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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곤원절(坤元節)
정의
대한제국 제2대 황제인 순종의 비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윤씨(尹氏)의 탄신일.
개설
1907년(융희 1) 8월 순종이 황제로 즉위하게 되자, 황제의 탄신경절(皇帝陛下誕辰慶節)을 건원절(乾元節)로 개칭하도록 하였으며, 이어 황후의 탄신일을 곤원절(坤元節)로 하였다. 곤원절의 날짜는 음력 8월 20일이던 것을 양력으로 환산하여 9월 19일로 정하여 실시하였다.
연원 및 변천
순정효황후는 1906년(광무 10) 황태자비인 동궁계비(東宮繼妃)로 책봉되었으며, 이듬해 순종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황후가 되었다. 따라서 황태자의 탄신일이었던 천추경절(千秋慶節)의 명칭을 바꾸어 황제의 탄신일인 건원절로 하는 한편, 궁내부(宮內府) 대신(大臣)민병석(閔丙奭)이 황후의 탄신경절의 칭호를 곤원절로 하자고 상주하여 실시하게 되었다.
절차 및 내용
첫 해인 1908년(융희 2) 곤원절의 의식은 건원절에 견주어 소략하게 진행되었다. 황제의 탄신일인 건원절 행사는 황제에 대한 폐현(陛見) 행사와 황제의 덕수궁 문안, 고종의 함녕전(咸寧殿) 사찬과 저녁에 돈덕전(惇德殿)에서 연회를 베풀고, 거리에서는 제등행렬까지 벌이는 등 매우 화려하고 성대하게 치른 반면, 곤원절 행사는 창덕궁 내에서만 진행되었다. 장례원(掌禮院)에서는 황제와 황후를 알현하는 폐현도 거행하지 않았으며, 곤원절 진하 행사로는 서명(署名)을 거행한 뒤 정오에 희정당(熙政堂)으로 종친과 총리대신(總理大臣) 이하 문무백관을 초청하여 사찬(賜饌)을 베푸는 것으로 행사를 치렀다.
곤원절 행사의 일환인 희정당 사찬에 참여하는 각부 대신들은 대례복(大禮服)을 착용하여 예를 갖추도록 하였다. 둘째 해인 1909년(융희 3)에는 종친과 문무백관은 인정전(仁政殿) 동행각에서 서명하고 문안하도록 하고 황족 부인과 대관의 부인들을 불러 사찬(賜饌)을 내리도록 하였으나 당시 전염병인 호열자(虎列刺) 즉 콜레라가 유행하여 중지되었다. 이에 이를 대신하여 10월 30일에 창덕궁 후원에서 원유회를 베풀기로 계획하였으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저격당하여 죽음으로써 행사가 중지되었다. 따라서 곤원절 행사는 실제로 1회밖에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문안 행사와 내연(內宴)으로 구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생활·민속적 관련 사항
황태자인 영친왕(英親王)은 일본 유학중이었으므로 곤원절 행사에 직접 참여할 수 없는 대신 전보로 경축의 뜻을 나타내었다. 학부(學部)에서는 곤원절을 기념하여 당일을 각급 학교의 휴업일로 제정하였다. 각 학교에서는 곤원절 당일 오전 9시에 돈화문 앞에 모여 대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의 만세를 외쳐 곤원절을 기념하였다.
참고문헌
『대한제국관보(大韓帝國官報)』
『황성신문(皇城新聞)』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공궐위장(空闕衛將)
정의
조선후기 공궐이 된 경복궁, 경희궁, 창경궁에 배치되어 궁궐 숙위를 관장하던 종2품 무관직.
