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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재 ;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모곡 사야도의 12연기 강론 / 강의 ; BBS불교방송 -상좌 불교 한국 명상원 원장 묘원 |
어려운 12연기 공부를 하시느라고 얼마나 수고가 많으십니까?
12연기는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입니다.
이 지혜는 부처님이 발견하신 지혜라서 일반적인 범부들은 알기가 어렵습니다.
바로 12연기의 원인과 결과를 발견하신 뒤에 오온을 발견하시고,
오온의 느낌을 발견하신 뒤에 위빠사나라는 수행을 통해서
열반에 이르는 과정이 부처님이 가신 길입니다.
그래서 지혜가 나야 아는 지혜이기 때문에, 처음에 생각으로는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불교의 과정은 제일 먼저 ‘빠리얏띠’라는 과정으로 시작합니다.
이 빠리얏띠는 경장, 율장, 논장을 이해하고 숙지하는 과정입니다.
이 빠리얏띠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빠띠빠띠’의 과정을 거칩니다.
기본적으로 법문을 듣고, 읽고, 이해하는 과정을 통해서
다음에는 빠띠빠띠라는 수행의 과정을 경험합니다.
듣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수행이 따라야 됩니다.
저희가 지금 하고 있는 법문의 제목이
12연기와 위빠사나 이듯이 12연기로만 그치면 이론에 불과한 것입니다.
연기를 탈출할 수가 없습니다.
12연기의 원인과 결과를 아는 그 방법을 선택해서
실천하는 것이 위빠사나 수행입니다.
그래서 빠띠빠띠는 사마타 수행이나 위빠사나 수행 두 가지를 다 말합니다.
이렇게 7청정과 16단계의 지혜인 위빠사나의 과정을 거치면
마지막에는 ‘빠띠웨다’라고 해서 통찰 지혜가 나서 도와 과를 성취합니다.
바로 이 도와 과가 열반입니다.
그래서 지금 저희가 듣고 있는 12연기는 먼저 교학적으로 이해를 하신 뒤에
반드시 실천적 수행을 통해서 그 뜻을 숙지하셔야 되고, 그렇게 숙지되었을 때에
비로소 통찰 지혜가 나서 연기의 구조를 완전히 이해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우선 듣고 생각으로라도 받아들이셔야 됩니다.
지난 시간에 제가 두 번이나 말씀을 드렸습니다.
아난다 존자께서 부처님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세존이시여! 희유합니다. 세존이시여! 불가사의합니다.
그리고 세존이시여! 이 연기는 심오하고 그리고 더욱 더 심오하게 보입니다.
그리고 한편 저에게 명료한 것과 같이 생각됩니다.”
이렇게 아난다 존자가 부처님께 12연기의 심오함을 말씀드렸습니다.
한 번만 말씀을 드린 게 아니고 세 번이나 강조를 했습니다.
여기서 ‘희유하다’라는 말은 ‘경이롭습니다’라는 뜻이고
‘불가사의합니다’ 는 ‘놀랍습니다. 실로 놀랍습니다.’ 라는 말이고
‘심오하다’ 는 ‘그 뜻이 깊고 그윽하다.’ 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렇게 연기를 최대한 칭송했을 때 부처님께서는 의외의 답변을 하십니다.
“아난다여! 실로 그와 같이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아난다여! 실로 그와 같이 말을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아난다여! 이 연기는 심오하고 더욱 더 심오하게 보인다. “
이렇게 세 번이나 거듭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아난다여! 이 법을 깨닫지 못함으로부터, 이해하지 못함으로부터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은 뒤얽힌 실과 같이 되고, 먼지에 덮인 공과 같이 되고
문자풀과 빠빠자풀과 같이 되어 고처, 악취, 악처의 윤회를 넘을 수가 없다.”
그렇습니다. ‘연기가 심오하다.’ 그랬는데
세존께서는 ‘아난다여! 그런 말을 하지 말라.’
고 반어법을 쓰신 것은 연기가 심오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고
아난다가 알고 있는 수준의 연기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 당시에 아난다는 수다원 도, 과를 성취한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렀을 때야
비로소 연기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바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희유하다, 불가사의하다, 심오하다. 그런 말을 하지 말아라.
