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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Eine Sommerreise nach dem Lande der Morgenruhe 1894,
Ernst Von Hesse-Wartegg, Dresden und Leipzig. Verlag von Carl Reissner, 220p,1895.초판
<Korea, Hesse-Wartegg, 1895>는 오스트리아의 작가 겸 여행가인 헤세 바르텍이
1894년 여름에 조선을 방문한 후 1895년 독일에서 독일어로 출간한 조선 여행기입니다.
당시까지 발간된 조선을 소개하는 책은 그리피스의 <코리아, 은둔의 나라 Corea :The Hermit Natiion,1882>와
달레 신부의 <조선천주교사, 1874>가 있으나 직접 조선을 방문하여 쓰여진 것이 아니라서
상당한 오류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헤세 바르텍은 직접 조선을 방문하여 두 책의 묘사들을 현지에서
검토하고 보완하여 이 여행기를 완성하였기에 상당히 신뢰성 높은 정보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특히 헤세 바르텍이 방문한 1894년의 조선은 나라 안밖으로 큼직한 사건들이 연이어 일어난 해였습니다.
1월부터 남부지방에서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고 6월엔 갑오개혁이 실시되고 8월엔 청일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이런 혼란기의 조선을 작가의 눈으로 예민하게 관찰하여 당시의 정황을 묘사해 놓았습니다.
이 독일어판 겉표지를 보면 두가지 눈에 띕니다.
먼저 왼쪽 상단에 태극기가 있는데, 흔히 볼수 없는 1894년 경의 컬러 태극기 모습입니다.
태극문양이 거꾸로 되어 있고 건곤감리 도 섞어 있습니다.
본문에도 '한국의 국기'라며 흑백 태극기가 인쇄되어 있는데 겉표지 것과는 모양이 조금 다릅니다.
겉표지에서 눈에 띄는 것 두번째는 "許世華 高麗"(허세화 고려)라고 하는 한자입니다.
처음에는 별 의미없이 보아 넘겼는데 나중에 보니 자신의 이름 "헤세 바르텍"의 한국식 이름을
지어 보았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글로 적었으면 더 좋았을 것 같으나
당시엔 다들 저렇게 한문으로 이름을 적었을 테니 자신도 그렇게 흉내를 내 본 것 같습니다.
<Korea, Hesse-Wartegg, 1895>에는 120년전의 조선의 모습을 다양한 분야에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풍경과 문화 뿐아니라 정치사회적인 상황, 조선인들의 오락, 여성의 삶, 교육제도와 지리의식,
종교관, 재판절차, 산업과 토산품 등 다양합니다.
그러고 그런 모습들을 사진과 일러스트레이션으로 묘사해 두었습니다.
내용 중의 사진과 일러스트레이션 몇장을 소개합니다.
동래 범어사의 경내 같습니다.
왼쪽은 조선의 왕 고종의 어진이고 오른쪽은 일부에서 명성황후의 모습이라고 알려졌으나
여기서는 'Hofdame'라고 적혀있어 궁녀, 시녀의 뜻이지만
같은 해인 1895년 이태리 판에서는 'Dama di corte'로 적어 궁정의 귀부인의 뜻으로 표현하고 입니다.
결국 이 여인이 명성황후의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고 복장 전문가의 의견이 필요해 보입니다.
La Corea,
E.V. Hesse-Wartegg 저, Ottone Brentari 역, Ulrico Hoepli,Milano, 278p, 1895. 초판
<La Corea, Hesse-Wartegg, 1895>는 헤세 바르텍의 <Korea>의 이태리 번역판이며
역자는 Ottone Brentari 로 그는 헤세 바르텍의 <Korea>의 번역과 함께 청일전쟁과 조선과 이태리와의 관계를
간략하게 저술하여 부록에 실었습니다.
그래서 내용도 독일어 판(220p)보다 조금 길어 289p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표지에 "La Corea e La Guerra Cino-Giapponese" (조선과 청일전쟁)라고 제목을 붙였습니다.