개설
인조 이후 역대 국왕은 대체로 창덕궁에 거처하였다. 이에 따라 경복궁, 경희궁, 창경궁은 빈 궁궐인 공궐(空闕) 상태가 장기간 지속되었고, 이런 공궐에 잡인이 들어가는 일도 빈발했다. 이런 사태를 막기 위해 경복궁, 경희궁, 창경궁에 각각 가위장(假衛將) 3명씩을 배치하여 각각 병력을 거느리고 지키게 하였는데, 후에 가위장은 정식 위장으로 바뀌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을 비롯한 한양의 모든 궁궐이 소실되어 의주까지 파천했던 선조가 환도하였을 때에는 거처할 궁궐이 하나도 없었다. 이에 선조는 정릉동에 있던 월산대군의 집을 임시 궁궐로 이용하며, 이 집을 정릉동 행궁이라고 하였다. 선조는 세상을 떠날 때가지 궁궐을 짓지 못하고 이곳에서 승하하였다.
광해군은 즉위하자마자 경복궁을 제외한 창덕궁, 창경궁, 경덕궁(慶德宮), 인경궁(仁慶宮) 등을 건설하였고, 정릉동 행궁도 경운궁이라 이름하고 중건하였다. 광해군은 새로 지은 창덕궁으로 옮겨가며 인목대비를 서궁(西宮)이라 강등시켜 칭한 후 경운궁에 머물게 했다. 경운궁에는 아관파천 이후 환궁한 고종이 거처하였으며, 고종이 황제에서 밀려난 이후에는 덕수궁이라 불렸다.
경덕궁은 인왕산 아래 위치한 정원군의 집터에 지은 궁궐이었다. 이곳에 왕기(王氣)가 있다는 말을 듣고 광해군이 지은 것인데 경복궁의 서쪽에 있다고 하여 서궐이라고도 하였다. 경덕궁은 영조대에 경희궁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인왕산 아래 중건되었던 인경궁은 인조 즉위 후 곧바로 철거되었다.
인조 이후 역대 국왕은 대체로 창덕궁에 거처하였다. 이에 따라 경복궁, 경희궁, 창경궁은 공궐 상태가 장기간 지속되었고, 이런 공궐에 잡인이 들어가는 일도 빈발했다. 이런 사태를 막기 위해 경복궁, 경희궁, 창경궁에 각각 가위장 3명씩을 배치하여 각각 병력을 거느리고 지키게 하였다. 다만 국왕이 창덕궁에서 경희궁으로 옮겨 거주할 때는 경희궁의 공궐위장이 창덕궁으로 옮겨갔다.
조직 및 역할
조선후기 공궐에는 처음 가위장이라는 임시 직제를 두어 지켰으나 뒤에 ‘가(假)’자를 떼고 무관의 반열인 서반(西班) 중에서 체아직(遞兒職)으로 편제하였다.[『영조실록』35년 11월 11일] 체아직은 실무가 있는 정식 직제가 아닌 녹봉을 주기 위해 만든 직제였다. 이 같은 공궐의 위장(衛將)은 관상감·사역원(司譯院) 및 승문원의 사자관(寫字官), 도화서(圖畵署)의 화원 중 정3품 당상 이상의 관원 중에서 선발되었다. 공궐에는 위장 외에 실무담당 서리 1인과 방직(房直) 1인이 배속되어 있었다. 여기에는 별도의 군사가 없었으나, 공궐위장들이 여러 군영에서 파견된 군사들을 지휘하여 경비를 수행하였다.
변천
조선후기 공궐에 처음 가위장이 배치되었다가 후에 정식 위장이 배치된 이유는 조선전기부터 궁궐 숙위를 책임진 직책이 바로 위장이었기 때문이다. 태조이성계가 조선왕조를 개창한 직후 반포된 문무 관제에 의하면 숙위는 중추원에서 담당하였다.[『태조실록』1년 7월 28일] 하지만 건국 직후의 혼란 상황에서 숙위는 일정한 제도 없이 변천을 계속하다가 『경국대전』의 규정에 의해 안정되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숙위는 병조의 무비사(武備司)에서 관장하였으며, 직접적으로는 중앙군인 오위(五衛)와 금군(禁軍)에서 담당하였다. 『경국대전』에는 숙위와 관련하여 숙직을 서는 입직(入直), 순찰을 도는 행순(行巡), 숙직자의 이름과 활동 등을 기록하는 계성기(啓省記) 등의 규정이 있는데, 중요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먼저 입직하는 장교와 병졸은 3일 만에 교대하였는데, 오위는 각 1부(部)씩 입직하되 그 전일 저녁에 병조가 그 담당 지역과 시간을 나눠서 정하고 왕의 허락을 받아 도총부에 공문을 보냈다.