이 법을 진심으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넌 아직 연기에 대해서 표피적 관점만 가지고 있다.” 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연기를 완전히 알 때만이 고처, 악취, 악처의 윤회를 끊을 수가 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고처는 괴로움만 있는 세계,
사악도인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의 세계를 말합니다.
그리고 악취는 비참한 존재의 세계를 말합니다.
그리고 악처는 고통뿐인 지옥 그런 곳을 말합니다.
그래서 고처, 악취, 악처, 이것이 다 사악도를 의미합니다.
이처럼 연기는 아난다 존자의 이야기처럼 ‘심오하다’는 것,
그것은 아는데, 그 참 뜻, 그 깊이는 우리가 알기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연기의 원인과 결과는 우리가 이론적으로 원인과 결과라고 하지,
실제로는 원인과 결과의 지혜가 날 때만이 비로소 원인과 결과를 알 수가 있습니다.
제가 오래 전 미얀마에서 수행할 때, 두 가지 분명한 사실을 알았습니다.
첫 해에 미얀마에 가서 수행을 할 때에 사람이 윤회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원인과 결과로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저는 상당 부분의 의문을 해결했습니다.
그 모든 원인과 결과는
자기 스스로가 일으킨 원인에 의해서 자기 스스로가 받는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단지 이론으로 원인과 결과를 안 것이 아니고,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서 모든 것들이 원인과 결과라는 통찰 지혜가 났을 때,
저는 구름이 덮인 어둠에서 밝음을 보았습니다.
‘그렇다. 모든 것이 원인과 결과로구나.’ 그렇다고 본다면
‘모든 것은 내가 일으킨 원인으로 내가 받는 결과 밖에 없구나.’ 라고 알고
밖으로 나가서 있는 모든 번뇌, 괴로움을 제가 해결할 수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스스로가 일으킨 원인으로 스스로가 받았다는 사실에 대해서
누가 무엇을 더 불평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이 연기입니다.
우리가 연기를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바로 무명과 다른 원인인 결과로서의 행을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어리석기 때문에 과거에 우리가 어리석은 행위를 한 그 결과로 현재를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지혜가 있으면 지혜가 있는 행위를 하고,
어리석으면 어리석은 행위를 하도록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현재 우리가 잘 살고 있다면 과거에 선한 마음으로 선한 행위를 해서
선한 과보를 받아서 잘 사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예쁘게 태어났다. 라고 한다면 과거에 아름다운 마음으로
아름다운 행위를 해서 그 과보로 현재에 아름답게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과거의 원인으로 현재 내가 아름답게 태어났다고 해도,
내가 부자가 되었다고 해도, 현재 이것을 지속하는
새로운 원인을 일으키지 않으면 그것은 현재로 끝납니다.
그러니까 과거의 원인으로 현재 내가 어떤 이익을 보았다 하더라도,
지금 새로운 현재의 원인을 만들지 않으면
지금 이후의 미래는 그 결과가 달라집니다.
그래서 우리가 연기를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
과거에 내가 어디서 왔는지를 모르고
단지 과거의 전생으로부터 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거기서부터 잘못된 견해가 생깁니다.
우리는 과거의 전생으로부터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어디서 왔을까요?
과거의 내가 온 것이 아닙니다.
과거의 그 순간의 마음이 일으킨 행위의 결과가 지금 나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어디서 온 것이 아니고 과거의 원인으로부터 왔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온 것이 아닙니다. 이미 나는 그 순간에 없었습니다.
마음은 있었지만, 매순간 일어나고 사라지는 연속적 현상의 마음만 있었을 뿐입니다.
이처럼 과거의 원인과 현재의 결과를 모르기 때문에 시작부터 연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실천적 수행인 위빠사나 수행의 통찰 지혜가 나지 않고서는
과거의 원인으로부터 현재가 왔다는 사실을 누구도 용납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신과 물질에서 생기는 괴로움을
행복이라고 잘못 생각합니다.
이것은 행복이 아닙니다.
이것은 감각적 욕망입니다.