책안에는 37개의 목판 사진이 수록되어 있고 독일판에는 없는 1895년에 제작된 조선의 지도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책의 수록된 그림 중 지도에 관한 내용을 소개합니다.
저자는 조선인의 지리 인식으로 소개하면서 한장의 사진을 보여줍니다.
[글의 출처] 하늘계단
조선, 1894년 여름과 2021년 한국(1)
1894년 조선의 급변하는 대내외 시국상황
<전봉준과 갑오농민전쟁>의 저자 우윤은 이 책에서 1894년 전후의 백성들의 삶과 나라의 국정문란 모습을 이렇게 쓰고 있다. "희망이라곤 털끝만치도 보이지 않는 찢어지는 삶인 줄 아내인들 몰랐을까...... 아내의 삶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아내를 묻는 전봉준은 그저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자신이 미웠고, 아무리 일해도 허리 펼 날 없는 세상이 저주스러웠다. '배 터져 죽는 고루거각(高樓巨閣) 의 양반놈들, 힘없는 농투성이 등쳐먹는 지주놈들, 에이 망할 세상......'"주1 이라면서 "지금 양적(洋賊)이 조선을 침략하여 위로는 나라 정치를 어지럽히고, 아래로는 민중의 생활을 파탄지경에 이르게 하였음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일. 게다가 특히 왜놈은 조선을 삼키려는 야심을 채우기 위해 물불도 가리지 않고 있고, 여기에 지주놈의 착취는 물론이거니와 중앙과 지방의 관리들 조차 덩달아 악랄한 방법으로 갖은 수탈을 다하고 있으니, 우리 조선 인민이 살 길은 떨쳐 일어나서 양적과 섬 오랑캐들을 쫓아내고 외척 민씨 집단을 몰아내는 길뿐이네."주2 라고 했다. "또 민씨들은 감사와 유수(留守)를 해마다 바꾸고 한 달에 한 번씩 인사행정을 단행하면서 그때마다 몰려오는 전국의 부민(富民)들에게 참봉이나 도사(都事), 감역(監役) 등의 벼슬을 팔아넘겼다. 그리고 해마다 10여 차례씩 과거를 실시하고, 기부하는 돈의 액수로 합격 여부를 결정하였다"주3고 했다.
조선 내부는 마치 악성 바이러스가 온몸을 덮어가는 형국이었다. 고종을 비롯한 조정 지도부는 시국에 대처할 재정도 병력도 없었다. 아니 국정을 감당할 능력 자체가 없었다고 함이 더 옳은 표현인 것 같다. 도탄에 빠진 백성들은 스스로 일어나 동학농민전쟁을 일으켰다. 그러자 민비일당은 이번에도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하고 말았다. 벌써 임오군란, 갑신정변에 이어 세 번째다. 일본은 청국이 조선에 파병한다고 통고하자 곧바로 파병을 했다. 결국 조선조정은 호시탐탐 조선 침략의 기회를 노리고 있던 일본군으로 하여금 아무런 장애물 없이 조선에 들어올 수 있는 명분을 제공하고 말았다. 고종이나 민비일당은 갑신정변 후 1885년 청나라와 일본 간에 맺은 텐진조약 내용에 청·일의 군대가 장차 조선에 군대를 파병할 때는 서로 상대국에 알려야 한다는 내용을 간과했거나 무시했다. 이 위정자들의 무능함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다. 이것이 조선의 운명이라면 어쩌랴. 당시 급변해 가는 대내외 시국 상황이 얼마나 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는지 한 번 정리해 보자.주4
ㅇ1893년
-11월 ·전봉준 등이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에 대해 4개 결의 사항의
사발통문을 작성하고 거사일 모색
ㅇ1894년
-1월 ·동학농민운동 발생. 농민군 고부관아 점령(10일)
-2월 ·상해에 피신 중인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을 홍종우가 피격살해.
