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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워 말라 (계1:17-20)
자, 말씀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요한계시록 1장 17절에서 20절까지의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요한계시록 1:17-20)17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려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18 곧 산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19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20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아멘.
왜 20절 부분은 이미 공부를 했습니다. 그렇죠? 오른손에, 예수님의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의 비밀! 그리고 금 촛대는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이미 인제 우리가 공부했구요. 19절에,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이라는 것은, 전체 교회사, 구속사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오늘은 17절, 18절을 여러분께 자세히 설명을 해드리고, 1장을 드디어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묘사한 구절들을 공부하면서, 능력과 권세와 위엄의,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교회를 오른손에 꼭 붙들어, 보호하고 계시며, 주석 같은 두 발로, 교회와 함께 하고 계신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기억나시죠? 여러분!
자, 오늘 본문을 보시면,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를 본 사도 요한이, 그 발 앞에 엎드려져서, 죽은 자 같이 됩니다. 여러분! 이 구절을 읽으시면서, 어떤 느낌이 드세요? 3년 반 동안, 함께 숙식을 같이 하던 스승이에요. 그 중에서, 유독 사랑을 많이 받았던 ‘주의 사랑하는 자!’ 요한이에요. 그런데 그가 예수님을 보자, 그 발 앞에 엎드려져서, 죽은 자 같이 되었다! 죽은 자 같이 되었다! 그런 모습은, 우리가 구약성경에서 여러 군데서 찾아볼 수가 있죠? 선지자들이나 하나님의 종들이 하나님을 만났을 때, 동일하게 나타났던 현상이죠? 사사기 13장 22절로 가겠습니다.
(사사기 13:22)
22 그 아내에게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
이게 삼손의 아비가 한 이야기예요. 삼손의 아비 마노아와 그 아내가. 하나님을 보고 지른 비명이라고요. ‘아!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을 거야!’ 다니엘서 10장 5절로 가겠습니다.
(다니엘 10:5-6)
5 그때에 내가 눈을 들어 바라본즉 한 사람이 세마포 옷을 입었고 허리에는 우바스 정금 띠를 띠었고
6 그 몸은 황옥 같고 그 얼굴을 번개빛 같고 그 눈은 횃불 같고 그 팔과 발은 빛난 놋과 같고 그 말소리는 무쇠의 소리와 같더라 (우리가 계시록 공부한 부분하고 아주 흡사하죠?)
7 이 이상은 나 다니엘이 홀로 보았고 나와 함께 한 사람들은 이 이상은 보지 못하였어도 그들이 크게 떨며 도망하여 숨었었느니라
8 그러므로 나만 홀로 있어서 이 큰 이상을 볼 때에 내 몸에 힘이 빠졌고 나의 아름다운 빛이 변하여 썩은 듯 하였고 나에 힘이 다 없어졌으나
9 내가 그 말소리를 들었는데 그 말소리를 들을 때에 내가 얼굴을 땅에 대고 깊이 잠들었었느리라 (그러죠?)
다니엘은 하나님을 보자마자 온 몸에 힘이 빠졌고, 죽은 것처럼 정신을 잃었다고 그럽니다. 여기 개역성경에서, ‘깊이 잠들었다’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라담’은 마치 죽은 것처럼 정신을 잃은 모습을 묘사할 때, 쓰는 단어예요. 라담! 이사야서 6장 5절로 가겠습니다. 이사야는 어떻게 하나님을 보았을 때 어떻게 반응했는지 한 번 보세요.
(이사야 6:5)
5 그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이사야도 하나님을 뵈었는데, 그 하나님을 보자마자, ‘다마키오이’ 그랬다고요. 다마키오이! ‘다마’는 ‘파멸하다, 파괴하다’ 이런 뜻이에요. ‘나는 이제 파멸하게 되었구나!’ 이런 말이에요. 이 말은, 지옥 앞에서 심판을 인제 받을 자가, 두려워서 지르는 비명이에요. 다마키오이! 이런 뜻은! ‘와! 나는 인제 큰일났구나!’ 이런 뜻이에요.
이사야가 누구예요? 하나님의 사람이에요. 하나님의 종이잖아요? 그런데 그도, 그와 같은 하나님의 사람도, 그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직접 딱 보니까, 다마키오이! ‘난 인제 죽었구나!’ 그 앞에 서니까, 자기의 죄와 추악함과 초라함이, 완전히 드러나게 돼 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다마키오이! ‘나는 인제 죽었구나! 화로다!’ 지옥 앞에 선 사람이, 지르는 비명을 이사야가 지르는 거예요. ‘나는 도저히 저 빛을 감당할 수 없는 자구나!’라는 것을 깨닫는 거죠. 에스겔도 마찬가지예요. 1장 28절 보세요.
(에스겔 1:28)
28 그 사면 광체의 모양은 비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 내가 보고 곧 엎드리어 그 말씀하시는 자의 음성을 들으니라 (그래요.)
여기서도 에스겔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엎드렸다.’ 그러죠? 여기서 ‘엎드리다’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나팔’도 ‘죽은 것 같이 되다’라는 뜻이에요. 개역성경으로만 보면, 여러분들이 조금, 그 감동이 덜 하실 거예요. 사도 바울도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그 영광의 빛을 보고 어떻게 됐습니까? 눈이 멀었죠? 출애굽기 33장 18절 보세요.
(출애굽기 33:18-20)
18 모세가 가로되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19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20 또 가라사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자가 없음이니라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에요. 모세가 누구냐고요? 모세가? 그런데 모세도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가 없어요. 그 하나님은 얼마나 크신 분인지! 어떠세요? 여러분! 하나님은 그토록 크신 분입니다.
우리가 수요 성경공부 때,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분인가에 대해서, 우리가 자세히 살펴봤습니다. 우리 죄인들은, 그 하나님의 영광 앞에 서면, ‘다마키오이’하고 ‘난 이제 죽게 되는구나!’ 이렇게 소리 지를 수밖에 없는 그런 자들이에요.