우리가 무명의 눈으로 보기 때문에 행복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행복의 실상은 괴로움 투성이 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행복으로 잘못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을 실재하는 자아라고 믿고,
또 행이 무명의 결과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은 우리가 어리석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난해한 12연기를 위해서 수행을 해야 됩니다.
어떤 수행을 해야 될까요?
물론 사마타 수행의 과정을 거쳐서 반드시 위빠사나 수행으로 넘어와야 됩니다.
수행이 없는 연기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반드시 수행을 해야만 연기로부터 탈출할 수 있습니다.
이 수행은 사유가 아닌 실천적 수행을 말합니다.
그 수행을 팔정도라 말하고 그것을 위빠사나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인간만 수행을 할 수 있습니다.
살아있는 모든 생명 중에서 오직 인간만 수행을 할 수 있습니다.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의 세계에서는 고통만 있지
결코 수행을 할 수가 없습니다.
천상의 색계와 무색계의 세계는 행복만 있어서
또한 수행을 할 수가 없습니다.
색계 사선정의 ‘정거천’이라는 곳에서만 수행을 해서
아라한으로 윤회를 끊을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색계 사선정은 특별한 세계입니다.
인간은 행복과 불행이 함께 있습니다.
오직 인간만 수행을 해서 행복과 불행을 경험합니다.
인간만 자기 삶을 유일하게 반전시킬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가 인간에서만 나옵니다.
왜냐하면 사악도는 수행을 할 수가 없고,
또 색계, 무색계는 행복만 있기 때문에
수행을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행복과 불행이 함께 있기 때문에,
수행을 해서 괴로움을 통해서
행복의 길로 나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만이 가진 특권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특권이라는 것은
자기의식을 고양시킬 수 있는 그런 기회를 맞았다는 것이고,
우리가 산다는 것은 이런 사명감을 가지고 살아야 되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
삶은 드라마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삶의 희곡을 써야 됩니다.
우리가 결과대로 살지 말고 드라마를 새로 써서 자신의 삶을 반전시켜야 됩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사람으로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해야 할 일 중에 가장 고귀한 것은 행복을 얻는 것입니다.
보통사람들의 행복은 감각적 욕망인데,
이것을 잘못 행복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진정한 행복이란 만족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리 행복을 얻어도 만족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이것이 행복이 아닌 것입니다.
얻고 나서 만족할 수 있는 행복은
평등심 이후에 오는 해탈의 지혜로 밖에 이르지 못합니다.
그래서 수행을 통해서 무지와 갈애가 끊어진 자리에서만이
가장 고귀한 행복이 실현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사람다우려면 선한 마음으로 선한 행위를 해서
자신과 남을 모두 이롭게 해야 합니다.
누구나 선한 마음을 갖기 위해서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해야 합니다.
탐욕이 있을 때는 탐욕이 있는 마음을 알아차려야 됩니다.
화를 낼 때는 화를 내는 마음을 알아차려야 됩니다.
어리석을 때는 ‘내 마음이 어리석다.’ 라고 알아차려야 됩니다.
어리석어서 스스로 자신을 비하하는 것으로는 수행이 아닙니다.
단지 ‘화를 냈네, 욕심을 부렸네, 어리석었네, 그렇네’ 라고
우리가 알아차리는 것을 수행이라고 말합니다.
수행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현재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그렇네’ 라고
알아차리는 것이 수행입니다.
괴로울 때는 ‘괴롭네’ 라고 알아차리면 됩니다.
즐거울 때는 ‘즐거워하고 있네’ 라고 알아차려야지
그 즐거움을 더 이상 더 큰 즐거움으로 발전시키지 않습니다.
우리들의 괴로움은 항상 더 큰 즐거움을 얻으려고 하기 때문에
즐거움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반드시 괴로움으로 떨어집니다.
그래서 일차적으로 일어난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과
마음을 알아차리는 대상, 이렇게 또 구별이 됩니다.
우리가 대상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무엇이나 객관화시켜서 그것에 휘둘리지 않고
단지 그것을 지켜보는 마음만 갖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연기를 이해하고 연기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런 수행이 뒤따라야만 우리들에게 행복을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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