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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장 헤어지지 못하는 남자(후기)
의사이자 작가인 프랭크가 상담 후 글을 쓰면서 진화 심리학, 신경 생리학, 뇌과학, 인지 행동학 그리고 정신분석학 이론을 가져와 사례를 해석할 때 위험성이 따른다는 것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그보다는 비유를 들어 이야기를 풀어나가면 좋겠다. 비유는 지식이나 개념이 풍부하지 않아도 이야기할 수 있는 방법으로서, 누구든 이야기에 참여하며, 끝나지 않은 이야기에 더 보태어질 수도 있고 다시 짜일 수도 있는 맛이 있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들어가, 먼저 폴은 왜 그랬을까? 나아가 ‘나’는 또 ‘우리’는 왜 그랬을까? 를 생각해 보면 좋겠다. 왜냐면 실연의 과정 즉, 내가 떠났을 수도, 상대가 나를 떠났을 수도 있는 상황을 겪을 때, 결별 앞에서 주체할 수 없었던 감정의 모습들, 또 설명해 내려고 애썼던 모습 등이 겹쳐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성복의 시인의 ”모두가 병들었을 때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라는 시구는 구조가 인간을 병리성으로 내몰기 때문에, 모두가 병들었는데, 그게 너무 정상적으로 보여서 누구도 그것을 고통스러워하지 않는 것에 대해 문제 삼았다. 반대로 한 사람이 병들었는데, 그 병을 함께 앓기 시작한다면, 한 명의 문제를 한 명의 문제로 두지 않고 공동체의 문제로 인식하고 공유한다면, 적어도 그 문제가 가벼워질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면 여기 문제를 갖고 상담사를 찾은 폴의 문제로 들어가 보면 좋을 것 같다.
폴은 명문사립고를 거쳐 옥스퍼드 대학에서 철학과 경제학을 전공하고 사모펀드 투자회사에서 일자리 제안을 받았다. 한 사람을 설명하는데 빈곤한 것 같지만 먼저 폴의 상황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정보이다. 폴이 이모겐을 이상화하고 있다고 보고 있지만, 실제 흠잡을 데가 없는 폴의 정보를 보면 폴은 외려 자기 자신을 이상화하고 있다. 주위의 높은 기대에 부응해 많은 것을 이루고 살아오면서, 자기 이미지와 실제를 인식하지 못하고 자기가 자기에 대해서 소개할 때조차 남들이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을 자신의 모습으로 인식하고 말을 한다. 예를 들면 “친구들이 항상 우리한테 잘 어울린다고 했어요”라고 했을 때 폴이 이모겐과의 관계를 설명하는 말로 인식하는 것과 같다. 자기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곳에 존재하는 자기를 보고 이모겐이 그만 만나자고 한 것을 그래서 이해하지 못한다.
두 번째, 폴이 이모겐에게 왜 빠져들었을까?
폴은 전도가 유망한 청년으로 스스로를 인식하고 있다. 미술상의 딸이자 갤러리에서 미술작품들에 대해 확신을 갖고 설명을 하는 여자 이모겐에게 빠져드는 것은, 무의식적으로 자기 자신을 남들과 차별화하고 특정화해 구별 짓는 행위로 보인다. 이는 후기 자본주의를 지배하는 돈이 많은 사람들일수록, 그들의 특징인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 차별화를 원하는데, 특히 주거지, 자녀교육 그리고 취향을 차별화한다. 그 취향 중 하나가 갤러리를 운영하고 유명작품을 수집하는 것이다. 폴 역시 스스로 많이 가지고 부족한 게 전혀 없는 사람으로서의 취향에 이모겐의 직업과 환경이 적절했다는 추측을 해본다.
세 번째, 이모겐이 폴에게 결별의 이유로 “너는 나와 원하는 게 다른 것 같다”라고 말한다.
이에, 폴은 전혀 대응하지 않는다. 폴이 “너는 뭘 원하는데?”라고 물었어야 한다. 상대가 뭘 하는 원하는지 궁금해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는 내가 다 해줄 수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줄 수 있는 게 뭔지도 모른다. 한 번만 더 기회를 주면 나는 그녀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지만, 상대의 생각과 의견은 중요하지 않고 그저 확신만 있다. 폴은 이모겐과 수평적인 관계 속에서 상징적으로 교환하는 호혜적 관계가 아니라 상상적 증여만 가능한 관계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는 게 스토킹이다.
