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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흐마(산스크리트어: ब्रह्मा 브라마)는 힌두교에 나오는 창조의 신으로, 유지의 신 비슈누, 파괴의 신 시바와 함께 트리무르티를 이루는 신이다.
브라흐마는 힌두교에서 우주의 근본적 원리이자 최고 원리인 지고의 우주적 정신 또는 존재인 브라흐만이 인격화된 남신으로 브라흐만을 상징한다. 신화나 그림 속에서 브라흐마는 네 개의 머리와 팔, 두 개의 다리, 수염을 가진 모습으로 등장하며, 브라흐마스트라라는 아스트라를 지니고 있다. / 위키백과 |
브라흐마는 우리에게 범천(梵天)으로 알려진 인도의 창조신이다.
그러기에 부처님 당시 주류 인도인들은 브라흐마(梵)가 변해서 일체 생명체가 생겨났다는 전변설을 주장하면서..
인간은 브라흐마(梵)와 하나가 되어야 [범아일여] 윤회를 멈출 수 있다고 했다.
불교에서는 세계를 삼세삼계로 설명하는데.. 그것은 힌두교와 별 차이가 없다..
삼계란 욕계, 색계, 무색계로 인간이 사는 세계는 탐욕이 주인인 욕계이고,
신은 몸을 지니고 사는 색계와 몸이 없고 오직 식만 있는 무색계에 거주하며 그것을 자아 atman로 아는 신이 있다.
브라흐마는 색이 있는 창조신이다.
자신을 쪼개어 일체 생명체를 만들었다는 인도의 창조설과
흙으로 만든 몸에 자신의 입김[생명]을 불어넣어 인간을 창조했다는 기독교의 창조설을 보면
어느 게 더 사실처럼 보이는가?.
기독교의 창조설이 더 그럴싸하다. 그 말은 기독교의 창조설이 후대에 나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닌가?..
하여튼 힌두교의 범아일여는 마음이 아닌 물질인 존재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에 반해 선종의 참나는 물질이 아닌 마음 변화요, 마음 작용으로 바라본다.
말하자면 물질 세계가 아닌 비물질인 무색계로 일체를 마음 작용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러기에 일체는 전도된 꿈속의 모습일 뿐[전도몽상]이라 한다.
참선의 목적은 아집인 아상을 버리고 참나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때문에 선종의 참나 또는 대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아트만이 브르흐마와 하나가 되는 것으로 이해하여..
선종을 힌두교 아류라 하면서 힌두불교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물론 참나를 마치 물질적인 존재처럼 가르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심전심이라 하지만.. 보이는 것처럼 방편을 세우지 않으면 대중에게 어떻게 입을 벙긋하면 전할 수 있을까?.
주장자를 공중으로 들지 않으면..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지 않으면서 어떻게 대중에게 참나를 보여줄 수 있느냐 말이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참나를 어떻게 무엇으로 설명하든 그것은 마음이라는 비물질로 물질이 아니다.
과학에서 가르치는 우주는 아무리 크다 해도 물질적 존재 세계에서 크다는 것이다.
그처럼 힌두교의 브라흐마는 만물을 창조하고, 더 없는 슈퍼 파워를 갖고 있어도 물질적 존재임에 틀림없다.
반복하지만 브라흐마와 참나는 물질인 색과 비물질인 무색으로 알 수 있듯이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그렇다고 감성과 이성에서 보듯.. 비물질인 마음이 물질인 존재보다 더 깊고 부처님 가르침인 법에 더 가깝다고 할 수만은 없다.
석가세존은 색과 무색을 함께 가르치셨고..
열반은 색계는 물론 무색계 역시 너머선 것이라고 하신다.
그리고 수행은 욕계에서 색계로, 섹계에서 무색계를 거쳐 열반으로 나아가는 게 정식임에 틀림없지만,
점프가 가능하니 욕계에서 그냥 열반이 가능하다.
열반을 성취토록 하는 무아 깨침은 욕계를, 색계를, 무색계를 너머선 게 된다.
무색계를 너머선다는 것은 불가능처럼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며.. 정직과 색계를 중시하는 남방 상좌부 불교는 진정한 무아의 열반을 포기한 것처럼 보이고,
비물질을 강조하는 선종은 물질인 색계를 실제 이상 무시해서 인지 현실 감각이 형편없는 불교로 보인다.
다른 각도에서 보면..
학생을 보면 누구는 국어는 잘하는 데 수학이 약하고, 또 누구는 수학은 잘하는 데 국어를 잘 못하는 것처럼.. 사람의 능력은 차이가 있다.
수행은 잘하는 부분은 그대로 유지해 가면서 약한 부분을 더욱 힘써 닦도록 한다.