도총부는 접수한 공문을 해당 부로 보내 입직하도록 하였다. 입직 부는 궁궐의 동소(東所), 서소(西所), 남소(南所), 북소(北所)의 네 곳에 분산 배치되어 중소(中所)의 통솔을 받았다. 중소에서는 병조의 당상관 1명, 도총부의 당상관 2명이 숙직했다. 입직하는 부의 병력은 종6품 부장(部將)과 종2품 위장(衛將)의 지휘를 받았는데, 위장과 부장은 군사 10명을 거느리고 야간 시간을 배분하여 순찰한 다음 무사 여부를 국왕에게 직접 보고 하였다. 이 같은 궁궐 숙위 제도가 조선후기 공궐에 적용되어 처음에는 가위장으로 되었다가 후에 정식 위장으로 되었던 것이다. 공궐의 위장은 내관(內官)과 함께 병력을 거느리고 공궐을 순시하였으며, 숙위의 효율을 높이기 위하여 공궐 주변에 군보(軍堡)를 설치하였다. 이 같은 공궐위장은 고종 후반 신군제가 적용되면서 사라지게 되었다.
참고문헌
『日省錄』
『承政院日記』
『增補文獻備考』
『萬機要覽』
『大典會通』
육군본부, 『한국군제사』-근세조선후기편-, 육군사관학교 한국군사연구실, 1997.
이태진, 『조선후기의 정치와 군영제의 변천』, 한국연구원, 1985.
국사편찬위원회 홈페이지(http://www.history.go.kr)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시소러스 검색.
공사청(公事廳)
정의
조선시대 왕명의 전달을 관장하던 내시인 승전색(承傳色)이 근무하던 청사.
개설
공사청은 조선 초부터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1894년(고종 31)에 혁파되었다. 공사청에서는 왕명의 전달 이외에도 국왕이 내려주는 계하문서(啓下文書)의 ‘계(啓)’ 자 날인을 담당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공사청이 설치된 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이미 조선 건국 초기부터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초기부터 내시들의 왕명 전달 역할이 확인되기 때문으로[『태종실록』 7년 7월 19일], 이들을 위한 별도의 청사가 마련되었을 것이다. 다만 현재 확인되는 기록상으로는 1527년(중종 22) 국왕이 공사청을 언급하는 과정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중종실록』 22년 4월 3일].
조직 및 역할
공사청에는 내시인 승전색을 비롯해 사알(司謁), 공사별감(公事別監)과 하례(下隷)인 대령(待令)이 근무하였다. 이들은 왕명을 전달하는 역할은 물론이고 국왕이 내리는 계하문서에 ‘계’ 자를 날인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간혹 ‘계’ 자가 날인되지 않은 채 계하되는 문서가 있어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이 밖에도 공사청에서 왕명 전달 과정에서 여러 가지 문제점이 노출되었다. 1660년(현종 1)에는 경상감사가 왜인의 선박이 왕래한 현황을 월말에 정리해서 보고한 것을 국왕이 확인하고 계하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종이의 끝부분이 잘려서 문서를 가지고 간 별감이 의금부에 수감되기도 하였다. 또한 1785년(정조 9)에는 국왕이 내린 초기(草記)를 늦게 반포하였다고 하여 공사청의 사알이 추고(推考)의 벌을 받았고, 1786년(정조 10) 11월에는 계하한 순감군단자(巡監軍單子)를 누락하기도 하였다.
