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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국 시인선 9〉
영원히 빛나는 별 시인 윤동주
(1917년12월30일-1945년 2월16일)
어두운 숲길 목적지를 찾지 못해 헤매는 사슴처럼 고요히 자아를 응시하던,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암울한 시대 언젠가 홀연히 나타날 '아침'을 기다리던 윤동주. 작은 등불을 밝혀 시대의 어둠을 밀어내어 보려던 청년시인은 일제와 조선총독부에 대한 비판과 자신과 민족의 아픈 자아성찰 속에서 애태우다가, 28세 어린 나이에 식민의 희생양이 되어 꿈을 펼치지 못하고 황망하게 우리의 곁을 떠났다. 하지만 그는 영원히 빛나는 시를 남기고 지금도 우리의 곁에서 별로 남았다.
1. 출생과 성장기
윤동주尹東柱는, 당시 북간도 간도성 화룡현 명동촌(지금의 지린성 용정시)에서 아버지 윤영석과 어머니 김용 사이에서 4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다. 간도 이주민 3세였으며 본관은 파평으로 아명은 해환이며 두 동생은 어려서 요절하였다. 19세기 말, 함경도와 평안도 일대에 기근이 심해지자 조선 사람들은 국경을 넘어 간도와 연해주 등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증조부인 윤재옥도 집안을 이끌고 1886년 함경도에서 만주로 이주하였다.
아버지 윤영석은 1910년 독립지사의 딸이며,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로 이름이 높던 김약연金躍淵의 누이인 김용과 결혼하여 명동 촌에 정착하게 된다. 명동은 1899년 윤동주의 외숙부 김약연 등에 의해 개척된 마을이며, 조선인들이 모여 살던 전형적인 농촌으로 기독교와 교육, 독립운동의 중심지로 문화운동이 활발하게 일던 곳이다. 할아버지 윤하현은 기독교 장로로 부유한 농부였고, 아버지 윤영석은 이곳 명동학교에서 교사로 교편을 잡았다. 동주는 어려서부터 자연스레 할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고모 윤신영의 아들인 고종사촌 송몽규는 평생의 친구이고 동지가 되었다. 그는 소학교 4학년 때부터 나중에 일본 유학과 죽음까지 함께하는 송몽규와 「어린이」, 「아이 생활」같은 소년 잡지를 구독하고 연극 활동을 하면서 문학적 소양을 닦는다. 명동소학교 5학년 때인 1925년에는 송몽규와 함께 문예지 《새 명동》을 직접 등사판으로 발간하며 자신의 동요와 동시를 싣는 등 어려서부터 문학적 재능을 발휘하였다. 명동소학교는 학생들의 졸업선물로 김동환의 시집 『국경의 밤』을 선물하는 등 문학에 대한 진심의 교육이었다.
14세에 소학교를 졸업하고 명동촌에서 20여리 떨어진 중국인 관립학교인 대랍자학교를 다녔는데, 1년쯤 다닌 이곳에서의 추억은 이국소녀들의 이름과 함께 시 「별 헤는 밤」을 낳는다. 가족이 용정으로 이사하여, 기독교계 학교 은진중학교에 입학한다. 1935년 9월에는 소학교 동창인 문익환이 다니던 평양의 숭실중학교로 전학하였고 학우지 〈숭실활천〉에 시 공상空想을 발표하였다. 신사참배 거부로 숭실중학교는 폐교가 되어 문익환과 함께 용정에 있는 광명중학교로 편입하게 되었고, 시인은 그곳에서 정일권을 만나게 된다. 송몽규와 함께 연희전문에 입학한 것은 스물두 살 때인 1973년의 일이다. 송몽규도 〈동아일보〉신춘문예에 「숟가락」으로 당선된 바 있어, 당시 시인으로 두각을 나타내었다. 윤동주는 문학을 전공하려했지만 아버지 윤영석이 의학을 전공하라고 해서 심각한 갈등을 겪기도 했으나, 식음을 전폐하며 저항한 윤동주로 인해 할아버지 윤하현과 외숙부 김약연이 나서 아버지를 설득, 마침내 윤동주의 문과반 진학이 이루어진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는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스라이 멀 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1941. 11. 5.)
