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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지만 죽은 사데교회
2018. 4. 8(주일오전예배) 요한계시록 3:1-6
사냥을 좋아하는 임금님이 사냥을 하고 돌아오다 험한 길에서 발을 다쳤다. 피곤에 지친 왕이 그 순간 얼마나 짜증이 났던지 사냥을 다니는 그 길을 소가죽으로 덮으라고 명령하였다. 그때 지혜로운 신하가 왕 앞에 나와 머리를 숙였다. 그리고 신하는 많은 소를 잡아 길을 덮는 일은 부당하다고 왕이 허락하면 소가죽 2조각으로 왕을 만족시켜 드릴 수 있다고 하였다. 그 말에 왕이 고개를 끄덕이자 신하는 어디서 소가죽 2조각을 가지고 왔다. 그리고 그 가죽으로 왕의 발을 감싸 주었다. 가죽이 왕의 신발이 된 것이다. 그렇게 왕의 발을 가죽으로 덮었을 때 왕은 험한 길을 안전하게 걸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발을 다친 왕은 모든 길을 바꾸려 했지만, 실상은 왕의 발만 바꾸면 되는 문제였다.
그런데 우리가 왕과 같은 모습을 가질 때가 많다. 우리는 나만 바꾸면 되는 일을 모든 것을 다 바꾸려고 하다가 실패하여 분노와 낙심을 가지면서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분들은 소설가 이외수씨가 쓰러질 때마다 일어나면 그만이라는 책에서 쓴 재미난 문구를 들어야 한다.
난 어릴 적에는 우주 정복을 꿈꿨다. 청년기에는 세계정복으로 꿈을 축소하였다. 그러다가 장년기에는 마누라 정복하기도 벅차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하여 어찌 등 뒤에 있는 그대를 껴안을 수 없으랴. 내 한 몸 돌아서면 충분한 것을..
철없는 시절에는 우주정복의 꿈을 꾸는 것처럼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가득차 있다. 그러나 세월의 흐름 속에 옆에 있는 아내도 정복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철이 든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철이 든 사람은 또 한가지를 깨달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내가 바뀌면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 뒤에 있는 사람도 내가 돌아서면 안아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내가 돌아서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있는가? 사무엘상 1장을 읽으면 한숨과 고통가운데 있던 한나의 삶이 완전히 바뀌는 것을 보게 된다. 남편 엘가나의 사랑을 받는 한나는 매년제를 드리러 올라갈 때 남편으로부터 갑절의 분깃을 받았다. 이것은 남편이 한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보여주는 징표이다. 그런데 브닌나의 질투로 인하여 한나는 행복이 아니라, 격분할 수 밖에 없었다.
그때 한나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브닌나와 싸우지 않았다. 또 엘가나에게 당신이 나를 사랑하면 브닌나가 더 이상 괴롭히지 못하도록 결단을 하라고 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한나는 엘가나에게 이 문제로 전혀 이야기 하지 않는다. 사무엘상 1장을 읽어보면 한나는 당하기만 하는 것이다.
왜 한나는 당하기만 했겠는가? 그렇게 격분된 한나는 매년제를 드리러 올라가서 하나님 앞에 이렇게 기도한다. 그 기도내용을 읽어보기 바란다.
(삼상1:10-11)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11서원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기도하고 통곡했다는 것은 한나의 기도에는 마음이 담겨져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자신의 괴로움을 하나님께 또박또박 이야기 하던 한나는 너무 서글프고 힘들어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가진 않아서 하나님께서 이 서글픔을 해결해 달라고 엉엉 소리내면서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한나가 마음을 담아 기도하는 내용이 무엇인가? 한나는 남편 엘가나가 자신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다. 또 브닌나가 자신을 격동하지 못하도록 해 달라고 기도하지도 않았다. 한나는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들으셔서 아들을 낳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결국 한나는 누구를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변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한나가 현명하지 않는가? 존볼트 버그라는 목사님이 쓴 우리가 만나면 서로가 힘이 됩니다는 책이 있다. 그런데 실제 이 책의 원제목은 긍정적이지 않다. 존볼트 목사님은 원제목을 우리가 서로 알기 전까지 우리 모두는 정상이다. 로 하였다. 쉽게 말하면 우리가 서로 알게 될 때 모두 비정상이 된다는 것이다.