변천
공사청은 각 궁궐마다 설치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중종 연간의 기록이 경복궁에 해당된다면, 1616년(광해군 8) 공사청을 각별히 조성하도록 한 기록은 창경궁에 있던 공사청이었다[『광해군일기』 8년 5월 9일]. 공사청에는 국왕의 전교(傳敎) 중 특정 명령을 적어 게시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1869년(고종 6) 5월 국왕이 하교하여 조광조(趙光祖)를 비롯해 이황(李滉)·이이(李珥)·성혼(成渾)·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등 6명 명현의 사판(祀板)이 서울을 지나고, 성균관 유생이 이를 맞이한다면 승정원에서 국왕에게 아뢰도록 명하고, 이를 공사청에 게시하도록 특별히 명령하였다.
고종 연간에 이르면 왕명이 공식적인 비서기관인 승정원(承政院)도 모르게 공사청을 통해서 하달되는 일이 많았다. 그리하여 왕명을 받는 관원들이 궁금한 것이 있어도 어디에 질문해야 하는지를 모르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건창(李建昌)은 이런 이유로 공사청을 사사로이 일을 하는 사인(私人)이라 하며 이를 시정할 것을 건의하였다.
공사청은 1894년(고종 31) 칙령(勅令)에 의거하여 승정원과 함께 혁파되었다[『고종실록』 31년 11월 21일]. 당시에 이전의 공문반포 규례를 모두 폐지하고 새롭게 공문처리 규정 등을 제정한 공문식제(公文式制)를 반포하면서 이루어진 조치였다. 공사청이 폐지되면서 종전에 공사청에서 담당하던 ‘계’ 자 날인은 국왕이 몸소 행하였다.
참고문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일성록(日省錄)』
『매천야록(梅泉野錄)』
『동학란기록(東學亂記錄)』
『명미당집(明美堂集)』
관광인(觀光人)
정의
조선시대 국왕 및 왕실 가족의 행차를 구경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
개설
조선시대 국왕은 자신의 훌륭한 덕을 과시하고 백성들의 여론을 듣기 위해 백성들의 관광(觀光)을 허락하였다. 반면 자칫 국왕의 안전과 위엄을 해칠 수 있는 관광인은 철저하게 금지하였다. 대표적으로 높은 곳에 앉아서 구경하는 관광인과 돌아다니면서 구경하는 관광인은 금지되었다. 또한 왕이 탄 수레인 어가(御駕)에서 바라다보이는 멀지 않은 곳에서 말을 타고 관광하는 자를 사형에서 감형하여 무기한으로 섬에 유배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관광인의 역할은 근본적으로 국왕의 안전과 위엄을 담보한 상태에서 국왕의 훌륭한 덕을 찬양하는 데 있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전통시대 한국과 중국에서 관광은 제왕의 훌륭한 덕 또는 자연의 풍광을 구경한다는 의미이므로 관광인은 제왕의 성덕 또는 자연의 풍광을 구경하는 사람이란 뜻이 된다. 전통시대 한국과 중국의 제왕은 자신들의 높은 덕을 과시하고 백성들의 여론을 듣기 위해 관광을 허락하였다. 따라서 역사적 의미를 갖는 관광인은 제왕의 훌륭한 덕을 구경하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이다. 그런데 제왕의 성덕을 구경하는 관광인이 자칫 제왕의 안전과 위엄을 해칠 수 있기에 수많은 금지가 뒤따랐다.
전통시대 한국과 중국에서 관광인은 제왕의 행행(行幸) 때 제왕의 성덕을 구경할 수 있었는데, 제왕의 행행은 유교예법에 의해 일정한 형태를 띠었다. 국왕의 행행이 유교예법에 의해 가장 정밀하게 정형화된 때는 조선시대였다. 조선은 오례(五禮)에 입각하여 국왕의 행행을 종류별로 또 규모별로 자세하게 규정하였다. 우선 오례와 관련된 조선시대 국왕의 행행은 오례의 중요성에 따라 대가(大駕), 법가(法駕), 소가(小駕)로 구분되었다. 『국조오례의서례(國朝五禮儀序禮)』에 의하면 왕은 중국 천자로부터 조칙을 맞이할 때, 종묘와 사직에 제사할 때는 의장의 규모가 가장 큰 대가를 사용하였다. 이 외에 태조 내외를 모신 사당인 문소전(文昭殿), 풍년을 기원하는 제를 올리는 선농단(先農壇), 문선왕에 제사할 때, 그리고 사단(射壇)에서 활쏘기 할 때, 무과전시를 거행할 때는 대가보다는 조금 간소화한 법가를 사용하였으며 능 참배, 활쏘기 관람, 기타 대궐 밖 행행 때에는 소가를 사용하였다.
