃內殿焚修僧也(내내전분수승야) 王妃引與通(왕비인여통) 因謀弑王也(인모시왕야) 於是王妃伏誅(어시왕비복주) 自後國俗(자후국속) 每正月上辰上亥上子上午(매정월상신상해상자상오) 忌百事(기백사) 不敢動作(불감동작) 目之爲怛忉日(목지위달도일) 必以四日者(필이사일자) 其時適有烏鼠豕之怪(기시적유오서시지괴) 令騎士追之(영기사추지) 因遇龍也(인우룡야) 又以十六日爲烏忌之日(우이십륙일위오기지일) 以粘飯祭之(이점반제지)).”
〈주석〉
〖怛〗 놀라다 달, 〖忉〗 근심하다 도, 〖大家(대가)〗 황제. 〖流蘇(유소)〗 채색한 휘장.
〖揚且之皙(양차지석)〗 훤칠한 이마(양(揚)은 이마 위가 넓은 것, 차(且)는 어조사, 석(晳)은 흼)로, 『시경, 용풍(鄘風), 군자해로(君子偕老)』에 나오는 구절임. 이 시는 위나라 부인이 음탕하여 군자를 섬기는 도리를 잃을 것을 풍자한 시임.
「陽山歌(양산가)」
敵國爲封豕(적국위봉시) 적국이 큰 멧돼지가 되어
荐食我邊疆(천식아변강) 연이어 우리 변경을 차츰 먹어 들어오니
赳赳花郞徒(규규화랑도) 용맹스러운 화랑의 무리들이
報國心靡遑(보국심미황) 보국하느라 마음에 겨를이 없었네
荷戈訣妻子(하과결처자) 창을 메고 처자를 이별하고서
嗽泉啖糗粻(수천담구장) 샘물로 입 닦고 말린 쌀을 먹다가
賊人夜劘壘(적인야마루) 적들이 밤에 성루를 무찌르니
毅魂飛劍鋩(의혼비검망) 씩씩한 넋이 칼날에 흩어져 버렸네
回首陽山雲(회수양산운) 머리 돌려 양산의 구름 바라보니
矗矗虹蜺光(촉촉홍예광) 우뚝하게 무지갯빛 뻗치었도다
哀哉四丈夫(애재사장부) 슬프다, 네 사람의 대장부는
終是北方强(종시북방강) 마침내 용감한 사람이 되었으니
千秋爲鬼雄(천추위귀웅) 천추에 귀신 영웅이 되어
相與歆椒漿(상여흠초장) 서로 더불어 술을 흠향하리
〈감상〉
이 시는 김종직이 30대 초반에 지은 『동도악부(東都樂府)』 7수 가운데 하나로, 화랑도의 의연한 기상을 기리는 과정을 통해 신라의 후예인 영남인의 기상을 과시하고자 한 시이다.
이 시를 지은 연유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을 덧붙이고 있다.
“김흠운은 내물왕의 8세손인데 젊어서 화랑 문로의 문에 종유하였다. 영휘(당(唐) 고종(高宗)의 연호, 650~655) 6년에 태종 무열왕이 흠운을 낭당대감으로 삼아 백제를 치게 하여, 그가 양산 아래에 진영을 두었는데, 백제인들이 그것을 알아차리고 밤중에 급히 몰아와서 새벽에 진루를 타고 쳐들어왔다. 그러자 아군은 놀라서 허둥지둥 어쩔 줄을 몰랐고 화살은 비처럼 쏟아졌다. 그래서 흠운은 말을 타고서 적을 기다리고 있는데, 종자가 고삐를 잡고 돌아가기를 권유하자, 흠운이 칼을 뽑아 그를 쳐 버리고, 마침내 대감 예파, 소감 상득과 함께 적진으로 달려가 싸워서 몇 사람을 죽이고 자신도 죽었다.
그런데 이때 보기당주 보용나가 흠운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저 사람은 골(骨)이 귀하고 권세가 높은데도 오히려 절조를 지키고 죽었는데, 더구나 이 보용나는 살아도 도움이 될 것이 없고 죽어도 손해될 것이 없음에랴?’ 하고는 마침내 적에게로 달려가 싸우다 죽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양산가를 지어 그를 슬퍼하였다(金歆運(김흠운) 柰勿王八世孫(내물왕팔세손) 小遊花郞文努之門(소유화랑문노지문) 永徽六年(영휘륙년) 太宗武烈王(태종무렬왕) 以歆運爲郞幢大監(이흠운위랑당대감) 伐百濟(벌백제) 營陽山下(영양산하) 百濟人覺之(백제인각지) 乘夜疾駈(승야질구)
黎明(여명) 緣壘而入(연루이입) 我軍驚亂(아군경란) 飛矢雨集(비시우집) 歆運橫馬待敵(흠운횡마대적) 從者握轡勸還(종자악비권환) 歆運拔釰擊之(흠운발일격지) 遂與大監穢破少監狀得(수여대감예파소감장득) 赴賊鬪(부적투) 格殺數人而死(격살수인이사) 步騎幢主寶用那(보기당주보용나) 聞歆運死(문흠운사) 嘆曰(탄왈) 彼骨貴勢榮(피골귀세영) 猶守節以死(유수절이사) 况寶用那(황보용나) 生無益(생무익) 死無損乎(사무손호) 遂赴敵而死(수부적이사) 時人作陽山歌(시인작양산가) 以傷之(이상지)).”