지금 우리가 살펴본 바대로, 위대한 하나님의 종들도, 그 하나님 앞에 서면, 죽은 듯이, 정신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종들이 보고도 두려워서 벌벌 떨었던 그 천지의 주재! 만유의 주! 그 하나님이, 새 언약! 우리에게 하신 새 언약을 성취하시고, 이제 그 약속대로 우리 안에 들어와 계세요. 여러분 이게 믿겨 지시냐? 말이에요? 그게 그리스도인이에요.
지금 여러분들이 지금 살펴본 것처럼, 그 위대한 하나님의 종들도. 그 빛을 보고서는. 완전히 두려워서 벌벌 떨었던, 그 하나님이. 여러분 안에 들어와 계신다 말이에요. 그게 믿겨지시냐고요? 제가 보기에는. 아무도 안 믿는 거 같아요. 아무도 안 믿는 거 같아! 그 하나님이 내 안에 들어와 계시다는데, 아무도 안 믿는 거 같아요. 사실이에요. 우리 안에, 이 무서운, 이 두려운, 이 크신, 이 엄위하신 하나님이,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시다고요. 요한복음 14장 16절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4:16)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또 다른 보혜사가 누굽니까? 성령 하나님! 그 하나님이 우리와 이제 영원히 함께 계세요. 영원히! 마태복음 28장 20절이요.
(마태복음 28:20)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에요. ‘내가 성령으로 너희와 영원히 세상 끝날까지 함께 있을 것이다!’ 그래요.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 맞으시다면, 지금 그 하나님께서 여러분 안에 함께 계십니다. 바라만 봐도 눈이 멀고, 죄인은 그 앞에 서면 그냥 죽어버리게 되는, 그 천지의 주재이시며, 만유의 주재이신, 하나님께서, 여러분 안에 계신다고요. 그런데 어떻게 여러분은, 이렇게 눈도 안 멀고, 죽지도 않게 되어 있는 것입니까? 그게 여러분의 신분이에요. 그게 교회의 신분이에요.
여러분들은 이제 눈도 안 멀어요. 여러분들은 인제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고, 하나님과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도, 여러분은 끝도 없어요. 더더군다나 우리 하나님이 여러분을 ‘친구’라고 불러주신다니깐요. 여러분! 이게 감격스럽지 않으세요? 여러분을 ‘친구’라고 불러주세요. 이사야가 보고, 에스겔이 보고, 다니엘이 보고도, 죽은 듯이 기절할 수밖에 없었던 그 하나님이, 여러분보고 ‘친구다!’ 그런다고요. 그리고 ‘너희들은 내 딸이다!’ 그래요 그리고 ‘너희들은 내 아들이다!’ 그래요. 그리고 그 예수님이 우리를 가리켜서, ‘너희들은 내 형제다!’라고 이야기해준다고요. 그게 기독교예요. 여러분!
여러분! 박쥐나 올빼미는, 빛에 노출이 되면 죽습니다. 쥐나 바퀴벌레도, 빛을 비추면, 감당을 못하고, 어디로 숨기 바쁘죠? 그렇게 죄인들에게 비치는 하나님의 영광의 빛은, 두려움과, 경악의, 심판의 빛입니다. 똑같은 죄인들이었던 우리에게, 그 빛이 비추었어요. 그런데 우리는, 그 빛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평안하고, 기쁘고, 안도하게 되어 있어요. 햇빛이 식물을 키워요. 따뜻하게 보호해줘요. 그런데 그 빛이 어떤 어둠 속에 있는 존재들에게는. 두려움과 경악의 빛이 된다고요. 여러분들에게는, 그 빛이 따뜻한 보호의, 안도의, 평안의 빛이 되어 달라 그래요 그 사실이 여러분 복음이에요.
오늘 본문을 보시면, 예수께서 죽은 것처럼 두려워 떨고 있는 요한에게, 뭐라고 그러십니까? ‘두려워 말라!’ 그러시죠? 두려워 말라! 우리는 그 하나님을 보면, 반드시 두려워해야 될 존재들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이 뭐라 그래요? 교회에게 손을 얹고, 뭐라 그럽니까? ‘두려워 말라! 두려워 말라!’ 여러분은 이제 그 심판의 주로 오신 그 예수그리스도를, 두려워하지 않게 된 하나님의 백성이십니다. 안 좋으세요? 이사야서 41장 10절 보세요.
(이사야 41:10)
10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예수님이 지금 그 얘기하고 계시는 거예요. ‘두려워 말라! 이젠 내가 너의 주인이다. 내가 보호할 거야! 두려워 말라!’ 여러분! 그 사실이 정말 믿게 지신다면, 그 사실보다 뭐 다 거의 여러분을 기쁘고 행복하게 만들어줄 사람이, 물건이, 사건이 있겠습니까? 정말 그 복음을 알고, 예수를 안다면, 무엇이 여러분을 더 만족하고 기쁘게 해드릴 수 있겠어요? 그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와 계신데! 도저히 그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감격스러워서 어쩔 줄 몰라야 하는, 그런 자들인데, 지금 이 시대는 그 하나님을 마치 자기 종 부리듯 부리고 있다고요. 그 엄위하신 하나님을 마음대로 불러내어서 복 줘! 부자 되게 해줘! 병 낫게 해줘! 소원 들어줘! 그 하나님을 이렇게 부리고 있다니깐요. 기도하는 거 보면, 전부 그런 내용 아닙니까? 여러분!
우리 경호가 아까 기도하는데, 제가 아주 감동 먹었어요. 예수님을 알면 알수록, 하나님께 뭐 요구할게 없어진다는 거예요. 그게 진짜 그리스도인이에요. 뭘 요구하겠어요? 그 하나님이 이미 내 안에 게시고, 그 하나님이, 나의 기업이라는데! 천지를 소유하신 하나님이 그 분이 나의 기업이면, 그 천지가 다 내거라는 거 아닙니까? 거기에 감동하셔야죠?