스토킹, 여기엔 “어떻게 네가 감히 나를 떠나? 부족함이 없는 나를 버려?”라는 심리가 깔려있다. 이것이 이혼 선언을 하고도 남편이 여자를 찾아가 죽이는 이유이다. "사랑해서 죽였다"라고 말하며, 낭만적 영웅의 행위로 착각한다. 낭만적 사랑은 언제나 죽음과 연결되어 있다. "너와 나는 하나야, 같이 죽자", "사랑해서 죽었다" 거나 "사랑해서 죽였다"는 말이 안 되는 말이 되풀이된다. 죽음에 대한 공포, 죽음에 대한 두려운 한계 상황을 낭만적인 사랑만이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 낭만적인 사랑이 가져다주는 일치의 황홀경이 죽음을 극복하게 해 줄 수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둘 사이의 성관계가 황홀할수록 더 그러하다.
자신에 대해서 내가 추구하는 게 무엇인지를 묻지 않는다. “얼마 버나?”로 내가 누군지를 규정짓고 또 규정받는데 익숙해지고 있다. 상대방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존중하면서 묻지 않고, 나는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묻지 않는다. 폴과 같은 심리가 우리 안에 조금씩 있다.
정체성은 명함에 의해서 규정되지 않는다.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 끊임없이 마찰하면서 재 생성된다. 사랑은 구축하는 것이다. 건설하고 만들어가는 것이다. 타자가 예상치 않게 “우리는 원하는 게 다른 것 같다”라고 했을 때 그 순간이 바로 둘 사이의 결별로 이어지지 않기 위해서 서로 물어야 한다. 그랬다면, 양상이 달라져 창조적인 이별을 했을지도 모른다. 타자와의 만남 속에서 서로 영향으로 주고받으며 스스로가 해체되어 새로운 정체성이 구축되어 가는 과정이다. 사랑이 그것을 충격적으로 해낸다.
블라인드
자신이 상대를 완전히 만족시켜 줄 수 있고,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고 믿는 '폴'이 있다면, 상대가 뭘 줘도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마리'가 있다.
거울을 못 보는 여자, '마리'와 앞을 못 보는 '루벤'이 만났다. 즉 '시선'에 장애를 갖고 있는 두 사람이 만났다. 그 둘의 만남의 매개가 '읽고 듣는 일'이다. 목소리와 시선에서 오는 충동이 우리를 지배하는데, 태어나서부터 나를 불러주는 목소리가 있다. 그것으로부터 기쁨을 얻는데 그것을 '호원충동'이라고 한다. 다정한 목소리가 나를 인간으로 세게 하는 중요한 힘이다. 우리에겐 '지문‘과 '성문'이 있는데, 목소리는 지문처럼 고유하다. 아무리 목소리를 흉내 낸다고 해도 똑같아질 수 없는 이유다. 마리는 '읽는 여자'이다. '목소리'를 사용해 '읽는' 행위를 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정체성을 나타내고 있다.
마리는 책을 사랑하는데, 깊은 결여에서 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태어나서부터 사랑을 받아야 할 어머니로부터 "너는 못생겼어, 흉측해, 괴물 같아"라는 목소리를 끊임없이 듣고 자랐으며, 거울에 얼굴을 부딪치게 해서 상처를 냈다. 어머니로부터 받은 '흉측한 사람'이라는 규정에서 벗어나기는 힘들 것 같다. 폴이 주위의 높은 기대에 많은 것을 이루고 살아오면서 흠잡을 데 없는 사람으로 규정되어 그것에서 벗어나기 힘든 것과 같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마리가 루벤을 휘어잡을 수 있었던 것은 '너는 못 보지만' '나는 볼 수 있어' '나는 너에게 책을 읽어주러 온 사람'이라는 긍지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거울을 못 보는 여자가 앞을 못 보는 사람 앞에서 얼마나 자기로 설 수 있는지 의문이지만, 루벤처럼 난폭한 사람에게는 반대심리가 작용한다. 반면 루벤은 마리에게서 '내가 잘 못한 것을 정확히 휘어잡아줄 수 있는 존재', '내 욕망에 종속된 것을 오히려 주체화해 줄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이라는 느낌을 갖는다. 그것이 마리에게 호기심을 갖게 되는 열쇠가 되었을 수도 있다.
