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핵전쟁 위기
세르히 플로히 지음, 허승철 옮김, 2022 삼인
“물러나는 용기를 가졌던 사람들에게”
어느 순간에라도 절단될 수 있는 아주 가느다란 실에 매달린, 핵의 다모클레스 칼 아래 살고 있다. - 존 F. 케네디, 1961년 9월
물론 나는 무서웠다. 무섭지 않았다는 건 미친 소리다. 나는 우리나라를 비롯한 전 세계가 핵전쟁에 파괴될 때 일어날 수 있는 일에 대해 겁먹었다. 겁먹었다는 것이 내가 이 미친 짓이 일어나지 않는 데 기여 했다는 것을 뜻한다면 나는 내가 겁먹었다는 것에 기쁘다. 오늘날 세계의 문제 중 하나는 핵전쟁의 위험에 충분히 겁먹는 사람들이 별로 많지 않다는 것이다. - 니키타 흐루쇼프, 1962년 12월.
들어가는 말
‘탄도미사일이 하와이로 날아오고 있습니다. 즉시 방공호로 대피하십시오. 이것은 훈련 상황이 아닙니다.’ 2018년 1월 13일 아침 수만 명의 하와이 주민들이 받은 문자메시지는 이러했다. “첫 번째 본능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무슨 일인지 알아보는 것이었죠”라고 마노아 소재 하와이대학 2학년생인 축구 선수였던 스물한 살의 루크 클레먼츠Luke Clements는 회고했다. 클레먼츠가 임시 피신처로 찾은 지하 강의실은 순식간에 사람들로 꽉 찼다. 몇 사람은 문을 닫으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족히 10분간은 아무런 규칙이 없었습니다. 모두 함께 살아남으려고 했어요. 고요한 혼돈이었죠”라고 클레먼츠는 회고했다.
그 메시지는 잘못된 경고라는 것이 밝혀졌다. 후에 정부 당국은 누군가 ‘버튼을 잘못’ 눌렀다고 해명했다. 실제 이야기는 훨씬 복잡했다. 실수를 저지른 관리는 비상민방위국의 10년 베테랑이었고, 버튼 하나가 아니라 두 개를 다 누르는 바람에 하와이주 전체를 공포에 몰아넣은 실제 경보가 발해진 것이었다. 클레먼츠와 동급생들, 하와이 주민의 상당수로 하여금 존재하지 않는 방공호를 찾아 헤매다가 결국 건물 지하실로 대피하게 만든 미사일 공격 경보는 난데없이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하와이 당국은 2017년 12월, 30년 만에 처음으로 민방위 경보장치를 시험하기 시작했다. 그 바로 전의 시험은 1987년에 있었다.
2017년 비밀에 가려진 34세의 북한 지도자 김정은은 미국과 국제사회에 항거하며 미국 독립기념일인 7월 4일을 골라 알래스카까지 도달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을 시험 발사했다. 얼마 후 김정은은 북한이 자국 미사일로 세계 어디든지 타격할 수 있는 “완전한 핵보유국(full-fledged nuclear power)”이라고 선언했다. 2017년 10월 북한 언론이 수소폭탄 실험을 발표하자 미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는 “북한을 완전히 파괴하겠다”고 위협했다. 트럼프는 “로켓맨(김정은)은 자신과 정권에 자살 특공 임무를 행하고 있다”고 선언했다. 김정은은 트럼프를 “정신 나간 늙은이”라고 되 받아쳤다. 2018년 5월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의 핵무기 개발을 막은 다자 합의를 파기했다. 2020년 1월 이란도 이 합의 파기를 선언하여 이란의 신속한 핵전력 개발에 대한 우려를 야기했다.