마치 지금은, 알라딘의 요술램프를 문지르면서, ‘지니야! 나와라!’ 이거예요. 오늘날의 기독교는! 여러분!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 아니에요.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크신 분이에요. 18절에 보시면요, 그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8 곧 산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있어 사망과 음부에 열쇠를 가졌노니
그래요. 여기서 ‘산자’라고 번역이 된 ‘호 존’은, 관사가 붙은 현재분사능동태예요. 그것은 ‘시작을 알 수 없는 시점으로부터, 계속 살아계신 분’이란 뜻이에요. 헬라어 현재분사 능동태는요! 이 단어는 구약과 신약에서, 공히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그런 단어였어요. 그런데 그런 단어를, 예수님이 지금 자기를 가리켜서, 쓰고 계시는 거예요. 여호수아 3장 10절 보세요.
(여호수아 3:10)
10 또 말하되 사시는 하나님이 … (그러죠?)
지금 여기서는 예수님이 ‘산자다’라고 한 그 단어예요. 사시는 하나님! 리빙 갓(living God)! 그런다 말이에요. 하나님을 표기할 때, 이렇게 ‘사시는 하나님’이라고, 그 속성을 표기한다 말이에요. 시편 42편 2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시편 42:2)
2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사시는 하나님! 리빙 갓(living God)이에요.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 (그런다고요.)
제가 신약도 많이 찾아봤는데, 그건 시간이 없으니까, 다음에 제가 알려드릴게요. 히브리어로는 ‘하이 엘’이라는 거예요. ‘엘’이 하나님이죠? ‘하이’가 ‘살아있는’ 하이 엘! 오늘 본문에서 쓰인 헬라어 ‘자오’와 같은 단어에요. 이렇게 산자라는 용어는, 공히 적용된 신적 칭호예요. 그런데 바로 그 단어로, 자신을 묘사하고 계시는 겁니다.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은, ‘내가 전에 죽었었다.’ 이렇게 이어서 말씀하고 계시죠? 죽었었다! 이 ‘죽었었다’라는 단어, ‘에게노맨 네크로스’는 부정과거시제예요. 부정과거! 이 부정과거는 뭐라 그랬어요? 과거에 한 번 일어났던 어떤 사건이, 계속 영향력을 미치는 것! 그걸 부정과거시제로, 헬라어는 표현을 한다 말이에요.
그 분에 죽음은 영단번! 한 번에 딱 일어나는 것이지만, 그 영향력은, 이제 세세토록 미치게 된다는 그런 뜻이 있어요. 그 단어의 시제는요! 그래서 지금 이 구절을 읽으시는 하나님의 백성들도, 그 죽음의 영향력이, 오늘 나에게도 미치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는 거예요. ‘아! 그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오늘날 나에게도 미치고 있구나!’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정말 이 땅에 죽을 수 있는, 그러한 인간으로 오셔서, 실제로 죽으셨고, 이제 살아나셔서, 세세토록, 다시는 죽을 수 없는 자리로 복귀를 하신 거예요.
여러분! 정확하게 알아두셔야 돼요. 우리는, 죽은 예수를 믿는 자들이 아니에요. 사람들이 자꾸 헷갈려요. 예수님의 죽음! 그 죽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아니에요. 부활이 없으면, 기독교는, 완전한 완제품이 아니에요. 우리는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세세토록 살아계신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입니다. 죽었었지만, 이제 산자의 자리에 복귀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거예요. 로마서 4장 25절 한번 보세요.
(로마서 4:25)
25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인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는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다 (말이에요.)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어요. 그걸로 끝나면 안 돼요. 우리는 의롭다 하심을 받아야 돼요.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그분은 살아나셔야만 된다 말이에요. 우리가 죄만 없다고 천국가요? 그러면 아담과 하와는 천국 갔어야죠? 아담과 하와는 뭔가를 지켜야지만, 천국을 갈 수 있었어요. 그죠? 뭐예요? ‘선악과 먹지 말아라!’ 그건 뭡니까? 율법(律法)! 그것을 지켜야만 의롭게 되는 거예요. 죄가 없다고 여러분! 천국 못 가요. 죄가 없는 것 플러스 하나님의 의를 입어야 돼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요구하시는 그 삶을, 그대로 살아내야지 천국 가는 거예요. 이 ‘의롭다 하심’은, 예수님이 살아나심으로 우리에게 전가(轉嫁)된 거예요. 임퓨테이션(imputation)! 우리의 구원은, 전가된 의(義)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거예요.
여러분이 잘 들으세요. ‘전가된 의(義)’라는 것은, 임퓨테이션(imputation)! 우리에게 완전히 인제 덧입혀진 의(義)예요 뭔가 다른 게 더 필요 없는, 덧 입혀진 의(義)! 예수님이 살아나시므로, 우리가 의롭다 칭함을 받게 된 거예요. 의롭다 여겨짐을 받게 된 거예요. 완전한 의가, 완제품이 되어서, 우리에게 이렇게 전가된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이 구별하셔야 될 게, 가톨릭에서 주장하는 의(義)! 그것도 비슷한 거 같지만, 완전히 달라요. 가톨릭은 어떻습니까? 그들의 교리대로 하면, 예수님이 굳이 살아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가톨릭은요! 예수님의 죽음으로 원죄(原罪)가 해결되어서, 그들에게 의(義)가 주입되었다고 주장해요. 주사기로 뭘 이렇게 쭉 넣는 거처럼, 의(義)가 주입이 되어서, 이제 우리가 의로운 일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졌다고, 이야기한다고요.
천만에요. 여러분! 만약에 그 교리대로 따른다면, 여러분 요즘도 맨날 죄 짓잖아요? 그거 어떻게 하실 거예요? 능력만 주어지면 뭐 해요? 행할 수가 없는데…. 가톨릭은 그 의(義)가 영세를 받을 때, 주입이 된다고 그래요. 그래서 그들은 영세를 안 받으면 절대 천국 못가요. 우리 세례 안 받으면, 천국 갑니까? 못갑니까? 아무 상관없어요. 그러나 가톨릭은, 그 영세를 받을 때,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셔서, 만들어 놓으신 의(義)가, 우리에게 주입된다고 믿어요. 그래서 그때부터 우리는 의로운 일을, 선한 일을 행할 수 있는 자가 되었다고 믿어요.