소년에서 청년기로 넘어가는 시기에 앞을 못 보는 장애를 얻어 무척 혼란스러웠을 루벤에게 책 읽어주기를 통한 마리의 목소리는 그 존재 자체를 뒤 흔들었을 것이다. 루벤의 성적인 열망에서 비롯되지만, 마리는 루벤이 앞을 못 본다는 전제하에 본인도 끌려 둘은 사랑을 한다.
그러나 루벤이 시야를 얻는 대신 마리를 잃게 되는 이상한 기로에 서게 된다. 마리가 떠난 걸 알고 마리를 찾아 헤매다가 수많은 마리들이 있는 몸을 파는 여자들이 있는 술집 간다. 그들에게 책 읽어주기를 요구하면서 마리를 찾는데, 루벤은 "나에게 마리는 단 한 명"이며, "나에게 마리는 대체될 수 없다"를 거듭 확인한다.
루벤은 도서관에서 마리를 재회하는데,
사랑에 빠졌다가 눈을 뜨는 바람에 사랑의 대상을 잃었던 루벤이 다시 뜬 눈으로 사랑을 만나는데, 못 알아본다. 그러나 체취를 통해 누구와도 대체할 수 없는 마리를 알아본다. 비록 루벤이 상상했던 마리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루벤은 서슴없이 마리에게 “집에 같이 가자”라고 한다. 이 말은 당신은 내가 상상했던 마리가 아니어도 좋다,라는 의미로 볼 수 있다. 루벤의 마리에 대한 상상은 상상일 뿐이었다는 것, 루벤이 찾아 헤맨 마리는 마리만이 가지고 있는 체취와 목소리로 알아볼 수 있는 단 한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한다.
사랑에 빠질 땐 상대에게서 이상적인 이미지가 크게 작용한다. 이 사람이라면, 내 어머니가 해주지 않은 것을 해 줄 것 같다,라고 생각하는데 이는 나에게 결여를 자극하는 무엇인가가 대상 안에 있다는 믿음이 사랑에 빠지게 한다. 그러나 루벤의 경우, 마리에게 마리가 가지고 있는 것 모두, 나이, 외모 등에서 비롯한 상처 투성이의 마리를 확인하고 "집에 같이 가자"라고 한다. 그러나 폴이 사회적 기준에 의해 자신의 기준이 너무 높았던 것처럼, 마리 역시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에 대한 사회적인 잣대에 갇혀 그것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사랑은 구축이다. 사랑은 둘이 함께 무대를 펼치는 것이다. 둘이 함께 외부의 세계로 나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알랭 바디우는 "사랑의 예찬"에서 사랑이 예찬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서로 완전히 다른 둘이 만나고, 서로 대치되는 과정을 겪으면서 사랑에 빠진 그들은 끊임없이 각자의 세계를 탐사해 나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마리는 애초 자신의 얼굴을 못 보는 여자였다. 루벤과 사랑하면서 루벤이 자신을 만지는 - 그때까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을 느끼고, 마리 역시 조금씩 루벤을 만지는 것을 시도하면서, 가린 거울을 조금씩 걷어내기 시작했다. 사랑으로 인해 외부가 규정한 목소리, 지배적인 응시에 맞섰다. 루벤의 경우, 자신이 앞을 보지 못하게 됐고, 외부세계와 단절된 세계에서 살아야 했던 그가 마리를 목소리와 촉감으로 사랑하면서 그 역시 점차 갇힌 세계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사랑은 그러한 힘이 있다.
그러나, 마리는 결국 루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사회의 지배적인 응시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루벤은 마리에게 자신의 사랑이 이만큼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자신의 눈을 찌름으로써 성인 동화 한 편을 완성하는데 그친다.
