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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김씨 시조 김알지는 소호금천(少昊金天)의 후손
역사학은 인간에게 매우 중요한 학문이다.
넓게는 자기가 속한 국가의 정체성이 무엇인가를 알아내는 학문이고, 좁게는 나는 누구인가를 알아가는 자아정체성과 관련을 맺은 학문이다.
나는 누구인가? 내가 누구인지 알려면 나는 어떤 유전자를 물려받은 인간인지를 알아야 한다.
나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한 근본은 무엇인가?
가깝게는 나에게 유전인자를 물려준 아버지와 어머니고, 멀게는 나의 본관 시조(始祖)이다.
대한민국은 부계(父系)와 모계(母系)를 동시에 보면서도 부계를 중심한 사회다.
그리하여 아버지의 성씨를 따르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대한민국 모든 개개인을 어느 성씨고 본관은 어디냐를 주민등록초본에 기록하여 보관하고 있는 것이다.
주민등록초본을 떼어보면 나의 본관이 기록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본관과 어머니의 본관이 기록되어 있다.
우리 사회는 개인의 정체성을 살피는 중요한 하나의 방편으로 본관을 보는 것이다.
본관을 보면 그 사람의 시조는 누구인지, 그가 누구의 자손인지 축척된 일련의 보학(譜學)을 통해 대번에 알 수 있다.
보학이라는 것도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역사학이다.
때문에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는 족보 연구를 통한 보학도 다루고 있는 것이다.
역사를 살펴보면, 고려시대 관직에 오른 사람들은 신첩에 자신의 씨족을 기록해야 했다.
이는 최충과 김원충의 논쟁에서 잘 드러난다.
문종 11년(1057년) 과거에 급제한 이신석이 씨족을 기록하지 않았다 하여 최충이 그가 조정에 오르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 하니
시랑 김원충이 아뢰기를 ‘씨족을 기록하지 않은 것은 부조(父祖)의 실책이며 신석은 한묵의 공을 쌓아 정시에 급제하였고 자신은 허물이 없으니 잠신(고관)의 반열에 들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문종이 제하기를 "현자를 쓰는 것은 밤소가 없는 것이니 그것은 원충의 주청에 의거하라" 하였다.
이 기록은 고려시대 고관들에게는 씨족을 기록한 신첩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따라서 이런 사례로 비추어 볼 때 이미 고려시대 사람들은 자신의 관향과 씨족에 대한 기록을 중시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경주김씨의 시조는 김알지(金閼智)이다.
삼국사기를 보면, 김알지는 탈해이사금 9년(65년)에 시림(始林)에서 황금상자 속에서 발견된 사내아기였으며 탈해왕이 거두어 길렀는데 황금상자에서 나왔다고 하여 성을 김씨로 하였으며 성장하면서 관찰하여 보니 총명하고 지략이 뛰어나 알지(閼智)라고 이름 지어주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김알지는 어디서 왔는가?
김알지는 도대체 누구의 후손인가?
김알지의 선대와 관련한 참고 사료로 경주김씨 김인위의 봉작명,
이자연의 묘지명에 기록된 계림국대부인김씨의 본향, 고려시대 경주김씨 봉작에 나타난 낙랑군호, 수녕옹주김씨묘지명, 이구의 부인 경조김씨 묘지명을 차례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들 사료를 살펴봄으로써 고려시대 사람들의 경주김씨 김알지의 선대에 관한 인식을 판단하여 볼 것이다.
1. 김인위(金因謂)의 봉작명에 나타난 경조현(京兆縣)의 지명
김지우묘지명(金之祐墓誌銘 1152년)에 따르면 김인위(金因謂)는 신라 원성왕의 후손으로 그의 아버지는 태자태보 좌복야(太子太保 左僕射) 김신웅(金信雄)이고 할아버지는 삼한공신 삼중대광(三韓功臣 三重大匡) 김인윤(金仁允)이다.
김인위는 경주김씨 역사상 최고의 명문대족을 이룬 사람으로
그의 세 아들은 김원정(수태위 문하시중), 김원황(병부상서 중추사), 김원충(문하시중, 정종과 문종의 장인)이다.