- 「별 헤는 밤」 전문
2. 문학과 일본 유학
18살이 되던 해 「삶과 죽음」, 「초 한 대」, 「내일은 없다」등 3편의 시를 썼으며, 21살이 되던 해에 본인의 이름으로 작품을 발표했다. 1938년 4월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한 윤동주는, 최현배의 조선어 시간을 비롯해 손진태의 역사 시간, 이양하의 영문학 강의 등을 들으며 민족의식과 우리말에 대한 자긍심을 키우게 된다. 강의가 없으면 주로 산책과 독서로 시간을 보내던 그는 정지용, 김영랑, 백석, 이상, 서정주등의 시를 열심히 읽고, 외국 문인으로는 도스토옙스키, 앙드레 지드, 발레리, 보들레르, 라이너 마리아 릴케, 프랑시스 잠, 장 콕토 등에 빠져든다. 윤동주의 주변인들은 그가 선천적으로 걷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전한다. 1941년 일제의 혹독한 식량정책으로 기숙사에서 나온 윤동주는 일제의 요시찰 인물인 소설가 ‘김송’의 집에서 넉 달쯤 하숙 생활을 한다. 「무서운 시간」, 「태초의 아침」, 「십자가」, 「또 다른 고향」 같은 작품을 쓴다. 그 뒤에도 하숙방을 전전했으며 친구 라사행을 만나 중학교 때부터 시를 탐독했던 문학적 정신적 스승 정지용을 방문, 시와 담론을 자주 나누기도 했다는 후문이다. 그해 《소년》지에 시를 발표하여 원고료를 받기도 했다. 졸업을 앞둔 윤동주는 그동안 쓴 시 19편을 묶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으로 자필 시고집詩稿集 세 부를 만든다. 그 중 하나는 자신이, 한 부는 영문과 교수인 이양하에게, 나머지는 후배 정병욱에게 준다. 본래 시집의 제목은 병든 사회를 치유한다는 상징의 ‘병원’이었지만 서시를 쓰고 난 뒤 제목을 바꿨다.
윤동주는 「별 헤는 밤」을 완성한 후 자선시집을 만들어 졸업 기념으로 출판을 계획했으나, 「십자가」, 「슬픈 족속」, 「또 다른 고향」 등 몇 편의 시가 일제의 검열을 통과하기 어려울 것이며, 일본 유학을 앞둔 윤동주의 신변에도 적지 않은 위험이 따를 것이라는 이양하교수의 만류에 따라 출판을 보류하였고 졸업 직후 용정으로 돌아와서도 아버지와 출판문제를 논의하였으나 이번에는 돈 문제로 계획을 접는다. 그 뒤 정병욱에게 전해준 시고만 남아 그의 어머니가 명주보자기에 싸서 장롱 속 깊이 감춰둔 덕분에 해방 뒤인 1948년 1월 30일, 드디어 윤동주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빛을 보게 된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 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 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서시」 전문
일본 유학길에 오른 시인은 1942년 릿교대학 문학부 영문과에 입학했다가 기독교계 학교이며 가장 좋아하는 시인 정지용이 다녔던 도시샤대학 영문학과에 편입하였다. 1943년 7월 14일 여름방학을 앞두고 집에 전보를 치는 등 귀향준비를 서둘렀으나 어느 때부터인가 불령선인으로 지목되어 일본경찰의 감시를 당하고 있던 시인은, 귀향 직전 사상범으로 교토경찰서 고등계에 검거되었다. 1943년 한국 학생대표가 한국 독립의 의지를 밝히려 중국의 장제스 총통과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가던 도중에 일경에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그 사건의 여파로 당시 똑똑해 보이는 한국 학생들을 잡아들였는데, 그때 윤동주와 송몽규도 체포된 것으로 보인다. 송몽규도 함께 잡혀 들어가게 되는데 이들의 죄명은 ‘사상 불온, 독립운동, 비일본신민, 서구사상 농후’ 등이다. 교토지방재판소는 윤동주에게 2년 형을, 송몽규에게 2년 6개월 형을 언도하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하였다. 판결문의 내용을 돌아본다.
“윤동주는 어릴 적부터 민족학교 교육을 받고 사상적 문화적으로 심독했으며, 친구 감화 등에 의해 대단한 민족의식을 갖고 내선(일본과 조선)의
차별 문제에 대하여 깊은 원망의 뜻을 품고 있었고, 조선 독립의 야망을 실현시키려는 망동을 했다.”라고 적혀 있다.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엽어집니다
도로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 「자화상」 전문
3. 영원한 이별과 문학사적 평가
1945년 간도 명동촌의 집으로 윤동주의 사망을 알리는 전보 통지서가 날아든다. “2월16일 동주 사망, 시체 가지러 오라.” 아버지 윤영석이 당숙 윤영춘과 함께 시신을 넘겨받으러 떠난 며칠 뒤 “동주 위독함, 원한다면 보석할 수 있음, 만약 사망 시에는 시체를 인수할 것, 아니면 규수제국대학 해부용으로 제공할 것임.”이라는 내용의 때늦은 우편물이 도착한다. 그 얼마 전, 후쿠오카형무소에 들어간 윤영석은 푸른 죄수복을 입은 조선인 청년 50여 명이 주사를 맞으려고 시약실 앞에 줄을 서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윤영석은 그 속에서 피골이 상접한 송몽규를 발견한다. “저 놈들이 주사를 맞으라고 해서 맞았더니 이 모양이 되었고, 동주도 그 모양으로·····.” 일제는 살아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세균 실험을 했는데, 윤동주도 바로 그 실험에 이용되어 죽은 것이다. 말을 맺지 못하고 흐느끼던 송몽규도 그로부터 23일 뒤 윤동주의 뒤를 따른다. 방부처리를 해놓아 윤동주의 시신은 말끔했다. 시신은 화장된 뒤 가족들에게 인도 되었고 3월 어느 눈보라 치던 날에 시인은 간도 용정의 동산교회 묘지에 묻힌다. 천인공노할 일제의 만행에 영문도 모른 채 망국의 재물이 되어 희생된 천재시인 윤동주, 너무나 슬프고 억울한 불과 28세 청년시인의 죽음이었다. 그의 조부 윤하현의 비석으로 마련한 흰 돌을 그의 비석으로 사용하였다. (당시 일본은 미국과 같이 혈액을 대체하는 생리식염수를 연구하고 있었지만 기술의 부족으로 해수를 사용했다. 감옥에서 하루 한차례 정체모를 주사를 맞던 윤동주의 증상으로 보아 해수의 오염으로 인한 뇌질환을 추정하는 견해가 많다. 함께 수감되었던 송몽규 또한 동일한 증상으로 사망하였다는 것으로 그를 추정한다).
