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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日常)
2015. 3. 22(주일낮예배) 마태복음 28:19-20
미국 개혁교단(CRC)은 목사안수 받을 때 정신과에서 심리테스트를 거행한다. 목사가 될 사람으로 정신적인 문제가 없는지를 검사하는 것이므로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는 쉽게 통과하는 의례적인 절차이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것은 한국 목사후보생들은 이 테스트에 부적격 판정을 받는 사례가 자주 발생한다. 왜냐하면 상담하는 정신과 의사가 교회와 가정 중에 어느 쪽이 우선적이냐?고 질문하는데, 그때 한국 목사후보생들은 한결같이 교회라고 대답을 하기 때문이다. 미국인들의 관점에서 목사가 자신의 가정을 제대로 돌아보지 않으면서 교회 사역에 치중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일이라고 한다.
저는 이 글을 읽은 후에 이런 질문을 해 보았다. 우리교회가 부목사님을 청빙하기 위하여 면접을 하는데 교회와 가정 중에 어느 쪽이 우선적이냐?고 질문했을 때 부목사님이 뭐라고 대답하기를 원하겠는가? 우리교회는 교회라고 하는 분을 사명감이 투철한 분이라고 생각하여 청빙을 할 것이다. 그런데 미국은 그런 사람을 목사의 자격이 없다고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왜 사명감이 투철한 사람을 목사로 세우지 않는가? 미국교회가 타락해서가 아니다. 목사가 강단에서 설교를 하였다. 그러면 그 설교를 실천할 첫 번째 장소가는 가정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가정에서 말씀대로 살 수 없다면 그 사람은 참된 목사가 될 수 없다는 것이 미국교회가 가진 생각인 것이다. 한국교회는 강단에서 설교 잘하는 사람을 목사로 세우려고 한다면 미국에서는 강단에서 설교를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강단에서 설교한 내용으로 자신의 삶의 영역에서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을 목사로 세우고 있다는 것이다.
여러분 보시기에는 어떤 모습이 목사답다고 생각하는가? 저는 지난 3월 8일 주일설교 때 우리가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는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에 대하여 말씀을 드렸다. 사실 저와 여러분의 최고 관심은 내가 성도로서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 예닮삶 20일 특별새벽기도회 여러분의 기도제목을 보면 기쁨의 삶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늘 기도하며 살게 하여 주옵소서, 감사가 회복되게 하여 주옵소서 하는 내용이 가장 많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기 바란다.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는 것이 일시적인 순간인가? 아니면 늘, 항상인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은 늘 기뻐하고, 감사하고, 감사하는 삶을 살기를 원한다. 그런데 실제 우리의 삶은 늘, 항상이 아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성취되는 때에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한 순간의 기쁨과 감사의 때를 위하여 항상 애쓰고 수고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런데 데살로니가전서는 우리의 삶이 한 순간이 아니라, 늘·항상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을 보는 순간 바로 알 수 있다. 왜냐하면 헬라사람들은 무엇을 강조 할 때 비슷한 말을 반복하는 습관이 있다. 그러면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에서 강조하는 것이 무엇인가? 기쁨, 기도, 감사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을 강조하는 것이다.
왜 이것이 중요한가? 저는 우연히 통일교 문선명 교주에 장남의 부인이었던 홍난숙씨의 고백이라는 동영상을 보게 되었다. 문선명의 큰아들과 결혼한 홍난숙씨는 어릴 때부터 문선명의 가족사진을 보면서 이상적인 가정이다는 생각을 하였다. 잔디밭에 앉아서 온가족이 활짝 웃는 모습이 아름답게 보였던 것이다. 그리고 문선명은 자신은 완벽한 사람이고, 또 완벽한 문선명이 자신의 아내를 선택했기 때문에 그 아내도 완벽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완벽한 문선명 부부가 자녀를 낳았으니 그 자녀들도 다 완벽해 진다고 하였다. 홍난숙씨는 그 가르침에 빠져서 문선명의 큰 아들과 결혼을 하였다.
그런데 문선명의 큰아들인 문효진은 굉장히 문란한 생활을 한다. 코카인을 하고, 마약을 하고, 또 사치와 향락을 누리는 것이다. 그러한 남편에게 하루는 홍난숙씨가 코카인을 끊어라고 했다고 구타를 당했는데, 얼굴에 멍이 드는 정도가 아니라, 당시 5번째 아들을 임신중이었는데, 아들을 죽이겠다고 하여서 두려워 벌벌 떠는 시간을 가져야 했다고 증언하였다. 그러면 문선명이 말하는 그 가족은 완전한 것이 맞는가?