그리고 그의 큰 딸은 원순숙비로 고려 제 8대 현종의 제 8비(妃)이고 작은 딸은 계림국대부인으로 이자연의 처다.
그의 딸 원순숙비는 처음에 경흥원주(景興院主)라 칭하였으며 1024년(현종 15) 정월에 덕비(德妃)로 책봉되었다. 원순숙비의 자녀로는 뒤에 덕종의 제1비가 된 경성왕후(敬成王后)가 있다.
고려사에 의하면 김인위는 딸이 덕비로 책봉된 1024년 그 해 9월에 상서좌복야 참지정사 주국 경조현 개국남식읍삼백호(尙書左僕射參知政事柱國京兆縣開國男食邑三百戶)에 봉하여졌으며 치사(致仕 관직에서 물러남)하였다.
봉작을 보면 경조현(京兆縣)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고려시대 왕이 하사한 봉작을 살펴보면 봉작을 받는 사람의 관향을 기록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렇다면 김인위의 관향은 경조현(京兆縣)이라는 말이다.
경조현이란 어디를 말하는가?
경조(京兆)란 고려시대 우리나라에는 존재하지 않는 현으로 현재 중국 서안(西安)의 옛 지명이다.
2. 이자연의 묘지명(1061년)에 기록된 계림국대부인김씨의 본향
이자연(李子淵 1003~1061)은 1024년 장원급제로 고려조정에 등장한 인물로 김인위의 사위이다.
그의 세 딸이 모두 문종의 비(妃)가 되었고 수태위문하시중에 올랐다.
이자연의 묘지명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몇 년 전에 일반인에게 공개된 바 있다.
이자연의 묘지명을 보면 김인위의 딸 계림국대부인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공은 낙랑군 경조씨(樂浪郡 京兆氏)를 아내로 맞았는데, 내조하는 부덕(婦德)이 진실로 일대(一代)에 으뜸 갔다. 왕비의 어머니인 까닭에 거듭하여 계림국대부인(雞林國大夫人)이 더해졌다”
김인위의 둘째딸 계림국대부인 김씨의 관향이 낙랑군 경조(樂浪郡 京兆)라는 것이다.
김인위가 현종으로부터 받은 봉작- 상서좌복야참지정사주국경조현개국남식읍삼백호(尙書左僕射參知政事柱國京兆縣開國男食邑三百戶)에 등장하는 그 경조(京兆)라는 지명이 여기서도 등장하는 것이다.
이자연의 묘지명은 계림국대부인이 낙랑군 경조씨(樂浪郡 京兆氏)라고 기록함으로써 경주김씨의 관향 월성-계림보다 더 먼 관향을 밝히고 있다.
낙랑군이 어디인가는 학자들 사이에 논쟁이 계속되고 있지만, 우리는 그 낙랑군이 고려시대 인식으로는 중국의 지명을 의미한다고 판단한다.
이자연의 처 계림국대부인김씨와 그의 아버지 김인위는 국보로 지정된 금산사혜덕왕사진흥탑비(1111년)에도 새겨져 있다.
“외조부(外祖父)의 휘는 ▨▨ ▨▨시랑(▨▨侍郞) 평장사(平章事) (결락) 왕실의 명신(名臣)이며, 충절(忠節)을 지켜 변하지 아니하고, 평탄함과 험난함을 겪어도 마음이 한결 같았다. 밖으로 나간 즉 장군으로서 모(旄)과 장(杖)과 부월(鈇鉞)을 잡아서 사방이 격탁(擊柝)의 근심이 없고, 궐내(闕內)로 들어오면 도(道)로 나라를 다스리는 경륜을 논하며, 만승(萬乘)께서 수상(垂裳)할 한가로운 여가가 있었다. 그의 세가(世家)의 먼 계보(系譜)는 신첩(信牒)에 자세히 갖추어 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어머니는 김씨(金氏)니, 여러 차례에 걸쳐 계림국태부인(鷄林國太夫人)으로 추증(推贈)받았다. 성품은 선천적으로 온유하고 아름다움을 타고 났으며, 장성(長成)해서는 (결락) 부인(婦人)의 사덕(四德)을 갖추어 영광스럽게 공족(公族)의 부인이 되고, 마음은 삼보(三寶)에 귀의하여 법왕(法王)의 제자가 될 아들을 간구하였더니, 과연 부처님의 성응(感應)을 입어 임신하였다”
"그의 세가(世家)의 먼 계보(系譜)는 신첩(信牒)에 자세히 갖추어 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라고 한 것을 볼 때
지금은 알 길이 없지만 혜덕왕사진흥탑비에서 밝히는 대로 김인위의 세가의 먼 계보는 신첩에 자세히 갖추어져 있었을 것이다.