그런데 그때부터 짓는 죄는? 고해성사로 없앨 수 있다고 믿어요. 고해 성사를 하면, 신부가 벌을 내려요. ‘너 기도문 몇 번 외워!’ 뭐 이렇게! 그러면은 그 죄가 용서된다고 해요. 신부들이 아주 그 사람들한테는 신적 존재예요. 그러니까 교황 어저께 죽으니까, 난리가 나잖아요? 아니에요. 여러분! 목사나 교회 리더들은, 하나님이 세운 가정교사예요. 소모품이에요. 자기를 막 태워서, 열심히 공부해서, 귀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그 하늘의 비밀을 계시해 주는 거예요.
목사가 무슨 성직자예요? 아니에요. 여러분! 목사 존경하지 마세요. 나중에 혹시 제가 먼저 죽으면, 태워버리세요. 고해성사도 못하고 죽은 그 죄는? 그들은 성직자들이 죄를 용서해줘요. 그런데 고해성사 못하고 간 사람은 어떡해요? 연옥에 가서, 대충 때우면 돼요. 가서! 그러니까 우리의 행위가 포함이 되는 거예요. 보태져야 돼요. 그 구원에!
그건 아니란 말이에요. 그 의(義)는 완제품으로 우리에게 전가된 의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십자가로 원죄(原罪)가 해결된 것이고, 나머지는 인간이 열심히 이루어야 한다.’라고 그들은 믿어요. 그래서 그들의 십자가에는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아직도 달려있는 거예요.
가톨릭은요! 자기들의 그 원죄 해결이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아직도 예수님을 죽은 채로 매달아 놓는 거예요. 그들에게는 예수의 죽음만이, 의미가 있어요. 그거 이상 더 필요가 없으니까, 나머지는 자기들이 다 하니깐요. 행위로 보태고, 선한일 하고, ‘내 탓이요! 내 탓이요!’ 하니깐요. 우리의 십자가에는 부활하신, 죽으신 예수는 없어요. 이제 우리는 살아나신 그 예수를 믿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열심히 선행을 하고, 종교행위를 해서, 우리의 구원에 뭔가 보태자!’ 굉장히 기특한 발상인 거 같지만, 그것은 큰 죄입니다. 죄 중에서도 가장 극악한 죄예요. 은혜를 거부하는 행위예요. 여러분이 이걸 잘 구별하고 계셔야 돼요. 그러니까 여러분! 이게 복음이 정확히 이해되지 않으신 분은, 교회에서 아무 일도 하지 마세요! 아무 일도 하지 마세요! 헌금도 하지 마세요! 여러분들이 하는 헌금으로, 여러분이 지옥에 가는 티켓을 사고 있는 거예요. 그분들은요!
복음을 명확히 알지 못하고, 여러분들이 뭔가 하나님 앞에 드리면서, 하나님 앞에 뭔가를 행하면서, 뭔가 여러분들이 만족을 얻는다면, 여러분은 지금 극악한 죄를 짓고 있는 거예요. 아무 일도 하지 마세요! 헌금도 하지 마세요! 여러분! 선교지에 가서, 죽을 때까지 선교하고, 지옥 가는 사람 있어요. 자기 의(義) 쌓다가! 거기가면 사람들이 나 존경해주거든요. 여기 있으면 아무도 안 알아줘! 가면은? 나 존경해줘요. 선교사다! 고생했다! 그러니까, 죽을 때까지 일하고, 지옥가요.
예수를 먼저 아세요. 하나님을 먼저 공부하세요. 구원은 완전한 항복(降伏)입니다. 구원은, 살아나셔서 지금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전가 받은 그 의(義)의 옷! 그 이외에는 아무 것도 보텔 것 없어요. 그게 은혜요. 믿음이에요.
그렇게 살아나셔서, 세세토록 영원히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다고 이야기하세요. 바로 이 열쇠입니다. 메시아에게 주어진 그 열쇠! 이사야서 22장 22절 보겠습니다.
(이사야 22:22)
22 내가 또 다윗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리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 자가 없으리라 (바로 이 열쇠예요. 계시록 3장 7절 보세요.)
(요한계시록 3:7)
7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 이가 가라사대 (바로 이 열쇠예요. 이 열쇠! 이 열쇠를, 지금 예수께서 가지셨다 그렇게 이야기하시는 거예요.)
열쇠는, 고대시대를 비롯해서, 예수께서 사시던 시대에도, 통치권! 권세! 같은 것을 상징하는 거였어요. 그래서 당시 왕이나 황제들이 어떤 도시를 방문하면, 그 도시의 분봉왕이나 성주들이, 상징적인 금 열쇠나, 은 열쇠를 만들어서, 그 입구에서, 왕에게 이렇게 드렸다 그래요. 그 열쇠는 그런 것을 상징하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그런 배경을 좀 아셔야, 성경을 읽으실 때, 좀 이해가 쉽겠죠? 그것은 ‘여기는 당신의 통치 아래에 있는, 당신의 땅입니다.’라는 그런 고백이었다, 그래요.
예수님께서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셨어요.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셨다는 건, 뭐예요? 사망과 음부를, 예수님이 지금 통치하고 계시다는 거예요. 이건 아주 중요한 거예요. 여러분! 사망과 음부를 예수님이 통치하고 계시다는 거예요. 사람들은 지금 예수님과 마귀가 싸우고 있다고 생각을 해요. 선과 악이 지금 대결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역사 속에서! 천만에요. 이미 얘는 죽었어요. 묶었어요. 음부에 묶였다고 그러잖아요? 성경에서! 디스암드(disarmed) 되었다고 그러잖아요? 무장해제 되었다고 그러잖아요? 지금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뭔가 필요하기 때문에, 쓰고 있는 거예요. 사탄은요! 여러분들을 절대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셨단 말이에요. 열쇠! 통치권을 가지셨다고요.