이 같은 국왕의 행행은 백성들에게 큰 구경거리였으므로 수많은 관광인이 모였다. 이에 따라 국왕의 행행에서 안전과 위엄을 확보하기 위해 각종 규정들이 『경국대전』에 마련되었다. 예컨대 행행 중인 국왕이 멈췄을 경우, 국왕을 호위하기 위해 내진(內陣)과 외진(外陣)의 2중 진형을 구축하고, 내진의 순찰은 도총관 이하 제장(諸將) 중에서 병조가 국왕에게 아뢰어 낙점을 받은 장수가 군사 5인을 거느리고 수시로 순찰한 후 직접 왕에게 보고하고, 외진의 순찰 및 특별순찰은 대장(大將)이 위장(衛將)이나 부장(部將)을 정하여 군사 10인을 거느리고 순찰하는 것 등이 그것이다.
반면 백성들이 관광하는 것 자체를 금지하지는 않았다. 국왕의 훌륭한 덕을 과시하고 백성들의 여론을 듣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국왕의 안전과 위엄을 해치는 행위는 엄격하게 금지하였다. 예컨대 높은 곳에 앉아서 구경하는 관광인 금지[『중종실록』 20년 3월 17일], 돌아다니면서 구경하는 관광인 금지[『광해군일기』 8년 8월 7일] 등이 그것이다. 또한 『신보수교집록(新補受敎輯錄)』에 의하면 1734년(영조 10)에는 어가에서 바라다보이는 멀지 않은 곳에서 말을 타고 관광하는 자를 사형에서 감형하여 무기한으로 섬에 유배한다는 규정이 제정되기까지 했다.
조직 및 역할
조선시대 국왕의 행행 때 관광인을 허락한 이유는 물론 국왕의 성덕을 과시하고 백성들의 여론을 듣기 위해서였다. 반면 높은 곳에 앉아서 구경하는 관광인을 금지한 이유는 국왕의 위엄을 해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돌아다니면서 구경하는 관광인을 금지한 이유와 어가에서 바라다보이는 멀지 않은 곳에서 말을 타고 관광하는 자를 사형에서 감형하여 무기한으로 섬에 유배한 이유는 국왕의 안전을 위협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관광인의 역할은 근본적으로 국왕의 안전과 위엄을 담보한 상태에서 국왕의 성덕을 찬양하는 데 있었다.
변천
조선시대 어가를 이용한 왕의 행행은 대한제국이 선포된 후 크게 변했다. 먼저 제후국의 위상을 가졌던 조선에서 황제국을 표방한 대한제국이 수립되면서 어가에 수반되는 각종 의장물들이 황제의 의장으로 바뀌었다. 이와 함께 새로이 전차와 열차, 자동차 등 근대 교통체계가 도입됨으로써 행행의 방식과 규모 역시 근대 교통체계를 이용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이런 상황에서 관광인 역시 사라지거나 성격이 바뀌게 되었다.
참고문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대한예전(大韓禮典)』
김지영, 「조선후기 국왕의 행차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5.
이왕무, 「대한제국기 純宗의 南巡幸 연구」, 『정신문화연구』30-2, 2007.
이왕무, 「조선후기 국왕의 陵幸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8.
국사편찬위원회 홈페이지(http://www.history.go.kr)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시소러스 검색
권농윤음(勸農綸音)
정의
조선 시대 국왕이 새해를 맞이하여 농업을 장려하기 위해 전국에 반포한 담화문.