그리고 그 동영상에 아주 재미난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통일교는 문선명이 죽은 후에 가정교회로 이름을 바꿀만큼 가정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래서 통일교에서 가장 큰 죄는 간음죄라고 말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홍난숙씨가 남편의 코카인과 여자관계를 이야기하면 그것은 신적사명이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것은 문선명의 외도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문선명은 새미라는 여자와 외도한 사실에 대하여 전혀 죄책감을 갖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 동영상이 강조하는 것은 문선명이 가르치는 내용과 그의 삶이 다르기 때문에 그는 이단이다고 증명하는 것이다. 지금 이단을 증명하는데 그것이 교리나 가르침의 문제가 아니라, 가르침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문선명은 이단이다고 정의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세상이 이단을 판단하는 기준이다.
그러면 지금 한국의 교회는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정통 종교라는 판단을 받을 수 있는가? 예수님은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였다. 그리고 예수님은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삶을 살았다. 그래서 예수님은 병자를 보면 그들을 고쳐주었고, 또 나사로의 죽음을 보고 슬퍼하는 사람들을 보시면서 함께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과 삶이 일치하는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의 교회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고, 또 그 말씀이 삶으로 나타났는데, 교회는 예수님이 말씀만 가르치고, 그 말씀대로 살지는 않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는 말씀과 삶이 이원화되어져 있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화가 호박이야기이다. 새벽기도를 빠지지 않고 참여하는 권사님이 있었다. 새벽에 일찍이 일어나 교회에 가서 말씀듣고 또 기도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권사님은 교회당에서 집으로 오는 길에 권사님은 찬송을 부르는 것이다. 새벽에 받은 은혜를 기억하면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십자가 짐같은 고생이나~ 하면서 은혜로운 얼굴을 찬송을 하던 권사님은 교회 아랫집에 나 있는 호박을 한덩어리를 뚝 떼어서 집으로 가는 것이다. 그리고 새벽에 기도하였더니 예수님이 아침에 된장국 끓여먹으라고 애호박을 주셨다고 감사기도하며 먹는 것이다.
여러분은 이것이 옛날이야기처럼 들리는가? 오래 전에 이찬수목사님께서 설교 중에 불편함의 영성이라는 말씀을 하였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교회에 올 때 제발 지하철을 타고 와 달라는 것이다. 그래서 추운 겨울이라 걸어오기에 춥고 미끄러워 많이 불편하겠지만, 그러한 불편함을 통하여 예배를 더 사모하는 영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목사님이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어 보였다. 교인들은 은혜받기 위하여 교회로 온다. 그런데 그렇게 은혜받기 위하여 교회에 오면서 차를 가지고 와서 이웃주민들이 차량정체로 불편함을 느끼게 하고, 또 남의 집 앞에 주차를 하여 그 집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한다면 그것이 잘못된 것이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신자는 남의 편안함을 위하여 내가 불편함을 감수하는 모습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것이 예배적 삶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불편함의 영성을 가지고 있는가? 이제 오늘 본문을 읽어보기 바란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하신 마지막 명령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사도적대헌장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무엇을 명령하고 있는가?
(마 28:19-20)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제자를 삼아이다. 왜냐하면 가서, 세례를 베풀고,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분사형이고, 제자를 삼아가 본동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야 하는 것은 제자를 삼으라는 말씀의 의미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가서, 세례를 베풀고,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을 제자를 삼으라는 수단으로 해석을 하였다. 그래서 세례를 베풀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지키게 하므로 제자로 삼는 사역이 제자사역이다고 우리는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무리 세례를 베풀고 말씀을 가르친다고 하여서 그 사람이 제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한 사람이 제자가 되는 복음을 듣고 회개하여 새사람이 될 때 이다. 그리고 교회는 그렇게 회개하여 제자가 된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고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의 정확한 해석은 예수님을 믿고 회개한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고 가르쳐서 그들로 하여금 제자로 살게 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사도들에게 내린 사도적 대헌장이다.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너희는 성도들이 제자된 삶을 살 수 있도록 세례를 베풀고 또 말씀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무슨 말인가? 예수님이 중요하게 여긴 것은 한명의 사람에게 세례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어 세례를 받은 사람이 이제 참된 제자로 살아가기를 원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로 복음을 믿고 회개하여 제자된 저와 여러분은 이제 제자된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문제는 예배의 자리에서나 특별한 상황에서는 굉장히 신실한 제자의 모습을 가진다. 그러나 일상에서는 제자된 모습을 나타내지 못하며 살고 있다. 그런데 신앙인은 특별할 때 한번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신앙인으로 살아야 한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왜 그런지는 이제 영상을 보시기 바란다.
