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전연명의료의향서가 있기까지 -
안락사와 존엄사, 그 끝나지 않은 논쟁
품위 있게 죽을 권리를 달라
〈사례 1〉
평소 술을 좋아하던 음주만(가명)씨는 사업 실패 후 부쩍 주량과 술자리가 늘었다. 무려 10여 년째다. 하루는 술에 취한 채 화장실에 가다가 기둥에 머리를 부딪치고 시멘트 바닥에 쓰려졌다. 피를 흘린 채 의식을 잃고 쓰러진 그를 발견한 아내 한계야(가명)씨는 그를 곧바로 종합병원으로 옮겼다.
경막외출혈상(뇌와 경막을 둘러싼 혈관이 찢어져 두개골과 경막 사이에 피가 고이고 굳어지는 상태)이었다. 병원에 도착한 후 외과 전문의 봉달희(가명)씨의 집도로 수련의인 전공의(가명)씨 등 의료진이 혈종 제거 수술을 시행한 결과 음씨의 상태는 다행히 호전됐다. 반나절이 지나자 외부의 자극에 반응을 할 정도로 좋아졌다. 하지만 뇌수술에 따른 뇌부종으로 음씨는 스스로 호흡을 할 수 없어서 인공호흡기를 부착한 채 치료를 받게 됐다.
아내 한씨는 병세가 호전된 남편을 보고도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문제는 돈이었다. 사흘간 치료비만 해도 수백만 원에 달했고, 그보다 앞으로 치료비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동안 돈벌이도 하지 않고 술과 폭행으로 가족들을 힘들게 했던 남편이 짐이 된다는 생각에 한씨는 퇴원을 결심했다. 몇 차례 퇴원 요구에 담당 의사인 봉씨와 전씨가 거절해 왔던 터라 더욱 강하게 밀어붙이기로 했다.
"선생님, 아무래도 우리 남편 퇴원시켜야겠어요."
"예? 지금 퇴원하면 환자 큰일 나요. 치료도 더 해야 됩니다. 혼자서는 호흡도 못 한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죽을 수도 있다고요. 1주일 정도 경과를 지켜보고 생각해 봅시다."
"저, 돈 없어요. 선생님이 돈 대줄 것도 아니잖아요. 하여간 퇴원시킬래요."
"허 참, 정 그러시다면…. 대신 잘못되면 우리도 책임 못 져요. 자, 여기 서약서에 사인하세요. 퇴원하면 환자가 사망하더라도 병원에 어떠한 이의도 제기하지 않겠다는 내용입니다."
전씨는 상사인 봉씨의 지시를 받아 입원 사흘째 퇴원을 허락했다. 집으로 돌아간 음씨는 인공호흡기를 뗀 지 5분 만에 호흡곤란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안타까운 일이다. 요지는 이렇다. 돈이 없으니 환자를 퇴원시켜 달라고 가족이 요청한다. 몇 차례 만류하던 의사가 마지못해 퇴원을 허락한다. 결국 환자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가족과 의사들은 도덕·윤리적 비난에 직면해야 했다. 그렇다면 법적 책임도 져야 할까.
<남편의 목숨을 손에 쥔 아내의 선택>
1998년에 시작된 이 재판은 장장 6년이 지나서야 결론이 났다. '보라매병원 사건'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 사건은 법학계와 의료계에 많은 고민과 논쟁거리를 던져 줬다. 검찰은 가족과 의사들 모두 살인죄로 기소했다. 수사 결과 서로 공모해 음씨를 살해했다고 봤기 때문이다.
우선 한씨다. 돈이 없다는 이유로 위독한 남편을 퇴원시킨 행위는 정당화할 수 없다. 강제로 산소호흡기를 뗀 것과 진배없다. 법원은 "치료가 필요한 남편을 보호할 의무가 있는 한씨가 음씨를 방치해 사망에 이르게 했다"며 살인죄1) 를 인정했다.
그렇다면 퇴원을 허용한 봉씨와 전씨는 어떻게 됐을까. 이들은 "한씨를 계속 설득해 치료하게끔 했으나 마음을 바꾸지 않았으며 경제적 이유로 퇴원을 원한다는데 의사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고 항변했다. 하지만 항소심을 맡은 서울고법은 "인간의 생명은 개인이 임의로 처분할 수 없는 것으로 인간의 생명과 결부된 의료 행위도 이러한 원칙 자체는 포기할 수 없다"는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법원은 "보호자의 경제적 고려에 의한 퇴원 요구에 응해 생존 가능성이 있는 피해자의 치료 행위의 중지를 초래케 한 행위에 대해서도 단순한 윤리적 책임뿐 아니라 현행법에 의한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고 판시했다.
대법원은 의사들에게 살인의 고의가 있다고 판단했다. 인공호흡기를 떼면 환자가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공호흡기를 제거하는 등 치료를 중단하는 경우 환자가 사망할 가능성 내지 위험성이 예견됐고 의사들도 이러한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으므로 비록 한씨의 요청에 의해 마지못해 치료를 중단했다고 하더라도 그 당시 음씨의 사망이라는 결과 발생에 대한 미필적 인식 내지 예견마저 없었다고 보기 어렵다." (대법원 2002도 995 판결)
그러나 의사들을 한씨와 살인을 모의한 '공동정범2) '으로 보지는 않았다. 대법원은 "공동정범은 주관적으로 공동가공의 의사와 객관적 요건으로 기능적 행위지배를 통해 범죄를 실행했을 것이 필요하다"면서 의사들에게는 기능적 행위지배가 없었다고 판단했다.
