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령남씨 남재
1351~1419(69세)
본관은 의령, 자는 경지, 호는 구정, 초명은 겸이다.
이색의 문인이다. 1371년(공민왕20)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정몽주,정도전,조준등과 친하게 지냈으며 아우 은과 함께
이성계진영의 인물로 활동했으며 위화도회군 뒤 회군공신으로 봉해졌다.
1392(태조1) 태조에게서 재(在)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개국공신 1등으로 의성군에 봉해졌다.
1393주문사로 명(明)에 가서 3년마다 조공할 것을 개선하고 승인을 받아 그 공으로 판중추원사가 되었다.
1398년 제1차 왕자의난에 아우 은이 살해되자 잠시 유배되었다가 풀려나온뒤 대사헌을 거쳐
1414년에 우의정에 이르렀고, 부원군이 되었다.
1416(태종16년) 영의정이 되었다.
-경제에 밝고 문장이 뛰어났다. 산수에도 능하여 당시 사람들이 남산이라 불렀다.
저서에 [구정유고]가 있으며 하륜과 함께 고려사를 개수했다.
태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종묘배향공신이 되었다.
시호는 충경공이다.
*부원군:조선시대에는 왕비의 아버지 즉,장인인 극구는 후작이고, 정1품 공신은 백작으로 작위되었다.
남재(南在)에게 내린 교지(敎旨)에,
"대업을 처음 일으키는 임금은 반드시 여러 대(代)만에 나는 현인에게 힘입게 되며, 큰 공을 세우는 신하는 마땅히 무궁한 보답을 누려야 될 것이다. 이는 곧 공변된 의리이며 사사의 은혜는 아니다. 경은 학문이 고금(古今)의 사적을 통달하고, 식견은 기미(幾微)의 일까지 환하게 알았다. 활달한 높은 생각으로써 경국 제세(經國濟世)의 원대한 계책을 쌓았었다. 고려의 국운(國運)이 이미 쇠진한 때를 당하여 천명(天命)의 거취를 알게 되었다. 이에 여러 공들과 더불어 의논을 결단하고 계책을 정하고 성조(聖祖)를 추대하여 나라를 세웠다. 이 백성을 구원하고 세상을 구제하여 억만년 무궁한 경사(慶事)를 마련하였으니, 그 공렬(功烈)이 어찌 위대하지 않으랴. 배향할 신하를 널리 물으니, 모두 말하기를, ‘경(卿)이라. ’고 하였다. 지금 봄 제사를 거행함에 있어 우리 태조에게 배향하여, 묘정(廟庭)에 종사(從祀)하게 하여 특별한 공훈에 보답하니, 상상컨대, 알음이 있거든 나의 이 명령을 받을지어다."
라고 하였다.
남은에게 내리는 교지(敎旨)는,
"천운(天運)을 도와 나라를 세운 것은 신하의 큰 공렬이요, 공을 기록하여 제사를 마련하는 것은 국가의 일정한 규정이다. 경은 영매(英邁)한 자질로써 경국 제세(經國濟世)의 방략(方略)을 가졌었다. 식견은 정치의 방법을 통달하고, 총명은 기미(幾微)를 환히 알았었다. 고려의 국운이 이미 쇠잔함을 당하여, 천명이 돌아가는 데가 있음을 알았었다. 큰 계책을 먼저 세워 우리 성조를 추대하여 처음으로 큰 기업(基業)을 마련하였다. 능히 세상에 드문 공을 이루어 무궁한 경사를 계승하였다. 맹부(盟府)002) 에 기재되어 있으니 환하게 상고할 수 있다. 이로써 경을 올려서 우리 태조에게 배향하여, 묘정에 종사하게 하여 특별한 훈공에 보답하니, 나의 이 명령을 받을지어다. 아아, 그대의 큰 공적을 가상(嘉尙)히 여겼으므로 포숭(褒崇)을 극진히 하였고, 우리 선왕을 도왔으니 마땅히 길이 보필에 힘쓸 것이다."
<세종실록> 15권, 세종 4년(1422년) 1월 5일
첫댓글 조선건국 공로자에서 영의정까지 지냈던
남 재 영상입니다~~
https://youtu.be/FpGWiE4lUq4?si=P8vraOV1DG22Vk8Q
의령 남씨 충경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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