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촌
지은이:벌마로(김윤식)
집에서 엄마를 도와서 옷장정리를 하던 영우에게 병휘의 전화가 왔다. 병휘오빠가 원래 있던 오산부대에서 강원도 횡계부대로 전출명령을 받았다고 한다. 영우로서는 예상치 못한 일이다. 전화를 끝으로 한동안 병휘오빠를 볼 수가 없었다.
‘아! 군인은 이런 경우도 생기는구나, 그럼 이제 병휘오빠를 어떻게 보지, 횡계는
어디를 말하는 거야, 우리나라에 있는 동네는 맞는 건가?’ 영우는 별별 고민을 하며 병휘의 소식만을 기다리며 지낼 수밖에 없었다.
열흘쯤 지났을 때 병휘오빠가 편지를 보내왔다. 강원도 산골마을의 어느 산꼭대기 부대에서 군복무 중이고 횡계라는 작은 산골마을의 마음착한 아주머니네 방을
얻어 하숙생활을 하며 잘 지내고 있다는 내용이다. 보고 싶다는 내용도 물론 쓰여 있었다. 병휘의 편지는 영우에게 안도와 반가움을 주었지만 다른 한편으론 어리둥절하게 만들기도 했다. 강원도 횡계가 어디쯤이라는 건지 산꼭대기까지 어떻게 출퇴근을 한다는 건지 강원도면 엄청 먼 거리일 텐데 우리는 어떻게 만날 수
있다는 건지 도무지 혼란스럽기만 하다.
영우는 답장을 기다리고 있을 병휘오빠 생각에 곧바로 편지를 썼다. 어린 시절
학교에서 단체로 국군장병 아저씨한테 위문편지를 썼던 기억이 새롭게 떠올랐다.
그때 그 느낌하고는 다르지만 궁금한 거는 마찬가지다.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강원도는 한겨울에 몹시 춥다고 들었는데, 올겨울까지 그곳에서 있게 되는 건지, 그러면 우리는 언제 어떻게 볼 수 있는 건지, 밥은 잘 챙겨 먹는지, 온통 궁금함 뿐이다. 영우는 궁금하고 걱정되는 마음을 그대로 편지에 옮겨 적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한동안 만나지 못하고 편지만을 주고받으며 그리운 마음을 달래야만 했다.
무료하고 답답한 날들을 목적없이 보내던 어느 날 중학교 때 친하게 지내던 친구
옥주한테서 전화가 왔다. 자기네 학교 친구들과 강촌으로 여행을 가는데 여자가
한 명 모자라서 짝이 맞지 않으니 영우에게 같이 가자는 거다.
옥주하고 또 한 명 친구 미경이 이렇게 셋이는 중학교 때 하루라도 안 보면 입안에 가시가 돋을 정도로 친하게 지냈었다. 고등학교 올라가면서 각자 다른 학교로
배정을 받아 흩어지게 되면서 만남이 줄었지만 그녀들은 누구보다 가까운 친구
였다.
병휘오빠 생각에 그리움만 쌓여가던 터라 기분전환도 할 겸 옥주의 제안에 따르기로 했다. 약속날짜에 옥주와 만나기 위해 청량리역에 조금 일찍 도착했다. 이곳은 아침부터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어느덧 젊음과 낭만의 계절이 온 걸 짐작할
수 있다. 대부분 대학생이거나 젊은 직장인들인데 그들의 옷차림은 거의 비슷했다. 청바지에 밝은색의 반팔티가 유행을 대변했고 간혹 교련복에 군화를 신고 있는 학생들도 있었다. 검은색 물 먹인 군복바지에 군용 물통을 옆에 찬 사람도 있었는데 머리도 짧은 걸 보면 아마 군에서 제대한 지 얼마 안 된 모양이다. 아니면 군인 흉내를 내면서 허세를 부리려는 학생이거나,,, 가장 눈에 띄는 장면은
기타를 둘러맨 사람이 꽤나 많다는 점이다. 역시 청춘의 상징은 기타가 확실해
보였다.