3. 고려시대 경주김씨 봉작에 나타난 낙랑군호
고려 신하 봉작 사례
최지몽(崔知夢) 경종(景宗) 5년 동래군후(東萊郡侯)
최승로(崔承老) 성종(成宗) 7년 청하후(淸河侯)
최항(崔沆) 성종(成宗) 12년 청하현개국자(淸河縣開國子)
한언공(韓彦恭) 목종(穆宗) 4년∼6년 개국후(開國侯)
강감찬(姜邯贊) 현종(顯宗) 10년 천수현개국남(天壽縣開國男)
최사위(崔士威) 현종(顯宗) 10년 청하현개국남(淸河縣開國男)
유방(庾方) 현종(顯宗) 10년 천승현개국남(千乘縣開國男)
채충순(蔡忠順) 현종(顯宗) 10년 제양현개국남(濟陽縣開國男)
주저(周佇) 현종(顯宗) 15 이전 해남현개국남(海南縣開國男)
김인위(金因渭) 현종(顯宗) 15년 경조현개국남(京兆縣開國男)
김맹(金猛) 현종(顯宗) 16년 선춘현개국남(宣春縣開國男)
왕가도((王可道) 현종(顯宗) 20년 개성현개국남(開城縣開國男)
위수여(韋壽餘) 현종(顯宗)3년 강화현개국자(江華縣開國子)
이자연(李子淵) 문종(文宗)代(?) 경원부개국공(慶源郡開國公)
최사추(崔思諏) 예종(4년) 대령군개국후(大寧郡開國侯)
문정(文正) 문종(文宗) 35년 장연현개국백(長淵縣開國伯)
윤관(尹瓘) 예종(睿宗) 3년 영평현개국백(鈴平縣開國伯)
김경용(金景庸) 예종(睿宗) 11년 낙랑군개국후(樂浪郡開國侯)
김연(金緣) 예종(睿宗) 12년 이전 강릉군개국남(江陵郡開國男)
홍관(洪灌) 예종(睿宗) 12년 이전 당성군개국남(唐城郡開國男)
이위(李瑋) 예종(睿宗 )12년 계양군개국백(桂陽郡開國伯)
이자겸(李資謙) 예종(睿宗) 16년 소성군개국백(邵城郡開國伯)
임원후(任元厚) 의종(毅宗) 즉위년 정안후(定安侯)
김부식(金富軾) 의종(毅宗) 즉위년 낙랑군개국후(樂浪郡開國侯)
최충헌(崔忠獻) 희종(熙宗) 1년 진강군개국후(晋康郡開國侯)
최우(崔瑀) 고종(高宗) 21년 진양후(晋陽侯)
최항(崔沆) 고종대(高宗代)(?) 진평공(晋平公)
김준(金俊) 원종(元宗) 6년 해양후(海陽侯)
김방경(金方慶) 충렬왕(忠烈王) 9년 상낙군개국공(上洛郡開國公)
홍군상(洪君祥) 충렬왕(忠烈王) 21년 익성후(益城侯)
고려시대봉작 사례에 경주김씨로 김인위, 김경용, 김부식이 등장한다.
김경용(1041-1125, 문하시중, 수태부 판상서이부사)은 아버지가 김원황이고 할아버지가 김인위이다. 말하자면 김인위의 손자이다.