→ 조정에서 김옥균 시신을 노량진에서 육시처참 효수
-3월 ·농민전쟁 본격 개시-전봉준 등이 전라도 무장에서 창의문(倡義文)
선포 및 농민군 1차 기병(20일)
-4월 ·양호초토사 홍계훈이 지휘하는 조정 최정예군 군산항 도착(6일)
·동학농민군과 전주감영군 간의 황토재 전투(7일) 농민군 승리
·농민전쟁이 충청도, 경상도에 번져 정부의 지방통제 불능상태가 됨
·동학농민군과 조정 최정예군 장성 황룡촌 전투(23일) 농민군 승리
·홍계훈이 조정에 군대증원 요청
·민비정권은 조선주재 통상대신 원세개(위안스카이)에 청군 파병 요청
(원세개는 조선이 청의 종주국임을 강력 주장하며 당시 조선의 외교,통상권을 실질적
으로 장악하고 있었음)
·동학농민군의 전주성 점령(27일)
·청나라 이홍장이 일본에 텐진조약에 따라 조선에 파병사실 통고
-5월 ·청군(1,500여명)의 아산만 상륙(5일)
·청일간에 체결한 텐진조약으로 선전포고를 받은 일본군은 제물포에
상륙(6일)
→ 일본은 제물포에서 한양 사이에 8,000여명의 대군을 포진시킴
·정부군과 동학농민군간에 전주화약(全州和約) 체결(7일)
·조선 정부는 일본이 독단으로 군을 파병한 것에 항의하고 철병 요청
·일본군의 경복궁 불법점령(21일)으로 고종은 일본군의 감시하에 있게
되고, 4대문을 일본군이 완전히 장악함.
·일본 선전포고 없이 아산만 풍도에서 청나라 지원군을 태운 함정 공
격으로 청육군 1,200여명 전사(23일)
·청일간 아산만 부근 성환 전투에서 일본군 압승(28일)
·일본이 양국 공동철수 대신 청나라에 조선의 내정 공동 개혁안 제시
→ 청나라 거절
-6월 ·임오군란 후 12년간 조선 조정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청나라 원세
개 본국으로 도망감
→청의 조선에 대한 실질적인 종주권 및 상권 상실
·조정에 친일내각 수립(25일) 흥선대원군은 섭정, 김홍집은 영의정
·조정에 개혁추진기구인 군국기무사 설치
-7월 ·청국에 대해 일본이 공식적으로 선전포고(1일)
·조선 친일내각은 일본과 '일본군의 진퇴와 식량준비 등 편의제공'을 위한 "조일맹약체결"
-8월 ·청일간의 평양성 전투에서 일본군 승리
·청군·대원군·전봉준연합하여 일본군과 싸우자는 내용의 대원군 편지가 일본공사 오오또리에게 발각
-9월 ·일본해군이 황해전투에서 청국함대 격침 및 황해 제해권 장악
·전봉준 전라도 삼례에서 2차 기병결정(12일) 및 서울진격준비
-10월 ·일본군 청나라에 진격하여 요동반도 상륙
·동학농민군은 일본군·조선관군(연합군)과의 (조일)전쟁 개시
-11월 ·동학농민군, 일본군·조선관군(연합군)과 전투
→공주 우금치 등에서 농민군 대참패(농민군 9,000명 이상 전사)
·일본군이 청나라 여순, 대련 점령하여 요동반도 장악
·동학농민군의 연속된 참패로 전쟁 동력상실
-12월 ·동학농민군 지도자 체포됨. 김개남(1일), 전봉준(2일), 손화중(11일)
→ 동학농민전쟁 사실상 종료
ㅇ1895년
-2월 ·일본군이 산동반도의 웨이하이웨이에 있던 청나라 북양함대 전멸시킴
·청나라 북양함대제독 정여창 항복문서 서명후 자결 및 일본군의 산둥반도 장악
→청일전쟁의 사실상 종결
-3월 ·동학농민군 총대장 전봉준 사형선고(29일)
-4월 ·일본승리로 청나라 이홍장과 일본 이토오 히로부미(이등박문) 간에 시모노세키(하관)조약 체결
·일본은 승전대가로 청나라 1년예산의 2.5배 배상금 보상받고, 요동반도, 대만, 펑후섬 할양받기로
합의
이처럼 1894년 당시 조선의 대내외 정국은 그야말로 백척간두에 서있었다. 고종과 민비일당은 외세에 의존하는 것 외에 아무런 힘이 없었다. 민비를 비롯한 그 척족들의 분탕질로 속절없이 나락에 빠져있었다. 당시 청나라는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 서방세력의 침략으로 제 한 몸 가누기도 힘든 나라였다. 임오군란 때 한번 잘못된 파병 요청의 결과는 그 대가가 너무나 크고 가혹했다. 원세개가 임오군란으로 온 뒤 총리교섭통상대신으로 10여년(1885~1894) 동안이나 조선 조정을 경제적.외교적으로 좌지우지 휘둘러도 누구도 그를 제압하지 못했다. 고종 이하 모든 대신들이 속수무책으로 농락당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백성들의 삶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참담했고 암울했다.