수행은 선정과 경 공부가 주를 이루는데..
선정 수행은 잘하는데 이해력이 부족한 수행자는 경 공부를 더욱 열심히 하도록 이끌고,
반대로 산만하여 선정 수행력이 약한 수행자는 선정 수행에 힘쓰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상좌부 수행과 참선 수행의 장단점을 살펴 수행자에게 최선의 수행법을 가르치는 게 이 시대 마스터 수행자의 임무가 아닌지..
한편 불교 공부는 지계, 선정, 반야라 하였다.
선정 수행에 특출한 자가 있으면 그는 더욱 선정 수행을 열심히 하도록 하여 뛰어난 선 마스터가 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듯,
이해력이 뛰어난 자는 경 공부를 더욱 열심히 하도록 하여 훌륭한 반야 법사가 되도록 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그런 가운데 진심으로 서로를 존경하는 보살 분위기를 항상 유지토록 해야만 한다.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진 이유 가운데 일체를 물질인 색으로 설명하는 상좌부를 보며
그게 불교라면 힌두교 안에서도 얼마든지 다 해결할 수 있다고 보아.. 결국 코카콜라와 팹시콜라 가운데 선택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힌두교가 승자가 되어 불교를 삼켜버렸다.
티베트와 베트남에서 불교가 사라지지 않은 이유는 위치 때문이기도 하지만 바로 마음을 바탕으로 하는 대승불교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물질을 앞세운 상좌부 불교의 수행법과 마음을 앞세운 참선 수행법의 차이는 무엇인가..
전자는 각 단계가 디지털처럼 분명하여 자신이 지금 어떤 단계의 수행을 해야 하는지가 분명하다.
그에 반해 후자는 아날로그처럼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있어.. 단계가 불분명하니 자신의 지금 수행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잘 알 수가 없고 바르게 가고 있는 지에 의문을 품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그런 문제가 있지만 참선 수행은 짧은 수행 시간으로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기에 어느 게 좋다 나쁘다 분별하기 전에.. 자기에는 어느 수행법이 적당한지를 알아채는 게 중요하다.
성철큰스님 제자인 원택스님에게 출가하였다가 상좌부 수행을 배워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일묵스님이 있다.
스님은 상좌부 불교를 가르치지만 선종의 좋은 점을 놓치지 않으려는 노력을 보여 좋은 호응을 얻고 있다.
상좌부의 <잡아함경> 격인 <쌍윳다 나까야>에는 12처를 존재로 이해해도 걸리지 않는 경들만 담겨 있다.
<잡아함경>은 12처를 비물질인 마음과 물질인 존재로 설한 내용이 섞여 있다.
여기에는 이렇게, 저기에는 저렇게 있다고 분명히 아는 게 중요하지..
이것만이 옳기에 저것은 틀리다고 논쟁을 하거나 상대를 무시하려는 노력은 어리석은 짓이다.
불교가 너무 존재론으로 나아가는 것을 보며 그것이 아니다 하는 마음[식]을 강조하는 대승불교의 유식학이 나왔듯이..
불교는 조건이 바뀌면 그 조건과 화합해 새로운 설명을 할 수 있는 오픈된 종교요, 법이다.
그러기에 불교는 정체되지 않고 그 시대와 화합하는 불교를 받아들이거나 만들어갈 수 있는 눈 푸른 선지식이 항상 나오고 있어야만 하고, 일반 불자는 그렇게 시대와 화합하는 불교를 받아들일 수 있는 포용력 있는 태도를 지니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조선조라는 불교 박해 시대에 살아남는 방법은 아녀자에게 의지하는 구복 불교와 철저히 개인적인 선종이 아니라면 불가능했다.
21세기는 대다수 국민이 지식인인 이제껏 우리가 경험하지 못했던 조건이다.
이와같은 조건에서 조선조의 구복이나 이기적인 참선 불교가 주류이어도 괜찮을까..
안타까움은 우리 불교는 아직까지도 바른 길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대통령이란 자가 불교 아류 격인 도사인지에 빠진 것을 그의 어리석음만으로 돌릴 수 있을까?.
만일 과거처럼 국사가 될 만큼 선정력과 반야 지혜를 쌓은 분이 지금 있더라면 저런 우스운 일이 벌어졌겠느냐는 것이다.
물론 어리석은 자는 성철큰스님이 옆에 있어도 못 알아본다고 하지만..
브라흐마와 참선의 차이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는 안목이라면 아류 도사와 참 도사를 어찌 구분할 수 있을까..
사단이 벌어지면 그때서야 땅을 치는 일을 반복할 수 밖에..
다 내려놓고..
눈푸른 선지식이 여기저기서 나오기를 기다리는 이유다.().