영우가 군복바지 입은 사람을 보며 잠시 병휘오빠를 떠 올렸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병휘가 군인인 것은 분명한데, 군복 입은 모습을 본 기억이 없다. 병휘가 영우를 만날 때는 늘 일반 옷을 입고 나왔기 때문에 병휘의 군인복장을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연애하는 내내 병휘오빠가 군인이라는 것을 잊고 지냈었던 같다.
잠시 뒤 옥주가 나타났다.
“오랜만이네”
“보고 싶었어, 자주 연락 못해서 미안해”
“나도 미안해 옥주야”
옥주하고는 고등학교 다닐 때는 학교가 달라서 자주보지 못하고 지내다가, 졸업 후에는 영우가 연애를 하느라 자주 못 본 것 같았다. 그게 영우 본인 탓인 것 만
같아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오늘 옥주가 먼저 미안하다고 했다. 그래서
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머지 일행이 올 때까지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조금 더 기다리자, 여자 한 명과
남자 셋 이렇게 네 명의 무리가 영우 쪽으로 다가오고 있다. 옥주가 몇 걸음 앞으로 나서며 반겼다. 옥주의 행동을 보고 친구들이란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남자들 등에는 짐이 가득 담겨 있는 배낭이 머리 위에까지 솟아있고 양손에도 짐을
들고 있다. 여자들도 양손에 제법 묵직해 보이는 짐이 들려 있다.
“안녕”
동시에 인사가 이루어졌다.
“시간약속 잘 지키세요”
옥주가 가볍게 핀잔을 주었다.
“기차 출발시간 아직 많이 남았는데, 뭘”
한 남자가 시큰둥 대꾸했다.
“숙녀를 기다리게 하면 되겠어?”
옥주가 한번 더 핀잔을 주면서 영우를 가리켰다.
“아! 미안합니다.”
남자가 놀라는 표정으로 인사를 한다.
“괜찮아요, 저희도 방금 왔어요”
영우가 웃으면서 가볍게 받아준다.
영우는 옥주가 다니는 학교 친구들과 간단한 통성명을 나누고 기차에 올랐다. 기차 안에는 물 맑고 경치 좋은 계곡으로 여행을 떠나는 대학생들과 영우 또래의
젊은이들로 북새통이다. 열차의 한쪽 끝은 좌석을 아예 분리해서 넓은 공간으로
만들었고 그곳을 차지한 어느 대학 학생들은 술을 마시며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며 한껏 젊음을 발산하고 있었다. 좌석에 앉아 있는 다른 사람들도 학생들이
부르는 노래를 따라 부르기도 하고 함께 박수를 치며 즐거워했다.
영우일행은 그들이 차지한 넓은 공간 바로 앞에 의자를 마주 보고 앉아 있었는데
그들이 부르는 노래를 따라 부르고 박수를 치며 흥겨움을 나눠 가졌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그들과 합류를 하게 됐고, 영우네 친구들도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이 주는 막걸리를 받아 마시며 어울렸다.
기차는 대성리역에서 정차하고 흥겹게 분위기를 주도하던 학생들과 다른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내렸다. 목적지를 강촌으로 정한 영우네 일행은 몇 개의 역을
더 지나야 했어서 그들에게 아쉬운 인사를 건넸다.
조용해진 기차 안에서 친구들과 담소를 나누는 사이에 기차는 어느덧 강물이 여울지는 산모퉁이를 돌아 강촌역에 다다랐다.
기차에서 내린 영우일행은 강가로 향하는 무리들 속에 묻혀 걸었다. 강가로 내려가자마자 곧바로 텐트 치기에 적당한 평평하고 넓은 자리를 찾아서 짐을 풀었다.
한쪽에선 텐트를 치고 한쪽에선 버너에 석유를 넣고 다른 사람은 점심준비를 했다. 일사불란한 그 장면이 영우의 눈에는 여러 번의 훈련으로 완성된 군인들의
모습처럼 비쳤다.