읽는 것은 중요하다. 계속 읽다 보면 고정관념이 흔들린다. 나의 언어가 달라지면서 시선이 달라진다. 그동안 나를 완전히 규정한다고 생각했던 목소리와 응시의 자국들이 가벼워진다. 거기에 사랑의 무대에서 함께 서로의 다른 세계를 탐구하고 발견하면서 함께 외부의 시련에 맞선다면 예기치 않은 장소에 다다를 수 있을 것이다.
사랑할 때 경계해야 할 것들이 있다. "내 뜻을 따라" 라며, 우리는 하나가 되어야 함을 강조하는 것, "당신을 위해 내가 다 바치겠어"라며 실상은 보상을 원하는 희생적 사랑을 외치는 것, 그리고 결국 성적인 갈망으로 사랑을 규정하는 회의적인 사랑의 성격이 있다. 이들은 사랑의 단계에서 거치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결국, 사랑에 이르는 것은, 최초의 다수로서 둘의 무대가 펼쳐지는 것, 서로의 속도와 보폭이 다르기 때문에 끊임없이 절뚝거리면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는 것이 중요하겠다.
폴과 마리를 생각하면서, 나는 지금 어느 단계에 와 있을까?
추천 영화 : 랍스터
역시나 제가 이해한 만큼의 후기입니다. 다른 분들께서 추가해주시고 수정해주시리라 생각합니다.
첫댓글 아.. 그리고... 제가 여기에서 조금만... 아는 척 하자면요, 마리와 루벤이 읽은 책은 안데르센의 이야기였죠. 안데르센이나 그림형제, 샤를페로의 이야기들은 콩트로 분류합니다. 우리나라 말로 굳이 번역하면 옛이야기인 거죠. 이들의 이야기는 지금의 시점에서 많은 한계가 있는 게 사실입니다. 주로 종교적인 관점과 가부장적인 관점에서 어린이들 특히 여자아이들을 교육시키기고 길들이기 위한 목적이 깔려있음을 개인적으로 생각하거든요. 선생님이 '동화',라고 언급하셔서 살짝 덧붙여 봤습니다. 그리고 저는 마리와 루벤이 이야기를 읽고 좀 더 그 이야기에 대해 토론을 했더라면 그 이야기에서 갇히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읽은 후 같이 토론을 하면서 생각을 나누는 것 역시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우와. 그룹홈 근무 중인데요. 밤 12시 9분이예요. 잠들기 전에 카페 잠깐 들렀다가 후기보고 좋아서 댓글부터 답니다. 진짜 댓글응 퇴근하고 한숨 돌리고 쓸게요. 후기 감사합니다! 덕분에 읽고 생각하는 시간이 풍성해지고 있습니다~
'자신에 대해서 내가 추구하는 게 무엇인지를 묻지 않는다.' 폴은 자신이 가진 것에 만족했나 봅니다. 거울을 못 보는 여자, '마리'와 앞을 못 보는 '루벤'이 만났다. 폴도 자신을 보지 못했고, 누구나 보지 못한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정성스런 후기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맞습니다. 편의상 '동화'라는 번역어를 쓰긴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동화가 아니겠지요. 그림형제의 잔혹한 이야기들과 그 이야기들이 생산, 유통되던 당대의 상황을 생각하면 여전히 그 작품들을 동화라고 부르는 일은 어폐가 있을 듯해요. 다만 맥락상 영화가 어른들을 위한 동화처럼 마무리되는 걸 해석하다 보니 그리 됐네요. 루벤과 마리가 읽고 듣는 일을 넘어서 함께 토론을 했다면 어땠을까, 이런 상상은 참 중요해 보입니다. 아마 스스로 갇혀 있는 칸막이를 넘어서 다른 땅을 향해 나아갈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도 들구요. 그래서 생각은 보태지고 더해질수록 예기치 못한 새로움, 풍성함을 낳는 것 같아요. 세심하고 정성스런 후기 감사합니다. (덧 : '호언충동' 이 아니라 '호원충동'입니다.^^)
참석하지 못해 아쉬웠는데.. 후기 고맙습니다.
'본다'라는 행위 속에 잔뜩 들어가 있는 많은 것들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본 것은 정말 본 것일까..
고맙습니다. 호원충동, 처음 듣는 용어라 잘 몰랐습니다.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