여기서 ‘음부(陰府)’라고 번역된 단어는, 여러분이 잘 아시는 헬라어로 ‘하데스’라는 말이에요. 하데스! 하데스는 부정 접두사인 ‘알파’와 ‘보다’는 뜻을 가진, ‘에이도’의 합성어예요. 그 끝을 볼 수 없는, 아득히 멀고 깊은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하데스는, ‘저주 받은 자들이 가는 곳’이라는 의미로도 쓰이지만, 그냥 막연히, 죽은 영들이 가는 곳! 천국과 지옥 다 포함한, 죽은 영들이 가는 곳! 이런 의미로도 쓰여요
그런데 계시록에서는 저주 받을 자들이 가는 ‘지옥(地獄)’의 의미로 쓰인 거 같아요. 중요한 건 아니니까, 두 구절만 제가 확인하고 갈게요. 계시록 6장 절 보십시오.
(요한계시록 6:8)
8 내가 보매 청황색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음부가 그 뒤를 따르더라 저희가 땅 사분의 일의 권세를 얻어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으로써 죽이더라
사망과 음부를 의인화해서, 마귀의 세력을 표현하고 있죠? 계시록 20장 14절을 보세요.
(요한계시록 20:14)
14 사망과 음부도 (역시 하데스예요.)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그러죠?)
자, 바로 그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예수께서 쥐고 계시단 말이에요. 통치하고 계시단 말이에요. 천국뿐만이 아니라, 음부도 예수께서 다스리시는 거예요. 여러분! 지금 우리가 제일 두려워하는 게 뭐예요? 지난주에 제가 죽음에 대해서 설교를 했는데, 죽음이에요! 그렇죠?
그런데 그 사망의 열쇠를 누가 쥐고 계세요? 예수님이 쥐고 계세요. 음부의 열쇠는 누가 쥐고 계세요? 예수님이 쥐고 계세요. 음부에는 누가 갇혀 있어요. 사탄과 마귀의 세력이 갇혀 있어요. 거기에 대해서 제가 설명해 드렸죠? 왜 갇혀 있다고 표현을 하는지! 그러면 그 음부도, 예수님이 다스리고 통치하고 계시다면은, 여러분이 뭘 두려워 하셔야 되는 거예요? 사탄이 여러분을 어떻게 할 수 있을거 같아요? 천만에요.
제가 다다음주 쯤에, 귀신론에 대해서 할 거예요. 수요회 청년공부 때! 여러분은 그만큼 귀한 존재예요. 음부에 묶여 있는 사탄과, 마귀의 세력도 예수께서 다스리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은 안전하다는 거예요. 여러분은 절대 실패하실 수 없어요. 사탄은 지금도 예수님의 통치 아래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백성들의 어떤 필요 때문에, 예수님이 지금 쓰고 계시는 거예요.
여러분! 욥기를 읽어 보셨으면 알잖아요? 하나님이 산울로 두르고 계세요. 하나님의 백성들을 그걸 치워주지 않으면, 사단이 범접을 못해요. 하나님께서 욥을 시험하는 사탄에게, 넘어가지 못할 금을 그어주시죠? 욥기 38장 11절 보시겠습니까?
(욥기 38:11)
11 이르기를 네가 여기까지 오고 넘어가지 못하리니 (하나님이 결정해 주세요.) 네 교만한 물결이 여기 그칠지니라 하였었노라
저주를 상징하는 바다에 경계를 그으시고, 넘어가지 말아라! 그렇게 명령하시는, 그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명령에, 사탄도 절대 복종을 해야 돼요. 그러니까 여러분은 안전하신 거예요. 너무 두려워하지 마세요! 여러분에게 거룩을 가르치시기 위해서, 지금 사탄을, 예수님은 이용하고 있는 것뿐이에요.
하늘이나 땅이나 땅 아래에 있는 어느 곳도,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벗어난, 무정부상태의 공간은, 없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사망의 열쇠를 쥐고 계세요. 사망에 잡혀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굳게 잠긴, 사망의 자물통을 여시는 거예요. 예수님이 열쇠를 갖고 계시잖아요? 사망은 지금 오해하고 있어요. 자기가 포로로 잡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니깐요. 사망이!
그런데 그 열쇠를 정작 누가 갖고 계시냐면? 예수님이 갖고 계시다고요. 예수님이 그 자물통을 여실 거예요. 사망을 상징하는 애굽에, 이스라엘 백성이 한 명이라도 남아 있었나요? 전부 나왔어요. 전부 나왔어요. 다 끌어내실 거예요. 예수님이 다 끌어내실 거예요. 하나님이 창세전에 구원하시기로 한 하나님의 백성은, 모두 다 그 사망의 나라에서 나오게 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그 열쇠를 갖고 계시기 때문에! 이사야서 26장 19절 보세요.
(이사야 26:19) (새번역)
19 그러나 주님의 백성들 가운데서 죽은 사람들이 다시 살아날 것이며, 그들의 시체가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무덤 속에서 잠자던 사람들이 깨어나서, 즐겁게 소리칠 것입니다. 주님의 이슬은 생기를 불어 넣는 이슬이므로, 이슬을 머금은 땅이 오래전에 죽은 사람들을 다시 내 놓을 것입니다. 땅이 죽은 자들을 다시 내어 놓을 것입니다.
예, 사망의 자물통은 열릴 거예요. 그분이 열쇠를 갖고 계시니까! 그리고 예수님은 그 열쇠로, 하나님 백성들의 천국 문을 여시죠. 그 열쇠예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들어가면, 예수님은 천국문을 그 열쇠로 잠궈 버리실 거예요.
왜 이스라엘이라는 무리를 들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설명한 줄 아세요? 거기에는 울타리가 있다는 거예요. 아무나 못 들어간다는 거예요. 그 문을 잠궈 버리실 거예요. 아무도 못 들어가요.
자, 마치 노아의 방주에, 하나님의 백성들과, 여덟 명의 하나님의 백성들과, 모든 피조물들을 집어넣고, 어떻게 합니까? 밖에서, 하나님이 문을 닫아 주시죠? 그것처럼 천국의 문은 하나님에 의해서 닫히고 잠길 거예요. 아무도 못 들어가요. 그런데 거기에 여러분이 들어가실 수 있는 자들이 되었다는 게, 그게 감격스럽지 않으면, 그게 뭐가 그리스도인이에요? 말만해도 좋네요. 그냥! 창세기 7장 15절 보세요.