왜 존볼트 버그 목사님이 이런 제목의 글을 썼겠는가? 그 책의 첫 장에는 우리가 잘 아는 고슴도치의 딜레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일반적으로 혼자 이동하는 고슴도치는 간혹 외로움을 느낄 때가 있다. 그래서 다른 고슴도치에게 접근을 시도하면 고슴도치는 자신이 가진 3만개의 바늘로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기만 하는 것이다. 외로워서 누군가를 만났는데, 그 만남은 나와 상대방에게 상처만 주는 결과를 가지는 것이 고슴도치의 딜레마이다.
그런데 사람도 고슴도치 딜레마를 가지고 있다. 사람은 나이가 30이 되면 3만개가 넘는 바늘을 가지게 된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 내 의도와 상관없이 곁에 있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또 더 깊이 사귈수록 깊은 상처를 가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그 상처를 가슴 깊이 묻어두고 원망과 분노의 쓴뿌리를 가지고 사는 것이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다 원망과 분노의 쓴뿌리를 가지고 사는 것은 아니다. 백수의 제왕인 사자는 다른 사자와 싸우거나 사냥을 하다가 다치면 바위 위로 올라간다. 그리고 햇볕에 그 상처를 내리쬐게 드러눕는 것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렇게 사자가 자신의 상처를 감추지 않고 햇빛에 내어 놓으면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 그 상처가 아물게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성도는 아픔과 상처가 있으면 그것을 가지고 영광의 하나님 앞으로 가지고 와야 한다. 그리고 그 상처를 하나님께 내어 놓을 때 하나님이 고치시고 회복케 하는 은혜를 더하여 주시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가장 큰 문제는 아픔과 상처를 가지고 하나님께 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감추기 위하여 몸을 웅크리고 세상이 변하지 않은 것을 원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저와 여러분의 모습이 아닌가? 이제 오늘 본문을 보시기 바란다. 사데교회가 위치한 사데는 BC 1200년 리디아 왕국의 수도였다. 450M의 높은 지대에 삼면은 암벽으로 되어져 있었기 때문에 사데는 난공불락의 도시였다.
뿐만 아니라, 사데 옆에는 팍톨루스 강이 흐르고 있었다. 마이다스 전설에 의하면 사냥을 좋아하던 마이다스 왕은 디오니소스 신의 친구인 숲의 신 실레노스를 잡았다. 그리고 실레노스를 매우 친절하게 대하여서 디오니소스는 마이다스의 손에 닿는 모든 것은 금이 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금을 좋아했던 마이다스는 처음에는 굉장히 좋아했다. 그런데 밥을 먹으려고 숟가락을 잡으면 숟가락이 금이 되고, 또 잠을 자려고 침대에 누우면 침대가 금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멀리서 딸이 찾아왔는데 너무 반가와 딸을 껴안는 순간 딸도 금으로 변해버렸다.
마이다스의 손은 복이 아니라, 저주였다. 그래서 마이다스는 이 저주를 풀기 위하여 팍톨루스 강을 찾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목욕을 할 때 마이다스의 저주는 풀리고, 팍톨루스 강에는 많은 사금이 흐르게 되었다. 그런데 그 팍톨루스 강이 사데 옆을 지나고 있었다. 그래서 최초로 금화를 사용한 도시가 사데이다.
이렇게 사데는 난공불락의 성을 가지고 있었고, 또 경제적으로 부요한 도시였다. 그런데 이렇게 부요한 도시를 강대국들이 가만히 놓아두지를 않았다. 그래서 BC 546년 페르시아 고레스 왕에 의하여 사데는 점령당한 후 그리스와 로마를 거치면서 독립국가의 수도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사데는 많은 전쟁을 치루어야 했고, 또 AD 17년에는 엄청난 지진으로 인하여 도시가 초토화되기도 하였다.
많은 전쟁과 심각한 지진을 경험한 사데사람들은 모두 종교심이 강하였다. 그래서 BC 3세기에는 아데미 신전이 건립되고, 또 로마시대에는 제우스 신전을 세워서 우상을 숭배했다. 그리고 또 기독교 복음이 들어와서 많은 사람이 교회 안으로 들어와서 결국 아데미 신전 앞에 교회가 세워져 졌다. 그리고 지금 우리 주님은 그렇게 많은 사람이 모이는 사데교회에 편지를 쓰고 있다.