김경용의 봉작을 보면 관향이 낙랑군이고,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1075~1151, 검교태보 수태위 문하시중 판이부사) 역시 낙랑군이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김인위의 관향- 경조, 김인위의 딸 계림국대부인의 관향-낙랑군 경조, 김인위의 손자 김경용의 관향-낙랑군, 김부식의 관향-낙랑군임을 알 수 있다.
4. 수령옹주김씨묘지명(壽寧翁主 金氏墓誌銘 1335년)에 나타난 소호금천의 후손
수령옹주김씨(1281~1335)는 경순왕의 후손으로 밀직승지 김신(金信)의 딸이다.
14살에 왕족인 왕온(王昷)에게 시집왔는데, 왕온은 현종(顯宗)의 넷째 아들인 평양공(平壤公) 기(基)의 10세손이다.
1335년(충숙왕 복위4)에 55세로 세상을 떠났고, 묘지명은 칙수 장사랑 전요양로개주판관(勅授 將仕郎 前遼陽路盖州判官) 최해(崔瀣)가 지었다.
이 묘지명을 보면 ‘김씨는 세속에 전하기를, 소호금천의 후손이기 때문에 그로 말미암아 성씨를 삼았다라고도 한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수령옹주김씨묘지명을 지은 최해는 이른바 ‘카더라 통신 어법’으로 수녕옹주가 소호금천의 후손이라고 기록하였지만, 뜯어보면 이미 고려시대에 경주김씨 시조 김알지는 소호금천의 후손이라는 말이 광범위하게 퍼져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는 이야기다.
5. 이구의 부인 경조(京兆) 김씨 묘지명(864년)
이 묘지명은 당나라시대에 제작된 묘지명으로 대당고김씨부인묘지명(大唐故金氏夫人墓銘 864년)으로 알려져 있다.
중요한 것은 경조(京兆) 김씨라는 표현이 쓰인 점이다.
이 표현은 이자연의 묘지명에서 보았던 바다.
“공(이자연)은 낙랑군 경조(京兆)씨를 아내로 맞았는데 내조하는 부덕(婦德)이 진실로 일대(一代)에 으뜸갔다. 왕비의 어머니인 까닭에 거듭하여 계림국대부인(雞林國大夫人)이 더해졌다”(이자연의 묘지명)
대당고부인김씨묘지명을 중요하게 보는 것은 이자연의 묘지명에 기록된 경조((京兆)씨라는 그 의미가 선명해지기 때문이다.
대당고부인김씨묘지명에 등장하는 경조김씨와 이자연의 묘지명의 경조씨가 동일 지명이란 점이 분명해진다.
다음은 권덕영 교수가 번역한 이구의 부인 경조(京兆) 김씨 묘지명이다.
『
전(前) 지계양감(知桂陽監)이자 장사랑(將仕郞)이며
시어사(侍御史)와 내봉공(內供奉)인
이구(李구<謬에서 言 대신 王>)의 부인(夫人)인 경조(京兆) 김씨(金氏) 묘지명(墓誌銘)과 그 서문.
향공진사(鄕貢進士) 최희고(崔希古)가 비문을 짓고 한림대조(翰林待詔) 승봉랑(承奉郞)이자 수건주장사(守建州長史)인 동함(董咸)이 묘지문(誌文)과 전액(篆額.묘지명 제목)을 쓰다.
태상천자(太上天子)께서 나라를 태평하게 하시고 집안을 열어 드러내셨으니 이름하여 소호씨금천(少昊氏金天)이라 하니, 이분이 곧 우리 집안이 성씨를 받게 된 세조(世祖)시다. 그 후에 유파가 갈라지고 갈래가 나뉘어 번창하고 빛나서 온천하에 만연하니 이미 그 수효가 많고도 많도다.
먼 조상 이름은 일제(日제<石+單>)시니 흉노 조정에 몸담고 계시다가 서한(西漢)에 투항하시어 무제(武帝) 아래서 벼슬하셨다. 명예와 절개를 중히 여기니 (황제께서) 그를 발탁해 시중(侍中)과 상시(常侍)에 임명하고 투정후(투<禾+宅>亭侯)에 봉하시니, 이후 7대에 걸쳐 벼슬함에 눈부신 활약이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경조군(京兆郡)에 정착하게 되니 이런 일은 사책에 기록되었다. 견주어 그보다 더 클 수 없는 일을 하면 몇 세대 후에 어진 이가 나타난다는 말을 여기서 징험할 수 있다.
