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코피에프의 바이올린 협주곡 제1, 2번
21세기 서양음악사에서 가장 중요한 작곡가의 한 사람으로 평가되는 러시아 출신의 작곡가 프로코피에프(Segey Prokofief,1891∼1953)는 대단히 뛰어난 피아니스트이기도 하였다. 때문에 그의 피아노 작품들, 특히 5곡의 피아노 협주곡은 한결같이 시적(詩的) 분위기와 혁신적인 연주기교를 반영하고 있어서 20세기에 만들어진 가장 주목받는 협주곡으로 인식될 정도이다. 그런데, 이에 반해서 그의 2곡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로맨티스트의 협주곡처럼 여전히 서정적이고 선율적인 성격이어서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물론 바이얼린 협주곡에서도 프로코피에프는 대가적인 기교를 요구하고 있지만 근본적인 속성은 다분히 전통적인 내용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2곡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20년이라는 시간적 간격을 갖고 작곡되었다. 따라서 음악적 접근 방법에서도 뚜렷한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제 1번 라장조 작품 19는 1917년(26세)에 페테르그라드 음악원의 바이얼리니스트 파울 호찬스키(Paul Kochansky)교수의 협조를 받으면서 작곡되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18년에 조국을 떠나 망명길에 올랐기 때문에 초연은 1923년, 파리에서 비로소 이루어졌다. '고전적 교향곡' 으로 불려지는 교향곡 제 1번과 비슷한 시기에 작곡된 이 협주곡 역시 전형적인 고전적 양식에 의해서 작곡되었다. 따라서 대중적 친화력이라는 측면에서 이 협주곡은 아주 유리한 작품이고, 역시 연주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독주자에게는 거의 모험적일 만큼 뛰어난 기교를 요구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바이얼린으로 표현이 가능한 거의 모든 기교가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뛰어난 선율성을 유지하고 있다.
제 2번 사 장조 작품 63도 풍요로운 선율성이라는 측면에서는 제 1번과 흡사한 작품이다. 1935년의 작품이며 원곡(原曲)은 바이얼린 소나타이다. 프로코피에프는 이 작품을 완성한 이듬해에 다시 조국으로 돌아간다. 따라서 이 작품엔 작곡가가 겪은 격변의 시대가 반영되어 있다. '양식의 단순화'가 그것의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 역시 대단히 열정적이고 로맨틱하다. 특히, 제 1악장과 2악장이 그런 성격인데 발레 음악인 <로미오와 줄리엣>과도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그러나 제 3악장은 매우 리드미컬한 악곡이어서 근대 작곡가로서의 프로코피에프의 개성이 엿보이는 부분이다.
레오니드 코간 (Leonid Kogan 1924~1982)
레오니드 보리소비치 코간은 1924년 우크라이나의 소읍인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의 유태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사진기사였다. 레오니드의 부친은 슬라브계 유태인이 흔히 그렇듯 취미로 바이올린을 즐겼다. 어릴 적의 레오니드는 아버지의 바이올린 소리를 매우 좋아해서, 아버지의 바이올린을 곁에 놓지 않고서는 잠을 자지 않겠다고 고집할 정도였다. 레오니드가 다섯 살이 되자 부모는 ‘아이에게 맞는 크기의 바이올린을 사주고 제대로 배워보게 하자’는 데 뜻을 모았다. 첫 번째 스승은 저명한 바이올리니스트 아우어의 제자였던 필립 얌폴스키였다. 어린 레오니드는 두 번 레슨을 받고는 참을성이 바닥나 그만 둘 뻔 했지만 매일 몇 분씩 마음을 풀고 바이올린을 잡은 결과 다시 ‘바이올린이 좋아’라는 느낌이 되살아나게 됐다.
이 무렵 레오니드는 처음 청중을 대면한 연주를 갖게 되는데, 이 연주가 매우 인상적이었는지 스승과 가족들은 그가 모스크바로 옮겨 수업을 받아야 한다는 데 의견일치를 보게 된다. 레오니드가 열 살 때 가족은 모스크바로 이주했고, 필립 얌폴스키와 마찬가지로 아우어의 문하생이었지만 훨씬 명망높던 아브람 얌폴스키로부터 수업을 받게 된다(‘필립’ 얌폴스키와 새 스승 ‘아브람’ 얌폴스키는 아무런 인척관계도 아니었다). 레오니드가 열두 살 때 그의 인생에 새로운 전기가 찾아온다. 당대의 대 현악 거장 자크 티보가 모스크바를 방문한 것이다. 티보는 코간의 연주를 듣고 감명받은 나머지 “이 아이는 훌륭한 연주가가 될 것으로 확신합니다”라는 예언을 남긴다. 그렇지 않아도 레오니드의 빠른 성장을 눈여겨보고 있던 얌폴스키는 티보의 확언에 고무돼 이 제자를 키우는 데 전력을 쏟기로 마음먹고 자기 집에 유숙시킨다. 얌폴스키는 당연히 기존의 정규적 과정 외에 과외 시간을 들여 레오니드를 가르쳤고, 눈부신 성장이 뒤따랐다.