어색하게 보고만 있던 영우에게 한 남학생이 배려하려는 듯 쌀을 씻어오라며 코펠에 쌀을 담아서 건넸다. 코펠을 받아 든 영우는 강물이 깨끗하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산 밑의 계곡에 작은 샘물을 찾아서 걸어갔다. 작렬하는 태양열에 뜨겁게
달구워진 모래의 열감이 맨발의 발바닥으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슬리퍼 준비를
못 해온 것을 후회하며 물에 젖을까 봐 벗어놓은 운동화를 신을까 하고 잠시 고민하다, 이대로 뜨거움을 즐겨보기로 마음먹고 그냥 걸어갔다. 영우가 고문과도
같은 고통을 견디며 뒤뚱뒤뚱 걸어가고 있을 때, 그 모습이 우스꽝스럽게 보였는지 영우의 뒤에서 그 모습을 보고 남자친구 한 명이 키득키득 웃으며 따라왔다.
인기척에 뒤를 돌아본 영우가 놀랐다.
“어머 뭐 하러 따라 오세요”
남자가 얼른 대답했다.
“아, 여기는 늑대가 많아서 영우 씨를 보호해 주려고요”
“여기 늑대가 있어요?”
훔찢 놀란 듯 영우가 물었다.
“안 보이세요 보이는 남자들 전부가 늑대인데,,,”
“아이 정말! 걱정 마세요, 저는 그런 늑대는 하나도 무섭지 않으니까. 돌아가서
캠핑찌개 끓일 준비나 하세요. 쌀은 제가 알아서 씻어올게요”
영우의 사양에도 불구하고 극구 따라온 남자는 영우가 쌀을 씻을 동안 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사이 다른 일행들은 텐트를 치고 짐을 풀고 버너에 불을 붙여서 밥 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영우가 보기에 마음이 잘 통하는 친구들처럼 보였다. ‘어쩜 이렇게 손발이 척척 잘 맞을까 대학생들이라 그런가?’
지난날 잊고 있었던 대학생활의 낭만에 대한 호기심이 가슴 저 밑에서 움틀 거리고 있었다. 그러면서 또 한번 대학진학에 실패한 자신의 처지를 질책했다. 그러다
마음을 바꿔 병휘오빠를 떠올렸다. ‘하지만 나에게는 사랑하는 병휘오빠가 생겼잖아,,,’
식사를 마친 후 본격적으로 물놀이를 시작했다. 물을 무서워하는 영우는 물 가장
자리에서 더 이상 깊은 곳을 가지 않으려고 했고, 영우의 심정은 아랑곳없이 남자들은 그런 영우를 조금이라도 더 깊은 곳으로 끌고 가려고 애를 썼다. 거의 울기 직전에 옥주가 나섰다.
“얘들아 그러다 내 친구 너네들하고 다신 안 논다고 하면 좋겠어?”
그 말에 모두들 영우를 낮은 물가로 끌어내 주었다. (그랬던 영우가 나중에 어른이 돼서는 선수급 수영실력을 갖추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물놀이를 즐기는 동안 해가 기울기 시작했다. 밤이 되자 젊은이들의 열기는 낮보다 더 강하게 발산하는 것처럼 보였다. 어디선가 장작불이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강촌의 밤을 밝혀 주었고 이곳저곳에서 술판이 벌어졌다. 이윽고 분위기가 서서히 달아오르자 기타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는 그룹도 있고 카세트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모래밭을 비비며 춤을 추는 그룹도 있는데, 춤에 자신이
없는 사람들은 춤을 추고 있는 친구들을 랜턴으로 비춰주며 분위기를 한껏 띄웠다.
영우와 친구들의 콧망울과 가슴은 부풀어 있었고 무엇보다 그들은 젊었다. 이곳 강촌의 밤은 젊은이들의 뜨거운 열기로 후끈 달아올랐고 한여름 청춘들의 낙원이 분명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