개설
전통시대 한국의 왕과 중국의 황제가 관리나 백성들에게 당부하거나 타이르기 위해 내리던 명령을 윤음이라고 했다. 윤(綸)이란 실로 꼰 줄이라는 뜻이고 음(音)이란 소리란 뜻으로서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윤음은 ‘실로 꼰 줄과 같은 소리’라는 의미이다. 국왕이 관인이나 백성들에게 당부하는 윤음은 양으로는 얼마 되지 않았다. 하지만 궁궐에서 반포된 윤음은 전국의 지방 관리들에 의해 백성들에게 다시 선포되었다. 윤음을 들은 백성들은 서로서로 그것에 대해 의논하고 평가했는데, 그 과정이 마치 실 뭉치에서 실을 뽑아내고 그 실을 꼬아 줄을 만드는 것과 같다고 해서 윤음이라고 했다. 윤음은 달리 윤발(綸綍)이라도 하였다. 발(綍)은 가는 실을 꼬아 만든 굵은 밧줄이므로 윤음이나 윤발은 결국 같은 의미가 된다.
전통시대 한국의 왕과 중국의 황제는 중요한 국정 현안에 대하여 윤음을 선포하곤 했다. 그 윤음은 국정 현안에 따라 다양하게 불렸다. 예컨대 조선 시대 국왕의 윤음에는 권농윤음을 비롯하여 계주윤음(戒酒綸音), 척사윤음(斥邪綸音), 수성윤음(守城綸音) 등이 있었는데 권농윤음은 권농 즉 농업의 장려에 관한 윤음이었고, 계주윤음은 계주 즉 술의 경계에 관한 윤음이었으며, 척사윤음은 척사 즉 사특한 것을 배척하는 것에 관한 윤음이고, 수성윤음은 수성 즉 도성의 수비에 관한 윤음이었다.
조선 사회는 농업을 기반으로 했다. 신년을 맞는 백성들의 최대 소망은 풍년을 맞이하는 것이었다. 왕은 전국의 관리들에게 백성들의 소망을 상기시키고 나아가 그 같은 소망을 실현시키기 위해 관리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을 훈계하고자 정월 초하루에 권농윤음을 반포하였다.
연원 및 변천
조선 시대의 윤음은 원칙적으로 왕이 직접 짓는 어제였지만 승지나 각신(閣臣) 또는 유신(儒臣)이 왕명을 받고 대신 짓는 경우도 있었다. 권농윤음은 대한제국기 들어 폐지되었다.
절차 및 내용
조선 시대 왕실에는 삼명일(三名日)이 있었는데 정초, 동지 그리고 왕의 생일이 삼명일이었다. 정초와 동지는 한 해의 시작과 끝을 기념하는 명절이었다. 새해 소망을 기원하고 한해를 마무리 짓기 위해 정초와 동지를 명절로 했다. 반면 왕의 생일은 군주제도에서 주권자 생일을 기리기 위한 필요에서 명절이 되었다.
삼명일 중에서 정초에 가장 많은 행사가 있었다. 새해를 맞이하는 의미가 특별했기 때문이었다. 정초에 국왕이 치르는 첫 번째 행사는 망궐례(望闕禮)였다. 새해를 맞아 중국 황제에게 인사를 드리는 의례가 망궐례였다. 궁궐 정전 옥좌에 중국 황제를 상징하는 궐패(闕牌)를 올려놓고 국왕 이하 문무백관이 인사하는 의례가 망궐례였다. 두 번째 행사는 왕세자와 백관으로부터 새해인사를 받는 것이었다. 왕세자와 백관은 정전 옥좌에 앉은 국왕을 향해 ‘만물이 모두 새로워지는 철을 맞아 삼가 전하께서도 큰 복을 받으소서.’라는 인사말을 올렸다. 이에 대하여 국왕은 답례로 ‘신년을 맞는 경사를 경들과 더불어 즐기노라.’ 했다. 이어서 국왕은 내전으로 들어가 왕세자빈으로부터도 새해인사를 받았다. 새해인사가 끝나면 종친, 백관, 외국인들이 모두 참여하는 잔치를 열었다. 이 회례연(會禮宴)에서는 술과 음악이 곁들여져 흥을 돋았다. 술처럼 또 음악처럼 군신상하가 서로 화합하고 즐기자는 의미의 잔치가 회례연이었다.