“나는 매일 스케일을 연습했습니다. 어린 나에게는 그것이 먹고 자고 이닦는 것만큼이나 필수적인 것으로 여겨졌죠”라고 그는 훗날 회상한다. 한 시간을 연습한다고 하면 그는 30분은 스케일 연습에, 나머지 30분은 연습곡을 익히는 데 보낼 만큼 그의 스케일 연습에는 유별난 데가 있었다. “항상 4옥타브의 넓은 스케일을 연습했죠. 왜냐하면 마지막 네 번째 옥타브야말로 바이올리니스트가 높은 성부에서 손가락을 자유롭게 놀릴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입니다. 지판(指板)에서 가장 높은 포지션을 흠없이 연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는 후일에도 높은 음역에서의 옥타브 연습을 강조했다. 그가 스케일 연습을 중요하게 평가한 이유는 그런 연습이 최고음부터 최저음까지를 균등하게, 끊어지는 느낌 없이 연주할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었다. 쓸고 닦아낸 듯 정교하다고 평가되는 그의 왼손 기교는 이런 끊임없는 스케일 연습에 힘입은 바 컸다. 이런 정교함은 나아가 프레이징의 자연스러움, 박자와 강약배분의 절묘함으로 이어졌다. 이 때문에 훗날 그가 동서를 막론한 바이올린 계의 최고 테크니션 중 하나로 우뚝 서게 된 것이다. 장성해서 그의 코스는 당연히 모스크바 중앙음악학교를 거쳐 모스크바 음악원이었다. 오로지 음악영재를 위한 중앙음악학교의 교육과정은 전반적으로 모자람 없는 전인교육에다 집중적인 음악교육을 더한 꽤 부담스러울 만한 것이었다.
오이스트라흐의 따뜻함, 코간의 차가움, 둘의 만남
청년 바이올리니스트 레오니드 코간의 첫 연주회는 17세 때 열렸다. 그는 모스크바 음악원의 대공연장인 모스크바 필하모닉 홀에서 브람스의 협주곡을 협연했다. 이 연주회의 성공에 따라 학생 신분으로 드넓은 소련 제국을 순회연주하는 영예까지 누렸지만, 그의 부모는 연주회수 제한을 고집함으로써 아들이 계속해서 기교를 닦을 수 있는 시간을 보장했다. 연주여행 대신 소비에트의 국가시책에 따라 콩쿠르 파견이 계속됐다. 첫 영예는 프라하 세계 청년축전에서의 1등상으로 찾아왔다. 그 다음번의 영예는 파급효과가 훨씬 컸다.
1951년, 27세 때 ‘콩쿠르 중의 콩쿠르’로 불리는 벨기에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대상을 차지한 것이다. 그가 연주한 파가니니의 협주곡 1번은 심사위원과 청중들에게 경이롭게 받아들여졌다. 놀라운 기교적 성취 외에 고전적인 열정이 연주회장을 휘어잡았다. 코간 보다 16년 연상으로 심사위원에 포함돼 있던 다비드 오이스트라흐는 결과 발표에 앞서 자국의 기자들 앞에서 이렇게 기세를 올렸다. “음악계에서 우리 위치는 확고합니다. 보시다시피 우리 나라의 젊은 연주가들이 뛰어난 연주를 펼쳤습니다. 누구보다도 레오니아(레오니드의 애칭)가 으뜸이었고, 그 다음에 미샤(바이올리니스트 미하일 와이먼)를 꼽아야 하겠죠. 이 두 사람은 적수가 없는 연주를 펼쳤습니다. 이 두 사람이 1, 2등 상을 휩쓸 것으로 확신합니다.” 그의 예상은 정확했다.