우리 주님이 사데교회에 뭐라고 편지를 쓰고 있는가?
(계 3:1-3) 사데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2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3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일곱영과 일곱별을 가진 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완전하심과 통치권을 이야기 한다. 그런데 완전하시고, 또 통치권을 가지신 그 주님께서 네가 살았다는 이름은 있지만, 죽은 자라고 하시는 말씀과 또 내가 도둑같이 이르겠다는 말씀은 사데교회 성도들의 심장을 떨게 하는 말이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난공불락의 요새를 가지고 있었던 사데는 2번 점령당한다. 첫 번째 패배가 BC 546년 페르시아 고레스 왕과의 전쟁이었다. 헬라역사가 헤로도투스(Herodotus) 에 의하면 페르시아의 고레스는 사데 성을 포위하였다. 그리고 네가 살았지만 죽은 목숨이다고 말했다. 그런데 사데성의 사람들은 모두 안일한 자세를 취하였다. 왜냐하면 난공불략의 요새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고레스 왕은 사데성으로 들어갈 방법으로 북쪽 계곡을 선택하였다. 그래서 캄캄한 밤에 계곡의 갈라진 틈 사이로 절벽을 타고 올라갔다. 그렇게 난공불락의 요새에 올라간 페르시아 병사들은 쉽게 성을 점령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사데의 군인들은 안일하여서 아무도 보초를 서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그로부터 200년이 지난 그리스의 안티오쿠스가 쳐들어 왔을 때도 사데는 똑같은 모습으로 점령 당했다. 그러므로 사데사람들에게 살았지만 죽었다는 말과 도둑같이 임한다는 말은 잊을 수 없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네가 살았다는 이름은 있지만, 죽은 자라고, 또 내가 도둑같이 이르겠다고 말씀하는 것이다.
왜 예수님은 사데교회에 이런 충격적인 말씀을 하고 있는가? 사데교회는 숫적으로 성장하였고, 또 도시가 부요하였기에 재정적으로도 든든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데교회는 많은 사람이 화려한 예배당에서 예배하고, 또 섬김과 봉사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예배와 헌신과 섬김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없었던 것이다.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교제가 아니라, 그냥 예배하고, 봉사하고 헌신하는 모습만 있었던 것이다.
우리 주님은 이러한 사데교회가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그래서 2절을 보면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2절)과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생각하다, 지키다. 회개하다는 모두 현재형 시제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생각하고, 지키고, 회개한다는 것은 그냥 내가 예수님을 믿고 한 순간 그 은혜를 생각하여 말씀을 지키고, 회개 한번 하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서 나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은 늘 생각하는 것이다. 아니 그 주님과 만났던 그 은혜의 사건을 기억하여서 하나님의 말씀의 도를 지키고 사는 것이다. 또 내 삶이 은혜에 합당치 못한 것들이 너무 많아서 날마다 회개하며 새롭게 되려고 몸부림치며 사는 것이다. 이것이 생각하고, 지키고, 회개하는 삶의 모습이다.