여기까지는 왕과 양반관료들만의 행사였다. 나라의 근본인 백성이 빠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회례연 다음에는 국왕이 전국의 백성들에게 당부하는 글을 발표했다. 그 글은 농업을 장려하는 글이기에 권농윤음(勸農綸音)이라고 했다. 정초에 국왕이 전국의 백성들과 어울리는 행사는 권농윤음 반포가 유일했다. 그런 의미에서 왕의 신년행사에서 가장 중요한 행사는 다름 아닌 권농윤음 반포였다.
권농윤음에는 올 한해 국왕이 농사지을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을 어떻게 마련하겠다는 의지가 포함되었다. 그 의지가 현실에 맞고 또 백성들의 마음에 맞을 때 백성들은 희망을 갖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왕은 심혈을 기울여 권농윤음을 짓거나 아니면 뛰어난 문장가에게 명하여 권농윤음을 짓게 하였다. 국왕이 반포한 권농윤음은 8도의 관찰사와 양도의 유수에게 전해졌고, 8도의 관찰사와 양도의 유수는 다시 관하의 수령들에게 전함으로써 궁극적으로 권농윤음이 백성들에게 전해지도록 하였다.
생활·민속적 관련 사항
농업사회에서 권농윤음은 농민들의 농사력과 관련되어 농사의 시작을 알리는 전환점이 되었다.
참고문헌
『銀臺條例』
권정례(權停禮)
정의
조선시대 국가 의례에서 왕이나 왕비, 세자나 세자빈 등 의례의 주인공이 참석하지 않은 채 거행하는 예식.
개설
국가 의례에 참석해야 할 왕이나 왕비·세자 등이 몸이 불편하거나, 날씨가 안 좋거나 다른 상황 때문에 의례에 참여하기 어려울 때 직접 의례 장소에 나아가지 않고 자리만 설치한 채 거행하는 예식을 권정례라고 한다. 종묘대제(宗廟大祭)처럼 왕이 직접 참여하지 않고 대신 등에게 대행하게 하는 경우에는 섭행례(攝行禮)라고 하여 구분한다. 권정례는 왕은 그 자리에 없지만 있는 것으로 가정하며, 다른 모든 절차를 왕이 있다는 가정 하에 진행한다.
내용 및 특징
왕의 탄일 때 백관이 권정례로써 축하 전문을 올렸다거나[『성종실록』 2년 7월 29일], 과거 시험의 합격자를 발표하는 방방(放榜) 의식을 거행할 때 왕이 참여하지 않은 채 권정례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성종실록』 3년 2월 13일]. 이렇게 왕이 참여해야 할 행사에 왕이 없는 채로 거행하는 의식을 권정례라고 한다. 왕뿐만 아니라 대비에게 존호를 올리는 의식을 거행할 때 대왕대비가 생존해 계시기 때문에 사양하는 의미로 권정례를 사용하기도 하였다[『성종실록』 6년 2월 26일]. 이 밖에 날씨가 궂을 때에도 권정례로 거행하였고[『성종실록』 7년 1월 8일], 즉위 의식에서 교서를 반포하는 의식이나 가례, 책봉 의식이나 존호 의식 이후의 축하 의례 등에는 주인공이 직접 참여하지 않은 채 권정례로 거행하는 일이 잦았다[『숙종실록』 7년 3월 25일]. 권정례로 의식을 거행하면 왕이나 왕비 등은 그 자리에 나오지 않지만 어좌(御座)를 설치하였으며, 왕이나 왕비·세자 등이 그 자리에 있다고 가정하고 의식을 거행하였다.
참고문헌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춘관통고(春官通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