곧 이어 오이스트라흐와 코간은 러시아의 유태계 바이올린 연주를 대표하는 양대 거장으로 자리잡게 된다. 그럼에도 요즘 유행하는 말처럼 ‘작은 차이가 큰 차이를’ 만들게 됐다. 오이스트라흐의 이름은 소비에트의 권부에 의해 유용한 선전문안으로 자리잡았다. 서방세계에 자국 예술의 우수성을 선전하는 데 있어서 오이스트라흐의 이름은 항상 맨 앞에 꼽혔다. 반면 코간은 그의 활동상 만큼 자주 ‘선전에 이용되지 않았다. ‘단순 반복’을 최우선으로 하는 선전술의 기법상 바이올린 한 분야에 여러 사람의 이름을 거명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코간 자체가 여러 사람의 앞에 나서기를 꺼리는 성격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두 인물의 관계에 질투심이라던가 적의의 빛은 찾아볼 수 없다. 두 사람은 평생 절친한 친구였으며 코간 자신이 오이스트라흐의 수업을 찾아가거나 공연을 관람하기도 했다.
반면 오이스트라흐는 반 세대가 넘는 나이차에도 불구하고 코간을 동등한 동료로 대우해주었다. 코간이 ‘따스함과 정열’로 상징되는 오이스트라흐의 연주를 주저없이 찬양했음은 물론이다. 코간이 찬양했던 또 한 명의 바이올리니스트는 하이페츠였다. 하이페츠의 연주를 회상할 때 코간은 “나는 그의 연주회를 빠짐없이 들었고 그의 한 음 한 음을 정확히 회상할 수 있다. 그는 내게 연주가의 이상으로 받아들여졌다”고 말했다. 요제프 시게티 역시 그에게 큰 영감을 준 바이올리니스트였다. 시게티의 연주회를 관람한 뒤 그는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당신의 한 걸음 한 걸음을 지금부터 뒤쫓아가기로 결심했습니다. 정말로 어려운 일이겠지만….” 하이페츠와 시게티. 코간이 주저없이 찬양한 이 둘의 바이올리니즘에서 그의 연주를 이해하는 몇 가지 단서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코간의 연주에는 확고한 기교적 자신감을 가지고 밀어붙이는 하이페츠적 ‘공격성’, 혹은 다이나미즘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나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코간이 가진 음색의 서늘함이다. 비브라토는 순수했고, 음량은 컸지만 뜨겁다기보다는 오히려 차갑게 빛나며 은은한 노래를 들려주었다. 이 점은 시게티와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노래’는 시게티보다 분명 현대적이었다. 고역에서 얇아지지 않았고 저역에서 물러지지 않아 어느 음역에서나 분명하고 매끈한 톤을 유지했다. 브뤼셀의 영광이 있던 시절로 되돌아가보자. 1952년 그는 모스크바 음악원 강단에 섰고, 1955년에는 파리와 런던에서 청중의 영광적인 기다림 앞에 서게 된다.
1958년 보스턴 교향악단과의 협연에서는 브람스의 협주곡을 연주해 20분이나 되는 열광적인 커튼콜을 받음으로써 미국 청중들의 확고한 지지를 확인받았다. 1963년에는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수로 정식 취임했다. ‘사진사의 아들’은 저명한 피아니스트 에밀 길렐스의 누이인 엘리자베타 길렐스와 결혼해 세계적 음악명가의 중요한 구성원이 됐다. 훗날 그의 아들 파벨 코간이 지휘자로 명성을 날리게 된 데다 딸 니나마저 피아니스트 대열에 오름으로써 이 ‘음악가계’는 더욱 확고해졌다. 오늘날에는 손자 드미트리도 바이올리니스트로 커리어를 쌓아가고 있다.
소비에트의 대표적 음악가로서 그가 몰두한 또 하나의 활동은 실내악이었다.처음에는 에밀 길렐스 및 로스트로포비치와 3중주를 형성함으로써 명성을 누렸다. 그는 베토벤 ‘대공’ 트리오, 차이코프스키의 3중주 등을 차례로 녹음해 팬들을 열광시켰다. 그러나 곧 터무니없는 사건이 발생했다. 로스트로포비치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해 KGB에 보낸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와의 관계가 와해되고 만 것이다. 폭압 감시정치가 낳은 어처구니없는 아픔이었다. 필자는 지난달 만난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에게 이 이야기를 물어보았다. “그 얘기는 나도 들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감시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어요. 나도 KGB의 보고서를 작성한 적 있는걸요. 미주알 고주알 상대방에 대한 것을 다 쓰되 정부에 찍힐 만한 말은 쏙 빼놓으면 그만 이죠….” 그의 대답이었다.
그가 만년에 얻은 가장 큰 영예는 1976년 그를 국제무대에 끌어들인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의 심사위원을 맡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만년의 결실을 기다리기에 앞서 죽음의 신이 먼저 그를 찾았다. 순환기 장애로 시달려왔으면서도 정밀 진단을 미뤄온 탓이었다. 1982년 12월, 빈 공연을 마친 이틀 뒤, 그는 기차 속에서 돌연 숨을 거두었다. 58세의 아까운 나이. 병명은 심장마비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