〈주석〉
〖封〗 크다 봉, 〖豕〗 돼지 시, 〖荐〗 거듭하다 천, 〖赳〗 용맹스럽다 규, 〖遑〗 겨를 황, 〖訣〗 이별하다 결, 〖嗽〗 양치질하다 수, 〖啖〗 먹다 담, 〖糗〗 건량 구, 〖粻〗 양식 장, 〖劘〗 베다 마, 〖壘〗 성채 루,
〖毅〗 굳세다 의, 〖鋩〗 칼날 망, 〖矗矗(촉촉)〗 높은 모양(矗, 무성하다 촉). 〖虹蜺(홍예)〗 무지개.
〖北方强(북방강)〗 『중용(中庸)』 제십장(第十章)에, “무기와 갑옷을 깔고 지내면서 죽어도 싫어하지 않는 것은 북방 사람의 강함이다(임금혁(袵金革) 사이불염(死而不厭) 북방지강야(北方之强也)).”라는 말이 보임.
〖歆〗 신이나 조상의 혼령이 제사 음식을 기쁘게 받다 흠,
〖椒漿(초장)〗 산초나무로 만든 술로, 고대(古代) 신에게 제사 지낼 때 썼음.
각주
1 김종직(金宗直, 1431, 세종 13~1492, 성종 23): 호는 점필재(佔畢齋). 아버지 김숙자(金叔滋)는 고려 말·조선 초 은퇴하여 고향에서 후진 양성에 힘썼던 길재(吉再)의 제자로, 아버지로부터 학문을 배운 종직은 길재와 정몽주(鄭夢周)의 학통을 계승한 셈이다. 김종직의 학문은 무오사화 때 그의 많은 글이 불살라진 관계로 전체적인 모습을 밝히기는 어려우나, 대체로 정몽주와 길재의 도학사상(道學思想)을 이어받아 절의(節義)와 명분을 중요시하고 시비를 분명히 밝히려고 했다. 또한 『소학』과 사서(四書) 및 『주자가례(朱子家禮)』를 기반으로 하는 성리학의 실천윤리를 강조하였으며, 오륜(五倫)이 각각 질서를 얻고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사민(四民)이 자기의 직분에 안정하도록 하는 인정(仁政)의 실시가 이상적인 정치라고 보았다. 이를 위해 향교 교육과 인재의 등용을 매우 중시했다. 한편으로는 경술(經術)을 근본으로 하면서도, 당시 대명사대외교(對明事大外交)에서 꼭 필요하였던 사장(詞章)의 학문을 겸비하기도 하였다. 김종직의 문학세계는 명분·절의·수기(修己)에 근간을 두는 여말선초의 처사문학(處士文學)과 송시(宋詩)의 영향을 받아 화려한 문채(文彩)를 배격하고 간결하면서도 함축된 이(理)를 드러내는 것이었으나, 경(經)과 문(文)을 다 같이 중시하는 폭넓은 것이었다.
「우음」 조식
[ 偶吟 曹植 ]
高山如大柱(고산여대주) 높은 산은 큰 기둥과 같이
撑却一邊天(탱각일변천) 한쪽의 하늘을 받치고 섰네
頃刻未嘗下(경각미상하) 잠깐도 일찍이 내려앉은 적이 없기에
亦非不自然(역비부자연) 또한 자연스럽지 않음이 없네
〈감상〉
이 시는 우연히 지리산을 보고 노래한 것이다.
높은 지리산은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큰 기둥과 같다(높은 산의 기상은 조식의 기상이기도 함). 지리산은 무거운 하늘을 떠받치고 있지만 일찍이 잠시도 내려앉은 적이 없기에,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조식은 지리산을 매우 사랑하여 10여 차례나 올랐으며 「유두류산록(遊頭流山錄)」이란 글을 남기기도 했다.
〈주석〉
〖撑〗 버티다 탱, 〖却〗 어조사 각, 〖頃刻(경각)〗 잠시.
각주
1 조식(曺植, 1501, 연산군 7~1572, 선조 5):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건중(楗仲), 호는 남명(南冥). 이황과 더불어 영남 사림의 지도자적인 역할을 함. 성운(成運) 등과 교제하며 학문에 힘썼으며, 25세 때 『성리대전(性理大全)』을 읽은 뒤 크게 깨닫고 성리학에 전념하게 되었다. 26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고향에 돌아와 지내다가 30세 때 처가가 있는 김해 탄동(炭洞)에 산해정(山海亭)을 짓고 학문에 정진했다. 45세 때 어머니가 세상을 뜨자 장례를 치르기 위해 고향에 돌아온 후 계속 고향 토동에 머물며 계복당(鷄伏堂)과 뇌용정(雷龍亭)을 지어 거처하며 학문에 열중하는 한편 제자들 교육에 힘썼다. 1555년 단성현감(丹城縣監)에 임명되었지만 모두 사퇴했다. 사직 시 올린 상소는 조정의 신하들에 대한 준엄한 비판과 함께 왕과 대비에 대한 직선적인 표현으로 조정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모든 벼슬을 거절하고 오로지 처사로 자처하며 학문에만 전념하자, 그의 명성은 날로 높아져 정구(鄭逑) 등 많은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61세 1561년 지리산 기슭 진주 덕천동(지금의 산청)에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죽을 때까지 그곳에 머물며 강학에 힘썼다. 1566년 명종의 부름에 응해 왕을 독대(獨對)하여 학문의 방법과 정치의 도리에 대해 논하고 돌아왔다. 1567년 선조(宣祖)가 즉위한 뒤 여러 차례 그를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고 정치의 도리를 논한 상소문 「무진대사(戊辰對事)」를 올렸다. 여기서 논한 ‘서리망국론(胥吏亡國論)’은 당시 서리의 폐단을 극렬히 지적한 것으로 유명하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