냉전(cold War) 종식 후 미국이 최악의 핵 위기(nuclear crisis)를 경험하면서 지나간 역사가 갑자기 현재가 되었다. 2017년 8월 두 명의 영향력 있는 논평가가 한목소리로 김정은의 핵무기와 미사일 개발을 둘러싼 미국과 북한 간 대치는 쿠바 미사일 위기 이후 세계를 강타할 최악의 핵 위기라고 논평했다. 그중 한 사람은 공화당원으로 미래에 트럼프 대통령의 국가안보보좌관이 될 존 볼턴John Bolton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민주당원으로 과거에 클린턴Bill Clinton 정부에서 백악관 비서실장, 오바마Barack Obama 정부에서 CIA 국장과 국방부 장관을 역임한 리언 패네타Leon Edward Panetta였다. 2019년 2월 블라디미르 푸틴Vladimir Putin도 이 논쟁에 가세하여, 자신이 새로운 쿠바 미사일 위기 상황에 이미 준비되어 있다고 선언하면서, 미국 해안을 공격할 함정과 잠수함 장착용 초음속 로켓을 가지고 위협했다. 그는 2020년 2월에도 같은 발언을 반복했다. 한 달 전인 2020년 1월 미국이 이란의 비밀 핵무기 개발자인 가셈 솔레이마니Qasem Soleimani를 암살하고 테헤란 당국이 핵 합의를 완전히 파기한다고 발표한 이후, 미국 언론은 트럼프 대통령의 핵 도박을 케네디John F. Kennedy 대통령의 쿠바 미사일 위기 때의 행동과 비교했다.
쿠바 미사일 위기를 언급하는 관행은 세계 정치 무대나 언론에서 금방 사라질 것 같지 않다. 핵무기가 국제정치의 중심 무대에 복귀한 것은 불가피하게, 쿠바에서의 핵 대치에 대한 기억을 다시 불러왔다. 우리는 쿠바 미사일 위기를 다시 검토함으로써 새로운 핵 대결의 출현을 막거나, 최소한 핵전쟁 없이 이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책에서 나는 이 위기를 만들어내고 또 이를 해결한 사람들의 경험에서 배울 것이 실제로 많다는 것을 논증하겠다. 그 역사로 다시 돌아가 보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전 세계가 1950년대와 1960년대 초를 특징지었던 핵무기 벼랑끝전술(brinkmanship)로 다시 빠져들고 있는 상황에서 새로운 세대에게 오늘날 세계의 불확실성을 설명하는 한 방법으로 그 시기의 극적인 사건에 대해 가르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쿠바 미사일 위기의 역사를 다룬 자료는 엄청나게 많지만, 나는 이 위기를 미국만의 문제가 아닌 국제적 문제로 보도하는 것과 이해하는 것 양쪽 모두에 커다란 구멍이 있음을 이제 보여 주겠다. 이 위기의 역사에 대한 심층 분석은 1960년대에 로버트 케네디Robert Kennedy의 [13일: 쿠바 미사일 위기 회고록(Thirteen Days: A Memoir of the Cuban Missile Crisis)으로 시작되었다. 이 책은 여전히 많이 읽히고 있다. 그러나 케네디 대통령이 비밀리에 녹음하고 아마도 그의 동생이 저술에 활용한 엑스컴ExCom(쿠바 미사일 위기 동안 소집된 국가안보회의 실행위원회) 녹음 파일이 일반에게 공개되면서 당시 정책 결정 과정에 대한 많은 기존의 ‘진실’에 질문이 제기되었다. 이후에 나온 연구들은 로버트 케네디의 설명이 종종 자기중심적이고, 딘 러스크Dean Rusk 국무장관이나 린든 존슨Lyndon Johnson 부통령 같은 당시 그의 정적과 경쟁자들이 이 위기에서 수행한 역할에 대해 정확하게 서술하지 않았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최근과 지난 몇십 년간 쿠바 미사일 위기를 다룬 학술적, 대중적 연구가 얼마나 많이 집필되고 출판되었는지와 상관없이 지배적인 담론은 변하지 않았다. 즉 존 케네디가 전혀 움츠러들지 않았고, 최측근 참모들이 관여한 의사 결정 과정 덕분에 소련의 의도와 역량에 대해 올바른 전제를 취하고 올바른 결론을 내리도록 이끌어 결국 위기를 해결했다는 것이다. 나는 쿠바 미사일 위기를 재구성하고 이해하기 위해 이전에 사람들이 거의 가보지 않은 길을 택해 이 기존의 담론에 도전한다. 이 위기에서 핵심 인물들과 관료들이 올바른 일을 했던 순간을 포착하고, 이들이 어떻게 맞는 결정을 내렸는지 밝히는 대신, 나는 이들이 일을 그르친 수많은 상황을 고려할 것이다.
이 책에서 내가 보여주는 것처럼 케네디와 흐루쇼프 둘 다 연속으로 실수를 저지르는 행진을 했다. 이것은 이념적 자만과 너무 앞서간 정치 의제에서부터, 상대의 지전략적(geostrategic) 목표와 의도에 대한 오독, 인재 부족에 뒤따르게 마련인 판단 실수, 문화적 오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요인에 의해 일어난 일이다.