그러면 우리 자여교회는 완전하신 통치자이신 우리 주님의 이 말씀을 듣지 않아도 되는가? 서울대 심리학 박주용 교수님이 세바시에서 아주 재미난 실험이야기 해 주었다. 동일한 선생님이 동일한 내용을 2가지 다른 전달방식으로 가르쳤다. A반에서는 아주 유창하게 강의를 하였고, B반에서는 말을 더듬거리면서 가르쳤다. 그리고 난 후에 학생들에게 자신들이 배운 내용을 평가하라고 하였더니 A반의 학생들은 아주 많이 배웠다고 평가하였지만, B반의 학생들은 조금밖에 배우지 못했다고 평가하였다. 그런데 그 학생들을 모아 두고 시험을 쳤는데, 성적은 차이가 없었다. 결국 강의가 유창하다고 실력이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는 것이다. 그런데 심각한 것은 그 다음이다. 강의가 부족하다고 느낀 학생들은 집에 가서 다시 공부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강의가 유창한 반의 학생들은 자신들이 안다고 착각을 하기 때문에 공부를 하지 않아서 성적은 더 떨어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자여교회가 지금 강의가 유창한 반의 학생들이 되어져 있지 않는가? 목사의 설교는 내용은 모르겠지만 굉장히 열정적이고, 또 예배 분위기도 좋다. 그리고 찬송을 부를 때면 때때로 화음을 넣어서 시골스럽지 않게 멋지게 부른다. 뿐만 아니라, 때로는 일어서서 손뼉을 치면서 찬송을 부르기 때문에 나는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생각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런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면이다. 그래서 열정적인 설교와 찬양을 통하여 하나님의 깊고도 넓은 사랑이 느껴져서 때로는 감격하고, 또 때로는 울컥하는 것이 계속되어야 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 자여교회는 이런 감격의 예배가 계속되고 있는가? 아마 이 질문 앞에 목사님 다른 교회도 별수 없습니다. 그래도 우리교회가 낫습니다 하고 말하고 싶은 분이 있는가? 그런 분은 4-5절을 읽어보기 바란다.
(계 3:4-5)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5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우리 주님은 4-5절에서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우리 주님께 합당한 자 몇 명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
무슨 말인가? 모두가 겉모양만 번지르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하는 신앙인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주님은 그 사람에게 ❶흰 옷을 입히고, 또 그 ❷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않고, ❸하나님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겠다고 약속해 주는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큰 복인가? 다 설명할 수 없어서 두 번째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우지 않겠다는 말씀만 생각해 보기 바란다. 저는 대학 다니는 아이가 3명이 있다. 그러므로 대학합격자 발표를 무수히도 많이 경험하였다. 학교 입학처에 들어가서 아이의 수험번호와 주민번호 그리고 이름을 기록한 후 Enter를 치면 합격여부를 알 수 있다. 그래서 수험번호와 주민번호, 그리고 이름을 기록한 후 Enter를 치는데 손이 떨려서 치지를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Enter를 쳤을 때 합격하였다는 문구가 있으면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그러나 그 합격은 고작 4년의 대학생활을 허락받은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는 것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사는 것이다.
그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것을 확인할 때 얼마나 큰 감격과 감사가 있겠는가? 그런데 그 생명책에 이름이 지워지지 않는 사람은 많은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예배하면서 분위기가 좋아서 은혜 받았다고 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 사람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그 하나님을 만나 감격하는 신앙을 가진 사람만이 이 감사와 감격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이 감사와 감격을 가지고 있는가? 이제 기억하고, 행하고, 또 회개하여서 우리가 잃어버린 그 감사와 감격을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생명책에서 지워지지 않은 내 이름을 가지고 신앙생활 하는 복된 성도가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이제 말씀을 맺는다.
월트 디즈니 감독 애니매이션 영화 라이언 킹을 보았는가? 어린 사자 심바는 빨리 왕이 되고 싶다는 노래를 부른다. 평화로운 왕국에 아버지가 다스리는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심바는 어릴 때부터 원했던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가 죽었는데, 심바는 그것이 자기 때문이다는 죄책감을 가졌다. 그리고 삼촌 스카가 무서워서 밀림의 왕국을 버리고 초야로 도망했다. 그곳에서 미어켓 티몬과 멧돼지 품바와 친구가 되어서 모든 것을 잊고 살았다. 그랬던 심바는 다시 밀림의 왕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삼촌과 싸워서 이기고 어지러운 밀림의 왕국을 평화의 나라로 만들었다.
그런데 심바가 다시 밀림의 왕국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던 장면이 있다. 그 장면을 보시기 바란다. <동영상 너는 누군지 기억해라 3‘ 17“>
아버지 무파사는 아들 심바에게 네가 누구인지 기억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심바는 그 자신이 누구인지를 기억하고 다시 왕의 자리로 돌아간 것이다.
저도 여러분께 기억하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내가 누구인가?가 아니라, 하나님이 내게 베푼 은혜와 사랑을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앞에 내가 합당한 크리스챤으로 서 있는지를 돌아보고 이제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의 모습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외형적인 조건을 갖춘 성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여서 하나님의 생명책에 그 이름이 지워지지 않는 복된 삶을 살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