<AIA 생명 -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밥상: 엄마의 밥 5‘ 43’>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하여 외국에서 house keep으로 또 식당웨이터리스로 일을 하면서 공부를 한다. 그러니 가끔씩 가족끼리 식사를 하는 것을 보면 나도 가족과 함께 하고 싶다는 생각도 나고, 또 내가 외국에서 왜 이러고 사나?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학생들이 감동을 받는 장면이 어디였는가? 제작진에서 준비한 밥이었다. 한국에서 먹던 숯가락과 그릇에 담겨져 있는 어머니표 밥이 학생들에게는 감동이 된 것이다. 아마 한국에서 그 밥을 먹을 때는 반찬 투정을 해 가면서 먹었을 것이다. 그러나 외국에서 가장 그리웠던 것은 바로 그 투정하며 먹었던 밥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일 마지막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평범한 일상 어쩌면 가장 소중한 순간일 수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의 신앙생활에 그대로 적용해 보기 바란다. 세상이 우리를 보고 감동을 받는 것은 특별한 날에 작은 선물을 하나주는 것이 아니다. 어머니가 자녀를 위하여 매일 밥을 주는 것처럼 그렇게 매일 힘들고 어렵지만 성도다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할 때 때로는 짜증을 내기도 하고, 비방을 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외국에 있는 자녀들이 어머니의 밥을 그리워하듯이 우리의 성도다운 모습을 그리워하는 때가 반드시 올 것이다. 이제 저와 여러분이 일상 속에서 성도다운 모습을 나타낼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이제 말씀을 맺는다.
어느 목사님이 일터사역 컨퍼런스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였다. 한국기독교인들은 열심이 참 대단해서 식당에 가서도 기도는 목숨처럼 한다. 특히 몇몇 사람과 같이 모이면 반드시 누구 한 사람이 대표 식사 기도한다. 식당 종업원, 식당주인, 밥 먹는 사람들이 다 기도하는 사람을 지켜보면서 저 사람들 교인들이구나! 한다. 그런데 참 안타까운 것은 그렇게 기도를 했으면 그 다음은 예수님이 식당에서 밥을 먹는 것처럼 먹어야 한다. 그렇게 거창하게 나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하고 광고까지 했는데, 고함을 치면서 이야기를 하고, 또 식당종업원을 야단을 치고, 음식에 대하여 투정을 피우면서 밥을 먹는 것이다.
좀 이상하지 않는가? 그런데 이러한 이야기는 한 두 개가 아니다. 어떤 교회에 다니는 집사님은 택배하는 일을 한다. 그러니 어떤 날에는 교회에 택배를 가지고 가기도 하고, 또 어떤 때에는 절에 택배를 가지고 가기도 한다. 자신이 교회를 다니니 교회에 물건을 가지고 갈 때는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간다. 그런데 교회에 물건을 가지고 가면 반갑게 인사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한다. 교회에 어디에 물건을 배달해야 할 지 몰라 물어보면 상냥하게 대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고개로 저리 가세요 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절에 가면 완전히 다르다고 한다. 택배 물건을 가지고 가면 누구에게 묻던지 다 반갑게 인사하고 상냥하고 길 안내도 정말 친절하게 잘 해 준다는 것이다. 그때 집사님은 교회가 이래야 하는데 하는 속상한 생각이 많이 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제자된 모습은 일상에서 나타나야 하는데, 우리는 특별한 장소인 교회에서 또 특별한 시간인 예배시간에만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을 감동시키고,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은 교회에서 예배할 때가 아니라, 일상에서 임을 기억할 수 있기 바란다. 그래서 교회에서 예배하므로 제자됨을 드러내고 있다면, 이제 세상에서는 그 말씀에 순종하므로 참된 제자됨을 드러내어 교회가 참 진리 안에 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복된 삶을 살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첫댓글 말씀처럼평범한일상이나에게가장소중하고값진순간임을기억하고먼저실천하는삶이되길소망 합니다~집에와서가장먼저교회문주가있는지확인했답니다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