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리의 진실 - 제1부
1. 아버님의 이북 노정
4) UN이 참전한 6·25 전쟁-하나님의 재림주 구출섭리
① 한국전쟁 발발과 흥남수용소
한국전쟁이 일어난 것은 1950년 6월 25일 미명이었다. 아버님과 감방에서 함께 지낸 김인호 씨에 의하면, 수용소에서는 한국전쟁은 수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전해졌다.
“6월 25일 새벽 4시를 기하여 미 제국주의자의 지시를 받은 남의 병사들이 38도선 전역에 걸쳐 대대적 무력 침략을 해왔다. 우리의 용맹한 병사들은 즉각 반격에 나와 용감하게 적을 퇴출시키고 있다. 동지들은 어떠한 사태가 일어나도 동요하지 말고 맡겨진 책임을 완수하도록.”
수용소에서는 인민군의 승리를 알리기 위하여 매일 요란스러웠다. 저녁의 ‘독보회’에서 읽는 노동신문은 북한 승리의 기사를 크게 취급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이 시작되면서부터 수인들에게 오는 식료의 배급은 점점 형편없는 것이 되었다. 면회도 금지되었기 때문에 미숫가루도 손에 들어오지 않게 되어 거의 모든 수인은 빈사상태가 되어 사망자는 이전보다도 많이 나오게 되었다.
유엔군은 북한에 대한 폭격을 개시하였다. 흥남비료공장에 대한 폭격은 1950년 8월 1일이었다. B-29 폭격기 50대가 흥남 공업지대를 맹렬히 폭격하였다. 폭탄은 합계 1,500발, 총 중량은 750톤 이상이 되었다. 비료공장에는 철근 콘크리트 방공호가 있었지만, 거기는 일반인이 먼저 들어갔기 때문에 수인은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것으로 생사가 갈렸다. 그렇다 해도 일반인이 들어간 방공호에서의 사망자가 압도적으로 많았고, 거기에 들어가지 못한 수인들의 사망자는 적었다. 박정화 총반장에 의하면, 일반인이 2,700명, 수인이 270명 사망하였다고 한다.
폭격을 받은 8월 1일 수인들의 얼굴은 죽은 사람 같이 얼어붙어 있었다. 그런 가운데 박 총반장에 의하면, 아버님만은 태연하게 폭격 같은 것은 없었던 듯한 태도였다고 한다. 아버님은 미리 이와 같은 사태가 올 것과 또 자기를 중심한 직경 12미터 안은 하나님이 지켜주실 것을 알고 친한 사람들을 자기 가까이에 있도록 전하고 있었다. 폭격 때 아버님은 혼자서 명상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