(창세기 7:15-16) (새번역)
15 살과 피를 지닌 살아 숨쉬는 모든 것들이 둘 씩 노아에게 와서, 방주로 들어갔다
16 하나님이 노아에게 명하신 대로, 살과 피를 지닌 살아 숨쉬는 모든 것들의 수컷과 암컷이 짝을 지어 방주 안으로 들어갔다. 마지막으로 노아가 들어가니 주께서 몸소 문을 닫으셨다.
닫아 주실 거예요. 눈물도, 슬픔도, 죄도, 못 들어가요. 딱 닫고. 자물쇠로 채워 버리실 거예요. 아무리 두들겨도 열리지 않습니다. 복음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정확히 알지 못하고, 그 전가된 의(義)! 그 은혜(恩惠)로 구원받은 자들이 아니면, 아무리 문을 두들기면서, ‘주님! 내가 선지자 노릇했고, 주의 이름으로 기적 일으켰고, 주의 이름으로 헌금을 그렇게 많이 했고, 내가 평생 한 번도 교회를 안 빠졌는데, 왜 문을 안 열어주세요?’ 안 열어주세요! 절대 안 열어주세요! 여러분! ‘네가 아무리 예수의 이름으로, 아무리 종교행위 열심히 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한 번도 교회를 안 빠졌다.’ 할지라도, 너는 못 들어간다는 거예요.
그러니 여러분! 얼마나 두려워 하셔야 되는 줄 아세요? 여러분 딴 거 갖고 고민하지 마시고, ‘여러분이 진짜인가? 가짜인가?’를 고민하세요. 무섭지 않으십니까? 내가 진짜 잘 믿고 있는지, 아닌지, 그걸 왜 안 두려워하시냐 말이에요. 그러니 제가 속이 터지는 거예요. 그걸 왜 안 두려워하세요? 내가 진짜 바로 믿는지, 안 믿는지! 루터도 켈빈도 죽기 3개월 전까지, 내가 진짠가 아닌가? 고민했다는데! 그래서 잠도 못자고, 불면증 걸리고, 우울증까지 걸렸다는데, 여러분이 뭘, 얼마나 아신다고, 이렇게 궁금해 하시지 않냐 말이에요? 거기에 대해서!
당연히 천국 갈 줄 알아요. 천만에요!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내가 이 땅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그랬다고요.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자는, 너무 길이 협착하고, 좁아서 안 들어간다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전부 천국 갈 거라고 착각하지 마세요. 못 들어가요. 정확히 이해하고 계셔야 돼요. 구원이 뭔지! 두려워 하셔야 돼요. 난 정말 바로 가고 있는가? 난 정말 바로 가고 있는가?
오직 그 예수로만, 우리는 구원받을 수 있고, 예수를 통해서만, 그 천국에 들어갈 수 있어요. 그분이 양의 문이세요. 그 분이 양의 문이세요! 그 문을 통과하지 않고는 못 들어가요. 거기에 뭘 보태신다는 거예요? 무슨 행위를 보태요? 거기다가? 요한복음 10장 1절 보세요.
(요한복음 10:1-5, 9)
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2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3 문지기를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4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에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 오되
5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이 이야기는 각기 두 가지 관점에서 살펴야 하는 구절이에요. 예수님 당시에, 양의 우리는 두 종류가 있었어요. 여러분! 산의 목초지에 올라가서, 목동들이 양을 먹이다가 미처 아래로 못 내려오면, 그 위에서 양들을 모아 놓는 그런 간이 우리들이 있었어요. 돌로 얼기설기 쌓아 놓은 거! 거기에는 문이 없어요. 그래서 목자가 서서, ‘들어가라!’ 그러면 들어가는 거예요. 그리고 그 뚫어진 곳에 목자가 이렇게 누워 있었다고요. 이리나 늑대는 못 들어간다고요. 그래서 ‘내가 양의 문이다!’ 그러시는 거예요. 예수님이!
그리고 또 한 가지 양의 우리가 있었는데, 그것은 마을에 있었던 양 우리예요. 큰 우리! 유대인들은 양의 우리를 각자 집에다 만들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동네에다가 큰 우리를 만들어 놓고, 김씨네 양! 이씨네 양! 박씨네 양! 다 집어넣었어요. 거기다가! 그러면 섞이면 어떡합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요. 양들은요, 자신의 주인의 목소리를 정확히 구별해요. 그래서 아침에, 주인이 가서, ‘이씨네 양 다 나와라!’ 그러면 쭉 따라 나오는 거예요. 양들의 특징이에요. 그게!
거기에는 너무나 많은 양들이 있어야 되니까, 문지기가 항상 있었어요. 여기에서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그 문지기는, 바로 ‘성령’이에요. 성령이 문을 열어주니까, 예수님이 들어가서, ‘빌립아! 삭게오야! 나사로야! 나와라!’ 그러니까 쭉 따라 나오더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양들은요,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고, 그 우리에서 나온다고요. ‘삭게오야! 내려와라!’ 했더니, 삭게오가 내려와요. 재산의 반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을 나눠줘요. ‘빌립아! 따라와라!’ 했더니, 빌립이 알아듣고, 따라가요. ‘베드로야! 가자!’ 했더니, 따라와요. 심지어 죽은 나사로더러, ‘나사로야! 나와라!’ 하니까, 그 목소리를 듣고 나와요.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양인 거예요. ‘마태야! 가자!’ 했더니, 그 돈 많이 버는, 세리 직을 두고 나오더라는 거예요.
여러분은 여기 어떻게 나오셨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그 말도 안 되는 복음을 듣고, 여러분이 이 예배당에, 어떻게 나와 계시냐고요? 그리고 예수를 믿겠다고, 눈물 철철 흘리면서, 이렇게 열심을 내는 분들이 되셨냐 말이에요? 예수 그리스도의 양이에요. 그분이 불러내신 거예요. 우리는 그 분을 통해서만, 양의 우리로 들어갈 수 있어요.