당시 우리나라를 여행하며 현장을 목격했던 외국인이 있었다면 그는 우리를 어떻게 보고 기술했을까? 그가 봤던 모습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와 비교할 수 있는 책이 있다면 얼마나 흥미진진하고 가슴 설레는 일인가? 오스트리아 출신 독일인 헤세 바르텍(1854~1918)이 쓴 <조선, 1894년 여름>주5이 바로 그 책이다. 그는 1894년 6월 말 일본을 거쳐 부산에 도착 후, 배를 타고 제물포로 온 뒤 한강을 따라 용산을 거쳐 한성에 입성했다. 조선을 떠난 날자는 명확지 않으나 1894년 8월에 있었던 청일간의 평양전투를 언급한 것으로 봐서는 최소한 3~4개월은 조선을 여행한 것 같다. 그는 국내에 거주하고 있던 선교사나 외교관 등과 사귀면서 그가 직접 보거나 들은 얘기들을 서술하고 있다. 그는 남유럽, 북아프리카, 캐나다, 미국, 멕시코, 중국, 일본, 태국, 인도 등 세계를 섭렵한 여행가이자 작가이기도 하였다.
※ 이 글은 "조선, 1894년 여름과 2021년 한국(2)"로 계속됩니다.
주1. 전봉준과 갑오농민전쟁 우윤 저 P. 14
주2. 전봉준과 갑오농민전쟁 우윤 저 P. 21
주3. 전봉준과 갑오농민전쟁 우윤 저 P. 83
주4. 한국문화대백과. 전봉준과 갑오농민전쟁 우윤 저외.
주5. 조선, 1894년 여름 헤세 바르텍 저 P. 4~ 5
조선, 1894년 여름과 2021년 한국(2)
서양인이 본 1894년 조선과 2021년의 한국
<조선, 1894년 여름>의 저자 헤세 바르텍은 제물포에 7월 초쯤 도착했는데 "우리 배와 동시에 일본부대 수송선이 도착해 항구는 온통 일본 군인으로 붐볐다. 조선 삼판선의 다수는 일본 깃발을 달고 있었다....... 상륙할 때 나는 일본군 대대들의 긴 행렬을 따라 걸었다."주6 고 했다. 이제 막 청일전쟁이 발발해 긴박했던 때였다. 조선의 요청도 없이 일본군이 일방적으로 쳐들어온 것이다. 그는 조선 패망의 서막을 목격했던 것이다. 이 당시 고종 재위 기간 무려 31년 차. 조선 조정은 스스로 국방력을 키워 나라를 지켜야겠다는 의지도 능력도 없었다. 오직 민비 패거리들의 사리사욕 채우기가 국정보다 우선이었다. 고종은 이를 단호히 척결하지도 못했고 우유부단하기만 했다. 그 오랜 집권 동안 국가경영 차원에서의 어떤 대비책도 국정철학도 비전도 없었다. 나는 당시의 어느 누구보다도 고종 당신에게 그 책임을 묻고 싶다.