한(漢)이 덕을 드러내 보이지 않고 난리가 나서 괴로움을 겪게 되자, 곡식을 싸들고 나라를 떠나 난을 피해 멀리까지 이르렀다. 그러므로 우리 집안은 멀리 떨어진 요동(遼東)에 숨어 살게 되었다.
문선왕(文宣王.공자의 시호)께서 말씀하시기를 "말에는 성실함과 신의가 있어야 하고 행동에는 독실하고 신중함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비록 오랑캐 모습을 했으나 그 도(道)를 역시 행하니, 지금 다시 우리 집안은 요동에서 불이 활활 타오르듯 번성했다.
부인의 증조는 이름이 원득(原得)이시니 황실에서 공부상서(工部尙書)에 추증되셨고, 할아버지는 성함이 충의(忠義)시니 한림대조(翰林待詔) 검교좌산기상시(檢校左散騎常侍) 소부감(少府監) 내중상사(內中尙使)라는 벼슬을 지내셨다. 아버지는 성함이 공량(公亮)이시니 한림대조 장작감승(將作監丞) 충내작판관(充內作判官)을 역임하셨다.
조부께서는 문무의 예리함에 여유가 있어 평자(平子.유명한 천문학자)를 궁구하여 관상(觀象)의 규모를 관찰하셨고, 공수자(公輸子.저명한 기술자)를 궁리하여 신과 같은 기술을 갖추셨다. 이에 기예로 천거받아 금문(金門.황실 혹은 조정)에 들어가 여섯 조정을 섬겨 봉록과 직위를 갖고서 처음부터 끝까지 훌륭한 삶을 살다 아름답게 마치셨다.
(이구의) 전 부인은 농서 이씨로 대대로 벼슬한 든든한 집안 출신이다.
그리고 부인은 판관의 둘째 따님으로 유순하고 곧은 마음은 날 때부터 스스로 그러한 품성이었고, 여성으로서의 일솜씨와 부녀자의 도리는 옛날 일로부터 스스로 힘써 부지런히 배운 바다.
이씨 집안에 시집감에 이르러 중외(中外) 친척들이 모두 현명한 부인이라 일컬었다. 그러나 부인에게는 뒤를 이을 자식이 없어 전 부인이 낳은 세 아들을 기르고 훈육하니 친자식보다 더했다. 장차 선행을 쌓아 넉넉한 보답을 받으려고 기약했으나, 어찌 천명(天命)을 일일이 헤아려 길고 짧음의 운명을 정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연이어 병을 앓아 무당과 편작(扁鵲) 같은 의원도 병을 다스리지 못하다가 함통(咸通) 5년(864) 5월29일 영표(嶺表.지명)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32세다. 단공(端公. 시어사의 별칭으로 여기서는 김씨 부인의 남편)은 지난날의 평생을 추모하여 신체를 그대로 보전하여 산을 넘고 강 건너기를 마치 평평한 땅과 작은 개울 건너듯 하며 어렵고 험함을 피하지 않고 굳은 마음으로 영구(靈柩)를 마주 대하며 마침내 대대로 살던 고향으로 돌아왔다.
맏아들 경현(敬玄)과 둘째 아들 경모(敬謨), 그리고 다음 아들 경원(敬元)은 모두 슬퍼하며 몸과 얼굴이 바짝 여위고, 멀리서 영구를 모시고 따르며 한없이 슬피 울부짖었다.
경현 등이 남은 수명을 겨우 부지하며 삼가 예문을 갖추어 함통 5년 12월7일에 영구를 만년현(萬年縣) 산천현(산<삼수변에 産>川鄕) 상부촌(上傅村)으로 옮겨 대대의 선영(先塋) 묘역에 안장했다.