케네디는 흐루쇼프의 동기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베를린을 둘러싼 핵 위기에 대한 우려로 진이 빠진 상태였다. 케네디는 쿠바에 있는 소련군 숫자와 핵전력을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쿠바의 소련 미사일에 대한 공격을 제안했다. 케네디의 결연한 반응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흐루쇼프는 처음에는 충격받았고, 다음으로는 가급적 빨리 위기를 해결하려는 자신의 바람을 전달하는 데 애를 먹었다. 흐루쇼프는 주도권을 잃었고, 결국 쿠바에 있는 소련군의 통제권을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에게 잃었다. 카스트로는 쉽게 충격받는 경향이 강했고 미국인들과의 싸움에 열의를 가졌던 인물이었다.
나는 케네디, 흐루쇼프, 이들의 참모들과 부하들이 저지른 실수를 찾기 위해 최근 공개된 KGB 문서를 비롯한 사료를 검토하면서 무엇이 핵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막았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엄청나게 많은 것이−어쩌면 지나치게 많은 것이− 배경, 정치적 지향, 이념적 관점, 통치 스타일에서 극명하게 다른 지도자들의 결정에 달려 있었다. 그러나 내가 이 책에서 논증하는 것처럼, 두 사람은 결정적이라고 드러난 한 가지를 공유하고 있었다. 그것은 핵전쟁에 대한 공포였다. 케네디와 흐루쇼프 모두 핵무기를 두려워하고, 이것을 사용한다는 생각 자체를 무서워했기 때문에 쿠바 미사일 위기는 전쟁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쿠바의 소련 미사일을 선제공격하려던 케네디는 이 미사일이 발사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안 다음 해상봉쇄로 돌아섰다. 처음에는 핵미사일을 이용해 쿠바에 대한 미국의 공격을 막으려고 했던 흐루쇼프는 해상봉쇄 전개 사실을 안 다음 소련 선박들을 회항하게 했고, 핵무기 탑재 미국 전략폭격기들이 비상 상태에 돌입한 것을 안 다음 소련 미사일을 쿠바에서 철수 시켰다. 모스크바의 재가 없이 미국의 U-2기가 쿠바 상공에서 격추된 사실에 나타나듯이 지상과 공중에서 통제권을 상실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두 지도자는 터키에 배치된 미국 미사일에 대해 서둘러 타협했다. 후에 흐루쇼프는 또 다른 위기와 잠재적인 전쟁을 피하기 위해, 미국이 인지하지 못했던 핵무기도 쿠바에서 철수시켰다.
케네디, 흐루쇼프, 당시의 세계 지도자와 시민들 세대는 1954년 미국의 캐슬 브라보Castle Bravo 수소폭탄 실험과 1961년 소련의 차르 봄바Tsar Bomba 실험으로 입증된 믿을 수 없는 파괴력을 보았을 뿐 아니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의 그늘에서 청년기를 보냈다. 그 세대는 원자폭탄과 특히 수소폭탄이 자국과 인류 전체를 파괴할 수 있다는 것을 통렬히 인식하고 있었다. 이 책에 기술된 두 지도자의 모든 행보는 핵무기 사용에 대한 이들의 두려움에 의해 결정되었다. 오늘날의 세계 지도자들이 1962년 케네디와 흐루쇼프보다 핵무기와 핵전쟁에 대해 더 무신경한 태도를 취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대부분의 세계 시민들이 알지 못하는 가운데 세계는 2019년 8월 2일 새로운 위험 시대에 들어섰다. 그날 3만 개의 핵탄두를 소유한,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핵보유국인 미국과 러시아는 1987년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과 미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가 서명한 중거리핵전력조약 탈퇴를 선언했다. 당시 이 조약은 냉전 시대의 마지막 무기 통제 합의로 유지되고 있었다. 이제 우리는 공식적으로 규제 없는 핵무기 경쟁이 시작되는 시점에 있다. 레이건-고르바초프 합의가 파기된 지 일주일도 지나지 않은 8월 8일에 이것은 분명해졌다. 스카이폴Skyfall이란 암호명을 가진 핵무장을 한 핵 추진 러시아 크루즈미사일의 원자로가 바렌츠해에서 폭발하면서 다섯 명의 러시아 과학자들과 해군 장교들이 사망하고, 러시아 아르한겔스크 지역의 대기와 수역이 오염되었다. 푸틴 대통령이 1년 전 공표한 영상에서 보여주었듯 스카이폴의 궁극적 목표는 미국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것을 일부 저자들은 ‘두 번째 핵 시대’의 도래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현재 더 많은 국가들이 적국을 핵무기로 위협하고 있고, 냉전 초기에 체득된 핵무기에 대한 두려움이 상당히 둔감해졌기 때문에 우리는 냉전 시대보다 더 위험하고 더 예측할 수 없는 시대를 살고 있다. 우리는 과거의 교훈을 잊어버렸다. 작금의 핵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해 우리는 그 교훈을 다시 배워야 한다.