또 한 가지 관점으로는, 여러분! 이 이야기가, 요한복음 9장하고 이어진 거예요. 원래 성경은 장절이 없었다. 그랬죠? 9장에 무슨 얘기가 나옵니까? 소경 이야기 나오죠? 요한복음 9장에! 소경이 눈을 떴어요. 안식일 날 예수님이 진흙을 눈에 이겨 붙여서, 눈을 뜨게 만들었어요. 그런데 유대인들이 난리가 났어요. 안식일 날 고쳤다고! 결국은 이 소경이 출교를 당해요. 산헤드린 공회원들한테! ‘넌 이제 유대교에 못 들어온다!’ 출교 당하고 나서,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을 만나요.
이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냐 하면은, 여러분들이 지금 어느 곳에 있다 할지라도, 어떠한 위험한 곳에, 아니면 여러분들이 얼마나 매력적으로 여기는 그런 곳에 있다 할지라도, 예수님이 부르시면, 그들은 나온다는 거예요. 유대교에서 봤을 때는 출교였지만, 이 소경은, 그 죽을 수밖에 없는 유대교에서 빠져 나온 거예요. 우리에서! 예수님이 부르시니까, 그 양들만, 빠져 나오더라는 거예요. 유대교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문이라는 거예요. 다른 것으로는 빠져 나올 수가 없어요. 다른 문을 통해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어요.
이렇게 양쪽 관점에서 보는 거예요. 여러분! 그 예수를 믿으십니까? 그 예수를 믿으세요? 그 예수로만, 여러분은 구원받을 수 있어요. 그래서 기독교예요. 시편 2편 12절 보세요.
(시편 2:12)
12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예수에게 입맞추라’라는 뜻이에요. ‘예수를 믿어라!’라는 뜻이에요.)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
그 예수님이,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다.’라고 이야기하세요. 그죠? 이 단어는 우리가, 전에 8절 공부할 때 배웠어요.
8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거기서 우리가 배웠죠? 알파, 오메가 할 때, 하나님을 묘사하는 이 동일한 단어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묘사하는 데 지금 쓰고 계세요. 베들레헴의 말구유에 나시고, 촌구석 나사렛에서 똥 싸고 오줌 싸는 애기로, 거기서부터 출발하신 거예요. 말을 배우셔야 했어요. 그분은 글을 배우셨어야 했어요. 자신을 낮추시는 거예요. 그분은 가구 고치는 법을 배웠어요. 그리고 등짐을 지고, 가구를 고치러 다녔어요. 그때 당시에는 이렇게 목공소 이런 게 번듯하게 없었어요. 다 봇짐장수였단 말이에요. 그리고 침 뱉음을 당하고, 배신을 당하고, 결국은 수난을 받고 죽으셨어요. 그분이 바로 ‘처음이요 나중이신, 하나님’이라는 거예요. 하나님이신 그분! 죄인들이 보면, 그냥 쓰러져 죽을 수밖에 없는 그분이, 똥 싸고 오줌 싸고, 시간 안에 들어오신 거예요. 그분이, 처음과 나중이신, 하나님이시라는 거예요. 잠언 8장 23절 보세요.
(잠언 8:23-26)
23 만세 전부터, 상고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입었나니
24 아직 바다가 생기지 아니하였고 큰 샘들이 있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며
25 산이 세우심을 입기 전에 언덕이 생기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니
26 하나님이 아직 땅도 들도 세상 진토의 근원도 짓지 아니하셨을 때에라
예수님이에요. 이때부터 계셨단 말이에요. 요한복음 1장 1절.
(요한복음 1:1-3, 14)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셨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14절.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에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복음 8장 58절
(요한복음 8:58)
58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
‘내가 있느니라’는, ‘아이 엠(I am)’이라는 말이에요. 내가 하나님이었느니라! 그게 예수를 믿는 거예요. 우리는요! 고린도전서 10장 9절을 보세요.
(고린도전서 10:9)
9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시험하지 말자
‘뱀에게 멸망하였다,’ 이 이야기는요, 광야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께 막 원망하다가, 하나님이 불뱀을 팍 풀어서, 많이 죽여 버리죠? 그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에,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했다,’ 그런다 말이에요. 사도 바울이! 여기서! ‘주를 시험하다가’ 이 말은, ‘엑크 페리아조 멘 톤 크리스톤’ 이런 뜻이에요. ‘예수 그리스도를 시험하다가’ 이런 뜻이에요.
그러니까 그때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원망한 게, ‘예수 그리스도를 시험한 거’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들을 지금 광야에서 끌고 간 건, 누구라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 여러분의 구원의 시작과 끝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시작하시고, 끌고 가시고,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끌고 가신다는 거예요. 여러분의 믿음의 창시자요, 믿음의 완성자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거예요. 여러분!
그 예수께서 여러분을 가리켜, ,‘내 형제요 내 자매다.’라고 말씀을 하세요. 그런데 왜 여러분이 두렵고, 무엇을 염려하신다는 것입니까? 여러분! 과거의 여러분의 상처가, 그렇게 여러분을 괴롭게 하세요? 그 분은 처음이라니깐요. 여러분에게 아직 닥치지 않은, 여러분의 미래가 여러분을 염려하게 만드느냐? 말이에요. 예수님은 나중이시라면서요? 그 예수님 안에, 여러분이 들어있다면서요? 여러분이 지금 두렵고 염려하고 계시다는 것은, 여러분은 그리스도인 아니라는 거예요.
아직까지 여러분이 갓 일루젼(God illusion)! 여러분이 ‘나는 하나님이다’라는 환상에 빠져있는 거예요. 여러분! 아직도 선악과를 꽉 깨물고 있는 거예요. 그거 아닙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리에서 내려놓고, ‘내 인생 내가 책임지겠다!’가 선악과란 말이에요. 그런데 여러분이 두려워하고, 염려한다는 것은, 아직도 내가 뭔가 해보겠다는 거예요. 내 인생을! 그게 죄(罪)예요.