저자는 한강을 따라 용산에 도착해서 남대문에 입성하기 전 우리 백성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렇게 적고 있다. "나팔 신호와 함께 무기가 맞부딪히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렸지만, 조선의 농부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점령하고 게다가 왕이 있는 수도를 향해 행군하는 이 오래된 숙적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았다. 하긴 왜 그런 걱정을 하겠는가?...... 조선 정부는 마지막 푼돈까지 쥐어짜고, 쌀과 곡물을 마지막 한 톨까지 빼앗아가지 않았는가? 온 가족이 배를 곯는 것보다 더 비참한 일이 있을까?"주7라고 썼다. 그러면서 "관리들은 조선의 몰락과 이곳에 만연한 비참함의 가장 주요한 원인이다."주8며, "넓은 지구 상에서 조선만큼 백성이 가난하고 불행한 반면 지배층은 거짓되고 범죄적인 곳은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다."주9고 했다. 또 저자는 "현재 조선에서 활보하며 총검과 대포로 수도를 점령하고 있는 일본인들은 이처럼 백성에게 참을 수 없이 되어버린 부실경영이 오직 외세에 의해서만 극복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옳은 말이다."주10고 했다. 파란 눈의 이방인 저자에게도 이러한 국난극복을 위해서는 외세에 의해 극복함이 옳다는데 동의하고 있는 것이다. 조정에 대한 민심이반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웅변하고 있다. 고종 등 위정자들의 국정능력 없음이 외국인의 눈에도 그대로 비춰진 것이다.
한양 시내에 입성 후 "도착한 지 한 시간 뒤 나는... 남산에 올라갔다.... 서울의 집들은 단순하고 황량한 황무지나 다름없다. 땅바닥과 거의 구분이 안 되는 납작한 잿빛 오두막의 초가지붕 1만여 개가 마치 공동묘지의 회색 봉분처럼 다닥다닥 늘어서 있다. 도로도 없고 눈에 띄는 건물이나 사원 또는 궁전도... 없다. "주11고 했다. 또 "공공용지는 오직 길바닥뿐이며, 온갖 오물과 쓰레기 그리고 담장에서 떨어진 조각들은 문 앞에 버려진다. 일고여덟 살이 되도록 발가벗고 돌아다니는 아이들은 길에서도 행인들을 향해 용변을 보는 일이 흔하다. 사람들은 모든 집안일을 길거리에서 처리한다. 밤이 되면 집 앞의 땅바닥에 돗자리를 깔고 잔다."주12고 묘사했다. 초라하기 그지없는 서울 모습과 한여름 우리 선조들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바로 알 수 있는 과거 우리들의 모습이었다.
고종이 있는 경복궁을 보고는 "이 작고 눈에 안 띄는 건물들이 500년 동안 조선을 지배해 왔으며 이 넓은 세계에서 아직까지도 오로지 천자, 즉 베이징에 있는 중국의 황제가 정하는 의전에 둘러싸여 있는 오래된 이씨 왕조의 궁궐인 것이다!...또한 그곳은 끝없는 음모의 무대이자 조선을 예전의 강대함에서 끌어내려 더러움과 가난 그리고 비참함에 빠뜨린 여인과 환관들이 판치는 무대다!"주13라고 썼다. 오직 중국만을 바라볼 뿐 세계정세에 너무나 무지했던 조정을 질타하는 모습이다. 그러면서 나라를 망국으로 이끌고 있는 민비일행의 만행을 꼬집고 있는 것이다.
아, 1894년! 정초부터 터지기 시작한 동학농민운동! 셀 수 없이 억눌리고 착취만 당하던 인고의 세월이 얼마였던가? 민초들의 울분은 용수철처럼 분출되었다. 여행가이자 작가인 저자의 눈에도 국가경영의 부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외세에 의함이 옳다고 비춰진 나라! 부끄럽기 한이 없는 과거의 우리들의 이 자화상을 어쩌랴?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마음은 어디 나뿐이겠는가?