프롤로그
로버트 맥나마라Robert McNamara는 자신이 지금 막 들은 말을 믿을 수 없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증인에 따르면 그는 뉴스를 들은 후 “몸을 지탱하기 위해 테이블을 붙잡아야만 했다.” 때는 1992년 1월 9일, 존 F. 케네디 정부와 린든 B. 존슨 정부의 국방장관이었던 75세의 맥나마라는 쿠바 미사일 위기의 핵심 참여자로 쿠바의 아바나에서 열리는 학술대회에 참가하고 있었다.
이 회의에는 피델 카스트로를 포함해서 미국, 쿠바, 이제 막 해체된 소련의 당시 위기에서 핵심 역할을 수행했던 참가자들이 모여 있었다. 충격적인 발언을 한 사람은 전 바르샤바조약군 사령군이자, 1962년 쿠바 군작전 핵심 수립자 중 한 사람이었던 아나톨리 그립코프Anatoly Gribkow 장군이었다. 맥나마라를 경악시킨 것은 1962년 봄과 여름 소련이 4만 3천 명의 병력을 쿠바에 배치했었다는 그립코프의 증언이었다. 맥나마라와 그의 군사 참모들은 쿠바에 1만 명 미만의 소련군이 있다고 확신했었다. 이것이 쿠바의 소련 기지를 공격하고 쿠바를 침공할지 결정하는 근거로 삼은 숫자였다.
그러나 이것은 그를 경악시킨 첫 폭로에 불과했다. 그립코프는 엄청난 병력 집중, 대공화기, 폭격기, 핵탄두를 장착하고 미국을 타격할 수 있는 중거리 미사일 외에도 소련은 쿠바에 미국이 전혀 알지 못하는 전술핵무기를 배치하고 있었다고 차분히 진술했다. 6기의 루나Luna(미국명 프로그Frog)미사일 발사대에 핵탄두가 장착된 9기의 미사일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 단거리 미사일은 사정거리가 플로리다에 미치지도 못했지만, 쿠바를 침공하는 미군에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 있었다. 각 핵탄두의 폭발력은 TNT 6~12킬로톤이었는데, 이것은 1945년 히로시마에 떨어진 15킬로톤 원자탄의 폭발력에 아주 조금 못 미치는 파괴력이었다. 이것 말고도 맥나마라가 알게 된 것은 위기 발생 1단계에서 소련 야전사령관이 루나미사일을 사용할지 말지를 결정할 권한을 가졌다는 사실이었다.
“우리는 쿠바에 핵탄두가 있다고 믿지 않았습니다”라고 맥나마라는 며칠 뒤 말했다. “핵탄두가 있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케네디 대통령의 보좌관이며 맥나마라와 같이 회의에 참석했던 아서 M. 슐레진저 2세Arthur M. Schlesinger Jr.도 똑같이 경악했다. 그는 그립코프의 폭로가 미국인들을 놀라고 오싹하게 만들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이 뉴스에 대한 자신의 반응을 돌아보면서 “믿을 수 없었다”라고 기록했다. “전에 우리는 쿠바 미사일 위기의 위험성을 과대평가했다고 생각했다. 즉 미국의 전반적 핵전력과 카리브해에서의 재래식 전력의 우위를 잘 알고 있는 흐루쇼프가 절대 전쟁을 일으키는 모험은 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들은 바로, 소련군은 무력 침공에 대해 전술핵미사일을 발사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보다 몇 시간 전 맥나마라는 학술대회에서 쿠바 미사일 위기의 세 주인공의 액션이 ”잘못된 정보, 잘못된 계산, 잘못된 인식으로 인해 왜곡된 바 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조차 그 잘못된 이해와 인식이 얼마나 심각한지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 무서운 일입니다. 이것은 만일 미국의 쿠바 침공이 감행되었고, 미사일이 철수되지 않았더라면, 핵전쟁이 발발했을 확률이 99퍼센트였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맥나마라는 한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