저는 오늘날 교회가 정말, 그 하나님을 믿고 있는지, 전 모르겠어요. 전부 그렇게 두려움과 염려 속에서, 자기들 소원만 빌고 있어요. 그건 기독교 아니에요. 무당 종교도 똑같은 거예요. 단지 자기를 도와줄 어떤 절대자를, ‘하나님’이라, ‘예수님’이라 그냥 부르고 있는 거뿐이지, 그 사람들은 그리스도인 아니에요.
여러분! 정말 두려워 하셔야 할 것은, 여러분에게 아직 닥치지 않은 일! 여러분이 과거에 겪었던 그 일! 그것 때문에 혹시 내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까? 이게 아니에요, 진짜 여러분이 두려워 하셔야 할 것은, ‘내가 진짜 그리스도인 맞나?’ 이걸 두려워 하셔야죠. 혹시 내 앞에서 천국 문이 철커덕 잠기고, 아무리 두들겨도 안 열리면, 어떻게 하실 거예요? 그걸 두려워 하셔야지, 왜 아직 닥치지도 않은 일을 갖고, 두려워하시냐 말이에요?
정말 여러분이 두려워 하셔야 할 것은, ‘내가 그리스도인 맞나?’만 확인하시면 돼요. 맞으면 걱정할 거 없어요. 그분이 알아서 끌고 가실 거니까! 처음이며 끝인 그분이, 전부이신 그분이, 여러분을 끌고 가실 것이니까!
여러분이 엉뚱한 거 지금 바라고 계시기 때문에, 두려운 거예요. 엉뚱한 거 가지고 지금, 여러분들이 소원하고 계시기 때문에, 염려스러운 거예요. 여러분들의 인생이! 그 예수님이, 처음이요 나중이신 예수님이, 여러분이 지금 간절하게 바라고 있는 어떤 소원이, 여러분의 인생에, 지금 이 시점에 필요한 것이면, 들어줄 것이고, ‘아니다. 아직 그거 들어주면 안 된다. 그러면, 너희들이 또 자고하고, 교만할 거야! 그래서 안 들어주시면, 그만이에요. 인정하고 좇아가고 순종하는 거예요. 우리는요!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지금 자꾸 그 하나님을 동원해서, 얻어내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목적과 다른 곳으로 가기 때문에, 염려하고 두려워하는 거 아닙니까? 그거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죄송하지만! 두려움을 떨쳐버리십시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입니다. 승리자예요.
자, 여러분! 여러분의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맡기십시오. 두려움을 떨쳐버리세요. 예수께서 교회의 몸에 손을 얹고, ‘두려워 말라! 두려워 말라!’라고 이야기하시잖아요? 두려워 말라! 예수님이 ‘두려워 말라!’라고, 그 예수님이 하신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는 자들이, 예수님의 양이에요. 그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없는 자들은, 양이 아니에요. 거기서 그냥 머물러 있다고 그러잖아요?
그런데 그것을 알아듣고 나왔다고 하는 분들이, ‘두려워 말라!’라고 하는데, 왜 계속 두려워하고 계시냐 말이에요? 그걸 두려워하세요! 그 사실을 두려워하세요! ‘나, 혹시 가짜인가벼!’ 그걸 두려워하세요! 여러분의 일이 해결되지 않은 걸, 두려워하시지 마시고, 내가 혹시 가짜면 어떡하는가? 그걸 두려워하세요! 예수님이 언젠가 자물통으로 문을 잠궈 버렸을 때, 나 거기 못 들어가는 자면 어떡하는가? 그걸 두려워 하셔야죠? 두려워 마세요!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세요. 그리고 여러분이 궁극적으로 가야할 그곳이 어떤 곳인지, 매일 매일 묵상하세요. 매일 매일 묵상하세요. 황홀해 질 거예요. 감사할 거예요. 기뻐질 거예요.
자, 오늘 본문을 한 번 다시 읽고, 잘 이해가 가셨는지, 이제 확인하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계시록 1장 17절, 18절 읽어볼게요.
17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려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 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18 곧 산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이해가 가십니까? 클리어(clear)하세요?
기도하겠습니다.
저 멀리 뵈는 나의 시온성, 오 거룩한 곳 아버지 집. 내 사모하는 집에 가고자 한 밤을 새웠네. 저 망망한 바다 위에, 이 몸이 곤할지라도, 오늘은 이곳, 내일은 저곳. 주 복음 전하리.
아득한 나의 갈길 다 가고, 저 동산에서 편히 쉴 때, 내 고생하던 모든 일들을 주께서 아시리. 빈들이나 사막에서, 이 몸이 상할지라도, 오 내 주 예수 날 사랑하사, 늘 지켜 주시리.
집으로 가자! 집으로 가자! 이런 눈물 흘리지 않는 곳! 집으로 가자! 집으로 가자! 내 아버지 기다리시는 그곳에. 안녕 친구여, 곰곰이 생각해봐! 그대는 지금 자유로운지, 안녕 친구여, 감추지 않아도 돼. 애써 웃는 모습 안보여도 돼! 구원받은 몸이라 안심하고 있었나? 끊임없이 생기는 어둔 죄 감춰둔 채,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셨는데, 친구 넌 그 뜻을 진정으로 아는가? 집으로 가자! 집으로 가자! 이런 눈물 흘리지 않는 곳! 집으로 가자! 집으로 가자! 내 아버지 기다리시는 그곳에!
안녕 친구여! 생각해 보았는가? 정말 넌 천국갈 수 있는지? 안녕 친구여! 세상 떠나갈 때에, 칭찬하는 하나님 볼 수 있는지? 마음 속 깊은 곳에 하나님이 계신가? 희미한 예감으론 평안을 얻지 못해. 예수님 알기 위해 얼마나 고민했나? 아직도 이 세상을 그렇게 기대하나? 집으로 가자! 집으로 가자! 이런 눈물 흘리지 않는 곳 ~! 집으로 가자! 집으로 가자! 내 아버지 기다리시는 그곳에! 내 아버지 기다리시는 그곳에! 아멘!
이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