지금은 2021년. 이제야 비로소 그 부끄러움이 조금은 가시는 것 같다. 하늘에 감사하고 우리 스스로에게 감사를 드린다. 일제 식민지 시대를 지나자 반쪽이 된 나라에서 동족상잔의 전쟁을 치르고도, 불과 60여 년 만에 지금의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룬 나라! 지금 그 중심에 바로 우리 세대가 서있다. 70세를 전후한 우리 같은 연령은 산업화와 민주화의 전 과정을 온몸으로 겪어온 세대다. 세계 최빈국의 하나로 1960년대 당시 초등학생들은 점심시간에 미국이 원조해준 옥수수 죽으로 끼니를 때웠다. 이후 우리 국민은 60년대의 새마을 운동, 70년대의 수출 100억 달러 달성, 80년대의 민주화운동 완성, 2000년 전후의 IMF를 극복하며 살아왔다. 이제 우리는 2020년 코로나19 가운데서도 세계 수출 7위주14 및 OECD 기준 GDP 9위주15를 달성한 나라에 살고 있다. 국민이 선거로 대통령을 직접 뽑을 수 있고, 폐할 수도 있는 나라가 되었다. 2021년의 한국은 1894년의 조선이 아니다. 이제 우리에게 1894년과 같은 시행착오란 있을 수 없다. 선출직이든 임명직이든 위정자들은 국민 위에 군림해서도 안되고 할 수도 없다. 언제나 정직하고 국민을 섬기는 자세라야 그 직을 유지할 수 있다. 이제 우리 국민은 그들에게 고종이나 민비 패거리 때처럼 잠깐의 무능할 틈새도 허용하지 않는다. 배는 물이 있어야 뜰 수 있다. 그 물은 바로 우리 국민이다. 주권이 국민에게 있음인 것이다.
아, 1894년부터 지금 2021년까지 그 127년간의 긴 세월! 참담했던 그 암흑의 시대에도 저자 헤세 바르텍은 우리한테서 한 가닥 희망을 보았는지 이렇게 썼다. "하지만 조선인들의 내면에는 훌륭한 본성이 있어서 진정성이 있고 현명한 정부가 주도하는 변화된 상황에서라면, 이들은 아주 짧은 시간에 깜짝 놀랄만한 것을 이루어 낼 것이다"주16고 했다. 저자의 예견대로 우리는 해냈다. 코로나 19가 온 세상을 괴롭히고 있는 요즘이긴 해도 이제 우리는 조금은 자랑스러운 나라에 살고 있음을 실감한다. 그러나 자긍심은 갖되 자만은 버려야 한다. 우리는 언제나 낮은 자세로 겸손하고 또 겸손해야 한다. 고종과 민비일당들의 과거 적폐가 현재 우리의 훌륭한 반면교사 됨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저자는 온갖 부조리와 진흙탕의 세상에서도 섬세하고 예리한 관찰력으로 우리에게 희망을 품어주었다. 저자에게 진심 어린 존경과 감사를 드리면서 이 글을 바친다.
주6. 조선, 1894년 여름. 헤세-바르텍 저 P. 49
주7. 조선, 1894년 여름. 헤세-바르텍 저 P. 75~76
주8 조선, 1894년 여름. 헤세-바르텍 저 P.88
주9. 조선, 1894년 여름. 헤세-바르텍 저 P. 109
주10. 조선, 1894년 여름. 헤세-바르텍 저 P.153
주11. 조선, 1894년 여름. 헤세-바르텍 저 P.77
주12. 조선, 1894년 여름. 헤세-바르텍 저 P.84~85
주13. 조선, 1894년 여름. 헤세-바르텍 저 P.81
주14. 연합뉴스.. 한국, 작년수출 5.5% 줄었지만 7위 수출대국 지켰다. (2021.2.28)
주15 연합뉴스. 한국경제, 코로나 국면서 세계 10위 탈환..첫9위도 가능?(2021.3.15)
주16. 조선, 1894년 여름. 헤세-바르텍 저 P.232
[글의 출처] 팔당호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