부인의 숙부는 한림대조로 앞서 소왕부(昭王傅)를 지냈고 친형은 수우청도솔병병조참군(守右淸道率府兵曹參軍)이니 연이어 나란히 조정에 벼슬하며 가문의 업을 이었다.
나 최희고(崔希古)는 부인의 형과 오랜 친구 사이로 죽은 이의 지난 일을 슬퍼하는 글을 짓고 명문(銘文)을 청하므로 이에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하늘과 땅이 인자하지 못하여 도균(陶鈞.부모)보다 먼저 돌아가시니, 누가 옳고 누가 그르며 소원함도 없고 친함도 없도다. 쌓은 선행 누리지 못하고 대명(大命)은 영원하지 않으니, 어찌 그 훌륭함이 오직 뛰어난 성인만이겠는가? 이 짧은 세월을 만나 태산에 노닐고 진령(秦嶺)을 건너 다녔도다. 대도(大道)는 오로지 만물의 변화를 좇아 함께 할 뿐이로다. 』
부산외대 권덕영 교수가 2009년에 우리나라에 소개한 “대당 김씨 부인 묘명(大唐 金氏 夫人 墓銘)”은 1954년 중국 산시성(陝西省) 시안시(西安市) 동쪽 교외 곽가탄(郭家灘)에서 출토되었고, 중국 산시성 시안시(西安市) 비림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묘지명 내용에 따르면 김씨 부인은 증조가 김원득(金原得), 조부가 김충의(金忠義), 아버지가 김공량(金公亮)이며 이구(李구<謬에서 言 대신 王>)라는 사람의 후처로 들어갔다가 사망했다.
권덕영 교수는 또 이 묘지명에서 김씨 부인의 조부로 등장하는 김충의와 부친 김공량이 "모두 기존 문헌을 통해 이미 알려진 재당 신라인이라는 점을 주목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권덕영 교수는 경주김씨가 소호금천씨의 후손이라는 것은 하나의 관념일 뿐이라는 주장을 했는데 묘지명의 기록은 단순한 관념의 기록이 아니라 그 사람의 씨족을 역사적, 사실적 근거를 바탕으로 기록하는 것이 관례이다.
864년에 제작된 묘지명을 현대인의 잣대로 관념적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학자로서 다소 무리가 있다고 본다.
죽은 사람의 묘지명에다 남의 조상을 자기 조상이라고 우길 하등의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소호(少昊)는 오제 가운데 한 사람으로 황제로 즉위했을 때 봉황이 날아왔다고 전해진다.
소호는 청양씨(青陽氏), 금천씨(金天氏), 궁상씨(窮桑氏), 운양씨(雲陽氏), 주선(朱宣)으로도 불린다. 전설에서 성은 기(己), 이름은 철(摰) 또는 질(質)이었으며 황제의 아들이었다고 한다.
몇 개의 사료를 통해 지금까지 살펴본 바 고려시대 경주김씨의 관향은 이자연의 묘지명(1061년)의 낙랑군, 또는 경조라는 것이며, 고려봉작사례에서 보았듯이 고려 조정으로부터 경조 또는 낙랑군임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아 사용하였고, 수녕옹주 김씨 묘지명(1335년)에 나타난 '소호금천의 후손'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대당고부인김씨묘지명(865년)에 새겨진 소호금천의 후손이라는 표현은 신라인으로 당나라에 건너가서 그 문화 속에 살면서 고대중국역사를 통해 소호금천의 후손임을 세밀하게 확인하였던 하나의 결과물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결론적으로 위에서 들었던 몇 가지 근거만 봐도 경주김씨의 관향이 낙랑군 또는 경조라는 인식이 신라시대와 고려시대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자연의 묘지명에 나타난 이자연 처 계림국대부인 김씨를 가리켜 낙랑군 경조씨라고 한 것과, 이구의 부인 경조김씨 묘지명(대당고부인김씨묘지명)에 등장하는 경조 김씨라는 표현이 어떤 의미와 상관관계를 갖는지 역사학적 관점에서 눈여겨 볼 일이다.
2016년 5월 21일
경주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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