쉽게 말해 의사들은 퇴원을 허용해 부양자인 아내 한씨에게 음씨의 생사를 맡긴 것이지, 음씨가 사망에 이르는 핵심적 과정을 계획적으로 조종하거나 촉진하는 등 지배하고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게 대법원의 입장이었다.
하지만 결국 법원은 의사인 봉씨와 전씨가 한씨의 행위(치료 중단에 의한 살인)를 용이하게 했다며 살인방조죄를 적용했다. 다만 ▲의사들이 주씨에게 최선의 의료 조치를 취했고 ▲퇴원을 수차례 만류했으며 ▲돈이 없으면 1주일 정도 있다가 도망가라고 권유한 사실까지 들어 징역형의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생존 가능성이 있는 환자에 대한 치료 중단은 설사 그것이 보호자의 요청에 의한 것이라도 살인이나 살인방조죄가 성립할 수 있다는 뜻이다. 2004년에 이 판결이 선고되자 법조계와 의료계는 술렁였다. 특히 서울고법은 이 사건을 통해 소극적 안락사와 관련한 의미 있는 지적을 했다.
"인간의 생명과 직결되는 치료 행위의 중지는 환자가 불치의 병에 걸려 있고, 죽음을 피할 수 없는 말기 상태에서 단지 생명을 연장하는 의미밖에 없는 치료 행위를 환자의 자기결정권에 기한 진지한 치료 중지 요구에 응해 의사의 양심적 결단에 따라 이루어질 경우에만 제한적으로 허용될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치료 행위 중지의 허용 여부 및 그 범위, 절차와 방법에 대해서 사회적으로 진지한 논의와 합의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로부터 몇 년 후 존엄사와 안락사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는 사건이 등장한다. 바로 2009년 '무의미한 연명치료 거부 사건'이다.
**********************************************************************************************
행복하게 살 권리만큼 중요한, 품위 있게 죽을 권리
〈사례 2〉
1932년생인 김 아무개 할머니는 2008년 폐종양 조직검사를 받기 위해 세브란스병원을 찾았다. 그런데 할머니는 검사 도중 과다출혈 등으로 저산소성 뇌손상을 입게 됐고 인공호흡기를 부착한 상태로 생명을 유지해 왔다. 이때부터 할머니는 지속적 식물인간 상태(persistent vegetative state)에서 항생제 투여, 인공영양 공급, 수액공급 등의 치료를 받아왔는데 의사들은 인공호흡기를 제거하면 곧 사망에 이르게 된다고 진단했다.
가족들은 할머니가 평소 무의미한 생명 연장을 거부하고 자연스런 사망을 원한다는 의사를 밝힌 만큼 병원 측에 치료 중단을 요청했다. 하지만 병원 측은 환자에 대한 진료를 포기할 수 없다며 거부했다. 결국 가족들은 할머니의 인공호흡기를 빼 달라며 소송을 내기에 이르렀다.
'최소한의 품위를 지키면서 생을 마감할 권리(존엄사)'와 '환자의 생명을 보호할 의무'가 법정에서 맞섰다. 1, 2심을 거친 이 사건은 대법원까지 올라갔다. 대법원은 공개변론을 열고 대법관들의 치열한 논쟁을 통해 전원합의체 판결로 환자의 존엄사를 인정했다. 그러면서 아주 엄격한 기준이 필요하다는 단서를 강조했다.
대법원은 생명권이 가장 중요한 기본권임을 부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인간의 생명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라는 근원 가치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보호되어야 한다"며 "이미 의식의 회복 가능성을 상실해 인격체로서 활동을 기대할 수 없고 회복 불가능한 사망의 단계에 이른 후에는 연명치료를 환자에게 강요하는 것이 오히려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해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법원은 헌법에서 존엄사를 인정하는 근거를 찾았다.
〈헌법〉 제10조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인간의 존엄성과 행복추구권에는 자기운명결정권이 전제되어 있고 자기운명결정권에는 환자가 자기의 생명과 신체의 기능을 어떻게 유지할지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법원의 판단이다. 회복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죽음을 맞이하려는 환자의 의사결정을 존중하는 것이 헌법정신에 부합한다는 말이다.
대법원은 "진료 중단은 극히 제한적으로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며 존엄사를 허용하기 위한 몇 가지 기준을 제시했다.
• '회복 불가능한 사망 단계1) '에 진입한 환자에 대해 진료 중단을 허용해야 한다.
• 미리 의료인에게 자신의 연명치료 거부·중단에 관한 의사(사전의료지시)를 밝힌 경우에 해당해야 한다.
• 사전의료지시가 없는 경우에는 환자의 평소 가치관이나 신념 등에 비추어 연명치료 중단을 선택했을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경우에만 가능하다.
• '회복 불가능한 사망 단계'는 전문 의사 등으로 구성된 위원회의 판단을 거쳐야 한다.
김 할머니는 대법원 판결에 따라 2009년 6월 인공호흡기를 제거한 상태에서도 200일 정도 생존을 이어갔다. 이 때문에 종교·의학·법학계와 시민단체에서는 존엄사를 둘러싼 찬반 논란이 더욱 가열됐다.
행복하게 살 권리 못지않게 고통 없이 품위 있게 죽을 권리도 중요하다. 안락사, 존엄사와 같은 민감한 문제가 우리 사회에서도 자꾸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사회적 논의와 입법이 절실한 시점이다.
글 - 김용국
서울중앙지법, 동부지법, 가정법원, 고양지원 등에서 법원공무원으로 10년 넘게 일하고 있다. 2009년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라는 글을 연재, 20회 만에 조회수 100만을 훌쩍 넘길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으며, 그 해 인터넷신문 '오마이뉴스' 선정 영예의 대상을 차지했다.
출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