윤동주의 시가 더욱 높이 평가되는 것은 아름다운 시어에도 가치가 있지만, 자기반성이라는 유례없는 주제로 한국문학의 지평을 넓혔다. 자신을 둘러싼 식민지 피지배현실이라는 테두리와 내면세계 사이에서 심각한 자기혐오와 수치심에 빠져 괴로워하면서도, 자기 응시와 자기 성찰을 통해 윤리적인 자기완성을 추구하였고 내부에 도사린 한 점의 욕됨조차 용납하지 않으려 했다. 또한 모진 검열에 자기표현을 쉽게 할 수 없는 시대에 곧은 민족적 저항정신으로 죽을 각오를 하고 한글로 일제를 비판하는 시를 썼다는데 있다.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줄에 줄이자
만 24년 1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한다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러운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 「참회록」 전문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건너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 「새로운 길」 전문
4. 남겨진 이야기
가.
1947년 2월 정지용의 소개로 경향신문에 유작이 처음 소개되고 함께 추도회가 거행된다. 1948년 1월, 유작 31편과 정지용의 서문으로 이루어진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정음사에서 간행하였다. 1962년 건국공로훈장이 서훈 신청되었으나 유족들의 사양으로 보류되었다가 1990년 8월15일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나.
1985년에는 그의 시정신詩精神을 계승하기 위해 《윤동주문학상》이 한국문인협회에 의해 제정되었다.
다.
후일 가수가 되는 윤형주도 그의 6촌 재종이다.
라.
하도 말이 없어서 연애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술을 마시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담배도 피우는 모습을 보지 못했습니다.
뭐든 누가 달라고 하면 책이든 샤스든 거저 주는 편이었고 공부도 시간을 아끼지 않고 했습니다.
오랜 시간 앉아서 펜으로 시를 쓰는 사람이었지만 중학교 때에는 축구선수로 활약할 정도로
운동을 좋아했습니다. 순하디 순한 사람이었습니다.
(1947년 정지용시인이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 군과 나눈 대화)
마.
윤동주의 가족만큼이나 절친한 평생지인을 두 사람 꼽자면 송몽규와 정병욱이다. 송몽규는 일찍이 김구가 광복군 무관을 양성하기 위해 만든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에 설치한 한인특별반2기생으로 입학해 군사훈련을 받으며 독립에 대한 열망을 가득 품게 됩니다. 이후 윤동주와 일본 유학시절부터 죽음까지 함께한 그는 18세 나이에 〈동아일보〉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윤동주가 늘 앞서가는 송몽규를 잘 따르면서도 부러워했다고 한다. 대범한 송몽규와 조용하고 차분한 윤동주의 관계는 가족 이상의 관계였고, 윤동주의 문학에 지대한 영감과 비약을 이끌어준 인연이었습니다. 정병욱은 연희전문대학에서 만난 친구로 윤동주보다 5살이나 어렸지만 문학적 교류를 통해 아주 가까운 사이였다. 훗날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와 정병욱의 여동생이 결혼할 만큼 끈끈한 인연이 있는 집안이기도 했다.
【참고문헌】
1. 나는 문학이다, 장석주, 2009.09,09
2. 연세대학교 윤동주 기념 사업회
3. 윤동주 「쉽게 쓰여진 시」,「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정음사, 1943)
4. 두산백과
5. 한국현대시대백과.
6. 카멜북스.
글쓴이; 이희국 (월간문예사조편집위원회장, 이어도문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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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희국 회장님
귀한 시간 내시어 집필하신 민족시인 윤동주 시인의 발자취를 감사히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